대한민국 대표 서정시인 박재삼의 문학사적 성과와 위상을 기리고, 시인의 문학과 고향에 대한 각별한 사랑을 담은 제3회 박재삼문학상에 이문재 시인의 시집 <지금 여기가 맨 앞>(문학동네, 2014)’가 선정됐다.
올해 박재삼문학상 본심 심사위원으로는 허영자, 강희근, 김연동 시인이 참여했다.
심사위원단은 “2014년에 발간된 시집에서 10권의 시집을 엄선해 최종심에 올렸다”며 “심사위원 세 사람이 각각 10권의 시집을 받아 읽은 결과 최종심에 각자 세 권의 시집을 골라내었는데 각자가 선한 시집 그 세 권 중 공통으로 올린 시집이 한 권 나왔다. 이문재의 시집 ‘지금 여기가 맨 앞’이었다"고 밝혔다.
심사위원단은 이문재 시집의 작품 중 <사막>, <오래된 기도>, <혼자만의 아침> 3편의 시에서 보이는 ‘관계의 세계’와 ‘미학’에 대해 주목했다고 전했다.
강희근 시인은 “이문재 시인은 ‘사이’와 ‘관계’를 탐색하고 그를 통해 이웃, 주변, 그대를 챙기는 관계의 미학을 보여 준다. 그것을 관념으로 바꾸어 말하면 ‘사랑의 미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이문재 시인은 그 어느 경우이든 확실한 사물(형상)을 기점으로 사색과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다. 말하자면 지향이 있되 그것을 형상으로 말하는 형식을 취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함께 박수를 보내고자 하는 이유”라고 박재삼문학상 선정 이유를 밝혔다.
제3회 박재삼문학상을 수상한 이문재 시인은 “십년 만에 시집을 내놓고 막막하던 차에 이런 격려를 받게 되었다. 스무 살 시절, 춘천 소양강가에서 박재삼 선생의 시를 읊조리며 가을을 맞이하던 때가 있었다. 삼십여 년 전, 그 늦여름, 가을이 오는 저녁 강가에서 혼자 태운 눈물이 저로 하여금 시의 길로 올라서게 했다”고 말했다.
이어 “시와 함께 애인에게 다가가려 한다. 생명에게, 평화에게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려 한다”며 “박재삼의 시를 사랑하는 모든 분들께 거듭 감사드린다. 시가 있어야 할 ‘기쁜’ 장소를 넓혀나가기 위해 남은 힘을 쓰겠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이문재 시인은 1959년 경기도 김포 출생으로, 1982년 <시운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시사저널 기자(1989~2005), 문학동네 편집주간(1998~1999)을 지냈다. 현재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로 재직 중이며 문학동네 편집위원, 녹색평론 편집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김달진 문학상, 시와 시학 젊은시인상, 소월시문학상, 노작문학상, 경희문학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시집으로는 <지금 여기가 맨 앞>(문학동네, 2014) 등 5권을 펴냈으며, 산문집으로는 <내가 만난 시와 시인>(문학동네, 2004),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호미, 2009) 등이 있다.
나의 눈이 가는 길, 서울에선 없다, 서울이 수시로 내 눈을 끌어당길 뿐이다, 광고의 아우성과 매체의 잡음 속에서 광고의 잡음과 매체의 아우성으로 나온다. 저, 아니, 이 길뿐, 빈틈은 없다, 내 시야와 시력은 이제 나의 것 아니다, 그러하니 내 눈이 보고 싶던 것이 무엇인지, 보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잠 안쪽에서도 두 눈 뜨고 있어야 하느니 내 눈이 먼저 가 닿아 내가 불려가는길, 사라졌다, 시선이 떠나가 돌아오질 않는다, 서울은 캄캄할 만큼 현란하고 현기증으로 증발할 만큼 무겁게 돌아간다, 즐겁다고, 쫓아가고 싶다고, 누릴 수 있다고, 견딜 수 있을 것이라고…… 안구 패여나간 나는 말할 뻔한다, 뻥 뚫려 허당인 내 두 눈구멍 속으로 서울은 24시간 형광을 불밝혀 놓는다, 의안은 울지 않느니 내 정수리 위에 거대한 타원 크레인 하나 박혀 있다, 엔진 끄지 않는다, 몸속의 엘리베이터도 멈추지 않고 오르내리느니 내 안에 서울이 죄다 들어와 있구나, 아, 보인다, 보이지 않는 저것들이, 어, 보이지 않는다 이 보이는 것들이, 저 분명한 것들이
3. 심사위원 : 김윤식(문학평론가, 서울대 교수), 황동규(시인, 서울대 교수), 김재홍(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수), 최동호(시인, 고려대 교수), 박두진(시인)
4. 심사평
「모색과 열정」
제6회 김달진 문학상의 수상작으로는 이문재 시인의 「타워 크레인」외 4편이 선정되었다. 최종심에 오른 김윤배·이성복·이성선·황지우 그리고 이문재 등 다섯 시인의 작품을 심사한 결과다. 최종심사를 위촉받은 사람은 김윤식·황동규·김재홍·최동호·박두진 다섯이었다. 심사 방법은 한 심사위원이 두 사람씩 추천하여 다득표순으로 축소 논의하기로 한 바, 나는 김윤배·이성선·황지우 세 사람을 추천하였다. 그러나 투표 결과는 이성선·이문재·김윤배 순으로 나타났다. 다시 2차 투표를 한 결과는 이성선과 이문재가 각 2표, 그리고 김윤배가 1표였다. 한참의 논의 과정에서 이성선과 이문재가 팽팽히 맞섰으나, 이 과정에서 상의 성격 내지 특성에 대한 의견교환이 있었다. 실험적 성격의 참신함에 비중을 두자는 의견과 김달진의 시 세계를 고려하자는 의견이었다. 장시간 논의 끝에 결과는 이문재로 하기로 하였는바, 이것은 상의 특성을 좀 젊게 가자는 의견이 우세했기 때문이다. 이문재의 시는 다소 불안정하면서도 도시적 삶의 문제를 정열적으로 파헤치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평가를 받았다. 어떤 점에서는 김윤배의 시가 더 성실하고 치열한 면도 있었고, 이성선의 시가 안정된 면도 있었지만, 이문재의 이러한 열정이 긍정할만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인도 이문재가 수상 시인으로 결정되는데 대해 이의가 있었다. 어차피 상의 심사를 최고라기보다는 최선의 작품을 고르는 일, 이 점에서 이문재씨가 앞으로 더욱 정진해서 큰 시인으로 성장해가기를 바란다. 해를 거듭하면서 점차 안정돼가는 김달진 문학상이 더욱 발전하기를 빈다.(박두진)
휴대전화를 통해 수상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온 첫 마디가 ‘무겁습니다’ 였습니다. 저에게 조지훈 선생은 오래 전부터 크고 무거운 이미지였습니다. 선생을 직접 뵌 적은 없지만(만나뵐 수가 없었지요. 선생께서 돌아가시던 1968년, 저는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던 9살 짜리 코흘리개였습니다), 우연찮게도 제게는 고려대 출신 선배 문인이 많았습니다.
제가 나온 경희대 국문과가 황순원, 조병화 선생 운운하는 것처럼, 연배가 지긋하신 고대 출신 선배들은 지훈 선생에 대한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가령, 두루마기 차림으로 혼자 정문을 가로막고, 시위하는 대학생들에게 호통을 치셨다는 삽화 같은 것입니다. 그분들이 들려준 이야기들이 내 안에 오래 쌓여 ‘크고 무겁다’는 앙금으로 남아 있습니다.
무거운 상을 받으면서, 상이란 벌과 대단히 흡사한 구조를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숙연했습니다. 문화의 전 국면은 물론, 개별적 삶의 진전도 상과 벌 사이로 난 길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상과 벌은 우선, 공개적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몰래 주는 상이나, 아무도 모르는 데서 받는 벌은 없습니다. 상과 벌은 대 사회적이고 또 매우 직접적입니다. 죽은 자에게 주는 상이나 벌은 없습니다.
상벌은 그것을 받는 사람에게 강력한 성찰의 계기를 제공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상을 받는 자는 박수를 받고 벌을 받는 자는 손가락질을 받지만, 수상자나 수형자 모두 진지하게 자기 삶을 돌아보고 들여다 봅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서 얼마큼 와 있는 것인가, 그리하여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나와 타자, 나와 자아는 서로 편안한가, 아니면 불편한가. 그리하여 상을 받거나 벌을 받는 순간, 당사자는 삶의 중심, 우주의 중심입니다. 상과 벌은 사랑이나 질병, 죽음처럼 전적으로 당사자에게 주어진 몫입니다.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고,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상과 벌의 본질일 것입니다.
상벌은 또 주는 쪽과 받는 쪽이 분명하게 나뉩니다. 스스로 상을 주면 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이고, 또 스스로 벌을 내리면 신경정신 계통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받기 쉽습니다. 큰 상일수록, 또 큰 벌일수록 그것을 받는 사람은 겸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삶과 정면으로 마주 선다는 것은 아늑한 일이 아닙니다. 어떤 선사가 말했듯이 ‘진실이란 우리가 두려워 하는 그 무엇’이기 때문입니다. 상과 벌은 바로 그런 진실과 대면하게 합니다.
가장 성숙한 수상자는 상에서 벌의 의미를 발견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릇된 가치와 제도가 내리는 벌을 기꺼이 상으로 받아들이는 순교자나 혁명가, 예술가들이 그런 것처럼 말입니다. 돌아보면, 역사의 방향을 바꾸거나 시대에 브레이크를 건 정신이나 운동들, 기왕의 질서와 개념을 뒤흔들며 끝끝내 인간과 생명을 옹호한 예술가들은 스스로 벌을 받기로 작정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상과 벌은 연속과 단절의 전위입니다. 상을 통해 기왕의 미덕이 전승, 유지되고, 벌을 통해 기왕의 악덕이 지탄의 대상으로 떠오릅니다.
오늘 저는, 제가 받는 상에서 벌의 의미를 굴착하려고 합니다. 저에게는 무거운 상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저는 ‘지조론’과 무관한 작은 삶입니다. 심사위원들이 지적했듯이, 저는 선비, 즉 지사이기보다는 겨우 한 사람의 시민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 작은 시인입니다. 제가 짧은 소견으로 이해하는 선비란, 자기를 지키는 사람입니다. 스스로에 대해 대단히 엄격하고, 세계에 대해 대단히 예민한 존재입니다. 글과 삶 사이에 시차가 없는 삶입니다. 그러면서도 아량과 여유를 갖고 있는 ‘향기로운 인간’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직 선비가 못 됩니다. 글과 삶 사이가 아득하게 멉니다. 신념이 많지도 않고, 있다 해도 분명하지 못합니다. 삶 또한 구차하고 옹색할 때가 많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오랫동안 선비적 삶은 저에게 유예될 것입니다.
지훈은 시 <낙화>에서 ‘꽃이 지기로소니/바람을 탓하랴’라며 바람으로 대표되는 외부적 요인을 일거에 일축하며 ‘꽃’ 즉 자기 자신으로 온전하게 돌아가 있지만, 저같이 미욱한 시인은 꽃이 지지도 않았는데 바람을 문제 삼곤 했습니다. 낙화의 원인을 끊임없이 외부에 전가해왔습니다. 꽃이 지지 않는 아침에도 울고 싶다며 감상에 젖곤 했습니다. 지훈은 <낙화> 이후 전쟁의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며 시대의 전면으로 나섭니다. 시 <터져오르는 함성>에서 ‘권력의 구둣발이 네 머리를 짓밟을지라도/(...)/절망하지 말아라 절망하지 말아라’라며 민주주의를 희구합니다. 저는 지훈의 이 전환에 주목합니다. ‘목어를 두드리다/졸음에 겨워’하던 청록파의 감수성이 어떻게 ‘1960년대의 포악한 정치’와 맞서는 사자후로 변화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당시 지훈은 40대 초반이었습니다.
이번에 지훈상을 수상하게 된 제 시집 《제국호텔》은 제가 40대 초반에 쓴 시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 시집의 상당 부분은 지사적 사유와 삶이 불가능한 시대에 대한 질문이고자 했습니다. 시의 사회적 효용이 용도 폐기되었다고 하는 판정에 대한 문제 제기이고자 했습니다. 갈수록 시가 작아지고 있습니다. 한국 시는 형용사와 부사의 울타리 안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시는 곧 서정시였고, 어느 사이엔가 시인은 변방으로 물러난 인간문화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시는 세상과 무관해졌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개별적 삶, 실존적 삶의 안쪽을 깊숙이 파고드는 시도 많지 않습니다. 시는 외치지 않았고, 그렇다고 속삭이지도 않았습니다. 많은 시가 시인과 독자, 언어와 현실 사이에서 부유하고 있습니다. 문학의 언어, 문학에 대한 언어, 문학을 위한 언어에는 패배주의적 분위기가 짙게 배어 있습니다. ‘낙화’하는 시는 ‘바람’만 탓하고 있습니다. 바람을 탓하며 절망하고 절망하고 또 절망하고 있습니다. ‘대중문화의 구둣발’이 시의 머리를 짓밟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국호텔》은 사실 제가 감당하기 힘든 무거운 제목입니다. 요즘 우리 시의 흐름에서 벗어나 있는 이미지입니다. 1990년대 이후 문학과 인문학이 내팽개쳐버린, 이른바 거대담론입니다. 저의 치기, 저의 오만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거스르고 싶었습니다. 아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형용사, 부사도 우리 시를 구성하는 주요한 유전자이지만, 그것은 우리 시의 뼈이기 보다는 살이었습니다. 살만 있는 몸은 없습니다. 연체동물은 홀로 서지 못합니다. 저는 《제국호텔》에서 우리 모국어의 척추, 즉 명사와 동사의 힘을 구축해보고 싶었습니다. 거칠게 말해, 커다랗고 무거운 상상력을 동원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저 ‘제국’이 우리의 일상적 삶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엄연한 현실을 공감하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부정하고 외면하려 해도, 우리는 제국 안에 살고 있습니다. 그것도 세들어 살고 있습니다. 냉전시대를 갈라 놓았던 장벽이 무너지자, 모든 것이 벽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시는 이 무수한 벽을, 우리 안에까지 들어와 있는 저 제국의 벽에 대해 발언하지 않습니다. 분단 현실도 그대로입니다. 빈부 격차는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제가 속해 있는 40대는 물론, 우리의 청년들은 일자리를 찾지 못해 고통스러워 합니다. 일이 없으면 꿈도 없어집니다. 이 사태는 치명적입니다. 여기에 종교 갈등, 민족 분쟁, 인종 차별, 문화 충돌, 그리고 이 모순과 갈등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생태 환경 문제가 들씌워집니다. 저는 이 지구적 차원의 문제들이 우리의 구체적 일상을 좌우한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제국은 더 이상 미국이나 일본과 같은 단위 국가가 아닙니다. 강대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제국의 황제가 아닙니다. 국가 위에, 초국적 기업이라는 새로운 제국이 우뚝 서 있습니다. 정치적 동맹은 없습니다. 그것은 경제적 제휴의 포장지일뿐입니다. ‘보이지 않는 손’은 강대국의 국가 비전이 아닙니다. 초국적 기업의 마케팅 전략이 세계 정책입니다. 초국적 기업의 현지 법인이 총독부입니다. 개별 국가는 초국적 기업의 경제적 식민지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영토는 시장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인간의 시대는 벌써 끝났는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백성과 국민, 시민의 시대를 거쳐 소비자로 진입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소비자입니다. 소비 능력이 있는 인간과 소비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인간. 인간은 소비자입니다. 이것이 제가 거칠게 파악하고 있는 제국의 풍경입니다. 그런데도 한국 시는 이 구체적이고 일상적이며, 사회적이며 심리적인, 그리하여 공포스럽기 그지없는 제국의 거대한 그늘에 대해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소비자의 시대에 유일하게 소비자이기를 거부하고, 마지막 개인이기를 주창할 수 있는 인간이 시인입니다. 시는 자본주의 유통 구조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습니다. 종교와 학문, 그리고 예술이 모두 자본주의 시스템 속으로 편입된 시대, 자본주의로부터 벗어나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가 시인입니다. 시인이 서 있는 위치가 시인의 역할을 규정합니다. 시인은 제국의 안에서 제국의 전모를 조망하는 이중적 존재입니다. 시인은 소비자이면서, 자립하고 자존하고 자긍하는 시민이기를 고집하는 분열증적 상상력입니다.
'몰락의 길은 평이하고 향상의 길은 간고하다'는 지훈의 금언을 되새기며 무거운 수상소감을 마치고자 합니다. 지훈 선생님의 유족 분들, 상을 제정하고 운영하시는 나남출판사 조상호 사장님과 지훈상 운영위원회 선생님들, 그리고 시가 아니려고 애쓰는 어설픈 시에 후한 점수를 매겨주신 세 분 심사위원 황동규, 김인환, 최동호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무거운 상을 무거운 벌로 달게 받겠습니다.
지훈 조동탁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지훈 문학상이 어언 제 5회를 맞게 되었습니다. 지난 2년 동안에 출간된 시집들을 대상으로 심사를 진행하면서 심사위원들은 무엇보다 먼저 작품의 완성도와 성취도를 중요한 척도로 삼아 논의하였으나, 지훈 선생의 시가 지닌 조형성, 전통성, 사회성도 간접적인 기준으로 고려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3월 18일에 모여 심사위원 각자가 세 권의 시집을 추천하기로 하고, 4월 8일에 추천된 시집들을 대상으로 구체적인 논의에 들어갔습니다. 가장 우수한 시집 한 권을 선정하기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우리는 중복 추천된 시집들을 중심으로 최근에 다른 상을 받았다든가, 등단 시기가 얼마 안 되어 아직 충분히 검증되지 않았다든가, 반대로 노대가에게 상을 드리기는 편안하지 않다든가 하는 이유를 제시하여 대상 시집의 수효를 줄여나가면서 작품의 질에 대한 평가를 병행하였습니다. 최후로 남은 시집은 이문재 시인의 《제국호텔》이었는데, 이 시집을 선정하기로 한 데 대하여 세 사람의 심사위원은 일말의 거리낌도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합의하였습니다.
강인한 자기반성과 심오한 비판의식으로 이문재 시인은 우리 시사의 한 맥을 새롭게 탐구해 왔습니다. 이미지를 애써 만들려고 하지 않더라도 그의 문체는 언제나 일반화된 도식을 떠나서 발생상태의 감각적 인상을 참신하게 포착하였습니다. 자기표현을 극도로 절제하여 자신을 작게 나타내려고 노력하지만, 항상 이 땅의 가장 낮은 곳으로 마음을 열어놓는 비판적 애정이 이문재 시인의 시에 견고한 의미의 구조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야 한다지만 나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이문재 시인의 질문은 우리 시대와 우리 시대의 불교에 대한 예리한 비판입니다. 인간은 자기를 파악하려고 하면 자기를 전보다 더 모르게 되는 존재입니다. 바로 이 자기와 다른 존재가 허위의 근거이면서 동시에 초월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일상생활 속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면에서나, 신자유주의의 일방적 세계화를 비판하는 면에서나, 이문재 시인의 시는 전통문화와 불교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는 지훈 선생의 시를 계승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훈 선생의 선비의식에 대비되는 이문재 시인의 시민의식에도 유의하였습니다. 우리들 세 사람의 심사위원은 그의 시를 통하여 우리 시사가 새롭게 조명될 수 있도록 이문재 시인이 자기가 선택한 길을 끝까지 밀고 나아가기를 기대하면서 이문재 시인에게 진심으로 축하의 인사를 전하는 바입니다.
* 결가부좌[結跏趺坐] 불교에서 앉는 법의 한가지로 정좌법의 일종이다. 양발을 꼬아 모아서 앉는 것으로 가(跏)는 발의 안, 부(趺)는 발의 등을 말한다. 오른쪽 발을 우선 왼쪽 허벅지 위에 얹고 다음에 왼쪽발을 오른쪽 위에 얹어 앉고 발을 좌우의 허벅지의 위에 얹어 앉는 법을 말한다. 부처님은 반듯이 앉는 법에 따르기 때문에 여래좌, 불좌라고도 한다. 산스크리트 nyasidatparyankam abhujya의 음역으로 가부정좌(跏趺正坐)·가부좌(跏趺坐)· 결좌(結坐)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