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
김명희
갈치를 손질한다
마지막까지 바다를 끌고 다녔을 꼬리와
수중의 속도를 재단하던 지느러미를 자르다보니
낚시 바늘이 한쪽 눈알을 통과한 채 단단히 박혀있다
턱뼈 깊이 잘 빠지지 않는 날카로운 바늘을 더듬는데
사망한 노숙자 소녀의 신원을 찾는 속보가 흘러든다
어느 소녀의 희망도 야행성이었을까, 낚싯배의 현란한
불빛을 따라 위로-위로-먹이를 찾다 걸려든 갈치처럼
어느날, 길 가 화단에서 발견된 채 더는 기척이 없다
세상의 불행이나 가출의 행방들은
치명적인 어둠 쪽으로 엎질러지게 마련인지 아침이면,
봉지에 담긴 싸늘한 유품처럼 구겨진 절망 몇 장 들춰질 뿐
소녀의 성장 안쪽에 깊숙이 박힌 바늘을 수습하는 일이란
뒤늦은 후회일 때가 많다
캄캄한 밤, 아직 덜 자란 지느러미를 달고 거리를 배회했을
초경의 꿈이 몸 곳곳에서 멍든 얼룩으로 피어나고
모자이크된 몇 개의 진술이 상한 물거품처럼 부글거린다
아직 귀가를 완성하지 못한 딸아이의 전화 속 행방을 살피며
쉽게 밀봉되지 않는 비린내를 내다 놓고 돌아서는 오후
번쩍,
잘 못 들른 햇살 한 마리 낚시 바늘에 걸려 퍼덕인다.
- 가작-
신문지 봉지 / 이윤경
이른 저녁상을 물리고 나면
온 식구가 머리를 맞대고 봉지를 만든다
쑤어 둔 밀가루 풀에선 단내가 난다
읍내서 얻어온 신문지엔
폭설에, 교통사고, 기름 값 폭등 기사
그런 시끄러운 세상 이야기들은
가위로 자르고 풀을 발라 꾹 누르면
얌전한 봉지가 된다
봉지는 봄이 되면
하얀 배꽃 떨어진 자리
연하디 연한 어린 배를 감싸 안고
바람을 막고, 벌레를 막고
봉지의 빈 공간만큼
딱 그만한 배를 키우게 된다
봉지를 만들며
벌써 아버지 봉지 속엔
살찐 송아지 한 마리 들어가고
어머니 봉지 속엔
곗돈 한 뭉치 들어가고
오빠의 야무진 봉투속엔
은빛으로 빛나는 자전거가 들어간다
몇 개 안되는 동생과 내 봉지 속엔
하얀 운동화 한 켤레씩 들어있다.
= 심사평=
겹눈으로 밝히는 생의 진실
선자에게 넘어 온 작품은 13명의 시편들이었는데 상당한 연찬을 거친 흔적이 뚜렸했고
수준 또한 높아서 우열을 가리기에 힘이 들었다.
그러나 여러 번의 검토 끝에 남은 작품은 김명희, 이윤경, 김용의, 한인숙,이순화 씨의 작품들이었다.
이순화 씨의 작품 중에서 '한가위'라는 작품이 눈에 들었다. 달이 차는 풍경을 '초생달이 시퍼런 칼날로 하늘깃을 찢는다'고 묘파하는 모습에서 사물을 자신의 고유한 눈으로 보는 매서운 시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거기에 보름달을 띄우고 하얀 쌀이 와르르 쏟아지는 통로를 연역해내는 솜씨는 더욱 빛난다, 다만 그 생각을 좀 더 푸짐하게 몰고 갈 시적 근력이 부족하였다.
한인숙 씨의 '콩나물은 헤비메탈을 좋아하지 않는다'도 수작이었다. 시의 화자는 유년의 가난했던 시절을 콩나물에 물주던 일로 재미있게 회상한다. 어렵고 고단한 일을 재미있는 음악으로 변주하여 그 어떤 슬픔도 거뜬하게 극복해내는 모습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또한 그 풍경은 읽는이로 하여금 저절로 신명나게 한다. 상당한 저력이다.그러나, 그 힘을 등굣길의 빽빽한 교통난을 얘기하는 데까지 과도하게 밀고나감으로써 시가 지녀야할 긴장을 놓치고 있다. 아쉬웠다. 시적 긴장과 언어의 절제를 살폈으면 좋겠다.
김용의 씨의 '아내를 찾습니다'도 수작이었다. 젊은 시절 아내의 아름다움이 생활의 고단함에 마모되어 마른 웃음을 짓고 있는 풍경을 그리고 있는데 아내에 대한 깊은 사랑과 따뜻한 마음이 읽는 이에게 훈훈한 감동을 준다. 세상에서 결코 낡아지지 않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잔잔하게, 그리고 견고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같이 보내온 작품들의 시상이 너무 단조롭다. 조금 더 사물을 다양하게 포착하는 눈이 필요하다. 이윤경 씨의 '신문지 봉지'는 시적 지혜가 눈에 띈다. 과일을 해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신문지로 과일봉지를 만드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얼핏 보면 단조로운 것 같으나 그 단조로움 뒤에 많은 얘기를 거느릴 줄 아는 지혜가 빛난다. 세상사 시끄러운 얘기들을 가위로 잘라 과일 봉지를 만든다는 얘기 속에 우리는 그 소란함 너머에 정직하게 일하는 사람들의 수고와 그 땀의 정직함을 느낄 수 있으며 또한 배면에서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같이 응모한 작품의 수준이 고르지 않다는 점에서 가작으로 선했다.
당선작으로 뽑은 김명희 씨의 '바늘'은 여러모로 빼어났다. 갈치를 다듬어가는 과정에서 발견한 바늘을 얘기하고 있는데, 그 얘기는 순간 비상하여 우리 모두의 꿈과 그 좌절의 역사로 데려다놓는다.
또한 그 바늘은 예리하여 읽는이의 마음을 돌연하게 나꾸어채고 있다. '낚시 바늘이 한 쪽 눈알을 통과한 채' 라는 구절 앞에서는 읽는 이의 눈에 바로 그 바늘이 걸려있는 것이 아닌가 상기시키는 힘이 있다.
시가 지녀야할 긴장미가 있으며 그 긴장이 우리네 삶의 자리로 전이되어 우리들이 지닌 꿈과 그 꿈을 향한 우리의 노력은 무엇이었는가를 되묻게 한다. 시가 겹눈을 지니고 사람 살이의 근원을 묻고 있다. 좋은 시를 쓸 것으로 믿게 한다.
끝으로 응모한 모든 분들이 시의 길을 깊이 신뢰하고 끝까지 밀고 가는 저력을 당부한다. 좋은 시는
당사자는 물론 읽는 이 모두에게 진정한 힘과 기쁨을 주는 것이 아닌가.
강형쳘 (시인)
- 1985년 '민중시'2집에 '해망동 일기' '아메리카 타운' 을 발표
시집'해망동 일기' '야트막한 사랑' '도선장 불빛 아래 서 있다'
- 평론집'시인의 길, 사람의 길' '발효의 시학'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사무총장 역임
- 현재 숭의여자대학 문예창작학과 교수
[ 당선소감]
머리 위로 한 무리의 새떼가 이주해 오고 있다
순간
긴 대열 한쪽이 활처럼 휘더니, 내 시야 속의 중력을 일제히 잡아 당긴다
저 오래 된 이주의 내력을 대할 때마다
내 작은 이승의 내력은 종종 짓무르곤 했고 그런 날 나는 산사를 찾는다
낡고 누추해진 마음 한켠에 사찰 하나 새로이 들어앉히는 일처럼 스산한 일도 없다
그것들은 대부분 혼자일 때 건축되는 법이다
나는 지금,
시베리아 북부 한켠을 박차고 날아오는 사원을 내 안에 복사하는 중이다
앞으로 한동안은 내 안의 담수량이 수런거릴 것이고, 가끔은 밤에도
물들의 파문은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저수지 저 끝에서는...
불면에 빠진 물고기들 몇, 힘차게 튀어올라
고요한 참선 하나 물고서 재빨리 물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아직, 길 위에 서 있습니다.
어쩌면 처음부터 집은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아음 한켠이 염증으로 짓무를 때마다 더 먼 길을 찾아 나섭니다.
나그네에게 시원한 옥수 한잔 부어주시니, 그간의 오랜 여독이 푸르러집니다.
건네받은 물그릇에, 가일층 정진하겠다는 말씀을 담아 두 손으로 드립니다.
부족한 이에게 더 큰 길 가라고 새 신발을 선사해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방송대 문학상 관계자 여러분께
머리숙여 감사함을 전합니다.
우리 [은행나무 시학회] 식구들과 이 기쁨을 함께 나누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