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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기행--최재영

 

 

거대한 입속으로 몸을 들이밀자
차고 음습한 퇴적층마다
세월의 지문이 선명하다
목구멍 깊숙이
짐승의 뼈 조각 신음소리 가시처럼 걸려있어
동굴은 늘 바람소리로 웅얼거린다
순식간에 굳어버린 놀람이나 슬픔이
동굴의 입구를 열어 놓았으리라
목울대 당당하게 버티고 선 석주는
어느 선사의 흔적일까
수만 년을 늙어오면서 동굴은
침전물을 뱉어내는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다
고생대와 중생대 사이
이미 허기를 걷어낸 침샘에는
가라앉은 부토와 이름을 알 수 없는 식물들이 공생하고
깊이 들어갈수록 어둠은 격렬하게 끓어올라
지층이 맞물린 흔적 심하게 헐어있다
발자국 소리 텅텅 울리는 꼬리뼈를 돌아나오는 길
어느 짐승의 발자국인지
움푹 패인 웅덩이 짙푸른 공복이
아득한 등허리의 고요를 흔들고
입구 저 켠에서 진화된 원시인들이 밀려 들어온다.

출처 : 은혜로 꽃피는 축복의 나무
글쓴이 : 바람그리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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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 

 

                                             김명희

 

갈치를 손질한다

마지막까지 바다를 끌고 다녔을 꼬리와

수중의 속도를 재단하던 지느러미를 자르다보니

낚시 바늘이 한쪽 눈알을 통과한 채 단단히 박혀있다

턱뼈 깊이 잘 빠지지 않는 날카로운 바늘을 더듬는데

사망한 노숙자 소녀의 신원을 찾는 속보가 흘러든다

어느 소녀의 희망도 야행성이었을까, 낚싯배의 현란한

불빛을 따라 위로-위로-먹이를 찾다 걸려든 갈치처럼

어느날, 길 가 화단에서 발견된 채 더는 기척이 없다

세상의 불행이나 가출의 행방들은

치명적인 어둠 쪽으로 엎질러지게 마련인지 아침이면,

봉지에 담긴 싸늘한 유품처럼 구겨진 절망 몇 장 들춰질 뿐

소녀의 성장 안쪽에 깊숙이 박힌 바늘을 수습하는 일이란

뒤늦은 후회일 때가 많다

캄캄한 밤, 아직 덜 자란 지느러미를 달고 거리를 배회했을

초경의 꿈이 몸 곳곳에서 멍든 얼룩으로 피어나고

모자이크된 몇 개의 진술이 상한 물거품처럼 부글거린다

 

아직 귀가를 완성하지 못한 딸아이의 전화 속 행방을 살피며

쉽게 밀봉되지 않는 비린내를 내다 놓고 돌아서는 오후

번쩍,

잘 못 들른 햇살 한 마리 낚시 바늘에 걸려 퍼덕인다.

 

 

- 가작-

 

 

 신문지 봉지 / 이윤경

 

이른 저녁상을 물리고 나면

온 식구가 머리를 맞대고 봉지를 만든다

쑤어 둔 밀가루 풀에선 단내가 난다

읍내서 얻어온 신문지엔

폭설에, 교통사고, 기름 값 폭등 기사

그런 시끄러운 세상 이야기들은

가위로 자르고 풀을 발라 꾹 누르면

얌전한 봉지가 된다

 

봉지는 봄이 되면

하얀 배꽃 떨어진 자리

연하디 연한 어린 배를 감싸 안고

바람을 막고, 벌레를 막고

봉지의 빈 공간만큼

딱 그만한 배를 키우게 된다

 

봉지를 만들며

벌써 아버지 봉지 속엔

살찐 송아지 한 마리 들어가고

어머니 봉지 속엔

곗돈 한 뭉치 들어가고

오빠의 야무진 봉투속엔

은빛으로 빛나는 자전거가 들어간다

몇 개 안되는 동생과 내 봉지 속엔

하얀 운동화 한 켤레씩 들어있다.

 

 

 

 

= 심사평=

 

 겹눈으로 밝히는 생의 진실

 

선자에게 넘어 온 작품은 13명의 시편들이었는데 상당한 연찬을 거친 흔적이 뚜렸했고

수준 또한 높아서 우열을 가리기에 힘이 들었다.

그러나 여러 번의 검토 끝에 남은 작품은 김명희, 이윤경, 김용의, 한인숙,이순화 씨의 작품들이었다.

이순화 씨의 작품 중에서 '한가위'라는 작품이 눈에 들었다. 달이 차는 풍경을 '초생달이 시퍼런 칼날로 하늘깃을 찢는다'고 묘파하는 모습에서 사물을 자신의 고유한 눈으로 보는 매서운 시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거기에 보름달을 띄우고 하얀 쌀이 와르르 쏟아지는 통로를 연역해내는 솜씨는 더욱 빛난다, 다만 그 생각을 좀 더 푸짐하게 몰고 갈 시적 근력이 부족하였다.

한인숙 씨의 '콩나물은 헤비메탈을 좋아하지 않는다'도 수작이었다. 시의 화자는 유년의 가난했던 시절을 콩나물에 물주던 일로 재미있게 회상한다. 어렵고 고단한 일을 재미있는 음악으로 변주하여 그 어떤 슬픔도 거뜬하게 극복해내는 모습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또한 그 풍경은 읽는이로 하여금 저절로 신명나게 한다. 상당한 저력이다.그러나, 그 힘을 등굣길의 빽빽한 교통난을 얘기하는 데까지 과도하게 밀고나감으로써 시가 지녀야할 긴장을 놓치고 있다. 아쉬웠다. 시적 긴장과 언어의 절제를 살폈으면 좋겠다.

김용의 씨의 '아내를 찾습니다'도 수작이었다. 젊은 시절 아내의 아름다움이 생활의 고단함에 마모되어 마른 웃음을 짓고 있는 풍경을 그리고 있는데 아내에 대한 깊은 사랑과 따뜻한 마음이 읽는 이에게 훈훈한 감동을 준다. 세상에서 결코 낡아지지 않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잔잔하게, 그리고 견고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같이 보내온 작품들의 시상이 너무 단조롭다. 조금 더 사물을 다양하게 포착하는 눈이 필요하다. 이윤경 씨의 '신문지 봉지'는 시적 지혜가 눈에 띈다. 과일을 해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신문지로 과일봉지를 만드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얼핏 보면 단조로운 것 같으나 그 단조로움 뒤에 많은 얘기를 거느릴 줄 아는 지혜가 빛난다. 세상사 시끄러운 얘기들을 가위로 잘라 과일 봉지를 만든다는 얘기 속에 우리는 그 소란함 너머에 정직하게 일하는 사람들의 수고와 그 땀의 정직함을 느낄 수 있으며 또한 배면에서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같이 응모한 작품의 수준이 고르지 않다는 점에서 가작으로 선했다.

당선작으로 뽑은 김명희 씨의 '바늘'은 여러모로 빼어났다. 갈치를 다듬어가는 과정에서 발견한 바늘을 얘기하고 있는데, 그 얘기는 순간 비상하여 우리 모두의 꿈과 그 좌절의 역사로 데려다놓는다.

또한 그 바늘은 예리하여 읽는이의 마음을 돌연하게 나꾸어채고 있다. '낚시 바늘이 한 쪽 눈알을 통과한 채' 라는 구절 앞에서는 읽는 이의 눈에 바로 그 바늘이 걸려있는 것이 아닌가 상기시키는 힘이 있다.

시가 지녀야할 긴장미가 있으며 그 긴장이 우리네 삶의 자리로 전이되어 우리들이 지닌 꿈과 그 꿈을 향한 우리의 노력은 무엇이었는가를 되묻게 한다. 시가 겹눈을 지니고 사람 살이의 근원을 묻고 있다. 좋은 시를 쓸 것으로 믿게 한다.

끝으로 응모한 모든 분들이 시의 길을 깊이 신뢰하고 끝까지 밀고 가는 저력을 당부한다. 좋은 시는

당사자는 물론 읽는 이 모두에게 진정한 힘과 기쁨을 주는 것이 아닌가.

 

강형쳘 (시인)

- 1985년 '민중시'2집에 '해망동 일기' '아메리카 타운' 을 발표

   시집'해망동 일기' '야트막한 사랑' '도선장 불빛 아래 서 있다'

- 평론집'시인의 길, 사람의 길' '발효의 시학'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사무총장 역임

- 현재 숭의여자대학 문예창작학과 교수

 

 

 

 

 

[ 당선소감]

 

머리 위로 한 무리의 새떼가 이주해 오고 있다

순간

긴 대열 한쪽이 활처럼 휘더니, 내 시야 속의 중력을 일제히 잡아 당긴다

저 오래 된 이주의 내력을 대할 때마다

내 작은 이승의 내력은 종종 짓무르곤 했고 그런 날 나는 산사를 찾는다

낡고 누추해진 마음 한켠에 사찰 하나 새로이 들어앉히는 일처럼 스산한 일도 없다

그것들은 대부분 혼자일 때 건축되는 법이다

나는 지금,

시베리아 북부 한켠을 박차고 날아오는 사원을 내 안에 복사하는 중이다

앞으로 한동안은 내 안의 담수량이 수런거릴 것이고, 가끔은 밤에도

물들의 파문은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저수지 저 끝에서는...

불면에 빠진 물고기들 몇, 힘차게 튀어올라

고요한 참선 하나 물고서 재빨리 물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아직, 길 위에 서 있습니다.

어쩌면 처음부터 집은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아음 한켠이 염증으로 짓무를 때마다 더 먼 길을 찾아 나섭니다.

나그네에게 시원한 옥수 한잔 부어주시니, 그간의 오랜 여독이 푸르러집니다.

건네받은 물그릇에, 가일층 정진하겠다는 말씀을 담아 두 손으로 드립니다.

부족한 이에게 더 큰 길 가라고 새 신발을 선사해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방송대 문학상 관계자 여러분께

머리숙여 감사함을 전합니다.

 우리 [은행나무 시학회] 식구들과 이 기쁨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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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 엄순복

 

 

 

팔짱을 끼고 있는 나무를 본 일이 있는가

 

만약에 나무가 두둑하게 팔짱을 끼고 서서

 

지나가는 거만한 사람의 뒤통수를 툭툭 건드려 본다거나

 

꾸벅꾸벅 졸기라도 한다면

 

나무처럼 사랑스러운 시를 결코 볼 수 없으리라고

 

노래한 시인은 없었는지 몰라

 

시인이 노래한 그 나무를 나는

 

사랑하지 않았을지 몰라

 

 

사람들이 길가에다 나무를 심는 것은

 

길을 가다가 문득 사랑하나 기억하라고

 

나무 하나 쳐다보며 푸르른 생각 키우고

 

나무 그림자 만한 고요, 제 가슴에 들이라고

 

그래서 나무는 온종일 제자리에 서 있는 것이지

 

수많은 손바닥을 들어 일일이 손인사를 건네고

 

그건 아니야 손사래를 치기도 하는

 

푸른 신호등이 되어야 한다고, 나무는

 

 

 

<한국크리스천문학 2006년 여름호 여름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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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닫힌 창(窓)

 

류명순

 

저 혼자 산 공기가 두껍다

유리창 깊숙이 뿌리를 내린 먼지의 격자무늬

직각으로 교차한 문살무늬를 지워본다

풍경을 적시던 창, 가만 들여다보면

햇살에 낫을 벼리던 사내들은 간데없고

흑백사진 속에 갇힌 三代의 쑥스러운 웃음만

마른 창틀에 걸려 위태롭다

이따금씩 걸려드는 새털구름 사이로

노랗게 익은 햇살이

빈집의 젖은 추억을 빨아먹고 있다

 

언제부터였을까

안과 밖의 경계가 두꺼운 침묵 속에 안주하게 된 것은,

굵게 금간 유리창이

툭툭, 상처의 비늘들을 떨어트린다

풍경이 유리창을 적신다

백 년을 지나온 묵은 길같이

바람에 몸 긁히며 길들여진 세월만

가슴에 품고 삭이고 있다

 

풍경이 풍경을 적신다

누군가 젖은 몸 빠져나간 자리마다

노을 가득 밑그림만 남았다

속내를 알 길 없는 오동나무 한 그루가 窓 두드리며 안부를 묻는다

웃자란 유리창의 기억이

꽁지 노란 새 한 마리 푸드덕 날려보낸다

 

 

산복도로 회원이신 로뎀나무(류명순)님께서

<오래 닫힌 창>으로 2010년 제34회 방송대 문학상 시 부문 수상자가 되셨습니다

많이 축하드립니다

 

방송대 문학상 시부문 심사평

 ...(중략)

 그에 비해 류명순의 시들은 어느 작품을 수상작으로 해도 좋을 만큼 전체가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대상을 바라보는 내밀한 시선과 감각, 절제된 언어, 안정된 화법들로 한결 균형 잡힌 세계를 보여준다. 당선작인 '오래 닫힌 창(窓)'에서도 침묵이나 행간의 깊이를 차분하게 읽어내는 눈이 돋보인다. 그러나 지나치게 무난하거나 일정한 틀 안에 갇혀 있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낯익은 발상과 어법에서 벗어나 좀더 과감한 시적 모험을 감행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심사평 ;나희덕시인

 

    

출처 : 산복도로에 쪽배가 떴다
글쓴이 : 양귀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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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동자승, 주지스님 따라 계곡 갔다가 맑은 물 속 흐르는 얼음 보고 깜짝 놀란다. 경을 외지 못해 졸던 계절은 그해 겨울의 선율이었고 눈 쌓인 대숲이 딱, 분별 꺾으며 만들던 화음이었다. 예끼 이 녀석, 전생에 무엇이었길래 이리 말을 안 듣는고? 스님, 스님, 난 전생에 계곡물이 콸콸 흐르는 물소리였어. 어린 부처가 웃는다. 그리고 폭설(暴雪), 절이 완벽하게 고립된다. 걱정스런 표정으로 총무가 핸드폰으로 여기저기에 연락을 취하며 안절부절 못하는 사이 동자승은 경내에 가만히 앉아 풍경 끝에 맺히는 이슬을 멍하니 바라본다. 한 방울의 맑은 음악은 자기 속에 주위의 모든 세상을 담아 둥글게 감싸고 있었다.

 

  - 제7회 대산대학문학상 시부문 수상작

출처 : 악마의 번뇌_ 올바르게(身,言,書,判)
글쓴이 : 그리운 하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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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대산대학문학상 시상
시부문 박희수 등 6명, 상금 각 5백만원 및 해외문학기행

제7회 대산대학문학상은 박희수(시,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3), 남윤수(소설,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 2), 이오진(희곡, 한국예술종합학교 극작과 3), 김주성(씨나리오,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4), 장은정(평론,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4), 문부일(동화,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3) 씨가 차지했다.

수상작품은 시부문 <삼면화> 외 4편, 소설부문 <당신의 얼굴>, 희곡부문 <가족오락관>, 씨나리오부문 <상흔록>, 평론부분 <기하학적 아우라의 착란>, 동화부문 <콩나물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외 1편 등이다.

심사는 조정권, 이문재, 김선우 시인(시부문), 최인석, 공지영, 한강 소설가(소설부문), 이윤택, 장성희 희곡작가(희곡부문), 김전한 씨나리오작가(씨나리오부문), 최원식 평론가(평론부문), 김병규, 원종찬 아동문학가(동화부문)가 맡았다.

지난 1월 21일 교보생명 소강당에서 시상식이 열린 이 상은 대학 문예활동에 활력을 불어넣고 역량있는 대학생 신진문인을 발굴하기 위해 대산문화재단과 창작과비평사가 공동으로 주관한 것으로, 이번 수상자에게는 각각 5백만원의 상금과 해외문학기행 기회가 제공됐다.

▲ 박희수
▲ 남윤수
▲ 이오진
▲ 김주성
▲ 장은정
 

출처 : 김경애의 시와사랑
글쓴이 : 시와사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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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작-베로니카 외 3편

 

 

베로니카*/박채림

 

 

  우리는 애초에 하나의 몸이었다. 아니, 몸짓이었나?

 

  나는 당신 손등에 잘못 그어진 흉터. 지난밤 꿈에 길게 칼자국을 남긴 얼굴 가린 귀신. 당신의 잘 웃지 못하는 왼쪽 입꼬리. 저장도 안하는 참 못 나온 쎌카. 당신이 태어날 때 처음 보고 놀란 그 환환 빛처럼, 나도 버튼이 잘못 눌린 복사기에 얼굴이 끼었을 때 태어났어요. 그 환환 빛 말이죠. 내가 어머! 하고 부끄럽게 비명을 질러보았는데요. 그 순간에도 나는 스무개, 서른개로 늘어나고 있더란 말이죠.

 

  우리는 죽은 쥐들과 귀신 들린 인형과 벌레들이 우글대는 베개 등등. 캄캄한 지구에서 신나게 달리기를 하는 중이죠. 시든 꽃을 들고 제일 먼저 당신에게 도착하면 신나서 팔짝팔짝 뛰어올라요. 잘못 도착한 세계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이방인이네요. 누군가 우리를 제자리에 돌려놓기 전에 최대한 수줍게 웃으면서 악수 청하는 포즈를 취하고 있어요.

 

  깜찍한 상상들 지겨워요. 우린 그냥 하나의 소문일 뿐인데요 뭘. 내가 나랑 또 나랑 나들이랑 손에 손잡고 귓속말로 내가 누구인지 수소문하는 동안 살비듬이 떨어져나가듯 내가 또 한움큼 세상에 나동그라졌어요.꽉잡아. 이런 말할 새도 없었죠. 스무개 서른개씩 나는 어제도 오늘도 나를 왕창 흘리고 다녔어요.

 

  저기 사납게 쏟아지는 빗방울 보이나요. 저 신나게 튀어오르는 물의 분열증. 창밖을 서성이며 호시탐탐 안을 노려보는 형형색색의 눈동자들. 깨어지고 다시 손잡기놀이 하며 소리 지르고 웃고 울고 발악하는 한바탕 술래잡기. 수없이 얼굴 바꾸며 쏟아지고 지워지는 지구의 상상. 나였는데 다시 보니 당신이었고 또 그였으며 이젠 그녀였는데 알고 보니 다 나더라 아니 다 당신이더라 하는 물기 어린 장난말.

 

  저기 찌라시 같은 내가 보이네요. 그래요 우리는 애초부터 과대광고였어요.

 

 

*끄시슈또프 끼에슬롭끼 감독의 영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맛있는 입술/박채림

 

 

   

  나를 만져봐도 괜찮아요. 경멸하는 얼굴이라면 나쁘지 않겠지만 당신의 부끄러운 표정은 견딜 수가 없으니 그냥 무심하게 만져보세요. 간지럽지 않아요. 할퀴거나 하지 않을게요. 우리 주인님 손톱 끝에 매달린 무수한 눈알들은 매번 붉게 충혈되어서는 도로록 도로록 빨주노추 검은자위를 굴리고는 했는데요. 내 털을 헤치고 맨살로 만져지는 시선들 때문에 나는 밤새 간지러워서 몸서리를 치곤했어요. 그러니까 이 정도는 괜찮아요. 뭣하면 보답하는 뜻에서 오늘밤 부엌 창문을 살짝 열어두는 것도 좋겠네요.

 

  나는 그냥 고양이고요, 두 개의 코트를 입고 있어요. 얼룩말과 겨울 하늘이 교차할 때마다 밤과 낮이, 어제와 오늘이, 주인님과 당신들이 자꾸만 몸을 바꿨어요. 무수히 내 몸을 애무하는 당신들과 주인님과 얼룩말과 겨울 하늘이 가난한 표정을 내 몸에 돋을새김할 때마다 나는 몇 번이고 기꺼이 죽었어요. 그러고는 꿈 한자락에 내 웃음소리를 묻혀갔잖아요. 주인님과 당신들은 자꾸만 악몽이라고 나를 원망했지만요.

 

  주인님이 풍선 불 듯 내 항문에 공기를 불어넣어요. 말랑말랑한 내 몸이 애드벌룬처럼 마구 부풀어오르네요. 생선 비린내 진동하는 내 얄미운 입술에 입 맞춘 주인님 때문에 나는 또 간지러워서, 둥실둥실 떠올라요. 발밑의 지구는 슬프고 황홀한 오렌지빛이에요. 바닥에서 올려다본 하늘과 비슷한 모양새라서 더 슬픈걸요. 저기 긴 실타래 풀고 있는 주인님의 얼굴이 보여요. 따뜻한 달에 입 맞추려고 나는 더 높이 높이 떠올라요. 주인님의 저 순진한 눈알들이 보이나요. 저 슬픈 상상들을 포식하는 달의 작은 입술에선 벌써부터 달콤한 냄새가 나요. 부럽다고 데룩데룩 소리치는 눈알들은 사실 내 뱃속에 모두 있어요.

 

  나를 만져봐도 괜찮아요. 내게 입 맞춰도 괜찮아요. 창문은 아무래도 좋아요. 내 분홍색 배를 뒤집어 귀를 대봐요. 괜찮아요. 세상에 맛없는 욕망들도 있는 법이죠. 달도 눈알도 악몽도 모두 내 뱃속에 집어넣고 휘휘 저었어요.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런데 저기요. 뭣하면 그 입술 잠깐 베어 물어도 괜찮나요. 아주 잠깐인데요 뭐. 아주 짧은 키스라고 생각하면 되는걸요. 네. 아주 잠깐만요.

 

 

심사평(349명 응모)

자기세대의 분열증을 21세기적 감수성으로 재기발랄하게 그려

 

시 쓰기에서의 넉넉함이나 새로움을 운문적이냐, 산문적이냐 하는 관점에서 살펴볼 일만은 아니다. 시인은 자신의 이미지를 통해 우리에게 세계와 우리들 자신에 관해 무엇인가를 말하는 셈이고, 그 ‘무엇인가’는 우리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진실로 밝혀준다. 시는 단순한 운율이 아니라 구체적 알맹이인 리듬, 즉 이미지로서 존재한다. 때문에 시적 이미지의 본질적인 새로움은 말하는 이가 존재의 창조성을 얼마만큼 실현했느냐가 중요하다. 운문적 형식이든 산문적 형식이든 자신의 절실함을 빼어난 이미지로 형상화하여 시적인 것에 도달한다면,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에서 서로 어긋난다 하더라도 그 모두는 오늘날 시의 성취가 될 수 있다.

 

제6회 대산대학문학상 시부문에 응모된 작품들은 지난 해와 마찬가지로 시의 산문화가 큰 흐름을 차지하고 있다. 젊은 대학생들은 온갖 욕망들이 들끓는 도시 속의 삶 사이에서 발생하는 디스토피아적 세계를 산문적 형식으로 고문하고 비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쓰기일수록 자신만의 내면화된 기법이 요구되며, 개체적 존재의 세속성과 욕망의 미세한 균열을 자신의 시속에 드러낼 수 있는 변별력 있는 목소리가 요구된다.

 

심사는 지난 해와 마찬가지로 예심과 본심을 통합하여 진행하였고, 1차 심사를 거쳐 압축된 13명의 시들이 본심에서 논의되었다.

 

당선작으로 결정된 박채림(서울예대 2학년)의 「베로니카」외 3편은 언어의 세공이나 시적 개성의 새로움에서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 시인은 재기발랄하고 그로테스크한 발상을 잘 아우른다. 자아란 상충되고 보완되는 다발들을 모아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피해의식에 물들지 않은 21세기적 감수성으로 전해준다. 우리는 허위적인 세계 속에서 상충되는 여러 자아들에 눌려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특히 「베로니카」는 자기 세대의 분열증이 전 세대와 어떻게 다른지 그 변별점을 인상적으로 그려나간다. 버튼이 잘못 눌린 복사기에서 토해져 나오는 ‘찌라시’로 비유되는 이 세대의 분열증은 “잘못 도착한 세계에서” ‘소문’이고 ‘이방인’일 수밖에 없으나, 그것은 내면의 어둠을 확 벗어던진 발랄한 감각에 의해 구성된다. 가령 다음과 같은 구절이 그렇다. “저 슬픈 상상들을 포식하는 달의 작은 입술은 벌써부터 달콤한 냄새가 나요. 부럽다고 데룩데룩 소리치는 눈알들은 사실 내 뱃속에 모두 있어요”(「맛있는 입술」). 그러나 이 시인의 작품들에서 보이는 감각들은 안으로 응축되지 못한 채 가볍게 떠오르는 경향이 있다. 시는 감각적인 쾌감도 중요하지만 그 단계를 넘어설 수 있는 자신만의 세계에 대한 깊은 깨달음과 울림을 간직할 수 있어야 한다. 앞으로 자기의 감성을 살리면서 시적 조화를 심화시켜나갈 새로운 방법에 대해 고민해야 할 것이다. 어느 시인의 말대로 “참된 자아가 언어를 찾아 말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눈부신 사건이 된다”(테드 휴즈)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한편 당선작과 끝까지 자웅을 겨룬 각기 다른 응모자의「바람실」과 「수화를 듣는다」는 서정시의 정수를 보여주는 감정을 뜨개질하는 솜씨가 뛰어나고 안정된 시적 품격을 보여주었으나 익숙한 세계를 벗어나지 못해 안타깝게 밀려났다. 또한「악몽」은 언어유희에 바탕을 둔 발랄한 상상력이 장점이었으나 테크닉에 머문 한계가 지적되었다. 수상자에게는 정진을, 응모자 여러분께는 건필을 기대한다.

 

 

- 심사위원 : 김승희 김정환 박형준

  

출처 : (사)충북시를사랑하는사람들
글쓴이 : 반소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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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폭설의 기억/백상웅-  

 
1
북받친 사람처럼 눈 쏟아졌다.
녹슨 용골 드러낸 어선은 급한 마음에 뱃머리를 항구로 돌리고 육지를 밀었다.
눈발은 그대 아픈 곳에 관심도 없어 척추 부러진 어선을 껴안았다.
뼈마디 뚫고 솟아오른 엔진이 늙고 비릿하였다.
눈덩이가 기름때 낀 심장을 철퍽 삼키며 왕성한 식욕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파란 페인트칠 벗겨진 앙상한 배를 하얗게 씹으며,
눈발을 고장난 어선의 멱살을 잡던 쇠줄을 깨물어 끊었다.

 
2
백년 만의 폭설이라고 했다. 마을 바깥에 그리운 이 있었지만,
발신음은 산을 넘지 못하고 귓바퀴에 차가운 신호음만 뿌렸다.
귓밥을 파내면 짠한 이름만 묻어나왔다.
주먹 쥐면, 길은 튼 손등처럼 툭 끊어졌다.
그리움도 백년 만에 부러졌을까?
혼자 남을 때, 내 사랑의 방식은 바닥에 깔려 출항을 기다리는 그물이었다.
겨울볕에 누워, 얼고 젖기를 반복하며 어선의 등에 업히기를 한없이 기다리는 것.
발자국은 방파제 끝까지 질질 끌려다녔다.
눈덩이가 바다로 떨어질 때 배의 후미는 출렁 가라앉았고,
폐선의 굽은 등에 꽂힌 깃발은 외로운 이의 발자국을 내놓으라는 듯,
하얀 쇠창살에 갇힌 수평선을 그만 놓아주라는 듯,
온몸으로 울며 눈송이의 귀싸대기를 올리고 있었다.
허공 속에 오롯이 찍혀 있는 눈송이의 발자국,
오래 서 있었기에 단단한 발자국이 먼 바다로 밀려가고 있었다.


<2>-아버지의 터널/백상웅-

 
공주에서 천안 사이, 아버지가 뚫었다는 터널을 지나간다.

 
산의 늑골 속으로 고속도로를 집어넣던 아버지,
속도가 없는 터널 속에서 길은 늘 바위 속에서 똬리를 틀고 꼭꼭 숨어 있었다.

 
어느 겨울에는 뒤돌아보니 눈발이 둥근 출구를 쇠창살처럼 가리고 있었다고 한다.
감옥, 속에서 오히려 환한 아버지의 눈은 석달쯤 벽만 보고 살았다.
맞은편 쪽으로 나가기 위해 밤낮으로 허공에 백열등을 매달고 구멍을 뚫었는데,
터널이 마침내 뚫린 날, 감옥에서도 밀려난 아버지의 눈에 터널은 한마리 거대한 구렁이로 보였다고 한다.

 
속도는 금세 아버지를 잊었다.
늙은 두더지의 말린 가죽처럼 마루에 앉아 볕을 쬐는 아버지,
나는 창호지 구멍에 갇혀 있는 아버지를 방 안에서 훔쳐보고는 했다.
아버지는 저렇게 평생 갇히기 위해 전전긍긍 살았나?

 
터널을 통과하니 폭설이다.
아버지의 터널에서 나는 서서히 멀어져야 한다.
눈발을 파헤치며 버스가 두더지처럼 기어가기 시작한다.


<3>-코끼리 무덤/백상웅-

 
이 노란 코끼리는 지축을 쿵쿵 울리며
걸어오지 않았다, 숲에서 숨을 거둔 뒤에야
대형트럭에 혼자 실려 왔다
늪으로 걸어가서 스스로 가라앉지 못한
기름진 심장은 마지막 두근거림까지 뜨거웠다
주인이 흥정을 끝내고 숲으로 돌아간 뒤
백제폐차장 앞마당, 코끼리는
딱딱한 땅에 코를 박고 깊은 잠이 들었다
코끼리가 여기까지 끌고 온 육중한 길이
땅에 내려놓은 코끝에서 마침내, 끝났다
아름드리나무의 옆구리를 때려 쓰러뜨리고
하늘 속의 번개를 끌어내리고
무허가 판잣집의 처마를 귀뺨 치듯 날려버리던
이 길쭉한 코는, 아파트를 벌떡벌떡 일으켜 세우고
주름진 들판을 반듯하게 잡아 펴던
고독한 손이었다, 고독해서
아무지 잡아주지 않아서
주름이 자글자글한 코끼리의 손,
그렇다고 진흙 위에 물렁한 발자국을 새겨
대지에 심장의 엔진소리를 들려줄 수도 없는
코끼리의 발은 이제, 녹슬고, 뻣뻣하고
거무튀튀하다, 이 노란 코끼리는 울고 싶을까
혈관을 잘라내고 뭉클했던 오장육부를 떼어내기 전에
크게 한번 울어 지평선을 자욱하게 물들이고 싶은 것일까
땅에 자신의 무덤을 파고 들어가고 싶은데
제 코를 한치도 들어올릴 수 없어
작고 까만 눈 감을 줄 모르는 이 노란 코끼리를
그렇다, 사람들은 죽기 전에 이구동성
포클레인이라고 불렀다


<4>-꽃 피는 철공소/백상웅-

 
철공소 입구 자목련은 과연 꽃을 피울 수 있을까요?
망치질 소리가 앞마당에 울려퍼지면요
목련나무 우듬지에 남은 살얼음에 쨍 하고 금이 가요
내 친구 스물일곱살은 강철을 얇게 펴서 봄볕에 달구죠

 
한 잎 한 잎, 끝을 얌전하게 오므려 묶어서
한 송이 두 송이, 용접봉 푸른 불꽃으로 가지에 붙여요


내 친구 스물일곱살의 팔뚝에도 꽃이 벙글거려요
팔목에 힘을 줄 때마다 자목련꽃이 팽팽하게 열리죠
자색 화상 위에 푸른 실핏줄이 돋아나요
그걸 보고 여자들이 봄날처럼 떠나기만 했대요

 
용접봉을 손아귀에 쥔 내 친구 스물일곱살
오늘은 철공소 마당에서 철목련을 매달아요
가지마다 목련꽃이 벌어져서 햇볕을 뿜어대죠

 
꽃 핀 철문은 허공에 경첩을 달고 식어가고 있고요
밤에는 하늘에다 꽃잎을 붙이느라 잠도 못 자요


<<백상웅 시인 약력>>


*2006년 제5회 대산대학문학상.
*2008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현재 우석대 문예창작과 재학 중.  

출처 : 시와 글벗
글쓴이 : yanggo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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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 이지우

 

뭘 해도 안된다는 친구의 주정은
날 가지고 하는 복화술이다.

젊어선 많은 경험 쌓으라던데
집에선 그 방황 어찌 견딜까
그저 집 평수만한 시야로
앞날을 꾸려본다.

젊음이란 아름답다며
이쁘장한 가수는 지저귀고
못난 우리는 그 노래 따라 짖으며,
못사는 걸 알고도 잘살려고 하니
리얼리스트에다 이상가라며
스스로에 체 게바라의 초상을 붙인다.

집으로 돌아가는 수염 없는 혁명가 하나
노을 지는 가로등에 기대고는 읇조리니,
나는 못나도 내 삶은 못나지 않기에
꽃이 피는 청춘 아름답지 못해도 아름답거라.

디스 한 개비 다 타들어가고,
고이 잠든 어미 깨우러 간다.

 

 


 


사춘기 / 정민아 (동덕여자대학교 문창과 4학년)


나를 불어줘요! 비눗방울처럼 당신의 입술에서 나는 다시 투명하게 부풀어오르고 싶어요 당신의 입김은 새 엄지발가락을 톡 튀어 오르게 하고 그러면 몸 구석구석에서 발가락같은 작은 돌기들이 버섯처럼 솟아오를 거예요 내 몸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올라요! 내 겨드랑이에선 나물들이 돋아나요! 나는 꼼지락거리며 나를 일으킬 거예요 날아갈래, 요 다듬어지지 않는 까칠한 말들 사이로 '하지만'은 없어요 '그러나'도 없어요 내 가슴팍에는 가슴이 봉긋 솟아오르고, 나는 남자할래요 흰 뼈들은 옆구리에서 발라내 그냥 버려요 나를 빗장뼈로 닫지 말아요 쉼표로 날 열어요 나를 일간지처럼 읽지 말아요 할 수 없으면 그냥 덮어요





4인용 식탁

아침 6시 30분
사마귀 같은 의자가
식탁 위에 아침을 놓고
기다리고 있다

체크무늬 교복에 담겨진 고3 아들이
식탁 위에 차려진 밥상을 보고
의자에 앉는다

첫번째 의자가 식사를 하기 시작한다

부장 손이 들어오는 팬티에 걸쳐진 딸이
두번째 의자에 앉는다
두번째 의자가 딸을 먹기 시작한다

가슴 한복판에 퇴직서가 꽂힌
아빠도 앉는다
이혼서류의 엄마도 앉는다
배고픈 의자들
삐그덕대며 씹기 시작한다

식탁 위에 오고가는 말 하나 없이
네 식구가 조용히 사라져 간다
끄윽, 의자가 트림을 한다.


 


그녀의 노래 

                               
그녀의 입에서 툭툭 혀가 튕겨나와요
그녀는 줄에 혓바닥을 매달아요
바람이 불어와요
나뭇잎처럼
혓바닥들이 한꺼번에 흔들려요
우수수 떨어지는 것들은
없어요
혓바닥이 나를 길게 핥아요
나는 분홍색 캐러멜처럼 쭉 늘어나요, 고인 침을 삼켜요, 날 흘리지 말아요
나는 위태롭게 흔들려요, 쓰러지지않아요
연골이 생크림처럼 부풀고 나는 부드러운 춤을 추어요, 나를 더 길게 핥아줘요
그녀의 혓바닥들이 내 못에 달라붙기 시작해요,
떨어지지 않아요
나를 점점 덮어가요
나는 하와처럼
사라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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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술집에 전등은 모두 여섯

 알코올에 온몸 흠뻑 젖을 때까지

 사람들은 잔을 기울인다

 바람한 점  없는 술집에서 전등들은 보이지않게 흔들린다

 사람들이 잔을 기울일 때마다

 보 일 듯 말 듯,  조그맣게 몸을 부르르  떠는 것이다

 밤마다 사람들은 술에 젖은 입술로 시를 쓴다

 

 그들의 하루를 시로 쓰자면 몇천만 가지 표현으로 부족하다

 사람들의 얼굴은  서서히 주홍빛으로  물든다

 창작의 고통은 혀가 꼬이고 눈동자가 풀렸다

 어떤사람은 단어를 쏟아내느라  입에서

 붉은 토사물이  넘쳐 나오기도 한다

 

 대머리 시인, 팔불출 시인, 사업가 시인,깡패 시인, 미성년자

 시인,바람둥이 시인, 발기부전 시인

 각자의 이야기를 담은 시들을 들어달라 아우성친다

 그 아  우  성 속에서

 늙은 노새처럼 또 하루의 밤이 깊어간다

 

 그들의 머리 위에서 전등들은 시를 쓴다

 다음날이면 기억해내지 못할

 그들의 시어를 가지고 글을 쓴다

 인간들을 그려내는 것이 전등이 하는 일,

 그곳에 매달려 있는 이유다

 

 시처럼  콩나물을  씹어대고

 오징어를  찢어대도

 전등은 말이 없다

 침묵하라!  침묵하라!

 쓰기 위해선 침묵하라!

 자신을 뜨겁게 달구는 것

 술집에 전등은 모두 여섯

 영업이 끝나고 불이 꺼지면

 전등들은 제각기 자신이 쓴 작품을 발표한다

 어떤 전등은 큰소리로 낭독하기도 한다          -서울산업대 문예창작과-

             

          

출처 : 지리산을 사랑하는 문학모임
글쓴이 : 지리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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괄호론 / 서덕민

 

괄호는 묶음의 형식이지만

비어있음의 형식이기도 하다

무엇인가를 잔득 묶고 있으면서도

텅 비어 있는 괄호는 어쩌면

모호함의 형식일 수도 있다

가령 내 어머니가 그렇다, 그녀는

주로 미지수를 묶고 다니므로

무엇인가를 들어 있다 할지라도

전혀 알아볼 수 없다

아니, 텅 비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괄호는

등호를 거리낌없이 뛰어넘어도

결코 균형이 무너지는 법이 없다

괄호가 사라진 자리에 어롱어롱한 자국

어머니란 한 쪽 변에

잠시 여자를 비워둔 여자일까

 

미지수를 묶고 다니는 그녀

미간을 둥그렇게 찡그리며

눈물을 흘리면, 작고 예쁜 괄호가 생긴다

내가 앓아야 할

세상의 모든 아픔 앞에서

그녀의 눈가는 언제나 먼저 축축해지는 것이다

나도 별 수 없이 그녀의 괄호 안에 묶이는 것일까

그렇게 그녀가 모두 묶어서

미리 중심을 잡고 있는 것일까

 

괄호란 여자의 형식이다

어렵고 아픈 것들로 가득 찬

텅 비어 있는 내 어머니의 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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