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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열리는 문이 있다
열린 문 뒤로 다가가 가만 들여다보면
웃음 속살 같은 쌀알들이 껍질을 벗고 있었다
미끈하고 반질반질하게 태어난 알맹이들
열어젖힌 정미소 문 앞에 차르르르
마술처럼 쏟아졌다
헐떡거리며 돌아가는 거친 기계음과
깊고 어둑한 그늘을 등지고
아버지 당신의 노동은 흥얼흥얼 사다리를 오르내렸다
밥과 응석과 꿈을 받아 삼키며
나의 한나절은 뱅뱅 맴을 돌다 가끔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쌀알을 밀어내고 껍질을 벗은 노란 쌀겨들이
정미소 앞마당을 꽃가루처럼 날아오르는 순간
당신의 현기증은 허공을 딛고 나의 놀이도 멈추었다
기계의 발톱에 물린 사나운 시간들
다시는 그 마당에 가지 못했다
굳게 갇힌 문안에서 그 어떤 소리만 새어나와도
멀리 달아났다
어느 날 늙은 기계들이 밧줄에 묶여 끌려 나갈 때까지
나는 그 문을 마주하지 못했다.

 

 

고향식당 정씨

 

사내, 한때 푸른 등을 넘어 파도를 꺾었다
부챗살 같은 굵은 가시를 펴고
사방을 헤엄치던 그 사내의 어깨가
오늘은 변두리 개천에서 꿈틀 거린다
오늘 따라 성가신 지느러미를 달래며
새벽 장을 보러 나간다
펄떡거리는 날비린내와
개흙처럼 미끈거리는 길바닥에서
일없이 담배를 피워 문 사내의 손이 타들어 간다
꼬막을 퍼 담는 할머니와
고등어 토막 내는 청년의 눈빛이 힐끔 거린다
오늘은 떨이 물건 없수다
달고 쓴 손님 척척 발라내는 고수들의 칼끝
푸르고 깊은 한 가운데
나자빠진 활어 한 마리 낚지 못하고
퍼덕이는 지느러미를 몰고 새벽시장을 빠져 나온다.

 

마리화나를 위하여

 

흐린 눈 껌벅이며 먹이를 삼키는 먹구렁이
깊고 검은 입 반 쯤 벌린 채 멀리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는 다시 번들거리는 배를 끌고 조금씩 다가오는 그를 만나러 갑니다
빙빙 다른 길을 맴돕니다
멀리 서둘러 달려온 출발점도 되돌아봅니다
어느 곳으로도 도망칠 수 없는 돌아서면 다시 앞을 가로막는 칭칭 먹구렁이
다 큰 개망초 언덕마다 부시게 피고 움츠린 몸이 천천히 먹힙니다
더듬더듬 검은 입 속으로 들어갑니다
발밑에 어둠이 똬리를 틀고 미끄러운 비탈 오르고 내리다 엉킨 몸이 풀립니다
마침내 취한 해가 둥둥 떠다닙니다.

 

 

박하사탕

 

출출한 빈 그릇이 식탁마다 둘러앉은
다 저녁 밥집에 털퍼덕 주저앉았다
육개장을 기다리며 자꾸 부어오르는 허벅지를
문지른다 이걸 어째
다섯 시간은 더 버텨야 할 두 기둥을 
달랜다 달래다 일없이
휴대폰 1번을 꾹 누른다 혼자
라면을 끓이던 아이가
숙제 다 했구요 준비물도 다 챙겼어요
뒷말 이르기도 전에 아이는 전화기를 내려놓는다
야, 야 쥔아줌마 잔소리로 볶아 내온 밥상이 차려지고
벌건 고추기름을 걷어낸 세상은 여전히 맵다  
육개장에 다시 밥을 만다 이번엔 휴대폰이 울린다
안사장 내일 세시쯤 갈게
벌써 한 달, 건물주가 과일을 씹으며 통보를 한다
입안이 화끈거리고 삶이 부어 오른다 
쥔아줌마 내미는 박하사탕 받아들고 
차가운 외투 부스럭부스럭 사탕 한 알 쥐어주고 돌아서던
아버지의 등 뒤를 오늘은 내가 따라 간다.

 

나팔꽃

 

창신동 외딴 섬
빨래가 펄럭인다 곳곳에
버려진 살림살이와
급한 걸음이 남긴 신발 한 짝
절반이 넘는 짐을 덜어 내고도
제 무게조차 견디지 못하는 철거민 아파트

담벼락에 나팔꽃 징하게 펄럭인다



 

 

당선소감(안진영)

폭설이 내리는 벌판에서 다시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미안하다고, 이미 무릅까지 덮으시고도 미안하다 하셨습니다.

 

그렇게 그날은 종일 눈이 내렸고 나는 아버지를 오래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움이 얼고 다시 녹아 시가 될때까지 매번 시에 기대고 시에게 배우면서 살아가는것이 참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내 서성이는 모퉁이에 문을 열어 빛을 보여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더 측은한 눈으로 시를 살면서 시를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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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바닥

 

전복을 씻는다
칼등이 스칠 적마다 움찔거리는 발바닥
겹겹 눌어붙은 찌든 때가 밀려나온다
파도를 등에 지고 거친 바위를 걸었을
단단한 바닥 하얗게 드러난다
군데군데 부비트랩 숨어 있던 아버지의 길은
언제나 가슴 졸여야 했고
피딱지 엉겨 붙은 물집 잡힌 발바닥엔
뜨거운 슬픔이 고여 있었다
늦은 밤 고단한 아버지 몸이 앓는 소리에
단칸방 문풍지가 파르르 떨리곤 했다
있는 힘을 다해 껍질에 몸 붙인 전복
예리한 칼끝이 멍든 핏줄기를 건드렸는지
푸른 내장 주르르 흐른다
전복 등껍질 벗겨내자
때 절은 거뭇한 패각 안쪽에
아버지의 한 생애 아롱져 있다

 

 

여자만汝自灣

 

뻘배 탄 아마조네스 꼬막껍질을 밟고
태고적 자궁 속으로
밀림 같은 아득한 세월 달려 나온다
여자만의 사내들은 뻘 밖에서 불을 쬐거나
꼬막을 구워 소주를 마신다
세상의 문 닫는 시간 안개주렴 발을 내린다
나문재 꽃무늬 속치마 축축이 젖어온다
바람도 없는 바다호수 밤새 뭍의 허리 껴안고
아랫도리 뻐근해지도록 자맥질하는 바다
구멍마다 드러누운 파도 호흡이 거칠다
움트는 꽃잎, 검은 자궁 들썩인다
달이 여문다
여명의 문고리 잡고 몸 푸는 만삭의 여자만
양수 터진 갯벌은 질펀한 해산을 하고
태를 자른다
딱딱한 껍질 열고 젖꼭지 찾는 여린 혓바닥들
스멀스멀 뒷걸음질 치는 바다
첫국밥 들인 여자만에
해미가 빠진다
충만한 밤을 지낸
여자만 여자들
뻘배를 타고 또 하루 문을 연다
꽃 없는 포구 花浦에 흐드러지게 참꽃 핀다

 

빨래경전

 

어머니
지겹지 않으세요
아침마다 손으로 읽는
그 페이지
오늘은 세탁기에서 읽어요
비누거품 풍선 불면
얼룩 팡팡 터져요
통돌이 난타 두드려요
온 가족 윙윙 부비부비 춤 춰봐요
우주로 밥상 날린 아버지 외박한 오빠
다 함께 차차차,
어깨를 흔들어요
온 가족 신나게 트위스트
늘어진 브래지어 고리 물고 림보 해봐요
막내 새까만 발바닥 요리조리 헤엄쳐요
벨 울려도 허리 굽히지 마세요
스텝 꼬인 빨래 쏙쏙 뽑아
비행기를 날려요
한 장 더 넘기면
어머니, 햇살 눈부셔요

 

 

하관

 

볕 좋은 선산발치
가묘 걷어낸 네 귀 반듯한 방에
아버지를 모신다
하관 밧줄 내리자
흰 국화 꽃송이 가슴에 얹고
상두꾼 올리는 흙밥 받으신다
달구질로 꾹꾹 눌러 쌓아올린 고봉
어머니 자분자분 어루만지니
아버지 두 다리 쭉 펴신다
새로 지은 봉분에 향 피워 혼백 부르고
메 올려 잔 친다
형제들 차례로 줄지어 엎드린다
크고 작은 등 산맥처럼 이어지는
한 家系 그윽하게 읽고 계시는 아버지
고향동네 내려 보이는 금당 산마루
양지바른 푸른 집에 언제든 다녀가라
갈참나무 가지 흔들어 눈짓 하시고
청솔 누비는 시원한 바람소리에
밝은 잠 드신다

 

미로 찾기

 

길을 잃었다
환한 통로에서 길과 엉켜버린 발
오르던 계단을 돌아서 내려가자
지하의 동굴이 迷路인지
좀 전 플랫폼이 건너편이다
빛 속으로 달려 나온 전동차는
멀미처럼 @@골뱅이를 쏟아놓는다
컴퓨터 화면을 누비던 핏발들이 몰려나와
지루한 반복 음으로 바닥을 두드린다
사방으로 뚫린 迷路에서
사람들은 未路 속으로 떠밀려간다
길눈 어두운 나는
낯설고도 익숙한 경계에서
아직도 두리번거리고
벽에 걸린 지도는 명쾌하다
길을 잃는다는 것은
길을 찾는다는 것
지하철 진동이 무겁게 닿았다
또 떠나고
몰려오는 발자국 소리들
미로를 빠져나간다

 

 

당선소감(이언주)

어느 날 詩가 내게로 왔다. 손 내밀면 금방이라도 닿을 것 같은데, 한 뼘 모자라는 곳에 서서 더 이상 거리를 좁혀주지 않았다. 시인이고 싶었다. 잡히지 않는 갈망으로 신열을 앓았던 시간들. 이제껏 한 가지 일에 매여 이렇게 몸서리친 적이 있었던가.

 

가끔씩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문학소녀 시절, 행여 삼류소설이나 쓰고 있을 미래의 자신을 상상하기 싫어 문학과는 전혀 상관없는 전공을 택했다. 그러나 유목민으로 낯선 곳을 떠돌던 한 때,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푸른 초원 위에 화살처럼 쏟아져 내리는 햇살 때문에 글을 쓰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지나온 곳마다 국적 잃은 향수병을 발자국으로 찍고 다녔다.

 

내게 시는 ‘기쁨 두 배, 고통 네 배’이다. 수염뿌리를 허공으로 내밀어 가쁜 숨을 몰아쉬던 열대도시 가로수처럼 공기 속으로 생각의 뿌리를 내리고 연명하기엔 언제나 목이 말랐다. 다가가면 저 만치 달아나는 시를 잡기 위해 새 해가 되면서 두 권의 공책을 준비하였다. 우연이었을까. 한 권은 표제가 ‘詩作’ 이고, 다른 한권은 始作이란 뜻의 ‘카이스’ 라고 붙였다.

이제 정말 시작이다!

 

언제나 희망을 잃지 않게 용기를 준 뚝방동지 정하린 오정순씨 정말 감사하고, 당선과 함께 친정을 만들어주신 심사위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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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비

 

태양의 가난한 침묵을
보았다 힘겹게 무너진 벽을 짚고
나는 반토막 어둠으로 흔들리고 있다
좁은 골목을 우회하는 끈적한 욕망들
파리한 그림자를 따라 파란 담벼락을 기어오른다
나는
애초부터 폐허의 주인이었다!
폐허를 감추기 위해 더 넓은 이파리가 필요하다
완전히 어두워질 그때를 기다려
창살을 움켜잡는다
처음 가지를 뻗는 휘어진 벽
눈을 감고 이파리를 펴며 간다
부서진 창틀을 지나야한다 문득
새들이 가볍게 날아간다
악착같이 버티고 있는 나는
중지할 수가 없다 돌아갈 수조차 없다
나는 납작 엎드려 친친 올라간다

 

 

정류장 근처

 

은행나무에서 누런 시간이 무겁게 떨어진다
아스팔트 바닥에 노을이 부서진다
하나 둘씩 네온 불빛이 공중으로 흩어진다
어색한 침묵은 끝내 나뭇가지를 흔든다
버스는 오지 않는다
이파리 하나 도로에 떨어진다
그림자를 핥고 가는 찬바람이
노선 위를 서성이는 사내의 기침을 쓸어간다
비에 젖은 사람들의 영혼은 무겁다
가지 끝에서 괴로워하는 잎들의 떨림은 무겁다
바람은 이제 나뭇가지를 흔들지 못한다
외투 안으로 어둠이 파고든다
사내가 뱉어놓은 기침소리가 나무를 흔든다
잠들지 못한 빈가지가 흔들린다
핼쑥한 가로등은 먼지를 뒤집어쓰고
고통스럽게 떨고 있는 그림자를 핥고 있다
하지만 정작 떨고 있는 것은 내 등뼈 속의 심장이다
나를 대신하여 우는 누런 잎이 바닥을 치며
어둠 속에서 버스를 기다린다
보도블록 위에
영혼이 가벼워진 비둘기들의 털이 나뒹군다
노선도는 언제나 그 자리에 꽂혀 있다
오지 않는 버스가 나를 기다리고 있고

 

두고나온 집

 

채송화 꽃잎들은 잠이 들고
하늘을 쳐다보던 해바라기가 나를 응시한다
내가 대신 하늘 향해 고개를 쳐든다
늙은 감나무 가지를 올라탄 능소화
모자를 찾다가 모가지 채 떨어진다
바닥에서 까맣게 말라가는 것은
능소화 꽃잎이 아니라 나의 고독이다
내 그림자가 땅을 쓸어가면서 신음한다

마룻바닥을 핥는 오래된 바람
나는 잠시 지친 몸을 그 위에 앉힌다
늙은 감나무 가지가 푸르다
툭 떨어지는 능소화의 울음소리
무서워 달아나버린 직박구리 어린 새
빙빙 돌아 어디로든 날아가면 그만이지만
그만이지만
내 몸 반을 가려주는
낡고 부서진 지붕은 자꾸 그림자를 밀어내고 있다
해바라기 씨 자국보다 깊게 패인 두 눈
나는 오래된 마당에서 꿈도 없이 구름모자를 쓰고 있다

 

 

염창동 버스정류장에서

 

속도를 늦추는 바퀴들
알 수 없는 한숨을 내려놓는다
제각기 다른 얼굴들을 한 사람들이 걸어간다
엉켜있는 시간들을 끌고 막차는 떠나고나는 이곳에서 꽤 오랫동안 웅크린
자세로 병든 비둘기 걸어가는 자세로
불빛을 펴며 익숙한 장애물을 찾는다
다른 사람들 분주히 길 위에서 날개를 펴고

침침한 시력으로 간판들을 읽어간다
삼겹살 3300 돈가스 2900 피자 5900
광어한마리 9900 안주+생맥주500cc 9900
김밥 한줄 1000 로또누적금액 118억
신발 끈이 풀어진 사람들을 따라간다
지친 발자국 수효만큼 어지러운
보도블록 위로 비틀거리는 발목들

그렇게 새벽이 왔다
이파리들은 아직 타올라야 할 것처럼 무성하다
바람이 분다
나무는 하얀 불꽃같이 웃는다
잠시 머물다가는 자동문이 나를 향해 열린다
속도가 길 위를 쓸고 지나면
욕망들이 외상값처럼 달려든다
나는 긴장한 눈으로 노선도를 쳐다본다
바퀴들이 멈춰 있다

 

구름이 사는 골목

 

먹구름이 바닥에 총을 겨누고 있어
채송화 콘크리트 비집고 붉은 꽃잎 뱉어내고 있어
집 앞 하수구가 텅 비어있는 것은
동사무소 계약직 할머니들이 삽질을 잘했기 때문이야
수백 번의 구직검색을 하면서도
먹구름이 몰려 올 거라는 걸 몰랐던 거지
자고 일어나면 실신한 구름들이 빈 병에 채워지곤 했지만
하릴없이 푸른 병들을 세어볼 순 없었어
헝클어진 구름을 끌어내려 가위질하고 망치질하여
다시 지붕 위에 올려 놓았어
건축기사처럼 간단하게 틈을 막아버렸지
오늘은 왜 미친바람이 불어오는지
비 섞인 바람은 고통스럽게 바닥을 쓸어가는데
참, 실직 중인 것을 잊어버렸네!
와이셔츠 단추를 잘라내어
아들놈의 장난감차에 헤드라이트를 붙여야겠어
빗방울이 창문 틈새로 들이치고
우리집 창문은 몇 개였더라?
쑤군거리는 낡은 책상 위
이력서의 글자들이 숨죽이며 꿈틀하는 것은
서랍 속 모나미 볼펜이 지렁이를 낳고 있기 때문이야
아주 늦게 창문을 열어야겠어
불빛은 맨홀 뚜껑 구멍으로 힘없이 빠져
지렁이 몸통에서 꿈틀하는데
나는 그것을 보고 있어
창문을 열고 바람 속에 웅크리고 한참!

 

 

당선소감

늦게 시작한 詩作, 뜻밖의 소식에 부끄러웠다.
한 편 한 편 시 쓰는 것에 늘 최선을 다했다. 사실 시를 쓰다보면 시와 맞닿는 나의 고통스러움을 중지할 수가 없다. 지금 이 순간도 책상에 배를 대고 글자만 찍고 있다. 시의 뒤를 따라가는 끈적한 욕망들이 나를 자꾸 재촉하고 있기 때문이다. 매일 조금씩은 고통을 위하여 살고 싶다.

紅詩 동인의 선생님들 그리고 일 년 넘게 자신감을 심어준 고영선생님께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이제는 선생님 말씀대로 맘껏 나를 드러내며 쓰겠습니다.
시사랑 사람들 원희언니 혜선언니 혜숙언니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내게 있어 사철나무와 같은 호애클럽이 없었다면 시를 썼을까. 혜란 미라 세정 지연 성신 모두에게 이 순간의 기쁨을 나누고 싶다.
사랑하는 내 아들 동언 승언 그리고 21년을 무심히 지켜봐주는 내 님에게도 지독한 고마움을 전달하고 싶다.

내 시가 첫 인사를 할 수 있도록 미숙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진심 가득한 감사를 드린다. 부지런히 시 쓰겠다는 것으로 약속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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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러쉬

 

라린코나다, 바람의 분진같은 사내 몇몇이
하루종일 동굴 천장에 매달려있다.
조도를 낮추며 새어들어오는 뙤약볕, 때때로
바람은 예고도 없이 굴 속에 침입한다.
그들은 라린코나다 갱도에서
지층의 나이테를 긁어모으고 있다.

강원도 정선 화암광산 안
석탄처럼 검은 얼굴을 가진
아버지는 너무 오래 병을 참아왔다.
이젠 하나의 폐광이 되어버린 아버지의 몸,
말을 내뱉을 때마다 호흡곤란처럼
세상이 가르릉가르릉 거렸다.
폐가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것으로 보아
곧 밤이 찾아올 것입니다. 아버지는 꿈속에서
페루의 갱도로 들어서고 있을까
저녁은 독성 폐기물처럼 번지듯 퍼져오고
시간 위로 오래된 수면이 뚝
뚝 떨어지고 있다.

사내들의 허기가 뙤약볕에 황금처럼 반짝거린다.
안데스에 반흔으로 남겨진 것은
이들의 몸 속에 긴 세월 박혀있던
금들이 내비치는 것은 아닐까
빙하 밑 광산에 묻어놓은 뼈조각들이
우글우글 부풀어오르고 있다.
어둠 속으로 점점 깊숙이 들어가는 발자국 소리.

사내의 등에 묻어있던 사금가루가
아버지의 폐로 날아든다.
시간이 전속력으로 공회전하는 오후 병실
아버지도 골드러쉬 행렬을 따라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신문 속
폭설같은 눈동자에서 이따금씩 아버지가 비춘다
나는 혼자서 햇무리를 반시계 방향으로 돌리다가
여기로 돌아왔다.

 

 바람에 실려

 

풍성한 바람들이 몇 갈래로 나뉘어지는 저녁
양탄자 위에 실직의 시간을 펴놓고
신밧드가 머리 위의 수건을 고쳐 맨다
신밧드는 여행할 때처럼 반쯤 누워서
텔레비전 속의 사막을 집으로 실어 나른다

누런 모래 알갱이를 껴안고 웅크려있는 신밧드
수많은 여행을 기록해 온 것처럼
머리의 수건이 해져있다
소녀들의 치마같이 펄럭거렸던 양탄자도
그가 집으로 돌아오던 길목처럼 사방이 구겨져있다
바람에 실려 칼라하리 사막을 옮겨 나르는 동안
신밧드도 길을 잃었던 것일까
올이 풀려 여기저기 흩어지는 햇빛이
바짓단 속의 모래를 잠깐씩 들춰본다
수시로 이동하는 모래언덕처럼
텔레비전의 전파가 느닷없이 끊긴다 순간
리비아 근처에서 퇴직을 한 바람이
집안을 맴돌다 사라진다 신밧드는
바람에 의지할 때처럼 몸을 꼿꼿이 세우고
그가 실어 나는 대륙을 떠올려본다

신밧드 얼굴에 주름처럼 지도가 새겨진다
동화책 속 사막 한 가운데서 모험을 하던 신밧드가
텔레비전 앞 곤히 잠든 아버지를 부르고 있다.

 

타자에 대한 단상

 

순간포착을 하는 순간
타자의 손이 방망이에 붙어 달아난다
달리는 말처럼 고삐를 늦추지 않고 날아간다

바람을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
곤봉에 붙은 체조선수의 손가락처럼
방망이에 붙은 뭉툭한 손바닥이 날아간다
한 때 타자의 뼈에 붙은 갑각이었던 손
타자의 손은 원의 균형을 잃지 않는다

방망이를 원으로 돌리며 공에 붙기 위해
안달 났던 타자의 호흡도 날아가고 있다
퇴족하듯이 뒷걸음질 치는 선수
육체가 하나의 활시위가 되고
팽팽히 당겨진 타자의 얼굴이
늘어난 고무줄처럼 울퉁불퉁하다

뼈마디를 퉁기며 달아난 화살하나가
어지럽게 선수의 눈동자 속을 돌고 있다.

 

 

 

 

어바웃 프리다 칼로

 

매일 같은 그림을 보는 것처럼 세상엔
마음에 잘 담아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가령, 두 다리를 벌리고 누워서
하혈하는 그녀 침대 끝자락에 누워있는
그녀의 생애를 유산하고 있다.
저만치 창밖에서 뜬 해는 때때로
피같고 태아같다.
수정란을 쏟아내고
끝없는 터널 같은 세상의 혈관 속으로
칼로가 몰래 들어간다
365일 하혈하는 밤, 그림을 그리며
농도 짙은 달빛이 물감처럼 허공에 번진다
가랑이 사이로 빠져나가는 시간을 쥐고
그녀가 앞으로 고꾸라진다
홀로 저만치 굴러가는 물컹한 기억
누군가 그릇에 담긴 조그마한 씨앗을 들고나간다
그녀의 몸에서 나온 태아가 굳어간다
배를 드러낸 그녀가 몸을 떨며
탯줄을 끊고 나간 아기를 생각한다
나를 닮아 눈썹이 갈매기처럼 이어져있을까
어떤 수평선 위로 날아가고 있을까
핸리포드에 찍힌 그녀의 발자국이 흐느낀다.

병실 안 병든 아침이 먼저 일어나 창문을 연다
그녀가 그 앞에 추모비처럼 서있다.

 

인쇄소

 

인쇄소는 귀가 밝다

귓바퀴 속으로 들어가는
하루의 소리들은 전단지처럼 여기저기 뿌려지고
사내들이 이끌어 간 발자국 위로 활자들이 우수수 쏟아진다
아침마다 책 뭉치처럼 부러져있는 인쇄소에는
하루 종일 수군거리는 말싸움이 가득하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프레스가 덜컹거리면
겹겹이 쌓인 잉크통 위로 더께가 앉고
인쇄소는 지나간 시간만큼 더 무거워진다 때때로
분철하느라 동그랗게 뚫린 종이들처럼
인쇄소엔 멈추지 않는 함박눈이 내린다

돋보기를 쓴 채 구겨진 포장지처럼 잠들어 있는 주인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은 끊임없이 술렁거리고
여기저기서 맡긴 기억들로 인쇄소는 항상 분주하다
밑바닥부터 차곡차곡 쌓여지는 종이처럼
가끔 인쇄소도 통째로 이 동네의 밑바닥이 된다

새벽부터 길목엔 막 찍어낸 신문지 냄새가 나고
바람 저만치엔 박스도 뜯지 않은 소설책들이 산처럼 쌓여있다
기억을 되풀이 하는 삶이 빛으로 복사되는 아침이다

 

 

당선소감
시를 쓰는 동안 아이를 잃은 프리다 칼로처럼 아무것도 만들 수가 없었습니다. 두근대는 깊은 밤 폐광 속으로 들어가는 여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펜을 잡을 때마다 밤이 길을 이끌어오고, 바람은 집 앞에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누군가 버린 것들, 혹은 잃어버린 것들을 짊어지고 늘 어디론가 숨어 들어갔습니다. 그 자리에서 시를 썼지만, 그것 역시 헛것일 때가 많았습니다. 항상 생각했습니다. “시는 언어의 스펙트럼에 나만의 색깔로 내뿜는 아름다운 운율의 생명체 이므로 때로는 진지함으로 때로는 발랄함으로 때로는 따스함으로 때로는 날카로움으로 시가 나를 선택하게 하자, 그리고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넘자” 라고 다짐했습니다. 가끔씩 제 몸이 깊은 터널처럼 느껴져 저는 밤이면 수없이 빨려 들어갔습니다. 온 몸 전체가 현악기의 몸통처럼 수없이 울릴 때가 있었습니다. 멀리서 터져오는 메아리, 메아리 같은 것들이 밤마다 저를 일으켜 세우고 또 펜을 잡게 했습니다. 시를 쓰지 않아도 늘 어두운 밤들이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터널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늦은 저녁 골목길에 낮게 깔린 안개처럼 저는 항상 밑에서 서성거렸습니다. 끝없이 빨려 들어가는 동안, 제가 의지해온 것은 터널에서 낯선 궤도를 따라 멈칫멈칫 하던 저를 붙잡아준 펜, 한 자루였습니다. 오늘 한통의 전화로 깊은 폐광 속으로 더욱 더 밀어 넣어 주신 심사위원 분들 감사합니다. 무엇보다도 어두운 나머지 딸이 길을 잃을까 걱정하시는 부모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때로 길을 잃을 때마다 늘 제가 옳은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격려해주셨던 전상국 작가, 이윤학 시인, 시 선생님인 신동옥 시인, 윤한로 선생님, 모든 분들을 항상 기억하고 있습니다. 언제였던가 감히 시는 허락된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상처받고 버려진 것들을 아름답게 하는 것, 세상을 떠나는 것들을 잡지 못하고 가만히 서서 바라보는 것이 시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펜을 잡으면 사람들의 슬픔이 떠오릅니다. 반짝하는 것은 모두 눈물이고, 먼 하늘에서 힘주고 있는 별들에 대해서 저는 오늘 밤에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눈물을 담는 가슴이 되고 싶습니다. 몇 편의 시로 자욱한 그리움들을 몰아내기는 어렵겠지만 자만하지 않고 결코 쉬지 않겠습니다. 분발하기 위해 견고한 날개를 만들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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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회 서울디지털대학교 사이버문학상 당선작 - 성백선 ‘분합문’ 외 6편 /가작 - 유원희 ‘별을 파는 여자’ 외 4편


제 2 회 서울디지털대학교 사이버문학상이 막을 내렸다. 심사위원인 도종환 시인, 이재무 시인, 유성호 문학평론가, 길상호 시인 등은 당선작으로 성백선의 ‘분합문’ 외 6편을, 가작으로 유원희의 ‘별을 파는 여자’ 외 4편을 선정했다. 2008년 제 2 회 서울디지털대학교 사이버문학상은 응모자가 674명, 응모작품은 4000여 편에 달했다. 이는 서울권 일간지 신문의 신춘문예를 상회한 수치이다. 뜨거운 관심에 감사드린다. 당선자들에게는 소정의 상금과 상패가 수여된다. 아울러 계간 문예 ‘시작’에도 작품이 실리게 된다. 시상식은 2월 28일(목) 오후 5시 서울디지털대학교 2층 회의실에서 열린다.


당선작 - 성백선 ‘분합문’ 외 6편
가작 - 유원희 ‘별을 파는 여자’ 외 4편


심사위원장 - 도종환 시인(한국 작가회의 사무총장)
심사위원 - 이재무(시인), 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 교수), 길상호(시인)



* 당선작 - 성백선


분합문



보 기둥 위 쌓인 고요가
벽 치고 수장을 들인다
살대로 달빛무늬 낸 소목의 솜씨
칠흑에 갇혀가는 서까래 밑
둔탁한 배목이 서너 개 박히고 나면
수직을 가늠하는 다림추의 미동도 멈춰 선다
단절된 괴에 동그마니 남아
떨그럭떨그럭 파동을 견디던 등자쇠
건너편 지도리에게 여음을 흘려 보내지만
동선은 보이지 않고 온기는 멀다
속살 드러내어 내밀한 눈빛 당기던 탱탱한 거리엔
마주앉은 속내끼리 경계를 허무는 소리도
천장 긁어 샛길 내는 쥐들의 부산함도
벽채 타고 반경 좁히는 고양이 아기울음도 그쳤다
품고 놓아주기를 반복하는 간극은
언제나 짧은 망설임을 남겨
은은한 창 같은, 거칠은 벽 같은 발자욱이
상 머뭇거리는 문전
나누어졌다 싶으면 어느 결엔가 다시 합쳐져
누마루와 팔작지붕 사이 환했던 소통이
옹이 진 정적으로 무료할 즈음
설주를 에돌던 삭풍이라도 맞아들일 양
좁고 짧을지 모르는 생의 공간을
한 간 확장하듯
벽이었다가 문이기도 한 널
지금은 번쩍, 들어올려야 할 때



애어리염낭거미


누가 잎새 끝에
저토록 푸른 누각을 세웠을까
정교한 산실 들어선
우거진 수풀 한가운데
성자의 입김 가득할 것 같은 염낭엔
낙엽층을 배회하고 돌아온
성체가 몸 푸는지
부들 뿌리로부터 신음이 부화한다
산고를 둘러싼 우주의 소음들
한여름 어스름에 비껴가고
지금 막 알에서 깨어난 어린 것들은
세상으로의 탈피를 시도하느라
생별을 입에 물고 있다
뱃속 그득 비정의 즙 짜 넣으면서
아, 살아있는 것들의 살고자 함은
이토록 뼈를 깎는 일이던가
생존의 늪지대에서
천적으로 변태한 새끼들에게
제 살과 뼈 뜯어 먹히고
어미의 골육을 포식한
패륜의 바다 위
거미 피륙으로 짠 섬이 전설로 흐르다
소리 없이 가라앉는다
세상의 푸르게 눈물겨운 것
다 흘려주고
말없이 형체 없이
하늘 가신 내 어머니처럼



독살꽃


멀리 갯바위 사이로 한 사내가 보인다
나는 괭이갈매기 눈으로 그의 움직임을 앞지른다
꽃지에서 굴혈포까지
조난의 시간 밑으로 흘러든 항로가
흙모래를 털고
어깨에 찰박이는 뻘빛 그물이
촘촘한 하루치 숨을 토해내는

드문드문 난 들불의 흔적과 소나무 사이
간조를 기다리는
따개비 껍질 같은 오두막이 움푹하다
물때 맞춰 막아놓은 그의 생존이
수면을 차고 오르기를, 파닥이기를
간절하게 물은 빠져나갔건만
개펄 위 불쑥 솟은 뾰족한 독살
돌 꽃 돌꽃
'꽃만 나고 말았네유'
그의 비릿한 기다림에 나는 초저녁 붉새로 번졌다

물고기를 잡아먹고 살았던
선사 수렵시대 바닷바람이
방파제에 부딪혀 해무 속으로 사라진 뒤
삶의 편린들 짭조름히 잦아드는 포구에선
도회지 어부들이 뱃길을 닫고 있었다
근근한 그의 어족은 격랑에 휩쓸려
꾸르륵꾸르륵
해조음만 꽃 주위로 무성히 몰려다니고

나는 몸 구석구석 돋아난 돌꽃의 순을 따다가
그의 어장 가득한 물고기로 흐드러지게 피었다



아침, 모네의 정원


그곳엔
빛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가슴 부풀어오른 수련이
마알간 바람으로 머리를 빗고
부신 눈으로 첫 빛을 밟는다
밤새 태양으로부터 달려 온
맨발의 하루가 뒤따르며
보폭을 키우는 사이
투명한 채색이 시작되고
흩뿌려진 햇발 위 조금씩
드러나는 색색의 일정들은
더 선연한 제 색을 찾아갈까
갓 깨어난 버드나무 아래
그림자 숨긴 여백이
새벽 내음을 코끝에 묻힌 채
풋 정오의 계단을 살핀다
햇살들의 빼곡한 일과가
어제에 이은 연작의 색감을
연못 위에 띄우는 찰나,

아직 이른 아침이다.




갈릴레이 망원경


이미 일순간의 착시가 사라진 지 오래였어요
투명한 유리 곱게 갈아 오목한 얼굴에 썼어요
겹겹이 둘러진 포물선 띠가 벗겨져 나갔어요
알몸으로 원점에 서 있는 그대 우뚝하였어요
태양의 흑점을 찾듯 그대 심장을 더듬었어요
천체를 떠다닌 빛과 박동 소리가 몰려왔어요
가까이 반사된 자리에 홍염이 이글거렸어요
산란을 마친 낮이 밤의 깊이로 빠져들었어요
차갑고 무표정한 거리가 환히 웃고 있었어요
쌍안에서 굴절하던 그대도 고색창연하였어요
시야를 가렸던 처음 내 눈은 선입견이었어요
흐린 초점 다시 맞춰 선명한 심상 포착했어요
그대 뒤돌아서면 반대편에 거울을 세워뒀어요
때론 도구도 정직하고 부드러운 눈길이었어요
관측을 마친 나는 목성의 가니메데가 되었어요
기꺼이 그대 곁을 돌고 도는 위성으로 살았어요



바퀴


길모퉁이 담벼락에
곯아떨어진 질주가 푸석하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루하루의 간격을 조율해 주던 삶의 속도들
어느 막다른 길목에 멈춰 선 것일까
울퉁불퉁한 일상 날렵히 나르던 회전은
비포장의 순간들을 갓길에 부려놓고
생애 어디 구간쯤 정체돼 있는지
온종일 시간 헛도는 소리만 헐렁하네
언제고 든든한 바람 넣은 탄력 위
휘파람 싣고 페달 밟으면
혼미한 내일의 여정에라도
동그라미 그려가며 오를 수 있을 텐데
역주행하다가, 전력투구하다가 가뿐 숨
평평히 고르고 윤활유 주입하면서
모난 길 훌쩍 건너뛸 수도 있을 텐데
환상 속에서는 늘 가파른 언덕 다다른
바퀴가 신들린 발처럼 날아다니고
내 어제의 지체된 두 바퀴도
주어진 거리만큼은 완주하려는지
지금 막 막힌 길목을 우회하고 있네



뚜껑




오피스텔에서 내려다 본 운니동 기와집들
검은 뚜껑들이 다닥다닥 세월을 덮고 있다
뚜껑을 열면
그늘 쓰고 문명을 피해 들어앉았던
개화 덜 된 세간살이가 비춰지면서
속속들이 차있는 나직한 군상들의 내부가
햇빛에 파르라니 눈 흘길 것 같다

뚜껑 속에 잠겨 있는
벽에 걸린 아이 낙서의 표정
마당 가운데 흐르는 수도의 사계절
개집 옆 작은 화분들의 자투리 여유
담장에 널린 이불의 낮과 밤
대문에 세워둔 자전거에 감긴 거리
한 사람당 할당된 시간과 공간이 똘똘 뭉쳐져
제자리에서 굴러가고는


세월의 뭉치마다
속도 다른 흔적들이
지워질랑 말랑한 뚜껑엔 다시
리모델링된 비밀번호가 채워지고
내 뚜껑은 24시간 개방돼 있어도
모호한 채 무늬만 내고 있는데

어느 날 열린 지붕 아래
테라스가 된 발 밑에서
내 뚜껑 속을 올려다보고 손짓하는
40년 전 상고머리 계집아이가 생경한 건
낮은 곳 앞서 흐른 삶의 기복들도
덮개 안에서는 그만치
출렁거리다 넘치고 싶었나보다



* 심사평

서울디지털대학교 문예창작학부와 계간 『시작』이 주관하는 제2회 <서울디지털대학교 사이버문학상> 심사는, 674명이 응모한 가운데 풍성하게 치러졌다. 무엇보다도 우수한 작품들이 많았고, 오래 연마된 시의 행을 따라가는 일은 실로 즐거웠다. 특히 캐나다, 일본 등 국외에 거주하는 응모자들을 대하면서 심사위원들은, <서울디지털대학교 사이버문학상>이 다국적인 문화를 수용하고 사이버 공간에서의 문학 활동을 활성화시키는 데 큰 기여를 하고 있음을 공감했다. 또한 시편들의 내용과 형태는 다양한 연령과 삶의 모습을 추측케 했는데, 이를 통해 아직도 문학이 사회 전반에 녹아 있다는 희망도 얻게 되었다.

예심을 통해 올라온 응모작 가운데 심사위원들은 김강식, 김수정, 김지영, 성백선, 송하얀, 유원희, 이종숙, 현혜숙 씨(가나다 순) 등 여덟 분의 작품에 주목하였다. 완성도에 있어서 다소의 차이는 느껴졌지만, 이들의 시편들에는 모두 시적 안정과 변화를 주도해가는 힘이 내장되어 있었다. 그것은 결코 단기간의 습작으로 얻을 수 없는 힘이어서, 독자의 내면에 큰 파장을 일으킬 것이 분명했다. 심사위원들은 시의 완성도, 언어구사 능력, 구성력 등 다각적인 차원의 논의를 거친 끝에 세 명의 후보를 다시 선정하였다.

우선 김지영 씨의 작품 중에는 「모란꽃살문」이 눈에 들어왔다. 선암사 원통전의 모란꽃살문을 통해 설화 속 시간을 바라보는 눈길이 섬세하고 신선하게 다가오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뒤에 이어지는 작품들의 편차가 심해 아깝게도 최종 논의에서는 제외되고 말았다. 이에 따라 마지막으로 논의된 후보는 성백선, 유원희 씨였다. 이 중 유원희 씨의 작품은 다양한 삶의 모습을 진솔하게 시로 감싸 안는 진정성이 높이 평가되었으나 언어 반복, 시적 반전의 미약함 등이 지적되었다. 이에 비해 성백선 씨의 작품은 사물을 바라보는 인식의 깊이가 남달랐고, 내용과 형태의 완결성에도 무리가 없었다. 특히 「애어리염낭거미」는 거미의 생태를 어머니의 삶으로 반전시키는 시적 역량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그리하여 심사위원들은 논의를 거듭한 끝에 유원희 씨의 작품을 가작으로, 성백선 씨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 합의하였다.
당선되지 않은 분들에게는 이번 응모가 더욱 정진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기를 바라고, 당선자에게는 거듭 축하와 격려의 말씀을 드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두 번째 당선자를 낸 <서울디지털대학교 사이버문학상>이 해를 거듭할수록 더 큰 시인의 산실이 되길 기대한다.

출처 : 파도가 부는 집
글쓴이 : 찬밥 원글보기
메모 :
 
별을 파는 여자

남구로역에 발 뻗어 먹고사는 삼성식품, 여자는
초저녁이면 문을 내리고
친정으로 별의 씨앗을 구하러 간다
하늘밭으로 나서는 여자의 손엔 망태가 없다
별의 씨앗을 담아오는 것은 손도, 호주머니도 아닌
언제부턴가 불쑥 뛰어나온 그녀의 두꺼운 등이다
별은 진열하지 않고 등에서 하나씩 꺼내 판다
아침이면 가게 앞으로 쪼르륵 쪼르륵 발소리가 몰려든다
직업소개소 봉고차에 실려 가지 못한 사내들이
밤새 염불로 굴렸던 시커먼 한숨을 뱉어 낸다
여자는 별 하나씩을 사내의 가슴밭에 밀어 넣는다
별 키우는 법은, 입꼬리를 높이 올려 설명해주고
혹시 아프거나 칭얼거리면
반드시 진찰 받으러 오라는 눈짓도 잊지 않는다
물 건너에 탯줄을 둔 검붉은 손도
커피 자판기에서 아침을 들이키는 지팡이도
여자가 등에서 꺼내준 별씨 하나씩을 담아 간다
가게 앞엔 별계단이 있다
그 별계단에 올라 본 사람만이
여자의 키가 허리쯤에 있다는 것을 안다
그녀의 밥그릇은 작다
별씨를 가득 싣기엔 배보다 등이 불러야한다
여자가 TV를 보면서 사발면을 들이킨다
가을 가뭄에 말라버린 별들이 브라운관에서 우르르 쏟아진다
여자는 자꾸 블라우스 속으로 손을 집어넣는다

  1-day

동네 안경점에서 구입한 1-day 콘텍트렌즈, 아침마다 비누로 손을 씻고 렌즈 속에 내 몸을 집어넣는다 통통한 허벅지 한쪽은 남겨둔다 아차하다 쓸개 빠진 여자, 간이 배 밖에서 펄떡거린 여자는 맵시가 없다 잘못 잠근 블라우스 단추는 그대로 둔다 하루쯤 옆으로 걸어도 좋을 것 같다 구두는 광을 내야한다 가끔 태양이 트림을 하면 1.0 시력으로는 받아낼 수가 없다 에스라인 몸매로 집을 나서 첫 번째로 만난 남자에게 청혼을 한다 아침 결혼식 주례는 신호등이 딱이다 아프리카 여자들처럼 배꼽에 피어싱을 한다 하루 세 번 결혼식에 그 정도의 멋은 기본이다 내 배꼽에 입을 맞춘 남자들은 쇠로 만든 콩깍지를 쉬운다 시계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기웃 할 때 중혼 준비를 한다 이번엔 젖꼭지에 피어싱을 한 남자를 택해 혓바닥으로 마빈 게이* 노래를 연주한다 되돌림표가 없는 악보에 남자를 태운다 세 번째는 대머리 남자가 좋다 이마에 누드 문신을 그린다 두 명의 남편들이 축전을 보내온다 그래도 걱정 없다 뚱뚱해도 자고나면 또 처녀, 내일은 내일의 렌즈가 필요하닌까

*마빈 게이 - 미국 흑인 R&B 가수, 음악프로듀서 1984년 45세 나이로 사망

담벼락 병동

대학병원 담벼락이 철거되고 있다
넝쿨장미의 인대들도 톱니바퀴에 몸을 내주고 있다
병실 유리창에서 담을 넘봤던 눈빛들이
동네 밖으로 산책을 시작한다
여름내 방문객들이 흘려준
보송보송한 사연들을 취재한 은행나무가
노란 쪽지를 병실로 휙휙 날린다
양손 보따리에 끌려 다닌 발걸음들
무너진 담벼락에 눈물과 한숨을 맡겨 놓고
억지웃음으로 병실로 향한다
뒤뚱거리는 발자국에서 배냇냄새가 기어 나오고
머리를 붕대로 감싼 휠체어 노인은
길 건너 죽집에서 햇볕을 끌어다 쓴다
의족으로 키를 맞춘 목발 아이는
대학꽃집 화분에 제 발목을 심는다
구로시장 앉은뱅이 의자들도
골다공증 치료를 받아 또 무거운 하루를 받아낸다
세상의 가위질에 긁힌 골목길들이 회진을 기다리는 동안
온 동네가 회복실로 옮겨간다

  작업복 이력서

드르륵 드르륵 귀를 세운 엄마의 재봉틀이
모락모락 솥뚜껑을 넘어갑니다
새벽 등성이를 넘어갑니다
드르렁 드르렁 아버지 지난 발자국들도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폅니다
누비처럼 앉아있는 부스럼딱지 위로
데굴데굴 실밥 타고 굴러갑니다
골목길을 짊어졌던 갈지자걸음도 끌려 와
꽁꽁 실밥 속에 묶여집니다
너털웃음에 덧댄 침 자국이 보일까봐
재봉틀 바퀴가 너스레를 떱니다
아버지 얼굴에 웃음소리가 풀리지 않도록
꼭꼭 실밥을 동여맵니다
흐린 손금을 풀어 마지막 실밥을 동여맵니다
아버지 키가 한 뼘이나 자랐습니다

구로동엔 펭귄이 산다

구로2동 우체국 계단 입구를 지키는 펭귄 우편함
앞 집 구두 수선 노인과 수다를 떨다
가끔 행인이 밀어 넣은 편지를 받아먹고
관할지역과 타 지역으로 나눠진 두 입을 옴질옴질 거린다
아침이면 우편함에서 뒤뚱뒤뚱 뛰쳐나와
저녁내 남극에서 보내온 우편물을 스케이트에 싣고
슬로우 슬로우 퀵퀵 오른발, 왼발을 동네 이불속으로 밀어 넣는다
이층집 세발 할머니네는 노란 스쿠터를
편식하는 경식에겐 크릴새우를
33번지 노처녀는 총각을
아래층 새댁은 아파트당첨권을
통통한 은아에겐 비키니 수영대회 포스터를 배달하면
구로동 한낮에 오로라가 떠오른다
구로디지털단지역엔 온갖 펭귄들이 돌아다닌다
가끔은 누군가에게 보내고 싶은
집안의 펭귄들이
우편번호부를 뒤적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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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다음 자연사박물관

등 푸른 추억

시 : 정상조

여기가 어딘지 몰라, 눈만 휘둥그레져 있는 고등어. 쭈그리고 앉아 있는 어머니의 뱃살처럼 켜켜이 쌓인 고등어는 시장바닥에 피어오르는 한기와 사람들의 흥정 소리에 대가리 없이도 그 사이를 헤엄쳐 나갔다. 대야에 남은 고등어는 그래도 대가리는 갖은 채, 밥상 위에서 지 몸 타는 줄 모르고 백열등만 응시했다. ‘또 고등어야’ 등 푸른 연기에 침묵은 소금처럼 스며들었다. 침묵의 수평선이 눈을 뜨자, 고등어는 아이의 입을 헤엄쳐 갔다. 목구멍에 잔가시가 걸려 아파하는 울음소리에 어머니는 맨밥을 밀어 넣으셨다. 고등어는 그 많은 가시를 삼키고도 아프지 않았을까. 아이가 남기고 간 상처들의 잔해를 어머니는 도둑고양이처럼 맨밥과 함께 목구멍으로 넘기셨다. 밤마다 파도치는 어머니의 뱃속에 고등어는 커가고 있었다. 다음 해, 간인지 쓸개인지 알 수 없을 커다란 어항이 어머니 몸속에서 나왔다. 그 곳에 고등어는 없었다. 다만 대형 고등어가 살았다는 붉은 흔적뿐. 퇴원 후에도 어머니는 뱃속에 고등어를 키우신다. 가끔, 내뿜는 담배연기 사이로 헤엄치는 등 푸른 추억이 떠오르곤 한다

<서울디지털대학교 제1회 사이버문학상 당선 가작>


율:Enigma - Almost Full Moon

출처 : 김기홍시인의 꿈과 희망을 찾아서
글쓴이 : 김기홍 원글보기
메모 :

 

 

 
줄장미 붉은 손바닥

초여름 아침 등촌동 자동차공업사 옆 담벼락을 지나는데 줄장미 붉은 가시가 홑겹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출근길 발걸음이 함부로 뻗친 가시에 걸려 잠시 허둥거렸다. 제 毒手에 찔린 줄장미 꽃모가지들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옷깃을 움켜 쥔 줄장미 독 오른 손바닥들이 옛 애인을 붙잡고 늘어지던 내 넝쿨손 같아 도망치듯 전철역까지 줄행랑을 쳤다. 가슴을 쓸어내리는 손바닥이 십년 전처럼 까칠했다. 젠장, 외로움에 긁히고 그리움에 긁히는 게 사랑이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니는 사람들은 조금씩 긁힌 손바닥을 갖고 있다. 사람들은 쉽사리 상처를 보여주지 않는다. 악수가 따듯한 건 상처가 상처를 어루만져주기 때문이다. 가슴을 쓸어내리던 손바닥을 펴면 아직도 털어지지 않는 붉은 가시들, 종일 손바닥이 따가웠다. 태양의 모가지가 뭉툭뭉툭 지고 있었다.

카페 라 캄파넬라

큐빅이 박힌 하이힐을 신고 표범무늬 미니스커트에 엉덩이를 걸친 女子 살갗이 슬쩍 보이는 반라의 시스루를 두르고 알 듯 모를 듯 미소를 흘리며 서 있는 女子 얇고 가느다란 시선만 던져도 울퉁불퉁 심장이 뜨거운 사내들이 침 삼키며 눈독을 들이는 女子 뒤로 다가가 허리를 덥석 안아 버릴까 얇은 시스루를 확 벗겨 버릴까 이런, 그 女子의 입술에서 따듯한 영혼이 실핏줄처럼 퍼져 나가게 돌려 버릴까 젠장, 숨 막히게 맑은 투명한 에스라인 허리를 손가락 끝으로 간질여볼까 혀끝으로 꼭지가 짓무르도록 핥아 볼까 아아, 女子의 입 속으로 바람을 불어넣는다면 배가 부풀어 오를까 아니면 스커트가 벌렁거릴까 사내들이 동공이 커진 눈동자를 번뜩이며 다가온다 이런, 스커트 밑으로 밀고 들어오는 이 부드러움은 무엇인가 이봐, 눈 큰 겁쟁이, 축제 준비는 다 됐니? 자, 그럼 실컷 만져 봐, 뇌쇄적인 女子의 몸매, 이런 와인 잔은 아마 처음일 걸?

늦겨울

느그들은 나 죽기 전에 시집들 안 갈래 요새 아그들은 참말로 애인들도 잘 사귀드만 느그들은 여태 뭣했냐 저 시랭이 마을 사는 끝자는 아들을 셋이나 낳고도 그 머이메와 끝내뿔고 딴 서방을 꿰차고서 딸 하나를 낳아서 알콩달콩 잘도 키우고 살드그만 느그들은 여태 뭣했냐 넘들은 시방 손주를 장개보낸다고 청첩장을 뿌리고 난린디 나는 딸 셋 중 하나도 못 치워서 복장이 터져뿔것다 참말로, 근디 시방 어디여, 여즉 사무실이라고, 그놈에 사무실은 매미맹키로 붙어서 끄륵끄륵 일만 해싸면 무슨 똑바라진 사내자식 하나 엮어준다디 인제 그만 일을 끝내뿔고 싸게싸게 나와서 술 한 잔 먹어제끼고 맘에 든 사내가 있거던 거그서 그냥 모른척 자빠져쁘러 지도 사람인디 나 몰라라 하것냐 뽀뽀는 안 허더라도 업어다 이불에는 눕히지 않겄냐 그렇게 갈켜줘싸도 그노메 좋은 머리는 어따가 쓰는겨 초등핵교도 안 댕긴 명옥이도 남재 만나서 잘만 살더그만 대학까정 나온 느그들은 여태 뭣했냐 잔소리라 생각허들 말고 퍼득 정신차려 시간이 없당께 고놈이 고놈잉께 인제 고만 고르고 화딱 소매를 끌던지 바지가랑이를 잡아댕기든지 하랑께 술 몽땅 묵고 자빠져쁘러 고것이 최고여 그라고 나중 지가 안 그러고 고놈의 술땀시 그랗게 되야부렀서야 하면 그만이랑께

땡? 법정

육법전서 너머로 보이는 거리에는 실어증에 걸린 사람들로 북적인다. 한 장 남은 달력 위로 다급하게 달려드는 발자국 밑으로 마른 햇볕이 끼어든다. 오후 네 시의 아찔한 구멍 속으로 비둘기들이 들락거린다. 법원입구 플라스틱 화분에 담긴 툰드라꽃배추가 미색의 소환장을 던진다. 덜컹 내려앉는 사람들의 놀란 가슴을 짓누르는 판결문 낭독소리. 판결문은 양자 누구에게도 위로가 되지 못한다. 돌아서는 고소인의 뒷모습과 구속된 피고인의 뒷모습은 동전의 양면처럼 닮아 있다. 완벽한 증거들로 가득 찬 네모난 형사공판조서 속에서 각진 얼굴들이 빠져나오려고 아우성이다. 법원사무실에서 바라본 풍경 속에서 태극기는 여전히 높이높이 바람에 펄럭인다.

네모난 겨울 - 법원사무실에서 바라본 풍경

초여름 아침 등촌동 자동차공업사 옆 담벼락을 지나는데 줄장미 붉은 가시가 홑겹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출근길 발걸음이 함부로 뻗친 가시에 걸려 잠시 허둥거렸다. 제 毒手에 찔린 줄장미 꽃모가지들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옷깃을 움켜 쥔 줄장미 독 오른 손바닥들이 옛 애인을 붙잡고 늘어지던 내 넝쿨손 같아 도망치듯 전철역까지 줄행랑을 쳤다. 가슴을 쓸어내리는 손바닥이 십년 전처럼 까칠했다. 젠장, 외로움에 긁히고 그리움에 긁히는 게 사랑이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니는 사람들은 조금씩 긁힌 손바닥을 갖고 있다. 사람들은 쉽사리 상처를 보여주지 않는다. 악수가 따듯한 건 상처가 상처를 어루만져주기 때문이다. 가슴을 쓸어내리던 손바닥을 펴면 아직도 털어지지 않는 붉은 가시들, 종일 손바닥이 따가웠다. 태양의 모가지가 뭉툭뭉툭 지고 있었다.

당선소감
새삼스럽게 가슴을 후벼 파기 시작했다. 이젠 잊었다고 생각했던 기억들이 일시에 떠올랐다. 독한 가시에 찔리면서도 시를 떠나보내지 못했던 건 별빛에 어깨를 기대며 시를 읽어주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붉게 꿈틀거렸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짝사랑만 하던 내게 비로소 따듯한 악수가 전해졌다. 정말 다행이다. 이젠 내 붉은 손바닥에도 새순이 돋아날 것이다. 새순에서 푸른 미소가 번지고, 뭉툭뭉툭 지던 태양의 모가지도 하늘로 떠올라 빛나는 여름 속에서 자라날 것이다. 꿈틀거리고 요동치며 오래도록 선연한 기운을 풀어낼 것이다. 가느다란 넝쿨로도 세상의 담벼락을 온통 휘감는 줄장미가 될 것이다.
영국의 낭만파 시인 셸리에 의하면 ‘시는 영원한 진실 속에 표현된 삶의 이미지’ 라고 한다. 앞으로 나는 시적 진실이 표현된 삶의 이미지를 묘사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작품을 뽑아주신 서울디지털대학교 여러 선생님들께 감사드리며, 날로 중요성을 더해가는 지식정보사회에서 서울디지털대학교의 위상이 더욱 더 빛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가작

 

 

마녀


4층 금강극장에 한 마녀가 살았다

그녀의 이름은 순자

마법에 빠진 동네 총각들은

TV에서 볼 수 있는 영화들을 극장에서 봤다

사내들이 계단을 오를 때마다 받쳤던

순정 한 방울, 주머니 속 먼지 두 스푼에 속눈썹 말아 올라간

그녀는 빗자루를 타고 종횡무진 날아다니며

사내들의 마음을 쓸어 담았다

마녀가 황금 빗자루를 쫓아

스크린 속으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자

탈색된 머리카락을 엮던 영식이 형은

몇 가닥 남지 않은 머리털을 부여잡고 울었다

장대비가 쏟아지던 날

꼬여버린 빗질 따라 마녀사냥꾼들이 동네로 들어왔다

붉은 부적딱지에 집이 불타오르자

마녀의 어머니는 불을 끄기 위해 애를 썼지만

도착한 것은 구급차였다

이듬 해 병실에 마귀할멈이 나타났다

그녀의 얼굴에는 수면제 4알, 한숨 세 스푼이 만들어낸

층층 계단이 놓여 있었다 금강극장 계단보다 높았다

그녀의 손에는 회한(悔恨)에 젖은 대걸레가 쥐여져 있었다

스크린의 턱을 넘다가 남자 발에 걸려

빗자루는 걸레가 되었다고 했다

부적 딱지를 많이 삼켜

굽어진 그림자 얼룩으로 가득 찬 병실.

그녀는 오늘도 잘 닦기지 않는 얼룩을 어루만지고 있다

젖은 걸레가 마르는 날,

나는 순자에게 소박한 빗자루를 선물하고 싶다



단단한 붕어빵


좁아터진 붕어빵틀 속에

밀가루 반죽처럼 길게 늘인 콧물 단

꼬마 하나 이리저리 뛰어 다녔죠

코가 막혀 숨을 몰아쉬니

한숨쉬면 복달아난다는 말에 꼬마는 숨을 참으며 살았죠

넘실거리는 소주에 그날 번 일당 띄우고

큰소리로 항해하신 아빠 이름은 마도로스 김

밤마다 암고양이 울음소리가 꼬마 귓등을 간지럼 태우면

어김없이 다음날에는 얼어버린 붕어빵 몇 개 놓였지요

아가미까지 말라버린 붕어빵을 꼬마는 먹지 않았어요

킁킁거리는 소리에 소주 뚜껑으로

꼬마 주머니는 아빠 술배처럼 불룩해졌죠

꼬마는 붉은 해가 뜨는 밤보다

잠들 무렵에

암고양이 울음소리가 안 들릴까 걱정했죠

울음소리 들리지 않으면 아침이 오지 않았을라나,


더 이상 탈 배가 없어 대낮부터 들어온 아빠가

엄마 가슴에 술 붓자, 푸른곰팡이 찍히는 소리 들리네요

꼬마는 답답해 아궁이 뒤에서 몰래 한숨을 내쉬자

푸른곰팡이 집 전체에 퍼져, 꼬마 몸까지 피워 오르네요

꼬마는 101마리 달마시안 그린다고 수많은 푸른 점에

개 그림 그리는데 한마리가 부족하네요

집나간 개새끼, ‘멍멍’ 동네방네 짖어대는 소리가 정겹네요

그 날 밤 암고양이 울음소리 사라져 꼬마는 무서웠어요

한숨 소리에 암고양이 제 새끼 놔두고 달아난 줄 안

꼬마는 한숨을 감추기 위해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어요

마을 어귀에서 담배를 피우며 꼬마는 붕어빵을 굽네요

암고양이가 먹어본 건 단단한 붕어빵이라

후후 불어가면서요



최후의 만찬


맨주먹으로 세상을 주무르겠다고 하던 시절

공장 앞 부동산 화투판에서 공갈빵을 맛 본 아버지는

도너츠 구멍으로 보이는 세상이 작아보였다

도너츠에 이스트를 넣으신 아버지

부풀다 부풀다 터져버린 그 날,

도너츠는 설탕 옷 대신

붉은 차압딱지로 포장되어 나왔다

그 해 공장은 붉은 시럽에 빠져 익사했다

아버지는 직원들과 최후의 만찬을 가지기 위해

도너츠 구멍처럼 작아져 버린 방에

직원들은 서로 부둥켜안은 채 둥글게 앉았다

반죽은 여자가슴 주무르듯 해야 한다는 김씨 아저씨

세상 모든 것은 구멍 없이는 살수 없다고 소리치던 최씨 아저씨

모두들 채울 수 없는 목구멍에 술잔을 부었다

술에 불어버린 방에서는 한숨만이 여기저기서 피어올랐다

아버지는 도너츠가 불던 휘파람소리가 듣고 싶어 했지만

더 이상 만들 손이 없어 입으로 도너츠를 만들었다

집안 가득 흰 도너츠는 우주선처럼 날아오르며

매캐한 설탕 가루를 집안 가득 뿌렸다

긴 한숨을 타고 우주선이 내 머리 위로 착륙하려 하자,

아버지는 우주선을 향해 재떨이를 날리셨다

휭 휭 날아오르다 내 이마밖에 닿지 못한 무능함에

더욱 커진 우주선이

시럽처럼 붉어져가는 방을 졸라매자,

사람들은 울음 섞인 휘파람을 내쉬었다



면도


무딘 주름살 꺼내놓은 채

이젠 날도 서지 않은 면도기로

사내는 면도를 해본다

칼날 사이에 켜켜이 쌓인

사내의 모진 인생을 면도기는 안고 살았다

탁탁 털어내지만,

사내의 매끄러운 인생에 잘려나간

아버지의 두개의 손가락만이 세면대 위에 떨어진다

턱 주위에 거품을 바르자, 거울에 아버지 얼굴 보인다

제 숨 다 쉰 거품들

‘지 애비 닮아가네’ 소리에 사라지고

욕실에 던져진 구멍 난 양말에서

아버지 배꼼 얼굴을 내민다

무딘 면도날에 베인 상처 틈으로 흐르는

시간은 뚝 뚝 끊어진다

상처를 막자, 사내의 그림자에서 걸어 나오는 아버지

무딘 칼날로 그림자를 깎으려는 사내는

깎기지 않자 면도기를 버린다

혼자 면도를 할 수 있는 사내에게

아버지는 일회용이었다

팽팽한 면도기로 난도질을 해봐도 떨어지지 않는 그림자

불을 끄자

사내가 없고 아버지도 없다

섞이지 못한 채 고여 있는 침묵뿐.



숨바꼭질


달빛 속으로 적막마저 숨은 밤

달동네에서 숨바꼭질이 시작된다

도둑고양이가 품고 있던 바람은

술래의 주먹 속에서 비명을 지른다

술래는 무너진 담벼락 따라 숨은 사람을 찾아 나선다


처음으로 잡혀 나온 사람은 ‘늘봄상회’할아버지

달동네에 뿌리내린 수염을 술래는 송두리째 뽑아간다

폐지를 덮고 자던 박스아줌마는

식어버린 아궁이에 숨어있다, 연탄집게에 엉켜 나온다

일찌감치 몇 푼의 보상금을 받고

숨바꼭질을 끝내는 사람들이 더러 나타난다

달빛 파편이 시퍼렇게 빛난 집에는

아버지가 버리고 간 소주병에 갇힌 채

숨어있는 남매 하나 깨져 나온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수묵화를 그렸던 집에

아무개 할아버지가 주검이 된 채 실려 나온다

모두 발견됐지만 끝끝내 한 소녀가 발견되지 않았다

숨바꼭질의 주도권은 술래에게 있으리라.

술래는 단단한 이빨을 드러내며 한 입 한 입 달을 집어 삼킨다

게걸스럽게 씹어대던 빛나는 잇몸에 흘러내린 핏줄기는

도둑고양이일까

이빨 틈에서 떨어져나간 이름표가

신문 하단 미아 찾기에 얼굴 없이 내려앉는다


달빛 찢어

마디마디에 붙인 대숲에서는

못 찾겠다, 꾀꼬리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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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경북 경주

제 5회 동서커피문학상 시 부문 금상 수상
제 22회 근로자예술제 문학부문 대상 수상

2002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2003년 방송대 문학상 시 당선
2004년 계간지<시작> 신인상
부산대학교 사회교육원 소설창작과 수료
한국 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
200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사라진 입들>2007 천년의시작


관계

 

이가 꽉 물린 식용유 병 하나가 있다 치자

뚜껑과 몸체는 온 힘을 다해

내용물을 보호했고

병 속의 어린것들은 행복했다

시간은 모든 물질에 틈을 벌린다

시간의 집요함이란

빛나는 다이어몬드에도 흠집을 내지 않던가

몸체와 뚜껑의 사이가 점점 벌어지자

서로의 합의하에

귀찮아진 내용물을 쏟아냈다

어딘지도 모르고 끌려나온 것들은

운 좋게 다른 병으로 옮겨지기도 했지만

프라이팬에서 뜨거운 세상을 맛본다

홀가분해 진 뚜껑은 벌써 보이지 않았다

굴러서라도 떠나는 게 뚜껑의 근성이다

무엇을 채워도 든든해지지 않는 빈 통은

집안이 떠나가도록 점점 시끄러워졌다

 

다음 정류장은 주식회사 기린

작업복을 입은 사내들이 식은 식빵처럼 웅크리고 앉은
그 정류장 뒤쪽 배경은 늘 맛이 바뀌지 않는 단팥빵 같았네

낮게 엎드린 지붕 위로 따뜻한 연기가 몽글몽글
뜯어먹기 좋도록 몸을 부풀리고 붉은 굴뚝들은 하나같이 작달막했네

공장 담벼락 밑으로 숨죽여 지나가던 늙은 완행열차가
황급히 기적을 올리며 달아나던
적색 식용색소가 첨가된 석양이 가끔 묽어져 있던 곳

잔업시간이 길어졌거나 퇴근 버스를 놓친 사내들이
군데군데 곰팡이 핀 얼굴을 가슴에 묻고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는 눅눅한 시간
산다는 게 갓 구워낸 비스킷처럼 바삭거리지는 않았네

구수한 바게트를 대형오븐에 수천 번을 구워냈을 숙련공도
제 생의 온도조절에 실패해 속을 까맣게 태우던
그때를 떠올리며 빈 빵 봉지처럼 웃고 있었네

옛날의 그 맛이 아닌 건빵처럼 쓸쓸한 저녁이
어김없이 정차했다가 출발하는 다음 정류장은 주식회사 기린이었네


 

삼나무 떼 

한때 모든 길들은 흘러간다고 생각했다
삼나무 떼들이 떠나려는 길의 양켠을 붙들고 있었다
뜬금없이 머리채 잡힌 삼나무 사이로
바람의 일행들이 절뚝거리며 지나갔다
술 취한 아버지가 삼나무 옆구리에 자전거를 박았다
큰언니가 가방을 꾸려 객지로 떠나던 날
내 안에서 우는 마른 바람소리를 들었다
흔들고 있던 손바닥이 삼나무 잎처럼 버석거렸다
떼를 지어 막아도 잡을 수 없는 게 있었다
그것은 모두 한때라고
나는 우두커니 서서 흘러가는 것들을 지켜보았다
삼나무들은 그림자를 이곳에서 저곳으로
키를 줄였다 늘이면서 제 외로움을 견디고 있었다
바람이 몹시 불던 날 소식 없던 작은언니 꿈을 꾸었다
삼나무는 밤새 한 뼘이나 키를 더 키웠다
세상의 바람이 다 불어간 다음에는
곤두세우고 있던 검은 머리채를
삼나무는 어디로 둘 건지 궁금했다
하루에 두 번 완행버스가 지나가면
변함없이 온몸을 일으켜 달려가는 것은 흙먼지뿐이었다
흘러간 것들은 망가져 돌아오거나 아예 오지 않았다
늘 떠나기만 하던 길들도 가끔 다리쉼을 했다
그때마다 삼나무 떼들은
평생을 키워온 짙은 그늘을 말없이 내려주었다


 

산낙지

 

온몸이 동강난 낙지 한마리

횟집 접시 위에서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꿈틀거린다

몇몇 토막난 육체들은

뻘 속으로 몸을 숨기던 버릇이 남아

잠시 밑으로 기어들어 보지만

토막난 기억들은 수습되지 않고

잘려진 순간들이 서로를 밀어낸다

제각기 다른 부위로 투쟁하며

다시 한몸으로 살아보자던 절박한 약속

끊임없이 미끌거리며 젓가락을 빠져나온다

악착같이 입천장에 들러붙어

버팅기는 생의 집요함

이젠 아무것도 빨아들일 수 없는

흡반이 슬픔으로 벌름댄다

접시 위에서 외롭게 저항 할

낙지의 정신을 아는

갯벌 위의 수많은 구멍들은

애써 눈물을 참는 듯

따가운 눈까풀을 실룩거린다


연막에 홀리다

 

유혹은 늘 그랬다
섬광처럼, 벼락처럼,
동네를 뒤흔드는 천둥을 몰고
뿌연 안개를 방사했다
놓칠세라
짝짝이 신발을 꿰신고 허둥지둥
따라 붙인 소독차는
이유를 묻지 않고
하얀 자루 하나씩을 펑펑 던져주었다
터지기 직전까지 부푼
희망을 담기위해
나는 주둥이가 넓고 가벼운 자루가 필요했지
난생 처음 큰길을 건너왔고
오리무중의 사거리를 지나면서
아버지의 껌벅이던 순한 눈을 잊었다
들이마신 연기로 헐떡헐떡 울음을 만들었다
너에게 이르는 길은 멀었고
獨走는 외로웠다
보이지 않는 것을 애써 보려고
나는 서둘러 연막 속에 숨었나
발바닥이 굳은살로 딱딱해질 때까지
아무도 없는 선명한 이곳에 닿기까지
내가 한 일은
고작 빈 자루 몇 개 턴 일밖에 없으니

 

2006 현대시학 2월호

 

겨울 과메기

 

바람을 무던히도 되받아치며

너는 그렇게 견디고 있었다.

단련된 맷집으로도 견딜 수 없는 것은

추억이 사라지는 일,

마른 아가미 속에 감추어둔 언약

바람 속에 뱉어내고

내장까지 훑어낸 뱃가죽에

행여 한 점 애간장이 묻어있다 해도

이젠 덮어두자

온 몸에 하얗게 소금 꽃 핀다

붙잡아 갈 걸 뻔히 알면서도

하얀 손가락 흘리던 파도

아픈 듯 뒤돌아보며

가늘게 떨며 따라오던 구룡포 눈썹 달

줄에 묶인 과메기처럼 매운 바람을 헤엄쳐

스스로 깊은 맛을 품을 때까지

혹한의 중심부로 나를 밀어넣어야 했던 그해 겨울

진눈깨비 뿌려대는 국도를 따라오며

나는 뜻하지 않게 너와의 약속을 깨던 적이 있었다

 

새벽 강구항

 

강구항에는 그날 따라 해가 뜨지 않았다
골목 안에 숨어 있던 겨울 바람만이
받침 떨어진 여인숙 간판을 할퀴며 지나갔고
그때마다 낡은 간판 불은 정신을 놓아버렸다
강구항의 불빛은 언제나 아름다웠다
그것은 내가 먼 곳에서만 보았기 때문이다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는 항구에는
장기 숙박하고 있는 눅눅한 바람만이
여인숙 창문을 들락거렸고
털실 뭉치같은 안개에서도 비린내가 났다
커다란 전구를 매단 통발선 한 척이
색색의 깃발을 꽂고 항구로 들어왔다
잠을 못 잔 선주의 눈알만 붉어져 있었고
해는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내 삶을 건져보기 위해
먼 바다에 나가 통발 한번 힘껏 던져두지 못했다
이곳에 와서도, 강해지거나 무디어지지 않고
몸을 녹이려고 낯선 방에 들어섰다
형광등 불빛이 빤히 내 감정을 들여다본다
접혀 있던 군용 담요를 펼치자
젊음을 탕진해버린 노름꾼 같은 야윈 화투짝들이
아직 냉기 돌고 있는 내 삶의 웃목으로 후두둑 떨어진다
밖으로 나가자 어둠이 물러선 자리에 늙은 선주가 서있고
주름이 깊게 패인 그가 빈배로 돌아왔다며
묻지도 않은 말에 스스로 대답했다
나는 침묵에 길들여진 넙치처럼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멀찌감치 쭈그리고 앉아 아침해를 기다렸다

 

마지막 봄날에 대한 변명

 

낯익은 집들이 서 있던 자리에

새로운 길이 뚫리고, 누군가 가꾸어 둔

열무밭의 어린 풋것들만

까치발을 들고 봄볕을 쬐고 있다

지붕은 두터운 먼지를 눌러 쓰고

지붕아래 사는 사람들은

이제 서로의 안부조차 묻지 않았다

떠난 자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이유를 알고있는

오래된 우물만 스스로 제 수위를 줄여 나갔다

붉은 페인트로 철거 날짜가 적힌

금간 담벼락으로 메마른 슬픔이 타고 오르면

기억의 일부가 빠져 나가버린 이 골목에는

먼지 앉은 저녁 햇살이 낮게 지나간다

넓혀진 길의 폭만큼

삶의 자리를 양보해 주었지만

포크레인은 무르익기 시작한 봄을

몇 시간만에 잘게 부수어 버렸다

지붕 위에 혼자 남아있던 검은 얼굴의 폐타이어가

돌아오지 못할 시간들을 공연히 헛 돌리고

타워 크레인에 걸려있던 햇살이

누구의 집이었던

쓸쓸한 마당 한 귀퉁이에 툭 떨어지면

윗채가 뜯긴 자리에

무성한 푸성귀처럼 어둠이 자라나고

등뒤에서는 해가 지는지

신도시에 서있는

건물 유리창의 눈시울이 붉어지고 있었다

 

2002 경남일도 신춘문예 당선작

 

밥상 위의 명태 한 마리

 

그는 침침한 백열등 밑에서 저녁을 먹는다

굳어버린 혓바닥으로

감지할 수 있는 것은 죽음뿐이다

밥상이 곤두박질 칠 때 마다

늙은 아내는 깨진 것들을 천천히 쓸어 모았다

그를 지탱하던 의식들은

이빨 나간 그릇처럼 쓰레기 통에 처박히고

치욕은 아내의 손톱 밑에 파고 든 양념찌꺼기 같았다

한바탕 울분 뒤에

몰아쳐 오는 적요는 언제나 쓸쓸하다

그는 잘 씹히지 않는 명태를 우물거리며

바다 속의 깊은 적막을 우려낸다

하루를 견뎌내기 위해서는

명태 한 마리의 온전한 고독이 필요할테지

관자놀이의 힘줄이 불끈 일어선다

내 영혼은 얼마나 더 능멸당해야 잠들 수 있나

꿈에서 조차 그는 말을 더듬는다

그는 마른 명태처럼 딱딱해진 생각들

탕탕 두둘겨

북북 찢어 놓고 싶었다

환멸에서 생비린내가 났다

백양나무가 바람든 뼈를 끌고 방안으로 들어 왔다

누런 이파리들의 밭은 기침에서 튀어나오는

죽음의 파편들

그는 온몸에 어둠을 퍼담고 고즈넉하게 저물어 간다

처마 밑의 마른 명태는

먼지를 한겹 두른 후 하루 더 희망을 품기로 했다

 

2004 제3회 계간 <시작> 신인상 당선작


단단한 뼈

 

실종된 지 일년 만에 그는 발견되었다 죽음을 떠난 흰 뼈들은 형태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무슨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독극물이 들어 있던 빈 병에는 바람이 울었다 싸이렌을 울리며 달려온 경찰차가 사내의 유골을 에워싸고 마지막 울음과 비틀어진 웃음을 분리하지 않고 수거했다 비닐봉투 속에 들어간 증거들은 무뇌아처럼 웃었다 접근금지를 알리는 노란 테이프 안에는 그의 단단한 뼈들이 힘센 자석처럼 오물거리는 벌레들을 잔뜩 붙여놓고 굳게 침묵하고 있었다

 

2005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민박집에 세워진 과녁

 

눈 그친 민박집으로

하얀 입김을 불며

파도와 갈매기가 맨 처음 찾아왔다

그 집의 담벼락은 파도가 칠 때마다

오래된 틀니처럼 흔들거렸다

화장실로 가는 좁다란 통로에는

널반지로 만든 과녁이 세워져 있고

칠이 벗겨진 숫자들은 원판안에 멈춰 있었다

여름 한철 동안 피서객들이

인형이나 담배에 배팅하며 활을 당겼을

화살과 활이 떠난 과녁은

바람이 들락거리는 구멍들을 안고 혼자 서 있다

미닫이 사이로 파도의 시린 발목이 보인다

비닐장판 위에 지져진 담배자국은

검은 몽돌처럼 침묵했고

그쳤던 눈발이 다시 사나워졌다

나는 내 안에 조준된 화살을 힘껏 쏘았다

결과는 경계의 안이거나 바깥일 것이다

과녁에 뚫린 수많은 구멍들도

알고보면

한때 온몸의 정신을 집중하여

생을 관통하려 했던 흔적임을 알겠다

 

2005년 신춘문예 당선시집

 

앵무새의 저녁식사


 하늘은 심각했고 정오가 되자 잔뜩 화난 포도 씨 같은 햇살이 틱틱 거리며 흩어졌다 외출에서 돌아온 남자는 앵무새의 저녁식사를 준비했다 남자는 새장을 등지고 검고 싱싱한 야채를 썰었다 냄비 속에 들어간 거짓말들은 제각기 다른 목소리로 말했다 침묵하고 있던 뚜껑이 들썩 거린다 흐물흐물해진 본성들이 아우성쳤다 견디다 못한 몇 개의 혓바닥이 부글부글 기어 나왔다

 

 식사가 끝날 때쯤이면 서로의 의심도 빈 접시처럼 하얗게 바닥을 보였다 앵무새는 남자의 입술을 열고 부드러운 혓바닥을 삼켰다 식탁위에는 다 비운 슬픔이 포개져 있고 그들의 저녁식사는 조용하게 끝이 났다

 

 그 후, 앵무새의 코는 조금 더 길어졌고 증오는 벌레도 먹지 않고 잘 자랐다 횃대에는 부러진 달의 긴 발톱이 상처처럼 박혀있었다

 

 2005년 신춘문예 당선시집


돛배 제작소


그의 좁고 어두운 창고는
바다를 낀 비탈길에 매달려 있다
작업대 위에는 선풍기 한 대가
성능 떨어진 스크류처럼 꺽꺽 거리고
가끔 죽은 생선을 입에 문 갈매기들이 힐끔거렸다
저녁이면 그는 절벅거리는 석양에 전신을 담그고
초판 인쇄본인 낡은 해부학 책을 탐독한다
그가 읽은 해부학 책의 대부분은
휘어진 척추와 절망에 눌린 늑골을
잘라내는 방법이 기술되어 있었다
노련한 마도로스가 되고 싶었던 그는
통나무를 파낼 때마다 깊어지는 허공을 밟고 내려갔다
설계도면에는 오래된 고뇌까지 꼼꼼히 그려져 있었고
돛배가 하나씩 완성될 때마다 그의 환멸은 정교해져 갔다
번번히 출항이 연기되었던 이유는
자로 잴 수 없었던 용기의 오차 때문이었고
환기통을 찾지못한 공기들은 녹슨 바람 소리를 냈다
그는 드라이버로 세상의 귀퉁이에
임시로 꽂혀있던 자신을 풀어낸다
완전한 조립은 언제나 해체를 의미하는 걸까
톱밥같은 날들을 훌훌 날려보내고
그의 돛배는 오늘밤 어디론가 흘러갈 것이다
통나무에서 밀려나온 나무껍질은
시멘트 바닥에서 알몸을 검게 말았다

 

2005년 겨울 계간 시작

 

빈집

 

바람벽의 광대뼈가 불거져 있는 빈농가

감나무 야윈 품안에 시린 낮달이 얼굴을 묻는다

허리를 비틀던 흙 담은 기어이 주저앉아 버렸다

간신히 서있는 세탁기속으로

후줄근한 바람이 몸을 구겨 넣자

겨울해의 마지막 동력이 녹슨 플러그에 접속된다

일시정지 된 동작들이 기억을 짜 맞추고

숫자가 희미해진 타이머는 오래된 예약시간을 깨닫는다

이삿짐에도 따라가지 못한

한쪽 다리가 부러진 빨래 집개가

눅눅한 어스름을 물고 늘어진다

이불호청 같은 저녁이 까슬까슬 말라간다

탈수가 끝난 세탁기가 빗물을 찔끔 내보낸다

탈탈 털어낸 달빛이 삶은 기저귀같이 새하얗다

달려온 바람의 눈동자가 창호지가 뚫자

놀란 문풍지들이 소스라치게 울어댄다

이빨나간 독안에 채워진 달빛이 넘친다

적막한 마음들이 흘러내린다

빈집은 조용 조용 젖어 가는데

방문은 늘 해오던 일이라는 듯이

고단한 뼈들을 가지런히 윗목에 뉜다

 

시인시각 2006 여름호

 

생일전야 

 
 남자는 달려오는 빛을 향해 몸을 날렸다 다급한 순간에는 어떤 기억도 저
항하지 못한다 남자의 몸이 파닥거리다가 이내 조용해졌다 남자의 주변으
로 살비듬같은 햇살이 잠시 푸석그렸다 호주머니 속에서 끌려나온 유서는
창백했다 세상의 고통들은 왜 똑같은 모서리를 가질까 남자의 절망은 여러
번 접혀진 채 천천히 닳아왔을 것이다 휘갈겨 쓴 모음과 자음들이 더듬거리
며 남자를 변명했다 생일전날 날짜가 맞아 떨어진 것은 순전히 남자의 수학
적 강박 때문이었다 TV를 켜자 아홉시 뉴스앵커가 알맞게 경직된 하루를
부검하고 있다 어두운 터널은 놀란 동공처럼 아득히 뚫려 있고 남자의 반
지하 단칸방에는 미역이 양푼을 검게 부풀리고 있었다


사라진 입들


잠실 방문을 열면 누에들의 뽕잎 갉아먹는 소리가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어두컴컴한 방안을 마구 두드리던 비,
눈뜨지 못한 애벌레들은 언니가 썰어주는 뽕잎을 타고 너울너울 잠들었다가
세찬 빗소리를 몰고 일어났다
내 마음은 누가 갉아먹었는지 바람이 숭숭 들고 있었다

 

살아있는 것들이 통통하게 살이 오를 동안
언니는 생의 급물살을 타고 허우적거렸고
혼자 잠실 방을 나오면 눈을 찌를 듯한 환한 세상이 캄캄하게 나를 막아섰다
저녁이면 하루살이들이 봉창 거미줄에 목을 메러 왔다
섶 위의 누에처럼 얕은 잠에 빠진 언니의 숨소리는
끊어질 듯 이어지는
명주실 같았다

 

허락된 잠을 모두 잔 늙은 누에들은 입에서 실을 뽑아 제가 누울 관을 짰지만
고치를 팔아 등록금으로 쓴 나는 눈부신 비단이 될 수 없음을 알았다
언니가 누에의 캄캄한 뱃속을 들여다보며 풀어낸 희망과
그 작고 많은 입들은 어디로 갔을까
마른 고치를 흔들어 귀에 대면
누군가 가만가만 흐느끼고 있다
생계의 등고선을 와삭거리며
종종걸음 치던
그 아득한 적막에 기대

 
검은 뿔도장

 

닳아버린 지문 같은 오래된 검은 뿔도장
이마에 하얀 점 하나를 찍고 상한 마음을 꼭 끼우고 있다
장롱 서랍 속에 함몰된 시간을 품고 누워 있다
아버지는 30년 공무원 퇴직금을 빚보증으로 날리고 부터
막도장, 막노동, 막말, 막배,
아무렇지도 않게 뱉은 말들이 물집처럼 부풀어올랐다
막 굴러다녀도 이제 그만인
누구하나 눈 여겨 보지 않는 도장
입김을 호호 불어 힘껏 누르면
아버지의 발자국이 비틀비틀 걸어 나왔다

 

목련

 

뼈만 남은 손가락이 가지를 움켜잡고 있었다
다정했던 목련, 지는 모습이 이랬다
볼이 움푹 팬 병색 짙은 몰골로
자신의 전부를 갉아먹고 있었다
활짝 핀 함박눈처럼
세상을 끌고 올라가던 목련은
순백의 기억을 갈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동백처럼 삶이 가장 요염할 때
선혈이 낭자하게 자신을 뚝뚝 던져 버리지 못하고
처음부터 끝까지를 모두 보여주며
추억을 되돌려가는 미련한 꽃
제가 얼마나 아늑하고 환한 시간을 밝혔는지 모르고
꽃 진 가지에 가장 누추한 기억 한 줄 걸어 두었다

                                             

애기 소*


지금 막 떨어지는 줄기찬 침묵과
오랫동안 고여 있던 침묵이 만나
서로를 강렬하게 흡입하는 애기 소
내부는 들끓고 있었지만
푸른 눈은 아주 침착하다
아무 것도 모르는 벌거숭이 아이가
물 속으로 풍덩 뛰어든다
무서운 침묵의 소용돌이가
빠르게 냉정을 찾아간다
잠자리 한 마리가 제 모습을 비추며
고요히 비행을 마쳤을 뿐
아가, 잔잔해 보인다고 속까지 잔잔한 것은 아니란다
정적이 백기를 들고 말 걸어 올 때
먹 개구리도 겁을 먹고 울음주머니를 부풀린단다
깊이를 알 수 없는 허기는 무엇으로 채울 수 없단다
한 생이 다른 한 생과 뒤섞이고 싶어
절대 속내를 보여주지 않는
저 깊고 푸른 눈,
아가, 격렬한 외로움은 아무 흔적을 남기지 않는단다

 

* 김동리 소설 「무녀도」의 배경인 애기소 , 형상강 상류에 있으며 경주지역의 발음 특성상 <애기소>라 부른다. 다른 두 물줄기가 합류하면서 소용돌이가 생겨 땅이 파져 깊은 소가 생겨났다. 한 해에 한 명씩 아이들이 빠져 죽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민달팽이의 길

 

김장배추를 다듬다 만난 놈
신문활자 위에서 벌거벗은 자신의 상황에 놀란 듯
더듬이를 마구 휘두르고 있다
예상치 못한 운명 앞에 당황한 것 같았다
희멀건 배추 속살에 붙어
느릿느릿 낮잠이나 즐기며 살아온 놈이
백주 대낮에 불려나와 곤욕을 치르고 있다
나는 맨몸으로 맞닥뜨릴 곤란을 모르는 척 할 수 없어
미끈거리는 몸을 신문지로 감싸 베란다 화분 속에 넣어 주었다
배 밑에 느껴지는 이끼의 감촉에 몸을 잔뜩 웅크린다
未知의 세상으로 몸 들여놓을 생각을 않는다
한번은 부딪쳐야 할 문제 앞에 망연자실한다
나는 저놈에게 어떤 결의가 생겨나
깨지든 이겨내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길 바랬다
며칠 뒤 베란다 청소 중에
한 뭉치의 철사를 풀어놓은 것 같은 은빛 선들
놈이 사투를 벌인 얼룩이었다
어디에도 민달팽이는 보이지 않고
살아남은 그 자리만 반짝거리고 있었다

 

동지 무렵의 검거나 새하얗던

 

어머니가 부뚜막에 앉아 팥죽 솥을 젓고 있다
밤눈은 벌써 솥 안에서 휘몰아쳤고
빨랫줄에 걸린 연기가 서걱서걱 얼어갔다
잡았던 손을 놓친 문고리가 동그랗게 몸을 말았다
아버지는 아랫목에 술 단지처럼 묻혀 부글부글 익어가고
어머니의 가슴에 빠진 수많은 달들은
무쇠솥 위로 떠올랐다
날개를 접은 검은 하늘이 뒤란으로 내려 와 웅크렸다
할머니가 뿜어대는 독한 담배연기에
어머니의 강건했던 주기도문이 쿨럭 쿨럭 기침을 했고
방안은 가마솥 안의 물집처럼 북적북적 끓어올랐다

박쥐가 가슴을 펴고 나는 것은
제 캄캄한 외로움을 보여주기 위해서란다
그렇지만 어머니
모두를 보여준다고 외로움이 없어지진 않아요
그건 살아있는 한 식량처럼 떨어지지 않는 것이에요
어머니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두꺼운 성경책의 이빨을 앙 물리고 예배당으로 갔다
펑펑 내리는 흰 눈 뒤로
검은 밤이 가죽 표지처럼 둘러섰다
할머니가 팥죽 양푼을 화롯불에 올리자
할 말을 참고 있던 흰 눈깔들이 희번덕거렸다
우리는 시끄러운 눈깔들을 맛있게 파먹었다
다 먹은 빈 양푼이 팥죽 같은 땀을 흘렸다
무엇이든 푹푹 지워버린 세상이 깨끗한 척했다
솜버선을 두툼하게 신은 집이 바람에 떠밀릴 것 같았다


이팝나무 고봉밥

 

육중한 그 집 대문 한 번도 열린 적이 없어

누가 사는지 본 사람이 없었다

겨울바람이 가랑이를 늘이며 높은 담을 올라갔다

술 취한 사내가 담벼락에 욕설을 퍼부어도

그 집은 끝내 묵묵부답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그 집 앞을 지나갈 때면

옷깃을 한 번씩 더 여미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보안등은 수상한 눈빛을 흘려보냈다

꽃샘추위가 물러가고 그 집의 산수유나무가

물집이 툭툭 불거진 가려운 팔뚝을 긁적였다

개나리는 조롱조롱 노란 궁금증을 매달았다

그 집의 대문이 열린 것은 혼자 살던 노인의

부음이 꽃씨처럼 떨어진 날이었다

외국에 사는 아들내외는 너무도 담담하더란다

석 달이나 지나 발견된 해골의 구멍 안에는

캄캄한 외로음이 그렁거렸다고 한다

목련나무가 꽃등을 내리고 조문을 끝내자

대신 이팝나무가 하얀 고봉밥을 가득 담아

담 위로 고개를 쭈욱 내밀고 있더란다

잘  먹어야 그리움도 훤히 켤 수 있다는 듯이

 

낮달이 꺼내는 새떼
                      ­-흰 접시꽃


접시꽃이 엎지른 그림자에 금이 가는 구 월
낮달은 가슴을 열고 까만 새떼를 자꾸 꺼낸다
그리움을 보태거나 덜어내며
위태롭게 균형을 잡아오던 접시들은
꽃이 일생동안 하나씩 공들여 빚어 온 것,
찬바람이 허공에서 하얀 접시 여러 개를 깨트렸다
새떼가 사분거리는 휜 빛을 물고 사라져도
꽃은 이듬해 새 접시를 들여 똑같은 상처를 담아 둘 것이다
꽃 지고 꽃대만 남았다는 것
허술히 담겨 있던 그리움을 슬쩍 쏟아낸 것과 같다
내 슬픔을 떠받쳐준 것을 슬쩍 쏟아낸 것과 같다
빈 꽃이 무게를 기억하는 것도
꽃대가 접시돌리기를 멈추지 않는 것도
저들이 잘 낫지 않는 환상통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새떼가 석양을 꾹 찍고 빠른 등기우편으로 날아갔다
말갛게 씻긴 허공 아래 헛헛하게 서 있는 꽃대들
가진 접시가 없어 아무것도 담아 둘 수가 없다
나는 꽃 필 때부터 깨질 것을 염려했어야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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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입들> 천년의시작 2007 11 20

 

그리운 노래, 시로 태어나다


2004년 『시작』, 200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영옥 시인, 그녀의 시는 남다른 감수성과 치밀한 구성 등에서 이미 여러 매체를 통해 검증을 거친 상태이다. 그렇기 때문에 첫 번째 시집을 기다리는 독자들도 그만큼 많았을 것이다. 이제 『사라진 입들』이라는 제목의 시집을 들고 나와 그녀는 조용하게, 그러나 가슴 저린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번 시집은 그리운 기억들을 불러들이는 주술적인 힘이 느껴진다. 그녀는 먼저 어린 시절의 아버지, 어머니, 언니 등 가족을 불러들여 그들의 상처를 어루만진다. 가족과 관계된 이미지들은 검은 색체를 띠면서 버거운 무게감을 갖고 있다. 또한 이러한 기억들을 떠올리는 시인의 가슴에는 숭숭 구멍이 난다.


그녀를 아프게 하는 것은 가족만이 아니다. 온갖 사람들과 꽃들과 벌레들에 이르기까지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생명체들의 슬픈 운명을 그녀는 감지한다. 시집의 곳곳에 등장하는 죽음은 모든 생명들이 벗어날 수 없는 아픔의 하나이다. 끝내 허물어져버릴 생명의 순간성을 깨닫고 있는 시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 속에 그들을 불러들여 어루만지는 것은 그것으로부터 현재의 자신이 만들어졌으며, 또 그것이 그녀를 살아가게 하는 힘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열악한 환경이 더 아름다운 꽃을 피게 하듯이 시인의 아픈 기억들은 시집 사이사이 여러 가지 색깔의 고운 시로 활짝 피어 있다. 눈이 밝은 독자라면 꽃의 아름다운 모습에만 이끌리는 게 아니라 꽃의 무늬에 담겨 있는 사연들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 사연들을 읽으며 눈시울이 붉어질 것이다.


[추천글]


이영옥이 삶을 보는 시선은 외향적이되 섬세하고, 표현은 전통적이되 신선하다.

무작위적으로 뽑은 다음 두어 구절을 살펴보자.

 ‘내 마음은 누가 갉아 먹었는지 바람이 숭숭 들고 있었다’ ‘접시꽃이 엎지른 그림자에 금이 가는 구월/그리움을 보태거나 덜어내며/위태롭게 균형을 잡아오던 접시들.’ 앞의 것은 누에가 뽕잎을 갉아먹는 것을 보며 산 추억에서 나온 것이고 뒤의 것은 꽃이 담고 있는 추억의 복합체이다.

이런 시들을 읽다보면 독자의 추억도 환해진다.

그 환함 속에 가족과 주변의 삶들이 모질만큼 감성적으로 새겨진다.

늦게 만나면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는 시인이다.


─ 황동규(시인)


이영옥의 시들은 상처를 거름[모티브] 삼아 핀다. 시가 상처요, 상처는 꽃이다. 꽃들은 온통 제 살빛 아래에 숨긴 “피빛 상처들”(「능소화 붉은 입술로」)이다. 꽃 속에 아버지와 어머니와 언니들과 동생들이 오글오글 숨어 있다. 상처는 이미 과거다. 상처 주변으로 세월의 두께가 내려앉는다.

“극한의 경계”(「집을 끌고나온 개 한 마리」)에서는 시도때도 없이 꽃이 터진다. 저를 묶은 줄을 풀지 못한 “개”는 집을 끌고 집 밖으로 나와 “갈 수 없었던 건너편”을 향해 컹컹 짖는다. 힘센 욕망으로도 닿을 수 없는 저 너머에 꽃 밖의 꽃, “풍경 밖의 풍경”이 있다. “개”가 멈춘 자리가 극한의 경계요, 거기가 통점(痛點)이다. “개”는 무의식에서 짖는 시인의 페르소나이다.

시인은 “화무십일홍에 울지 마라, 꽃아”(「화무십일홍에 울지 마라, 꽃아」)라고 노래한다. 울지 마라, 꽃아! 꽃 진 자리라야 열매가 맺히느니!


─ 장석주(시인·문학평론가)


 

목차

 

I 사라진 입들


철길
사라진 입들
브라스밴드가 지나간 뒤
형상강
나를 찢고 달아나는 붉은 달
우물 속의 잠자리
돼지
검은 뿔도장
목련
밥상 위의 명태 한 마리
이팝나무 고봉밥
언니라는 선인장
애기 소
연밥
달밤
삼나무떼


II 바람 아래 붉은 강


바람 아래 붉은 강
목련꽃 입덫
소쩍새 울음
낮달을 꺼내는 새떼
돛배 제작소
그날은 민물새우가 아팠다
노포동 터미널
만리장성 동백꽃
강대나무
질긴 내장으로 만든 집
주먹만한 구멍 한 개
복어국
동지 무렵의 검거나 새하얗던
질긴 막
얼음 강을 건너다
어디쯤 왔을까


III 화무십일홍에 울지 마라, 꽃아


접시 거미줄
내 애인은 장수풍뎅이
맨드라미
화무십일홍에 울지 마라, 꽃아
소금쟁이
행방
달맞이꽃
그늘교회
집을 끌고 나온 개 한 마리
민달팽이의 길
원앙금침
빨간 장화에 대한 오해
왕버들 상회
묵호항 사발낙지
부산여인숙 3호방


IV 굿바이, 역도산 찐빵집


능소화 붉은 입술로
굿바이, 역도산 찐빵집
어떤 비교우위론
아양교 다리 아래에서
공이 온다
이러한 열반
마늘 한 접
달의 자서전
겨울 과메기
콩대를 태우며
늦은 눈
입맞춤
영도다리
늙은 개에게 바라는 최소한의 예의
회전문
우렁이 집
밤 기차


■ 해 설
비장미를 엿보이는 생명의식 | 남송우(부경대 교수)

[인터파크(도서) 제공]

 

출처 : 휘수(徽隋)의 공간
글쓴이 : 휘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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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동강

               유금숙



강변을 따라 걸으면 물 갈피마다

유년의 기억들 깔깔대며 물수제비 뜨는 저녁

물안개 속에서

어린 비오리 갸웃 고개를 내밀다

소리에 놀라 소스라친다

수풀사이 돌밭 틈새로 계절 없이

샘물 뿜어 올리는 황새여울 지나는데

길 끝나는 곳 산비탈에

코란도 한 대 서 있다

문희마을 몽룡씨는 오늘도

고무신 같은 나룻배를 신고

홀로 강을 건너간 모양이다

노를 잡고

물길을 따라가던 산 그림자

길게 하품하며 뱃전에 누워 잠에 들면

외딴집 텃밭엔 오늘밤

은하수 푸르게 쏟아지고

별빛에 옥수수 익는 소리 가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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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대 국문과 졸업

2004 방송대문학상 당선

2006 <심상> 신인상

강원문협, 강릉문협, 한울림문학 회원

시집 <꿈, 그 간이역에서>

출처 : 시와 별 그리고
글쓴이 : 하늘다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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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지게

                                      우 경 화


성냥갑만 한 슬레이트 지붕
다닥다닥 붙어 정겹고도 쓸쓸한 달동네
희망같은 연탄 가득 실은 손수레 끌며
검둥이 한 마리 앞세우고
가파른 비탈길 휘청휘청 올라가는 할아버지
허리띠같이 좁은 골목 입구에 멈춰 서서
지게에 연탄 착실히 옮겨 짊어지고
성지 순례하듯 발걸음 느릿느릿 떼놓는
등 굽은 뒷모습
하필이면 어깨에 박인 굳은 살같은 지게
평생 내려놓지 못하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닮았을까

몹쓸 병으로 쿨럭거리는 둘째 딸
엉덩이에 주사바늘 찌르는 솜씨도 날마다 늘어
스스로 돌팔이의사 다 되었다며
짐짓 쓴웃음 지으시던 아버지
장마 때면 시름인 양 쌓인 빈 스트렙토마이신병들
비료 푸대에 말없이 주워 담아 지게에 얹고
남몰래 마을 앞 냇가 쪽으로 무거운 발걸음 옮기셨던가
봄날이면 큼직한 나뭇단 눌러 쟁인 지게 위에
참꽃 한 아름 자랑스레 꽂고 저녁놀 등에 지고 걸어오시던
고향 뒷산 붉은 참꽃 맛이 문득 그립다

독거 노인들 옹기종기 모여 사는 달동네
내 아버지 모습같은 할아버지
겨울 되면 집집마다 효도하듯 한층 빨갛게 타오를
연탄꽃, 그 환한 꽃지게 지고 계단을 오르신다

.

 

<해설>
- 아버지와 자신의 투병과 달동네 할아버지를 잘 대비시키고 있다. 뛰어난 묘사가 사실적 풍경을 더하고 있어 뭉클하게 다가온다. 도시 변두리의 달동네 할아버지의 삶과 우리네 농촌 지난한 아버지의 삶이 클로즈 업 되어 그 효과가 더욱 생동감을 주고 있다. 상징적의미로 쓰인 `꽃지게’ 역시 심도를 더하고 있음이 확인 되는데, 그래도 꿋꿋하게 살아가며 밝은 쪽로 시선을 두고 있는 시인의 자세가 더없이 아름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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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나비 / 장진명

 

 

가상의 공간에서 막 걸어나온 듯
휘장같은 원피스를 걷어들고
검고 가련한 허벅지를 온 통 드러낸
몽골의 붉은 나비

그녀는 캥거루처럼 구부정하게 인사를 했다.
쫄아드는 키만큼씩 자꾸만 높아지는
끝이 뾰족한 하이힐에서
우두둑 잔뼈들이 틀어지고 있었다.

채찍을 든 일본 원숭이를 피해
공중제비를 넘는 그녀가 곧 울 것 같아서
자정의 술꾼들은 잔을 부딪치며 소리를 질렀다.

징기스칸 만세!

새벽을 걸어가는 그녀를 본 적이 있다.
주점 어스름등이 꺼지면 피가 스민 하이힐을 손에 든 채
맨발로 호르르 날아가는 붉은 나비
가무레한 뒤꿈치가 옴씬옴씬 품어내는
몽골의 향취가 수액으로 점점이 얼룩지는 그녀를

나는 매일 주점으로 간다
반쯤은 웃고 반쯤은 우는 새벽 지하철
부스스한 내 얼굴이 그녀 같아서
채찍을 든 원숭이의 부라리는 눈알이 그녀를 관통하고 나를 관통하는
극적인 마조히즘을 위해서
경극배우의 짙은 분장으로 숨긴 그녀의 살기가
패왕별희처럼 시퍼런 장도를 휘두를 것 같은 두려움에 떨면서 
어머니가 낭떠러지는 위험하다고 했다.
눈이 오고 별은 눈 속에 갇혔다.

나는 세상 끝이 보고 싶어서 인파가 붐비는 동성로를 지나

주점 낭떠러지 문을 민다.

발이 허공을 짚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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