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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바다에서 본 것들 / 변준석(영남대, 국어국문학)

 

1. 물새

물새는 죽어서 물새 울음이 되었다.

어떤 물새 울음은 꺼이꺼이 저 혼자

울면서 바다로 가서

파도가 되었고

파도는 바람의 아픔이다.

항상 제 고독의 양만큼의 모래를 적신다.

 

2. 섬

젖은 모래는 젖어서 다시는 젖지 않는

섬이 되었다.

저 혼자서 아름다워지는 섬

사람들은 누구나 저 나름의 별을 갖고 있듯이

저 나름의 섬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의 마음에는 언제나 새 한마리가 살고 있다.

 

3. 눈

젖지 않는 섬과, 마음과, 물새의 머리

위에 내리는 눈은

바다에도 내린다.

바다에 내린 눈은 수평선에 쌓여서 바다가 된다. 바다는 눈

의 고향이다.

 

 

 

 

[심사평]

 

우리 계명 시단(詩壇)이 점점 무르익어 가는 것이 퍽 기쁘기도 하다. 많은 응모작품 중에서도 <겨울바다에서 본 것들>과 <풍경>이 눈에 띄었다. 두 작품 중 전자(前者)가 좀 더 말 다루는 솜씨가 일보 앞서 있기에 당선했다. 이 밖에도 <겨울 산행(常行)> (산행이 무슨 뜻인가 작품을 쓰려면 이런 것도 세심히 주의해야 한다.), <겨울 체석장>, <겨울묘지에서>, <악수(握手)>, <겨울 강에서>, <배앓이>, <바람> 등 좋은 소질이 보이는 작품들도 있었다. 더 더욱 분발하기 바란다.

 

신동집(외국학대 영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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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사의 사탑에서 종이컵이 떨어졌다

05학번 허용수

한 잔 따라드릴게요 밤바람을 견디기 위해 몸속에 맥주를 꾹꾹 담아두는 어머니 수직축을 잃어버린 후 부터였다 보수공사에도 불구하고 구부정해지는 그녀의 각도를 멈출 수가 없게 되었다 움켜쥐면 그대로 구겨지는 마음처럼 종이컵 옆구리가 움푹 파여 있다 허리가 꺾인 채 방향을 잃은 삶이 하루에 1mm씩 기울어지고 있던 거다 네 아버지의 가장 큰 업적은 철근과 자신이 동시에 떨어질 수 있음을 증명한 일이란다 하지만 종이컵은 자유낙하 하지 않는걸요 무너져 내리는 옥상에서 헛디딘 발이 살아남고 싶었던 바람과 함께 밤바람에 휩쓸린 것뿐이에요 그의 가슴속 매일 밤 소주 한 잔 들이키며 채워 놓는 허공 있잖아요 그 면적이 받았을 공기저항을 생각해보세요 속 빈 종이컵이 흔들린다 잇자국 남겨진 주둥이가 젖어 있다 찌그러지는 미간 너무 오래 머금고 계셨네요 빳빳하던 어머니가 맥주 한 잔에 시무룩해지면 종이컵을 털어낸다 하나 둘 남은 방울이 동시에 마저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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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세랭게티

05학번 이지상


날카로운 수평선이 태양을 찌르고
영역을 침범하는 기척에 일어난다
치타는 앞 다리의 손목시계를 핥고
혓바닥 같은 넥타이를 죄어 맨다
물소 기차가 도착한다는 모래방송
검은 양복의 치타는 상아빛 이빨의
36년 세월을 마감한다.
어제는 치타의 동공에 사자가 꿰뚫렸다
사자의 송곳이가 그를 긴장하게 만든 것이다
한바탕 사자의 포효가 있었다
치타는 순간 고개를 낮게 깔고
두 앞발과 엉덩이를 넙죽 내밀었다
분위기를 조장한 먹이사슬조차
그 공간을 주시했다
그는 바닥에 널브러진 냄새를
서류가방에 주워 담았다
하이에나는 뼈대 없는 자리에
파리만 채워 오아시스를 몰아내려고 한다

21세기 세렝게티
이곳은 자신의 영역을 지키려는 동물들의
열기가 구석구석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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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의 왼손


왼손으로 늘 바닥을 쓸고 앉는 외할머니

넓은 치마폭을 가지런히 모으면

그 한 자락을 손에 감고 난 드러누워

옛날이야길 듣는다.

우렁각시를 시작으로

귀신과 원님이 너나들이 하고

맨손으로 호랑일 잡았다는 왕손 아제 펄펄 날고

맘씨 고운 친구 순덕이가

정신대에 끌려간 대목에 이르면

저고리 고름으로 코를 푸는 척하며

눈물을 훔치는 외할머니의 왼손

시주승의 홀쭉한 바랑에 됫박 쌀 담을 때도

내 상고머릴 쓰다듬을 때에도

왼손만을 재게 놀린다.

동백기름 발라 쪽진머리 반드레 매만지고

사분사분 마실갈 때면

어머니는 명주솜 넣어 누빈 천으로

어깨에 붙은 몽당팔을 감싸고

텅 빈 오른팔을 저고리 앞섶에 여며드린다.

외할머니의 오른팔을

질겨빠진 피댓줄이 감아먹은 후부터

어머니 가슴엔 피멍이 들고

덜컹덜컹 왁자하던 외가의 정미소는

친친 거미줄을 쳤다.



해오라비난초


그를 보고 깜짝 놀랐지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한 나비, 아니 학이던가

긴 다리가 흙살에 갇힌 하얀 나비

날아보지 못하고 죽은 그의 제삿날

음복한 술이 과했는지 이내 몽롱하네

환하게 웃는 사진 속 그 사람

설핏 작은 눈이 커지네

조곤조곤 귀엣말 이어지고

내 머리 쓰다듬던 그 손길

목덜미를 간질이던 입김이 스물스물 피어나네

나는

훌훌 벗고

춤을 춘다 땀으로 얼룩진 초혼제

너울너울 날개 펴고 바짝 세운 머리 꽃술

못내

발을 뗄 수 없어도 덩실덩실

춤이야말로 몸시가 아니던가

기신기신 어깨춤에 올라

달보드레한 입술에 잠시 머물다가

난향 가득한 귓가에 이르네

잘 사시오, 그 매정한 인사가

닿을 듯한 이명 같은 먼 울림

피와 피가 수런거리고

살과 뼈가 뒤엉켜 이룬 마지막 기상

허공에 그리는 동그라미 커질수록 다가오는 이

순간, 격랑에 휩싸여

둥둥 춤추며 날아오르는 저, 순백의 꽃잎



누운 자에게 말 걸기


천불산 운주사 와불 옆에

이른 서리 푸르게 떨어지는 낙엽들

물들이지 못한 말 너무 많아

낮은 바람에 실랑이네

앉은 불(佛) 선 불(佛)

세상을 벗은 그들

잘난 탑(塔) 못난 탑(塔) 모두 모여

빌고 또 빌, 그 무엇이 아직도 남아

자리 털지 못하고 서성이는가

그윽한 눈길 한번 못 맞추고

머슴바위 늘인 목 서늘한데

칠층탑 위에 앉은 조롱새

웃는 듯 우는 듯 날 새워도

무심히 뜬구름만 보는 염불

천 년 누운 자리 등창 나

이제 물릴 만도 한데

뼈 속조차 한기 든 저문 날

서성이는 바람 베고

그 곁에 허리 감고 누워나 볼까



패싸움


상추 치커리 고추가 눈 부라리며 막말을 한다. 근대 아욱도 분기탱천 발길질 요란하다.

풀숲에 갇힌 쑥갓 쪽파는 머리채를 잡혔다. 이파리 절반은 벌레한테 내주고 겨우 손가락만큼 영근 총각무 씩씩대며 허연 팔을 걷어부쳤다.

하얀 손차양 아래 고개 내민 당귀는 우아 떨며 샐쭉거리고, 죄 푸른 것들 사이에 붉은 얼굴 백일홍까지 삿대질하고 나섰다.

구석진 자리에 멀거니 서있는 돼지감자, 시앗에게 안방까지 내 준 큰엄니처럼 주춤주춤 물러선다.

나 이렇게 도리천 아수라 속에서 자랐다.



백구두


아침부터 구두를 닦는다. 솔질을 하고 퇴퇴 침을 뱉어가며 헝겊을 야물게 잡고 광을 낸다.

하얀 구두코가 반짝반짝 빛난다. 날선 바지에 중절모 눌러 쓴 아버지 찡긋 웃으며 내게 동전 한 닢 건내준다.

한량아버지 나서면 골목 끝으로 모든 빛이 따라 나간다. 이 골목에서 쓸개 빠진 놈은 네 놈 뿐이여 할머니 고함소리 자지러진다. 할머니만 이마에 옥양목 머리띠 질끈 동여매고 눕는다.

어머니 재바른 빗자루 소리가 나른한 마당에 다시 햇살을 쓸어 모은다. 며칠, 때론 몇 달 만에 돌아온 아버지 양복에 박하향 가득하다.

언제고 다시 떠날 백구두, 댓돌 위에서 멀뚱거리고 있다.




당선소감 (노정숙)


  시가 좋아 시 동네에서 어정거린 것이 10년이 넘었습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십 년쯤 지나면 그 분야에서 꾼이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돌아보니 안일한 생각이었습니다. 꾼이 되는 것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치열함이 문제였습니다. 시는 질투심 많은 연인과 같아, 몰두하여 바친 시간만큼만 야박한 눈길을 줍니다. 곡진한 마음이 아니면 희미한 미소조차 어림없습니다. 불같은 사랑을 전력투구로 퍼부어야 합니다. 때론 치열한 시 쓰기보다 시인들을 만나 밥정나누기를 더 즐기기도 했습니다. 끈질기게 심각하지 못한 제 성정이 시작(詩作)의 치명적 결함이라는 것을 깨닫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좋은 시를 만나며 가슴 덥히던 순간의 감동을 떨치지 못하고 짝사랑에 매달려 있습니다.

  저를 닮아 야무지지 못한 제 분신들이 열린 세상에 나가서 눈총받이가 되지 않을까 염려되기도 합니다. 이 수상은 느슨한 제 시작에 박차를 가하라는 뜻으로 알고 정진하겠습니다. 늘 깨어서, 가슴 뛰는 사람으로 나아가겠습니다. 10년을 함께한 시인회의와 서시 동인과 기쁨을 함께 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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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의 별


그의 혹에서는 모래바람 소리가 들린다.

가람병원 8층 사막의 경유지에서

아버지는 투명한 비커 속

잠잠해지는 모래바람을 본다

오래전 물이 마른 웅덩이 일까

떼어내지 못한 담낭, 가뭄은 상처가 깊어서

소변을 보고 돌아누운 어깨가 흔들린다.

하루 세 번 비커에 소변을 받고

사막의 모래 돌풍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릴 때

신기루 같은 선잠에 드는 낙타

늘어진 목덜미에 손을 얻으면

흩어지며 무늬를 만드는 모래 알갱이

수많은 아버지들의 무덤, 그의 땅에서는

풍장 된 낙타들의 뼈가 만져진다

지린내 퍼져가는 4인실 병동

먹다 남긴 복숭아 캔에 황사먼지가 내려앉는다.

되돌아오기엔 너무 멀리 걸어 나온 낙타 한 마리

비커 바닥에 담석 알갱이들이 샛별로 빛나기 시작한다.



바람의 말줄임표


실밥을 뽑고 할아버지는

잘려나간 길들로부터 자유로워 졌다.

한성병원 202호실, 모든 길을 꿰매어 논 할아버지가 있다.

병수발 들던 고모가 마중 나가 조용한 병실

가습기 연기가 야윈 얼굴을 스쳐지나간다.

발톱부터 빠져나갔다, 무릎만 남아 균형 잃은 다리

창가로 들어온 햇살 한 줌 빈자리를 채운다.

선산에서 다시 찾게 될

왼쪽다리, 할아버지 무릎에 실밥자국으로 남아 있다.

살기 위해 다리를 버린 할아버지는

불사의 길은 알지 못했으나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는 법은 알고 있었다.

잠든 할아버지의 날숨에서 다리를 잘라먹은 단 내가 나고

링거액이 심박수처럼 떨어진다.

달구지를 타고 두렁을 지나오던 날들

썩어버린 시절을 봉하는 마지막 바느질이었고

새로 시작될 바람같은 날들을 향한 말줄임표였다.

실이 빠져나간 자리로 뭉특하게 남은 흉터

할아버지 왼쪽 무릎아래

햇볕이 새 터를 잡는다.



말레이가비알


난간에 걸린 이름표에 김이 서린다.

물속에 오래 잠겨 있어도 부르트지 않는 몸

악어새가 오지 않는 대공원 파충류관

말레이가비알 악어 두 마리

입을 다물고 환영처럼 사라지는 서로의 몸을 본다.

수조 벽에 긁혀 조금씩 마모되었을 꼬리

좁은 웅덩이가 그들에게는 유일한 천적이다.

더 이상 얼굴을 늪 안으로 넣지 않고

늪을 부유하던 몸은

수조의 물 위를 떠다닌다.

꼬리를 휘두르며 사냥하던 육식의 본능은

이제 사육사가 주는 고기를 받아먹는 것

말레이가비알 악어를 찍던 남자

움직여 보라는 듯 난간을 발로 찬다.

챙, 하고 진동하는 난간에도

다문 입을 열지 않는다.

청각부터 굳어 가는지

떠날 준비를 하는지

말레이가비알, 말레이시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악어 두 마리

산 채로 박제가 되어간다.

요철무늬 사이가 깊게 패인다.



구세군


올해도 서울역 앞에는 산타가 온다.

종소리에 맞춰 흔들리는 자선냄비

생의 밥그릇은 항상 저렇게 비어 있다.

기차를 타기 위해서는 저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 한다.

한 번의 헛발질로 미끄러졌을까, 저 남자

아득한 시절로 돌아가는 차표는 영영 끊겼는지

비둘기처럼 모여든 사내들의

뜯어진 신발 틈으로 삐져나온 맨발이 환하다.

몇 번이나 담배를 구걸하다 체념대신

여러 번 누빈 이불보를 덮고 누운 남자

종소리, 캐럴소리 듣는지

끊기지 않는 선율 따라 붉은 냄비가 흔들린다.

마이크를 든 산타가 종착역을 알리는

역장처럼 목청을 높인다 또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개찰구에서 쏟아져 나오는 동안

밤은 거대한 이불보를 펼친다.

털어낸 솜이불에서 오래 묵은 먼지를

첫 눈발을 날리고 있다.



처녀자리의 계절


할머니는 죽어서 처녀자리가 되었다.

한별 아파트 202호

아버지가 옥매트 전선을 묶는다.

삼촌과 인부가 자개장롱을 들어 옮기고

하나씩 비워지는 방

엄마는 노끈에 묶인 점성책을

통재로 들어 현관에 내놓는다.

누렇게 변한 책 귀퉁이

곳곳이 접혀있다.

오래된 책 냄새가 현관을 매운다.

운세는 할머니의 유일한 취미

매일 아침 각자의 운세를 짚어보고

호통을 치던 할머니는 별이 되었다.

움직이지 않던 별자리도 서쪽으로 이동하는 겨울

높아지는 하늘이 보인다.

계절따라 별자리도 바뀐다고

점성을 좋아하던 할머니는

계절을 따라 가셨다.


 

 



당선소감 (안양예술고등학교 3학년 7반 정예림)


  제게 문학은 한 없이 높은 산이었습니다. 열심히 오르다가도 정상은 보이지 않아서 주저앉기도 했습니다.

  저는 대체로 일상에서 겪었던 것을 시로 씁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다리에 남은 바람의 말줄임표와 아버지의 안에 있는 사막을 보면서 꼭 한번 시로 써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야생성을 잃은 채 살아가는 말레이가비알 악어를 보면서 그들의 슬픔을 느끼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것들을 자신만의 언어로 이해하고 싶었습니다. 아마 제 나이의 또래들이 걱정하는 게 내가 가는 이 길이 맞는가, 일 것입니다. 그때마다 자신의 결정에 책임을 지는 법을 가르쳐주신 김유미 선생님과 윤한로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재작년 항상 저희에게 웃음으로 가르침을 주신 유한칠 선생님과 항상 못난 딸을 응원해주신 부모님께도 감사하다 전하고 싶습니다. 높디높은 문학의 산을 걸으면서 만난 27기 문창과 동기들, 물동이에게도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한 없이 부족하고 더 배워야 할 저에게 이런 큰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분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 기회는 저에게 시작이라는 의미입니다.

  나태하던 자신을 혼내고 더욱 열심히 하라는 문학에 정진하라는 뜻의 상인 것 같습니다 언젠가 산에 올라 야호를 외칠 수 있는 그 날까지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노력하는 문학인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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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목련 / 홍슬기(숭실대학교 문예창작 1년)

 

너의 저 하얗고 순결한 혓바닥들

나는 너의 혀와 나의 혀를 교체했으면 좋겠어

나는 너의 혀를 달고 바람의 노래를 부르고

너는 나의 혀를 달고 껌처럼 질겅질겅 씹어보기도 할 텐데

종종 바람이 불 때마다

내게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너의 혀에서 갈라져 나온

세상에 존재하는 바람의 방언들이 후드득 쏟아져

두껍고 부드러운 너의 혀를 쓰다듬으며

나는 네가 말을 하지 못했던 때를 생각해

네 내부에 갇힌 수많은 방언들이 시끄럽게 떠들다가

스스로 조용히 썩어버리던 시절

너의 봉오리 속에서 그런 은밀한 시간들이 흐르고 있지

나는 너의 입을 벌려 네 입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어

네 입 아주 깊은 곳에 위치한 너의 혀

아직도 너는 혀에 남아있는 방언의 자음과 모음을 중얼거려

아무렇게나 맞물린 활자들이

네 혀를 타자기처럼 두드리면

너의 혀가 쩍쩍 갈라지지

눈이 오고 따뜻한 어느 나라의 방언으로

나에게 욕설을 내뱉어

그 나라 방언의 기원은 욕설이었을까?

나는 네 입술을 한 겹씩 헤집으며

가장 오래된 너의 혀가 가진 언어를 배우는 중이야.

 

 

 

* 가작

비단길 / 황의선(명지전문대 문예창작 3년)

 

아무리 씻어도 이름만은 지워지지 않는다.

 

단어가 의미를 가둔다는 생각이 들 때

언어에서 화장품 냄새가 날 때면

 

난 발걸음을 재촉하여 구부러진 길 위를 걸어간다

이정표를 보지 않고 꽃들에게 길을 물으며

걷는다 촉촉하게 젖은 대숲을 지나

떨리는 강물에 부싯돌 몇 개 던지기도 하며

걷는다 온간 간판과 현수막들이

서로 길을 가리키던 도시에서 벗어나

언젠가 철도나 아스팔트의 잔가지가 닿을 이 길

곳곳에 곱고 보얀 맨살 가득하다

 

달빛이 내려앉은 숲을 지나갈 때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바라본다

손가락을 들어 별자리의 선분을 끊고

이름 모를 들꽃들의 학명을 지워나가다 보면

보인다, 화장기 없는 얼굴

어둠 속에서 흔들리는 꽃송이 하나

너 이제 빨강에서 해방되었으니

어떤 길도 이름도 색칠한 적 없는

투명한 꽃잎 위로 내리는 달빛 가루 환하다

 

 

 

* 가작

고서(古書) / 이효정(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 4년)

 

나는요 도서관에서 일해요

아침 일찍 나와서 반납통 먼저 확인하죠

글쎄, 어제는 거기 노숙하는 할아버지가

웅크리고 주무시더라고요

뒤주도 아니고

할아버지가 사도세자에요, 해도 대꾸가 없기에

하는 수 없이 끌차에 실어 책장에 모시고 왔어요

여기 계시면 누군가 대출할지도 모르잖아요

그렇담 어느 책장이 좋으려나

할아버지는 여기 말고 살 곳도 없다고

여기 말고 가본 곳도 없다고

자꾸만 우는 소리 하니깐

여행 코너가 맞춤일 것 같아서

나는 그리스 해안에 꽂아드렸어요

물이 좀 차다고 덜덜 떨진 마시고

할아버지 주름만큼 구깃거리는 모래사장을 푹 덮으세요

그리고 여기 하얀 조약돌을 입에 물고 기다리세요

왜 있잖아요

나뭇잎을 띄운 물이 맛 좋은 것처럼

책갈피라도 껴있는 책이 음미하기 좋은 법이거든요

자, 준비되셨지요

이제 그럼 가지런히 앉아서 책장이 넘겨주는 파도소리 좀 들어보세요

파도가 훔쳐오는 저 발자국 소리 좀 들어보세요

발들을 밟고 달아나는 자갈과 무릎을 베고 눕는 모래알.

할아버지는 이제 책장의 섬이거든요

오래된 책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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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화석의 시제 / 김성태(성균관대학교 소비자가족학 3년)

 

풍경을 송출한다.

소금기 빠진 화석의 윤곽이다.

 

코끼리 무덤처럼 가스통이 뭉쳐있는 동네. 산

란하지 못한 물고기 정액이 수초를 묶는다.

기와지붕엔 수렵의 흔적이 묻어있다. 순록의

뜯긴 등 같다. 잠자리 한 마리가 햇살을 털고

날아간다. 개들이 목청을 돋궈 짖기 시작한다.

분리수거함에서 해골이 떨어진다. 사과 한 알

이 웃다가 트럭에 밟힌다. 수류탄만한 모과

두 알이 포탄 향을 뿜는다. 철조망의 임파선

을 따라 아찔하게 담쟁이가 매달려있다. 지친

경주마의 그것처럼 서 있는 공장의 굴뚝 위

로, 노동자의 입김이 힘없이 떠오른다. 불임의

구름을 만든다. 교수대처럼 서 있는 나무 끝

에서 까치 한 마리가 솟구친다. 잎맥만 남은

잎사귀가 허공에서 출렁거린다.

 

꽃잎들이 쓰러지고 있다.

골목의 수명을 수첩에 적는다.

 

 

 

* 가작

둥근 잔 / 임상훈(우석대학교 문예창작 4년)

 

할머니의 스무 번째 제삿날

손끝으로 둥근 잔의 테두리를 쓰다듬는다

입술로 빚어진 휑한 눈구멍이다.

 

청주가 담긴 사기(砂器)잔을 홀짝 빨다

내 등골이 싸늘해진다

녹차를 곧잘 따라 마시던 잔에서

뒤집힌 봉분이 보인 까닭

씻긴 목기들이 선반에서 마르는 동안

엎어진 목기처럼 내 속으로 어둠이 찾아온다

무덤 속에서 눈알부터 비워버린

할머니는 눈앞이 컴컴해

넘칠 듯 찰방거리는 둥근 잔

 

향 태우는 연기가 소복자락처럼 구겨진다

아버지와 삼촌은 서둘러 잠들지 못하고

어린 사촌들은 제사상 앞에서 소란스럽다

할머니의 대접 같은 젖꽃판에서 비릿한 젖이

암흑이, 줄줄 흘러나오는 시간

 

내 둥근 잔의 텅 빈 눈구멍에서부터

독주가 천천히 차오른다

할머니는 몇 년째 입이 없어 상을 물리는데

찬찬히 제삿밥을 오물거리는 하현달

 

 

 

* 가작

폐점 / 박혜란(경희대학교 국어국문 3년)

 

상점 앞에서 개가 운다.

밤중에 셔터를 내리고 내 뺀 사람은 더 이상 개의 울음이 아니고

옭아맨 쇠줄에 대하여 생각할 여력도 개의 것은 아니라서

털이 삐쭉 세우고 짖다가 말뚝을 핥고 모가지를 길게 뺀다.

손전등을 든 관리는 개의 동공 속에 다녀가는 잔상.

울다가 밥그릇을 엎고 얼마 남지 않는 물이 개의 앞다리를 적시고

두리번거리던 손전등의 빛도 남 일인 양, 길 끝으로 멀어져 갈 때

사나운 시절 흔들던 꼬리에는 단단하게 자물쇠가 걸리고

밤중에 함구한 셔터는 휑한 개의 눈동자만 곱씹는 중이다.

리어카는 새벽을 깨며 개의 울음을 줍고

경계하는 노파의 발걸음에는 잔망스럽게 입을 차는 소리.

아스팔트에 끌려올라오는 진창에 물 고이는 소리.

고름 냄새를 기필코 피우는 저 언청이 울음.

이렇게 우는 개를 보고 있으면

개의 울음은 개주인의 것이라는 생각만 나곤 한다.

상점 앞에서 개가 악을 쓰며 성성하다.

 

 

 

[심사평]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시는, 10명의 작품들이었다. 비교적 정확하고 안정적인 언어 구사와 시적 감각을 보여준 작품들이 적지 않았고, 전체적으로 고른 수준이었다고 할 수 있다. 언어를 다루고 시적 이미지를 구축하는 능력에 있어서는 일정한 단계에 올라와 있는 작품들이 발견되었지만, 비슷한 소재와 이미지를 구사하는 측면들이 있어 아쉬웠다. 시는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언어와 감정을 표현하기 보다는, 아직 표현된 적이 없는 미지의 언어와 감각을 발굴하는 작업이다. 그런 측면에서 젊은 문학도들은 자기 언어를 찾아내는 작업에 열정을 집중하기를 바란다.

당선작이 된 「화석의 시제」는 풍경과 이미지를 구축하고 묘사하는 방식에 있어서 독창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풍경'을 "소금기 빠진 화석의 윤곽"으로 설정하는 발상 자체가 감각적이었고, 그 풍경의 내부를 은유적인 방식이 아니라, 환유적인 방식으로 병렬적으로 나열하는 언어들이 신선함을 주었다. 각각의 이미지들이 특정한 관념에 묶여있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감을 스스로 가지면서 '화석의 윤곽'과 '골목의 수명'이라는 시간적인 이미지로 연결되어 있는 점이 시적 성취로 이어졌다.

가작이 된 「둥근 잔」의 경우는 '둥근 잔'이라고 하는 전통적인 이미지에 할머니의 제삿날의 느낌을 적절하게 배합하고 있다. 특히 그 '둥근 잔'으로부터 "뒤집힌 봉분"과 "할머니의 대접 같은 젖꽃판" "내 둥근 잔의 텅 빈 눈구멍"으로 이미지가 전이되면서, '나'의 실존적 깊이가 심화되는 양상이 흥미로웠다.

가작이 된「폐점」은 어둡고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건조하고 밀도 있게 묘사하는 감각이 인정할 만 했다. 특히 암울한 시각적 이미지들을 기묘한 소리의 이미지들로 풀어내는 방식이, 그 풍경에 어두운 심도를 부여하고 공간적 감각에 다른 차원을 부여하는 효과를 내고 있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 심사위원 : 정현종, 정과리, 이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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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없음

 

 

 

* 가작

바다 / 신진용(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3학년)

 

늙은 밤의 기침소리에 잠을 깼다

쿵쿵 소리 내며 돌아가는 하늘의 회전축엔

갈라진 목마름이 가득하지만

노래로 가득 찬 어느 부두에선가

낡은 櫓는 이를 갈고

팽팽해진 돛이 빰을 때린다

 

바다 깊이 던져놓은 그물들은 성기지만 단단하다

부리가 긴 새들은 검은 아가리를 헤집어 먹이를 찾고

거품을 비집고 나온 파도는

익사체를 입에 문 채 눈을 껌벅이는데

밀물은 물갈퀴를 좁게 오므리고

재갈 같은 부표를 뒤집어 놓는다

 

어둠이 녹아들 곳은 애주가의 수염뿐이다

그의 허리춤에 매달린 큼지막한 망태에서

갓 잡아 올린 싱싱한 별 한 마리가

뾰족한 아가미를 퍼덕이며 소금기를 토한다

짜디짠 표백제가 하늘에 흩뿌려지는 순간

만선한 새벽이 부두를 향해 뱃머리를 돌리는데

 

포장마차 주인은 수족관에 납작 엎드린 항구를 잡아

도마 위에 패대기쳐 놓았다

비로소 바다의 능선이 드러나고

침묵한 사원이 활기를 찾을 것이다

 

누구일까? 첫 물길에 발자국을 찍을 이는?

 

 

 

* 가작

어부바 / 오병량(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3학년)

 

기력이 다한 태양을 사내들이 털어내며

공사장을 나오고 있었다

연장통을 들고 버스 정류장에 모인 사람들

야윈 그림자보다 더 누추한

사내 하나가 눈에 닿은 것은

오직 등에 간신히 멘 분홍색 가방 때문이었다

그는 오로지 앞만 보고 있었다

딸애가 보채며 사내의 어깨를 잡는 것 같았고

가슴팍에 닿은 가방 끈 안으로 비벼 넣은 양손이

마치 등에 업힌 딸애의 손목을 간질이는 듯도 했다

힘에 부쳤는지 한두 번 몸을 치켜 올렸다

그때마다 스르르 올라가는 원피스 사이로

소녀의 수줍은 엉덩이가 드러났다

사내의 잔등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몰래 치마를 내려줘야 하나

그들의 그림자가 내 발치에 닿아있어

걸음을 딛기가 민망했다

한 무리의 비둘기가 날아와

입 밖으로 꼬르륵 소리를 낸다

오늘은 무슨 반찬, 딸애가 그리 물으면

사내는 무어라 답할까

혹, 개구리반찬

 

날 수 없는 하늘이 높아

잘린 발을 쪼아대는 비둘기

배가 부르다

눈을 감으면 잠긴 눈꺼풀 사이로

붉게 비치는 소녀의 엉덩이

햇볕이 두 볼의 언저리에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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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잘못 누군가에게 들어선 / 이현우(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 1학년)

 

훗날 그대의 사내가

잠든 그대의 몸을 끌어안으며

지금 당신은 누군가의 전생으로 잘못 기어드는 중입니다 라고 말한다면

그리 말한 뒤로 그대의 발가락 마디 사이의 수로(水路)를 열어

그대를 밀어 넣기 시작한다면

그저 묵묵히 그 긴 수로(水路)를 따라 걸어 내려가실 수 있겠습니까

이 생을 누군가의 전생인양 접어두고

 

훗날 그대의 여인이

걷는 그대의 손을 놓으며

지금 당신은 이 생으로부터 만삭이 되었어요

라며 그대의 손가락 마디 사이의 화로(火路)를 열어

당장 여기서 나가라 한다면

그대는 유유히 이곳을 빠져나가실 수 있겠습니까

이 생을 누군가의 전생인양 걸어둔 채

 

한 사내와 여인의 전생이 빚어지는 방에서

한 생은 사내로 나머지 한 생은 여인으로 각기 삼십을 살다가

가야할 곳이 후 생이 아니라 이 생이라는 사실을

지금 당신은 누군가의 전생으로부터 잘못 빠져나가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 가작

가시리 / 박성준(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2학년)

 

너를 거기에 묻어두고 내가 여기서 희미하게 몸을 연다

 

목련꽃이 가지를 잊는다. 나무와 헤어진 꽃잎은 예민한 바람의 손톱들. 그렇게 가시리 가시리잇고. 후두둑 깍여 나간 너의 호흡이 가만히 허공을 밀면, 나뭇가지마다 하얀 물이 흘러나왔다. 나무가 몸을 열기 시작했다고, 따가워, 따가워! 내가 너의 눈동자를 불 때처럼 가늘게 대지의 어깨가 떨리기 시작했다고. 네 몸 속을 유연하게 떠다니던 풍매화의 홑씨들이 후一 후一 제 살을 뚫고 흘러나온, 잃어버린 문장 하나를 만나면 나는 오래 전부터 이 자리에 서서 너를 불렀다. 눈물을 흘린 때마다 내 몸이 열리고 있었다고. 하얀 뼛가루가 부슬거리던 목소리로. 토라지지 못해 붉은 열병만 앓으며 위 증즐가 태평성대

 

너와 내가 서로의 틈을 껴안고 겹쳐지는 순간 이미 잃어버린 계절, 새들이 버리고 간 둥지는 나무의 심장이었을까. 한 때 풍성한 불빛이 나무의 내부를 휘젖고 뿌리마다 젖물 돋아 옹이딱지들 가려워지고, 축축해지고, 끈적해져도. 그렇게 가시리 가시리잇고. 나무는 다시 누군가, 제 몸에 들인다는 것이 두렵다. 헤어지던 그 순간 모습 그대로 목련꽃이 다시는 아니 올까 두려워, 온몸에 단추를 걸어 잠그고 나무껍질을 붙잡아 단단하게 움츠려 봐도 하얀 눈물샘은 아무도 막지 못할 거라고. 목련잎은 떨어지면서 먼 마음을 붙들고 나는 너와 늘 같이했던 자리에 가만히 손바닥을 대어 본다. 위 증즐가 태평성대

 

한 계절, 나무가 속앓이를 멈추면 대지의 심장이 뛰리라.

 

 

 

* 가작

거의 안개 / 윤유나(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 3학년)

 

고장 난 듯이 붉고 붉은 장미와 함께

나는

 

발뒤꿈치처럼 툭 튀어나온 이 길을 걸을 때면

몸속으로 안개가 꼈다 사라지곤 했다 그럴 때면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끊겼다

길 속으로 귀를 넣어 보곤 했지만 피아노를 찾을 수 없었다

우연인 척 우체통을 보며 냉장고를 생각했다

코드를 잘라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보도블록 보다 커다란 발자국을 그리면서

 

집으로 갔다 집으로 가지 않고서부터 집은 내내 감동적이지만

이젠 아무것도 그리지 않는다

다만

빈 가방을 버리고 싶다

열쇠는 버리고 싶지 않고

문방구에 가고 싶기도 하다

보고 싶은 사람이 없다고 중얼대다가도

미간을 구기며 연기한다

 

안개는, 이건 운명 교향곡이군

사랑은 아니 길은

사람을 빚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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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동백꽃치마 / 조윤희 (우석대학교 문예창작학과 1학년)

 

빨랫줄에 널린 엄마의 치마를 걷어 와요

방문을 꼭 잠그고 나는 몰래 치마를 입죠

치맛자락에 둥둥 떠다니던 동백꽃이 토독 눈을 떠요

내가 입고 풀썩 앉아 널따란 동그라미 그리면

방바닥에 주름진 푸른 우물이 생겨나죠

 

우물 속에 고개를 숙이고 속눈썹을 담궈요

내 눈동자에 목젖을 감추고 있던 꽃망울이

엄마의 두레박 같은 웃음처럼 풍덩 피어나요

나는 빨간 동백 숲 가운데 천막을 치고 앉아

불그스레한 볼에 머뭇거리는 바람을 맞고요

깊은 우물 밑바닥에 꽁꽁 숨겨져 있던

엄마의 캄캄한 자궁을 상상하며 나는 익어가지요

 

나는 가장 붉은 동백꽃을 우물에 던지고는

시치미 떼며 엄마의 뱃속으로 다시 들어가요

그곳에는 내가 우물 밖으로 태어나지 않을 때

꽃을 던지며 긴 머리칼 날리는 엄마가 있죠

천막을 치고 앉아 젖어가며 나를 기다려요

낮잠을 주무시는 엄마는 이제 이끼가 가득한데요

나는 엄마 모르게 어른이 되지요

 

 

* 가작

망종(芒種) / 이승욱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3학년)

 

비가 그치고 마당에 나가 젖은 자전거를 닦는다

근 석 달 만에 비다운 비가 내렸다 걸레로

안장을 닦고 내친김에 살대도 군데군데 닦는다

걸레를 접는데 엷은 녹이 묻어나온다 페달도

거꾸로 돌려서 소리를 들어본다 생각보다

잘 돌아간다 그늘진 마당가엔

흙지렁이 몇 마리 기어나와 꾸불텅거린다

힘을 구부린 곳마다 빛이 반사한다

가뭄이 생길 때부터 오랜 시간을 저렇게

더딘 몸으로 기어왔을 것이다

주름을 잡고 펼치며 온 몸을 밀었을 것이다

제대를 하고 한 여자를 만났다 헤어지고

잘 배우던 간판일을 그만둔 지도 반 년이 지났다

광대뼈처럼 메말라가던 그 반 년이

너무 쉽게

마당을 따라 뒤로 밀려간다 그늘처럼

어찌할 도리 없이 밀려간다

 

 

 

* 가작

초록의 여린 눈이 되어 / 이현정 (경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3학년)

 

오랜 시절엔 우리도 아주 조금은

여린 식물의 눈을 하고 허공을 더듬었을지도 모를 일,

우리가 볕을 쬐며 광합성을 하는 동안

눈은 저절로 감겨 팔 다리는 나른해지고

온 몸 가득 초록이 번져

열에 들뜬 날이 많아질수록

우리는 모든 그리운 이름을 흙에 부쳐

물길을 더듬으며 꽃대를 키웠던 것 같다

땅이 긴 울음을 울며 밤의 수레바퀴를 굴릴 때에도

결코 잠듦 없이 허공과 공허의 사잇길을 달음질쳐

머나먼 동으로 귀를 열었을 것이다

가끔 내 몸 속이 간질거리고

목이 마르고 볕이 그리워지면은

아주 오래 전 내가 초록이었을 적

이름들이 깨어나는 것 같아

펌프질한 물들이 눈물샘에 말갛게 고여

온 몸의 감각을 흔들 때에도

나는 슬프지 않았나 보다

바람에 휘청거리는 오후,

그 졸음 겨운 시간에 가만히 내 안을 들여다보면

아직도 초록의 여린 잎새들이 많아

간질거리는 봄볕을

삭정이 마디마다 있는대로 구겨넣고

맨땅에 등을 대고 가만히 눕고 싶을 때가 있다

초록이 벙글어지는 온 몸에

봄물이 수포처럼 잡히고

하늘 향해 펼친 열 손가락에

명주바람 앉았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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