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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기둥 / 문보영

 

 

도서관에 간다. 밖에서 볼 땐 가로로 긴 직사각형이나 들어가면 첨탑이다. 높은 벽은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달았다. 너무 큰 창은 벽을 약하게 하며 창은 지나가는 것을 모두 수긍해버린다는 나의 생각이 틀렸다고, 도서관 사서인 에드몽 자베스는 말한다.

 

에드몽이 쓴 글라스의 왼쪽 알에 달린 얇은 줄은 어깨까지 드리운다. 이곳은 천장이 아주 높다, 생각하자 책을 높이 쌓아야 하니까, 에드몽이 대답한다 그는 램프의 뚜껑을 열어 기름을 채운 뒤 촛불을 켠다.

 

서가에는 책만이 있다 책들은 기둥 모양으로 쌓여 있다. 그 주변을 난쟁이들이 서성인다. 난쟁이들은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가로로 비틀어 책의 제목을 살핀다. 책기둥의 가장 아래쪽을 살핀다. 읽고 싶은 책은 늘 기둥의 가장 아래쪽에 있다 나는 읽고 싶은 책을 머릿속으로 떠올린다. 그러자 그 책은 기둥의 가장 아래 위치한다.

 

책기둥들은 어디론가 기울었다. 나는 기울어진 건물을 떠올린다. 피사의 사탑과 같이 똑바로 서지 못한 것들에 사람들은 환호한다.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것이 주는 감동은 책기둥이 주는 그것과 유사하다. 기우는 것은 어디론가 편향되니까 겉은 꼿꼿하나 안은 어디론가 치우친 인간의 몸을 떠올린다. 심장은 왼쪽으로, 간은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으므로 사람은 똑바로 걷는다. 기울어진 건물은 내부에 벽으로 치우쳐 자는 사람을 기른다, 는 내 생각을 읽은 에드몽이 나 대신 내 생각을 말한다.

 

그는 지팡이로 바닥에 널브러진 장서들을 옆으로 치우며 길을 만든다. 이따금 난쟁이들의 숱 없는 작은 머리를 지팡이로 내려친다. 난쟁이들이 독서에 집중하지 않아서라고 말하는 그는, 책기둥에 등을 대고 앉아 책에 푹 빠진 난쟁이들만을 골라 때린다.

 

난쟁이들이 책기둥을 무너뜨리고 원하는 책을 얻는다. 다시 기둥을 쌓는다. 난쟁이들은 책을 때리고 책을 향해 침을 뱉고 욕설을 퍼붓는다. 그럴 만도 하다, 고 나는 생각한다. 책은 무례하니까. 책은 사랑을 앗아 가며 어디론가 사람을 치우치게 하니까. 벽만 바라봐서 벽을 약하게 만드니까. 벽에 창문을 뚫고 기어이 바깥을 넘보게 만드니까.

 

난쟁이들은 맨 아래 깔린 책을 얻기 위해 기둥을 무너뜨린다. 책은 쌓여 기둥이 된다. 기운다. 치우친다. 쏟아진다. 다시 쌓인다. 맨 아래 깔린 책을 읽으면 그 위에 쌓인 모든 책을 다 읽은 거나 다름없다고, 그 한 권의 책은 그 위에 쌓인 책들을 집약한다, 는 나의 생각이 안일하다고 에드몽은 꾸짖는다. 햇살이, 몇 가닥 되지 않는 얇고 구불구불한 난쟁이들의 머리칼에서 반짝인다. 빛이 그들의 오래된 생각을 때린다. 난쟁이들은 이제 지친 게 아니겠냐고 생각하는 나는 아직 책을 덜 읽었다, 고 에드몽이 말한다.

 

 

 

책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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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회 김수영문학상에 신예 시인 문보영(25)이 선정됐다.

 

30일 김수영 문학상을 주관하는 민음사는 "178명의 시인이 50편 이상의 시집 원고를 투고한 2017'김수영 문학상'에서 수상의 영예는 신예 시인 문보영이 가져갔다"고 밝혔다.

 

수상작은 '책 기둥' 52편이다. 고려대 교육학과 출신의 문 시인은 2016년 중앙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심사위원 김나영(문학평론가)"문보영 시의 담백하고도 에너지 넘치는 문장 이면에는 삶과 세상을 대하는 시인의 용기와 정직한 태도가 두텁게 자리하고 있을 것"이라고 평했다.

 

심사위원 조강석(문학평론가)"아쉬움과 결여조차 또 한 번 배신당하기를 희망할 만한 작품들이라는 것이 최종 결론"이라며 "또 하나의 사건이 되기를 희망하며 문보영 시인의 수상을 축하한다"고 전했다.

 

문 시인은 "별 이유 없이 시를 쓴다""시를 쓰는 순간만 아프지 않고, 시를 쓰지 않는 나머지 시간이 너무 지루하다. 사람들은 손잡이가 없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문으로 생각하지 않는데 시를 쓸 때만큼은 사람의 무릎이나 겨드랑이 아니면 허벅지에 난 점 따위에 달린 작은 손잡이가 보이며, 열릴 리 없지만 왠지 열고 싶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수상 소감을 밝혔다.

 

수상작은 격월간 문학잡지 '릿터' 9호에서 공개되며 수상 시집 '책 기둥'으로 만날 수 있다. 수상 시인에게는 상금 1000만 원이 수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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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의 물 / 안태운

 

 

그는 안에 있고 안이 좋고 그러나 안으로 빛이 들면 안개가 새 나간다는 심상이 생겨나고 그러니 밖으로 나가자 비 내리고

비는 믿음이 가고 모든 맥락을 끊고 있어서 좋다고 그는 되뇌고 있다 그러면서 걸어가므로

젖은 얼굴이 보이고 젖은 눈이 보이고 비가 오면 사람들은 눈부터 젖어 든다고 그는 말하게 되고 그러자 그건 아무 말도 아닌 것 같아서 계속 드나들게 된다

얼굴의 물 안으로

얼굴의 물 밖으로

비는 계속 내리고 물은 차오르고 얼굴은 씻겨 나가 이제 보이지 않고

 

 

 

감은 눈으로 / 안태운

 

꿈으로부터 내쳐진다. 감은 눈으로, 일부러 눈 뜨지 않고 걸으면 나와 함께 내쳐진 논이 있고 논 위로 걷는 내가 만져진다. 보이지 않는 눈앞에서 그러나 내가 만진 것들은 다 사라지고 사라진 것들은 내 손을 멈추게 하고 손은 어둠에 익숙해진다. 걷고 난 후의 일들은 다른 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짚이 타고 있다. 눈 뜨면 꿈과 함께 내쳐졌다.

 

 

 

감은 눈이 내 얼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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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자로 안태운(30) 시인이 선정됐다고 상을 주관하는 민음사가 4일 밝혔다. 수상작은 '탕으로' 50편이다.

 

민음사는 4“135명의 시인이 각기 50편 이상의 시집 원고를 투고한 올해 김수영 문학상에서 독특한 개성을 드러내는 에너지와 확고한 시 세계를 이끌어가는 능숙한 전개가 돋보이는 안태운 시인의 탕으로49편이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고 밝혔다.

 

심사에 참여한 강정 시인은 "유동적인 세계를 담아내고 있는 그의 시는 지하에서 지하로 흐르는 물처럼 언뜻 봐서는 눈에 띄지 않지만, 들여다볼수록 강한 기운이 느껴지는 문장들이었다. 지하에만 머물지 않고 간간이 지상으로 도약하는 듯한 문장의 꿈틀거림도 함께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수상작은 다음달 발행되는 격월간 문학잡지 '릿터' 3호에 실리고 단행본 시집 <탕으로>로 출간된다. 시상식은 다음달 20일 오후 730분 강남역 카페 빈브라더스에서 안 시인의 시집 낭독회로 열린다. 상금은 1000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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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최대화 / 황유원

 

 

화물칸에 일렉기타를 한 만 대쯤 싣고 가는 세상에서 가장 길고, 무거운 마음

 

그 속을 누가 알겠냐마는 철로만은 알지,

짓밟힌 몸길이를 짓밟힌 시간으로 나눠 기차가 절망하기 시작한 지점에서부터 자기 합리화에 성공하는 지점까지 걸린 속도를 계산해내며 자기를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짓밟고 가는 기차의 무게를 참고 견디지

 

기차가 아무리 짓밟고 가도 손가락도 발가락도 잘리지 않는 건 손가락도 발가락도, 아무것도 없어서

 

손가락을 잃은 기타리스트는 알지 흉측한 음악을 만들 바에야 약을 먹고 죽는 게 낫다는 걸

발가락이 없는 애벌레는 알지 발가락이 없으면 기어서라도, 가고 싶은 곳엔 가고 봐야 한다는 걸

 

말하자면 비시각적 음표들의 시각적 극대화

 

그러나 약은 치료하기도 하는 것,

병명보다 더 많은 치료제를 잔뜩 싣고 가던 기차가 마침내 말기에 다다라 포기하고 탈선할 때

눈 내린 들판에 처박힌 기차에서 동그란 알약들이 쏟아져나올 때의 기분이란

 

그 기분 누가 알겠냐마는 환자들만은 알지,

환자들은 꿈속에서 거기까지 걸어가 그 약을 모두 주워 먹은 다음날 아침 병실에서 깨어나 기차의 차가운 몸을 이해하지 넘어진 채 몸을 뒤로 돌리던 기차를 이해하며 몸을 정확히 당신들 반대편으로 돌리지

 

현실도피는 없어, 현실의 최대화만이 있을 뿐

 

오늘밤 그들의 기도가 기차처럼 길어져 결국 지구를 몇 바퀴씩이나 돈 기도들의 속도가 기차를 조금씩 허공에 뜨게 해 마침내 이륙한 기차를 바라보며 철로가 난생처음으로 편안해질 수 있다는 희망,

을 품자마자 기차는 곤두박질치고

지진처럼 지축이 흔들려 복부를 강타당한 남자처럼 철로가 신물을 토할 때 신물 위로 기타가 쏟아지는 기분

 

그 기분은 누가 알까

침대에서 굴러떨어져 꿈에서 엎질러진 아이나 알까

 

아무리 길게 써도 저 레일에는 모자랄 것이므로 여기서 그만둬도 상관은 없겠지만

 

고요한 밤, 캐롤을 싣고 가다 넘어져 모두 엎질러버린 아주아주 거룩한 밤, 깨진 전구를 뛰어넘어 크리스마스의 본질을 거침없이 이해하고 산타를 엉망진창으로 때려눕히고

 

지구가 한 바퀴 돌기 전까지 기타를 모두 수리해야 하는 수리공의 마음은 망가진 리프(riff)들을 밤새 고치고 있는 기타리스트밖에 모르지

너에겐 싣고 가다 넘어져 모두 엎질러버릴 만한 그 무엇이 있나? 넘쳐서 어쩔 수 없이 들켜버리는 리듬이라도 있니?

넘쳐서 어쩔 수 없이 들켜버리는 리듬을 타고 비옥한 꿈속을 달리다 넘어지는 곳이 늘 절벽 앞이어서 느껴보는

아찔함, 그 뒤에 웅크리고 앉아 그 리듬을 정면으로

견뎌본 적 있니!

 

구겨진 리듬을 잘 펼치면 과연 어디까지 펼쳐질 수 있을지, 무엇까지 덮어볼 수 있을지를 가늠하며 최대한 붉은 와인을 박스째 주문해

 

뱃속에 와인을 만 박스나 싣고 가는 기차가 오늘밤 도무지 몸을 가누지 못하는 이유를 누가 이해하겠냐마는

사랑을 한 박스나 마시고도 제대로 서 있는* 조니 미첼은 이해하지, 어쩌면 술집을 이름표처럼 달고 다니다 이름을 아무 데서나 콸콸 쏟아버리던 에이미 와인하우스**도 이해하지

 

잠시 동안의 짧고 굵은 경악과 모든 최대화에 따르는 극심한 부작용, 그때마다

벌어진 가랑이 사이로 경적을 울리며 긴 열차 한 대 빨려 들어오는 느낌, 결국 일망타진 당하고 마는 느낌을

 

너무 긴 문장에겐 이제 그만, 쉼표를

 

* Joni Mitchell, A Case of You중에서.

** Amy Winehouse.

 

 

 

세상의 모든 최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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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는 제34회 김수영문학상 수상자로 황유원(33) 시인이 선정됐다고 14일 밝혔다. 수상작은 '세상의 모든 최대화' 50편의 시다.

 

서동욱 심사위원(시인·평론가)"가식 없이 절실한 시적 정황들이 주는 무게감을 시편 하나하나가 고르게 성취하고 있는 황유원의 진지한 세계는 매우 드물고 값지다"고 평했다.

 

수상작 가운데 7편은 계간 '세계의 문학' 겨울호에 실린다. 수상작을 모두 담은 시집 '세계의 모든 최대화'는 이달 중 민음사에서 출간된다.

 

상금은 1천만원이며 시상식은 오는 22일 오후 5시 서울 강남구 신사동 민음사 사옥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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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 박수 / 기혁

 

 

자동차 트렁크에 실린 소나무가

허공으로 뿌리를 내밀자,

지상도 지하도 아닌 나라가 생겨났네.

 

그 나라 시민들은 블랙 러시안이나

화이트 러시안 표정을 지으며

허공에 허파를 만들고

심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네.

 

몇 번의 눈사태와 크리스마스가

달궈진 아스팔트 아래 묻히는 동안,

독재자를 연기하는 배우를

지도자로 추대하기도 했네.

 

그 나라의 모든 병명은 비유였으므로

의사는 처방전 대신

시를 적어 내밀곤 했지.

 

엘리베이터를 천사라고 부르게 된 건

그 나라의 돌림병 때문이었네만

하늘을 나는데

꼭 혁명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네.

 

천사를 타기 위해 필요한 중력을

사람들은 서로를 껴안으며 마련했고

그것을 적분해

사랑이라 부르기도 했었네.

 

떠돌이 악공의 연가가 끝나 갈 무렵

+에서 -로 전류가 흐르는 건

기타 줄만이 아니었다는군.

 

잊었는가? 소나무가 뿌리내린 곳에는

사철이 없다는 걸 말일세.

 

여름이 끝나고 드라마가 찾아오고 있다네.

천사가 지나간 자리는 모두

그들의 박수일 따름이었네.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 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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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민음사와 계간 '세계의문학'이 주관하는 제33회 김수영문학상 수상자로 시인 기혁(35)이 선정됐다.

 

수상작은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 박수' 51편으로 지난 19일 시집으로 출간됐다.

 

심사위원들(김혜순·김기택·서동욱)"시집 전체를 통틀어 자신의 시 스타일을 끝까지 견지하고 한 편 한 편에서 긴장을 놓지 않았다"고 평했다.

 

기씨는 2010'시인세계'에 시 부문 신인상을 받으며 문단에 나왔다. 2013'세계일보' 신춘문예(평론)로도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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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파 공동체 / 손미

 

 

그러니 이제 열쇠를 다오. 조금만 견디면 그곳에 도착한다. 마중 나오는 싹을 얇게 저며 얼굴에 쌓고, 그 아래 열쇠를 숨겨 두길 바란다.

부화하는 열쇠에게 비밀을 말하는 건 올바른가?

 

이제 들여보내 다오. 나는 쪼개지고 부서지고 얇아지는 양파를 쥐고 기도했다. 도착하면 뒷문을 열어야지. 뒷문을 열면 비탈진 숲, 숲을 지나면 시냇물. 굴러 떨어진 양파는 첨벙첨벙 건너갈 것이다. 그러면 나는 사라질 수 있겠다.

 

나는 때때로 양파에 입을 그린 뒤 얼싸안고 울고 싶다.

흰 방들이 꽉꽉 차 있는 양파를.

 

문 열면 무수한 미로들.

오랫동안 문 앞에 앉아 양파가 익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때때로 쪼개고 열어 흰 방에 내리는 조용한 비를 지켜보았다. 내 비밀을 이 속에 감추는 건 올바른가. 꽉꽉 찬 보따리를 양손에 쥐고

 

조금만 참으면 도착할 수 있다.

한 번도 들어간 본 적 없는 내 집.

 

작아지는 양파를 발로 차며 속으로, 속으로만 가는 것은 올바른가. 입을 다문 채 이 자리에서 투명하게 변해 가는 것은 올바른가.

 

 

 

양파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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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와 계간 '세계의 문학'이 주관하는 제32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자로 손미(31) 시인이 선정됐다. 수상작은 '양파 공동체' 49편의 시다.

 

심사위원들은 "양파 하나가 쪼개지는 사건 속에서 우주를 보여 주는 시인이다. 세상과 인간의 마음을 통과하는 무시무시한 동요(動搖)가 유리의 실금과도 같은 식물의 결 속에서 섬세하게 그려진다"고 평했다.

 

수상작은 20일 단행본으로 출간되며 부상으로 상금 1천만원이 주어진다. 시상식은 20일 오후 5시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강남출판문화센터 내 민음사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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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관조 씻기기 / 황인찬

 

 

이 책은 새를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새를 다뤄야 하는가에 대해 다루고 있다

 

비현실적으로 쾌청한 창밖의 풍경에서 뻗어

나온 빛이 삽화로 들어간 문조 한 쌍을 비춘다

 

도서관은 너무 조용해서 책장을 넘기는 것마저

실례가 되는 것 같다

나는 어린 새처럼 책을 다룬다

 

새는 냄새가 거의 나지 않습니다. 새는 스스로 목욕하므로 일부러 씻길 필요가 없습니다.”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읽었다 새를

키우지도 않는 내가 이 책을 집어 든 것은

어째서였을까

 

그러나 물이 사방으로 튄다면, 랩이나 비닐 같은 것으로 새장을 감싸 주는 것이 좋습니다.”

 

나는 긴 복도를 벗어나 거리가 젖은 것을 보았다

 

 

 

구관조 씻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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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민음사와 계간 '세계의문학'이 주관하는 제31회 김수영문학상 수상자로 시인 황인찬(24)씨가 선정됐다. 수상작은 '구관조 씻기기' 54편이다.

 

심사위원단은 "언어에게 옷을 입히는 방식이 아니라 언어를 씻기는 방식을 통해 새로운 시적 경험을 선사하는 황인찬의 시는 예술적인 다양한 '방법론'을 지워 버리는 희귀한 '방법론'으로 최근 우리 시에서 볼 수 없었던 농도 짙은 개성을 드러내는 데 성공했다"고 평했다.

 

상금은 1000만으로 선인세 방식으로 지급된다. 시상식은 1213일 오후 5시 서울 신사동 강남출판문화센터 내 민음사에서 열린다.

 

한편, 1988년 경기 안양에서 태어난 황씨는 중앙대 문창과를 졸업했다. 2010'현대문학' 신인추천으로 등단했다. 현재 동인 ''에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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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 / 서효인

 

 

평화는 전투적으로 지속되었다. 노르망디에서 시베리아를 지나 인천에 닿기까지, 당신은 얌전한 사람이었다. 검독수리가 보이면 아무 참호에 기어들어가 둥글게 몸을 말았다. 포탄이 떨어지는 반동에 당신은 순한 사람이었다. 10분 정도는 늦게 도착했고, 의무병은 가장 멀리 있었다. 지혈하는 법을 스스로 깨우치며 적혈구의 생김처럼 당신은 현명한 사람이었다. 전투는 강물처럼 이어진다. 통신병은 터지지 않는 전화를 들고 울상이고, 기다리는 팩스는 오지 않는다. 교각을 폭파하며, 다리를 지나던 사람을 헤아리는 당신은 정확한 사람이다. 굉음에 움츠러드는 사지를 애써 달래며 수통에 논물을 채우는 당신은 배운 사람이다. 금연건물에서 모르핀을 허벅지에 찌르는 당신은 인내심 강한 사람이다. 허벅지 안쪽을 훔쳐보며 군가를 부르는 당신은 멋진 사람이다. 노래책을 뒤지며 모든 일을 망각하는 당신은 유머러스한 사람이다. 불침번처럼 불면증에 시달리는 당신은 사람이다. 명령을 기다리며 전쟁의 뒤를 두려워하는 당신은 사람이었다. 백 년이 지나 당신의 평화는 인간적으로, 계속될 것이다. 당신이, 사람이라면.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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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민음사와 계간 '세계의문학'이 주관하는 제30회 김수영문학상 수상자로 시인 서효인(30)씨가 선정됐다. 수상작은 시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 49편이다.

 

심사위원들은 "낯선 것이 낯익은 것에 닿고, 가장 낯익은 것이 가장 낯설어지는 순간을 체험케 했다"고 평했다.

 

상금은 1000만원이며 시상식은 1220일 오후 5시 서울 강남구 신사동 민음사에서 열린다.

 

한편, 서씨는 1981년 광주에서 태어나 2006'시인세계'로 등단했다. 시집 '소년 파르티잔 행동 지침' 등을 펴냈다. 동인 '작란'에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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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없는 토끼에 관한 소수 의견 / 김성대

 

 

함구

함구는 조금씩 우리를 달리게 하는지도 모른다

함구는 조금씩 바깥에서 깊어진다

여기는 속 없는 굴속 같군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바깥을 모으는

굴은 지상으로 입을 벌리고

토끼는 반시계 방향으로 굴을 오른다

빨간 눈은 데굴데굴, 먼저 굴러가 있다

있는 힘껏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리뛰기

토끼는 자신의 눈을 보면서 달리는 것이다

자신을 함구하는 빨간 눈이 토끼의 공률이다

 

아버지랠리

공률 제로의 아버지는 서식지를 오염시키지 않는다

청정 지역이 되어 버린 아버지

일제히 눈을 켜고 빨간 눈을 따라간다

뒤에서 보면 무릎을 공회전하고 있다

이 눈을 좀 꺼 줘

자꾸 늘어나는 눈을 끄고 싶다지만

제로에 제로의 공률을 가속해 천문학적 사십 세에 이른다

반시계 방향의 급커브를 꺾어져서야

오래 비워 두었던 눈을 한번 감아 보는 것이다

다시 빨간 눈이 들어오고 있다

아버지는 한밤중에 그 눈을 따라간다

 

아랍인 투수 느씸

느씸은 공을 쥐지 않고 던진다

긴 손금으로 공에 대해 기도하고

시간 속에 공을 놓는다

공은 한없이 느리지만 시간의 결을 타고

반시계 방향으로 공회전하기 때문에

아무리 정확한 타자라도 맞출 수 없다

공에 대한 기도가 시간을 휘는 것이다

그러나 공을 받을 사람은 없고

느씸은 자신이 던진 공을 노려보느라 눈이 충혈된다

공은 젖어 가고 느씸의 눈은 폭발하고

빨간 눈이 흩어지고 흩어진 눈들이 느씸을 바라보고 있다

그가 던진 공은 눈먼 그만이 받을 수 있다

 

납굴증

밤의 소리들이 만질 수 없는 귀를 음각한다

귀 가득 무엇이 이리 무거울까

귀가 뜨거워질 때까지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

귀는 말라 가고 우는토끼,

몸 안을 반시계 방향으로 돌고 있다

몸을 얻고 나서 몸 밖으로 나오기가 어려워진

이 밤은 누군가의 눈 속 같군

눈알이 염주가 될 때까지

이 밤을 모으고 있는 눈은 누구의 것인지

우는토끼 속의 우는토끼

돌아보는 눈까지 멈추고

한 벌 귀로 남은 밤

 

미결

이것은 관점의 문제가 아니다

긴 귀,

피가 미치지 않을 만큼 긴 귀가 결론을 뒤집지는 못했다

눈알을 반시계 방향으로 굴리며

관점을 덜어 내고 있는

그들의 정신만큼 안전한 곳은 없다

없는 귀 가득 명료한 결론들

정신은 없는 귀에 순응하는 것이다

귀가 좁아졌기 때문은 아닐까요?

끊임없이 자신을 듣는 귀 안쪽이 비리다

이름이 너무 길거나 붙일 수 없거나

귀의 기억만으로 그들은 자신을 기를 수 있는 것이다

귀가 없다면 계속 지켜봐야겠지만

눈이 없다면 계속 귀 기울여야겠지만

 

 

 

귀 없는 토끼에 관한 소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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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민음사와 계간 세계의 문학이 주관하는 제29회 김수영문학상을시인 김성대씨(38)가 수상한다. 수상작은 귀 없는 토끼에 관한 소수 의견55편이다.

 

심사위원단은 깊이 있고 폭이 넓은 이미지를 자유롭게 활용해 스케일이 큰 시를 빚어내는 능력이 돋보인다간결하고 선명하게 구성하는 시적 방법이 감각적인 데다가 장인의 솜씨도 느껴진다고 평했다.

 

상금은 1000만원이다. 시상식은 1217일 오후 5시 서울 강남출판문화센터 민음사에서 열린다. 이날 수상작을 묶은 단행본도 출간된다.

 

강원 인제 출신인 김씨는 한양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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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차의 건축 / 김경주

 

 

오르골이 처음 만들어질 때 유리통 속으로 들어가는 바람은 음악에 고이는 태풍이 되고

오르골에 조금씩 금이 갈 때 유리통 속으로 들어가는 바람은 그 음악을 태풍으로 만든다

 

립파이를 먹고 싶을 때에는 립파이를 먹고

죽은 시계를 차고 여행 가고 싶을 때는 죽은 시계를 차고 여행간다

어떤 여행지에서는 살구와 자두를 아직 구별하지 못한다

 

오전엔 박하향이 나는 담배를 물고 불을 끄러 가는 소방관을 보았고

오후엔 소방관이 박하사탕처럼 건물 속에서 녹는다

 

수업시간엔 세계지도를 펴 놓고 먼 도시들의 위도와 경도를 외웠는데

수업이 끝나면 독사를 잡으러 가기 위해 검은 봉지를 주우러 다녔다

 

밤엔 나무에 몰래 기어올라 앉아 있는 느낌보다 나무에서 떨어진 느낌으로

책을 본다 새벽엔 종이비행기보다 종이배를 더 많이 접었다고 고백하는 느낌

종이배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이봐 네 곁에 난 오래 앉아 있었다구

내가 공책에 갈겨 쓴 아주 많은 글자들이 밤에 지우개 속으로 모두 들어가 사라진 날의 느낌

 

인도향을 선물받은 날 다리를 좀 절었고 시차에 대해서 오래 생각했다. 집에서만 지내는데도 망각이 필요하다는 사실,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옮기는 데에도 기억은 수십 종의 식물을 달고 간다. 어쩐지 너의 여행을 이야기하기 위해선 많은 종의 연필이 필요할 것 같아서 흑말을 탈까? 백말을 탈까? 청기를 들까? 백기를 들까? 여행은 태도의 문제라기보다는 침묵의 차이 같아...

 

내 현기증이 조금 잘 팔리는 이유는 졸음과의 싸움같은 것인데

네 수증기가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내가 모르는 마을 속에서 언제나 네가 눈을 감고 있기 때문일 거야 과민한 날 합격통지서를 받은 것처럼, 아침에 손톱을 자르고 저녁에 손톱을 잃어버렸다고 우는 아이처럼, 부모의 섹스를 처음 훔쳐본 날의 몽연함처럼 나는 <붉은 책 암송대회>에 나가 우승을 하고 온 엄마를 번쩍 들어 올리며 말했다.

 

유산같은 건 필요 없어요. 대신 엄마의 멀미를 내게 다 주세요

 

누군가 내게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넌 고향을 꽃다발처럼 평생 벽에 거꾸로 말릴 생각이니?’

누군가에게 언젠가 이렇게 말할 날이 올 것이다. ‘주머니를 뒤집으니 강아지 사료 한 알이 나옵니다.’

 

유리창에 입김으로 그려놓은 건축들이 흘러내린다

그건 시차를 이해해 가는 가장 아름다운 머릿속의 물방울들

배우기 위해 태어난 사람은 스무 살도 안 되서 양미간을 찌푸리고 나쁜 감정에 진학하기 위해

나는 침묵의 보병이 되었다. 부재의 영역에서 말은 별로 대수롭지 않은 역할을 할 뿐이고

시는 그곳을 오고 가는 내 인종人種에 불과하다. 간직하기를 원하는가 그러면 자신의 시차를 돕기를.

 

 

 

시차의 눈을 달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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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자로 김경주(33) 시인이 선정됐다.

 

문학상을 주관한 민음사와 계간 '세계의 문학'은 김씨의 시 '연두의 시제' 50편을 김수영문학상으로 선정했다고 24일 밝혔다. "감각과 정서를 급습해 미적 자극을 주고, 그것을 활동하게 하는 힘으로 생생한 미적 울림을 보여준다"는 심사평이다.

 

2003'대한매일'(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김씨는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기담' 등을 펴냈다. 2009년 오늘의 젊은 예술상과 시작문학상을 수상했다.

 

상금은 선인세 형식으로 1000만원이 지급된다. 다음 달 11일 단행본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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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윙 / 여태천

 

 

커피 물이 끓는 동안에 홈런은 나온다.

그는 왼발을 크게 내디디며 배트를 휘둘렀다.

좌익수 키를 훌쩍 넘어가는 마음.

제기랄, 뭐하자는 거야.

마음을 읽힌 자들이 이 말을 즐겨 쓴다고

이유 없이 생각한다.

살아남은 자의 고집 같은,

 

커피 물이 다시 끓는 동안의 시간.

식탁 위에 놓인 찻잔을 잠시 잊고 돌아오는 시간.

오후 22637,

몸이고 마음이고 새까맣다.

20년 넘게 믿어 온 기정사실.

내 오후의 어디쯤에는 불이 났고 구멍이 뚫렸던 것이다.

방금 전 먹었던 너그러운 마음을

다시 붙들어 매는 데 걸리는

시간은 고작 17.

애가 타고 꿈은 그렇게 식는다.

 

오후 22654,

커피 물이 다시 끓지 않는 시간.

식탁 위로 찻잔을 찾으러 오는 시간.

커피는 아주 조금 식었고

향이 깊어지는

바로 그때

도무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을 때

국자를 들고 우아하게 스윙을 한다.

 

 

 

스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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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와 계간 '세계의 문학'이 주관하는 제27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자로 여태천(37) 시인이 28일 선정됐다. 수상작은 '스윙' 49.

 

동덕여대 교수로 재직 중인 여 시인은 2000'문학사상'을 통해 등단한 후 2006년 첫 시집 '국외자들'을 냈다.

 

심사위원들은 "여태천 시인은 말의 최소화로 여백을 창조하는 시, 의미의 증식이 아니라 의미의 붕괴를 통해 여백을 창조하는 시를 씀으로써 무기교의 기교를 선보였다"고 평가했다.

 

상금은 1천만원이며 시상식은 내달 10일 오후 서울 강남출판문화센터 내 민음사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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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표범 여인 / 문혜진

 

 

낯선 여행지에서 어깨에 표범 문신을 한 소년을 따라가 하루 종일 뒹굴고 싶어 가장 추운 나라에서 가장 뜨거운 섹스를 나누다 프러시아의 스킨헤드에게 끌려가 두들겨 맞아도 좋겠어 우리는 무엇이든 공모하기를 좋아했고 서로의 방에 들어가 마음껏 놀았다 무례함을 즐기며 인스턴트 커피와 기타의 선율 어떻게 하면 인생을 망칠 수 있을까 골몰하며 야생의 경전을 둘러보았지 그러나 지금은 이산의 계절 우리는 춥고 쉬 지치며 더, , , 젊음을 질투하지 하지만 네가 잠든 사이 나는 허물을 벗고 스모키 화장을 지우고 발톱을 세워 가터벨트를 푼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하이힐 벗어 던지고 사로잡힌 자의 눈빛으로 검은 표범의 거처에 스며들거야 단단한 근육을 덮은 윤기 흐르는 검은 밸벳 흑단의 전율이 폭발할 때까지 이제 동굴보다 깊은 잠을 자야지 도마뱀자리 운명, 진짜 내 목소리를 들려줄까?

 

 

 

검은 표범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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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와 계간 '세계의 문학'이 주관하는 국내 최대의 시문학상인 '김수영문학상' 26회 수상자로 문혜진(31) 시인이 30일 선정됐다. 수상작은 '표범약사의 비밀 약장' 49.

 

추계예대 문창과와 한양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한 문씨는 1998'문학사상'을 통해 등단해 시집 '질 나쁜 연애'를 펴냈다.

 

심사위원단은 "시인의 시는 이론의 틀에 맞춰 생산되는 작품들과는 다르다"면서 "페미니즘이나 생태주의 또는 자신의 여성상을 의식하고 쓰는 시들과 달리 자연스럽게 발아되거나 태어나거나 발효한 느낌을 준다"고 평했다.

 

수상자에게는 1천만 원의 상금과 상패가 수여되며 수상작품들은 조만간 민음사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된다. 시상식은 내달 17일 강남출판문화센터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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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가득 찬 책* / 강기원

 

 

네가 한 권의 책이라면 이러할 것이네

첫 장을 넘기자마자 출렁, 범람하는 물

너를 쓰다듬을 때마다 나는 자꾸 깎이네

점점 넓어지는 틈 속으로

무심히 드나드는 너의 체온에

나는 녹았다 얼기를 되풀이하네

모래펄에 멈춰 서서 해연을 향해 보내는 나의 음파는

대륙붕을 벗어나지 못하고

수취인 불명의 편지처럼 매번 되돌아올 뿐이네

네가 베푸는 부력은 뜨는 것이 아니라

물밑을 향해 가는 힘

자주 피워 올리는 몽롱함 앞에서 나는 늘 눈이 머네

붉은 산호(珊瑚)들의 심장 곁을 지나

물풀의 부드러운 융털 돌기 만나면

나비고기인 듯 잠시 잠에도 취해 보고

구름의 날개 가진 슴새처럼

너의 진동에 나를 맡겨도 보네

운이 좋은 날,

네 가장 깊고 부드러운 저장고, 청니(靑泥)에 닿으면

해골들의 헤벌어진 입이 나를 맞기도 하네만

썩을수록 빛나는 유골 앞에서도

멈추지 않는 너의 너울거림

그 멀미의 진앙지를 찾아 그리하여

페이지를 펼치고 펼치는 것이네, 그러나

너라는 마지막 장을 덮을 즈음

나는 보네, 보지 못하네

, 혹은 내 혼돈의 해저 언덕을 방황하는

홑겹의 환어(幻漁) 지느러미

 

* 라니 마에스트로(Lani Maestro)의 사진집 제목

 

 

 

바다로 가득 찬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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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에서 주관하는 제25'김수영 문학상' 수상자로 시인 강기원(49)씨가 4일 선정됐다. 수상 시집은 '바다로 가득 찬 책'이다.

 

계간 '세계의 문학'은 지난해까지 매년 한 해 동안 출간된 시집을 심사 대상으로 삼았지만 올해부터 등단 10년 이내 기성 시인은 물론 등단하지 않은 예비 시인으로까지 문호를 넓힌다는 취지로 공모제로 심사 방식을 전환했다.

 

올해 수상자 강씨는 1997'작가세계' 신인상에 당선돼 문단에 나왔으며 시집 '고양이 힘줄로 만든 하프'(2005)를 냈다.

 

민음사 측은 "최근 시의 경향이 일반 독자가 잘 이해할 수 없는 모호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과는 달리 강씨는 시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뚜렷이 나타냈으며 여성성에 대한 새로운 탐구를 시도했다"고 선정 이유를 설명했다.

 

강씨는 "많은 이들이 글쓰기를 천형의 고통이라 하지만 내면에 구멍을 뚫고 내 영혼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의 자리라고 생각한다""평범한 무명시인이 상을 받아 기쁘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시상식은 18일 오후 5시 신사동 강남출판문화센터 5층 민음사에서 열릴 예정이며 상금은 1천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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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민복

 

 

말랑말랑한 흙이 말랑말랑 발을 잡아준다

말랑말랑한 흙이 말랑말랑 가는 길을 잡아준다

 

말랑말랑한 힘

말랑말랑한 힘

 

 

 

[해설] 강화도 개펄에서 캐낸 말랑말랑한 힘 / 온전한 마음의 길을 펼쳐내는 개펄의 상상력

 

박용래 문학상과 제24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한, 함민복 시인의 네 번째 시집이다. 한국 서정시의 본류를 이어가는 대표적 시인으로 떠오르는 그가 강화도 생활을 시어에 담아냈다. 그곳에서는 끝없이 펼쳐져 있는 바닷길, 거대한 수평선이 거만한 문명을 일순간에 지운다. 시인의 마음도 밀려오고 다시 밀려가는 바닷물의 흐름과 함께 깨끗이 비워지고 또다시 채워지기를 반복한 지 10, 그의 마음은 뻘밭처럼 부드럽고 말랑말랑해졌다.

 

시 또한 뻘밭에서 캐낸 듯 펄떡이는 시어들로 가득 차 있다. 시인은 개펄의 '몰골'이야말로 길의 원형이라고 말한다. 개펄은 강과 달리 사람들이 걸어가며 만들어낸 길과 물이 스스로 찾아간 길이 결합되어 이루어진다. 이처럼 생명이 자리잡고 있는 부드러운 수평선은, 위로만 가려고 하는 인류의 욕망과 대비되면서 우리가 잊고 있었던 말랑말랑한 힘을 상기시켜준다.

 

또한 시인은 물길만 보지 않는다. 바다에서 눈을 돌려 하늘을 보면, 거기에는 살아 우는 글자를 찍으며 날아가는 기러기들도 있는 것이다. "요즘 내가 살고 있는 강화도에서 들을 만한 소리는 기러기 소리다. 하늘에서 나무대문 열리는 소리가 나 나가보면 수십, 수백 마리 기러기가 하늘에 글자를 쓰며 날아간다. 살아 우는 글자. 장관이다.” 의지만으로 개척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의 길이라면 개펄의 물골과 새들이 나는 하늘길과 같은 자연의 길은 우리가 바라보고 걸어가야 할 삶의 길이라 할 수 있다.

 

 

 

말랑말랑한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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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세계의 문학'이 주관하는 제24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으로 시인 함민복(43)의 시집 '말랑말랑한 힘'을 선정했다고 5일 밝혔다. 시상식은 28일 오후 5시 강남구 신사동 강남출판문화센터 5층 민음사에서 열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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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명한 산책 / 황인숙

 

 

아무도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

금빛 넘치는 금빛 낙엽들

햇살 속에서 그 거죽이

살랑거리며 말라가는

금빛 낙엽들을 거침없이

즈려도 밟고 차며 걷는다

만약 숲 속이라면

독충이나 웅덩이라도 숨어 있지 않을까

조심할 텐데

여기는 내게 자명한 세계

낙엽 더미 아래는 단단한, 보도블록

보도블록과 나 사이에서

자명하고도 자명할 뿐인 금빛 낙엽들

나는 자명함을

! ! 걷어차며 걷는다

내 발바닥 아래

누군가가 발바닥을

맞대고 걷는 듯하다

 

 

 

자명한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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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민음사와 계간 세계의 문학이 주관하는 제23회 김수영문학상 수상자로 시인 황인숙(46)씨가 선정됐다. 수상시집은 자명한 산책이다. 시상식은 1210일 서울 신사동 강남출판문화센터 5층 민음사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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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막대기와 꽃뱀과 소녀와 / 이윤학

 

 

집에 가는 오솔길이 있었다.

길게 머리를 따 묶은 소녀가 있었다.

유월의 풀밭 안으로 스며드는

오솔길을 걷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가장 아름다운 시절.

딱딱하게 굳은 땅바닥 위에

떨어진 꽃 막대기가 있었다. 소녀는

의심을 품어본 적이 없었다.

 

꽃 막대기에 대한 소녀의 설렘!

 

손을 가져가자

꽃 막대기는 금세

꽃뱀으로 변했다.

 

꽃 막대기와 꽃뱀과 소녀는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꽃 막대기와 꽃뱀과 소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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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세계의 문학이 주관하는 제22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자로 시인이윤학(38)씨가 선정됐다. 수상시집은 꽃 막대기와 꽃뱀과소녀와(문학과지성사)이다.

 

본심 심사를 맡은 문학평론가 김우창씨는 시인의 시가 요즘의 현란한수사로부터 멀리떨어져 있으며, “시와 삶의 기본을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고선정이유를 밝혔다. 시상식은 19일 오후 5시 서울 신사동 강남출판문화센터 5층민음사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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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 / 채호기

 

 

수면 위에 빛들이 미끄러진다

사랑의 피부에 미끄러지는 사랑의 말들처럼

 

수련꽃 무더기 사이로

수많은 물고기들의 비늘처럼 요동치는

수없이 미끄러지는 햇빛들

 

어떤 애절한 심정이

저렇게 반짝이며 미끄러지기만 할까?

 

영원히 만나지 않을 듯

물과 빛은 서로를 섞지 않는데,

푸른 물 위에 수련은 섬광처럼 희다.

 

 

 

 

수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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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 계간지 세계의 문학이 주관하는 21회 김수영 문학상수상자로 시인 채호기씨(45·문학과지성사 대표)가 선정됐다. 수상 시집은 수련’(문학과지성사)이다. 채씨는 대구 출신으로 서울예전 문예창작과와 대전대 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1988년 계간 창작과 비평을 통해 등단, ‘지독한 사랑’ ‘슬픈 게이’ ‘밤의 공중전화등의 시집을 발표했다. 시상식은 1210일 민음사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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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꽃 여인숙 / 이정록

 

 

요구르트 빈 병에 작은 풀꽃 심으려고

밭두둑에 나가 제비꽃 옆에 앉았다

나잇살이나 먹었는지 꽃대도 제법이고, 뿌리도 여러 가닥이다

그런데 아니, 뿌리 사이에 굼벵이 한 마리 모로 누워 있다

아기부처님처럼 주무시고 있다

 

한 송이는 하늘 쪽으로

한 송이는 포대기 속 잠결 아래로

그리고 또 한 송이는 곁에 잇는 감나무 가지를 향하고 있다

저 감나무에 올라 울음보를 터트릴 거라고 입술을 떠는 꽃잎들

어떻게 본래의 이부자리대로 제비꽃을 심어놓을 것인가

요구르트 빈 병 허리를 매만지다가, 안에 고여 있는 젖 몇 방울을 본다

몸통만 남아 있는 불상처럼, 지가 뭐라고 젖이 돌았는가

 

울음보만 바라보며 몇 년을 기다려온 굼벵이

그 아름다운 허리를 오래 내려다본다

할 말 아끼다가 멍이든 제비꽃에게도 합장을 한다

문득 내 손가락의 실반지 그 해묵은 뿌리에 땀이 찬다

제비꽃 아래의 고운 숨결에 동참하고 싶어

내 마음 감나무 새순처럼 윤이 난다

 

흙 속에 살되 흙 한 톨 묻히지 않고, 잘 주무시고 계신다

이미 흙을 지나버린 차돌 하나,

살짝 비껴간 뿌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먼 훗날의 제 울음주머니만 굽어보고 있다

사랑은 언제나 여러해살이라고, 그리하여

차돌 같은 사리로 마음 빛나는 것이라고

 

 

 

제비꽃 여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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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가 주관하는 제20회 김수영문학상 수상작에 시인 이정록(李楨錄·37)씨의 제비꽃 여인숙이 선정됐다.

 

유종호 황동규 최승호씨 등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에 대해 말의 맛에 대한 섬세한 감수성과 살가운 상상력이 넘치는 시편이라고 평했다.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현재 홍성여고 한문교사로 재직 중인 이씨는 충남 홍성여고 한문교사로 재직중인 이씨는 이제 내 옷에도 단추 하나가 매달리게 되었으니 옷깃을 여미는 자세로 문학을 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그간 벌레의 집은 아득하다3권의 시집을 냈다. 시상식은 12월 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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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눈, 동백 / 송찬호

 

 

어쩌자고 저 사람들

배를 끌고

산으로 갈까요

홍어는 썩고 썩어

술은 벌써 동이 났는데

 

짜디짠 소금 가마를 싣고

벌거숭이 갯망둥이를 데리고

어쩌자고 저 사람들

거친 풀과 나무로

길을 엮으며

산으로 산으로 들까요

 

어느 바닷가,

꽃 이름이 그랬던가요

꽃 보러 가는 길

산경으로 가는 길

 

사람들

울며 노래하며

산으로 노를 젓지요

홍어는 썩고 썩어

내륙의 봄도 벌써 갔는데

 

어쩌자고 저 사람들

산경 가자 할까요

길에서 주워

돌탑에 올린 돌 하나

그게 목 부러진 동백이었는데

 

 

 

붉은 눈, 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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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가 주관하는 제19회 김수영문학상 수상자로 시인 송찬호씨가 선정됐다. 수상작은 올해 2월 출간된 시집 "붉은 눈,동백"(문학과지성사)이다.

 

동백나무부터 동백교도소에 이르기까지 동백이란 키워드를 여러 각도로 조명한 이 시집은 머리와 심장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온몸으로 밀고 나가려는 치열한 시작 자세를 지향한다”(시인 김광규)는 평을 받고 있다.

 

송씨는 1959년 충북 보은 태생으로 경북대 독문학과를 졸업한 뒤 1987"우리시대의 문학""금호강 변비"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송 시인은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민음사) ‘10년 동안의 빈 의자’(문학과지성사,1994) 등을 발표했으며 현재 시작 활동과 함께 충북 보은에서 축산업을 하고 있다.

 

시상식은 6일 오후 1시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강남출판문화센터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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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 백주은

 

 

세상이 하 수상하여

도 닦는 기분으로 두문불출,

면벽하다 간만에 집을 나섰더니

거리에서 누가 묻는다.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길에서 마주 서 있는 사람에게

이 무슨 어색한 질문일까.

점잖게 타이르려다 주위를 둘러보니

지금 어디에 계시느냐는 질문과

놀거나 쉬고 있다는 대답들이

그 무슨 시류가 된 듯싶네.

 

하 수상한 세월 탓에

사람들이 마음을 비워버린 것일까?

주고받는 대화들이 온통

선문답(禪問答)이 아니면 동문서답형이니

시대가 만드는 게 영웅만은 아닌가 싶네.

 

그래 세월이여 흘러가거라.

풍파여, 부서지거라.

이 몸은 남겠노라, 나의 벽 앞에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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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으로 백주은씨의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민음사)가 선정됐다.

 

지난 83년 단편소설 어떤 귀향으로 등단한 백씨는 방송평론 등으로 활약해 오다 올해 처음 발표한 시집으로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그는 "쓰고 싶었던 소재들을 시라는 개념보다는 쓸 거리, 읽을거리 개념으로 썼다""독자들에게 이 시집이 소화제와 같은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고 수상소감을 말했다.

 

심사진은 "백씨의 시는 독자를 고통스럽게 하는 언어의 유희를 배제하고 있으며 날카로운 현실감각과 세계에 대한 넉넉한 인식을 함께 지니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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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한 사랑 기계 / 김혜순

 

 

내가 몸을 팔기로 한 것은 값비싼 모피를 휘두르고 싶어서가 아니라, 외투를 어쩌면 이불이라도 덮어줄 따뜻한 손 때문에. 내가 몸을 팔기로 한 것은 섹스에 환장 들린 어린 것이 아니라, 하고 싶다고 말하는 거짓말하지 않는 입 때문에. 내가 몸을 팔기로 한 것은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끊임없이 찾아와주는 사람들의 외로울 틈새 없는 이어달리기 발자국 때문에. 내가 몸을 팔기로 한 것은 차가운 다독거림의 동상 걸린 손과 마음을 담보로 혀 속에 계산기를 받아놓은 입에 진저리를 쳤지만, 동상 걸린 손과 거짓말하는 입을 다시 기다렸기 때문에. , 불쌍한 사랑 기계

 

 

 

 

 

불쌍한 사랑 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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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운상가 키드의 사랑1 / 유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지독한 마음의 열병,

나 그때 한여름날의 승냥이처럼 우우거렸네

욕정이 없었다면 생도 없었으리

수음 아니면 절망이겠지, 학교를 저주하며

모든 금지된 것들을 열망하며, 나 이곳을 서성였다네

 

흠집 많은 중고 제품들의 거리에서

한없이 위안받았네 나 이미, 그때

돌이킬 수 없이 목이 쉰 야외 전축이었기에

올리비아 하세와 진추하, 그 여름의 킬러 또는 별빛

포르노의 여왕 세카, 그리고 비틀즈 해적판을 찾아서

비틀거리며 그 등록 거부한 세상을 찾아서

내 가슴엔 온통 해적들만이 들끓었네

해적들의 애꾸눈이 내가 보이지 않는 길의 노래를 가르쳐 주었네

 

교과서 갈피에 숨겨논 빨간책, 육체의 악마와

사랑에 빠졌지, 각종 공인된 진리는 발가벗은 나신

그 캄캄한 허무의 블랙홀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나 모든 선의 경전이 끝나는 곳에서 악마처럼

착해지고 싶었네, 내가 할 수 있는 짓이란 고작

이 세계의 좁은 지하실 속에서 안간힘으로 죽음을 유회하는 것,

내일을 향한 설렘이여, 우우

무덤은 너를 군것질하며 줄기차게 삶을 기다리네

 

내 청춘의 레지스탕스, 자상 위의 난

햇살에 의해 남김없이 저격되었지

세상의 열병이 내 몸 속에 들어와 불을 밝혔네

금지된 의 집어등이여, 지하의 모든 나를 불러내다오

나는 사유의 야바위꾼, 구멍난 영혼, 흠집 가득한 기억의 육체들을

별빛의 찬란함으로 팔아먹는다네

내 마음의 지하상가는 여전히 승냥이 울음으로 붐비고

나 끝끝내 목이 쉰 야외 전축처럼

해적을 노래부르고 해적의 애꾸눈으로 사랑하리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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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 구멍속의 폭풍 / 김기택

 

 

너무 오랫동안 사용해서 그의 육체는 낡고 닳아 있다. 숨을 쉴 때마다 목구멍과 폐에서 가르랑가르랑 소리가 난다. 찰진 분비물과 오물이 통로를 막아 바늘 구멍처럼 좁아진 숨구멍으로 그는 결사적으로 숨을 쉰다. 너무 열심히 숨을 쉬느라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 숨이 차면 자주 입이 벌어진다. 벌어진 입으로 침이 질질 흘러 나오지만 너무 심각하게 숨을 쉬느라 그것을 닦을 겨를이 없다.

 

밤이 되면 숨쉬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목구멍에서 그르렁거리는 낮은 소리는 때로 갑자기 강해져서 거목을 뽑고 지붕을 날려 버릴 것처럼 용틀임을 한다. 휘몰아치는 바람의 힘에 흔들려 그의 몸이 세차게 흔들리다가 이윽고 가래와 침을 뚫고 기침이 뿜어져나온다. 기침이 나올 때마다그는 목을 붙잡고 컹컹 젖으며 방바닥에서 뒹군다. 몸 속에서 한바탕 기운을 쓴 바람은 차츰 조용해져서 다시 허파에 얌전히 들어앉아 가르랑거린다.

 

필사적으로 바람을 견디다가 찢어진 비닐 조각처럼, 떨어져 덜컹거리는 문짝처럼, 망가지고 허술해진, 바람을 더 견디기엔 불안한 몸뚱어리를 그는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눕힌다. 조금이라도 호흡이 거칠어지거나 불규칙하면 몸 속에서 쉬고 있는 폭풍이 꿈틀거린다. 숨이 바늘구멍을 무사하게 통과하게 하느라 그는 아슬아슬 호오호오 숨을 고른다. 불손했고 반항적이었던 생각들과 뜨겁고 거침없었던 감정들로 폭풍에 맞서온 몸은 폭풍을 막기에는 이젠 너무 가볍고 가냘프다. 고요한 마음, 꿈 없고 생각 없는 잠이 되려고 그는 더 웅크린다.

 

 

 

 

 

바늘구멍 속의 폭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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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기질1 / 차창룡

 

 

쟁기질을 한다, 잡풀과 쓰레기와 먼지들이 서식하는 밭.

아버지는 밭주인의 묘를 벌초 해주기로 하고

몇 년이나 묵혀 놓은 그 밭을 갈고 있다.

잡초가 무성한 환자의 배를 수술하듯이,

신문과 텔레비젼에 마취된 이땅의 피부에 보습날을 댄다.

잡초로 뒤덮인 땅들이 뒤집어지고 부드러운 흙들이

태어난다. 지렁이가 모습을 나타내고 굼벵이가

어려운 걸음을 나선다. 빛 바랜 신문지가 아득한 사건 속으로 묻히고,

신문지 속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수천의 뼈들이 일어선다.

이러 이러 아버지는 소리를 질러대며 채찍을 휘두르고,

황소는 깜짝 놀라 펄쩍 뛰다 오줌을 싸고,

지렁이가 그것을 맞고 몸을 뒤튼다.

굼벵이도 그것을 맞고 움찔거리고, 수천의 뼈들도 그것을 맞고

희게 빛나고, 신이 난 보습날이 그들 사이를

다시 한번 지나간다. 날 끝으로 뼛조각이 묻어오고

뼛조각이 날 끝에서 땀을 흘린다. 이제는 뼛조각이

쟁기질을 하는지. 아버지와 황소는 힘든지도 모르고,

해가 넘어가도 넘어가지 않는 가난으로

쟁기질을 한다 쟁기질을 한다.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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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1 / 이기철

 

 

어떤 노래를 부르면 내 한 번도 바라보지 못한

짐승들이 즐거워질까

어떤 노래를 부르면 내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들도, 까치도 즐거워질까

급히 달려와 내 등 뒤에 연좌連坐한 시간들과

노동으로 부은 소의 발등을 위해

이 세상 가장 청정한 언어를 빌어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을 노래하고 싶다

나이 들기 전에 늙어버린 단풍잎들은 내 가슴팍을 한 번 때리고

곧 땅 속으로 묻힌다

죽기 전에 나무둥치를 감고 타오르는 저녁놀은

지상의 죽음이 저렇게 아름답다는 것을

가르치는 걸까

살이 연한 능금과 배들은 태어나 첫 번째 베어무는

어린 아이의 갓 돋은 치아의 기쁨을 위해 제 살을 바치고

군집으로 몰려오는 어둠은 제 깊은 속에다

아직 밤길에 서툰 새끼 짐승들을 위해

군데군데 별들을박아놓았다

 

우리가 아무리 높이 올라도

검은 새가 나는 하늘을 밟을 수는 없고

우리가 아무리 정밀을 향해 손짓해도

정적으로 날아간 흰 나비의 길을

걸을 수는 없다

햇빛을 몰아내는 밤은 늘 기슭에서부터 몰려와

대지의 중심을 덮고

고갈되기 전에 바다에 닿아야 하는 물들은

쉬지 않고 하류로 내려간다

들도 친숙해지면 우리의 외로움 덮어주는

이불이 된다

산과 들판에 집 없이도 잠드는 목숨을 위해

거칠고 무딘 것들을 달래는 것이

지혜의 첫 걸음이다

달콤하지 않아도 된다, 내 부르는 노래가

발 시린 짐승의 무릎을 덮는 짚이기만 하다면,

향기롭지 않아도 된다, 내 부르는 노래가

이슬 한 방울에도 온몸이 젖는 풀벌레의 날개를 가릴 수 있는

둥글고 넓은 나뭇잎이기만 하다면

 

 

 

 

 

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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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떼들에게로의 망명 / 장석남

 

 

1

찌르라기떼가 왔다

쌀 씻어 안치는 소리처럼 우는

검은 새떼들

찌르라기떼가 몰고 온 봄 하늘은

햇빛 속인데도 저물었다

저문 하늘을 업고 제 울음 속을 떠도는

찌르라기 속에

환한 봉분이 하나 보인다.

 

2

누군가 찌르라기 울음 속에 누워 있단 말인가

봄 햇빛이 너무 뻑뻑해

오래 생각할 수 없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나는 저 새떼들이 나를 메고 어디론가 가리라,

저 햇빛 속인데도 캄캄한 세월 넘어 자기 울음 가파른

어느 기슭엔가로 데리고 가리라는 것을 안다

찌르라기떼 가고 마음엔 늘

누군가 쌀을 안친다

아무도 없는데

아궁이 앞이 환하다.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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