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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괭이 한 자루 / 김상규

 

삽괭이 하나가 아버지를 짊어지고 서 있다.

논에 가서 삽괭이 대가리를 땅에 박고 막 흔들 때,

지렁이 한 마리가 걸려 넘어오지 않더냐.

고놈의 지렁이가 무시로 길어서

꼭 장마철 갈천(渴川) 같더라.

고놈의 지렁이가 배때기로 땅을 기는 것을 보니

꼭 네 어미가 네 나을 때 지르던 괴소리 같더라.

고놈의 지렁이가 눈도 없이 앞으로만 치달리니

꼭 내 인생과 같더라.

고놈의 지렁이가 땅으로만 대가리를 박는 걸 보니

네 할아버지가 보고플 때 마다 산소에 찾아가

머리만 주악거리는 내 꼴을 보는 것 같더라.

더 이상 밭일을 못하는 아버지가 아직도 나를 짊어지고 있다.

흙에서 흙으로 이어지는 내리사랑을 짊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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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꽃 / 이지원

 

여름이 마음 급해 손을 뻗을 즈음

우리 할매 앞마당엔 감꽃이 흐드러졌더라.

달짝한 감꽃 내가 온 마당에 스몄어도

억센 울 할매 생을 닮은 큰 손에는

매운 마늘 쫑대만 꽃다발처럼 묶여나가고

웅숭깊이 묻어 뒀던 고단함이

나지막한 가락 되어 흐르면

흙장난하던 손녀도 괜시리 마음이 맵더라.

이맘때쯤 돌아오던 큰아버지 제사에

시들은 감꽃마냥 앉아 있던 울 할매는

온통 생을 잃은 갈빛이더라.

스스로 제 몸을 썩히던 뒤뜰 병들은 나무와 같이

속으로 서걱서걱 부서지던 우리 할매......

들큰한 그 향내에 울렁이지 않던 이는

울 할매 밖에 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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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의 산조(散調) / 조이풀

 

누구는 가을비라 했고 누구는 장마라 했다.

가끔 번개 빛줄기 없는 천둥이 오기도 했고

낙엽이 되지 못한 시월 하순의 나뭇잎들이

알몸으로 비를 맞고 있었다.

그 아침 나는 단골로 드나들던

폐업한지 꽤 오래된 술집 앞에 서 있었다.

뽀얀 입김이 금세 성에가 되는 유리문 사이로 일간지며 고지서며

명세서며 독촉장이며 광고 전단지

수북이 쌓아둔 한숨들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를 못내 쫓겨났다고도 하고

외상이 많아 어려웠다고도 한다.

이혼을 했다고도 하고

눈 맞은 남자와 멀리 도망갔다고도 한다.

나는 짐짓 이 주인이 로또에 당첨되어 여길 떠났을 거라고 생각했다.

간다는 인사를 듣지 못했기에

이 자리 어딘가에는 남아있을

나와 내 친구들의 체취정도는 돌려줘야 하지 않겠는가

투덜대고 있었다.

비 내린다.

오늘은 퇴직하는 친구를 위하여

마음 빈 구석에 뎁힌 정종술 한잔 정도는 채워야 할 텐데

지금은 이 비가 내게 다가와서 술이 된다.

가을비라서 좋구나.

천둥 칠 때마다 빨간 홍시 하나 던져 줄 것 같아서 좋구나.

따듬따듬 적셔오는 시월의 산조라서 가을비 네가 좋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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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오던 날 / 홍희자

 

설핏 낮잠이 들었다 목마름에

깨어 냉장고 문을 열었다

 

하염없이 보고 있다

 

당췌....

닫고 말았다

 

텔레비전이 혼자 씨부렁거리는 게

말리는 시누이 같건만

리모콘은 혼자 머리 속을 돌아다닌다

벌레 먹은 나뭇잎사귀 같은 기억

 

버팅기는 발 끌어 올려

전원을 눌러 버렸다

 

 

병원을 가 보아야지

서랍을 열고 양말을 찾아 다시

손이 헤매고 있다

길을 모르는 바람 같은 마음

 

 

젊고 잘 생긴 의사양반의 공허한 소리

  - 기억력 검사 몇 가지 할께요

 

- 알츠하이머 치매 초기입니다

 

태풍이 시작이다.

 

 

 

  

   [심사평]

 

   30주년을 맞이하는 마로니에전국여성백일장에 응모된 작품들은 한편 한편이 모두 소중하게 다가왔다. 응모된 대부분의 작품들 속에는 삶에 대한 긍정적인 사유들과 모성적인 따뜻함이 들어 있었고 자신만의 시각으로 시제를 통찰하는 면이 돋보이는 작품도 적지 않았다.

   장원으로 뽑힌 「태풍 오던 날-치매랑 놀기」는 알츠하이머 치매 초기라는 진단을 받은 자신의 내면 풍경을 태풍이 시작되었다고 스스로 진단하고 형상화했다는 점이 돋보였다.

   우수상으로 뽑힌 「부부살이」는 부부가 되어 아이를 낳고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고양이 자세로’ 나의 나됨만을 강요하지 않고 간격없는 교감을 하고자 하는 시적 화자의 마음이 잘 전달되고 있다는 점을 높이 샀다.

   장려상을 수상한 「10월을 완성하다」는 가을풍경의 쓸쓸함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외로이 꿋꿋하게 ‘10월을 완성’하리라는 시적인 전언이 인상적이었다.

   수상의 기쁨을 누린 분들께는 축하의 인사를, 수상하지 못한 참가자들에게는 다음 수상의 행운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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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롱 속에 피어있는 숲 / 허환


우리 집 안방에는요

엄마가 결혼 할 때 혼수해온 오동나무 장롱이 있어요

오동나무 장롱은 결혼기념일 마다 심장에 동그라미를 그려요

오동나무는 지난날의 태엽을 추억으로 감는 중이예요


장롱 문을 열어보면 이불들이 싱싱한 숲으로 피어올라요

어렸을 땐, 몰래 자란 나무 그늘 아래에서

낮잠을 자기도 했던 걸요

그때마다 오동나무 숨소리는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 주었는지 몰라요

어린 나의 들숨소리가 열매들을 통통하게 불어 올리고

숲속엔 새떼들이 열쇠뭉치처럼 오종종 모여 있어요

종종 딱따구리가 나이테를 돌리고

햇빛이 부리 위로 미끄러질 때

바람은 쪼아놓은 나무들의 숨구멍을 더듬다 달아나고요

광활한 초원엔 얼룩말들이 벽돌 쏟아내듯 뛰어다녀요

나는 오동나무가 들려주는 자장가를 들으며

초원을 뛰놀고 있었을까요

장롱이 펼쳐놓은 어린추억으로 나들이 다녀온 셈이지요

낮잠이 몹시 몰려오는 한여름 날이에요


 

- 제12회 혜산 박두진 전국백일장 대상




나무 / 김시라


수풀을 향해 손을 뻗는 버드나무를 닮은 할머니

세월을 광합성하며 자라난 이파리 가지에 매달리듯

할머니의 등허리에도 세월이 걸려있다


기억의 새순이 더 이상 피지 않는 할머니는

자라나던 어린 나를 행해

가지를 내뻗으며 힘껏 끌어안았다


새싹들이 잎을 띄워낼 때마다

하얗게 센머리칼 하나 둘 떨구는

이제 할머니의 나뭇가지, 앙상하게 뼈만 남았구나


할머니의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은 저만치 흘러가고

오늘따라 할머니는 자꾸만

할아버지 계신 하늘을 향해 손짓하고 있다


그녀의 앙상한 버드나무 가지에

다시 새순을 띄어낼 수 없을까

나는 떨어진 잎들을 주워 기억들을 매달아본다

 

 


- 제12회 혜산 박두진 전국백일장 고등부 으뜸상




대금 안에는 산천이 있다 / 이현주


대금 안에는 산천이 있다

바람이 낳은 그대의 몸

대금 앞에서 그대는

바람으로 돌아가고 있다


지공을 열고 닫으며

취구에 숨을 불어넣으면

산천 사이로 생기는

바람의 길

길 위에서 망설이며 물결치는 것은

그대의 떨림이다

자진하지 못하고 기어이 되살아오는

기억이다


그대가 내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다

소리는 바람의 살결

우리는 살을 비비고 있는 것이다


바람이 산천을 스치는 소리

끊어지지 않는 흐느낌

대금 안에는 대숲이 있다

 

 


- 제12회 혜산 박두진 전국백일장 대학 일반부 으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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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 옥상 / 권여원

   

내 신혼의 꿈은 옥상에서 시작되었다

스티로폼 상자에 심은 부추와 과꽃은 철따라 피고

화분 하나는 옥상을 지키는 대문이었다

옥탑방이 할 수 있는 건 하늘을 끌어당기는 일

밤하늘의 별은 붙박이장이고

그믐달은 내일을 꿈꾸게 하는 베개였다

대리운전을 했던 신랑은 공복의 저녁도 잊은 채

밤하늘의 귀가를 총총 도왔다

도시의 절반을 헤매고 다닐 남편의 주행거리가

빛의 속도로 쌓여도 내 집 마련의 꿈은 저 별들처럼 아득했다

시어머니는 종종 아이 소식을 물었지만

벼랑처럼 흔들리는 옥상에서 아이를 키울 수 없어

나는 밤마다 마이보라*를 챙겨먹었다

남편이 도시의 불빛을 잠재우는 동안

늦게까지 구슬을 꿰며 시간을 굴렸다

새벽 고단한 잠을 겨우 눕히면

옥상으로 몰려온 바람이 문고리를 잡고 흔들었다

그해 겨울, 가파른 언덕을 넘으며

우리는 맹물에 별을 녹여먹었다

바라보면 아슬한 옥상에서 두 해를 견디다

낮은 곳으로 내려온 나는

그때부터 마이보라를 던져버릴 수 있었다

 

* 마이보라 : 먹는 피임약

 

 

 

 

 

 

 

 

[우수상] 옥상 / 이성자  

 

가을볕 소복이 쌓이는 옥상 빨랫줄에
중풍 맞은 노인이 낡은 스웨터를 널고 있다

 

헐렁한 왼팔을 허리춤에 끼워 넣고
흘러내리는 어깨 추스르며
구부정한 등줄기 몇 번이고 들썩거린다


젖은 스웨터에서 물방울이 떨어지자
출렁, 팔 하나가 흘러내린다
잠시 근심이 떠올랐다 사라지는 노인의 얼굴

 

가을 바람이 달려와 한 팔이 빠져나간 빈손을 흔들어본다


시나브로 가벼워지는 꽃무늬 스웨터
물먹은 꽃들이 모가지를 쳐들기 시작한다


옥상에 살던 바람이 지루한 오후를 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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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 / 이성자

  

 

가을볕 소복이 쌓이는 옥상 빨랫줄에
중풍 맞은 노인이 낡은 스웨터를 널고 있다

 

헐렁한 왼팔을 허리춤에 끼워 넣고
흘러내리는 어깨 추스르며
구부정한 등줄기 몇 번이고 들썩거린다

 

젖은 스웨터에서 물방울이 떨어지자
출렁, 팔 하나가 흘러내린다
잠시 근심이 떠올랐다 사라지는 노인의 얼굴

 

가을 바람이 달려와 한 팔이 빠져나간 빈손을 흔들어본다

 

시나브로 가벼워지는 꽃무늬 스웨터
물먹은 꽃들이 모가지를 쳐들기 시작한다

 

옥상에 살던 바람 지루한 오후를 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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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 김태형


누군가의 사연을 담은 종이

누군가의 눈물자국이 찍힌 종이

그 여러 종이 가운데

가슴 시리도록 살아 움직이는 종이가 있다.


곰팡이 핀 벽지아래 컬컬한 숨을 고르며

잠이든 어머니

반평생 구겨진 종이위에 자식 뒷바라지에

고단함으로 시커멓게 물든 삶을 적어오셨다.

새하얀 종잇장으로

세상에 처음 태어났던 그녀

무엇을 담아내는 것에 따라 가치가 결정되는 종이처럼

그녀는 자신의 삶을 비워내고

자식에 대한 사랑과 희생으로

자신의 종이를 빼곡하게 채워갔다.

눈물은 맑은 봄비가 되어 내렸고,

눈빛은 햇빛이 되어 행간사이로 세상을 비추었다.


그녀의 종이위에 이제는 쉼표를 찍어주고 싶다.

쉼 없이 내달려온 그녀의 생

꿈틀거리는 문장부호를 찍어 그녀의 삶을 위로하고 싶다.

잠시 생략했던 그녀의 꿈을 그리고

그녀의 어긋난 치열처럼 힘들었던 삶에

소박한 웃음을 흘려 넣고 싶다.

몸을 웅크리며 잠자리를 뒤척이는 어머니

그녀의 꿈결 같은 종이위에

거룩한 마지막을 담아낼

새하얗게 돋아나는 여백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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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혜산 박두진 백일장 

 

대상(대학일반부 포함, 문화체육부장관상) - 최슬기  (상금 50만원)

장원(고등부) - 손화정  (상금 30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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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 김은혜


어두운 골목길 입구 홀로 깨어 있는

작은 24시 김밥천국

훤히 들여다보이는 유리문 안에서

여자는 피아노 치고 있다

도마 위에서 손가락들이 흥얼거린다

검은 건반 둥글게 두드린다

끊어진 기억들이 스타카토처럼

손끝에서 튕겨나간다

소리들이 길게 말려지면

어둡고 둥근 터널이 된다

위태로운 여자가 검은 터널 끝에

비틀거리며 서 있다

긴 시간들이 쓸려간 자리,

그 끝에 떠나갔던 이들이 온다

어두운 터널 속으로 살며시

시처럼 가벼이 온다

그 자리에 어느새 봄날처럼 떠난

어머니가 늦가을처럼 서 있다

이쪽과 저쪽, 그 날선 끝과 끝

여자는 그 생채기들을 둥글게

말아내고 있다

건반 두드리듯 울음을 그 터널 안에

겨우 들려준다

여자는 칼로 터널을 자른다

터널 속에서 아주 작은 틈처럼

여자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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