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롱 속에 피어있는 숲 / 허환
우리 집 안방에는요
엄마가 결혼 할 때 혼수해온 오동나무 장롱이 있어요
오동나무 장롱은 결혼기념일 마다 심장에 동그라미를 그려요
오동나무는 지난날의 태엽을 추억으로 감는 중이예요
장롱 문을 열어보면 이불들이 싱싱한 숲으로 피어올라요
어렸을 땐, 몰래 자란 나무 그늘 아래에서
낮잠을 자기도 했던 걸요
그때마다 오동나무 숨소리는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 주었는지 몰라요
어린 나의 들숨소리가 열매들을 통통하게 불어 올리고
숲속엔 새떼들이 열쇠뭉치처럼 오종종 모여 있어요
종종 딱따구리가 나이테를 돌리고
햇빛이 부리 위로 미끄러질 때
바람은 쪼아놓은 나무들의 숨구멍을 더듬다 달아나고요
광활한 초원엔 얼룩말들이 벽돌 쏟아내듯 뛰어다녀요
나는 오동나무가 들려주는 자장가를 들으며
초원을 뛰놀고 있었을까요
장롱이 펼쳐놓은 어린추억으로 나들이 다녀온 셈이지요
낮잠이 몹시 몰려오는 한여름 날이에요
- 제12회 혜산 박두진 전국백일장 대상
나무 / 김시라
수풀을 향해 손을 뻗는 버드나무를 닮은 할머니
세월을 광합성하며 자라난 이파리 가지에 매달리듯
할머니의 등허리에도 세월이 걸려있다
기억의 새순이 더 이상 피지 않는 할머니는
자라나던 어린 나를 행해
가지를 내뻗으며 힘껏 끌어안았다
새싹들이 잎을 띄워낼 때마다
하얗게 센머리칼 하나 둘 떨구는
이제 할머니의 나뭇가지, 앙상하게 뼈만 남았구나
할머니의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은 저만치 흘러가고
오늘따라 할머니는 자꾸만
할아버지 계신 하늘을 향해 손짓하고 있다
그녀의 앙상한 버드나무 가지에
다시 새순을 띄어낼 수 없을까
나는 떨어진 잎들을 주워 기억들을 매달아본다
- 제12회 혜산 박두진 전국백일장 고등부 으뜸상
대금 안에는 산천이 있다 / 이현주
대금 안에는 산천이 있다
바람이 낳은 그대의 몸
대금 앞에서 그대는
바람으로 돌아가고 있다
지공을 열고 닫으며
취구에 숨을 불어넣으면
산천 사이로 생기는
바람의 길
길 위에서 망설이며 물결치는 것은
그대의 떨림이다
자진하지 못하고 기어이 되살아오는
기억이다
그대가 내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다
소리는 바람의 살결
우리는 살을 비비고 있는 것이다
바람이 산천을 스치는 소리
끊어지지 않는 흐느낌
대금 안에는 대숲이 있다
- 제12회 혜산 박두진 전국백일장 대학 일반부 으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