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갓집 / 조정옥
요령소리가 밤공기를 가르며 올라갔다.
외갓집 장독대에 까치발 하고 넘어보다가
박수무당의 춤사위에 넋을 놓다가 휙 마주치 눈
연신 허리를 굽히고 손을 비비는 등 위로
한 무리의 새떼가 날아올랐다
나무 상 위 흩어진 쌀에 새의 발자국이 찍혔다고 했다
어머니의 어머니는 죽어서 새가 되었다고
한 번도 고향 마을을 떠난 적 없는 할머니가
요령소리를 따라 새가 되어
돌담을 넘었다고
처음 보는 눈동자에 쫓겨 다니는 꿈을 꾸었다
주름지고 어둡게 핏발 선 눈 하나
거울 속에서 바라보고 있다
할머니를 닮은
새의 눈을 닮은
한 무리 새떼가
외갓집 마당을 돌아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외갓집 / 최옥선
-수수밭가에서
주인 없는 외갓집 텃밭 가에
검붉은 수수,
오지게도 열렸다.
굴뚝에 연기 오를 일 드물었던
가난한 유년시절,
싸리대문 기웃대던 숫기 없는 나를
툇마루에 앉아 참빗으로 머리 빗던
청상의 외할머니.
손짓하며 부르신다.
“수숫대를 베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아.
잘 벼린 낫으로 단번에 거침없이 베어야지.”
슬픔도 아픔도 베어버리고
참아내는 법을 가르치셨던 외할머니.
어디선가 들리는 아기 염소
울음소리에
처마 밑 수숫대 평화롭게 말라가고,
할머니 무릎 베고 듣던 옛이야기는
전설처럼 아득하다.
억센 바람이 분다.
가을을 심하게 타던 외할머니.
90번째 가을을 놓치셨다.
곡기를 끊은 지 열흘이 넘었다는
외숙모 전화에
배앓이 할 때 끓여 주셨던
수수죽을 쑨다.
씹기도 전에 술술 넘어가던
수수죽을 할머닌 한 숟갈도
못 넘기셨다.
보랏빛 혈관이 드러나 보이는
도라지꽃처럼
뼈와 가죽만 남은 몸피를 만져본다.
마른 수숫대 같다는 생각에
목울대를 치고 왈칵 울음이 차오른다.
늑골 아래 감추어있던 아픔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린다.
시퍼렇게 벼린 낫을 들고
아픔을 베려 나선다.
가꾸는 주인이 없는데도
뿌리 내리고 열매 맺은
왕성한 생명력,
손목에 힘이 주어진다.
“그래, 살자! 살아가자.”
툇마루 몰래 올라보려던
들 고양이 한 마리
화들짝 놀라 달아난다.
아파트 / 최예슬
이곳은 불멸의 바람으로부터 상속받았다
닳아빠진 시간의 축이 쓸쓸한
정물들을 토해 놓고 기울어져 있고,
인왕궁 맨숀 하얀 외벽은
빗살무늬 균열을 미간에 그려 넣고
모래내 길의 주인 행세를 한다.
나는 맨숀이면서도 맨션인
주소란에는 가끔 아파트이기도 한
기원이 불분명한 소심한 우주에 세 들어 있다.
임자 잃은 세간들이
먼지 같이 달라붙어 쌓여만 가고
옥상에는 삼십년 전 기억을 버무리는
빈 장독대가 웅크리고 있다.
낡은 계단을 내려갈 때면
삭아버린 지지대 지붕보다,
음탕한 도발을 꿈꾸는
낙서들이 문신처럼 새겨진
시멘트 외벽이 유용한 곳이다.
그리고 아득한 홍제동 골목
삼십년 기억의 가장자리에 맞닿은
나의 최초의 세계이자
마지막 우주인 우신아파트가 있다.
그곳에서 돌아나오던 수많은
길위에서 나는
달그림자 비춰지는 풍경 위로
덧그려진 시간 축의 정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의 아파트에는 작은 악어가 산다
방금 늪에서 헤엄쳐 올라온
싱싱한 꼬리가 파닥거리는
나는 악어의 눈이 되고 가죽이 된다.
오래전에는 맨숀이었고
지금은 아파트인 이곳에서
나는 이제는 아무도
그리워하지 않을 기억의 조각들을
용접하는 시인이 된다
나의 세계와 마주하는
악어는 가만히 최초의 악수를 건넨다
악어의 눈과 기억을 닮은
축축한 늪지의 물이
서서히 차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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