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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 신미영


나는 변두리 출신이다.

그래서 키가 작다.

흙이 더 잘 보인다.

흙 속에 사는 지렁이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나는 키가 작아서 몸이 가볍다.

한 계절의 황홀한 몸빛마저 버리고 나면

나는 바람 속으로 둥둥 떠다닐 수 있다.

가장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날 수 있다.


지상에서는 질경이 씀바귀가 내 친구지만

이 곳에서는 새들이 내 친구다.

나도 그들도 모두 고향이 변두리다.


변두리에서는 밤에도 별이 초롱초롱하다.

매일 밤 우주의 변두리에 사는 별들이 찾아온다.

그들과 우리는 같은 사투리로 이야기한다.


그래서 변두리에는 늘 사투리가 무성하다.

이리저리 줄기를 뻗으며

때묻지 않은 야생의 이야기꽃을 피운다.


 

 



핸드백 / 이경숙


무명 앞치마 곳곳에 꽃이 피었다

바늘 끝에 모였을 순간순간들로

짙은 향 없었던 어머니

젖은 손 꽃잎에 문지르시다

꽃잎만 적시고

낡은 앞치마의 꽃처럼

져버린 어머니 다시 피지 않았다


금장 모자 쓴 아버지 지프에서 내린

새엄마는 반짝이는 구슬로 왔다

어린 나는 가지런히 열려 있는

핸드백의 구슬이 탐이 나 침을 삼켰다


그 날 이후

영악한 오래비는 책상을 떠나지 않았다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건 이게 전부야

철없는 내 손목 잡아끌어

책상 앞에 앉힐 때

나는 반짝이는 구슬을 훔치고 싶었다


동생의 피아노 소리가

맨발의 나를 거리로 내몰고

거리에 선 나는

은행나무로 때론 은단풍나무로 살았다


구슬 박힌 핸드백을 산다, 이 가을

끝내 훔칠 수 없었던 새엄마의 허영과 사랑 속에서

자유로운 지금

치매 중인 새엄마의 머리맡에 놓아 둘 내 가을을


 

 


골목 / 배은별


엉켜 있는 골목 어깨를 붙인 집들이 널려 있다


문패 없는 문들은 열리지 않고, 나는 그들이 벗어 놓은 그림자를 본다


아내에게만 힘자랑하는 털보가 구겨진 채 흔들, 그 옆으로 새벽 두 시가 넘어 지쳐 들어오는 털보 부인이 찌든 음식냄새 매달고 축 늘어져 있다 해가 져야 분냄새 풍기며 나가는 1층 미미의 브래지어는 시멘트 사이에 핀 붉은 꽃처럼 집게도 없이, 지하방 갓난쟁이 울음소리 젊은 아비 품에 안겨 바람 따라 나풀거리고, 방구석에 처박혀 담배만 태우는 백수청년 누런 팬티가 자기소개서 되어 펄럭!


나는 그 옆으로 가 나를 매단다 마르지 않는 헛헛한 가슴이 햇볕을 기다린다


삶아도 빠지지 않는 때묻은 빨래들이 물을 흘리며 널려 있다


꿈꾸지 않았던 삶이 흔들릴 때마다 가는 빨랫줄이 휘청, 금방이라도 풀썩 내려앉을 것 같은 603-22호 한숨이 몰아친다


익명의 낙서가 가득한 담벼락 사이로 제 몸보다 큰 불룩한 자루를 끌며 폐지 줍는 노인이 들어온다


또 한번 골목이 휘청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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