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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실개천 / 박선민(고등부)

 

실개천은 견고한 실학實學이다.

누구든 이 가늘고 긴 배움 앞에서

반나절만 앉아 있으면

벌떡 일어서는 깨달음을 알게 된다.

 

독실한 본분을 몰두하는 실개천은

훌륭한 포장사이기도 하다.

푸른 논배미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반듯하게 묶고 있다.

실개천을 흘러가는 물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한 땀 한 땀 논을 깁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가로질러 묵직한 궁리 몇 개 놓아두고

누구든 발 젖지 않고 건너가라는

조언 같기도 하다.

 

실개천 끝에는

작은 돌다리들이 매달려 있고

또 실개천 끝에는

푸른 논배미가 달려 있다.

그러니까 실개천은 물의 오솔길이다.

 

커다란 강이 풀리는 소리

논과 논을 연결해 꿰매고 있는 소리가 밤낮을 새우고

오랜 시간을 한 번도 끊지 않고

흐르는 실개천은 바느질법이다.

 

음계를 열어놓고 실개천에

발을 첨벙거리면 아이들의 음악 시간이 펼쳐진다

 

넘치는 강을 허물어

마음을 감싸고 흐르는 실개천은

구휼을 베푸는 박애주의자일 것이다.

 

 

 

 

 

[으뜸상] 숲 속에 가다 / 차유오(고등부)

 

할머니 숲 속에 첫발을 딛자

소멸해 버린 잎들이 가득 날렸다

낡은 검정 고무신을 따라 숲길을 걸을 때면

나무그늘로만 내 손을 이끌던 할머니

늘 잘 익은 열매 한 알을 따서 내게 건네셨다

잘 익은 알알을 따라 구르던 생이 재생되고

알싸한 맛에 코끝이 찡해 미간을 잔뜩 찌푸리던 나

어렸을 적 가난에 배를 곯으면

선산 뒤에 숨어 개딸기를 훔쳐 먹었다던 할머니는

배탈이 나고 두드러기를 앓고 했더랬다.

이제는 먹고살 것이 늘어났는데도

여전히 뜰에 앉아 숲을 배부르게도 바라보는데

바치춤에 딸기를 한 아름 담던 할머니의 소매엔

이미 붉은 물이 스며들고

허리춤까지 따라 든 노을을 가만히 바라보던 나

아물면 다시 짓무르고

짓무르면 다시금 아려오던 삶의 생채기 속에서

할머니는 얼마나 힘드셨던 걸까

광 밑에 숨겨둔 오동나무 지게의 나이테가

오늘따라 더욱 선명하기만 한데

숲 속으로 희미해지던 마지막 발자국을 찾아

빈 숲을 찾아 온종일 헤맨다

빨갛게 짓무르던 생애의 골목에서

수줍게 딸기를 따 먹던 소녀는

오동나무 지게에 실려 숲으로 희미해져 갔는데

주인 잃은 열매들만 선명히도 피어나는 걸까

할머니 숲 안으로 사라진 오늘

서쪽 너머로 녹음이 짙기만 하다

 

 

   

 

[으뜸상] 숲의 기억 / 안지숙(대학 일반부)

 

팔레트의 갈라진 물감들이 하늘에 흩뿌려진다

거대한 메아리들이 경계를 품고 온몸을 휘감는다

사내가 연두, 라고 발음을 하자

되돌릴 수 없는 사월의 봄이 지나갔다

고개를 주억거리는 꽃들은 단단히 주먹을 쥐고

나무와 나무의 간격은 더 멀어진다.

 

사내의 얼굴이 흐려진 계곡 물에

그녀의 얼굴이 떠오른다

복숭아를 베어 물자 입에 침이 고인다

바람의 방향을 따라 새들이 흘러가고

나이테처럼 부푼 배를 안고 사라진

그녀가 여기 있다.

 

들끓는 아기의 울음으로

계곡 물이 흐른다

사내의 발목이 자꾸만 사라진다

젖은 화장지처럼 찢어지는 사내의 조각들

연두, 라고 입술을 모으면

거대한 숲이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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