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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 / 강순미

―그 가벼운 수다처럼

 

소문은 가벼운 수다로 시작했다


이른 아침 지하의 어둠을 타고

어깨를 드러낸 골목을 지나

마을을 벗어난 말이

명랑하게 젖어들고 있었다


구린내 밤이슬 털어내

통일로변 튼실해진 은행 서 말

문산장에 내다 판 명호네

연시물 떨어지는 가을 맞으러

설악으로 떠났다며

혀의 길을 열어주는 어머니


닳아진 만성 관절염에

구절초 흐드러진 둑길도 멀어지고

이제는 갈비뼈 사이까지

바람이 숭숭 올라온다고


불현듯 차고 둥근 호흡에

귓속을 더듬다 보면

깊어진 소리 언저리에서

서성이던 아버지

잎의 문을 열고 나온다고


귀를 검게 하던 달콤한 혀

푸념처럼 뜨거워져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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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쉼표 / 최분임

- 은행나무모자

 

늘 푸른 아파트 놀이터 은행나무가

중절모 모자를 신고 있다


아이들이 파헤친 은행나무 뿌리 위에

일회용밴드처럼 붙여진 모자

쉼표로 앉아 있다

오랜 노숙의 발바닥처럼

헤지고 갈라졌다

 

시큼한 낯선 냄새를 식솔처럼

달고 다니는 노숙자처럼

아침이면

모자는

낯선 길 하나 달고 있거나

이름 모를 풀씨들을 알처럼

품고 있기도 했다


어둡고 찬 몸뚱이 바닥 위로

희미한 온기의 손바닥 내밀던

신문지 한 장의 기억을

펼치면,

보였다

은행나무가 제 안을 뒤져

폐허 같은 모자의 맨발위로

건네주던

물 묻힌 손수건 몇 장

상처는 그늘이 드나드는

열린문 같았다


반쯤 풀린 눈으로

하루를 어슬렁거리다가

이내 한 조각 박스 위에

오래 걸은 길 부려놓고

쉼표처럼 졸고 있는 시간 위로

놀이터 떠들썩한 하루가

집으로 돌아가자

모자가 은행나무를 벗어

노숙으로 지친 제 몸의

노란 남루를 털고 있다


공터 같은 겨울 지나

모자가 툭툭,

자리를 털고 일어서면

초록 눈의 새싹 하나가

밤새 덮고 있던 우주,

신문지 한 장 빼앗긴

떠돌이 잠처럼 두리번거리며

제 움막을 찾고 있는


 

 

 

쉼표 / 양윤정


오래된 기억 끝에 맺히는

까무룩 잃어버리는

왔던 길 지워져, 돌아갈,

가야할 길 찾지 못하는

그저 타오르며 자라난

지나온 매듭만큼 타오르고 떨어져 내리는

38년 뒤에도 네 등에 기대어 키워온 눈물 쏟을 수 있을까

사막을 건너는 자들의 고여진 달을 네 등에 담뿍 부어줄 수 있을까


달을 삼킨 그 여자 검은 머릴 치렁거리며 따라 나왔네. 치자꽃 하얗게 질려 툭툭 제 몸을 던지는 계절이었네. 내 뒤를 다가오던 그녀, 내 앞을 질러가기 시작 했을 때, 그녀 등에 붙은 저승을 보았네. 거꾸로, 거꾸로 매달려 삶을 뒤돌아 낚은 세월의 빈 자루 왜 저렇게 무겁게 끌고 가는 것인가 그녀에게 물었네. 돌아 본 그녀 눈에 하얀 소금 사막이 가득 펼쳐져 있었네. 그 사막 헤매다 만난 작은 오아시스에 비춘 그 사막 속에 걸어 온 길이 새로 난 길인 줄 알아 돌고 돌아오고 다시 그 길속으로 떠난다는 사실을,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 길을 가면서, 태양이 뼈를 누이고 달이 옷을 벗은 그 길에 서서 멈추어 서서 알게 되었네.

 

 

 

쉼표 / 김후자


여자가 누웠다

누에처럼 간간히 뒤척이며

낮은 신음소리를 냈다

모로 누운 여자의 등이 시리다

사막을 횡단하며 지하셋방을 떠돌던

긴 여정의 짐을 풀고

이제 여자가 누웠다


짓무르고 부르튼 몸

늙고 병든 몸에서 꽃물이 터진다

덤불속을 헤매던 몸이 이제사

상처를 들어내는지

붉은 욕창이 화인처럼 박혔다


햇살이 눈부신 오후

또 누군가 지상에서 멀어지는 듯

남은 자들의 오열에

낡은 벽이 가늘게 흔들렸다

병실 밖으론 천지사방 꽃잎이

하르르 날리고

여자도 눈을 감았다


살아생전 꽃구경 소원이라

입버릇처럼 말하더니

산 벚나무 꽃길을 달려가는 듯

영정사진 위에 그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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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천하장사 / 김순복


우리 아파트에는 천하장사 아줌마가 산다

남편 실직한 지 석 달째

수제비를 뜨는 날이 많아진 그녀

수제비에도 기교가 필요하더군

무조건 치대기만 하는 게 아니더라고

한 세상 약삭빠른 요령처럼

수제비가 한 수 가르쳐 주더군 반죽이

중요한 거라고 이를테면

적당한 타협 포기할 땐 쿨하게

너무 무뚝뚝해도 감칠 맛이 없거든

궁상의 은유마저 하하 웃으며

풀 죽은 남편에게 얘기해줘야겠다는 그녀


밤새 봉제 인형의 눈을 달다

눈 빠질 뻔 했다며 웃는 그녀

앉은 자리가 꽃자리라며 퍼질러 앉아

눈도 붙이고 마음도 붙이고

삶을 꿰매는 마지막 한 땀으로

생활을 붙이는 여자

그러나 끝내 떨어진 꿈 하나는 못 붙여

가슴에서 별을 꺼내 노래를 부르는 그녀

떨어진 꿈뭉치에서 남루의 먼지 풀풀 날리지만

하하하 웃으며

아프지만 않으면 된다

다 괜찮다는 힘센 그녀


심술궂은 어제와 찡그린 오늘이

천하장사 그녀 앞에서 뒷머리를 긁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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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문씨 / 안수정

 

우리동네 문씨네 빌라 B03호에는 쉰줄의 문씨가 살고 있다. 쨍쨍한 햇볕 한 줌 시원스레 들 날 없이 밤낮으로 어둑신한 반지하 B03호에 문씨는 8년째 세들어 살고 있다.

부산에서 큰 슈퍼를 하며 쉴 새 없이 큰 돈을 세던 8년 전 문씨의 민첩한 손길은 이제 아침마다 두살 박이 조카아이와 씨름하며 삐둘빼둘 땋은 머리칼 속으로 스며들고 있다.

그러나 열한 가구가 모여사는 조씨네 빌라에 유일하게 대문이 열려 있는 집은 문씨네 B03호이다. 그 열린 문으로 사람들이 허물없이 드나든다.

점심으로 수제비 한 상 차려놓고 형님 아우하며 한 술 입안에 우겨넣으며, 자식을 넷이나 두고 도망간 H빌라 지하방의 못된 며느리 얘기며, 새로 이사온 D빌라 지하의 치매 걸린 노부부가 날마다 문을 두들겨댄다는 투덜거림을 깍두기보다 더 맛있는 반찬 삼아 우걱우걱 씹어 삼킨다.

그렇게 우리동네 이야기는 문씨네 B03호로 흘러들어와 휘돌아 계단을 타고 역류해 우리 동네로 흘러간다.

조씨네 빌라에 사는 문씨네 B03호는 우리동네의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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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 이혜순

-지금, 그 숲속에선

 

호기심 많은 새벽이 드르륵 문 연다

종소리처럼 눈 부릅뜨고 첫 기차 터널 지나간다

터널 옆구리로 새어 나온 푸른 소음 계단 내려가며 똑똑 조간 신문을 돌린다

신문에서 뛰쳐나온 여자가 달그락 검은 활자를 요리하면 눈 없는 먼지들 풀풀 입맛을 다신다

창으로 달아나는 씩씩한 근육질의 어둠 잠 덜 깬 숲으로 난다, 날아간다

쓰레기봉투 뒤지던 야생 고양이 수염이 가느다란 햇살로 반짝거린다

노란 태양이 가득 알을 부화해 놓은 숲속, 칠순의 늙은 돌 알을 주물럭거린다

알 속에서 깨어나오는 햇살 구더기들 긴다, 기어간다

태양 헬스장으로 쭉 가지 뻗은 단풍나무 잎사귀 붉다, 화끈거린다

단풍나무 등에 햇살이 줄줄 터진다

아! 이 싱그런 오르가즘

이 노란 태양 눈알들 붉은 눈알들이 단풍나무 잎사귀에 꽃잎처럼 터진다

버려진 FM 라디오가 풀밭 위에서 먹다 남은 햇살을 스트롱으로 빤다

죽은 안테나가 소리를 감지한다

미소 치과로 날아가는 붉은 은행나무 잎이 라디오의 노래를 흥얼거린다

가을이 드르럭 문 여는 소리에 나를 뚫고 나온 묽은 잎사귀 숲 속에 나풀나풀 주저앉는다

내 가는 나무 밑동에 링거를 꽂으며 방긋 지나가는 붉은 바람,

시월이다

 

 

 

우리동네 / 김영숙

 

섬은 잡식을 한다

일요일 오후가 되면 트림을 하느라 어지럽다

트림을 할 때마다 마니산 바위가 쩍쩍 갈라진다는데,

그 광경을 본 사람이 여럿 나왔다

사실 섬은 식성이 까탈스러워

어쩌다 들어오는 바깥음식은 냄새조차 싫었다

여북하면 물로써 너른 경계를 만들었을까

시간이 지나면서 바깥음식은 먹을만 했다

처음 맛 본 음식도 입에 착착 붙었다

요즘 많이 먹는 음식은 ‘사람과 자동차’ 세트 메뉴

사람과 기름을 담은 자동차는 냄새마저 향기로웠다

살얼음이 동동 뜬 인삼막걸리도 마실까

햇살 길게 늘어진 동막리 갯벌에서,

 

 

 

 

우리동네 / 박상희

 

가을 햇살이 눈부신 이맘때쯤

어머니가 맑갛게 풀을 쑤어

창호지에 바르신다


그 해의 가장 어린 코스모스

꽃잎들

그 속에 가두신다


코스모스 꽃잎들 그 속에서

더러는 영원히 살 수 있다 하고

몇몇은 시들어 간다고 투정을 부린다


그늘에서 어머니가 입에 가득 물을

머금고 창호지에 뿜으신다

이슬이 번지듯 물을 뿜는 일은

맛있는 것을 아껴먹는 것만큼

어려운 일


마당의 문짝들을 집안으로 들이는

그 저녁

꽃궁전이 들어선 듯 환해졌다

코스모스가 문신처럼 새겨진 궁전에는

늘 가을 하늘이 살았다


손가락을 갖다 대면

둥둥 장구소리가 새어나오는

그 문을 열면

듬성듬성 비워져가는 가을 들녘이 다가온다


지금 

우리동네에는

거리마다 그 때 갇혀 있던

코스모스들이 풀려나와 출렁이고 있다

그 사이로

물을 가득 문 어머니의 얼굴이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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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 김형숙


흐르는 물줄기 굽이마다 돌고 돌아

조약돌 벗 삼아 재잘댄다


집어 삼키는 모래와 돌들

젖가슴 품어 흘러나오는 젖줄

시원하다 못해 차갑다


굽이쳐 흘러가는 강물

햇빛 쏟아 부어 피어나는 물결들

일렁이는 마음 달래며

먼데서 불어오는 바람 붙잡고

함께 가자며 소매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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