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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주름 / 이은주


최민식의 사진을 보다보면

주름이 먼저 눈에 차는데

어렸을 때인데도

전쟁통 고아가 된 남매의 누추함보다

깊은 주름 노인들이 더

눈에 띄었던 거지.

주름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물도 보이고, 흙도 보이고

사람도 보이고, 마음도 보이고

그랬던 건 아니고,

규칙없는 무늬처럼 꿈틀거리는 게

살아있는 것 같았거든.


노인들은 그후로

얼마나 살았을까.

검버섯 핀 얼굴이

이제 막장이다

그러는 것 같잖아.

그런데도 주름들은

제대로 자리잡은 뿌리 같아서

뭐 하나 이쁘게 키워낼 것 같았어.

니들은 이럴 수 있어

뻐기면서 말야. 그러니

그것들은 그냥 주름이 아니었던 거지.

피고 피고 피워내는

꽃주름이지.


 

 

 

소나기 발자국 / 한옥주


외출했다 돌아오는 저녁 무렵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서는데

소나기다

사람들이 뛰기 시작하고

가게 처마 밑으로 나는 뛰어든다


신문지를 뒤집어쓰고 뛰는 남자

가방으로 머리를 가리고 뛰는 여자

함성을 지르며 뛰는 학생


사람들 등에, 어깨에도

소나기 발자국들 확연하다

살다보면 가끔은

죄 없이 젖을 때가 있다

이리 뛰고 저리 뛰어도

결국은 젖게 되는 걸

그러나 흠뻑 젖은 자리도

한 번쯤 햇볕 들면 마르는 법


그때는 모르고 젖었다

또다시 쏟아지는 빗속에서

가야할 길을 잃은 듯 멍하니 서 있는데

맞은편 담벼락, 파라솔 밑 좌판에서

푸성귀를 다듬던 할머니

빙긋 웃음 던지는 눈빛이 촉촉하다


나는 얼른 빗속으로 뛰어든다

얼굴에 부딪히는 차가운 빗방울들

그래, 상쾌하다 수많은 길이다





주름 / 이미옥

- 참나무숯


그는 속으로만 생의 궤적을 그렸다

그의 중심은 늘 꼿꼿하여

궤도를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

그는 늘 말이 없어서

사람들은 짐작으로만 그의 속내를 잴 뿐이었지만

속주름이 늘어갈 수록 그는

넉넉한 그늘을 드리웠고

튼실한 열매를 매달았다

언제나 꼿꼿이 서 있을 것 같았던 그를 쓰러뜨린 건

우람한 그의 몸뚱이였다

죽어서도 그는 든든한 기둥이 되어

올곧은 삶을 빛냈고

불에 타 검은 숯으로 변했어도

둥글고 깊은 주름으로

공기를 물을, 술을 걸러 맑게 했다

그의 한생은 눈부신 것이었다

어느 날

그의 몸은 태워져 음식의 향기가 되었는데

그제서야 그의 주름이

사르르 풀리는 것이었다


내 아버지의 유골을 산에 뿌린다

아버지,

빛나는 생을 놓고 비로소 영면하신다





자국 / 서화금


거기,

카메라 맨 젊은이

지금 내 자국 박으려 하는가.

그럼

이건 보이나.

충치 먹어 아린 이에

내 사십오 년 먹고 산 자국이 남아 있는데


아니지,

그이의 사십오 년

일곱 자식 밥 나오는 쇠망치의 내리침으로

엄지에 맺혀 있던 시푸르딩딩한 자국들은 더 하지.


검은 물 들여 놓은 흰 머리카락엔

이십여 년 전에 접어놓은 학종이의 꿈이 염색되어 있는데.


아니지

그이의 이십여 년 전-

쇳덩이 내려놓고 늘그막엔 장구치고 노래나 하며 살고 싶다 하던

타령이 끝나 버린 입가엔 막걸리 자국만이 남아 있는데.


발뒤꿈치의 굳은살을 뜯으며

아차 아픔을 느끼는 순간

속 살 내미는 생채기의 그 자국도 박아 놓아졌는가.


그이의 차가운 신경통은 이제 내 혈관을 타고 흐르는데.


젊은이,

쩡쩡한 망치 소리로

켜켜이 쌓여 진 거름 더미에 앉아

그이를 닮아가는

내 모습 가까이 박아주게나


청정한 하늘 깃에 스치는

눈시울일랑

먼 날의 앵글에 맞추어 주게나.





주름 / 조현숙


서울대병원 호흡기내과 진료실 앞

부쩍 거칠어진 그녀의 숨소리가

마치 흰 수국꽃 같다


대기번호 72번

생(生)의 전환점을 도는 그녀는 지금

저녁 길을 서성이고 있다


불혹이 된 딸 무릎에 손을 얹은 채

전광판 대기숫자에 눈을 고정시킨

그녀의 옆모습을 훔쳐본다


채송화만큼 작아진 몸은

육남매에게 길을 내 준 눈부신 증거다

그녀의 몸에서 젖은 흙냄새가 난다


그녀의 몸을 떠난

여섯 개의 이파리가 꽃으로 필 동안

폐허의 땅에 간신히 지탱하고 있다

드러난

그녀의 마른 뿌리를 본다


그녀가 걸어온 꽃의 시간이 내게

말을 건넨다

‘너그들 배곯지 않게 밥 헤멕이고 너그들이 웃을 때마다 생긴 꽃자리여’


꽃 진 자리, 그녀의 길을 더듬는다

멀리서 나팔꽃 닮은 아이들 웃음소리 들려오고

기억의 링거를 맞은 심장이

물고기처럼 뛰어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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