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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 이혜순

-지금, 그 숲속에선

 

호기심 많은 새벽이 드르륵 문 연다

종소리처럼 눈 부릅뜨고 첫 기차 터널 지나간다

터널 옆구리로 새어 나온 푸른 소음 계단 내려가며 똑똑 조간 신문을 돌린다

신문에서 뛰쳐나온 여자가 달그락 검은 활자를 요리하면 눈 없는 먼지들 풀풀 입맛을 다신다

창으로 달아나는 씩씩한 근육질의 어둠 잠 덜 깬 숲으로 난다, 날아간다

쓰레기봉투 뒤지던 야생 고양이 수염이 가느다란 햇살로 반짝거린다

노란 태양이 가득 알을 부화해 놓은 숲속, 칠순의 늙은 돌 알을 주물럭거린다

알 속에서 깨어나오는 햇살 구더기들 긴다, 기어간다

태양 헬스장으로 쭉 가지 뻗은 단풍나무 잎사귀 붉다, 화끈거린다

단풍나무 등에 햇살이 줄줄 터진다

아! 이 싱그런 오르가즘

이 노란 태양 눈알들 붉은 눈알들이 단풍나무 잎사귀에 꽃잎처럼 터진다

버려진 FM 라디오가 풀밭 위에서 먹다 남은 햇살을 스트롱으로 빤다

죽은 안테나가 소리를 감지한다

미소 치과로 날아가는 붉은 은행나무 잎이 라디오의 노래를 흥얼거린다

가을이 드르럭 문 여는 소리에 나를 뚫고 나온 묽은 잎사귀 숲 속에 나풀나풀 주저앉는다

내 가는 나무 밑동에 링거를 꽂으며 방긋 지나가는 붉은 바람,

시월이다

 

 

 

우리동네 / 김영숙

 

섬은 잡식을 한다

일요일 오후가 되면 트림을 하느라 어지럽다

트림을 할 때마다 마니산 바위가 쩍쩍 갈라진다는데,

그 광경을 본 사람이 여럿 나왔다

사실 섬은 식성이 까탈스러워

어쩌다 들어오는 바깥음식은 냄새조차 싫었다

여북하면 물로써 너른 경계를 만들었을까

시간이 지나면서 바깥음식은 먹을만 했다

처음 맛 본 음식도 입에 착착 붙었다

요즘 많이 먹는 음식은 ‘사람과 자동차’ 세트 메뉴

사람과 기름을 담은 자동차는 냄새마저 향기로웠다

살얼음이 동동 뜬 인삼막걸리도 마실까

햇살 길게 늘어진 동막리 갯벌에서,

 

 

 

 

우리동네 / 박상희

 

가을 햇살이 눈부신 이맘때쯤

어머니가 맑갛게 풀을 쑤어

창호지에 바르신다


그 해의 가장 어린 코스모스

꽃잎들

그 속에 가두신다


코스모스 꽃잎들 그 속에서

더러는 영원히 살 수 있다 하고

몇몇은 시들어 간다고 투정을 부린다


그늘에서 어머니가 입에 가득 물을

머금고 창호지에 뿜으신다

이슬이 번지듯 물을 뿜는 일은

맛있는 것을 아껴먹는 것만큼

어려운 일


마당의 문짝들을 집안으로 들이는

그 저녁

꽃궁전이 들어선 듯 환해졌다

코스모스가 문신처럼 새겨진 궁전에는

늘 가을 하늘이 살았다


손가락을 갖다 대면

둥둥 장구소리가 새어나오는

그 문을 열면

듬성듬성 비워져가는 가을 들녘이 다가온다


지금 

우리동네에는

거리마다 그 때 갇혀 있던

코스모스들이 풀려나와 출렁이고 있다

그 사이로

물을 가득 문 어머니의 얼굴이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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