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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이해가 아니다 / 박규현

 

 

친애하는 메리에게

나는 아직입니다 여기 있어요

 

불연속적으로 눈이 흩날립니다 눈송이는 무를 수도 없이 여기저기 가 닿고요 파쇄기 속으로 종이를 밀어 넣으면 발치에 쌓이던 희디 흰 가루들 털어도 털어도

 

손가락은 여전합니다

사람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 사람은 가장 보편적인 성격을 갖게 될 것입니다

 

녹지 않으니까

착하다고 말해도 되나요

 

의심이 없을 때

평범한 사람을 위해

 

젖은 속눈썹 끝이 조금씩 얼어가는 게 느껴졌습니다 극야로부터 멀어지고 싶고

 

장갑을 끼지 않아 손가락이 아팠습니다 나에게도 손이 있다니 나무들을 베어 버릴 수 있을 만큼 화가 났습니다

 

메리에게 답장을 씁니다

천사 혹은 기원이 있을 곳으로 눈은 그칠 줄 모르고 눈밭에 글씨를 써도 잊혀지는 곳으로 우리가 전부여서 서로에게 끌려다니는 곳으로

 

눅눅한 종이뭉치를 한 움큼 쥐고 있었는데

눈을 뭉쳐 사람을 만듭니다 우리가 소원하고 희망해 온 사람

 

무겁고 불편한 폭설입니다 사람들은 여기저기 쓰러져 있어 그들의 눈을 빌립니다 그는 천 개의 눈을 가진 이가 될 것이에요 제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메리, 나는 겨우 있어요

내일과 같이 여전히

 

 

 

 

 

[당선소감] 도망치긴 싫었다버티다보니 해볼 만했다

 

쓰고 싶은 시와 쓸 수 있는 시가 서로 달랐다. 당선된 시편은 그동안의 기록이다.’

 

고등학교 시절, 작은 공모전에서 상을 받았을 때 작성한 당선 소감이다. 이제 와 돌이켜보니 늘 그런 마음이었던 게 아닐까 싶다. 모든 걸 그만두고 싶던 내게 도망치고 싶은 건 아닌지 생각해보라고 말해준 이가 있었다. 존경하는 동료인 그의 말을 들은 뒤 그런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오늘과 내일과 모레와 앞으로의 다짐은, 나를 버리지 않기 그리고 밀어내지 않기, 견뎌보기, 내버려 두기다. 이렇게 여기자 나는 조금 괜찮아졌다. 나는 내가 해볼 만한 것 같다!

 

때론 삶이 극도로 평범해 어떠한 사건이라도 각별히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었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에 대해서는 한참을 골몰해야 했다. 다 쓰기 전까지는 집에 갈 수 없는 기분. 집이면서도 그랬다. 집인데 왜 집에 가고 싶어지는 건지. 집이 진짜 있기는 한 건지. 그럴 때는 일단 누웠다.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고 나한테 모질게 굴던 사람들의 얼굴을 천천히 헤아렸다. 우는 게 싫고 부끄러운 것도 싫어서 울고불고하다가 이를 갈았다. 팔뚝을 깨물어 남은 잇자국을 만지면서 내 이야기를 더 잘하겠다고 다짐했다. 박규현은 그냥 박규현이므로.

 

나를 늘 응원해준 가족, 친구 그리고 서울과기대 교수님들과 아낌없이 지도해주시는 나희덕 교수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내 시의 가능성을 믿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도 감사드린다. 최선의 최선까지 밀고 나가는 사람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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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랭보의 시' 떠올리게 해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선정

 

2022년 한경 신춘문예 시 부문에는 다양한 세대의 목소리와 시대의 흐름을 보여주는 응모작이 많았다.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동시대인들의 절박한 생활, 희망을 찾고자 하는 고투 등이 반영돼 있었다.

 

본심에서는 네 분의 작품을 놓고 토론과 숙고를 거쳤다. 박서령의 재수강은 서사를 이어가며 감정을 표출하는 데 능숙했다. 그러나 편지 형식의 산문성으로부터 도약하는 힘이 부족했다. 박언주의 도둑 잡기에서는 생존과 죽음, 세계를 향한 질문들이 돋보였다. 그러나 시적 이미지나 음악성을 가려버리는 설명적 진술들은 아쉬움을 키웠다. 임원묵의 새와 램프는 끊어질 듯 이어가며 이동하고 합류하는 언어 실험이 새로웠다. 그러나 언어는 평이해 가능성을 측량하기 어려웠다.

 

만장일치로 박규현의 이것은 이해가 아니다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읽는 줄도 모르게 빨려 들어가는 흡입력에 놀랐다. 이어질 수 없는 문장과 문장들의 연접을 통한 긴장감, 착란적 비약, 예상을 건너뛰는 불연속성에도 다 읽고 나면 이미지가 선연히 발생하는 독특한 작품이었다. 그는 사소한 일상의 가치를 애써 찾아가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나는 겨우 있어요/내일과 같이 여전히라고 기록하는 시. 간신히 발설하는 이 미세한 약음이야말로 거대 담론이나 외치는 소리보다 시적 울림이 크다는 것을, 시는 침묵하기겨우 말하기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새로운 시인에게 축하를 드린다.

 

심사위원 황지우 시인 손택수 시인·노작 홍사용 문학관 관장 김이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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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키슈퍼 / 고선경

 

 

농담은 껍질째 먹는 과일입니다

전봇대 아래 버려진 홍시를 까마귀가 쪼아 먹네요

 

나는 럭키슈퍼 평상에 앉아 풍선껌 씹으면서

나뭇가지에 맺힌 열매를 세어 보는데요

원래 낙과가 맛있습니다

 

사과 한 알에도 세계가 있겠지요

풍선껌을 세계만큼 크게 불어 봅니다

그러다 터지면 서둘러 입속에 훔쳐 넣습니다

세계의 단물이 거의 다 빠졌어요

 

슈퍼 사장님 딸은 중학교 동창이고

서울에서 대기업에 다닙니다

대기업 맛은 저도 좀 아는데요

우리 집도 그 회사가 만든 감미료를 씁니다

 

대기업은 농담 맛을 좀 압니까?

농담은 슈퍼에서도 팔지 않습니다

 

여름이 다시 오면

자두를 먹고 자두 씨를 심을 거예요

나는 껍질째 삼키는 게 좋거든요

그래도 다 소화되거든요

 

미래는 헐렁한 양말처럼 자주 벗겨지지만

맨발이면 어떻습니까?

매일 걷는 골목을 걸어도 여행자가 된 기분인데요

아차차 빨리 집에 가고 싶어지는데요

 

바람이 불고 머리 위에서 열매가 쏟아집니다

이게 다 씨앗에서 시작된 거란 말이죠

 

씹던 껌을 껌 종이로 감싸도 새것은 되지 않습니다

 

자판기 아래 동전처럼 납작해지겠지요 그렇다고

땅 파면 나오겠습니까?

 

나는 행운을 껍질째 가져다줍니다

 

 

 

 

 

[당선소감] 미래의 나, 미래의 에게 이젠 씩씩하게 걸어갈 것

 

나는 늘 어딘가 엉성한 아이였다. 단체 줄넘기를 하면 꼭 줄에 걸리는 아이, 큐브를 맞추는 데 한 번도 성공한 적 없는 아이, 대답이 느리고 말을 자주 더듬는 아이, 결정적인 순간이면 반드시 긴장해서 실수하는 아이. 자주 망신을 당했다. 내가 엉성한 존재라서 세계도 나를 어색해하는 것 같았다. 자의식과 수치심이 비례했다.

 

수치심은 내가 느끼는 숱한 감정들의 형이다. 슬픔과 분노와 죄책감 같은 동생들을 데리고 나를 줄기차게 따라다닌다. 그런 수치심과 거리를 두는 감정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다. 사랑은 수치심을 파괴하기까지 한다. 사랑을 사랑해서, 세계를 사랑해서, 사람을 사랑해서, 시를 사랑해서 나는 엉성하게나마 살아 있다.

 

사랑하는 모든 것을 더 잘 사랑하고 싶은 마음, 그것마저 사랑이라고 믿는다. 나에게 시는 그 사랑에 대한 고백이자 답변이었다.

 

내 엉성한 발걸음과 어울리는 이상한 길을 끝없이 내어주는 시에게 고맙다. 그 길에 첫걸음을 내딛게 해 주신 한양여대 권혁웅 교수님, 장석남 교수님, 양연주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이상한 길에도 아름다움이 있다는 걸 알려 주신 이영주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못생긴 발자국을 발견하고, 그 발자국이 더 멀리 나아가도록 힘을 보태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내 모든 용기의 근원이 되는 수정, 세리, 재아, 지은, 소정, 민경, 효린을 비롯한 친구들에게 고맙다. 혜정, 선우에게도 고맙다. 나보다 나를 더 믿어 준 연수에게 고맙다. 무한한 지지 속 연대감을 알게 해 준 한양여대 동기들에게 고맙다.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나의 가족. 이수기 씨, 고동진 씨, 그리고 동생들에게 각별한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오래전 누군가는 내가 머문 자리마다 꼭 흔적을 남긴다며 긴 꼬리 인간이라 놀려댔다. 흔적은 영혼의 때, 꼬리는 거추장스러운 그림자 같은 것이다. 내게는 그런 것이 성가실 정도로 많다. 그러나 이제는 뒷모습 보이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서 씩씩하게 걸어가고 싶다.

 

무궁무진하고 이상한 미래, 미래의 나, 미래의 시에게로.

 

 

 

 

[심사평] 퉁치면서 눙치고, 하면서 하는 시적 패기 높이 평가

 

시의 봄은 세상의 봄보다 빨리 온다. 시의 나라에서는 새해 첫날이 새봄의 첫날이다. ‘신년문예가 아니고 신춘문예인 까닭이다. 엄동설한에 봄을 열어젖히는 신춘 시처럼, 시의 시제(時制)는 언제나 미래다. 천 년 전을 노래하는 시라고 해도 그 시가 좋은 시라면 시의 마지막 행은 미래로 열리기 마련이다. 이번 새해 첫날에도 시의 나라는 설레는 마음으로 입국 비자를 발급한다. 시인의 숫자가 아니라 우리 시의 영토가 다시 넓어지는 순간이다.

 

입국 심사대에 올라온 본심 대상작 열 분 중 네 분이 남았다. ‘폭우’()는 일상의 균열을 포착하는 감각적 묘사와 시적 통찰이 빛났으나 예견 가능한 시적 구도가 아쉬웠다. ‘팝콘꽃’()은 가족이라는 근원적인 상처 혹은 폭력을 겨냥한 팝콘처럼 튀는 비유적 상상이 매력적이었다. 튀려는 시적 욕망을 조금만 더 제어했으면 싶었다. ‘’()은 언어를 어떻게 마르고 잇고 매듭짓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 언어의 압침들이 꽂힐 언어 이전이나 언어 너머의 지점을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졸업반’()을 내려놓는 데는 긴 논의가 필요했다. 그의 시편들은 시가 노래와 만나는 지점을 잘 알고 있었다. 리듬감이 좋았고 시의 완성도도 높았다. 시편들에서 엿보이는 시에 대한 열정과 내공이 느껴지기에 충분했다. 문제는 그 자연스러움에서 묻어나는 기시감이었다.

 

럭키슈퍼’()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최근 시의 파장 안에 있으면서도 지금-여기의 사회 현실과 청춘의 당사자성이 감지된다는 미덕이 있었다. 버려진 과일(홍시), 낙과(사과), 씨는 물론 껍질째 먹는 과일(자두), 그리고 부풀었다 터지는 단물 빠진 풍선껌, 헐렁한 양말, 납작한 동전을 먹는 자판기 등이 있는 럭키슈퍼가 화자의 현주소다. 젊은이의 미래와는 먼 오브제들이다. 화자는 농담 맛이 가득한 럭키슈퍼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화자의 동창이자 럭키슈퍼사장 딸은 감미료로 비유되는 대기업의 맛을 맛보고 있다는 대비도 능청스럽다. 퉁치면서 눙치고, ()하면서 통()하는 행운의 의미를 농담과 엮어내는 시적 패기를 높이 평가했다. 신춘 같은 미래를 향해 푸른 도화선 속으로 꽃을 몰아가는”(딜런 토마스), 그런 시의 힘을 기대한다.

 

심사위원 이문재 시인 정끝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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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 / 박수봉

 

 

빗속에 집이 잠겨있다

태풍이 온 나라를 휩쓸었지만 빈집은

날개를 접고 흔들리지 않았다

식구들은 모두 전주로 떠나버리고

덩그러니 혼자 남은 빈집

퇴행성관절염에 어깨 한쪽이 내려앉은 채

기울어 가는 생을 붙들고 있다

빈집의 담장을 지나다보면 허옇게 바랜 집이

손을 저으며 말을 걸어온다

평생 걸어온 길의 기울기와 그 길로 져 날랐던

가난과 고단함에 대해서 빈집은

미처 다 하지 못한 말들을 빈 방에다 새긴다

행간마다 피어나는 유폐의 점자들

마당 우물터로 목마른 잡초들이 조촘조촘 들어서고

버리고 간 장독대엔 혼잣말이 웅얼웅얼 발효 중이다

죽은 참가죽나무에 앉아 종일 귓바퀴를 쪼아대던

새소리도 날아가고 귀가를 서두르는 골목

일몰의 욕조에 몸을 담근 빈집이

미지근한 어둠으로 눈을 닦는다

종일 입술을 다문 대문을 빈집은

몇 번이고 눈에 힘을 주어 밀어 보지만

끝내 대문 여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마당 깊은 곳까지 어둠이 차오르면 빈집은

눈을 들어 별자리를 더듬는다

식구들이 몰려 간 서남쪽 하늘

별이 기울 때까지 눈을 떼지 못한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들쥐가

들어앉아 새끼를 낳았다

이따금 달빛이 새끼들의 털을 핥아주고 갔다

들쥐는 빈집의 뒷다리를 갉아 먹으며 자라고

집은 제자리에서 우물처럼 늙어간다

빈집의 늑막 아래로 어둠이 점점 차오른다

 

 

 

 

 

[당선소감] “시의 길은 말없이 인내하며 살아가는 삶의 뒷모습 따라가는 것

 

보라색 공원관리 조끼를 입은 사내들이 나무 줄기를 자르고 있었습니다. 나무는 지난 계절을 잃고 바람을 흘리며 우두커니 서 있었습니다. 그런 나무 곁에서 문득 내가 줄기 잘린 나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퍼렇게 뻗어 가는 시의 줄기를 잃고 자꾸 움츠러드는 제 모습이 나무를 닮았다며 허전함의 지평을 늘이고 있을 때 당선 통보를 받았습니다.

 

전화를 끊고, 다시 수변 공원 나무들을 보러 나섰습니다. 매서운 한파에 뭉툭하게 가지가 잘린 나무들이 즐비하게 어두워지고 있었습니다. 나무의 잘린 부분을 어루만지면서 저는 제 시가 가야할 길을 더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잘리고, 꺾이고, 찢겨가면서도 말없이 인내하며 살아가는 삶의 뒷모습을 따라가는 것이 시의 길임을 어렴풋이 느끼면서 천천히 공원을 걸었습니다.

 

저의 움츠러든 손목에 힘을 실어주신 심사위원들께 머리 숙여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름이 더욱 무거워졌음을 염두에 두고 열심히 쓰겠습니다. 그리고 작년에 최종심에서 낙선하고 우울해 할 때 낙선주라며 담근 술을 따라주며 격려를 아끼지 않던 오산의 문우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를 사랑하는, 제가 사랑하는 모두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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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주관적 정서의 객관화, 소통 잊지 않은 작품"

 

전주에 펑펑 함박눈이 쏟아지겠다고 예보된 날 신문사로부터 본심에 올라온 14편의 시를 전달받았다. 이름을 지운 응모자의 시편들은 자아와 세계의 화해 불가능을 확신하는 비규범성이나 이질적인 것들의 혼돈 등을 과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혼종적 욕망이 들끓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지금의 시단 풍토와 다르게 뜻하는 바가 분명했고 시어들 개개의 인상과 소리 맵시가 어울려 새 형상을 짓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응모작 중에서 <괄호 밖의 사람들>, <빈집>, <편의점 라이프>, <오래 머무르는 풍경>, <바람의 건축> 등의 작품을 오래 들여다봤다. <괄호 밖의 사람들>괄호 안의 사람들을 궁금하게 함과 동시에 모래가 환기하는 삶의 황폐성을 떠올리도록 하고, <오래 머무르는 풍경>에 적힌 경작금지라는 팻말누군가는 스며들고 또 누군가는 닮아간다라는 구절은 시 읽는 즐거움을 주었다. <편의점 라이프><바람의 건축>도 심사위원들의 시선을 끌었다.

 

숙고 끝에 <빈집>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태풍을 피해서 모두가 떠난 빈집, 삶의 내력과 유폐된 시간을 감당하는 의인화는 고단한 시간을 견딘 타인의 이야기, 동시대 모두의 사연으로 읽혔다. ‘평생 걸어온 길의 기울기에 어울린 빈집의 서사는 시 공부를 열심히 한 흔적도 보였다. 시는 주관적 정서의 객관화이며, 소통이라는 점을 잊지 않고 시적 형상화에 공력을 들인 <빈집>의 시인, 당선을 축하한다.

 

심사위원 민윤기(서울시인협회 회장), 이병초(전북작가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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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주 묻은 태양의 행방 / 김종태

 

 

뉴타운 소문을 태우고 마을버스가 들어왔다

 

미숫가루처럼 흙먼지만 내려놓고 폐교를 한 바퀴 돌더니

 

제비처럼 고샅길을 빠져나갔다

 

언젠가부터 절개지 묵정밭엔 어린 의혹들이 심겨지기 시작했다 깨진 항아리 속에 갇혀있던 뻐꾸기 소리에 둔덕 까마중 몇, 복부인 같은 선글라스를 끼고 귀고리를 흔든다 전과자인양 담장 안을 기웃거리던 햇살, 굴다리 밑으로 잠입하고 배 밭으로 달려간 그림자 하나가 이른 아침부터 풍선 불 듯 바람의 평수를 후후- 부풀린다

 

두부장수 확성기에 귀를 열던 도토리들 일제히 상수리나무를 버린다 선거벽보 어지럽게 붙어있는 축대 아래, 사방치기 놀이를 하던 아이들 오후가 오랜만에 찾아온 밀짚모자 주위로 몰려든다

 

뻥튀기 소리에 놀란 해바라기, 발밑에 검은 태양들을 투투둑- 파종하고 늦게 외출한 채송화는 발뒤꿈치를 높이 꺼내 분꽃의 망설임을 흔든다 태양이 시작되면 빨간 인주통이 열렸다 몇 평 봄이 처분되는 계약서 그 끝, 마을경로당에선 코스모스와 금잔화가 형광빛 포스트잇처럼 끝도 없이 유예되고 있었다

 

이장 집 옆 모과나무가 늙은 귀띔이라도 들은 걸까 오래된 우물 속에다 노란 주먹을 툭툭 박았다 내가 헐값에 처분했던 그 시절 변두리 네온사인과 외딴집에 세를 든 귀뚜라미의 지하 방엔 오래도록 해가 들지 않았다 지난밤 거처를 잃은 두견새와 갑작스레 약수터에서 쫓겨난 달빛은 창문 틈에 허리가 끼어 아침까지 웅웅거렸다

 

누가 분실한 것일까

 

공사 중인 안테나처럼 힘껏 꼬리를 세운 고양이 한 마리

 

방금 눌러 찍은 붉은 태양이 채 마르지도 않은 부동산 계약서를 입에 물고서

 

인적 드문 논밭을 검은 천 조각처럼 가로질러 어디론가 재빨리 구겨지고 있다

 

 

 

 

 

[당선소감] “앞으로는 내가 세상을 로 위로할 차례

 

패딩점퍼처럼 눈을 껴입은 세상이 고딕체로 서 있었다. 애타게 기다리던 삶의 목록들이 연착되고 있었다. 측은지심의 영혼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시 쓰기. 내 가냘픈 노래는 원고지 속에서 자주 익사했다. 악보의 실루엣이 보이면 음정이 삐걱거렸다. 부러지고 흔들리는 것들이 시가 된다고 믿었기에 앞만 보고 계속 노를 저었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몇 년 전의 내가 나에게 웃으며 손을 내민다. 살고 싶어서 시의 소맷자락을 간절히 붙들었다. 시는 나를 살려주시려고 보내준 그분의 언약궤였다. 이제는 내가 세상을 위로할 차례이다.

 

한 시도 의 램프를 끄지 않는 시시각각(詩視刻各) 스승님과 따뜻하고 치열했던 나의 도반들과도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지치지 않도록 응원해준 아내와 두원, 예은 고맙고 사랑합니다. 지난해 하늘로 가신 어머니, 늘 막내아들을 자랑스럽게 믿어주셨는데, 하늘 향해 이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벼랑 끝에 선 제 시의 손을 기꺼이 잡아주신 전북문인협회장 김영 시인님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마음이 춥고 외로운 이들에게 손난로가 되어줄 그런 시로 보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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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2022 전북도민일보의 신춘문예 응모작을 읽는 시간은 어떻게 시를 써야 울림이 깊은가에 대해 다시 되짚어보는 시간이었다.

 

천 편이 넘는 응모작에는 막 시를 쓰기 시작한 듯한 사람의 작품도 있었고, 시적 완성도와 문장의 긴밀도가 만만치 않은 작품도 있었다.

 

각주와 외래어가 난무하는 작품과 언어의 유기적인 연결이 아쉬운 작품도 많았다. 패기나 참신성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 적었고, 그만그만한 내용이나 익숙한 수사가 버무려진 작품도 많았다.

 

주제 면에서는 개인의 서정을 노래한 작품부터 시대의 불합리에 대한 작품까지 스펙트럼이 넓었다. 시국의 영향인지 사회의 어두운 면과 개인의 어두운 시간을 직조한 작품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편이었다.

 

최종까지 남은 작품으로 김선호 님의 빙하의 숲을 걷다’, 조희 님의 파울라가 있는 풍경과 김종태 님의 인주 묻은 태양의 행방’, 장성희 님의 폭우’, 김수형의 포스트잇이었다.

 

모두 우리의 일반적인 인식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작품들이었으나, 제목이 내용을 끌고 가지 못하거나 내용이 제목을 받쳐주지 못하기도 했다. 시상을 직조하는 솜씨가 매끄럽지 못하기도 하고 제출 작품의 수준이 고르지 못하기도 했다.

 

마지막까지 경합한 작품은 조희 님의 파울라가 있는 풍경이었다. 시상을 전개하는 힘이나 주제를 끝까지 밀고 가는 힘이 좋았으나 아쉽게 되었다. 조금 더 힘을 내면 다음을 기약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선작으로 선정한 김종태 님의 인주 묻은 태양의 행방은 자신만의 언어로 시대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능력이 수준급이다. 삶의 현실에서 시의 뿌리가 발아했으나 주관에 휩쓸리지 않고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확보하는 솜씨가 시의 밭을 오래 가꾼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응모한 다른 작품들도 고른 수준을 보인 점과 앞으로의 가능성에 무게를 두었다.

 

심사위원 김영(시인, 전북문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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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창속에는 누군가가 사는데 / 소은옥

 

 

언제나

나는

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멀지도 가깝지도 않는 거리에서

당신을 바라볼 수 있는 거리만큼

투명한 기억들로 창이 부풀어 오를 때까지

그것이 격자로 되었는지 석쇠로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어요

햇볕이 가득 차오를 때마다

아득하게 느껴지는 황홀한 느낌

어떤 얼굴은 노랗고

어떤 얼굴은 구리 빛에 가깝기도 했지만

당신이 나를 굽어보는 그 만큼의 거리에서

하나의 세상이 무시로 열리거나 흩어지기도 하고

누군가는 어김없이 무심한 듯 들여다보기도 하고

어쩌면

보고 싶다는 것이 있다는 것

모스부호를 건지는 것처럼 두근거리는 일일지도 몰라

창은 묵직하게 침묵하지만 나는 말해요

어쩌면 운이 좋았다는 말과 동의한 그런 말들이

오늘도 반짝이는 빛이 창으로 들어와요

투명한 살갗 속 깊은 곳에 미세하게 흔들리는 실핏줄과

심장이 두근거리고

하얀 조각달 같은 얼굴도 마주 다가서네요

꼭 그 만큼의 거리에서

당신을 그려보는 자유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남겨진 입김의 흔적도

틀 안으로 박혀오는 빛의 프리즘도

아득하게 피어오르는 완충지대도

모두 파장 속으로 들어가요

건조한 햇볕과 거친 바람 그리고 오래된 기억들까지도

......

당신을 향해서 부풀었던 창이 꼭꼭 문을 닫네요

 

 

 

 

 

[당선소감] 더욱 정진해 훌륭한 시인으로 보답을

 

글을 쓰고 있을 때가 가장 행복했습니다. 비록 그것이 화답을 하지 않더라도 시를 쓰고 있는 그 순간만큼은 보이지 않는 세계가 내 곁으로 다가오고 있거나, 내 곁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바라본 시선으로 무아(無我)의 얘기들을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썼다가 다시 지우고 버려진 기억들을 차곡차곡 담아 문장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시어들이 저를 얼마나 뭉클하게 했는지요.

 

당선 전화를 받았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소식이라 당황했었습니다. 비로소 글 속에서만 존재했던 무아(無我)의 세상이 문을 열고 저를 향하여 뚜벅뚜벅 걸어오는 것만 같았습니다.

 

감사 인사를 드릴 분이 아주 많은데요. 우리 문학회 지도교수님, 하재룡회장님, 문진숙, 정인숙, 이정애, 오숙희. 열거하지 못한 동료 문우님들에게도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기회를 주신 전라매일과, 심사해 주시고 채택해 주신 심사위원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더욱 정진하여 훌륭한 시인으로 보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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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수미쌍관의 안정 속에 잔잔한 파장

 

속도와 경쟁의 자본논리가 압도하는 디지털문명 시대에 변방인들처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불안심리가 이번 응모작에서 산견되었다. 그런 속에서도 끝내 인간의 위의와 존엄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세계가 주목을 끌었다. 그동안 신춘문예에서 보아왔던 세상에 대한 비판적 리얼리즘 성향의 세계에서 존재와 실존에 대한 성찰과 탐구, 곧 인문학적 접근의 자세가 내면화 된 작품들이 최종심에 올랐다. 고경자의 기시감은 하나에서 둘이 되고 셋이 되는 우주의 생성원리를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넘나드는’ ‘어느 영혼의 갈급함에 비유하는 활달한 문장의 흐름이좋았다. 그러나 결구에 가서 시적 여운과 울림을 남기는 메타포적 공소성을 끝내 충족하지 못해 아쉬웠다.

 

최민지의 절벽 끝에서 우리는 깊습니다도 보다 차분하고 투명하게 가라앉은 정조와 울림이 선자의 마음에와 닿았다. 울지 않고도 울고, 말하지 않고도 말하는 언외언(言外言)의 간결어법이 선자의 눈길을 끌었으나, 결구가 허술하게 처리되어 안타까웠다. 이런 속에서도 소은옥 나의 창속에는 누가 사는데, 당신에 대한 기억의 세계를 거시(입자)와 미시(파장)의 불확정적사유의 세계로 형상화해가는 솜씨가 남달랐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는 그 만큼의 거리에서때때로 나타났다 흩어지고’,‘부풀어 오르는잔잔한 그리움이 창()을 열고 닫는 수미쌍관의 안정 구조 속에 뒤섞여 잔잔한 파장의 울림을 주고 있어 당선에 올렸다.

 

심사위원 김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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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들다 / 송종철

 

 

가까이 있는 모든 것은 서로 집중하고 있다 폭우로 뻘겋게 드러난 교회 언덕은 얼마 지나지 않아 녹색으로 변했다 몇 해 전부터 카페가 들어서기 시작한 거리 빈터 여기저기에 경작금지라는 팻말이 보인다 누군가는 스며들고 또 누군가는 닮아간다

 

물든다는 것은 당신의 책 속 주장에 동의한다는 말이고 어릴 적 나와의 약속을 저버리는 일이다 오랜 기침이 가라앉는 학하리의 아침은 새로운 습관이 된다 유튜브 내 편이 필요할 때광고 배경음악을 하나하나 찾아 듣는 오후 창문 안으로 스며드는 아카시아 향기, 물들고 싶다는 것은 날리는 꽃잎을 맞으며 당신의 집에 다가가는 일이다 날 저물도록 걸어가는 벗어나기 힘든 길이다 길게 늘어진 주차 행렬이 내려다보이는 벤치 오래 머무르는 풍경이다

 

당신의 색깔로 변해가는 시간 맨 앞에는 두꺼운 기억의 막이 있다 머금고 있는 생각이 단단해진 땅을 흠뻑 적시는 동안 기억 속 이름들을 견딘다 사람들은 유행처럼 곧 지나갈 거라고 말한다 작은 흙 알갱이 사이로 촉촉한 생각이 울먹울먹 배어 나오는 동안 버릇처럼 온몸으로 번져나가는 당신

 

서서히 겹쳐지는 익숙한 화면 나는 나의 손을 놓는다

 

 

 

 

[당선소감]

 

시 공부를 시작하면서 김사인 시인의 특강을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일상, 나날의 형언들은 모두 시가 될 수 있다. 시는 무엇을 무엇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그 무엇에 대한 존경과 경외의 표시가 바로 시이다.” 공학을 해오던 나에게 간단해 보이는 이 정의는 시를 쓰는 기본 알고리듬처럼 들렸습니다. 하지만 지금껏 마음속으로 늘 되뇌고 있습니다. 나는 특별하게 알아주고 불러줄 일상을 찾아내지 못하는구나. 그리고 무엇을 무엇이라고 부를까 애를 씁니다. 매번 원점, 시를 쓰기 위해 주위와 대면하는 시간은 늘 겸손해지려고 노력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내년에는 소바처럼 낮고 슴슴한 시를 써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중에 당선 통보를 받았습니다. 기쁨보다는 부족한 글을 마지막까지 들고 읽어줬다는 놀라움이 앞섰습니다.

 

지금까지 한남대와 대전문학관에서 시의 세계로 이끌어주신 성은주 교수님, 길상호 시인님, 김영남 시인님, 양예경 교수님 그리고 최은묵 시인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많은 시간 동안 습작을 읽어주고 소중한 조언을 해주신 최현주, 김미옥, 김광명 시인님과도 이 기쁨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맨 처음 소리 내 작품을 읽어주는 아내 한경민, 언제나 우리는 원팀 미란, 미선과 근홍 고맙고, 사랑해

 

어려운 시기에도 기회를 주시고 제 글을 뽑아주신 뉴스라인제주와 심사위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좋은 시를 쓰도록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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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부드러운 언어의 전개와 잔잔하게 발화하는 서정의 향기

 

제주의 중심 인터넷신문 <뉴스라인제주><2022 영주신춘문예>를 공모한 결과 전국에서 예년처럼 북적북적 많은 예비 시인들이 모여들어 그들의 심장 소리를 들려주었다. 자본주의 세상과는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분야가 문학이라지만, 갈수록 팍팍해지는 우리들의 삶을 만져주는 작품들이 용호상박 치열한 각축을 벌였다.

 

최후까지 검토한 작품은 시조 2작품, 3작품이었다.

 

김미진의 시조 콩나물 이력서는 진술의 발상이 상큼하여 매력적이었다. 김미경의 시조 대숲을 읽다는 시상 전개가 깔끔하였다. 송종철의 시 섭지코지 문서물들다는 세밀한 묘사와 진술, 호흡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힘을 보여주었다. 송문희의 시뜨거운 외출은 땡볕 속에서 말라가는 지렁이의 모습을 펄펄 끓는 오후의 번제로 보고, 그것을 요즘의 구직인(求職人)과 결부시켜 형상화한 수작이었다.

 

고심을 거듭한 끝에 신선한 비유, 부드러운 언어의 전개와 서정의 향기가 잔잔하게 발화하는 송종철의 물들다에 눈길이 머물렀다. 이어 함께 보내온 작품들이 일정 수준에 도달함을 확인하고 당선작으로 뽑아 들었다. 독특한 상상으로 N포 세대 청춘들의 아픔과 희망을 노래한 김미진의 콩나물 이력서와 송문희의 뜨거운 외출도 끝까지 붙들고 있었다. 다음 기회에 좋은 결과를 기대한다. 당선자께 축하의 말씀을 드린다.

 

심사위원 김춘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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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무늬로 웃는 연습하기 / 손연후

 

 

노란색 상자 안에

털실 뭉치 좋아하는 고양이를 기르는 일

 

누구나 동그란 노란색으로 웅크려본 날들 있었지

쉼표 모양 씨앗처럼 고요히 꿈꾸는 연습

 

감자야, 하고 부르면 눈이 동그래져서 딸꾹 하고

딸기향 나는 감기에 걸린 것 같아

당신 넥타이에도 딸꾹거리는 딸기가 묻었어,

우리는 서로의 코를 쿡 찌르며 웃어버렸지

 

커튼을 열면 우리도 고양이 꼬리처럼 기다랗게 기대어 보고

노란 고양이 무늬 닮은 햇빛이 머리 위로 얼룩덜룩 흘러내렸지

반짝이는 유리잔마다 함께 이름을 붙이던 날

사람은 이름대로 사는 거래, 여기저기 우리 이름을 붙이자

우리는 감자 눈동자 속에 살고 유리잔과 식탁보 넥타이 구두에도 살고

사람들 와르르 모였다 흩어지는 보도블록 횡단보도에도 길쭉하게 누워 있는 거야

수많은 버스 차창 손잡이에도 상냥한 고양이 키스처럼 토닥토닥 흔들리고 있는 거지

 

하늘이 자몽즙 같은 노을빛으로 젖어들면

기다란 빨대 꺼내 눅눅해진 하루를 보글보글 휘저어볼래

볼을 삐죽 부풀린 거품들 퐁퐁 터지고

푹 익은 노을 냄새 싫어하는 감자는 자꾸만 빨대를 타고 기어오르고

잭의 콩나무처럼, 하늘 위로 쑥쑥 자라나는 노란색 빨대를 올려다봤지

높이 더 높이, 어느새 굵어진 줄기에서는 샛노란 꽃잎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어

 

날마다 눈부시게 타오르는 구름 위로 훨훨 날아가는 꿈을 꿨어

감자는 점프를 잘했고 우리는 고양이 무늬로 웃으며 서로에게 손을 뻗었지

하늘에서 빨간색 노란색으로 뒤섞여 열리던 우리의 기다랗고 사랑하는 미래들

 

감자에 대해 말하자면 먼저 사랑에 대해 말해야 해

우리는 노란색이었고, 커튼을 열면 유리잔마다 함께 반짝이며 살아있었지

우리는 씨앗처럼 가벼워 이 계절 어디로든 갈 수 있다고

늘씬한 고양이처럼 숨차게 달려보지 않겠니

 

매일 밤 노란색 상자 안에서

우리는 털실 뭉치처럼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있었고

 

통통 고양이 발소리 다가오자

우리는 눈 맞추며 함께 큰소리로 웃어버렸어

 

 

 

 

 

[당선소감] "슬픔 가득한 계절 속 상냥한 등불같은 시 쓰고파"

 

크리스마스 사흘 전, 학과 졸업시험을 마치고 하교하던 길에 당선 소식을 듣게 되었다. 대학로 구석진 담벼락 아래에 서서 전화를 받으며 오랫동안 조용히 울먹였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는 항상 혼자서 무언가를 끼적이고 있었다. 뭘 적고 싶은 건지도 잘 모르는 채로, 나는 노트를 펼쳐 삐뚤빼뚤한 글씨체로 끊임없이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곤 했다. 나는 멋대로 그것들을 시라고 불렀다. 시가 뭔지도 모르면서. 그건 어쩌면 철없는 바보의 짝사랑 같은 거였을까.

 

그동안 길을 잘못 들기도 하고, 혼자 컴컴한 시간 속에서 한없이 헤매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듯이, 사실 나도 좀 더 멋진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시간의 빚만 뿌옇게 쌓여갔다. 힘든 시간 속에서 문득 내게 위안을 안겨준 것은, 대학 교양 수업에서 접하게 된 프랑스 시인들의 시편들이었다. 시를 읽으면 칙칙하게 말라가던 내 영혼의 색이 밝은 빛으로 환하게 칠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시란 참 따뜻한 거였구나.

 

용기를 내어 다시 펜을 들고 내 멋대로 감히 시라는 걸 써봤는데, 우연히 교내 문학상에서 상을 받게 되었다. 시를 좀 더 알고 싶어서 여기저기 동아리도 전전해보고, 학과에서 열리는 시 수업도 들어보았다. 그리고, 계속 썼다.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멈추지 않고 계속.

 

시를 쓰는 법에 대해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다. 아직 많이 부족한데도 운 좋게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음을 알고 있다. 겸손한 자세로, 계속해서 열심히 써나가고 싶다. 모두가 많이 아프고 힘든 계절이다. 잔혹한 슬픔으로 가득한 이 추운 계절 속에서, 누군가에게 작고 따스한 위로를 전해줄 수 있는 상냥한 등불 같은 시를 쓰고 싶다.

 

사랑하는 가족들, 항상 곁에서 함께해준 고마운 친구들, 하연·진희·성은, 한 해 동안 함께 열심히 임용시험을 준비했던 우리 스터디원들, 하림· 주민·지성 그리고 경호, 한번 시를 써보라고, 그래도 된다고 제게 용기를 주셨던 이순욱 교수님과 국어교육과 시 동아리 '모임'의 학우분들에게도 모두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 아름답고 광활한 세계에 저를 초대해주신 영남일보사와 관계자분들, 심사위원 선생님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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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경쾌·발랄한 시어 구사당찬 신인의 미래 기대

 

본심에 올라온 스무 분의 시 가운데 장현숙씨의 '뭉친 나이' 2편과 김지영씨의 '뜨겁고 흰 유언' 16, 홍담휘씨의 '카라멜마끼야또가 꽃피는 동안' 3, 손연후씨의 '고양이 무늬로 웃는 연습하기' 2편이 선자의 눈길을 끌었다. 장현숙씨의 작품은 시를 차분하게 끌고 가고 보이지 않는 부분을 만지는 솜씨도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글에 생기가 부족하다는 점이 흠이었다. 김지영씨의 시에서 두드러진 것은 현실 묘사 능력이었다. 다만 완성도에서 "이거다!"하고 내세울 수 있는 한 편이 보이지 않았다.

 

홍담휘씨와 손연후씨의 작품들을 놓고 장시간 논의가 있었다.

 

홍담휘씨의 '젠가'는 젠가 게임을 통해 일상과 가족, 현대성의 문제, 지구온난화까지를 유머러스하고도 시니컬하게 담아내는 능력이 돋보였다. "마스크 쓴 계절도 빙하가 녹는 북극까지도 쌓아야 하는데/ 밤하늘이 하나둘 별빛을 빼내고 있었죠"를 비롯한 빼어난 표현이 촘촘히 박혀 있다. 이 작품만으로 본다면 당선작으로 뽑아도 손색이 없다. 그러나 투고한 다른 시편들의 질적 균질감이 편차가 있었다.

 

손연후씨의 '고양이 무늬로 웃는 연습하기'를 당선작으로 밀기로 했다. 이 시에서 유독 강조되는 '노랑'은 삶의 어둠과 우울을 들어 올리는 힘이다. 우리는 "노란색 상자 안에 털실 뭉치 좋아하는" 감자라는 이름의 고양이를 기른다. 놀라운 건 감자와 교감을 하면서 마침내 그의 발소리를 들으며 "노란색 상자 안에서/ 우리() 털실 뭉치처럼 동그랗게 몸을 말게 된다"는 것이다. 서두와 종결부의 아름다운 대응을 보라.

 

그건 '감자'의 무늬에서 번지고 성장하는 사랑 때문이다. 사랑은 "유리잔과 식탁보 넥타이 구두에도" 산다. 그 사랑의 힘이 "눅눅해진 하루를 보글보글 휘저으며" 그때마다 "볼을 삐죽 부풀린 거품들이 퐁퐁 터진다." 이 당찬 신인은 자기만의 스타일로 경쾌한 시어와 발랄한 상상력을 구사한다. 이 싱싱한 능력은 이 신인의 미래의 가능성을 예고한다. 동봉한 '여름의 아이들을 아세요'도 충분히 좋은 작품이었다. 당선을 축하하며 아깝게 당선에서 밀려난 홍담휘씨에게도 힘찬 응원을 보낸다.

 

심사위원 손진은 시인·안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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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의 스페인 / 이신율리

 

 

죽는 사람들 사이로 날마다 비가 내린다

사과는 쓸모가 많은 형식이지 죽음에도 삶에도

 

수세미를 뜬다 사과를 뜬다

코바늘에 걸리는 손거스러미가 환기하고 가는 날씨

를 핑계로 미나리 전이나 부칠까

 

미나리를 썰 때 쫑쫑 썰어대는 말이 뒤섞인들 미나리

탕탕 오징어를 치며 바다가 보인대도 좋을

 

다행히 비 내리는 날이 많아 그 사이로 사람이 죽기도 한다

올리브 병에서 들기름이 나오면 핑계 삼아 한판

사과나무에서 다닥다닥 열린 복숭아를 다퉈도 되고

소금 한 주먹 넣으며 등짝도 한 대

 

단양과 충주 사이에 스페인을 끼워 넣는다

안 될 게 뭐 있어 비도 오는데

스페인보다 멀리 우린 가끔 떨어져도 좋을 텐데

 

철든 애가 그리는 그림 속에선 닭 날개가 셔터를 내리고 오토바이를 탄 새가 매운 바다에서 속옷과 영양제를 건져 올렸다 첫사랑의 정기구독은 해지했다

 

꽃병에 심야버스를 꽂았다 팔다리가 습관적으로 생겨나는 월요일, 아플 때마다 키가 자라는 일은 선물이었다

 

불꽃이 튀어도 겁나지 않은 나이는 이벤트였지

 

단풍 들지 않는 우리를 단양이 부른다 스페인은 멀고

안전벨트를 매고 접힌 색종이처럼 사진을 찍는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누군가 멀리 떠난다

 

 

 

 

[당선소감] “이 세상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감사합니다

 

까마귀가 얼어붙은 목청을 녹이자 유자나무가 등불을 켭니다. 노랑은 빨리 달려오는 발목을 가졌다고 생각할 때 벨이 울렸습니다. 편두통은 어느 계절을 돌아 여기 와서 끝이 되었을까. 손끝에 모은 0도에서 바닐라 라떼를 만들어 오래된 연인들에게 나눠주는 상상을 합니다.

 

희망이 텅텅 비었던 정오의 숲에서 길을 잃고 나를 잃었던 시간들 쓸모없는 것에 관심이 많아 세계를 건너 너에게로 간다고 썼습니다. 우주가 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깨어나 또 다른 나를 찾아 젤리를 뿌리고 스티커를 붙여 내 안에 어떻게 나를 배치할까 궁리합니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말들이 새 이마를 가지고 수천 번의 질문을 하는 상상로를 걸어옵니다.

 

초승달에 그네를 매 하늘을 날았다는 당신의 태몽이 맞았습니다. 죽은 가지를 부러뜨리면서 나는, 밤나무 숲을 걸어 나옵니다.

 

길 열어주신 나의 하나님 감사드립니다. 이 세상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게 감사합니다. 선해주신 심사위원님, 세계일보사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심사평] “인생론적 깊이 함축언어적 안정감 탁월

 

2022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응모작들은 예년에 비해 숫자는 조금 줄었지만 그 수준과 내실은 더욱 탄탄해졌다고 할 수 있다. 역량 있는 신인들이 이렇게 다양한 작품을 투고해주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기쁘게 다가왔다. 심사위원들은 예심을 통과한 작품들을 읽어가면서 다수 작품이 빼어난 언어와 안목을 보여주었다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다. 시단의 주류 시풍이나 관습적 언어를 답습하지 않고, 스스로의 경험적 언어에 오랜 시간과 정성을 쏟았을 작품들이 많았다. 침체기에 있는 한국 시는 이들의 언어를 통해 새로운 개진을 해갈 것이다.

 

심사위원들은 그 가운데 김하미, 이신율리, 조민주씨의 작품을 오래도록 주목하였는데, 숙의 끝에 상대적으로 균질성과 언어적 안정감을 가진 이신율리씨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이신율리씨의 비 오는 날의 스페인, 비가 내리는 풍경 속에서 구성해가는 사람살이의 외관과 생태와 속성이 인생론적 깊이를 함축하고 있는 수작이다. 그 안에는 음식들에 관한 숱한 기억의 구체성과 함께, 스페인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어도 더 멀리 떠나 있어도 좋을 사랑과 불꽃과 시간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수없는 사이에서 벌어지는 생의 파노라마가 환상성과 역동성을 함께 거느리면서 그림처럼 사진처럼 다가온 선물이자 이벤트였다. 더욱 성숙한 시편으로 세계일보 신춘문예의 위상을 높여주기 바란다.

 

당선작이 되지 못했으나 구체성과 심미성을 두루 갖춘 사례들이 많았다는 점을 부기한다. 대상을 좀 더 일상 쪽으로 구체화하여 우리 주위에서 살아가는 타자들을 애정 깊게 응시한 결실도 많았다. 다음 기회에 더 풍성하고 빛나는 성과가 있을 것을 기대하면서 응모자 여러분의 힘찬 정진을 마음 깊이 당부 드린다.

 

심사위원 안도현·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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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성천변 물래실 / 구지평

 

 

어정쩡한 물안개가 저녁 강을 서성이다

속기 벗는 투명함에 산 빛이 검어질 때

실골목 저뭇해지는 내성천을 감싸고

 

굼닐대던 저녁연기 모래톱으로 불러내면

속 깊도록 시에 숨어 우련한 물래실이

갈라진 시간 틈새로 제 몸피를 드러낸다

 

허물어진 돌담 너머 마당귀에 마른 장작더미

텅 빈 방 잠긴 시간 푸른 여백 문장인데

이제야 적요를 푸는 한 올 한 올 자화상

 

평면으로 구겨지는 빛바랜 담초談草 위에

창문마다 달이 뜨면 거기에, ! 거기에

묏등에 답청하시는 어머니가 서 있네

 

물래실 : 경상북도 예천군 마을 이름

 

 

 

 

[당선소감] “금빛 반짝이는 내성천이 시조의 모태

 

사무실 창밖으로 찌뿌듯한 눈발이 희끗희끗 날린다. 며칠째 일없이 심란하여 맥 놓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시대가 하수상한지라 모르는 전화번호는 잘 받지 않는 편인데 벨소리에 묻은 예기에 끌려 바로 받으니 당선 소식이다. 가슴에서 머릿속까지 헤집고 다니는 말글들이 뽁뽁거리며 입술을 내밀고, 산란기 무논에 붕어 튀어 오르듯 통통거리며 정신 줄을 튕긴다.

 

책상 위에 게으르게 누워있는 책들 속에 갇혀있던 문장도 스멀스멀 똬리를 풀고 제 공()을 자랑하듯 눈앞에 알짱거린다. 그래, 저것들 조탁하며 남은 생 보내라는 부처님 말씀인 게지! 늦깎이 시 공부를 시작한 지 10년째. 연로하신 아버님 둘째아들이 원을 풀었다. 한국문인협회 평생교육원에서 어설프기 그지없는 무지렁이를 야무지게 무두질 해주신 이승하 교수님과 문우님들, 격조 있는 시조 세계와 에스프리의 멋을 깨우쳐 주신 윤금초 교수님과 열린시조학회 문우님들께 감사의 큰절을 올린다. 그리고 코로나에 발목이 잡혀 텅 빈 손이라고 생각한 신축년 한 해를 무한한 기쁨으로 채워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의 말씀 올린다. 힘든 시기 함께 보낸 사랑하는 가족들과 뇌리를 스치는 많은 분들께도 고마움을 전하며 잊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졸작의 배경인 물래실은 소백산 등짝을 따라 한참 내려오다 보면 끝자락에 매달린 산골 마을이다. 열 번이 넘는 아버지의 복막염 수술로 형편이 어려웠던 세월이었지만 떠나온 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머릿속에는 물기 머금은 모래사장이 금빛으로 반짝이던 내성천이 흐른다. 그 배고팠던 때도 부뚜막 한 쪽에 조그마한 단지를 두고 아침마다 곡식 한 줌을 모아 탁발하러 오신 스님께 시주하던 어머니가 눈에 선하다. 남에게 건넨 해로운 말이 다 자식에게 돌아온다며 평생 말을 아끼시던 어머니, 하루 종일 물만 마셔도 배가 부르다던 어머니, 어머니가 20202월에 귀천하셨다. 보셨으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이 기쁨과 영광을 어머님 영전에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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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신선한 감각과 고요한 시심 돋보여

 

불교신문 ‘2022 신춘문예에 응모한 시·시조 부문 작품들을 꼼꼼하게 읽었다. 불교문인의 등용문인 만큼 응모한 작품들의 경향도 예년과 다름이 없이 불교적 소재를 시적인 모티프로 삼은 경우가 주를 이루었다. 사찰 공간과 주변 환경, 수행, 불교와의 인연 등을 노래한 작품들이 많았다. 특히 불교의 연기법, (), 무심과 무욕 등을 노래한 시편들은 예년의 시편들보다 깊고 확장된 시심(詩心)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다만, 한 편의 좋은 시는 빈틈없이 꽉 찬 상태에 있지 않고 오히려 흰 여백에 의지할 때가 많고, 읽는 사람이 개성적인 독해의 내용으로 그 여백을 마저 채우게 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당선작 선정을 두고 크게 고민한 작품들은 두고 간 신’, ‘반가사유상’, ‘고목’, ‘내성천변 물래실이었다. ‘두고 간 신은 낡은 구두를 보며 아버지의 일생을 가늠하는 작품이었다. 작고하시기 전 구두를 닦고 끈을 묶어 신발장에 가지런하게 두었다라고 쓴 대목은 감동이 컸지만 술회의 방식이 다소는 산문적이라는 느낌을 갖게 했다. ‘반가사유상은 마음이 안정의 세계에 머물게 된 일을 목수의 목공의 일에 견주고 있는데, 시를 짓는 데에 익숙한 솜씨를 보여주었지만 번뇌의 소진과 맑은 명상을 죽음의 상태인 에 견준 점은 다소 의아했다. ‘고목은 벌판에 선 고목을 노스님으로 여기고 쓴 작품이었다. 고목이 옥빛 낮달 하나 걸치고있고, 스스로 적막 그 자체가 되어가고 있다고 적은 시구들은 깨끗한 시심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눈꽃들이 입적해 있다라고 쓴 시구 등은 다소 과장되어 있는 듯했다.

 

긴 고민 끝에 내성천변 물래실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이 시조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되는 풍경을 응시하는 고요한 시심이 돋보였다. 시행을 따라가며 읽을 때 잡스럽고 탁한 것을 걷어내며 밝고 환한 달이 떠오르는 모습을 절로 상상할 수 있었는데, 그러할 때에 어떤 환희 같은 것을 느끼게 했다. 시어의 선택이나 시상의 전개가 매우 자연스럽고 또 신선한 감각을 선보여 신뢰감을 안겨 주었다. 앞으로 더 많은 가편(佳篇)들을 보여주시길 당부 드린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문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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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 살롱 / 최은우

 

 

자꾸 이야기하다 보니 말이 생깁니다 기분이 달라지고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요 기분 탓인가요? 그러자고 한 건 아닌데 수다장이가 돼서 오물조물 오래 씹어 쉴 새 없이 꺼냈어요 이야기라면 해도 해도 할 게 많아요 귀를 여는 자가 없다면 저 무성한 나뭇잎들이 있잖아요 이리 와서 들어봐요 늘 같은 이야기지만 오늘은 하나 더 추가시킬 예정이에요 극적인 요소는 늘 있어요 마녀들이 밤에 모여 항아리에 대고 떠들던 주문 같은 것도 있다니까요 인생은 재미 아니겠어요? 문밖 무성한 화분들은 신경 쓰지 마세요 이야길 엿듣고 흉내 내느라 줄거리가 아니 줄기가 생겨서 풍성해졌어요 염치도 없이 나무 옆에 나무를 낳네요 자꾸만 나무들이 생기는 오후에 하나 더 있다고 하나 더 없다고 나무가 나무 아닌 것은 아니겠지요 비 오는 오후에도 어김없이 이야기에 중독된 여자들이 똑같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감수분열하듯 옆에서 옆으로 다음 손님을 부르네요

 

여자는 거미 다리 같은 손가락으로 사뿐사뿐 머리카락을 잘라요 몸이 생기기 전부터 손가락만 있었던 것처럼 손은 여자를 떠나 가위를 들고 허공에서 춤을 춰요 원피스에서 요란하게 싸우고 있던 꽃무늬들이 살짝 얼굴을 빼자 잎사귀들이 떨어져요 떨어져서 허공으로 떠다니는 꽃들. 차를 마시던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요 알지 못해요 가위질 소리에 맞춰 간간이 웃음소리를 끼워 넣을 뿐. 유리문이 밀릴 때마다 들어오세요 붙여진 팻말에서 글자들이 살짝 떨어졌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은 비밀을 지켜주기 위해서죠 비밀과 상처는 오늘은 괜찮고 내일은 거대해지다 모레면 잊고 글피엔 주저앉게 만드니까요 쉽게 묻는 게 좋을까요 쉽게 말하는 게 좋을까요 수다장이들이 수다스럽게 찻잔을 부딪치며 그런 건 관심 없다고 하네요

 

 

 

 

[당선소감] ‘모든 봄은 언제나 첫 번째였다는 걸 이젠 압니다

 

이 겨울이 지나면 또 봄이 올 겁니다. 누군가에게는 첫 번째 봄이고 누군가에게는 마지막 봄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때마다 똑같이 피어나는 꽃들을 기를 쓰며 보러 가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왜 꽃들 앞에서 같은 포즈를 취하며 그곳에 그날, 그 시각 거기 있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사진을 찍는지를 말이지요.

 

아주 오랜 시간 낙방하고 이제 신춘문예는 봄이 오기 전 우체국에 들르는 작은 행사가 되었습니다. 그 많은 연례행사를 치르며 나이를 먹고 왜 봄이 오면 사람들이 꽃을 보러 가는지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습니다. 모든 봄은 언제나 첫 번째였고 짧은 진통으로 낳은 둘째도 결국은 내 처음의 아이였다는 것을요. 어느 순간 핸드폰 카메라 앨범엔 꼭 찍혀야 할 단풍이 있고, 꼭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길고양이가 있으며, 재개발을 기다리는 골목의 장미여관이 가지 말라며 제 발을 붙들었습니다. 그 골목을 찍고 있는 순간도 다시 오지 않을 그 하루의 처음이었다는 것을요.

 

시와 함께 한 살 더 나이 먹을 수 있게 해주신 부산일보사와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과거와 현재 미래에서 나의 아픈 손을 잡아 주어 나의 한쪽, 나의 시가 되어가는 사람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심사평] 읽고 있어도, 읽고 나서도 얼굴에 웃음이 번지는 시

 

506명이 보내온 1903편의 작품에 깃들어 있는 무게감. 당선작을 결정하는 일은 그것을 이겨내는 일이었다. 마지막까지 심사자의 눈길을 끈 것은 모두의 잠깐’ ‘뱉은 씨앗’ ‘숲에 살롱세 편이었다.

 

모두의 잠깐은 잘 쓴 시다. ‘우리는 중요한 일일수록/일의 틈틈마다 그 잠깐을 배치시켜 놓아요/하루가 연속성의 과정이라면/하루엔 얼마나 많은, 다양한 잠깐들이 있을까요라는 진단은 휴식 없이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마땅하고 옳다. 그러나 후반부로 갈수록 그 진단의 힘은 약해지고, 잠깐의 목록들을 호출, 나열하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있었다.

 

뱉은 씨앗오물거리는 입속에서 톡톡 내뱉어지는/수박씨들, 저것은 아마도 최초의 농법이자 직파법이라는 발상이 뛰어났다. 그러나 이 발상이 인간에게로 향하는 심화 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시를 닫아버린 것이 못내 아쉬웠다.

 

숲에 살롱은 재미있다. 읽고 있어도, 읽고 나서도,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어느 동네나 있을 법한 살롱(미장원)과 어느 동네나 떠돌만한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요리조리 이야기의 잎사귀들, 시의 잎사귀들을 갖다 붙였다.

 

시가 독자를 억압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대면이 어려운 이 시대에, 이런 재미난 이야기의 광경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즐겁다.

 

첨언 한 가지. 이 시가 만약 잎사귀가 아니고 꽃을 이야기했다면 얼마나 끔찍했을까. 아무쪼록 좋은 시는 꽃이 아니라 잎사귀를 보기 좋게 매다는 일이다.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전동균·유홍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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