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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자 놀이 / 김보나

 

 

내 방엔 뜯지 않은 택배가

여러 개 있다

 

심심해지면

상자를 하나씩 열어 본다

 

오래 기다린 상자는

갑자기 쏟아지는 풍경에 깜짝 놀라거나

눈을 떴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건 착각이야

세계는

 

누군가 눈을 뜨기 전에

먼저

빛으로 눈꺼풀을 틀어막지

 

나는 상자가 간직한 것을 꺼내며 즐거워한다

 

울 니트의 시절은 지났고

이 세제는 필요하다

 

새로 산 화분을 꺼내

덩굴을 옮겨 심으면

내 손은 순식간에 흙투성이가 된다

 

그래도 돼

뮤렌베키아 줄기가 휘어지는 방향을 따라가도 돼

 

친구는 이것을 선물하면서

식물은

쏟아지는 빛의 자취를 따라가며

자란다고 말했지

 

방을 둘러보면

여전히 상자가 수북하다

 

이삿짐이거나

유품 같다

 

빈 상자가 늘고

열 만한 것이 사라져 가면

 

나는 이 방을 통째로 들어

리본으로 묶을 궁리를 해 본다

 

 

 

 

[당선소감] 다르게 말하는 방법 활자가 열어준 세계

 

겨울의 초입, 갑상선암 진단을 받았다. 완치 가능성은 높지만 갑상선을 절제하는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마음이 얼어붙었다. 출퇴근길, 바삐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생각했다. 단단한 빙하가 된 것 같다고, 점점 부서지고 작아질 얼음이 되어 먼 하류로 떠내려가는 것 같다고.

 

막막한 그때, 당선 전화를 받았다. 거짓말처럼 생일에 걸려 온 전화는 이렇게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엔딩 크레디트가 내려진 것처럼 살지 말라고, 너는 이제 활자의 세계에서 다시 태어날 거라고.

 

언젠가, ‘얼음의 노래를 들은 적이 있다. 촬영감독 요나 인톤은 팽팽한 빙판이 호수 한가운데에서 깨지는 순간을 영상으로 포착했다. 길고 깊은 균열이 생기는 그때, 얼음은 노래한다. 나는 무언가를 잃어 가는 사람들의 곁에 있고 싶다. 그러한 방식으로 노래하는 법을 배우기로 하면서.

 

고마운 사람들의 이름이 어둠 속에서 하얗게 떠오른다. 서툰 나를 받아 주는 아네스와 베드로, 오빠와 두 동생과 다투고 또 사랑하며 살아갈 것이다. 삼십 대가 되면 좋은 일이 더 많이 찾아온다고 한 혜지 언니, 초등학생 때부터 서로 곁을 지켜 준 미혜와 수인, 평생 미더운 눈빛 서우종 선생님, 널 믿는다는 말 대신 말없이 손을 잡는 진희, 언니는 시인이 될 거라고 나보다 앞서 믿은 윤혜, 함께 글을 쓰고 사계절의 풍경을 여행한 지혜, 혜배, 혜라에게 고맙다. 무지개책갈피와 상처를 드러내지 않는 글쓰기 친구들, ‘SOH’가 있어 일하는 나날 가운데에서도 마음을 가다듬으며 읽고 쓸 수 있었다. 쭈뼛대며 수업에 찾아온 사범대생을 격려한 한영옥 시인님,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는 법에 대해 알려 준 김상혁, 황인찬, 김소연, 김언 시인님과 첫걸음을 응원해 준 심사위원님들께 갓 우린 차처럼 따뜻한 감사를 전하고 싶다.

 

모두에게 행운이 깃들었으면 좋겠다. 숨은 씨앗을 어떻게든 찾아내 싹을 틔우는, 햇빛을 닮은 힘이 이 글에 어리면 좋겠다. 앞으로도 활자를 믿고 쓰면서, 어쩌면 날 녹일지도 모를 빛과 사랑을 따라 흔들리며 나아가고 싶다.

 

 

 

 

[심사평] 평범한 소재서 리듬감 이끌어낸 상상력서정시 품격 한층 높여

 

심사는 예심과 본심을 통합해 진행됐고, 논의를 거쳐 10여 편의 작품이 본심에 올랐다. 이 중에서 가뭄’ ‘포도’ ‘청년 희망 회복’ ‘상자 놀이가 경합한 끝에 상자 놀이가 당선작으로 선정됐다. 마지막에 아쉽게 수상의 영예에서 밀려난 다른 작품들 역시 서정적 울림과 개성을 지닌 높은 수준을 보여줬다는 것이 심사위원들의 중론이었다.

 

가뭄은 자연어의 결합을 통해 영혼의 갈증과 슬픔을 형상화해내는 언어 감각이 눈에 띄었다. ‘포도는 도입부의 돌발적인 이미지가 끝까지 유지되는 흡인력과 의미의 여운을 증폭시키는 간결한 시상 전개가 인상적이었다. ‘청년 희망 회복은 변두리 재개발지와 도시계획 차원에서의 개발행위의 상관관계를 통해 사회적 관심을 환기해내는 시선의 힘이 돋보였다. ‘상자 놀이는 평범한 일상의 소재에서 운문적 리듬감을 이끌어내는 풍부한 상상력과 감성이 감탄을 자아냈다.

 

이 작품들에 대한 심사위원들의 일차 의견 교환이 있고 난 다음 가뭄은 언어 감각의 화려함에 비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불투명하다는 점, ‘포도는 돌올한 언어 배치가 인상적이지만 한편으론 그것이 행간의 깊이를 모호하게 만든다는 점이 각각 지적돼 제외됐다. 최종적으로 청년 희망 회복상자 놀이가 남았다. ‘청년 희망 회복은 재개발지에 꽂힌 깃발을 통해 세계가 재편되고 그 안으로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지적하는 사회적 비판의식과 구체적 사실감이 코로나19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의 마음을 대변한다. 다소 시가 직설적이고 산문적이라는 점이 고심케 해 당선작이 되지 못했지만 이 응모자의 앞날을 기대하게 한다. 결국 끝까지 남은 상자 놀이가 별다른 이견 없이 만장일치로 당선작으로 선정됐다.

 

우선 상자 놀이는 간결하면서도 풍부한 여백의 미가 서정시로서 갖춰야 할 품격을 한층 높인다. 시상을 전개하는 맑고 순수한 시행의 흐름이 행과 행, 연과 연 사이에서 막힘없이 운용돼 운문적 리듬감으로 충일하다. 또 시행과 시행을 건너뛰는 간결함과 담백함으로 우리 마음의 여백에 잔잔한 파문을 남기는 풍부한 상상력이 여운을 자아낸다. 이 시는 뜯지 않은 택배라는 평범한 일상의 소재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것을 구태의연하게 쓰지 않고 현실에 발을 댄 독특한 시선으로 변주하는 공간 변용 능력과 감정의 안배가 뛰어나다. 상자의 닫혀 있음과 열림, 그를 통해 드러나는 어둠과 빛이 팬데믹 시대의 도시적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속내를 주거 공간에 집약해낸다. 무엇보다 당선작과 함께 보내온 응모작들의 수준이 고른 점도 안심케 하는 대목이다. 산문화와 장식적인 수사가 대세를 이루는 오늘날의 시적 풍경 속에서 이 신예시인이 현실 세계와 상상 세계를 덧대어 어떤 삶의 박동과 리듬을 우리에게 선물해줄지 큰 기대를 가지며,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나희덕·박형준·문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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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유인력 / 양승수

 

 

한 알의 사과가 저문다

잘 여문 것 좇아 줄기와 가지 따라

억지로 삼키던 몇 모금의 물 따라

바쁘게 걸어온 길에서 폴짝 뛰어오른다

느껴지지 않던 중력이 어느 순간 무거워져

곤두박질치는 것이다

날아오르는 것이다

떨어질 때가 된 사과는 서서히 붉어지는 것이고

떨어지고 난 사과가 여전히 싱싱한 것은

사라지지 않은 관성, 따르다 남은 습관 탓이다

사과의 단맛은 그런 식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과를 가졌을까

하루에도 몇 개의 사과가 공중으로 날아오를까

저로부터 최대한 멀리 뻗어

그러나 고작 몇 발자국 사과를 배웅 나갔다가

휘어졌던 가지가 그 탄력으로

복원되는 궤적을 그리며 돌아온다

돌아오는 가지 하나 횡단보도를 건넌다

걸음 재촉하는 신호등

가던 길 멈추고 고개 돌려 옆을 보았다면

중력이 늘 같은 방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거나

받아들이거나

도로에는 각자 서로 다른 중력으로 달려온 것들

잠시 멈추어 서 있다

그러나 멈추었다는 것을 아는 자동차는 없다

아무도 시동을 끄지 않는다

떨어진 낙과의 단맛 같은 엔진소리

정지선에 닿기 전 이 곳은 공중이다

바람이 지나온 커브길에서

원심력과 구심력으로 뻗어나간 잎맥의 갈림길 따라

빨아들인 햇빛 같은 후회

꽃 피었다가 졌던 시간 흘러가지 않고 멈춰

오래 서성이던 발자국이었다가

흘러갈 곳 없는 소리들 엉켜있던 것이라 한들

사과를 두고 무슨 오해라 할까

 

 

 

 

[당선소감] "민슬기, 권미양별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아델이라는 영국 가수가 컴백 콘서트를 했다.

 

자신의 음악에 대해 지극히 개인적인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닌가싶었다고 한다. 너에게서 내가 모르던 나를 발견하고 너의 상처가 나의 용기가 되고 너의 용기가 나의 기쁨이 되고 네가 지나친 너를 귀띔해준다. 너로 하여 시간이 휘고 거리도 사라진다. 우리는 우리를 먹이로 먹고 사는 종족인가. 어떤 슬픔으로 벌어진 입은 잘 닫히지 않는다. 입맛을 쩍쩍 다시며 어쩌면 영원히 닫히지 않는다. 우리는 그 벌어진 입을 그곳에 버려두고 다른 입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그 벌어진 채 버려진 입에 와 닿는 것들의 맛을 느끼게 된다. 아니 그보다 벌어진 입들이 덜거덕거리는 소리를 달고 걸어간다. 도망치려고 뛰어가면 그 소리가 더 커진다.

 

살금살금우리가 하나의 영혼을 공유하던 때가 언제였을까. 그 사실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기를 읊조린다. 내 상처에 아무리 약을 발라도 낫지 않던 것이 너의 상처를 어루만져 나아가는 임상을 겪으며 어디가 상처였는지 깨닫게 되기를 밤 하늘에 흩뿌려본다. 알 수 없음과 실패라는 축복까지. 나는 기억하지 못해도 별은 기억해주리라. 어둠은 속삭여 주리라.

 

별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내 친구 민슬기 뚜벅뚜벅 권미양 김병용 모스부호 노치성 김희섭 김경수 신애영 박경만 환한 서영채 최두섭 임철우 최수철 주인석 높은 먼먼 나희덕 안도현 박남준 복효근 이희중 가파른 장창영 한정화 최기우 미소 짓는 김의수 뜨끈한 전성진 섬세한 꾸준한 튼튼한 함한희 이정덕 예리한 윤중강 조명환 멋진 박윤지 빛나는 별들을 올려다본다. 맑은 비스듬한 화사한 포근한 숯검댕이 먹먹한 그렁그렁한 무던한 칼칼한 글썽글썽한 부르지 않아도 서운타 않을 빛이 빚임을 안다. 길이 아직 식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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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뉴튼 사과와 이 시대 일상 적절한 시적 거리로 밀당

 

시는 언어예술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언어가 박제된 문장으로만 남아서는 시가 되지 않는다. 언어는 화자의, 그리고 시인의 목소리가 실린 ''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 말이 살아 독자를 향해 나아갈 수 있고, 독자의 시가 될 수 있다. 시는 언제나 정의할 수 없는 어떤 것이지만, 시인이 되고자 꿈꾼다는 것은 또 언제나 이 언어와 말 사이에서 줄타기 하는 것이어야 한다.

 

한 사람의 새 시인을 찾기 위해 1,000편이 넘는 응모작을 만났다. 코로나시대의 불안증이 시 쓰기에도 가위 누르기를 한 까닭일까, 전반적으로 활기차고 패기 넘친 작품보다는 사색적이고 관조적인 작품들이 많았다. 또 상투적인 언어와 생경한 이미지의 나열로 인해 박제화 되어버렸거나, 최소한의 형상화 과정도 거치지 않은 채 기억과 일상을 그대로 진술하고 있는 응모작도 적지 않았다. 이들을 일차 걸러낸 후 남은 작품들을 다시 꼼꼼히 읽었다.

 

심사자의 감식안을 시험한 응모작에는 오랜 숙련의 흔적이 뚜렷하게 보이는 작품도 있고, 새로운 감각으로 세상을 읽어낸 작품도 있었다. 홍여니의 를리외르는 자신의 지나온 삶을 책 제본 과정에 빗대어 쓴 작품이었다. 그 상상력이 흥미로웠지만 묘사와 진술을 중첩시킨 어법에서 몇 군데 억지스러운 이미지가 정서적 몰입을 약화시킨 측면이 있었다. 고경자의 끈의 방식은 직장인의 삶의 방식과 애환을 진솔하게 담아내면서 체험과 사유를 잘 조화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마무리 부분에서 시적 긴장이 유지되지 못한 채 느슨하게 풀려버린 아쉬움이 남았다.

 

마지막까지 심사자의 손에 남은 응모작은 최형만의 새들의 삽화와 양승수의 만유인력이었다. 두 작품 모두 당선작으로 삼아 무방할 시품을 갖추고 있었다. 새들의 삽화는 언어를 다루고 시상을 직조하는 능력이 대단히 숙련되고 단단하였다. 굳이 흠을 잡자면 그 단단함 때문에 오히려 신인으로서의 활달함이 덜 느껴졌다는 것이다. 고민 끝에 만유인력을 당선작으로 선하였다. 거기에는 인간 존재의 무게와 삶의 부피를 응축시키는 상상력의 힘이 있었다. 뉴튼의 '사과'와 이 시대의 '일상'이 적절한 시적 거리로 밀고 당기고 있었다. 특히 꽤나 긴 호흡으로 끌고 간 작품인데도 끝까지 시상에 흐트러짐이 없었다는 점이 앞으로의 시적 성취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하였다. 당선인에게는 축하를 드리며, 아깝게 선택되지 못한 분들에게도 심심한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드린다.

 

심사위원 김동근(전남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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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소행성 134340* / 유진희

 

 

우주는 조금씩 부풀고 있고

우리는 같은 간격으로 서로 멀어지고 있어요

사방이 우주만큼 트여 있어도 어쩔 수 없는 일

좌표만 같은 비율로 커지는 세계에서

시간만이 변수라고 한다면

아득한 게 쓸쓸한 일이 되고 맙니다

다시 올 것 같지 않게 멀어지다가

어느 계절엔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오는 별을

찌그러진 궤도를 가진 별을

사람들은 무리에서 내쫓았습니다

이로써 우리 행성계는

완벽하게 끼리끼리 어울리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공전 주기를 늦추고 싶은

사람들은 서둘러 여행을 떠나지만

매진 행렬이 더 빠르게 이어지고

출발을 위한 서류는 늘어납니다

서류가 늘어날수록 안심하는 사람들을 위해

늘 거기 여기의 세계에서

서류는 잠식하는 불안처럼 불어납니다

모든 항의에는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는 답변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관료의 심장을 뚫어버릴 별빛은

어느 블랙홀에 갇혀버렸을까요

다른 시간 속에서 유영하던 우주비행사는

돌아오자마자 순식간에 늙어버립니다

 

* 태양계에서 퇴출된 명왕성이 받은 새 이름

 

 

 

 

[당선소감]

 

중복 투고 여부에 대한 확인 전화를 받은 지 11일이 지나서야 당선 통보 전화를 받았다. 확인 전화 이후 거의 바로 당선 고지 전화가 오는 줄 알았던 나는 이 큰 행운이 스쳐 지나간 줄 알고 꽤 힘든 시간을 보냈다.

 

확인 전화와 당선 고지 통화 사이 열흘 남짓한 시간, 앞으로 해나가야 할 작업들을 정리했다. 그중에 가장 큰 성과라면 '계속 쓸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다다른 것이다. 확인 전화를 받고도 떨어진 줄 알았던 나는 그 불운을 이겨내기 위해 언제라도 쓰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완전히 백기투항을 하게 되었다. 다른 방도는 없었다.

 

최근에 '사무사'(思毋邪)에 대해 생각도 많이 했다. 이 말이 맑고 고운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예술가의 진심'에 관한 것이라고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니 진심이 담긴 시를 앞으로 계속 쓰도록 하겠다.

 

나의 시에 성장시라는 이름을 붙여주시고 묵묵히 행로를 지켜봐 주셨던 최두석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교수님은 모르셨겠지만 나는 속으로 기대에 부응하고 싶다는 생각에 자주 조바심이 났었다. 시어 하나하나 세세하게 지도해 주셨던 임동확 교수님, 생각을 많이 깨우쳐 주신 서영채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문학은 언어 예술이란 정의에 조금은 어울릴 수 있는 시를 쓸 수 있도록 함께 공부해온 나의 선배님들 권오영, 엄기수, 신성률 시인께도 감사를 드린다. 사당에서 함께 한 시간이 없었다면 시를 어떻게 익혀가야 하는지 몰라 오래 헤매었을 것이다.

 

당선 소식을 들은 날 시를 부모님께 보여드렸다. 엄마는 시간이 약이라는 말의 허망함으로, 아빠는 정치에 대한 이야기로 시를 읽으셨다. 그렇게 읽히는 것에 수긍이 가면서 이렇게 각자의 생각대로 시가 읽히는 것이 좋았다. 엄마, 아빠, 그리고 조카 규민이에게는 사랑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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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응모자 연령, 지역의 다양함에 심사 내내 놀라다양성이 우리 시가 가진 가능성

 

이번 매일신문 신춘문예에는 총 1785편이 응모되었다. 응모자들의 연령과 지역의 다양함에 심사 내내 놀랐다. 이러한 다양성이야 말로 우리 시가 가진 가능성이라고 생각해 설레는 마음으로 심사에 임했다.

 

'도미노' 4편의 응모자는 사유의 집중력과 점착력이 돋보였다. 오랜 시간 시를 쓰며 응시한 세계를 완성도있게 쌓아올릴 줄 아는 시인이었다. 그러나 이 시가 갖는 깨달음의 형식이 신선하고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는 의견이 있었다.

 

'천사를 만나는 날은 오늘' 4편의 응모자는 시가 젊고 감각적이어서 최근의 경향과 발맞추어 기대감을 갖게 하는 시인이었다. 그러나 젊은 시인들의 감각들 사이에서 자신만의 변별점을 찾으려는 노력이 조금 더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견과 분위기를 넘어서는 지점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었다.

 

'왜소행성 134340' 4편의 응모자는 자기만의 목소리가 돋보이는 시인이었다. 우주와 지구와 이국과 모국의 거리를, 익숙하면서 새로운 감각들을 발견하는 시선이 재미있게 그려졌고 각 시마다 마지막 문장에서 시적 분위기를 다시금 낯설게 만드는 감각도 좋았다. 그러나 문체에 대해 아쉽다, '습니다' 종결어미가 변주 없이 쓰이고 있다는 문제도 제기되었다.

 

세 분 다 수준 이상의 시를 쓰고 있었기에 당선자를 선정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세 분의 시를 두고 심사위원 셋이 고심을 거듭했다. 문청, 패션, 트렌드 및 시쓰기 감각에 대한 상당한 논의가 있었다.

 

'왜소행성 134340'의 유진희 씨를 당선자로 선정한 것은 다른 두 분에 비해 이견의 격차가 크지 않았다는 점과 유진희 씨가 응모한 다른 시들 모두 편차 없이 고루 좋았다는 점이 크게 작동했다. 유진희 씨의 시가 보여주는 매력적인 세계가 여기서 출발해 어디로든 멀리로 잘 떠날 수 있기를. 그가 꿈꾸던 여행이기를 기쁜 마음으로 응원한다.

 

심사위원: 강성은(시인), 김문주(영남대 교수·문학평론가), 정호승(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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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를 찾다 / 김종숙

 

 

요동치던 밥솥에 뜸이 들고

솥뚜껑을 열면 거기

너무도 고요해진, 반듯한 밥알들

 

끓어 넘치고 치솟던 설익은 시간이 지나고

잦아든 잘 지어진 밥

 

까칠한 쌀알들이

반지르르한 한솥밥이 되기까지

가령, 몇억 년 동안 쌓인 사막의 무늬들이나

물에 씻긴 돌의 생김새 같은

저의 격렬을 저도 종잡지 못한 일을

따라 했을 뿐이다

 

또는, 반듯한 간격을 맞추어

파랗게 자란 벼포기들이

탈곡이 되고 같은 자루에 동량으로 담기는 동안

바르르 떨다 잠잠해진 저울의 바늘이 함께 들어 있어

더도 덜도 없는 정량,

들쭉날쭉 흐트러진 적이 없다

 

흔들릴 만큼 흔들린 벼 포기들

털릴 만큼 털려 본 낟알들

 

갈 만큼 다 걸어가 보고야

능숙하게 제 길을 가거나 돌아오는 답습처럼

그 뒤끝은 저렇게

결 고른 한솥밥이 되는 것이다

 

이쪽도 넘보고 저쪽도 넘보던

휘청이며 허기진 몸이 그 고요해진 밥을 먹고

제힘을 힘껏 잡는 것이다

 

 

 

 

[수상소감] "마흔 중턱 늦깎이 해거리 공부, 뚜껑 열린듯 결실"

 

뚜껑에 대해서 잠시 생각을 했습니다. 두 번의 신춘문예 최종심에서 결국 열지 못했던 뚜껑, 그건 내가 아직 미끄럽고 땀이 많이 나는 손을 가졌다는 뜻이었겠습니다. 어쩌다 뚜껑이 열리는 패는 늘 허수였지만, 꽉 잠긴 한계에서 한 호흡을 더 힘준 덕분일까요, 열린 뚜껑을 들고 한참을 멍하니 있는 지경입니다.

 

한때 삶을 견딜 수 없어 신을 찾았고, 신은 내게 자유와 시를 주셨습니다. 몸부림을 칠 때마다 애착이 떨어져 나갔고 또 공허했지만, 마흔 중턱에서야 늦깎이로 시에 입문했습니다. 바쁜 직장 일들로 해거리 시 공부를 했습니다. 절실한 시간을 할애한 만큼 모든 결실들이 생긴다면 그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겠습니까.

 

예부터 시인은 신과 인간의 메신저로서 삶 자체가 구도의 길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시를 쓸수록 와 닿는 말입니다. 때로 '신은 시인에게 인간의 오관으로 느낄 수 없는 초감각 계들을 몽환처럼 열어 보이기도 한다' 고 생각합니다. 늘 깨어 있는 마음으로 그런 감각조차도 벼려 이 시대에 일익을 해 보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앞서 걸으며 방향이 되어 준 분들이 계십니다. 졸고를 선해 주신 심사위원님 감사합니다. 맹문재 선생님과 문우님들,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명서 선배 시인님, 그리고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

 

이 자리를 마련해 주시고, 신춘문예 공고에서부터 당선자 고지까지 한 번도 나이를 묻지 않아 주신 머니투데이에도 감사를 드립니다. 어릴 때부터 두보, 소동파, 이백, 김삿갓의 한시(漢詩)를 들려주시던 아버지와 솜씨를 물려주신 어머니도 하늘나라에서 무척 기뻐하실 것 같습니다. 그동안 곁에서 알게 모르게 외조를 아끼지 않은 남편과 응원해 준 세 아이에게도 미안함과 고마움과 사랑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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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시인 삶의 깊이 에 고스란히

 

올해엔 시 부문 응모작품 수가 적었다. 그러나 좋은 작품이 많았다.

 

<도배사>는 여자 도배사의 아슬아슬한 삶과 닮은 작업 과정을 통해 "벽이 꽃그림자 속으로 환하게 스며드는" 과정을 리얼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종결어미가 모두 "~"로 계속 이어지면서 시가 둔탁하고 리듬감이 부족했다.

 

<어머니 몸 속에는> 작품은 뼈마디마다 삶의 무게로 점철된 통증들이 신음소리인 비음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어머니에 대한 회한과 애정이 잘 담겨져 있다. 다만 응모작 대부분이 시의 주제나 의도와 달리 너무 길어 산만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목수의 딸>은 목수였던 아버지의 삶을 아련하게 반추하고 있다. 목장갑을 빨면서 아버지의 한 생애를 뒤돌아보는 시인의 눈이 따뜻하다. 다만 함께 응모한 다른 작품들이 선정을 다음 기회로 미루게 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작품은 <고요를 찾다>였다. 벼 낟알이 쌀이 되고 밥이 되기까지, 하여 고요해지기까지 과정을 그야말로 '반듯하게' 그리고 있다. 잘 익은 따뜻한 밥을 앞에 대하듯 군더더기 없이 정갈하게 표현해 내고 있다. 작품 중에 "가령", "또는" 같은 추임새도 시적 긴장을 확장시켜주고 있다. 함께 응모한 작품들에서도 시인의 세상을 바라보는 깊이를 느끼게 하고 있어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는다.

 

심사위원 이순원 소설가, 이희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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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유지에서 / 채윤희

중국 부채를 유럽 박물관에서 본다

초록색을 좋아하는 나는

딱정벌레 날개 위에 누워 있다

한때 공작부인의 소유였다는 황금색 부채

예수는 얼핏 부처의 형상을 하고 있다

약속의 땅은 그림 한 뼘

물가로 사람을 인도한다는 뿔 달린 짐승은 없다

한 끝이 접혔다가 다시 펼쳐진다

떨어진 금박은 지난 세기 속에 고여 있고

사탕껍질이 바스락거린다

잇새로 빠져나와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받아 적을 수 없는 소리

파란색을 좋아하는 나는

물총새 깃털을 덮고 잠든다

멸종에 임박한 이유는 오직 아름답기 때문

핀셋이 나를 들어올리고

길이 든 가위가 살을 북, 찢으며 들어간다

기원에 대한 해설은 유추 가능한 외국어로 쓰여 있다

따옴표 속 고어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오랜 세월 파랑은 고결함이었고 다른 대륙에 이르러 불온함이 되었다

존재하지 않던 한 끝 열릴 때

나, 아름다운 부채가 되기

열망은 그곳에서 끝난다

 

 

[당선소감] 괜히 글 쓰고, 괜히 혼자 여행하고괜히 그랬다 싶은 일들이 시가 됐다

 

채윤희 씨당선 연락을 받았다. “엄마!” 비명을 지르며 따뜻한 품을 끌어안았다. 엉엉 울기에 이상적인 순간이었고 거의 그럴 뻔했다. 그러나 끓는 물에 들어간 지 10분을 훌쩍 넘긴 파스타를 걱정하는 마음이 울컥 치미는 마음을 기어코 짓눌렀다. 퉁퉁 불어버린 파스타를 소스가 담긴 팬으로 옮겨 담았다. “어휴, 비명이 들리기에 사실 벌레가 나온 줄 알았다.”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새우가 그릇마다 세 마리씩 배분되었는지 살폈다. 지금 새우가 문제인가. 그러나 새우가 문제이기는 했다. 내가 네 마리를 먹으면 누군가는 두 마리를 먹게 될 테니까. 회심의 파스타였는데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새우가 세 마리이기는 했다, 다행히도.

 

당선작의 제목을 알려드렸다. “, 너 비행기 놓친 곳!” 아니라고 답하면서도 그편이 재미있었을 텐데 괜히 정정했나 싶었다. 괜히 그랬다 싶은 일들은 늘 일어났다. 괜히 글을 쓴다 그랬다, 괜히 다른 공부를 한다 그랬다, 괜히 혼자 여행한다 그랬다. 그렇게 괜히 그랬다 싶은 일들이 시가 되었다. 조촐한 당선소감을 읽고 있는 당신도 당신만의 괜한 순간을 긍정하게 된다면 좋겠다.

 

감사할 사람들이 많다. 우선 언제나 응원해준 엄마와 아빠, 할머니와 동생에게 사랑을 보낸다. 예술을 한답시고 빌빌거리는 친구 셋의 술값을 턱턱 내준 이 선생. 이제 갚을게. 나의 6. 응어리진 애정을 풀기엔 나의 언어가 모자라다. 마지막으로, 항상 무언가를 그르치고 있다는 감각으로 살아가면서도 스스로를 사랑하는 걸 멈추지 않은 나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열심히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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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시간-공간 넘나드는 활달한 상상력, 매력적으로 다가와

 

최종심에 올라온 작품들은 대체로 무난했다. 달리 말하면 위험도 모험도 드물었다는 말이다. 안정적 기량이 우선인 것은 틀림없지만 개성적인 목소리가 많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균일함은 우리가 보낸 한 해의 격동과도 거리가 있어 보였다. 시가 삶의 불안을 고스란히 드러낼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시대의 삶의 환경과 동떨어진 기예를 겨루는 경연도 썩 유쾌한 것만은 아니다. 본심 심사위원들이 만나서 가장 먼저 나눈 얘기는 바로 이 의아함에 대한 것이었다.

 

오래 논의한 세 작품은 남겨진 여름’, ‘씨앗의 감정’, ‘경유지에서였다. ‘남겨진 여름은 문장의 신선함이 눈에 띄었고 근경과 원경을 오가며 사유를 전개하는 리듬도 흥미로웠다. 다만 긴장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하고 시의 마지막 연에서 상투형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아쉬웠다. 압축과 절제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씨앗의 감정은 이질적인 이미지를 하나의 시상을 중심으로 그러모으는 솜씨를 보여줬다. 씨앗을 소재로 한 사유가 다양한 이미지를 통해 변주되는 양상은 신선했다. 그러나 시의 마지막 대목에서 대사를 그르쳤다. 모든 시가 기승전결과 대미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심사위원들은 긴 논의 끝에 경유지에서를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활달한 상상력이 매력적인 작품이다. 나아가 찰나적 순간을 자신의 삶에 대한 사유로 길어오는 기량도 믿음직스럽다. 함께 투고된 작품들이 고른 기량을 보인 것은 아니었지만 한 작품을 고르라면 이 작품일 수밖에 없다는 것에 대한 동의가 있었다. 기대와 더불어 축하의 마음을 전한다.

 

심사위원 정호승 시인·조강석 문학평론가(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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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그러라고 할지 / 강영선 

 

 

시어른이 돌아가시고 아무도 살지 않는 시골집에서

안부 전화가 왔다

 

노인정에 가기는 어정쩡한 젊은 노인에게 방을 

내주어도 되냐고 동네 이장이 묻기에

그러라고 했다

 

마당의 빈터는 앞집에서 농기구를 갖다 놓아도 

되냐고 묻기에 그러라고 했다

 

샘가 감나무에 감이 무겁게 열리자 옆집에서

곶감을 좀 보내 줄 테니 감을 따도 되냐고 묻기에

그러라고 했다

 

빈 닭장에 닭을 키우고 싶은데 그래도 되냐고 묻기에

그러라고 했다

 

전기도 수도도 끊어 놓은 그 집에 물이 들어오고

불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동네에서 가장

밝은 집이 된 빈집

 

빈집의 주인은 빈집인데

멀리 있는 아들 내외에게 물어 온다

 

떼 내지 않은 나무 문패는 옛 주인의 이름으로 살아 있어

하늘 번지수를 동사무소 가서 물어야 할지

그러면 그러라고 할지

 

 

 

 

[당선소감] “정말 원하는 빛깔의 시 나올 때까지 정진삶 속 어둠이 시 자양분 돼 스승과 가족·문우들에 감사

 

광부이자 농부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의 고단한 삶을 다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새벽녘 낡은 자전거를 타고 막장으로 가던 바퀴 소리를 어렴풋이 기억합니다. 주말에는 사과밭에 농약을 치던 그의 젖은 등이 선연합니다. 노동의 무게로 아버지의 등은 늘 굽어 있었지만 그런 아버지에게 배운 건 게으름 피우지 않는 성실이었습니다. 그저 말없이 묵묵히 일하시는 모습이 평범한 나에게 시를 붙잡고 있게 했습니다.

 

살면서 어둠이 나를 늘 따라다닌다 생각하여 피하려고만 했던 지난날이 떠오릅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어둠 속에 있을 때 가장 밝았던 것입니다. 희망이라는 등불이 있었으니까요. 어둠을 끄면 밝음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걸 당선되고서 알게 되었습니다. 시와 나의 관계는 이런 게 아니었나 싶습니다. 어둠이 시를 짓는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천연염색은 여러 번의 색 입힘이 필요합니다. 고운 색을 얻으려면 먼저 불순물을 걸러내야 원하는 색이 나옵니다. 저는 겨우 초벌염색을 통과하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공을 들여야 정말 원하는 빛깔의 시가 나올지 모르겠으나 앞으로 더 정진하며 늘 남은 염색을 생각하겠습니다.

 

스승은 어둠에 있는 나에게 빛을 주는 존재라 여깁니다. 빛을 좇아가려고만 했던 저에게 빛이 찾아오게끔 길을 만들어준 존재였습니다. 평소에 많은 시를 읽어주시던 울산 중구문화의전당 조숙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응원해준 가족과 문우님께 고마운 마음을 드립니다. 서툰 저에게 고마운 빚을 남겨준 농민신문사와 심사위원님의 숙제를 풀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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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담백한 시어지만 행간에 깊은 사유 담아

 

<농민신문> 신춘문예는 다른 일간지와는 변별되는 특성이 있는 듯하다. 전통적 서정이나 생활의 실감이 전반적으로 강한 편이고, 실험적인 경향의 작품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그리고 도시 풍경보다는 농촌 현실에 대한 묘사나 자연과의 교감이 두드러진 편이다. 그야말로 대지에 뿌리내린 시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330명이 응모한 1943편의 투고작 가운데 다음 네 명의 시를 두고 마지막까지 논의를 이어갔다. 결이 곱고 섬세한 언어로 자연의 상징성을 잘 살린 <꽃누르미-그들의 압화> 4, 활달한 상상력과 구수한 입담으로 농본적 세계를 재미있게 표현한 <주걱을 읽어주시겠습니까> 6, 슬픔과 상실의 풍경조차 감정의 절제와 발랄한 언어감각으로 새롭게 조형해낸 <어떤 필기체> 4, 담백하고 간결한 시어와 리듬으로 생활의 단상을 묵직하게 펼쳐낸 <그러면 그러라고 할지> 4편 등은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웠다.

 

당선작으로 뽑은 <그러면 그러라고 할지>는 제목에서부터 묻어나는 어떤 무심함이 오히려 감정과 의미 과잉의 시대에서 신선하고 돋보이는 면이 있었다. 투고한 작품 전체가 얼핏 무심하고 담담해 보이지만 행간에 많은 이야기와 깊은 사유를 거느리고 있다. 아무도 살지 않는 시골집이 많은 이의 터전이 돼주고 서로 연결해주는 따뜻한 풍경이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이 시는 생활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시선과 타자를 따뜻하게 감싸 안는 태도에서 나온 것이다. 바로 그 점이 이 시인의 미덕이고 가능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심사위원 나희덕, 장석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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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퇴 / 강희정

 

 

드르륵 교실문 열리는 소리

 

슨상님 야가 아침만 되믄

밥상머리에서 빗질을 했산단 말이요

긴 머리카락 짜르라 해도 안 짜르고

구신이 밥 달라 한 것도 아니고

참말로 아침마다 뭔 짓인지 모르것어라

 

킥킥 입을 가리고 웃어 대는 책상들

아버지는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하고

낮술이 뺀질뺀질 빨갛게 웃고 있는

4교시 수업 시간

 

덩달아 붉어진 내 얼굴은 밖으로만

내달리고 싶어

 

아버님 살펴가세요 어서가세요

얘들아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일찍 점심 먹고 운동장 나가 놀아라

나보다 먼저 교실 밖으로 나가버린 선생님

 

달걀 프라이가 들국화처럼 피어 있는

생일 도시락이

아버지 손을 잡고 산들산들 집으로 걸어간다

 

 

 

 

[당선소감] “시의 길에선 남과 다른 내가 더 나일 수 있다

 

눈을 가리고 귀를 닫았다. 의지가 개입할 겨를이 없이 바깥을 향해 열린 모든 세포를 걸어 잠갔다. 물속에 오랫동안 잠겨 있었다.

 

정지된 시간을 다독여 수면 위로 올라와 녹슨 세포를 깨우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갇혀 있던 감각 촉수가 언어와 결합하며 나를 한 걸음씩 움직이게 했다.

 

기억처럼 지워졌다가 되살아난 진실이 시어가 되어 꿈틀거린다. 하얀 종이 위에서 먹고 마시고 잠이 든다.

 

행복과 불행이 서로 곁눈질하면서 달린다. 이 둘에게서 언제나 허둥대지만, 그래도 나는 나아간다. 시와 사랑을 향해. 세상을 향해...

 

시의 길에서는 남들과 다름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큰 위안이 됩니다. 다르니 내가 더 나일 수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광주일보와 이병률 시인께 감사드립니다. 서울디지털대학교 이재무, 오봉옥 교수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정윤천, 이대흠 시인님께 감사드리고 첫눈 시빚기반 회원들, 시를 향해 탄탄한 근육을 보여준 선배 시인들과 기쁨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작년과 올해 바삐 곁을 떠나신 부모님께 영예를 안겨 드립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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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쨍하고도 명징한 시, 탁한 세상에 차려놓는 기쁨

 

시가 반드시 고통을 통과한 형태의 무엇은 아닐 것이다. 번민과 고뇌를 통과한 흔적을 날것의 형태로 그려 놓을 필요는 어디에도 없다. 꼭 그래야 하는 것처럼 누구나 쓸 수 있을 것 같은 시라거나 더군다나 그 누구도 홀릴 수 없는 시라면 신춘문예 같은 공모에선 감점법으로 접근하게 된다. 장점이 충분한 작품을 두고 고민을 했다.

 

진영심의 꾸미지오 미용실은 제목부터 즐거운 이야기의 향을 품고 있는 것 같아 여러번 읽게 되었다. 잘려나가는 머리카락을 바늘에 비유했다는 사실에 일단 선자는 놀랐다. 하지만 바늘을 연상하고 바늘귀까지 끌어와 착상에 성공했다면 바늘귀에 뭐라도 꿰어야 하는데 그것이 빠진 채 후루룩 시를 맺고 말았다.

 

결국 강희정의 조퇴를 당선작으로 선한다.

 

새해에 여는 시 한 편으로서의 자격과 미덕을 찾자면 단연 양명함이었다.

 

동시(童詩)의 마스크를 쓴 시라고 가볍게 평할 수 있겠으나 이 시의 아름다움은 시 속에서 자기 자신이 들어갈 자리를 과감할 정도로 배제시키는 능력으로 완성도를 일으켰고 그것은 어떻게든 자신을 과잉하게 드러내려는 수많은 응모작들 속에서 분명한 빛을 발하는 지점이기도 하였다. 멋진 다이빙이었다. 쨍하고도 명징한 시 한 편을 골라 탁한 세상의 공기에 차려놓는 기쁨이 나만의 것이 아니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이병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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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침대는 오늘 아침이 봄 / 박재숙

 

 

침대에게 몸으로 물을 주는 건, 그에게서 달콤한 봄 냄새가 나기 때문이지 내 주변엔 봄이 너무 많아 침대도 나에겐 봄이야, 그건 아마도 침대를 향한 나의 일방적인 편애일지도 모르겠어

 

침대는 해마다 겨울이 알려주는 장례관습 따위엔 관심 없어 꿈과 현실 사이에서 철없이 스프링을 쿨렁거려도 푸른 봄은 여전히 아지랑이처럼 오고 있을테니까

 

침대 위에서 휴대폰 속 이미지나 사건들을 클릭하고 닫는 동작은 무의미해 그때마다 끝이 보이지 않던 내일이 침대 커버처럼 단순해질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해

 

침대의 생각은 참으로 명료해 홀쭉하게 들어간 배를 쓰다듬으며, 지난밤 겹의 무게 뒤에 펼쳐진 피로를 걷어내고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날 힘을 얻지, 그건 내일이 던져줄 공복을 향한 강한 의지인 거야

 

공복은 채움의 예비의식이기도 해 그러므로 내 침대는 늘 비어서 오늘 아침이 봄, 때때로 난 널 사랑해 내 생각대로 꽃피게 하고 싶어 레시피는 간단해 갖가지 감정의 재료들을 봄흙으로 만든 황토침대에 쏟아부으면 끝, 그럼 우린 하루 한 끼 제대로 된 꽃밭의 식사를 할 수 있어

 

사계절은 한결같아 언제나 내 침대는 오늘 아침이 봄, 불쑥 깨진 거울을 들이미는 봄의 손을 보고 있으면 거울 속의 내가 보여 나인 듯 내가 아닌 듯, 너무 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는 거울의 트릭이 보여

 

그래도 방언 같은 아지랑이의 말을 기억하는 내 침대는 여전히 오늘 아침이 봄

 

 

 

 

[당선소감] 혹독한 겨울 흔들어 봄을 일깨워준 시

 

나의 오늘은 어제와 닮아있다. 그날이 그날인 것 같은 오후, 나는 핸들을 잡고 서울 외곽순환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차창 밖에는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와이퍼를 작동시켜도 앞이 흐려 답답하다고 생각하던 그 순간 휴대폰 벨이 울렸다. 국제신문 최승희 기자라고 했다. 갑작스런 당선 소식에 잠시 귀를 의심했다.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왈칵 눈물이 흘렀다. 자동차가 어디로 움직이는지 알 수 없었다. 갓길에 잠시 나를 정차시키고 심호흡을 해야 했다. 가만히 있는 나를 자동차가 어디론가 끌고 가는 것처럼 그 순간 나는 자동차 대신 구름 모양의 시를 타고 있었다. 그동안 오래 문학과 시에 목이 말라 있었다. 그래서 늦게 시작한 공부였고, 20218월에 허수경 논문이 통과되면서 중앙대 일반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 과정을 졸업했다. 늦은 공부에도 응원해주고 끝까지 등을 밀어준 가족에게 감사한다.

 

시의 압축미를 강조하셨던 이승하 지도교수님과 시가 잘 안 풀릴 때는 미술관을 가라고 말씀하셨던 이수명 교수님, 대학원 분과 수업시간에 시를 쓴다는 행위는 하나의 세계를 제시하는 것이다고 묘사의 중요성을 말씀하셨던 조동범 선생님, 좌절을 느끼며 시를 포기하고 싶어질 때마다 계속 쓸 수 있는 용기를 주셨던 박남희 선생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시를 쓰면서 나만의 독창성으로 남이 할 수 없는 걸 내가 할 수 있다는 기쁨이 생겼다. 이제야 시의 끝자락에 빗방울 같은 나를 들여놓는다. 앞으로 보다 깊이 있는 시 세계를 보여줄 수 있도록 노력하는 시인이 되겠다.

 

끝으로 혹독한 겨울을 통과하고 있던 제 시를 신춘의 봄 뜨락으로 성큼 불러내주신 강은교 권정일 문태준, 세분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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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유쾌한 상상으로 생명의 의지 캐낸 수작

 

국제신문 신춘문예 공모에 보내온 작품들을 읽었다. 어느 해보다 전반적으로 서정적 색채가 두드러져보였으며, ‘어머니의 존재를 포함한 가족의 이야기를 노래한 작품들이 많아 눈에 띄었다. 코로나 장기화로 인해 가족이라는 두터운 관계와 그 관계에서 오가는 정감에 시심(詩心)이 쏠린 것이 아닐까 싶었다. 마지막까지 심사위원들이 토론을 이어간 작품들은 서부도서관 열람실에서의 중얼거림4, ‘흔들렸다2, ‘내 침대는 오늘 아침이 봄2편이었다.

 

서부도서관 열람실에서의 중얼거림은 너무나 질서 있게 꽂힌 도서관 서고와 검색대가 있는 열람실의 풍경을 보여주면서 그 공간에서의 작은 균열과 소란과 술렁거림과 이탈 욕망을 긴장감 있게 그려낸 작품이었다. 시상 자체가 빛처럼 번득였으나 시어들의 선택과 활용이 다소 평이해 아쉬웠다.

 

흔들렸다는 하나의 존재에 투영되어 있는 다른 존재, 즉 존재들 사이의 유기적 연결에 주목한 작품이었다. 시의 마지막 대목에서 돌연한 충격을 주어 신선했지만, 함께 보내온 작품들이 이 작품과는 편차가 있어 당선작으로 내는 데에 주저하게 했다.

 

심사위원들은 시 내 침대는 오늘 아침이 봄을 당선작으로 선정하는 데에 모두 동의했다. 이 시는 회복되는 어떤 생명력의 강인한 힘을 사물인 침대에서 발견해내는 수작(秀作)이었다. 봄의 절기가 갖고 있는 환함과 꽃핌과 탄력을 침대의 공간과 끊어지지 않게 미묘하게 연결시키는 솜씨가 돋보였다. 함께 보내온 작품들에서도 개성적인 신예의 출현을 충분히 기대할 수 있게 했다. 시단에서 특별한 시의 목소리를 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강은교 권정일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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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투리 감동시!!!

구독과 좋아요는 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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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퍼큐브*에 관한 기록 / 백가경

 

 

1920년 변호사 세바스챤 힐튼은 어린이들에게 3차원 공간에 대한 기초적 이해를 돕고자 정글짐을 발명했다

 

*

 

x가 머리 위에 달린 축을 오른손으로 잡고 있다 높이를 미처 재지 못한 x의 발이 바닥에 거의 닿을락 말락 누군가 실컷 타다 뛰어내린 그네처럼 어안이 벙벙하다

x의 팔과 다리가 점점 빠르게 버둥거린다 x는 하나의 커다랗고 검은 점이 되는가 싶더니 그 어떤 축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고 x값이 무한 증폭된다

 

y님 행복을 주는 치과 생일 축하드립니다. 임플란트 10% 할인 1

어떻게, 잘 지내? 1

은평구도서관 세상의 끝연체 49일 빠른 반납 요망 1

소액 대출 최저 이율로 신용등급 모두 가능

 

y는 몸을 정육면체 안으로 구겨 넣는다 점점 y값을 잴 수 없고 그럴수록 y는 생각한다

이 모든 되풀이는 나의 결과 값 “(경제적) 자유를 위한 것

 

z의 미래 값: 직사각형 화장실 천장에 도시가스 공급관이 노출돼 있음 장판과 텐트 사이 혈액이 말라붙어 표백제와 기타 용액을 계산한 것보다 한 통 더 사용함 청구 예정

z의 현재 값: 중위소득 85% 이하 가정에서 자란 3학년 C

 

*

 

발가락 하나로 자신의 목숨을 지탱한 x는 같은 위치 옥상에 사는 주민이자 애인 z를 찾아 창백한 타일로부터 그를 무한 증식시킨다 열화 과정에서 z는 기체로 변할 수 있게 되고 y가 연체한 세상의 끝을 대신 반납한 후 49일을 1초 만에 앞당겨 세상의 끝 역자 후기를 대출한다 y가 연탄과 소주를 담아 온 마트 봉지를 쓰레기통에 넣을 때 자연스럽게 제목을 볼 수 있도록 책을 비스듬히 세워놓는 것을 잊지 않는다

 

*

 

범우주아카이빙센터 12호 연구소장은 x, y, z 세 어린이를 한 차원에 모아 두고 질문을 시작한다

 

말을 끊어서 미안하지만 여러분 어떻게 연결되었으며 이런 건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세 어린이 동시에 말한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연구소장은 웃음을 잃지 않는다 어린이들 모르게 언어 변환 버튼을 누른 후 짧게 욕을 한다

 

그렇다면 당신들의 능력은 어떤 문헌에서 찾은 것인가요?

 

어린이 일동, 문헌에서 찾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 Hypercube 4차원에서 모든 변의 길이가 같은 도형, 10개 이상의 처리기를 병렬로 동작시키는 컴퓨터의 논리 구조

 

 

 

 

 

[당선소감] 기억과 기록오래 써나갈 것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쓰는 것이 시일까, 내가 시를 쓸 자격이 있을까? 경향신문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울먹이는 제가 선뜻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제게 시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외면당했다고 느꼈을 때, 세상의 빛나는 것들이 하찮아 보일 때, 사는 것을 잠시 그만두고 싶을 때 쓰였습니다. 분노와 슬픔과 괴로움 그리고 부끄러움, 그런데도 살아보겠다고 꿈틀대는 욕망이 시 속에서만 비로소 쓸모를 찾았습니다. 어두운 방에서 더 어두운 생각을 톺아보고 그보다 어두운 곳에 있을 존재에 기대어 썼습니다. 그랬던 시가 살면서 가장 빛나는 자리로 저를 데리고 나왔습니다.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요즘은 시가 어떻게 시작되는지 잊을 것 같은 두려움에 꿈속에서도 문장을 중얼거립니다. 좋은 시란 어떻게 쓰이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모르는 마음으로 덤벼봐도 된다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그 속으로 마음껏 몸을 던져도 된다고, 길을 잃은 곳에서 더 길을 잃기 위해 난장을 부려도 된다는 목소리였습니다.

 

함께 시를 써나간 김미라 언니, 양송이 언니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우리는 오래 들어왔던 시 수업이 갑작스럽게 폐강한 후 임시저장이란 이름의 작은 모임을 만들어 시를 쓰고 서로의 것을 읽었습니다. 만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시절에 모니터 화면 너머로 표정을 나누고 이어폰으로 전달되는 낭독을 들으며 저는 써나갈 힘을 가까스로 얻었습니다. 어느 우스갯소리가 기억나네요.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Ctrl+S만 차리면 산다고요. 계속, 습관적으로, 시도 때도 없이 저장한다는 임시저장이란 기능처럼 지금 우리가 기억하고 기록해야 하는 것, 돌아보아야 하는 것을 신경질적으로 시에 저장하며, 오래 써나가겠습니다. 칠흑 같은 바다 위로 둥실 떠오른, 혼불 같은 목소리를 들려주신 분들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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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미학적 자유로움은 정확함 위에서 탄생한다는 것 보여줘

 

우리 삶의 시간은 살아내는능동과 살아지는수동이 얼마간 뒤섞이기 마련이다. 반면 우리가 시를 쓰는 시간은 온전한 능동만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투고된 작품들은 언어와 삶의 주체를 회복하려는 저마다의 고투다. 이 흔적을 따라 읽는 것은 경외가 가득한 것이었고 이들 가운데에서 한 편만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정하는 것은 고민을 더하는 일이었다.

 

5명의 작품을 정해 더 깊은 논의를 이어나갔다. 이미 모두 자신만의 것을 가지고 있는 고유함들. 김소영은 구어와 문어의 적절한 활용을 통한 활달한 에너지로 일순간 세계의 이면을 서늘하게 드러낼 줄 안다. 박규현은 개성 있는 호흡과 리듬이 돋보였다. 행의 배열이나 문장이 끝나는 지점을 어슷하게 두어 여운을 발생시키는 감각도 좋았다. 원예린은 무심한 듯 부리는 언어들로 미감을 이끌어내는 능이 상당했고 시적인 것을 발견해내는 밝은 눈도 인상 깊었다. 박다래의 원고는 끝까지 놓지 못했다. 평이한 진술 가운데 묘한 긴장감을 불러내는 능력. 숨어 있는 서정을 잡아채는 감각. 다만 문장의 반복이나 중복이 만들어내는 효과에 대해 스스로 한번쯤 의심해주었으면 하는 고언을 드리고 싶다.

 

백가경의 하이퍼큐브에 관한 기록4편을 당선작으로 정한다. 백가경의 시는 명징한 언어로 작품을 구축한다. 어떤 모호성에 기대어 상상을 비약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사유와 진술로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것이다. 이런 방법론은 자칫 단순해지고 평이해질 위험이 따르는 것이지만 시인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더 공고하게 세계를 확장시킨다. 미학적 자유로움은 정확함 위에서 탄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름답고도 투명하게 상기시켜주는 시인이다.

 

앞으로도 내내 지난할 시간 속에서 시인만의 가장 고른 것들을 우리에게 꺼내주시길 기대한다.

 

심사위원 박준, 김행숙, 김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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