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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가 생각나지 않는 꽃 / 조정권

 

 

호수에 앉아

무속력의 수면에

취한다

 

잔잔히 퍼져오는

소 얼굴에 취한다

 

저물 무렵 올라오는

하얀 꽃에 취한다

 

소리가 생각나지 않는

하얀 꽃에 취한다

 

집으로 돌아오며

물 속 뿌리를 쥐고

잠 들 물빛에 취한다

 

찾아야 할 마음도 있지도 않거니와

따라야 될 마음도 없다

 

가만히 뿌리를 쥔 손 놓고

잠 든 물빛에 취한다

 

 

 

 

먹으로 흰 꽃을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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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미네르바는 금년으로 제2회를 맞는 질마재문학상에 조정권 시인의 시집먹으로 흰 꽃을 그리다, 질마재해오름문학상에 길상호 시인의 시집 눈의 심장을 받았네를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심사위원 김남조, 김종해, 문효치 시인은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각 부문 10권씩의 시집들 중에 각각 수상작을 선정하였는데 시집들은 모두 문학적 우수성과 개성적 세계를 보여주는 가편들이었다고 평가했다.

 

두 작품집 모두 새로운 의미 창조의 탁월한 언어적 성취를 이룸으로써 본 문학상의 수상작으로 충분히 값할 수 있다고 판단되었다.

 

조정권 시인은 1970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한 이래 40여 년 동안 비를 바라보는 일곱가지 마음의 형태』 『시편』 『허심송』 『하늘이불』 『산정묘지』 『신성한 숲』 『떠도는 몸들』 『고요로의 초대』 『먹으로 흰 꽃을 그리다등의 시집을 펴내면서 우리 시단의 핵심에서 70년대 시인의 선두주자로 활동해 왔다. 그는 순연한 시적 감성과 강철 같은 의지력으로 사물을 바라보면서 그 대상으로부터 튕겨져 나오는 탄력 있는 언어로 새로운 세계를 구축해 왔다. 그가 추구해 온 드높은 정신의 세계는 시집산정묘지에서 크게 꽃피워 건강성과 역동성을 함양하면서 혼탁한 세상을 질책하고 자기 초월의 상향적 세계를 표상한다는 평을 받아왔다.

 

이번에 수상작으로 선정된 먹으로 흰 꽃을 그리다는 창조적 에너지가 충만한 시집이다. 그러나 그 에너지는 시 속에서 흰 꽃처럼 탈색되어 무위와 공의 세계로 승화됨으로써 보다 높은 차원의 힘으로 상승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승화된 에너지에 힘입어 세속의 현실적 집착이나 번뇌로부터 청정무구의 대자유로 나아가고 있다.

 

이번 시집에서 돋보이는 또 하나의 특징은 언어의 절약 또는 함축의 묘이다. 말을 아끼면서 말 옆의 여백에 많은 뜻을 숨겨놓음으로써 오히려 시적 스케일을 키우고 깊음과 풍요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요즈음 난삽한 산문적 언어가 횡행하는 우리 시단의 현상에 큰 경종이 되고 있다.

 

섬세하고 정확한 촉수로 삶과 사물을 탐색하여 그 밑바닥에 갈앉아 들어가 명상하고 사색하면서 길어올리는 창조적 언어들은 그가 얼마나 예민한 언어 감각의 소유자인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그 언어의 끝으로 밀어 올리는 신세계가 놀랍다.

 

질마재 문학상은 2010년 미당 서정주 선생의 10주기를 맞아 그분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계간 미네르바에 의해 제정되었으며 우리 시문학을 이끌어갈 중량감 있는 작가를 선정하여 매년 한 번씩 수여하는 이 문학상은 제1회에 장석주, 고영 시인을 수상자로 선정하여 시상한 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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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랑문화인협의회(회장 최동호)가 주관하는 제22회 김달진문학상 수상자로 오세영(69, 서울대 명예교수) 시인과 최현식(43, 경상대 교수) 평론가가 선정돼 기념 시낭송회를 가졌다.

6월 3일 오후 6시 서울 고려대학교 국제관 2층 국제회의실에서 열린 이날 행사에는 서울신문사 임원, 김종길 시인, 김윤식 평론가를 비롯한 심사위원 및 문인 200여 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행사는 축사, 김달진문학상 심사평, 당선소감, 수상시 낭송, 축가, 서정시학 신인상 시상식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펼쳐졌고, 본상 시상식은 9월 3일 김달진문학제 때 창원 진해시민회관에서 갖는다.

본상 상금은 각 2000만원으로 수상작은 시집 ‘밤하늘의 바둑판'(오세영 시인)과 평론집 ‘시는 매일매일'(최현식 평론가)이다.

 

 

 

 

2011년 제22회 김달진문학상 · 제1회 창원KC 국제시문학상 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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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달진문학상 시 부문 수상자 : 오세영(吳世榮)

 

1942년 전남 영광 출생. 서울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1965-1968 현대문학 추천 완료(추천: 박목월 시인). 충남대 국문과(1974), 단국대 국문과(1981) 서울대 국문과(1985) 교수 역임. 시집으로 반란하는 빛,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무명 연시, 사랑의 저쪽, 꽃들은 별을 우러르며 산다, 불타는 물, 어리석은 헤겔, 벼랑의 꿈, 적멸의 불빛, 봄은 전쟁처럼, 시간의 쪽배, 꽃피는 처녀들의 그늘 아래서, 연구서 한국 낭만주의시 연구, 서정적 진실, 문학연구 방법론, 한국근대문학론과 근대시, 한국현대시인 연구, 시의 길, 시인의 길, 한국현대시 분석적 읽기, 현대시와 불교, 평론집 현대시와 실천비평, 변혁기의 한국 현대시』 『20세기 한국시의 표정 등이 있음. 시인협회상, 정지용문학상, 불교문학상, 녹원문학상, 편운문학상, 한국예술상 수상. 2006년 한국시인협회장을 역임하고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밤 하늘의 바둑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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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상자 : 문인수

 

 

2. 수상작품 : 채와 북 사이, 동백 진다 외 4편

 


「채와 북 사이, 동백 진다」

 


지라산 앉고,
섬진강은 참 긴 소리다.

저녁노을 시뻘건 것 물에 씻고 나서

저 달, 소리북 하나 또 중천 높이 걸린다.
산이 무겁게, 발원의 사내가 다시 어둑어둑
고쳐 눌러 앉는다.

이 미친 향기의 북채는 어디 숨어 춤 추나

매화 폭발 자욱한 그 아래를 봐라

뚝, 뚝, 뚝, 듣는 동백의 대가리들.

선혈의 천둥
난타가 지나간다.

 

 

 

그립다는 말의 긴 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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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심사위원 : 유종호(문학평론가, 연세대 교수), 황동규(시인, 서울대 교수), 이성선(시인), 황현산(문학평론가, 고려대 교수), 최동호(시인, 고려대 교수)

 


4. 심사평

「觀想의 깊이」

심사가 마친내 문인수와 박용하 두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을 수상자로 선정해야 하는 단계에 이르자 심사위원들은 모두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인수에게는 觀想의 깊이가 있다면, 박용하에게는 패기가 있다. 박용하에게서는 자신의 視像과 이미지를 강요하려는 조급함이 약점이라면, 문인수의 시는 얼핏 보기에 선동력이 떨어지는 것처럼 여겨진다. 나는 처음부터 문인수의 편에 서 있었는데, 한편으로는 박용하의 더 훌륭한 시들이 미래에 나타날 것이라고 믿어 그의 어깨에 수상의 짐을 올려놓는 것이 반드시 이로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또 한편으로는 안정감과 신선함을 동시에 지닌 시인을 찾는다면 문인수에게서 그 시인을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문인수의 시는 주로 자연에 관해서 노래하며, 그 자연관은 한국적 산수화의 전통과 일정하게 맥이 닿아 있다. 그러나 그에게서 자연이 드러나는 방식은 개량 한복에서 연상되는 것과 같은 그런 오종종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치레도 아니며 자기 기만도 아니다. 그의 자연에는 착할래야 착할 수 없는 어떤 의붓자식의 한 같은 것, 일을 벌써 저질러 놓고 원망을 듣는 놀음꾼이나 또다시 길 떠난 가객의 속 그늘 같은 것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항상 말해 보아야 이해될 턱이 없다는 듯 길게 표현되지 않는다. 시인은 말을 하려다 말고 북채만 한번 부러져라 내리치는데, 이 암묵법은 오히려 모던하다.
「3월」, 아직 날씨 춥고 꽃만 뜨거운데, 무덤 속의 아버지, 어머니 두런거린다: 가슴속에 고려장을 했기 때문인가. 「10월」, 호박 따낸 자리가 고름 짜낸 자리처럼 가을 한복판이 움폭 꺼져 있다: “한동안 저렇게 아프겠”지만, 회복기의 환자처럼 아프겠지. 「채와 북 사이, 동백 진다」, 좋다, 그런데 왜 북채는 동백이 떨어져 선혈지는 순간에만 난타하는가, 왜, 아깝게도 심사 대상 기간 밖에 있는 좋은 시「동강의 높은 새」, 새파란 산 구비들 이어져 “일자무식의 백리 긴 편지를 쓴다”는데, 그 편지를 받는 사람은 누구인가. 제 몸 내던지고 살아온 시인은 아직도 세상에 대해 질문하게 한다. 축하한다. 그의 수상을 축하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출석 부르는 이 의문들을 축하한다.(황현산)

 

 

파란 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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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상자 : 이하석

 


2. 수상작품 : 「가야산」외 5편

 


「가야산」

계류와 더불어 칭얼대며 내가 숨긴 길. 동굴의 숲가엔
엘레지꽃들이 고개숙인 채 나의 그림자를 응시한다.

그 짧은 생애들의 외롭고 강렬한 눈길 따돌리며 산등성이에 올라서자 조릿대숲이 앙칼지게 울며 열린다. 큰바람이 내 욕망을 뒤집느라 웅성거린다.

아직 집에 가고 싶지 않다.
바람의 칼날이 조각하다 부러뜨린 나무가지 끝에
간밤에 눈이 얼리고 간 내 꿈이 싹트고, 산정에서
뒤엉키는 내 마음의 사나운 구름.

 

 

 

상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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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심사위원 : 김종길(시인, 고려대 교수), 김윤식(문학평론가, 서울대 교수), 황동규(시인, 서울대 교수), 오세영(시인, 서울대 교수), 정현기(연세대 교수)

 


4. 심사평

 

이기철의 <아름답게 사는 길> 연작과 <地上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연작은 그가 계속 시에 따스함과 깊이를 다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예삿일이 아니다. 그전까지의 그의 시는 편한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었고, 그 방향은 대체로 ‘돌아오지 않는 江’이었다. 그런 그가 새로운 살을 획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病들도 친숙해지면 우리의 외로움을 덮어주는 이불이 된다”(<地上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1>) 같은 통찰력도 동반한 살이다. 아마도 나까지 포함해서 주로 이미지 중심의 시론을 갖고 있는 사람 다수의 심사위원 구성이 아니었다면 이 상이 그에게 갔을지도 모른다.
모르는 사이에 이하석도 변모를 했다. 철저히 군살빼기 운동을 한 것이다. 말이 쉽지 느낌과 생각의 군살이 그리 쉽게 빠지는가. 가슴을 선뜩하게 하는 곳도 있었다. <가야산> 끝부분이 특히 그랬다. 다만 대부분 시의 제목이 되고 있는 地名들이 그냥 <山 1>, <山 2>, <山 3> 등으로 바꾸어도 좋을 만큼 개별적인 필연성을 덜 갖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하기 바란다. 이번의 변모가 앞으로 그의 시에 뚜렷한 흔적을 남길 것 같은 예감이 들기 때문에, 일과성이 아닐 것 같기 때문에, 더욱 유의하기 바란다. 그리고 유모어, 혹은 마음의 여유 같은 데도 신경을 썼으면 좋겠다. 그와 나 사이엔 이번 상이 두번 째 인연이다. 두 배로 축하한다.(황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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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상자 : 이준관

 


2. 수상작품 :  「가을 떡갈나무숲」 외 5편

 


「가을 떡갈나무숲」

떡갈나무숲을 걷는다. 떡갈나무잎은 떨어져
너구리나 오소리의 따뜻한 털이 되었다. 아니면,
쐐기집이거나, 지난 여름 풀 아래 자지러지게
울어대던 벌레들의 알의 집이 되었다.

이 숲에 그득했던 풍뎅이들의 婚禮,
그 눈분신 날개짓소리 들리 듯 한데,
텃새만 남아
山 아래 콩밭에 뿌려둔 노래를 쪼아
아름다운 목청 밑에 갈무리한다.

나는 떡갈나무잎에서 노루 발자국을 찾아 본다.
그러나 벌써 노루는 더 깊은 골짜기를 찾아,
겨울에도 얼지 않는 파릇한 산울림이 떠내려오는
골짜기를 찾아 떠나갔다.

나무 등걸에 앉아 하늘을 본다. 하늘이 깊이 숨을 들이켜
나를 들이마신다. 나는 가볍게, 오늘 밤엔
이 떡갈나무숲을 온통 차지해 버리는 별이 될 것같다.
떡갈나무숲에 남아 있는 열매 하나.
어느 山짐승이 혀로 핥아보다가, 뒤에 오는
제 새끼를 위해 남겨 놓았을까? 그 순한 山짐승의
젖꼭지처럼 까맣다.

나는 떡갈나무에게 외롭다고 쓸쓸하다고
중얼거린다.
그러자 떡갈나무는 슬픔으로 부은 내 발등에
잎을 떨군다. 내 마지막 손이야. 뺨에 대 봐,
조금 따뜻해질거야, 잎을 떨군다.

 

 

 

천국의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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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심사위원 : 장 호(시인), 김종길(시인, 고려대 교수), 김윤식(문학평론가, 서울대 교수), 황동규(시인, 서울대 교수), 김재홍(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수)

 


4. 심사평

 

나는 먼저 김달진을 머리에 그리며 여섯 편의 시편들을 읽어나갔다. 그러나 그 일은 도로에 그쳤다. 당연한 일이지만 김달진에게서는 인간 삶의 땟국이 씻겨져 가뭇없는데 이즈음 시는 오히려 그것을 시의 알갱이로 잡아내려 들고 있으니 거기 그런 흔적인들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더라도 나는 나대로 생활현장이 그대로 작품에 노정되어서는 이건 정 김달진과는 연줄이 닿을 수가 없다는 생각으로 후퇴했다. 그러고보니 나름대로는 절반 숫자로 압축되었다.
그러나 거론된 분들이 모두 그만한 연조를 지녀 저마다의 빛깔로 압도해오는 터에 어느 한 작품, 어느 한 사람을 집어내기는 망설여질 수밖에 없었다. 그 중에 이준관씨의 10편은 기복이 없이 모두 어느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다. 연갈이를 한 작품은 한결 투명한 대신, 그렇지 않은 것은 또 그런대로 여태도 끓어오르고 있는 열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소재를 이모저모로 돌려대어가며 구워나가는 장인의식이 몸에 배어있는 듯이 보였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어느 거나 설익은 데가 없다. 소재를 그대로 배설해내는 우를 범하는 법이 없다. 어떤 상이든 꿀꺽 삼켜 그것을 이 시인의 내면세계라 할 따스한 심상풍경으로 차분하게 깔아보여주는 기량이 돋보였다. 그것이 바로 그의 장기인 듯이 느껴졌다.
카자르스는 바하의 무반주 첼로독주곡을 하루에 한 곡씩 오십 년 이상을 거르는 법이 없이 탄주했다고 들었다. 모두 여섯 곡 밖에 안되는 것을 지루한 줄도 모르고 평생을 되풀이한 셈이다. 그에게는 그 낡은 것이 오히려 새로웠던 것이다. 이를테면 이즈음 듣기 힘든 말로 고전적 훈련이 몸에 밴 것이다.
이준관씨의 작품에 늘 안심이 가는 것도 그런 독자적인 훈련이 뒷받침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章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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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집 / 박미산

 

 

갈비뼈가 하나씩 부서져 내리네요

아침마다 바삭해진 창틀을 만져보아요

지난 계절보다 쇄골 뼈가 툭 불거졌네요

어느새 처마 끝에 빈틈이 생기기 시작했나 봐요

칠만 삼천 일을 기다리고 나서야

내 몸속에 살갑게 뿌리 내렸지요, 당신은

문풍지 사이로 흘러나오던

따뜻한 온기가 사라지고

푸른 송진 냄새

가시기 전에 떠났어요, 당신은

눅눅한 시간이 마루에 쌓여있어요

웃자란 바람이, 안개가, 구름이

허물어진 담장과 내 몸을 골라 밟네요

하얀 달이 자라는 언덕에서

무작정 기다리지는 않을 거예요, 나는

화티에 불씨를 다시 묻어놓고

단단하게 잠근 쇠빗장부터 열겁니다

나와 누워 자던 솔향기 가득한

한 시절, 당신

그립지 않은가요?

 

 

 

 

2008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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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느리게 공부하는 내게 격려·질책해 준 선생님께 감사

 

나는 무언가를 시작할 때라든가 막막한 나날이 계속될 때마다 산을 탔다. 바싹 마른 말이 먼지를 피우며 스르르 무너지려 할 때 지리산을 완주했고, 봄 여름 가을 겨울 설악과 북한산에 다니면서 내 몸을 다져 밟았다.

 

잘근잘근 밟혀 돌아오면 후줄근한 내 몸에서 말들이 피어나왔다. 허기진 가슴에서 바람이, 구름이, 안개가 시로 피어났고 때로는 미처 피어나지 못한 말들은 나도 모르게 곳곳에 쌓여 갔다.

 

찰랑찰랑 의심하던 사랑을, 요절을, 시를 여름 계곡에 떠나보내고 푸른빛이 사라져 이슥해진 나의 겨울 계곡은 은빛의 물 뿌리가 드러났다. 바닥이 다 드러난 나는 솔솔 내리는 눈발에 목을 축이고 사모하는 긴 혀를 따라 구불구불 의심했던 길을 다시 갔다.

 

피어나지 못했던 말은 부패되지 않은 채 골짜기로 흐르고 있었으며 이리저리 부딪치며 새 물길을 터뜨리기도 했다.

 

지난밤 나는 가장 예쁜 꿈을 꾸었다. 눈 쌓인 계곡에 차가운 바람을 얼굴에 맞으면서도 지천으로 피어나던 꽃살문들이 활짝 웃고 있었다.

 

내가 존경했던 선생님께서 철없는 나에게 늦게 피는 꽃이라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새롭게 떠오른다.

 

지진아처럼 느리게 공부하는 나에게 격려와 질책을 아낌없이 해주신 최동호 선생님과 시 합평회를 할 때마다 묵사발을 만들어준 수요시창작팀, 유안진 선생님, 장만호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치매로 고생하시는 시어머님과 구십이 넘도록 식당일을 하시는 친정어머니, 묵묵히 나를 지켜준 남편과 사랑하는 두 딸 단비와 차래에게도 고마움을 보낸다. 십년을 함께 땀 흘린 택견패들에게도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고, 무엇보다도 유종호 선생님과 신경림 선생님 두 분 심사위원께 감사드린다.

 

오랜 세월 흐르는 동안 유연해지고 너그러워진 말로 살냄새 나는 시를 쓰고 싶다. 나는 우리들의 삶을 감싸 안는 따뜻함이 묻어나는 시를 씀으로써 두 분 심사위원께 두고두고 은혜를 갚을 참이다.

 

 

 

 

태양의 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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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신선하고 맛깔스럽게 쓴 아주 따뜻한 시

 

예심을 거쳐 올라온 작품들이 수준이나 내용이 비슷비슷했다.

 

특별히 개성 있는 시가 별로 눈에 띄지 않았고, 재미있게 읽히는 시도 많지 않았다. 하지만 실직’(이재근), ‘나비의 꿈’(문계현), ‘너와집’(박미산) 같은 작품들은 신춘문예라는 관문을 통과할 수준은 넉넉히 되었다.

 

먼저 실직은 삶에 뿌리박은 정서의 시로서 호소력을 갖는다. 한데 무언가 신선한 맛이 덜하고, 죽음의 이미지가 시를 무겁게 만든다. 게다가 너무 건조하다.

 

같은 작자의 얼굴은 읽는 재미는 실직보다 낫겠는데, 산만하고 장황한 것이 흠이다.

 

나비의 꿈은 장애인 부부의 외식 나들이가 소재가 된 시로서, 그 의도는 충분히 이해가 되는데 비유가 좀 억지스럽고 관념적이다. 외국인 근로자가 화자가 되고 있는 붉고 둥그스름한 다라이는 정리가 더 돼야 할 소재 같다.

 

하지만 남과 같지 않은 상상력은 그의 앞날에 기대를 가지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너와집은 아주 따듯한 시여서 일단 호감이 간다.

 

물론 너와집은 실제의 너와집이기보다 당신가 만든 사랑의 집일 터, 그 비유가 호소력이 있어 아름답기까지 하다.

 

말이나 감각도 신선하고 맛깔스럽다. ‘문둥이가 사는 마을, 이랑진 무덤들 사이에도는 열두 살 여름의 추억을 소재로 하고 있는 시로서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재미있게 읽힌다.

 

이렇게 해서 우리 두 심사위원은 최종적으로 박미산의 너와집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 심사위원 신경림·유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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