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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상자 : 남진우

 


2. 수상작품 : 「타오르는 책」외 4편

 


「타오르는 책」

그 옛날 난 타오르는 책을 읽었네
펼치는 순간 불이 붙어 읽어나가는 동안
재가 되어버리는 책을

행간을 따라 번져가는 불이 먹어치우는 글자들
내 눈길이 닿을 때마다 말들은 불길 속에서 곤두서고
갈기를 휘날리며 사라지곤 했네 검게 그을려
지워지는 문장 뒤로 다시 문장이 이어지고
다 읽고 나면 두 손엔
한 웅큼의 재만 남을 뿐

놀라움으로 가득 찬 불놀이가 끝나고 나면
나는 물로 이글거리는 머리를 이고
세상 속으로 뛰어들곤 했네

그 옛날 내가 읽은 모든 것은 불이었고
그 불 속에서 난 꿈꾸었네 불과 함께 타오르다 불과 함께
몰락하는 장엄한 일생을

이제 그 불은 어디에도 없지
단단한 표정의 책들이 반질반질한 표지를 자랑하며
내게 차가운 말만 건넨다네

아무리 눈에 불을 켜고 읽어도 내 곁엔
태울 수 없어 타오르지 않는 책만 차곡차곡 쌓여가네

식어버린 죽은 말들로 가득 찬 감옥에 갇혀
나 잃어버린 불을 꿈꾸네

 

 

타오르는 책

 

nefing.com

 


3. 심사위원 : 정현종(시인, 연세대 교수), 오세영(시인, 서울대 교수), 최동호(시인, 고려대 교수)

 


4. 심사평

「문명사적 죽음의 탁월한 형상화」

예심에 올라온 다섯 분의 작품을 놓고 토론을 한 결과 남진우 씨의 「타오르는 책」을 당선작으로 뽑는 데 만장의 일치를 보았다. 후보자들 중 한 분은 심사하는 당일 다른 문학상을 수상한다는 사실이 공표되어 제외되었고 다른 분들은 혹은 작품의 수준이 고르지 않다든가 혹은 개성이 약하든가 혹은 좀더 지켜 보자든가 하는 이유로 밀리게 되었다.
남진우 씨는 우리 시단에서 독특한 개성을 드러낸 시인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그가 작년에 출간한 그의 시집에서 우리 시대의 황량한 삶을 죽음의 이미지로 잘 형상화시킨 것을 기억하고 있다. 이번의 심사 대상에 오른 작품들 역시 그와 같은 개성이 드러나 보인다. 특히 수상작 「타오르는 책」은 진정한 삶에 도달할 수 없는 존재의 한계성을 불과 언어의 상상력을 통해 형상화해 내는 데 성공하였다.
그에 있어서 완전한 삶이란 완전한 언어를 소유하는 데서 가능하다. 언어는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고 나아가 자신과 세계를 연결시켜 주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일상적 인간의 불완전한 언어를 버리고 완전한 언어를 갖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이 신화시대에 경험한 이 언어, 즉 이 시에서 ‘불타는 책’으로 상징된 이 완전한 언어가 인간이 물질로 타락한 우리 시대에는 그 복원이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시인은 이와 같은 문명사적 죽음의 의미를 「타오르는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 가지 지적할 것이 있다면 「타오르는 책」이 다소 관념적이라는 인상을 모면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시 또한 예술의 하나인 까닭에 미학성 역시 중시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고형렬 씨의 「성에꽃 눈부처」, 나희덕 씨의 「그 때 나는」, 장옥관 씨의 「살구꽃 필 때」등의 작품들도 좋았다.(오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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