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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 곽효환

 

 

비에 젖은 통영에 가서 얼마간 머물고 싶다고 했다

너는

날이 춥고 바람 차다고 옷을 단단히 입으라고 했다

나는

 

바람을 갖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게 어렵다고

한꺼번에 울지 않기 위해

아침부터 조금씩 나누어 울었다고 이제

더 이상 소리 내어 울지 않기로 했다고

너는

젖은 나무껍질 냄새가

몸 구석구석에 배어 지워지지 않는다고

아직 잎새를 다 떨구지 못하고

우투커니 겨울을 맞는 나무 한 그루에

, 라고 이름 붙였다고 했다

너는

 

미세먼지 가득한 연무에 싸인 겨울 도심 공원

걸음마다 마른 잎새가 바스락거리며 내려앉았다

멀리 왔다고 되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왔다고

조금은 쓸쓸한 것도 괜찮다고 했다

나는

 

너는, 나는

많이 싸웠어야 했다

불확실한 위험과 시련에서

등 돌리지 말고 도망치지 말고

그 차오르는 말들을

그 세세한 기억들을

그 기적같은 감정을 지키기 위해

한때 가까웠던 우리는

더 많이 더 열렬하게 싸웠어야 했다

아무 데도 없으나 어디에도 있는

너라는 깊고 큰 구멍

 

 

 

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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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시사랑문화인협의회는 제30회 김달진문학상 수상자를 발표하였다. 시 부문은 곽효환 시인(시집 '너는'), 평론부문은 김문주 평론가(수상작품집 '낯섦과 환대')가 선정되었다. 상금은 시부문은 2000만원, 평론부문은 1000만원이다.

 

곽효환 시인은 1967년 전주출신으로 1996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 문예지 '시평'으로 등단하였다. 시집 '인디오 여인', '지도에 없는 집', '슬픔의 뼈대' 등이 있으며 고대신예작가상, 애지문학상, 편운문학상, 유심작품상을 받은바 있다.

 

김문주 평론가는 1969년 서울 출신으로 2001년 서울신문신춘문예 평론 당선으로 등단하였으며 '소통의 미래', '수런거리는 시', '분기하는 비평들' 등이 있다.

 

9회 젊은 평론가 상, 6회 김달진 젊은 평론가 상을 받은바 있다. 시상식은 9 28일 오후 4시 진해문화센터 강당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이에 앞서 오는 6 7일 서울 고려대 100주년기념관에서 수상작 시낭송회가 열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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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명한 산책 / 황인숙

 

 

아무도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

금빛 넘치는 금빛 낙엽들

햇살 속에서 그 거죽이

살랑거리며 말라가는

금빛 낙엽들을 거침없이

즈려도 밟고 차며 걷는다

만약 숲 속이라면

독충이나 웅덩이라도 숨어 있지 않을까

조심할 텐데

여기는 내게 자명한 세계

낙엽 더미 아래는 단단한, 보도블록

보도블록과 나 사이에서

자명하고도 자명할 뿐인 금빛 낙엽들

나는 자명함을

! ! 걷어차며 걷는다

내 발바닥 아래

누군가가 발바닥을

맞대고 걷는 듯하다

 

 

 

자명한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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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민음사와 계간 세계의 문학이 주관하는 제23회 김수영문학상 수상자로 시인 황인숙(46)씨가 선정됐다. 수상시집은 자명한 산책이다. 시상식은 1210일 서울 신사동 강남출판문화센터 5층 민음사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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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막대기와 꽃뱀과 소녀와 / 이윤학

 

 

집에 가는 오솔길이 있었다.

길게 머리를 따 묶은 소녀가 있었다.

유월의 풀밭 안으로 스며드는

오솔길을 걷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가장 아름다운 시절.

딱딱하게 굳은 땅바닥 위에

떨어진 꽃 막대기가 있었다. 소녀는

의심을 품어본 적이 없었다.

 

꽃 막대기에 대한 소녀의 설렘!

 

손을 가져가자

꽃 막대기는 금세

꽃뱀으로 변했다.

 

꽃 막대기와 꽃뱀과 소녀는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꽃 막대기와 꽃뱀과 소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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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세계의 문학이 주관하는 제22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자로 시인이윤학(38)씨가 선정됐다. 수상시집은 꽃 막대기와 꽃뱀과소녀와(문학과지성사)이다.

 

본심 심사를 맡은 문학평론가 김우창씨는 시인의 시가 요즘의 현란한수사로부터 멀리떨어져 있으며, “시와 삶의 기본을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고선정이유를 밝혔다. 시상식은 19일 오후 5시 서울 신사동 강남출판문화센터 5층민음사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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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 / 채호기

 

 

수면 위에 빛들이 미끄러진다

사랑의 피부에 미끄러지는 사랑의 말들처럼

 

수련꽃 무더기 사이로

수많은 물고기들의 비늘처럼 요동치는

수없이 미끄러지는 햇빛들

 

어떤 애절한 심정이

저렇게 반짝이며 미끄러지기만 할까?

 

영원히 만나지 않을 듯

물과 빛은 서로를 섞지 않는데,

푸른 물 위에 수련은 섬광처럼 희다.

 

 

 

 

수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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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 계간지 세계의 문학이 주관하는 21회 김수영 문학상수상자로 시인 채호기씨(45·문학과지성사 대표)가 선정됐다. 수상 시집은 수련’(문학과지성사)이다. 채씨는 대구 출신으로 서울예전 문예창작과와 대전대 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1988년 계간 창작과 비평을 통해 등단, ‘지독한 사랑’ ‘슬픈 게이’ ‘밤의 공중전화등의 시집을 발표했다. 시상식은 1210일 민음사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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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한 사랑 기계 / 김혜순

 

 

내가 몸을 팔기로 한 것은 값비싼 모피를 휘두르고 싶어서가 아니라, 외투를 어쩌면 이불이라도 덮어줄 따뜻한 손 때문에. 내가 몸을 팔기로 한 것은 섹스에 환장 들린 어린 것이 아니라, 하고 싶다고 말하는 거짓말하지 않는 입 때문에. 내가 몸을 팔기로 한 것은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끊임없이 찾아와주는 사람들의 외로울 틈새 없는 이어달리기 발자국 때문에. 내가 몸을 팔기로 한 것은 차가운 다독거림의 동상 걸린 손과 마음을 담보로 혀 속에 계산기를 받아놓은 입에 진저리를 쳤지만, 동상 걸린 손과 거짓말하는 입을 다시 기다렸기 때문에. , 불쌍한 사랑 기계

 

 

 

 

 

불쌍한 사랑 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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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 구멍속의 폭풍 / 김기택

 

 

너무 오랫동안 사용해서 그의 육체는 낡고 닳아 있다. 숨을 쉴 때마다 목구멍과 폐에서 가르랑가르랑 소리가 난다. 찰진 분비물과 오물이 통로를 막아 바늘 구멍처럼 좁아진 숨구멍으로 그는 결사적으로 숨을 쉰다. 너무 열심히 숨을 쉬느라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 숨이 차면 자주 입이 벌어진다. 벌어진 입으로 침이 질질 흘러 나오지만 너무 심각하게 숨을 쉬느라 그것을 닦을 겨를이 없다.

 

밤이 되면 숨쉬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목구멍에서 그르렁거리는 낮은 소리는 때로 갑자기 강해져서 거목을 뽑고 지붕을 날려 버릴 것처럼 용틀임을 한다. 휘몰아치는 바람의 힘에 흔들려 그의 몸이 세차게 흔들리다가 이윽고 가래와 침을 뚫고 기침이 뿜어져나온다. 기침이 나올 때마다그는 목을 붙잡고 컹컹 젖으며 방바닥에서 뒹군다. 몸 속에서 한바탕 기운을 쓴 바람은 차츰 조용해져서 다시 허파에 얌전히 들어앉아 가르랑거린다.

 

필사적으로 바람을 견디다가 찢어진 비닐 조각처럼, 떨어져 덜컹거리는 문짝처럼, 망가지고 허술해진, 바람을 더 견디기엔 불안한 몸뚱어리를 그는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눕힌다. 조금이라도 호흡이 거칠어지거나 불규칙하면 몸 속에서 쉬고 있는 폭풍이 꿈틀거린다. 숨이 바늘구멍을 무사하게 통과하게 하느라 그는 아슬아슬 호오호오 숨을 고른다. 불손했고 반항적이었던 생각들과 뜨겁고 거침없었던 감정들로 폭풍에 맞서온 몸은 폭풍을 막기에는 이젠 너무 가볍고 가냘프다. 고요한 마음, 꿈 없고 생각 없는 잠이 되려고 그는 더 웅크린다.

 

 

 

 

 

바늘구멍 속의 폭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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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기질1 / 차창룡

 

 

쟁기질을 한다, 잡풀과 쓰레기와 먼지들이 서식하는 밭.

아버지는 밭주인의 묘를 벌초 해주기로 하고

몇 년이나 묵혀 놓은 그 밭을 갈고 있다.

잡초가 무성한 환자의 배를 수술하듯이,

신문과 텔레비젼에 마취된 이땅의 피부에 보습날을 댄다.

잡초로 뒤덮인 땅들이 뒤집어지고 부드러운 흙들이

태어난다. 지렁이가 모습을 나타내고 굼벵이가

어려운 걸음을 나선다. 빛 바랜 신문지가 아득한 사건 속으로 묻히고,

신문지 속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수천의 뼈들이 일어선다.

이러 이러 아버지는 소리를 질러대며 채찍을 휘두르고,

황소는 깜짝 놀라 펄쩍 뛰다 오줌을 싸고,

지렁이가 그것을 맞고 몸을 뒤튼다.

굼벵이도 그것을 맞고 움찔거리고, 수천의 뼈들도 그것을 맞고

희게 빛나고, 신이 난 보습날이 그들 사이를

다시 한번 지나간다. 날 끝으로 뼛조각이 묻어오고

뼛조각이 날 끝에서 땀을 흘린다. 이제는 뼛조각이

쟁기질을 하는지. 아버지와 황소는 힘든지도 모르고,

해가 넘어가도 넘어가지 않는 가난으로

쟁기질을 한다 쟁기질을 한다.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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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로역정, 혹은 / 김정웅

 

 

지난 날 내 그대를

자욱한 눈물 없이 사랑함은

거처 없이 떠돌던 내 가난한 영혼이

[]을 빌어서 그런 저런

()들어 살던 집들같이

땀냄새 진한 까닭일지나 이제, 내 사랑은

겨드랑이 가볍고

살을 버려서 살을 얻음 같음이니

그 사이

모나고 답답했던 단칸방을 벗어나

욕심줄인 은단(銀丹)알 같은 집 한 채 찾아

아담히 홀로 먼저 이사함 같음이니

 

그곳, 푸르고 단단한

둥근 청기와가 없는 담장 너머

아직 싹트지 않은 별들이

까마득히 박혀 숨쉬는 그런 곳

 

그대여,

내 나가는 곳 지금은 모를지나

어린 날, 수학여행 떠나기 전날 그 신새벽처럼

그렇게 뜬 눈으로 가슴 설레이게 하는 곳,

 

유성(流星)이 옛 할아버지 흰 턱수염처럼

바람 없이도 이따금 길게 흩날리는

잊혔던 고향 동구(洞口) 밖 아득한 천공(天空),

기쁜 그곳, 너희들과 영 이별이 아니라

 

 

 

 

 

천로역정 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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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 / 류인서

 

 

어떤 아침은, 아침임을, 속죄하고 싶어 한다.

그런 날은 마음 울에 가둬 기르던 양 한 마리 거친 들판으로 내몬다.

닦을수록 커지는 얼룩들의 창에는

산문적으로 두꺼워지는 안개와 안개가 만드는 묽은 풍경,

시든 예언처럼 쉽게 풀어져 창문마다 입술을 주는 배고픈 고백들,

불탄 나무 우듬지에서 새소리가 태어날 때

쫓겨난 숫양이 빈 들을 위로할까.

뾰족 파도를 닮은 초록 뿔이 그 양을 키워낼까.

종소리를 찾아 종탑으로 올라간 마을 아이들

돌아오지 않는데

 

 

 

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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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회 지리산문학제가 103일 함양관내 상림공원의 함양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다.

 

이날 시상식을 가질 제10회 지리산문학상에는 류인서 시인이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며, 수상작으로 류인서 시인의 희생4편이 최종 확정되었다.

 

지리산문학상은 지난 한 해 발표된 기성 시인들의 작품 및 시집을 대상으로 하는 심사제로 명실상부 문학상으로서 품격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금년에도 지리산문학제는 계간시산맥과 지리산문학회가 공동으로 주관하게 되었고 전국적인 규모의 대표적인 문학상으로 도약하게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지리산문학상의 새로운 도약에 걸 맞는 수상자 선정을 위해 문인수 시인 등 심사위원들의 고심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오랜 격론 끝에 류인서 시인이 제10회 지리산문학상 수상 시인으로 선정됐다.

 

심사위원들은 세계에 대한 새로운 감각과 익숙한 세계를 전복하여 펼쳐 보여주는 그의 장기는 경이로웠다. 얼핏 스쳐 지나갈 수 있는 소소한 일상의 이면을 섬세한 감각의 깊이로 재구성하는 능력이 매 시편마다 잘 발휘되고 있었다.”라고 류인서 시인의 작품을 평했다.

 

심사는 문인수 시인 외에 황인숙 시인 홍일표 시인이 맡았으며 각 시인의 수상작품과 수상소감, 심사평 등은 계간 시산맥가을호에 소개될 예정이다.

 

지리산문학상은 함양군과 지리산문학회에서 제정해 첫해 정병근 시인이 수상한 것을 비롯해 유종인, 김왕노, 정호승, 최승자, 이경림, 고영민, 홍일표, 김륭 시인이 각각 수상했다.

 

한편 이번 지리산문학상 수상자인 류인서 시인은 1960년 경북 영천 출생으로 2000시와사람, 2001시와시학신인상으로 등단하였다. 육사시문학상, 젊은시인상, 청마문학상 신인상, 대구시인협회상을 수상하였으며 2007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 수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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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밤 0시 5분 / 황동규 

 

 

 별을 보며 걸었다.

 아파트 후문에서 마을버스를 내려

 길을 건너려다 그냥 걸었다.

 추위를 속에 감추려는 듯 상점들이 셔터들을 내렸다.

 늦저녁에 잠깐 내리다 만 눈

 지금도 흰 것 한두 깃 바람에 날리고 있다.

 먼지는 잠시 잠잠해졌겠지.

 얼마 만인가? 코트 여며 마음 조금 가다듬고

 별을 보며 종점까지 한 정거를 걸었다.

 

 마을버스 종점, 미니 광장 삼각형 한 변에

 얼마 전까지 창밖에 가위와 칼들을

 바로크 음악처럼 주렁주렁 달아놓던 철물점이 헐리고

 농산물 센터 ‘밭으로 가자’가 들어섰다.

 건물의 불 꺼지고 외등이 간판을 읽어준다.

 건너편 변이 시작되는 곳에

 막차로 오는 딸이나 남편을 기다리는 듯

 흘끔흘끔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여자,

 키 크고 허리 약간 굽은,

 들릴까 말까 한 소리로 무엇인가 외우고 있다.

 그 옆에 아는 사이인 듯 서서

 두 손을 비비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서리 가볍게 치다 만 것 같은 하늘에 저건 북두칠성,

 저건 카시오페이아, 그리고 아 오리온,

 다 낱별들로 뜯겨지지 않고 살아있었구나!

 

 여자가 들릴까 말까 그러나 단호하게

 ‘이제 그만 죽어버릴 거야.’ 한다.

 가로등이 슬쩍 비춰주는 파리한 얼굴,

 살기(殺氣) 묻어 있지 않아 적이 마음 놓인다.

 나도 속으로 ‘오기만 와바라!’를 몇 번 반복한다.

 

 별 하나가 스르르 환해지며 묻는다.

 ‘그대들은 뭘 기다리지? 안 올지 모르는 사람?

 어둠이 없는 세상? 먼지 가라앉은 세상?

 어둠 속에서 먼지 몸 얼렸다 녹이면서 빛 내뿜는

 혜성의 삶도 살맛일 텐데.’

 누가 헛기침을 했던가.

 옆에 누가 없었다면 또박또박 힘주어 말할 뻔했다.

 ‘무언가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사람 곁에서

 어둠이나 빛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

 별들이 스쿠버다이빙 수경(水鏡) 밖처럼 어른어른대다 멎었다.

 이제 곧 막차가 올 것이다.

 

 

 

 

김달진문학상 수상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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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밤 0시 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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