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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명 서정시 / 나희덕

 

 

그들은 <서정시>라는 파일 속에 그를 가두었다

서정시마저 볼온한 것으로 믿으려 했기에

 

파일에는 가령 이런 것들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머리카락 한 줌

손톱 몇 조각

한쪽 귀퉁이가 해진 손수건

체크무늬 재킷 한 벌

낡은 가죽 가방과 몇 권의 책

스푼과 포크

고치다 만 원고 뭉치

은테 안경과 초록색 안경집

침묵 한 병

숲에서 주워온 나뭇잎 몇 개

 

붕대에 남은 체취는 유리병에 밀봉되고

그를 이루던 모든 것이 <서정시> 속에

들어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의 서정시들과 함께

 

그들은 이런 것조차 기록해두었을 것이다

 

화단에 심은 알뿌리가 무엇인지

다른 나라에서 온 편지가 몇 통인지

숲에서 지빠귀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옷자락에 잠든 나방 한 마리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하루에 물을 몇 통이나 길었는지

재스민차를 누구와 마셨는지

도서관에서 어떤 책을 대출받았는지

강의 시간에 학생들과 어떤 말을 주고받았는지

저물 무렵 오솔길을 걷다가 왜

걸음을 멈추었는지

국경을 넘으며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이 사랑의 나날 중에

대체 무엇이 불온하단 말인가

 

그들이 두려워한 것은

그가 사람의 마음을 열 수 있는

말을 가졌다는 것

마음이 뿌리를 돌보며 살았다는 것

자물쇠 고치는 노역에도

시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

 

파일명 <서정시>에서 풀려난

서정시들은 이제 햇빛을 받으며 고요히 반짝인다

 

그의 생애를 견뎌온 문장들 사이로

한 사람이 걸어나온다, 맨발로,

그림자조차 걸치지 않고.

 

* Deckname<Lyrik>. 구동독 정보국이 시인 라이너 쿤쩨에 대해 수집한 자료집.

 

 

 

파일명 서정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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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회 고산문학대상 수상자가 선정됐다. 현대시 부문에선 나희덕, 시조 부문에선 오승철 시인이 선정됐다. 시상식은 고산문학축전이 열리는 1011일 해남읍 연동 백련재에서 거행된다.

 

고산문학대상운영위측은 지난 1년 동안 출간된 시집들을 대상으로 현대시와 시조 부문에서 각 100여 명의 시인을 고르고, 평론가들의 추천을 받아 심사에 들어갔다.

 

현대시 심사를 맡은 정현종 시인, 최승호 시인, 권희철 평론가는 최종심에 오른 5권의 시집들 가운데 나희덕의 파일명 서정시(창비, 2018)를 올 고산문학대상으로 고르는 데 망설임 없이 동의했다. 이 시집은 세월호 사건에 즈음해 죽음과 폭력으로 가득한 세계에 강렬한 외침으로, 모두를 침몰케 한 슬픔을 부력처럼 끌어내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주목됐다.

 

현대시조 부문은 비교적 젊은 세대의 심사위원들이 맡았다. 이승인 시인, 박현덕 시인, 황치복 평론가는 본심에 오른 5권의 시조집들이 각각 고유한 개성과 질적 수준이 뛰어나 수상자 선정에 고심했다고 한다. 긴 토론 끝에 오승철의오키나와의 화살표(황금알, 2019)가 시조부분 고산문학대상으로 선택됐다.

 

이 시조집은 제주 4·3사건이 남긴 상흔의 무늬들을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현재적 삶에 예리하게 새겨놓았다는 점에서 주목됐다.

 

고산문학대상운영위측은 제17회 이후, 크라운-해태의 후원으로 젊고 참신한 작품을 쓰는 등단 10년 미만의 시인들에게 신인상을 시상하고 있는데 올해의 신인상에는 유순덕 시인의 시조집구름 위의 구두(고요아침, 2018)와 권민경 시인의 시집베개는 얼마나 많은 꿈을 견뎌냈나(문학동네, 2018)가 선정됐다.

 

고산문학축전운영위원회는 최근 귀향한 황지우 시인이 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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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명 서정시 / 나희덕

 

 

그들은 <서정시>라는 파일 속에 그를 가두었다

서정시마저 볼온한 것으로 믿으려 했기에

 

파일에는 가령 이런 것들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머리카락 한 줌

손톱 몇 조각

한쪽 귀퉁이가 해진 손수건

체크무늬 재킷 한 벌

낡은 가죽 가방과 몇 권의 책

스푼과 포크

고치다 만 원고 뭉치

은테 안경과 초록색 안경집

침묵 한 병

숲에서 주워온 나뭇잎 몇 개

 

붕대에 남은 체취는 유리병에 밀봉되고

그를 이루던 모든 것이 <서정시> 속에

들어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의 서정시들과 함께

 

그들은 이런 것조차 기록해두었을 것이다

 

화단에 심은 알뿌리가 무엇인지

다른 나라에서 온 편지가 몇 통인지

숲에서 지빠귀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옷자락에 잠든 나방 한 마리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하루에 물을 몇 통이나 길었는지

재스민차를 누구와 마셨는지

도서관에서 어떤 책을 대출받았는지

강의 시간에 학생들과 어떤 말을 주고받았는지

저물 무렵 오솔길을 걷다가 왜

걸음을 멈추었는지

국경을 넘으며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이 사랑의 나날 중에

대체 무엇이 불온하단 말인가

 

그들이 두려워한 것은

그가 사람의 마음을 열 수 있는

말을 가졌다는 것

마음이 뿌리를 돌보며 살았다는 것

자물쇠 고치는 노역에도

시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

 

파일명 <서정시>에서 풀려난

서정시들은 이제 햇빛을 받으며 고요히 반짝인다

 

그의 생애를 견뎌온 문장들 사이로

한 사람이 걸어나온다, 맨발로,

그림자조차 걸치지 않고.

 

* Deckname<Lyrik>. 구동독 정보국이 시인 라이너 쿤쩨에 대해 수집한 자료집.

 

 

 

파일명 서정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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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53) 시인이 올해 제21회 백석문학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출판사 창비는 6"나희덕 시인의 시집 '파일명 서정시'(창비)가 올해 백석문학상 수상작으로 결정됐다"고 밝혔다.

 

심사위원단은 수상작에 대해 "시인의 주변을 포함해 세월호로부터 아우슈비츠, 아프리카 초원의 누에 이르기까지 이 세계에 편재한 죽음의 증후들 속에서 비극적 인식의 언어를 거침없이 토로했다""이제까지는 없었던 전혀 다른 시세계를 보여줬다. 이 시집이 리얼리즘 시의 예리한 갱신을 이뤘다고 평가한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감시와 착취, 죽음과 절망이 도처에 존재하는 시대현실과 정면으로 맞서는 시집"이라고 평했다.

 

올해 시상식은 오는 26일 오후 630분 한국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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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을 켜는 사람 / 나희덕

 

 

심장의 노래를 들어보실래요?

이 가방에는 두근거리는 심장들이 들어 있어요

건기의 심장과 우기의 심장

아침의 심장과 저녁의 심장

두근거리는 것들은 다 노래가 되지요

오늘도 강가에 앉아

심장을 퍼즐처럼 맞추고 있답니다

동맥과 동맥을 연결하면

피가 돌 듯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지요

나는 심장을 켜는 사람

심장을 다해 부른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통증은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지만

심장이 펄떡일 때마다 달아나는 음들,

웅크린 조약돌들의 깨어남,

몸을 휘돌아나가는 피와 강물,

걸음을 멈추는 구두들,

짤랑거리며 떨어지는 동전들,

사람들 사이로 천천히 지나가는 자전거바퀴,

멀리서 들려오는 북소리와 기적소리,

다리 위에서 노래를 부르는 동안

얼굴은 점점 희미해지고

허공에는 어스름이 검은 소금처럼 녹아내리고

이제 심장들을 담아 돌아가야겠어요

오늘의 심장이 다 마르기 전에

 

 

 

 

심장을 켜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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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거리의 죽음·노래까지 품다 서정 미학의 진화

 

예심을 통해 올라온 10명 시인들의 작품들은 한국시단의 현재 지형도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서정적인 것의 태도를 포기하지 않는 시들과 언어에 대한 자의식을 시 쓰기의 기반으로 하는 시들의 접촉면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1차 투표를 거쳐 가장 많은 득표를 한 것은 나희덕과 김행숙의 시들이었다. 나희덕의 시들은 모범적인 서정시적 미학 위에 현실에 대한 감각과 노래에 대한 관심이 더해져서 시적 진화를 이루어내고 있었다. ‘심장을 켜는 사람에서는 시가 가진 노래적인 성격을 극대화하면서 언어의 리듬과 소리의 질감들이 다른 음악을 탄생시킨다. 거리의 뮤지션, 버스커들의 음악을 묘사하는 언어들은 그들의 음악뿐만 아니라, 거리의 소음들도 그 음악을 우연한 일부이자 시적인 사건으로 엮어낸다. 한국서정시를 대표하는 시인의 시가 최근에는 자연의 정숙함이 아니라, 거리의 죽음과 거리의 음악으로부터 시적 모티브를 발견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오늘의 한국시의 성취를 각각 다른 지점에서 보여주는 김행숙과 나희덕 두 시인의 시적 변모가 가지는 새로운 가능성에 신뢰를 보내면서, 심사위원들은 최종적으로 나희덕 시인에게 미당문학상의 영예가 돌아가는 것에 대해 합의를 이루었다. 나희덕 시인의 영예가 한국 현대시의 지금까지의 고투에 대한 상찬으로 이해될 수 있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김정환·오생근·이광호·천양희·최승호

 

 

 

 

파일명 서정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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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수고 또 새로 짓는 시 매일 다른 심장으로 쓰겠다

 

나희덕(48)의 문학은 만물에 대한 글썽임에서 시작한다. 1989년 본지 신춘문예로 등단했을 때 그는 소감에 나에게 지금 필요한 건 발표 지면이 아니라 삶의 억압 속에서도 살아있는 목소리를 가지는 것이다라고 썼다. 그는 25년 동안 세상의 고통과 치열하게 대면하면서 약속을 지켰다. 올해 미당문학상 은 그 노고에 대한 보상이다. 18일 그를 만났다.

 

영광입니다. 미당의 시는 처음 시를 쓸 때부터 읽었고, 모국어를 다루는 감각이나 시적인 것을 포착하는 시선에 늘 감탄했어요. 석사논문 도 미당의 질마재신화에 대해 썼고요. 그는 타고난 서정시인이지만 자기 갱신을 거듭했어요.”

 

그도 미당처럼 타고난 서정시인이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세계를 부수고 새로 지었다. 특히 근 몇 년은 올해 초 발표한 시집의 제목처럼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이었다. 그건 죽음과 비애와 눈물의 말이다. 20대의 나희덕은 사랑과 윤리, 종교적 세계관 속에 살았고 30대엔 사랑과 치욕의 양면성을 알게 됐으며 마흔을 넘어서면서 도처의 죽음을 끌어안았다. 그의 말을 빌리면 타락한 것이고, 모범생이 예술가가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일찍 결혼하고 나서 생활인으로서의 누추함을 알게 됐어요. 메워도 메울 수 없는 빚이 정신을 짓눌렀고,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통과하면서 많이 바뀌었어요. 아이들이 엄마는 파란만장을 자초하고 산다고 말해요. 일부러 불안정적인 요소를 늘려가는 것 같아요. 그것이 시를 쓰기에 고집스럽고 완고한 저를 길들이고 죽이는 방법인 거죠.”

 

수상작인 심장을 켜는 사람에도 자신의 불우함을 다해 노래하는 거리의 악사가 나온다. 조선대 교수인 그가 2년 전 영국으로 연구년을 갔을 때 본 풍경이다. 매일 다른 심장을 꺼내 노래하는 악사에게서 그는 시인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지만 순간 피어났다 스러지는 꽃처럼 세상을 어루만지고 사라지는 시가 보였다고 했다. 매일 다른 심장으로 시를 쓰겠다는 중견 시인의 의지도 느껴진다.

 

다시 그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자. 고아원을 운영한 부모님 때문에 시인은 소외된 아이들과 가난하고 외롭게 자랐다. 만물에 대한 글썽임은 그때부터 시작됐는지 모르겠다. 그 마음은 시풍이 바뀐다 해도 변할 수 없는 것이다. 세월호 이후 나희덕은 국가나 사회의 폭력으로부터 희생된 개인에게 마음을 쏟고 있다. 저기, 오늘 하루 일용할 심장을 열심히 조이고 닦는 그가 보이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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섶섬이 보이는 방 / 나희덕
- 이중섭의 방에 와서


서귀포 언덕 위 초가 한 채
귀퉁이 고방을 얻어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아이들을 키우며 살았다
두 사람이 누우면 꽉 찰,
방보다는 차라리 관에 가까운 그 방에서
게와 조개를 잡아먹으며 살았다
아이들이 해변에서 묻혀온 모래알이 버석거려도
밤이면 식구들의 살을 부드럽게 끌어안아
조개껍데기처럼 입을 다물던 방,
게를 삶아 먹은 게 미안해 게를 그리는 아고리와
소라껍데기를 그릇 삼아 상을 차리는 발가락군이
서로의 몸을 끌어안던 석회질의 방,
방이 너무 좁아서 그들은
하늘로 가는 사다리를 높이 가질 수 있었다
꿈 속에서나 그림 속에서
아이들은 새를 타고 날아다니고
복숭아는 마치 하늘의 것처럼 탐스러웠다
총소리도 거기까지는 따라오지 못했다
섶섬이 보이는 이 마당에 서서
서러운 햇빛에 눈부셔 한 날 많았더라도
은박지 속의 바다와 하늘,
게와 물고기는 아이들과 해질 때까지 놀았다
게가 아이의 잠지를 물고
아이는 물고기의 꼬리를 잡고
물고기는 아고리의 손에서 파닥거리던 바닷가,
그 행복조차 길지 못하리란 걸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알지 못한 채 살았다
빈 조개껍데기에 세 든 소라게처럼

* 화가 이중섭과 그의 아내가 서로를 부르던 애칭.


 

2008 제22회 소월시문학상 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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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중인 나희덕 시인이 문학사상사 주관 제22회 소월 시문학상에서 대상의 영예를 안았다.

 

5일 소월시문학상 심사위원회(김남조, 오세영, 송수권, 문정희, 권영민)에 따르면 나희덕 시인의 '섶섬이 보이는 방-이중섭의 방에 와서' 2008년도 제22회 소월시문학상 대상 수상작으로 뽑혔다.

 

또 심사위는 박라연, 이승하, 이정록, 손택수, 송찬호, 정끝별 시인을 우수상으로 선정했다.

 

지난달 27일 권영민 문학사상 주간의 주재로 본심을 거친 심사위원회는 "나희덕 시인의 대상 수상작은 시인이 꿈꾸는 자연과 인간의 화해로운 세상에 대한 소묘적 묘사와 생태주의적 해석법이 돋보인 작품"이라고 선정이유를 밝혔다.

 

이에 대해 나 시인은 "슬픔을 줄곧 노래해 왔다는 점에서, 서정적 전통의 자장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도시적 사물보다는 자연을 통한 발견에 주로 의존해 왔다는 점에서, 저는 소월의 식솔 또는 후예인 듯 하다"고 수상소감을 밝혔다.

 

나희덕 시인은 김수영문학상, 김달진문학상, 현대문학상, 대한민국 문학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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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상자 : 나희덕

 


2. 수상작품 : 「엘리베이터」외 4편

 


「엘리베이터」

더 들어가요. 같이 좀 탑시다.
병원 엘리베이터 타기가 이렇게 어려워서야……
육중한 몸집을 들이밀며 한 아주머니가 타고 나자
엘리베이터 안은 빽빽한 모판이 되어버렸다
11층, 9층, 7층, 5층……문이 열릴 때마다 조금씩 헐거워지는 모판.
갑자기 짝수층 엘리베이터에서 울음소리 들려온다
어젯밤 중환자실 앞에서 울던 그 가족들일까.
모판 위의 삶을 실은 홀수층 엘리베이터와
칠성판 위의 죽음을 실은 짝수층 엘리베이터는
1층에서야 만난다. 울며 떨어지지 않으려는 가족들과
짝수층 엘리베이터에 실린 죽음을
홀수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바라보는 사람들 앞에서
흰 헝겊으로 들씌워진 한 사람만이
텅 빈 엘리베이터 안에 남고, 문이 닫히고,
잠시 후 B1에 불이 들어온다, 그 사이에
홀수층 엘리베이터 안에는 다시 사람들이 채워진다
더 들어가요, 같이 좀 탑시다……아우성이 채워지고, 문이 닫히고,
빽빽해진 모판은 비워지기 위해 올라가기 시작한다
1층, 3층, 5층, 7층, 9층, 11층……
삶과 죽음을 오르내리는 사다리는 잠시도 쉬지 않는다

엘리베이터는 나른다, 병든 입으로 들어갈 밥과 국을
엘리베이터는 나른다, 더 이상 밥과 국을 삼키지 못할 육체를
엘리베이터는 나른다, 병든 손을 잡으려는 수많은 손들을
엘리베이터는 나른다, 더 이상 병든 손조차 잡을 수 없는 손들을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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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심사위원 : 정현종(시인, 연세대 교수), 김화영(문학평론가, 고려대 교수), 김선학(동국대 교수), 김명인(시인, 고려대 교수), 최동호(시인, 고려대 교수)

 


4. 심사평

「날아오르는 나비와 내려앉는 나비」

장석남, 나희덕 두 시인을 두고 어느 쪽을 수상자로 추천할까 망설였다.
장석남은 매력적인 시인이다. 어떤 분은 ‘타고난 시인’이라고도 말했다. 가령 <수묵 정원 9-번짐> 같은 시를 읽어 보면 그런 말이 수긍된다는 느낌이다. “번짐,/번져야 사랑이지//산기슭의 오두막 한 채 번져서/봄 나비 한 마리 날아오른다” 같은 곳을 읽고 있으면 그의 시적 역동성이 읽는 이의 마음 깊숙한 곳으로 번져드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도, 덜어낸 무게 때문에 가뜬히 치켜 올라간 가지 사이의 시들한 이파리들의 팔랑임 사이에”(<살구를 따고>) 같은 치밀한 묘사 위에 덧없는 삶의 한 순간을 덜렁 올려 놓을 경우 또한 그렇다. 그러나 예심을 거쳐온 이 시인의 시편들이 이런 수준과 긴장을 항상 유지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아 좀 아쉬웠다.
반면에 나희덕 시인의 시편들은 언제나 일정한 구조적 긴장과 특유의 어법을 견고하게 지탱하고 있다는 점이 미덕이다. 엘리베이터, 밥상, 젓가락, 맨밥, 현관문, 신발, 호미 같은 사소한 일상의 소도구들이나 거미줄, 기러기 떼, 월식, 새, 나비, 나무, 구름, 비 같은 가시적 대상이나 현상들로부터 존재와 무, 죽음 같은 근원적 문제로 태연하게 건너뛰어 직행하는 그 속도와 고즈넉해서 더욱 섬뜩해지는 시선이 여운과 우울한 감동을 길게 남긴다. 대체로 그의 시는 우리를 슬프게 하지만 그 슬픔 속에는 일정한 균형을 잡아 주는 무게 중심 같은 것이나 삶의 전모를 흐릿하게 비추는 거울 같은 것이 또한 내장되어 있어서 그 슬픔을 조용하게 견디며 통과하는 암시 구실을 한다. 가령 “한 발은 나비를 신고/한 발은 땅에 디딘 채/절뚝절뚝 봄길을 날아 걸어왔으니//나비야, 나비야,/이 검은 땅 위에 다시 내려와 앉아라/내가 너를 신겠다”의 어두운 초현실주의가 그렇다. 나는 결국 이 “내려앉는” 나비 쪽의 손을 들기로 한다. 나희덕 시인의 “캄캄한 씨방 속에 갇힌 꿈들”이 더욱 단단해지기를 바란다.(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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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사과/ 나희덕

 

 

어떤 영혼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붉은 절벽에서 스며나온 듯한 그들과

 

목소리는 바람결 같았고

우리는 나란히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흘러가는 구름과 풀을 뜯고 있는 말,

모든 그림자가 유난히 길고 선명한 저녁이었다

 

그들은 붉은 절벽으로 돌아가며

곁에 선 나무에서 야생사과를 따주었다

 

새가 쪼아 먹은 자리마다

개미들이 오글거리며 단물을 빨고 있었다

 

나는 개미들을 훑어내고 한입 베어물었다

달고 시고 쓰디쓴 야생사과를

 

그들이 사라진 수평선,

내 등 뒤에 서 있는 내가 보였다

 

바람소리를 들었을 뿐인데

그들이 건네준 야생사과를 베어 물었을 뿐인데

 

 

 

 

야생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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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어찌된 일인지 시쓰기의 어려움과 시인으로 사는 일의 고단함은 갈수록 커져만 갑니다. 시를 그만 내려놓고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떠올리곤 했던 지훈 선생의 말이 있습니다. “시인이 시를 버리고 무엇으로 생각하며, 시를 잃고 무엇으로 사랑하며, 시를 버리고 무엇으로 무기를 삼을 것인가.” 이 말은 도망치려는 저를 다시 시 앞으로 불러 앉혔고, 시를 떠나서는 살 수 없게 되었음을 고백하게 만들었습니다.

 

시집 야생 사과를 낸 지 꼭 1년이 지났습니다. 지훈문학상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 순간 저는 사실 마음이 뜨끔했습니다. 과분한 격려인 것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어떤 불편함이 따라붙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그 부끄러움과 불편함의 이유를 말씀드리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수상소감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되새김질하는 동안 이 상이 저에게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헤아려보고자 합니다.

 

제가 스스로 생각하기에 야생 사과라는 시집은 독자적인 새로움이나 성취를 보여주었다기보다는 과도기를 지나는 한 인간의 내면적 고백에 가깝다고 여겨집니다. 과도기란 한 세계를 벗어나 다른 세계로 가기 위해 거쳐야 할 과정이자, 파괴와 혼란을 불가피하게 경험하게 되는 시기를 의미합니다. 그 시들을 쓰는 동안 저는 어떤 시를 써야겠다는 지향보다는 다른 시를 쓰고 싶다는 갈망에 사로잡혀 지냈습니다. 하지만 한 세계를 깨뜨리는 일은 그것을 축조해나가는 것보다 훨씬 어렵고 막막한 노릇이었습니다.

 

시집을 낸 후에 저는 단 한 편의 시도 발표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처한 삶의 조건이 시에 집중할 수 없도록 몰아치기도 했지만, 그것은 한편 의도적이고 긴장 어린 직무유기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시를 완전히 내려놓았던 것은 아닙니다. 다른 어느 때보다 낯선 자신을 붙잡고 끙끙거렸던 것 같기도 합니다. 생각의 파편들을 받아적고 그것을 들여다보는 일을 계속했지만, 단 한 편도 제가 시라고 부를 수 있는 형태에 도달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 파편을 하나의 작품으로 완료하는 일을, 그리고 시라는 완제품을 여기저기 납품하는 일을 제 안의 또 다른 는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거부는 완강했고, 그 앞에서 저는 무력했습니다. ‘다른 시’ ‘새로운 시를 원하고 있는 그에게 저는 예전의 타성대로 따르기를 요구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그와 함께 묵묵히 침묵의 시간을 견디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편함의 또 다른 이유는, 제 내면적 요구에 따라 전통의 자장(磁場)에서 멀어져가고 있을 때 지훈의 이름으로 다시 호명되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등단 이후 제가 줄곧 속해 온 시의 영토는 지훈이 지향한 질서와 조화의 세계에 비교적 가까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전통을 바탕으로 한 균형감각은 저에게 부정해야 할 덕목으로 느껴졌고, 재현적 언어에 대한 회의도 강해져 갔습니다. 그런 저에게 지훈상이 주어졌다는 것은 전통으로의 회귀를 환기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문학상의 목적은 그 상이 기리는 시인과 아류의 시인을 찾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정신을 새롭게 확장하라는 권유에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저는 지훈에 대한 문학사적 평가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지훈을 비롯한 청록파에 대한 이해는 상당부분 전통과 현대성의 도식적인 이분법에 기초해 왔습니다. 그런데 지훈의 시와 시론을 읽다보면 그가 현대성에 둔감한 시인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전통과 현대성을 결합하기 위한 모험을 감행했던 흔적들을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지훈이 서구사상을 받아들여 동양전통과 접맥하는 지점에서 논리의 모순을 보인다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 혼란을 향한 감행이 오히려 안정된 고전주의자의 신념보다 한결 시인다운 모색이라고 생각합니다. ‘芝薰이라는 풀초( )’자가 나란히 드리워져 있는 것을 보며, 그의 풀잎斷章이라는 시를 떠올려 봅니다.

 

한 줄기 바람에 조잘히 씻기우는 풀잎을 바라보며

나의 몸가짐도 또한 실오리 같은 바람결에 흔들리노라.

 

이 구절을 읽으며, 풀처럼 섬세하게 흔들리는 감각이 있었기에 바위처럼 굳은 정신과 지조 또한 가능했으리라 짐작해보기도 합니다.

 

지훈 선생이 남긴 삶의 자취와 예술적 풍취 앞에서 제 문학의 자리는 아직 볼품없지만, 그 오롯한 길을 따라 걸으려는 마음만은 간절한 바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상은 저의 재능이나 성취보다는 스스로의 무력함과 싸우면서 통과하고 있는 혼란의 여정에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환절기를 앓고 있는 제 시들에게 따뜻한 격려를 베풀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나남출판사에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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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회 지훈문학상 심사보고

 

지훈 선생의 시가 도달한 언어의 드높은 품격과 고아한 향기는 이후의 한국 현대시가 넘어야 할 뚜렷한 봉우리를 만들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지훈 선생의 시를 넘어설 수 있는 시가 나타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지훈 선생의 시가 보여준 품격과 향기는 재주가 만들어낼 수 있는 기술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뛰어난 지성인이 지행일치의 삶을 살아가며 풍기는 인품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삶의 품격과 동일한 것이기 때문에라고 생각한다. 지훈문학상 심사위원들은 지훈 선생의 시가 지닌 이같은 성격을 염두에 두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최근의 많은 부박한 시들이 보여주는 깊이의 결여를 걱정하면서 심사에 임했다.

 

지훈문학상 심사 위원들은 송찬호, 나희덕, 최승자, 이병률 등 6~7명의 시인들이 생산한 시집을 대상으로 삼아 논의한 결과 수상 후보자를 어렵지 않게 송찬호와 나희덕 두 사람으로 좁힐 수 있었다. 송찬호의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에서는 그의 반성적 상상세계가 이미 일정한 경지에 도달한 시어구사 능력에 힘입어 한층 자유롭게 구사되고 있으며, 나희덕의 야생 사과에서는 에 대한 응시와 에 대한 성찰로 귀결되는 고통의 시간을 팽팽한 언어로 줄기차게 형상화하는 집요함과 성실함이 들어 있다. 그래서 세 사람의 심사위원들은 이 두 시인의 시집 중 내용의 깊이와 형상화가 보여주는 미덕으로 미루어 보아, 어느 쪽이 수상작이 되든 유감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송찬호의 경우 동일한 시집이 중복수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결국 나희덕의 야생 사과를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나희덕의 야생 사과20여 년에 걸친 시작생활이 만들어낸 여섯 번째 시집이다. 그의 이 시집은 과거를 과거로 만들기 위한, 그러나 과거를 넘어서서 자신의 삶을 새롭게 건설하려는 의지가 만들어낸 반성적 언어의 집합이다. 나희덕의 그 같은 의식을 우리는 나는 바늘이다/하얀 무명의 장막 속으로/떨리는 몸을 밀어 넣기 시작한다라든가 나는 박쥐다/나는 새가 되지 못한 게 아니라/쥐가 되지 못했다라는 말 속에서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다. 나는 이미 지워졌다라는 말 속에서 과거와 결별하려는 자세에도 불구하고 과거는 안개 속에 숨겨진 형체와 같기 때문에 완전한 결별을 손쉽게 이루지 못하는 인간적인 모습도 읽을 수 있었다.

 

나희덕의 야생 사과는 이런 강렬한 반성적 성격 때문에 주어가 이다. 서정시의 일반적 화자인 1인칭보다 훨씬 강도 높은 주관적 1인칭으로서의 가 그의 시를 지배하는 주어이다. 그리고 이 는 반성적인 의식과 자세 때문에 긴장되어 있으며, 이 긴장은 이 시집의 미덕을 이루는 팽팽한 언어, 팽팽한 의미로 나타난다. 특히, 나희덕이 결정적 순간이란 시에서 사진을 찍을 때 피사체와 빛이 절묘하게 만나는 순간을 포착해야 하듯이 결정적 순간이란 게 있다. 잎맥을 따라 흐르던 물기가 한 꼭짓점에서 일제히 끊어지는 순간, 단호하면서도 부드럽게 제 발목을 내리쳐야 한다고 쓰고 있는 시구가 바로 그런 미덕의 소산일 것이다.

 

또한 나희덕은 이어지는 시구에서 그러면 짧으면서도 아주 긴 순간 한 생애가 눈앞을 스쳐갈 것이다라고 썼는데, 이 순간이야말로 그의 반성적 의식이 만들어낸 완전한 결별이며 결정적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여 그의 이번 시집은 이런 완전한 순간을 향해 자신의 내면을 비우고 게우는, 그리고 시간과 풍경과 삶을 재인식하고 재정비하는 줄기찬 노력의 성과이다.

 

시인 조지훈의 시와 정신과 생애에 부합하는 길을 걸어간 시인에게 이 상이 주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지금까지 심사위원들의 한결같은 소망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소망은 지훈 선생이 걸어간 길을 편협하게 축자적으로 해석하는 방식으로는 달성할 수 없다. 올곧게 자신의 삶을 추스르며 최근의 경박한 시어에 대응하는 팽팽한 의미의 언어를 만드는 작업에 지훈상을 수여하는 것은 이 상의 본질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라고 우리 심사위원들은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나희덕 시인에게 지훈상을 수여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시인이 희망하는 새로운 세계가 시를 통해 우리 앞에 환하게 나타나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 오생근 정현종 홍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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