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극지의 밤 / 서재진

 

이누이트의 외투 깃마다 빡빡한 바람이 들이 닥친다

당신 어서 도망가라

 

내뱉은 말 모두 시퍼렇게 얼어붙어 입김이 되는 땅

부끄러운 고백이 당신 입술 녹일텐데, 그렇다면 추워서 어디에도 가지 못할 텐데 칼이 침엽수처럼 돋아날 텐데

 

노파가 어린 사냥꾼에게 설화를 전하는 밤이다

부모를 죽인 자식이 당신 가슴팍에 살고 있다고 아니 당신은 짐승 한마리도 건드려본 적 없다고, 사실은 얼어붙은 땅 위로만 걸어다닌다고 당신은 발자국이 없는 사람이라고

올가미와 칼을 든 사람들이 바람의 역방향으로 서서 소근거린다

말하지 않을 게 당신을 찾지도 않을 게벙어리와 장님이 연애하는 것처럼

 

바람도 방향도 없이

 

당신이 태어났을 적 배꼽에서 솟구친 울음

거기서 이 땅의 첫 꽃이 피었다는데

영구동토에는 발자국이 남지 않는 법, 그래서 당신은

발자국 대신 피 한방울 피 두 방울 흘리며 도망 갔다고

 

어린 이누이트가 놓친 늑대, 그 늑대가 새끼를 낳고 새끼 늑대가 자라 어렸던 이누이트의 자식을 잡아먹을 때쯤

 

내가 무사히 노파가 된다면 이야기를 전하겠다

 

바람의 역방향으로 해가 진 밤이다

극지에서 적도로 날아가던 날짐슴이 물에 빠져 죽은 밤이다

벙어리와 장님이 서로 입술만 더듬던 밤이다

 

꽃 피는 것을 본적 없는 사람들이 모피를 입고 짐승을 사냥한다

아니 혹은

꽃 지는 것을 느낀 적 없는 짐승들이 모피의 냄새를 따라 사람을 사냥하는지도

 

 

 

728x90

 

해변의 커튼콜 / 육호수

 

   살점 없는 십자가를 왜 바다에 던지나

 먹다 만 빵을 바다에 던지면 새들이 뛰어들어 헤엄쳤다

 부끄럼도 없이

 아름답게

 

 파도는 내가 버린 얼굴들이었으므로

 나의 해변은 항상 모래성보다 먼저 폐허였다

 알아들을 수 없는 농담처럼

 내게 맞지 않는 신발들만 밀려왔다

 

 썰물, 모래 위엔 두마리의 물고기

 젖은 이불을 덮어주면 끝없이 불어나며 파닥였다

 집에 돌아와도 파닥파닥, 끝나지 않는 커튼콜

 

 짠바람 먹은 베개 밑에 칼을 묻고

 아무도 아이를 배지 않는 이불을 덮었다

 잠을 깨지 않는 얼굴들 일흔명을 일곱번씩

 집에서 몰아냈다

 일흔번째, 일흔의 일흔번째에도 파도가 왔다

 

 그러다 내가 먼저 잠이 드는 날이면

 모르는 사람 잠에서 깨어 해변에 나무를 심었다

 잠든 내 머리를 빗기면

 조용히 나무가 자라고

 나무에 새긴 이름들

 산모의 튼 살처럼 갈라질 때까지도

 짝짝짝 끝나지 않는

 

 커튼콜; 신이 떠날 때 우리에게 그림자라는 뿔이 돋아났다

 

 나를 집어 바다에 던지면 검은 개들이 따라 뛰어들었다

 용서도 없이

 아름답게

 

 바다 위 부표를 볼 때면 젖니가 흔들렸다

 구름은 바다의 끝자리에서 뛰어내려 선분이 되었다

 멀어지는 뒤통수처럼 하늘이 돌아눕고 있었다

 

 커튼콜, 내가 살아난 이유를 오래 설명하기로 했다

 

 

728x90

 

전염 / 장성호

 

우리는 기다렸다

 

이 길을 통해 그들이 곧 지나갈 것이라는 소식이 있었다 총신을 겨눈 채로 우리는 말이 없고 이따금 수풀이 조금 흔들리는 것으로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믿기로 하면서

 

그들은 언제 올까 묻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었다 매복이었으니까 정적 속에서 새떼가 날아올랐다 평소 같았으면 새를 쏘고 박수를 쳤겠지 새를 맞추지는 않았지만 같이 박수를 치자 말하고 싶었지만 매복이었으니까 우리는 점점 우리라는 보호색을 가진 혼자가 되고

 

빈 길을 응시했다

본 적 없는 그들의 모습을 만들었다 지우면서

본 적 없는 그들의 머리에 아는 얼굴을 붙이면서

 

방아쇠를 당기는 상상을 하면

우리는 모두 죽었던 적이 있는 사람들

 

총신을 겨눈 채로 해가 졌다 그들이 곧 올 것이라고 말해 준 이는 누구일까 생각했다 바람이 불었고 수풀이 흔들렸다 이제 돌아가자, 말하려고 옆을 봤는데 어둠 속에는 가득한 얼굴들 돌아가자, 돌아가자 중얼거렸는데

 

총성이 울렸다

보이지 않는 곳을 향해 총을 쏘면서 우리는 우리에게 너무 쉽게 그들이 되고

 

전추 속에서 밤이 지났다 햇빛이 들기 시작한 숲을 둘러봤는데

아무도 죽지 않았다 죽은 새들이 가득했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박수를 치면서 수풀 속으로 들어갔다

텅 빈 숲이었는데 행군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728x90

 

구직광고 / 김윤아   

 

선 아침

살에 취한

저 사내

어디로 가나

 

첫 새벽부터 파한 인력시장

멀쩡한 사내들도

담배연기 뿜으며 돌아선

뒷걸음의 시간을

짧은 왼쪽 다리에 위태롭게 걸치고

막걸리 한 사발, 김치 한 쪽으로

염치없는 시장기를 숨겨

불과해진 얼굴로 뒤돌아가는

저 사내

발밑을 비추는 그림자 숨은 대낮은

기우러진 어깨 위에

위태로운 사선을 긋고

천만 번을 짓눌려도 고개를 쳐들어

끈질긴 꽃대를 기어코 올리는

민들레처럼

누렇게 뜬 생계를 짊어진 채

 

절룩절룩

 

낮술로 취한 태양이

이죽거리는 거리에 멈춰 서서

멍한 시선으로 하늘만 바라보는

저 사내

 

어디로 가야하나

 

 

728x90

 

그리움이 끓어 오른다 / 문현숙

 

하루 종일 비가 오고 바람이 불었다

이런 날 저녁이면

된장국을 끓이고 싶다

한결같은 마음닮은 뚝배기를 준비하고

밥 벌어먹고 사느라

정처 없이 떠돌았을 두 발을 씻겼다

그중, 왼쪽 정강이뼈 하나 뚝 떼어

뭉근하게 다싯물을 우려낸다

늙은 호박에 새겨진 주름처럼

당신 눈가 주름 두어줄

놀빛처럼 젖어들던 그윽한 눈빛 한 줌

머릿결 쓰다듬으며 세상 가장 예쁘다고 말하던

달착지근한 입술 반 모와

품에 안아 포근하게 데워주던

참갈비뼈, 그 중 삼 번과 사 번 두 대

당신 또한

내가 그리웠을 마음과

내 그리움이 조화롭게 어우러질 즈음

첫 만남, 두근대던 심장 통째로 넣고

나만의 손맛 비밀스레 꺼내

한 큰술 반 넉넉히 풀어 넣으니

뚝배기 속, 당신

보글보글 끓어오르고 있다 

 

728x90

 

 

죽음의 냄새 / 전영아

 

엄마는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계시다 가셨다

집 앞을 지나는 사람들은 누구라도 코를 싸쥐고

지나가며 우리 집에서 생선 썩는 냄새가 난다고 했다.

너무나 가까운 일상이어서 나는 그 냄새를 전혀 구분하지 못했다

엄마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젊디젊은 나이에 방바닥을 짊어지고 있으라는 형벌을 받으신 걸까

내장이 서로 다 통해버려 끊임없이 밑으로 오물이 흘러나왔다

몸은 말할 수 없이 망가졌어도 정신만은 초롱같아서

자리 밑에 비닐을 덧씌우고 당신 손수 기저귀를 갈아 받치면서도

한 번도 내게 몸을 보이지 않으셨던

엄마

 

유방과 자궁이 온전해야 여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딸은 엄마의 유전자를 빼닮는다는데

엄마가 겪은 그런 고통은 결코 겪지 않으려고

조그만 근종 하나에 나는 지레 겁을 먹고 여자를 버리고 말았다

저승은 몸이 망가져야만 갈 수 있는 곳일까

 

어젯밤 꿈엔

담벼락에 기대서서 엄마를 기다리며 웅크리고 섰던 어린 내가

저만치서 다라이를 이고 오는 엄마를 보고 쪼르르 달려가고

삼랑진 오일장 초라한 생선장수 좌판에서 허옇게 소금에 절여진 엄마를 만났다

뒤죽박죽 정리되지 않은 꿈에서 깨어난 아침

냉장고에서

사다 놓은 지 한참 지나 살이 물러 물컹거리며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생선 한 토막을 발견했다

삼십 년 전에 엄마에게서 났던 그 냄새를 만났다

지독한 냄새는 길잡이인양 죽음을 데려왔다

 

 

 

 

 

 

[당선소감] 내 삶의 슬픔이 내게 詩를 쓰게 합니다

 

어제는 대설이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대설은 첫눈을 선물로 가져와 온 세상을 새하얗게 덮어 놓았더군요.

눈을 치우느라 반나절을 땀을 흘리고 잠시 따사로워진 햇살아래 커피를 한 잔 하고 있는데 당선전화를 받았습니다.

오후 내내 가슴이 두근거려 진정이 되지 않더군요.

엄마가 보고 싶어 눈물이 났습니다.

벌써 하늘나라 가신지 삼십년도 더 지났고 내가 엄마 보다 더 나이를 먹었네요.

시인이라는 슬픈 이름표를 달겠노라고 스승을 모신지 올해로 십 년째입니다.

혹독하게 혹평을 하시며 첨삭지도를 해주신 황봉학 시인님께 큰절을 올립니다.

시인님은 그동안 제 글을 보아 주실 때마다

이것도 빼고 저것도 빼라고 하시며 다 사족이라며 지우곤 하셨지요.

그러면 끝내는 단 한 줄이 남기 힘든 날들의 연속이었어요.

그럴 때마다 글이 되지 않는 내 자신이 안타까워 울곤 하였어요.

서로 어깨를 겯고 이 길을 걸으며 격려를 아끼지 않는 『작가사상』 문우들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함께 기쁨을 나누겠습니다.

아직 설익은 작품에 눈맞춤 해주신 심사위원님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또 詩가 나를 부릅니다.

오늘밤을 또 꼬박 셀 것만 같습니다.

 

 

 

 

[심사평] 

 

제38회 방송대문학상 시 부문의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을 읽었다. 시 창작의 경험이 많지 않은 분도 있었고, 꽤 오랜 시간 동안 단련된 분도 있었다. 좋은 시는 과연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할 것인가를 새삼스레 생각해보았다. 아마도 좋은 시는 열어젖히고 확장하는 힘이 있는 것이 아닐까한다. 뭉클한 감동을 통해서나 분열 혹은 충격을 통해서 좋은 시는 이러한 일을 하는 게 아닐까 한다. 열어젖히고 확장한다는 것은 한 편의 시 속에서 시상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움직인다는 뜻이다. 움직인다는 것은 이동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시는 시상의 율동을 통해 이 세계를 다른 위치에 옮겨놓는 것이 아닐까 한다. 마치 물건을 들어 다른 곳에 내려놓듯이. 시를 창작할 때 이점을 유의했으면 한다.

마지막까지 경합한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6월14일」외 4편은 자신만의 독특한 생각의 끈을 끝까지 끌고 가는 힘이 좋았다. 발상도 신선했다. 다만 시「6월14일」은 직유의 과잉을 제한하고 조절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고백체로 일관해서 쓸 필요가 있었을까도 싶었다.

「여름」외 6편은 상큼하고 발랄한 언어 감각과 시상의 전개를 자랑하는 작품들이었다. 생각의 탄력도 좋았다. 사색의 통로를 따라가며 읽는 재미가 있었다. 그러나 여러 곳에서 감정의 노출이 과도하게 있었다. 일상의 입말과 대화가 시구로 그대로 활용되는 것에 대해서도 신중한 판단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보였다.

「기우제」외 4편은 시행이 진행되면서 가장 고조되는 지점이 뚜렷하지 않아 아쉬웠다. 전반적으로 평면적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다만 시 「하이테크빌딩 복도에서」는 여러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개인과 개인의 단절과 불통의 초상을 자연물을 빌려 발언하는 수사가 새롭고 산뜻했다. 가령 “우연히 눈길이 부딪치면 벌레가 떨어진 듯 소스라친다”와 같은 시구가 그러했다. 이러한 장점을 계속 이어가길 바란다.

고심 끝에 제38회 방송대문학상 시 부문 당선작으로 전영아 님의 「죽음의 냄새」를 선정했다. 함께 응모한 작품들의 수준도 고르고 안정적이었다. 특히 시「죽음의 냄새」는 체험의 몸이 실려 있어서 묵직한 감동을 안겨주었다. ‘엄마’의 늙고 병든 몸을 일상으로 바라보는 시적 화자의 슬픔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었다. 특히 “삼랑진 오일장 초라한 생선장수 좌판에서/ 허옇게 소금에 절여진 엄마를 만났다”는 대목에서는 생전 엄마의 퇴모한 몸이 함께 겹쳐지면서 비통에 빠지게 했다. 수상을 축하드리며 앞으로의 정진을 당부 드린다.

- 문태준 시인

 

 

 

 

728x90

 

리사이클 / 김종연

 

새벽에 부음을 들었습니다 거짓말입니다 의사는 죽은 지 백년이 넘은 환자의 예를 들면서 자신이 죽었다고 믿게 되는 것도 하나의 증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죽은 지 백년이 지났지만 이렇게도 살아 잇습니다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부활이라고 한다면 영원히 사는 것은 증상입니다만 저는 제 손으로 시신을 몇 번이나 수습한 적이 있습니다 운명에 대해서도 잠시 생각해보았지만 깊은 퇴폐의 밤을 보내도 범해지지 않는 삶이었습니다 무언가 저를 이토록 아름답게 만들고 있습니다

 

아이가 있는 창부가 아이를 생각하다 절정을 맞게 되는 것처럼 다 잃고 조금 구하는 일입니다 사랑 없이도 저를 흔드는 비밀은 거의 다 보고 나서야 재방송인 걸 깨닫게 되는 판타지입니다 여자는 이미 낳아버린 아이를 안고 자주 저울에 올라갑니다

 

백년 후의 제가 누워  있는 작은 방 안에서 체념할 수 있는 인생이 아직도 몸을 쓸어주고 갑니다 이 새벽의 몰락과 부흥을 동시에 바라면서 하룻밤 만에 부활하고 이들을 기다린 여자가 되어

 

너는 내가 죽었다는 말에도 눈 하나 깜짝이지 않는구나 백년 전에 죽은 아이가 백년 후의 거짓말 때문에 다시 태어나고 있습니다.

 

 

 

 

심사위원

 

 시 부문 : 손택수(시인), 이영광(시인), 조용미(시인)

728x90

 

 

다음날로 가는 새벽 / 김응규

 

모기향 위에 개미 한마리가 있었다

나는 무언가에 쫓기듯

잠을 이루지 못했고

천천히 타들어오는 불에

개미는 이따금 놀라했다

펜 끝으로 먹이를 나르는 새벽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활자들을 배열하는 일을 했다

혼자 불이 켜진 방에는

시간이 혼자서 앞서갔다

나는 가느다란 선을 따라서

개미굴을 구석구석 비집었고

혼자서 알을 낳고 있는 여왕에게

고통의 내용을 읊어주었다

깊고도 짧은 시간을 지나서

나는 먹이를 구하러 가는

일개미를 따라 굴 밖으로 나왔다

빛이 엷게 들어왔다

하얀 접시 위에는 모기향이

재가 되어 가지런히 가라앉아 있었고

개미는 어디론가 사라진 후였다

이대로 괜찮겠냐는

몽롱한 소리가 들렸다

나는

 

종이에 적었다

 

 

 

-《창작과 비평》 2014년 봄호, 제12회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시 중 1편

 

 

[심사평]

 

우리들은 투고된 700여명의 작품을 나누어 각 3편씩을 뽑아 모두 9편을 가지고 본격적인 논의를 하기로 하였다. 투고자의 정보를 알 수 없도록 이름과 주소, 학교명을 가린 채 진행한 이 첫 번째 작업에서 우리들은 우연히도 3편을 일치시킬 수 있었다. 시를 보는 눈이 서로 다를 줄 알았는데, 논의를 해갈수록 비슷한 점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가운데 2명이 공동으로 뽑은 1편을 한 분이 추천하여 모두 4편을 가지고 최종 심의를 하였다.  

「우선 앵무새 혀 사용법」외 4편을 응모한 분의 표제시는 앵무새의 혀를 펜으로 전환하는 비유적 기법이 매혹적이었다. 한 사물을 다른 사물로 대체하는 시의 기본기를 잘 알고 있는 분이었다. 다른 시「말」에서도 “혀끝에 속력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건”이라는 느닷없는, 그러면서도 상상이 가능한 낯선 진술이 마음에 들었다. 긴 호흡을 통한 긴장의 유지와 균일한 작품성이 장점이었다. 그러나 메시지 전달이 명확하지 않다는 한계에 부딪혔다.

「인력」외 4편을 응모한 분의 시는 행간이 좋았다. 짧은 호흡의 시지만 언어가 행간을 신선하게 뛰어다닌다. 수준 높은 인식이 존재한다. “한 바퀴를 다 회전하는 손잡이는 없다 딱 반 바퀴 돌고 다시 반 바퀴를 되돌아 문이 열리면”이라는 식의 진술이 그렇다. 다른 시 「트랙」은 시간에 의해서 구축되는 인간의 운명을 비유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던진 것과 놓친 것에는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인식에 공감했다. 그러나 간혹 건너 뛴 행간을 되돌아 가야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결국 우리들은 「다음날로 가는 새벽」외 4편을 응모한 분의 작품 가운데, 섬세한 요리의 상상력으로 죽음을 응시한 「동물적인 죽음-Melting pot」와 「가로등 밑」을 당선작으로 뽑는 데 합의하였다. 우선 이 분의 시는 잘 읽혔다. 시행을 따라가면서 심상이 그대로 떠올랐다. 그러면서도 은유가 깊었다. 특히 주목한 시는 「가로등 밑」이었다. 정황묘사가 세밀하고 트릭과 능청, 기대 배반의 말부림이 좋았다. 한마디로 시 읽는 재미가 있었다. “비둘기 한 마리가 차에 치었는데/ 바나나껍질 옆으로 날아가 같은 포즈로 누었다”라는 표현들이 그랬다. 공부를 쉬지 않으면 대성할 분이다. 

공광규 ‧ 이수명 ‧ 이정록 

 

 

728x90

 

 

빈통장 속의 오후 /  정순


잔고가 얼마 남지 않은 통장을 들고서
현금코너에 들른다
곧 새로운 무게로 모였다 헤쳐질 숫자들이 짐작되는
그짧은 동안에 통장을 넘겨다보며
나는 왜 세상의 부적절한 관계들을 생각했을까
내 통장 또한 너무 일찍
주는 사랑에 주저앉고 말았음일까
입금되기만 하면 신기루처럼 어디론가 출금되고 말 사연들
늘 뻘 밭처럼 강팍한 아들의 통장이 잠깐 떠올랐고
한 번도 대면한 적 없는 유선비와
어디에 쓰이는 지도 모를 이름들의 납부고지서들이
뇌리를 스쳐갔다

 

날마다 땀에 전 통장과 함께 현금코너를 들른다
재래시장 한켠 생선 냄새 나는 궤짝 사이에 쪼그리고 앉아
하루치의 푸른 목숨 대신 넘겨받은 구겨진 지폐 몇 장을
내 안의 숫자들이 동의해 주지 않는 용건들을 향해 날린다
골목 저쪽의 절약과 봄날 한때 절반의 외출로 견뎌낸
햇살들을 날리는 것이다
애써 편식을 변명으로 대며 그들의 외식 한 켠에서
소금처럼 찍어 먹던 저녁 한 끼와
몇번이나 집었다 놓았던 새 옷 한벌을 송금하는 것이다
철컥, 또다른 가난의 분량이라도 검증해 주듯
기계음이 울리고 몇 개의 알리바이 숫자들과
아직은 유효하게 남아있는 찌거기 잔액들을 헤아리며
365코너를 나서다 문득 올려다본 하늘
팔월 중순의 가난한 구름 몇 점 서풍에 밀려가고 있었다.

 

 

728x90

 

 

진형란  꽃등급

'대학문학상 > 교단문예상(단국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3회 교단문예상  (0) 2012.12.19
제12회 교단문예상  (0) 2012.12.19
제11회 교단문예상   (0) 2012.12.19
제10회 교단문예상  (0) 2012.12.19
제9회 교단문예상 수상작  (0) 2012.12.19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