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 소식을 듣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함께 원인 모를 부끄럼이 나를 엄습해왔습니다. 서른다섯 해 동안 시를 써오면서 과연 나는, 그동안 시에서 진술한 내용에 걸맞게, 삿되지 않는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자괴감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내게 주어지는 이 상이, 다른 상도 아니고 일제강점기에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불교 운동을 통해 청년운동을 강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여 불교의 현실참여에 앞장서 온 만해 한용운 선생을 기리는 상이고 보니 수상했다는 기쁨도 잠시, 그 기쁨의 자리를 밀어내고 이내 무거운 책임감이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흔히 아날로그 세대로 명명되는 내 몸 속에는 전근대와 근대와 탈근대의 정서가 혼재되어 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등잔불 밑에 엎드려 숙제를 했고 비포장도로를 걸어 학교를 오갔습니다. 좀 자라서는 기차를 타고 대처에 나가 온갖 근대문명의 이기를 경험했습니다. 지금은 디지털문명 기기에 빠르게 적응하기 위해 발 빠른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중입니다. 사회학적 용어로 우리 같은 세대를 경계인이라 합니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채 두루 여러 세대에 걸쳐져 있는 정신상태로 불안정한 정체성을 지니고 살아가야 하는 세대, 그리하여 까닭 모를 불안이 영혼을 잠식하는 세대가, 이른바 세상의 저널에서 흔히 말하는 베이비 붐 세대인 것입니다.
나의 시력은 바로 이러한 요철과 파란만장으로 점철된 삶의 이력을 반영해 온 것에 다름 아닙니다. 즉, 나의 시는 살아오면서 나에게 의식, 무의식으로 영향을 끼쳐온 세계의 온갖 사물과 나를 다녀간 무수한 인연들을 표절해온 것에 다름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표절 시인이었습니다. 고향을 표절하고 엄니의 슬픔을 표절하고 아부지의 한숨과 동생의 좌절을 표절하고, 눈과 비와 나무와 새와 바람과 별과 달을 표절하고 한 사내의 탕진과 애인의 눈물과 아내의 한숨을 표절하고, 기차와 여관과 굴뚝과 철길과 중서부 지방의 사투리와 그해 겨울 저녁의 7 번 국도와 한여름 강진의 해안선과 서울에서의 피난민들의 삶을 표절했습니다.
요사이 나는 부처의 향기가 난다는 佛巖山을 하루에 한두 번 일과처럼 오르내리는 것을 하나의 낙으로 삼고 있습니다. 산을 오르내리며 나는 중얼중얼 산에게 속말을 건네고 아무도 모르는 죄를 토설하고 때로 투정을 부리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면 산과 심심상인, 교외별전이 이루어지고 나는 산의 일부가 되기도 합니다. 산에는 크고 작은 돌들과 우람한 바위들이 많은데 오르고 내릴 때 삼가라는 뜻일 것입니다. 이 산에 어린아이로 들어왔으니 어른이 되어 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아주 산을 내려가 세상 어디를 주유하든 나는 이미 내 몸 안쪽에 자리한 불암산을 오르내리며 산이 주는 지혜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유심 문학상’이 내게 준 선물에 내 식으로 보답하는 일이며 ‘만해 한용운 선생’을 사는 일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소리란 무엇인가. 인간의 경우는 음성, 한마디로 언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육성을 통해 감정과 의사를 표현하거나 전달한다. 그런데 소리는 인간의 전유물만이 아니다. 인간의 세상을 뛰쳐나와 밖을 보아라. 이 이 우주의 모든 사물들도 크던 작던 소리들을 낸다. 바람소리, 물소리, 파도소리, 천둥소리, 자동차 엔진 소리, 전화벨 소리…… 이 모든 소리 역시 그들의 언어이며 그들만의 의사소통이 아닌가.
하지만 불행히도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소리는 극히 한정되어 있다. 물리학에서는 이를 가청(可聽) 주파수라 하는데 다른 짐승과 달리 인간은 20-20.000Hz(헤르츠) 영역 안의 소리만을 듣는다고 한다. 그러니 사실 인간은 이 세상의 대부분 사물들과 소통을 단절하며 살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듣지 못하는 그 사물들의 소리는 누가 들을 수 있는가? 누가 그 사물의 언어를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인가. 우리는 그 가능한 자를 일컬어 편의 상 그저 시인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훌륭한 시인은 이 물리학적 세계의 소리, 경험적 세계의 이 가청 주파수를 넘어서 일상의 인간이 듣지 못하는 그 어떤 사물의 언어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이재무, 그는 사물이 들려주는 언어를 잘 들을 줄 아는 시인이다. 시류적 시인과 달리 그 사물의 말에 귀를 기우리려고 노력하는 시인이다. 4월의 어떤 화창하지만 적막한 봄날 모든 사람들이 삶의 횐희를 노래할 때 오히려 그는 목련이 들려주는 호곡 소리를 조용히 엿듣고 있지 않는가. 아름다움은 오로지 기쁨의 소유만이 아니다. 그 이면에는 이처럼 슬픔도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 슬픔 속에서 생명이 잉태되는 것이다.
우리 문단 대부분의 시인들이 인간의 소리에만 집착하는 요즘 모처럼 사물의 언어에도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시인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오늘의 우리 시를 위해서 다행한 일일지도 모른다.
만해 한용운 스님의 문학 사상을 선양하고 한국문학 발전에 기여한 문학인들을 선정·시상하는 유심작품상 수상자가 발표됐다.
만해사상실천선양회는 “제17회 유심작품상 수상자로 시 부문에 이재무 시인의 ‘목련’을, 시조부문에 김영재 시인의 ‘바늘귀’를, 평론 부문에 이경철 평론가의 <현대시에 나타난 불교>를, 특별상에 이상범 원로 시조시인을 각각 선정했다”고 6월 3일 밝혔다.
이재무 시인의 수상작 ‘목련’에 대해 심사위원회는 “이재무 시인은 사물이 들려주는 언어를 잘 들을 줄 아는 시인으로 시류적 시인과 달리 그 사물의 말에 귀를 기우리려고 노력한다”면서 “대부분의 시인들이 인간의 소리에만 집착하는 요즘 모처럼 사물의 언어에도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시인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오늘의 우리 시를 위해서 다행한 일”이라고 상찬했다.
김영재 시인의 ‘바늘귀’에 대해서는 “ 초장의 열고 중장의 펼치며 종장에 닫는 기본 보법을 충실히 지키면서도 시인 특유의 작법 태도인 상의 비약까지 잘 갈무리하고 있다”고 밝혔으며, 이경철 평론가의 평론집에 대해서는 “지난 110년의 한국현대시를 망라하고 있다는 점에서 거시적인 체계를 세우려 했고 이는 충분히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수상소감에 대해 이재무 시인은 “요새 부처의 향기가 난다는 불암산을 하루 1, 2번 오르내리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다. 아주 산을 내려가 세상 어디를 주유하든 나는 이미 내 몸 안쪽에 자리한 불암산을 오르내리며 산이 주는 지혜를 잊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김영재 시인은 오현 스님의 그리며 수상 소감을 마무리했다. “마냥 기쁘지 많은 않다”고 운을 띄운 그는 “나의 시조를 과분하게 칭찬해주시던 그분, 오현 스님이 내 곁에 안 계신다. 그분께 자랑하고 싶어도 자랑할 수 없다. 슬프다. 이 상을 오현 스님 앞에 두 손 받들어 올린다”고 말했다.
이경철 평론가는 “월명사의 ‘도 닦아 기다리겠다’는 불심(佛心)과 미당의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는 시심(詩心)에 무슨 차별과 등급이 있겠는가”라며 “불교의 원만하고 한량없는 인본주의 세계가 시세계의 궁극과 같음을 실감했다”고 밝혔다.
한편, 제17회 유심작품상 시상식은 오는 8월 11일 동국대 만해마을에서 열리며 각 부문 수상자에게는 각각 1500만원의 상금이 수여된다.
공주시(시장 오시덕)가 지원하고 풀꽃문학상운영위원회(위원장 이준관)가 주관하는 제2회 풀꽃문학상 수상자가 결정됐다.
8일 풀꽃문학상운영위원회에 따르면 지난 6일 공주문화원에서 이건청(한양대 명예교수), 이숭원(서울여대 교수), 윤효(시인) 등 3명의 심사위원이 심사한 결과, 본상 부문에는 이재무 시인의 시집《슬픔에게 무릎을 꿇다》(실천문학사)가, 젊은시인상 부문에는 안현심 시인의 《연꽃 무덤》(서정시학)이 결정됐다.
심사위원들은 두 수상자를 결정함에 있어 인생과 자연에 대한 아름다우면서도 진정성 있는 시심에 만장일치로 찬사와 지원을 보냈다. 시상식은 오는 16일 오후 2시 공주풀꽃문학관 개관기념식 행사장에서 더불어 열릴 예정이다.
한편 이번 풀꽃문학상을 위해 지난달 말까지 공주문화원에 자천타천으로 2014년과 2015년 출간된 시집을 대상으로 접수된 시집은 총 66권이었다. 그 중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려진 시집은 본상 부문 젊은시인상 부문 각각 6권이었다.
마을 회관 한 구석 고물상 기다리며 한 마리 늙고 지친 짐승처럼 쭈그려 앉은, 흙에서 한 때 쟁기가 되어 수만 평의 논 갈아엎을 때마다 무논 젖은 흙들은 찰랑찰랑 얼마나 진저리치며 환희에 들떠 바르르 떨어댔던가 흙에 생 담궈야 더욱 빛나던 몸 아니었던가 논일 끝나면 밭일, 밭일 끝나면 읍내 장터에, 면사무소에, 군청에, 시위 현장에 부르는 곳이면 가서 제 할 도리 다해온 그였다 눈 많이 내렸던 그해 겨울밤은 만취한 주인 싣고 오다가 멀쩡한 다리 치받고 개울에 빠져 저 세상으로 먼저 보내고 저 또한 팔 다리 빠지고 어깨와 허리 크게 상하기도 했던 돌아보면 파란만장한 노동의, 그 오랜 시간을 에누리 없이 오체투지로 살아온 그가 오늘은 바람이 저를 다녀갈 때마다 저렇듯 무력하게 검붉은 살비듬이나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몸의 기관들 거듭 갈아 끼우며 겨우 오늘에까지 연명해온 목숨 아닌가 올 봄 마지막으로 그가 갈아 만든 논에 실하게 뿌리내린 벼이삭을 달디단 가을 볕 쪽쪽 빨아마시며 불어오는 바람 출렁, 그네 타는데 때 늦게 찾아온 불안한 안식에 좌불안석인 그를 하늘의 깊은 눈이 내려다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