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하기의 역 / 허수경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우리는 만났다
얼어붙은 채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내 속의 할머니가 물었다. 어디에 있었어?
내 속의 아주머니가 물었다. 무심하게 살지 그랬니?
내 속의 아가씨가 물었다. 연애를 세기말처럼 하기도 했어?
내 속의 계집애가 물었다. 파꽃처럼 아린 나비를 보러 시베리아로 간 적도 있었니?
내 속의 고아가 물었다. 어디 슬펐어?
그는 답했다. 노래하던 것들이 떠났어
그것들, 철새였거든 그 노래가 철새였거든
그러자 심장이 아팠어 한밤중에 쓰러졌고
하하하, 붉은 십자가를 가진 차 한 대가 왔어
소년처럼 갈 곳이 없어서
병원 뜰 앞에 앉아 낡은 뼈를 핥던
개의 고요한 눈을 바라보았어
간호사는 천진하게 말했지
병원이 있던 자리에는 죽은 사람보다 죽어가는 사람의 손을 붙들고 있었던 손들이 더 많대요 뼈만 남은 손을 감싸며 흐느끼던 손요
왜 나는 너에게 그 사이에 아무 기별을 넣지 못했을까?
인간이란 언제나 기별의 기척일 뿐이라서
누구에게든
누구를 위해서든
하지만
무언가, 언젠가, 있던 자리라는 건. 정말 고요한 연 같구나 중얼거리는 말을 다 들어주니
빙하기의 역에서
무언가, 언젠가, 있었던 자리의 얼음 위에서
우리는 오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이처럼
아이의 시간 속에서만 살고 싶은 것처럼 어린 낙과처럼
그리고 눈보라 속에서 믿을 수 없는 악수를 나누었다
헤어졌다 헤어지기 전
내 속의 신생아가 물었다. 언제 다시 만나?
내 속의 노인이 답했다. 꽃다발을 든 네 입술이 어떤 사랑에 정직해질 때면
내 속의 태아는 답했다. 잘 가
TBC는 제15회 이육사 시문학상 수상자로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의 저자인 허수경 시인을 선정했다고 24일 밝혔다.
이 상은 민족시인 이육사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생애와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TBC가 2004년부터 매년 수상자를 선정한다.
최종심사는 고진하, 신달자, 이기철, 천양희 시인과 정과리 문학평론가가 맡았다.
이들은 "허수경 시인의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는 이국 생활의 애환과 고뇌를 담았다"면서 "시인은 20년 이상 독일에서 생활하면서도 모국어를 잊지 않고 갈고 닦아 수상자로서의 자질이 충분하다"고 평가했다.
허수경 시인에게는 상금 2000만원이 주어진다. 시상식은 오는 7월28일 경북 안동 이육사문학관에서 열리는 이육사문학축전과 함께 진행한다.
경남 진주 출신의 허수경 시인은 경상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뮌스터대학교 고대고고학 박사를 거쳤다.
그는 제6회 전숙희문학상, 제14회 동서문학상을 수상하며 이름을 알렸다.
대표 시집으로는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등이 있다.
'국내 문학상 > 이육사시문학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7회 이육사시문학상 / 이재무 (0) | 2021.07.16 |
---|---|
제16회 이육사시문학상 / 박철 (0) | 2021.07.16 |
제14회 이육사시문학상 / 이하석 (0) | 2021.07.16 |
제13회 이육사시문학상 / 김해자 (0) | 2020.10.05 |
제12회 이육사시문학상 / 김소연 (0) | 2015.08.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