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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사발 속 섬에 사는 이에게 / 이병철

 

 

막사발에 달 떴다 노릇노릇한 달이 무인도처럼 탁주 위에 혼곤하다 술잔에 달빛 섬 띄워 놓고 자암의 외로움도 꽃 지듯 붉었겠다 쌀독에 얄팍하게 쌓인 쌀을 불려 술 담근 게 지난여름 일이다 누룩이 별을 흉내 내며 허연 쌀물 위에 어리비치더니 귀뚜리 울음 먹고 달짝지금한 빛으로 찰랑였다 술맛에 마음이 좋아 부엌을 함부로 구르던 개다리소반 절름발에 못을 박았다 반짇고리를 얻어 와 구멍 난 속곳들을 기웠다 탁주 한 사발ㅇ 고인 소낙비와 우레와 폭설이 대견하여 눈시울이 젖었다 다 지나간 일이다

 

얄궂은 두견새 밤 새워 노래하는 부리 끝에 어스름이 물려 있다 뒤란 대숲을 흔드는 바람 무성해지니 잠설친 고양이가 마당을 어슬렁거린다 고양이는 수염을 반짝이다가 막사발 내려놓는 소리에 놀라 지붕 위로 오른다 그 기척에 두견새 날아가 버린다 내 마음에도 텅 빈 마당이 있어 작은 발소리에도 반가움이 소스라치는 것일까 막사발 속 달빛 섬에 유배된 이가 누구인지 짐짓 궁금하다

 

술잔 속에서 나를 보는 누빛이여 막사발에 놋수저 부딪는 소리 쨍쨍 울리면 뒤란에 진 작약으로 화전을 구워 오시게 지상에서 가장 외로운 노을도 같이 이끌고 오시게나 나도 한껏 취하여 젖은 마음을 내어 말리고픈 것이리라 맑은 취기로 헹궈진 머릿속을 홍매화가 피어도 꽃술 죽어 벌 나비 부를 수 없는 내 처지를 읽어 주오 그대가 띄워 보낸 웃음 휘휘 저어 단숨에 술잔을 비우고 보니 그대는 없구나 탁주의 출렁임 따라왔다가 가시는 이 누구인가

 

 

 

 

제7회 김만중문학상 시 부문 수상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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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201661일부터 한 달간 공모한 제7회 김만중문학상 시 부문에는 모두 268분이 시와 시조를 포함하여 2,390편을 응모하였다. 응모한 작품들 중 서포의 유배 생활을 제재로 삼은 작품들, 바다를 시적 공간으로 삼은 작품들이 많았고 세월호를 거론한 작품들도 적지 않았다. ‘김만중문학상이라는 문학상의 이름을 고려한 때문이고, 시대의 아픔을 절실하게 받아들이는 시인들의 어진 마음 때문이라고 생각되었다.

 

세 명의 심사위원들은 응모작들 대부분이 일정 정도의 성취를 보여주고 있으나 언어의 날카로움이나 인식의 새로움보다는 식상함이랄까 진부함을 벗어나지 못하는 게 흠이라고 판단하였다. 오랜 습작과 훈련을 했으리라 짐작되는 작품들이 더러 있었지만, 자동화된 표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점이 아쉬웠다. 새로움에 대한 강조가 지나칠 경우 자칫 강박으로 여겨질 수 있겠으나, 익숙함에 균열을 일으키며 기존의 시들과는 차별화된 시를 보고 싶은 것은 비단 심사자들만의 바람은 아닐 것이다.

 

응모 작품들을 돌려 읽은 후에 심사자들은 <막사발 속 섬에 사는 이에게>, <물방울의 발설>, <또 감자를 삶습니다>, <무덤의 형식>, <어깨와 엉덩이>, <섬이 유배를 오다>, <나의 오이디푸스>를 표제작으로 삼은 7분의 작품들을 논의 대상으로 삼았다. 논의 끝에 <막사발 속 섬에 사는 이에게>, <물방울의 발설>, <또 감자를 삶습니다>가 최종적으로 거론되었는데, <또 감자를 삶습니다>의 경우 응모 작품들의 수준에 편차가 적지 않은 것이 제외의 이유가 되었다.

 

<막사발 속 섬에 사는 이에게> 외의 작품들은 대상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섬세한 시선을 갖추었다. 자칫 지루하거나 평이하게 읽히기 쉬운 산문시의 리듬적 자동성을 감각적 언어를 통해 지연시킴으로써 시를 되읽게끔 하는 힘을 갖춘 것도 미덕으로 평가되었다. <물방울의 발설> 외의 작품들은 언어표현의 활달함과 자유로운 연상의 힘을 갖춘 점을 좋게 평가하였다. 선정된 두 분께 축하를 드린다.

 

심사위원: 성춘복, 강희근, 장만호

 

 

 

오늘의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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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군이 5, 7회 김만중문학상 당선작을 발표했다.

 

올해 김만중문학상의 영예의 금상 수상자는 소설 부문에 마지막 메이크업의 이서진 작가, ·시조부문에 막사발 속 섬에 사는 이에게6편의 이병철 시인이 각각 선정됐다.

 

이외에 소설부문 은상은 단편소설 너의 목소리1편의 김민주 작가, ·시조부문 은상은 물방울의 발설6편의 강태승 시인이 각각 선정됐다.

 

·시조부문은 총 2390편이 응모됐으며, 성춘복 부위원장을 비롯한 강희근, 장만호 심사위원이 당선작을 선정했다.

 

심사위원들은 금상 수상작인 막사발 속 섬에 사는 이에게6편의 작품들이 대상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섬세한 시선을 갖췄으며 산문시의 리듬적 자동성을 감각적 언어를 통해 지연함으로써 시를 되읽게끔 하는 힘을 갖췄다고 호평했다.

 

또 은상 수상작인 물방울의 발설6편은 언어표현의 활달함과 자유로운 연상의 힘을 갖췄다고 평가했다.

 

남해군은 이번 제7회 김만중문학상 당선작을 책으로 발간할 예정이며, 오는 111일 유배문학관 개관일에 맞춰 시상식을 개최할 예정이다.

 

각 부문별 금상과 은상 수상자에게는 상패와 함께 각각 15백만 원과 1천만 원의 상금이 수여된다.

 

한편 남해군은 서포 김만중 선생의 작품세계와 문학정신을 기리고 유배문학을 계승 발전해 한국문학발전에 기여하고자 지난 2010년부터 매년 김만중문학상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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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한 짐승을 위하여 / 이병철

 

 

나는 활짝 열린 가슴

 

나는 저문 겨울 잔설을 녹이는 햇볕

이른 봄 먼저 여는 젖은 꽃망울

 

나는 연초록 새순에 맺힌 아침이슬

그 이슬방울에 비친 영롱한 우주

 

나는 떨림으로 가닿는 손길

온 밤을 지새는 그리움

 

나는 심장에서 타오르는 불꽃

그 꺼질 줄 모르는 열정

 

나는 땅을 딛고 하늘로 솟구치던 신명

푸른 칼날이 서늘히 목에 닿을 때에도 미소 짓던

환한 그 기쁨

 

나는 마르지 않는 생명의 샘

길어 올릴수록 더 맑게 샘솟는 시원의 우물

목숨이 목숨을 잇는 끊김 없는 모진 길을 이어

더 짙푸르게 흐르는 강

 

나는 생명의 강을 품은 대지

 

그 대지를 움켜쥔 질경이 뿌리

나는 네발로 대지를 딛고

온 몸 솟구치는 기운으로

이 산 저 벌판을 거침없이 내닫으며

싸늘한 달빛아래 하늘 우러러 포효하던

한 마리 짐승

 

가슴에 품은 하늘 그 아득함의 깊이로 전율하던 짐승

 

이제 나는

다시 그 대지에 무릎 꿇고

더운 가슴으로 눈부시던 하늘 향해 제사하며

잊혔던 하늘 길 새롭게 여는 짐승

 

마침내 다시

나는 신령한 짐승이다.

 

 

 

 

신령한 짐승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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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림청(청장 김재현)‘2019년 제8회 녹색문학상에 시인 이병철의 시집 신령한 짐승을 위하여와 아동 문학가 정두리의 동시집 별에서 온 나무를 선정했다.

 

녹색문학상()한국산림문학회가 산림청의 지원을 받아 숲 사랑·생명 존중·녹색 환경 보전의 가치와 중요성을 담은 문학 중 국민의 정서 녹화에 크게 기여한 작품을 발굴하여 주는 상이다.

 

올해는 192건의 작품이 추천되어 11(2, 동시 3, 소설 1, 수필 5)이 본선에 올랐다.

 

시인 이병철은 1949년 경남 고성 출생으로, 2007년 시집 당신이 있어로 등단하여 흔들리는 것들에 눈 맞추며’(2009) 5권의 시집과 산문집 밥의 위기, 생명의 위기’(1994) 6권의 산문집의 저서가 있다. 현재 ()전국귀농운동본부 생태귀농학교 교장과 지리산 생태영성학교 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아동 문학가 정두리는 1947년 경남 마산 출생으로 1982<한국문학> 시 부문 신인상을 수상, 1984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으로 등단했다. ‘기억창고의 선물8권의 시집과 시선집 파랑주의보’, 동시집 소행성에 이름 붙이기24권의 저서가 있으며, 초등학교 국정 국어 교과서에 '떡볶이' 6편의 동시가 수록되어 있다. 또한 새싹문학상(1985), 방정환문학상 (2004), 윤동주 문학상 (2017) 등을 수상한 이력이 있다.

 

시상식은 오는 117일 오전 1030'문학의 집·서울- 산림문학관'에서 열리며, 수상자에게는 각 1500만 원의 상금이 주어진다.

 

송경호 산림휴양등산과장은 녹색문학상의 공정하고 투명한 운영을 위해 우리나라 대표 문학단체인 한국문인협회, 한국작가회의, 국제 PEN 한국본부, 문학의 집·서울 관계자 등이 올해 녹색문학상운영위원회 운영 위원으로 참여했다.”라면서 앞으로 녹색문학상을 더욱 큰 문학상으로 성장시켜 산림 문화 저변을 확대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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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선을 걷는 장화들 / 이병철

 

 

파랗고 맑은 냉기에도 코가 얼지 않는 우리는

언제나 싱싱한 뒤축으로 수평선을 걷는 장화들이다

그중에서도 나는 수심(水深)이 깊어질수록 바다의 과거를 잘 기억하는

오래된 가죽장화, 유빙에다 이마를 닦아 물광을 내며

아열대의 꽃잎을 흉내 내는 크릴새우를 쫓아다닌다

우리는 발목도 없이 발가락도 없이 난류에서 한류로 행진한다

캄브리아 시절에 따뜻한 바다 위를 걸어가던 신들이

탁족(濯足)을 하려고 장화를 벗어 놓았는데

그게 그만 바다에 빠져 밍크고래들이 된 것을

나는 다 발설해버리고 말았으니,

우리는 구멍으로 물숨을 쉬는 끈 없는 장화들

옆구리에다 파도를 주먹밥으로 뭉쳐 매달고 다니면

장화를 바느질하려는 수선공들을 만나기도 한다

태양에 달군 뾰족한 쇠가 내리꽂혀도

유선형의 몸은 능글능글한 데가 있어 작살을 바다로 흘려버린다

물빛 발자국들을 한꺼번에 연안으로 몰고 가면서 우리는

가죽나팔을 길게 분다, 높고 고운 소리 너머로

깨진 유리 바다가 일어서도, 장화들은 끄떡없다는 듯이

 

 

 

 

오늘의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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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평택 생태시 문학상’은 평택시와 한국문인협회 평택지부가 자연생태계의 환경보존과 그 가치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자 하는 취지로 비롯되었다.

 

심사기준은 인간에 의한 자연생태파괴, 환경파괴, 생명 순환질서 파괴, 인간존엄성 상실 상황에서 재생태계 질서회복에 중점을 두고 있다.

 

네 번째의 ‘생태시 문학상’을 심사하며 다섯 명(이귀선, 진춘석, 배두순, 김영자, 유병만)의 심사위원들은 즐거운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맙고 유쾌한 일이었다. 응모자도 많고 전체적인 수준이 높아 한 편 한 편 탐독하는 시간도 많이 소요되었다.

 

이번 공모전에는 모두 347명이 응모하였으며 예선과 본선, 두 번의 심사를 거쳐 최종 다섯 명의 작품을 두고 치열한 점수제를 운용하여 이병철 시인의 《수평선을 걷는 장화들》을 대상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심사위원들은 이병철 시인의 작품들을 폭 넓은 상상력과 사유의 깊이를 신선하게 표현하여 생태시의 수준을 높이고 있음을 시사했다. 응모한 세 편의 작품이 모두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 심사위원들의 만장일치를 얻어냈다. 활달하고 톡톡 튀는 이병철 시인의 무궁한 상상력과 표현력이 생태시의 폭을 한층 더 넓혀주고, 다양한 이미지의 변형은 재미까지 더해주고 있다.

 

최종심사까지 올라와 경합을 벌인 작품으로는 ‘잇구멍의 숲’, ‘요정의 원’, ‘몽고반점을 새긴 바위’등이다. 모두 탄탄한 내공을 가진 작품들이어서 내려놓기가 아쉬웠다. ‘평택 생태시 문학상’에 응모한 모두의 열정에 감사드리며 당선자에게는 축하의 박수를, 낙선자에게는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 심사위원 배두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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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혈목이의 책장 / 이병철

 

 

당신은 풀잎 위에 누워 돌을 떨어뜨리고 있었어요 나는 당신 귀밑머리에 매달린 하얀 박쥐들을 떼어냈고요 우리의 책은 폭설을 쏟아내고 있었지요 마른 혀도 꽃이 될 수 있을까요 그때 바람이 입 속으로 들어왔어요

 

바람이 갈비뼈를 두드리자 피아노 소리가 났어요 소리가 빚어낸 동전 몇 닢 손에 쥔 하늘은 구름을 보름달솥에 고았지요 어둠이 우러났어요 별가루 뿌리고 배추흰나비와 벚꽃잎 고명 얹은 국 한 사발 떠 주었지요

 

국을 들이킨 당신은 은어 떼 헤엄치는 수박 향기로 반짝였지요 당신이 흘러든 풀섶에서 유혈목이가 기어나와 내 품을 파고들었어요 책장엔 진달래꽃 피어났고요 알몸을 포갠 우리는 따뜻한 무덤이 되어갔지요

 

 

 

 

오늘의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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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부끄럽지 않은 행복한 시인 될 것

 

이십대의 모든 날들을 시 쓰기에 바쳤습니다. 시가 돈이 되지 않아도 행복했습니다. 아무도 걷지 않은 오솔길의 임금이 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서른 살이 되자, 돈이 되지 않는 시를 계속 붙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멀리 달아났습니다.

 

하지만 달아나면 달아날수록 시는 더 강하게 저를 잡아당겼습니다. 돌아선 뒤통수에 쏟아지는 시의 따가운 눈총이 미안하고 괴로워 몹시 취해버린 밤도 많았습니다.

 

계절이 바뀌는 저녁에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제 나름으로는 갈림길에서 받은 전화였습니다. 용기와 힘, 그리고 막막한 두려움이 동시에 제 가슴에 불을 밝혔습니다. 그 불빛을 의지해 뒤돌아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화는 시가 걸어온 것이었습니다. 서른 살에 세상을 떠난 김유정 선생이 걸어온 것이었습니다. 누나 집에 얹혀살며 늑막염으로 괴로워하던 가난한 청년, 치료비도 없이 병과 문학을 함께 키워야 했던 김유정 선생을 떠올려봅니다.

 

선생은 절망 가운데서도 결코 문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나이 서른 살 짧은 생애였지만, 선생이 남긴 문학은 위대한 것이었습니다. 김유정 선생의 서른한 살, 서른두 살을 제가 살아낸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읽고 쓰겠습니다.

 

선생으로부터 걸려온 전화 한 통을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숨이 여린 작품을 잡아 일으켜 근력과 호흡을 불어 넣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언제나 온화한 미소로 격려해주시는 이승하 교수님, 제겐 아버지와도 같으신 이경교 교수님, 시 쓰기의 즐거움을 알게 해주신 장석주 선생님께 감사 드립니다. 명지전문대, 서울과기대,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의 모든 선생님들께 감사 드립니다. 부끄럽지 않은 제자가 되겠습니다. 행복한 시인이 되겠습니다.

 

 

 

 

[심사평] 응축·변주·확장 탁월한 수작

 

본심에서 세 분의 작품을 거론했다.

 

먼저 <죽은 시인의 사회> 11편을 투고한 심상숙의 작품들에선 시적 포즈나 비의 같은 것에 욕심 부리지 않고 문장을 끌고 가는 정서의 힘이 느껴졌다. 시인이 관찰하는 인물, 사건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심이 남다른 묘사 문장을 탄생시켰다.

 

그렇지만 어떤 시들은 기행문이나 산문 같았다.

 

<비의 기원> 4편을 응모한 민경란의 시는 다른 응모작들에서 흔히 보이는 상투적인 우화 만들기, 한결 같은 감상적 정서를 훌쩍 벗어나 주변 공간 묘사에 의지해 자신을 표현하고, 해부하고, 고백하는 남다른 표현법을 갖고 있었다. 자신만의 표현법, 자신만의 문장 구사 방법을 갖고 있다는 것은 자신만의 언어 세계를 갖고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일 것이다.

 

하지만 일상적 대화 수준으로 떨어져 버린 문장의 나열이 들어있는 <광염소나타> 같은 시가 신뢰를 떨어트렸다. <유혈목이의 책장> 4편을 응모한 이병철의 시들은 어떤 순간에 집중하여 그 순간을 증폭시켜 이미지의 정원으로 확장하는 시적 구축의 방법이 흥미로웠다. 이를테면 네 입술이 닫히는 순간 세상의 문들도 닫히, ‘추억 속 고통은 무슨 힘으로 밝히지?’하고 고통스럽게 질문하다가 뒤틀리고 찢겨진 살결을 보이며 검게 물든 엽록소를 배설할 거야’(<일기예보>) 라고 다짐하는 장면에 이르는, 시적 언술의 연속이 작은 한순간에서부터 독자를 이끌고 가 확장된 시의 이미지 공간에 부려 놓는 힘이 느껴졌다.

 

그러나 <비 개인 저녁의 안부 편지>에서처럼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센티멘탈하기만 할 때는 시를 쓴 의도를 의심하게 했다.

 

논의 끝에 이미지의 응축과 변주, 확장이 시의 문장들에 깃들게 함으로써 시적 긴장이 발생하게 한 <유혈목이의 책장>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 심사위원 정현종·김혜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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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스무살의 열차 / 이병철

 

 

너는 차창 위로 그림을 그리다

새벽보다 축축한 잠에 빠졌다

그림자 같이 어둡게 기운 어깨 아래

네 손은 얇은 책장처럼 떨렸고

나는 첫 장을 넘기듯 조심스레

작은 네 손에 뜨거운 지문을 새겼다

 

밤바람 달리는 녹슨 철로는

별빛 스러지는 안개의 통로이자

누군가 밟고 지나간 질척한 눈길

열차는 흐릿한 눈을 뜨고

쓸쓸한 어둠을 향해 주행을 재촉했다

 

무서운 꿈이 가슴을 짓누르는 밤

너는 엷은 숨을 내쉬는 어린아이처럼

내 어깨에 피곤한 머리를 기대고 잠들었다

열차가 기억의 간이역을 지나자

하늘의 뒷면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눈을 뜬 아침은 죽음 같은 잠을 깨부숴

어둔 너의 그림 위에 밝은 물감을 덧입혔다

 

열차가 멈춰 서자 우리는

아지랑이 같은 입김을 일으켜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갈색 언덕을 향해 달려갔다

우리의 숨결을 잠재울 계절이 오기 전

벌써 내일의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오늘의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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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동양전통은 말에 대해서 가혹하다. 그것은 말의 불완전함을 단정하고 있다. 동양에서의 말의 사건은 이미 종결처리된 사건이다. 그래서 노자는 “말하여질 수 있는 도는 도가 아니”라고 했다. 불가에서는 아예 말 자체를 버려버린다. 정말 냉정하고 과격한 철학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언어는 상대적인 것만 표현할 뿐 절대적 진리를 담을 수 없다’는 노자의 사상은 도교적 미의식뿐 아니라 동양의 미의식을 대변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말 할 수 없다면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얘기하고 있다. 우리는 심사하는 과정에서 노자의 미의식과 공자의 미의식 사이에서 고민했다. 말해지지 않음을 극복하는 사유의 깊이와, 말해야 하는 인식의 철저함이 아쉬웠다. 그것은 응모된 작품들이 모두 이러한 한계에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메시지가 강한 작품은 사유의 깊이에서 오는 시어의 독특함이 부족했고 시를 잘 만들어내고 있는 작품들은 인식의 철저함에서 오는 성찰이 부족했다. 사유가 생각의 논리적 전개라면 철저한 인식은 사유를 깊고 절실하게 만드는 힘이다. 그런 점에서 박창호씨의 `표류'는 끝까지 논란이 되었던 작품이다. 그러나 시를 만들기에 급급해 내용이 형식을 얻지 못하여 표류하고 있는 게 흠으로 지적되었다. 그 반면에 정경희씨의 작품들은 사유와 인식의 깊이에 있어서 이미 기성시인이었다. 그러나 페이소스 가득한 스냅사진이란 혐의에서 우리는 이 시인을 더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이병철씨의 `여행, 스무살의 열차'는 기성의 어떤 유행에도 물들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 작품을 주목했다. 상황에 대한 묘사와 통제가 적절히 이루어져 개인적인 삶의 어느 한때를 보편성 있게 설득하는데 성공하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다듬어지지 않은 표현들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어 크게 아쉬웠다. 시에는 숨김이 없어야 한다. `생각에 삿됨이 없다’는 말은 시는 솔직해야 한다는 말이고 그 솔직함이란 지금의 자신까지도 부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 부정의 불온성이야말로 시를 시대의 가장 예민한 촉수로 만드는 근거이다. 우리는 그 근거를 더 기다리기로 했다.

심사위원 함성호·서준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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