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의 입 / 신유야
이사하기 삼일 전 미리 빈 집을 둘러보았다
물은 잘 나오는지 보일러는 잘 돌아가는지
일행과 나누는 소리가 벽에 퉁겨 되돌아왔다
이사를 하고 살림의 자리를 정해주고 소리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살림들이 소리를 먹고 있었다
집들이 손님의 왁자한 소리를 먹고
소리 몇 개는 아래층으로 흘러 경고를 듣기도 했다
살림들이란 주인의 소리를 삼키며 둥글어지는가
어떤 밤이면 내 말이 맞다며 딱, 무릎 치는 낡은 장롱
어릴 때는 이 소리가 무서워 어머니 가슴팍을 파고 들었는데
언제부턴가 어머니 무릎에서도 이 소리가 났다
어머니 쓰시던 문갑에 등을 대고 잠들면
겨울날 옷 속에서 훅 솟구치는 살내 같은 것이
이마를 가만히 짚어 오기도 하고
살림의 틈서리, 수천의 입으로 삼킨 소리는 어디로 간 것인가
30년 후 내 딸아이의 이마를 짚고 있는 것인가
구들장처럼 식지 않는 몸의 온기
나이기 이전의 생부터 천천히 데워 온
어머니의 장작 같은 손바닥을 찾아간 것인가
새 집에서 쉽게 잠들지 못하고
20년 전의 어머니와 10년 후 딸아이
지금은 세상에 없는 두 사람을 생각한다
잠든 척 가만히 오래 묵은 살림의 그림자
길게 목을 빼고 내 가슴에 귀를 대고 있는 줄도 모르고.
[당선소감]
어둠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빛이 온몸을 휘감아 도는 동안에도 내 안에 웅크리고 앉아 세상을 더듬거리게 했다. 생각의 끝으로 더듬어지는 것들의 정체를 궁금해하고, 두려워하고, 뒷걸음쳐 도망치다가도 어둠에 걸려 휘청거리는 일이 배멀미처럼 나에게는 어둠 멀미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멀미도 오래 견디다 보면 이력이 붙는 것일까.
어둠 속에서 별이 하나 둘 보이고 그 별빛이 어둠이 슬며시 내미는 손으로 느껴질 때는 더듬거리던 생각의 끝이 환하게 젖어 드니 말이다.
아침부터 나물을 다듬고 찌짐을 붙이며 제사음식을 막 마무리 지을 무렵 전화를 받았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먼 곳에서 어둠 속을 헤매다니느라 수고했다며 잔치를 벌여주실 생각이셨을까.
잘 알지 못하는 어둠을, 어쩌면 영영 잘 알지 못한 채 남게 될지도 모르지만 겁내지 말고 들어가 보라는 격려의 말씀을 오늘 밤에는 하고 가실 것 같다.
그리운 사람들의 안부가 궁금하고 고마운 사람들의 손을 꼭 잡고 싶다. 그 사람들에게 된장찌개라도 맛있게 끓여 맛있지? 맛있지? 묻고 또 물으며 그릇 밑바닥이 보일 때까지 서로의 숟가락을 부딪치고 싶다.
많이 부족해서 힘이 난다면 우스운 말이 될까. 가슴 가득 힘을 넣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감사드리며 강원도의 눈길에 내 발자국을 꼭꼭 찍어보고 싶다.
- 애드픽 제휴 광고이며, 소정의 수수료를 지급 받을 수 있습니다.
[심사평]
어떤 원로시인이 요즘 시인들은 자신에 대하여 분노하지 않는 것 같다는 말씀을 듣고 부끄러움을 느낀 적이 있었다. 해마다 응모 편 수는 늘어도 올 신춘문예 역시 문학적 분발이나 열정 같은 건 찾기 어려웠다.
응모작의 특징을 몇 가지로 분류해보면 우선 그 내용에 있어서 격랑하는 세계의 모습이나 당대를 아우를 만한 서정성을 다룬 작품이 드물었다. 공허한 말 잔치나 미시적 내면투시의 현상들은 오늘의 문단의 반영일 것이고, 응모의 형태면으로 볼 때 여러 곳에 투고하기 때문에 작품 수가 모자라 그런지 제일 앞에 놓은 그럴싸한 작품 한 두 편을 빼고는 제대로 된 작품이 없는 응모자가 많았다. 이것들은 이른바 `선수'들이 요행을 바라고 하는 일 일텐데 문학에는 요행이 없다. 종합해보면 응모자들 대부분이 문학을 매우 가볍게 혹은 장난스럽게 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인터넷 글쓰기의 영향일 수도 있다. 어쨌든 시인은 세상 사람들을 대신하여 세상의 기쁨과 슬픔을 노래하라고 붙여준 아주 오래된 이름인데 이 이름을 얻겠다는 이들의 진지함이 아쉬웠다.
예선에서 넘어 온 17명 중 마지막까지 남은 건 신유야 조혜경 최선호 강전욱 노미경 다섯 사람이었다. 노미경은 행마다 거리 풍경이 가득한데도 왜 `눈사람'이 무기력하게 읽히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보았으면. 강전욱의 시편들은 따뜻하고 능청스럽고 재미있다. 그러나 산문과의 다른 점이 무엇인지. 최선호의 `희망 한품'은 똑 떨어지게 된 작품이다. 그렇지만 여타의 작품들이 그 점수를 깎아먹고 있다. 기행시들이 지니는 상투성이 문제이긴 하지만 조혜경은 `사북을 지나며'가 특히 좋았다. 마지막으로 신유야의 작품 중, 첫 번째 연의 난삽함만 아니었다면 나는 `겨울로 가는 길'을 당선작으로 뽑고 싶었다. 그러나 새로 이사 갈 집에 먼저 가서 거기서 살다간 사람들과 살아 갈 나의 생과 삶, 그런 속삭임들을 빈방의 반향에서 들어보는 `살림의 입'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거기에 인생이 들어 있어서였다. 모든 응모자들의 정진과 대성을 빈다.
- 심사위원 이상국
'신춘문예 > 강원일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6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 이병철 (0) | 2011.02.09 |
---|---|
2005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 최재영 (0) | 2011.02.09 |
2003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 장시우 (0) | 2011.02.09 |
2002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 고현수 (0) | 2011.02.09 |
2001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 박민수 (0) | 2011.0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