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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국 / 최옥선


새벽부터 뒤란이 어수선하다.

나이 들수록 모든 게 서럽다는

친정 어머니.

큰 귀 열어 하소연 들어주는 이는

아득한 중생대에도 살았다는

전설의 은행나무.


한무리의 가을바람 가지를 흔들자

무수히 쏟아져 튀는 황색 공모양.

쪼그라든 어머니 젖가슴 같아 한참

웃었는데, 덩달아 웃는 어머니의

붉은 잇몸. 휑하다.


곰삭은 간장게장에 모조리 빠져버린

틀니.

노련한 의사는 뼈대 세워 시술하는

임플란트 밖에 길이 없다고 했다.


억새 엮은 지붕 아래.

제비처럼 일제히 입 벌리는

일곱 남매.

옹기물확에 보리쌀 갈아 안친

까실한 밥.

연시보다 말랑하고 달보드레하게

씹어 먹여주던 어미새.


정수리 벗겨지도록 물동이 이고

오르던 아픈 시절을 기억하는

것일까.

파근한 다리 펴고 앉아 설핏 잠든

어머니의 애잔한 어깨

가느다랗게 떨린다.


어머니의 지나온 세월의 자국마다

눈물과 한숨 가득 고여있다.

나또한 그 자국따라 걸어갈 것이다.


우렁이처럼 단물 다 빨아먹혀

처참하게 무너져내린 잇몸속.

공룡이 밟아도 튼튼한 뼈대 세워

희고 가지런한 이

심어 드려야겠다.




주름 / 박상희


오랜 세월과 한여름 뙤약볕이 키워낸

텃밭으로 장을 보러 나선다

보랏빛 가지에서 알싸한

어린시절 들춰내어 귀를 담근다


커다란 주전자와 둘둘말은 돗자리

옆구리에 끼고

넓적한 바위와 까마중 한 쟁반에

한나절을 내 맡겼던

쌉싸래한 기억들


거미줄같은 도시를 돌며

자전거로 육남매를 키우신 아버지

지금 아버지는

주름같은 고랑사이를 오가며

옥상에 또 다른 가정을

꾸리고 계신다

퉁퉁부은 다리를 끌며

힘든 세상살이에

꼭 껴안아 주지 못했던

땟국물 같은 어린 것들

이제라도 보듬어 주듯

햇빛을 다닥다닥 붙여가며

온갖 색깔의 야채와 푸성귀들을

가슴에 싱그러운 그리움을 담아

키우고 계신다

이 녀석들 키우시는 즐거움에

칠순을 훌쩍 넘긴 아버지

아직도 까만머리 소복하시다


텃밭 한곁

키가 줄어든 느티나무에 기댄

목단 한 그루

봄날 가신 어머니 얼굴 보려

심으시고

늘어진 호박 울타리

갈곳없는 거미 한쌍에게도

자리를 내어 주신다


지금 아버지는

토마토와 가지가 영글었던 자리에

고갱이가 노랗게 차오를

배추를 심고

젊을 적 그 마음으로

주름진 페달을 밟고 계신다




주름 / 김영숙


땔감으로 잘라놓은 나무토막에

길이 빼곡하게 패여 있다

벌레들이 지나간 길이다

구불구불,

언젠가 딱정벌레 한 마리가

나무껍질을 뚫고 들어가

나무줄기에 보금자리를 마련했을 것이다

벌레는 수액을 빨아먹으며 알을 낳았을 테고,

애벌레는 제 어미가 알을 죄 쏟고

빼빼 말라가는 동안

단물을 삼키며 몸집을 키웠을 것이다

등딱지가 딱딱해지고

이빨이 단단해질수록

나무토막에 난 길은

더 넓어지고 더 깊이 패였다

나무는 제 몸을 깎아

벌레를 키우고 무늬를 만들었다

벌레가 낸 눅눅한 길에는,

잘못 내고 뒤틀린 길은 없다는 듯

떨어진 날개 파편이

되새김질하듯 일렁이고 있었다

저만치 바람 지나는 끝자락에

내 어머니가 느럭느럭 걸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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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주름 / 이은주


최민식의 사진을 보다보면

주름이 먼저 눈에 차는데

어렸을 때인데도

전쟁통 고아가 된 남매의 누추함보다

깊은 주름 노인들이 더

눈에 띄었던 거지.

주름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물도 보이고, 흙도 보이고

사람도 보이고, 마음도 보이고

그랬던 건 아니고,

규칙없는 무늬처럼 꿈틀거리는 게

살아있는 것 같았거든.


노인들은 그후로

얼마나 살았을까.

검버섯 핀 얼굴이

이제 막장이다

그러는 것 같잖아.

그런데도 주름들은

제대로 자리잡은 뿌리 같아서

뭐 하나 이쁘게 키워낼 것 같았어.

니들은 이럴 수 있어

뻐기면서 말야. 그러니

그것들은 그냥 주름이 아니었던 거지.

피고 피고 피워내는

꽃주름이지.


 

 

 

소나기 발자국 / 한옥주


외출했다 돌아오는 저녁 무렵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서는데

소나기다

사람들이 뛰기 시작하고

가게 처마 밑으로 나는 뛰어든다


신문지를 뒤집어쓰고 뛰는 남자

가방으로 머리를 가리고 뛰는 여자

함성을 지르며 뛰는 학생


사람들 등에, 어깨에도

소나기 발자국들 확연하다

살다보면 가끔은

죄 없이 젖을 때가 있다

이리 뛰고 저리 뛰어도

결국은 젖게 되는 걸

그러나 흠뻑 젖은 자리도

한 번쯤 햇볕 들면 마르는 법


그때는 모르고 젖었다

또다시 쏟아지는 빗속에서

가야할 길을 잃은 듯 멍하니 서 있는데

맞은편 담벼락, 파라솔 밑 좌판에서

푸성귀를 다듬던 할머니

빙긋 웃음 던지는 눈빛이 촉촉하다


나는 얼른 빗속으로 뛰어든다

얼굴에 부딪히는 차가운 빗방울들

그래, 상쾌하다 수많은 길이다





주름 / 이미옥

- 참나무숯


그는 속으로만 생의 궤적을 그렸다

그의 중심은 늘 꼿꼿하여

궤도를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

그는 늘 말이 없어서

사람들은 짐작으로만 그의 속내를 잴 뿐이었지만

속주름이 늘어갈 수록 그는

넉넉한 그늘을 드리웠고

튼실한 열매를 매달았다

언제나 꼿꼿이 서 있을 것 같았던 그를 쓰러뜨린 건

우람한 그의 몸뚱이였다

죽어서도 그는 든든한 기둥이 되어

올곧은 삶을 빛냈고

불에 타 검은 숯으로 변했어도

둥글고 깊은 주름으로

공기를 물을, 술을 걸러 맑게 했다

그의 한생은 눈부신 것이었다

어느 날

그의 몸은 태워져 음식의 향기가 되었는데

그제서야 그의 주름이

사르르 풀리는 것이었다


내 아버지의 유골을 산에 뿌린다

아버지,

빛나는 생을 놓고 비로소 영면하신다





자국 / 서화금


거기,

카메라 맨 젊은이

지금 내 자국 박으려 하는가.

그럼

이건 보이나.

충치 먹어 아린 이에

내 사십오 년 먹고 산 자국이 남아 있는데


아니지,

그이의 사십오 년

일곱 자식 밥 나오는 쇠망치의 내리침으로

엄지에 맺혀 있던 시푸르딩딩한 자국들은 더 하지.


검은 물 들여 놓은 흰 머리카락엔

이십여 년 전에 접어놓은 학종이의 꿈이 염색되어 있는데.


아니지

그이의 이십여 년 전-

쇳덩이 내려놓고 늘그막엔 장구치고 노래나 하며 살고 싶다 하던

타령이 끝나 버린 입가엔 막걸리 자국만이 남아 있는데.


발뒤꿈치의 굳은살을 뜯으며

아차 아픔을 느끼는 순간

속 살 내미는 생채기의 그 자국도 박아 놓아졌는가.


그이의 차가운 신경통은 이제 내 혈관을 타고 흐르는데.


젊은이,

쩡쩡한 망치 소리로

켜켜이 쌓여 진 거름 더미에 앉아

그이를 닮아가는

내 모습 가까이 박아주게나


청정한 하늘 깃에 스치는

눈시울일랑

먼 날의 앵글에 맞추어 주게나.





주름 / 조현숙


서울대병원 호흡기내과 진료실 앞

부쩍 거칠어진 그녀의 숨소리가

마치 흰 수국꽃 같다


대기번호 72번

생(生)의 전환점을 도는 그녀는 지금

저녁 길을 서성이고 있다


불혹이 된 딸 무릎에 손을 얹은 채

전광판 대기숫자에 눈을 고정시킨

그녀의 옆모습을 훔쳐본다


채송화만큼 작아진 몸은

육남매에게 길을 내 준 눈부신 증거다

그녀의 몸에서 젖은 흙냄새가 난다


그녀의 몸을 떠난

여섯 개의 이파리가 꽃으로 필 동안

폐허의 땅에 간신히 지탱하고 있다

드러난

그녀의 마른 뿌리를 본다


그녀가 걸어온 꽃의 시간이 내게

말을 건넨다

‘너그들 배곯지 않게 밥 헤멕이고 너그들이 웃을 때마다 생긴 꽃자리여’


꽃 진 자리, 그녀의 길을 더듬는다

멀리서 나팔꽃 닮은 아이들 웃음소리 들려오고

기억의 링거를 맞은 심장이

물고기처럼 뛰어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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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子의 쉼표 / 임경미


영정사진 속에서 어머니가 웃고 계신다.

왼쪽 난소에서 오른쪽 난소까지

퍼진 癌을 그토록 사랑했던 女子.

높은 음자리를 그리지 않은

그 위험한 오선지 위에 고단한 길거리 좌판

고등어의 싱싱함을 대신 훔쳐 팔던 女子.


그 女子에게 쉼표가 생겨 버렸다.


그 독한 항암제 주사바늘이 펌프질 할 때 맨 처음 나오는 마중물이라며 44kg 불길한 몸무게로 버텨내며 웃던 그 女子


억지로, 다독이며, 쓰다듬다, 울부짖는다 폐경 된 자궁 속에서 쉴 새 없이 흘러내리던 그 썩은 악취를 팔다 남은 생선 비린내로 착각하며 자랑스러웠던

그 女子가 말이다.


한 웅큼 빠져버린 머리카락.

반달을 숨긴 손톱.

갈라질 대로 갈라진 파충류의 초록색 혓바닥.


구석구석 혈액이 통과한 통로 끝에서 고통으로 울부짖다

민둥산이 된 뒷통수에 빨간 립스틱으로 맨드라미를 그려 넣은 그 女子

혈관 깊숙이 숨어있는 세포마저 살아나 주렁주렁 저승 가는 길

쉼표도 찍지 않고 그 女子를 데려가 버렸다.


아름답게 웃는다.

흉내 낼 수 없는 어머니의 웃는 얼굴.


마침내 그 女子는 쉼표도 찍지 않은 癌으로 최초의 마침표가 되었다.

온 몸이 근질거린다.


달팽이 한 마리가 쉼표처럼 내 몸 위를 하루 종일 기어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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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 / 강순미

―그 가벼운 수다처럼

 

소문은 가벼운 수다로 시작했다


이른 아침 지하의 어둠을 타고

어깨를 드러낸 골목을 지나

마을을 벗어난 말이

명랑하게 젖어들고 있었다


구린내 밤이슬 털어내

통일로변 튼실해진 은행 서 말

문산장에 내다 판 명호네

연시물 떨어지는 가을 맞으러

설악으로 떠났다며

혀의 길을 열어주는 어머니


닳아진 만성 관절염에

구절초 흐드러진 둑길도 멀어지고

이제는 갈비뼈 사이까지

바람이 숭숭 올라온다고


불현듯 차고 둥근 호흡에

귓속을 더듬다 보면

깊어진 소리 언저리에서

서성이던 아버지

잎의 문을 열고 나온다고


귀를 검게 하던 달콤한 혀

푸념처럼 뜨거워져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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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쉼표 / 최분임

- 은행나무모자

 

늘 푸른 아파트 놀이터 은행나무가

중절모 모자를 신고 있다


아이들이 파헤친 은행나무 뿌리 위에

일회용밴드처럼 붙여진 모자

쉼표로 앉아 있다

오랜 노숙의 발바닥처럼

헤지고 갈라졌다

 

시큼한 낯선 냄새를 식솔처럼

달고 다니는 노숙자처럼

아침이면

모자는

낯선 길 하나 달고 있거나

이름 모를 풀씨들을 알처럼

품고 있기도 했다


어둡고 찬 몸뚱이 바닥 위로

희미한 온기의 손바닥 내밀던

신문지 한 장의 기억을

펼치면,

보였다

은행나무가 제 안을 뒤져

폐허 같은 모자의 맨발위로

건네주던

물 묻힌 손수건 몇 장

상처는 그늘이 드나드는

열린문 같았다


반쯤 풀린 눈으로

하루를 어슬렁거리다가

이내 한 조각 박스 위에

오래 걸은 길 부려놓고

쉼표처럼 졸고 있는 시간 위로

놀이터 떠들썩한 하루가

집으로 돌아가자

모자가 은행나무를 벗어

노숙으로 지친 제 몸의

노란 남루를 털고 있다


공터 같은 겨울 지나

모자가 툭툭,

자리를 털고 일어서면

초록 눈의 새싹 하나가

밤새 덮고 있던 우주,

신문지 한 장 빼앗긴

떠돌이 잠처럼 두리번거리며

제 움막을 찾고 있는


 

 

 

쉼표 / 양윤정


오래된 기억 끝에 맺히는

까무룩 잃어버리는

왔던 길 지워져, 돌아갈,

가야할 길 찾지 못하는

그저 타오르며 자라난

지나온 매듭만큼 타오르고 떨어져 내리는

38년 뒤에도 네 등에 기대어 키워온 눈물 쏟을 수 있을까

사막을 건너는 자들의 고여진 달을 네 등에 담뿍 부어줄 수 있을까


달을 삼킨 그 여자 검은 머릴 치렁거리며 따라 나왔네. 치자꽃 하얗게 질려 툭툭 제 몸을 던지는 계절이었네. 내 뒤를 다가오던 그녀, 내 앞을 질러가기 시작 했을 때, 그녀 등에 붙은 저승을 보았네. 거꾸로, 거꾸로 매달려 삶을 뒤돌아 낚은 세월의 빈 자루 왜 저렇게 무겁게 끌고 가는 것인가 그녀에게 물었네. 돌아 본 그녀 눈에 하얀 소금 사막이 가득 펼쳐져 있었네. 그 사막 헤매다 만난 작은 오아시스에 비춘 그 사막 속에 걸어 온 길이 새로 난 길인 줄 알아 돌고 돌아오고 다시 그 길속으로 떠난다는 사실을,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 길을 가면서, 태양이 뼈를 누이고 달이 옷을 벗은 그 길에 서서 멈추어 서서 알게 되었네.

 

 

 

쉼표 / 김후자


여자가 누웠다

누에처럼 간간히 뒤척이며

낮은 신음소리를 냈다

모로 누운 여자의 등이 시리다

사막을 횡단하며 지하셋방을 떠돌던

긴 여정의 짐을 풀고

이제 여자가 누웠다


짓무르고 부르튼 몸

늙고 병든 몸에서 꽃물이 터진다

덤불속을 헤매던 몸이 이제사

상처를 들어내는지

붉은 욕창이 화인처럼 박혔다


햇살이 눈부신 오후

또 누군가 지상에서 멀어지는 듯

남은 자들의 오열에

낡은 벽이 가늘게 흔들렸다

병실 밖으론 천지사방 꽃잎이

하르르 날리고

여자도 눈을 감았다


살아생전 꽃구경 소원이라

입버릇처럼 말하더니

산 벚나무 꽃길을 달려가는 듯

영정사진 위에 그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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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천하장사 / 김순복


우리 아파트에는 천하장사 아줌마가 산다

남편 실직한 지 석 달째

수제비를 뜨는 날이 많아진 그녀

수제비에도 기교가 필요하더군

무조건 치대기만 하는 게 아니더라고

한 세상 약삭빠른 요령처럼

수제비가 한 수 가르쳐 주더군 반죽이

중요한 거라고 이를테면

적당한 타협 포기할 땐 쿨하게

너무 무뚝뚝해도 감칠 맛이 없거든

궁상의 은유마저 하하 웃으며

풀 죽은 남편에게 얘기해줘야겠다는 그녀


밤새 봉제 인형의 눈을 달다

눈 빠질 뻔 했다며 웃는 그녀

앉은 자리가 꽃자리라며 퍼질러 앉아

눈도 붙이고 마음도 붙이고

삶을 꿰매는 마지막 한 땀으로

생활을 붙이는 여자

그러나 끝내 떨어진 꿈 하나는 못 붙여

가슴에서 별을 꺼내 노래를 부르는 그녀

떨어진 꿈뭉치에서 남루의 먼지 풀풀 날리지만

하하하 웃으며

아프지만 않으면 된다

다 괜찮다는 힘센 그녀


심술궂은 어제와 찡그린 오늘이

천하장사 그녀 앞에서 뒷머리를 긁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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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문씨 / 안수정

 

우리동네 문씨네 빌라 B03호에는 쉰줄의 문씨가 살고 있다. 쨍쨍한 햇볕 한 줌 시원스레 들 날 없이 밤낮으로 어둑신한 반지하 B03호에 문씨는 8년째 세들어 살고 있다.

부산에서 큰 슈퍼를 하며 쉴 새 없이 큰 돈을 세던 8년 전 문씨의 민첩한 손길은 이제 아침마다 두살 박이 조카아이와 씨름하며 삐둘빼둘 땋은 머리칼 속으로 스며들고 있다.

그러나 열한 가구가 모여사는 조씨네 빌라에 유일하게 대문이 열려 있는 집은 문씨네 B03호이다. 그 열린 문으로 사람들이 허물없이 드나든다.

점심으로 수제비 한 상 차려놓고 형님 아우하며 한 술 입안에 우겨넣으며, 자식을 넷이나 두고 도망간 H빌라 지하방의 못된 며느리 얘기며, 새로 이사온 D빌라 지하의 치매 걸린 노부부가 날마다 문을 두들겨댄다는 투덜거림을 깍두기보다 더 맛있는 반찬 삼아 우걱우걱 씹어 삼킨다.

그렇게 우리동네 이야기는 문씨네 B03호로 흘러들어와 휘돌아 계단을 타고 역류해 우리 동네로 흘러간다.

조씨네 빌라에 사는 문씨네 B03호는 우리동네의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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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 이혜순

-지금, 그 숲속에선

 

호기심 많은 새벽이 드르륵 문 연다

종소리처럼 눈 부릅뜨고 첫 기차 터널 지나간다

터널 옆구리로 새어 나온 푸른 소음 계단 내려가며 똑똑 조간 신문을 돌린다

신문에서 뛰쳐나온 여자가 달그락 검은 활자를 요리하면 눈 없는 먼지들 풀풀 입맛을 다신다

창으로 달아나는 씩씩한 근육질의 어둠 잠 덜 깬 숲으로 난다, 날아간다

쓰레기봉투 뒤지던 야생 고양이 수염이 가느다란 햇살로 반짝거린다

노란 태양이 가득 알을 부화해 놓은 숲속, 칠순의 늙은 돌 알을 주물럭거린다

알 속에서 깨어나오는 햇살 구더기들 긴다, 기어간다

태양 헬스장으로 쭉 가지 뻗은 단풍나무 잎사귀 붉다, 화끈거린다

단풍나무 등에 햇살이 줄줄 터진다

아! 이 싱그런 오르가즘

이 노란 태양 눈알들 붉은 눈알들이 단풍나무 잎사귀에 꽃잎처럼 터진다

버려진 FM 라디오가 풀밭 위에서 먹다 남은 햇살을 스트롱으로 빤다

죽은 안테나가 소리를 감지한다

미소 치과로 날아가는 붉은 은행나무 잎이 라디오의 노래를 흥얼거린다

가을이 드르럭 문 여는 소리에 나를 뚫고 나온 묽은 잎사귀 숲 속에 나풀나풀 주저앉는다

내 가는 나무 밑동에 링거를 꽂으며 방긋 지나가는 붉은 바람,

시월이다

 

 

 

우리동네 / 김영숙

 

섬은 잡식을 한다

일요일 오후가 되면 트림을 하느라 어지럽다

트림을 할 때마다 마니산 바위가 쩍쩍 갈라진다는데,

그 광경을 본 사람이 여럿 나왔다

사실 섬은 식성이 까탈스러워

어쩌다 들어오는 바깥음식은 냄새조차 싫었다

여북하면 물로써 너른 경계를 만들었을까

시간이 지나면서 바깥음식은 먹을만 했다

처음 맛 본 음식도 입에 착착 붙었다

요즘 많이 먹는 음식은 ‘사람과 자동차’ 세트 메뉴

사람과 기름을 담은 자동차는 냄새마저 향기로웠다

살얼음이 동동 뜬 인삼막걸리도 마실까

햇살 길게 늘어진 동막리 갯벌에서,

 

 

 

 

우리동네 / 박상희

 

가을 햇살이 눈부신 이맘때쯤

어머니가 맑갛게 풀을 쑤어

창호지에 바르신다


그 해의 가장 어린 코스모스

꽃잎들

그 속에 가두신다


코스모스 꽃잎들 그 속에서

더러는 영원히 살 수 있다 하고

몇몇은 시들어 간다고 투정을 부린다


그늘에서 어머니가 입에 가득 물을

머금고 창호지에 뿜으신다

이슬이 번지듯 물을 뿜는 일은

맛있는 것을 아껴먹는 것만큼

어려운 일


마당의 문짝들을 집안으로 들이는

그 저녁

꽃궁전이 들어선 듯 환해졌다

코스모스가 문신처럼 새겨진 궁전에는

늘 가을 하늘이 살았다


손가락을 갖다 대면

둥둥 장구소리가 새어나오는

그 문을 열면

듬성듬성 비워져가는 가을 들녘이 다가온다


지금 

우리동네에는

거리마다 그 때 갇혀 있던

코스모스들이 풀려나와 출렁이고 있다

그 사이로

물을 가득 문 어머니의 얼굴이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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