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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성신경
세상에는 무채색의 꽃밭도 있답니다.
햇살 비켜가는 곳
무표정한 건물들 길게 이어져
봄에도 가을에도 추운 그곳에 가면
바이러스보다 빠르게 감염되는 생기를
숨 헐떡이며 마시게 될 겁니다.
주머니 너무 가벼워
황학동 벼룩시장에도 갈 수가 없거든
평화시장 앞 차도를 일부 점령한
용감한 노점상들을 만나십시오
고마운 그이들은
언젠가 미련없이 버렸던 우리들의 추억을
고스란히 보관하고 있을 거예요.
반짝이는 뿔단추들 꽃보다 곱고 이상하게 마음 설레게 하는 손거울과
우스꽝스런 모양의 선그라스가 발목을 잡고 이미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가수의 앳된 얼굴이 웃고 있는 레코드판에서 잊을 수 없는 선율이 묻어나는
그 자리.
그러나 그조차도 다시 간직할 여유가 없거든
다시 인도로 올라 헌책방으로 들어가십시오
따스한 백열등 아래서
시리던 발목 뜨끈뜨끈 하도록
옛 활자들과 다시 만나면
그렇게 찾아 헤매던 환한 꽃밭을
곰팡내나는 거기서 찾게될지도 모릅니다.
세상에는 무채색 꽃밭도 있답니다.
맑은 내 그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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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시
- 그 늦지 않았음에 대하여
김경화
분침과 시침이 있는
낡은 아날로그 시계를 이용하여
방향을 찾아내는 법을 아십니까?
작은 바늘을 태양쪽으로 향하게 하고
큰 바늘이 이루는 각을 반으로 접으면
그 사잇각이 남쪽을 가르킨다는군요.
지금은 오후 3시.
내 인생의 남쪽도
이런 방법으로 찾을 수 있을런지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은하계의
오후 3시 방향을 살펴보았습니다.
끊임없이 태어나는 젊은별, 밝은별들이 모여모여
아직도 끝없는 팽창을 계속하고 있다는군요.
여름철 북극성의 오후 3시 방향에는
아직도 다정하기만한
견우와 직녀가 아스라이 보인다더군요.
지금은 오후 3시
낡은 망원경을 꺼내들고
아직도 찾지 못한
내 인생의 좌표를 찾아봅니다.
두 종류의 시계를 갖고 살았습니다.
두 얼굴의 가면을 쓰고 살아 왔습니다.
두 마리의 고양이를 키우며 살고 있습니다.
공식적이며 늘상 바쁘게 허둥대는
시계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암팡져보이기만한 검은 고양이와
비공식적이며 한없이 늘어져 추스리기조차 힘든
시계소리에 놀라 겁먹은 흰 고양이같은 삶의 대비
그 갈림길이 오후 3시입니다.
새로움과 낯설음 그리고 어정쩡함이
섞여 있는 내 인생의 오후 3시.
그러나
그 늦지 않았음에 대하여
어깨위에 놓여진 짐들의 무게에 대하여
이젠 두려워하거나 망설이지 않겠습니다.
이제 고작 오후 3시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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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
남혜민
비 길게 내린 후
물안개가 세상으로 열린 길을 닫고
미처 떠나지 못한 바람 몇줄기
얼룩진 창을 두드린다
시끄러운 차창 밖의 나무
바람결에 몸을 떨면
버틸 수 없어
이내 안개에 몸을 담근다
골목마다 사랑을 익히는 소리
이별의 슬픈 노래
빗방울의 시린 눈물되어 떨어지면
비릿한 바람과 어둔 하늘따라
사그러지지 않는
꿈의 이삭을 줍고 있는
상.계.동
뒤돌아보면
하얀 얼굴들이 뒤엉켰던 거리
퍼덕이는 꿈 한줌
아득한 세월로 실려 보내고
어둠이 타는
소슬한 길목을 밟으면
아아,
바람에 서걱이며 수런대는 저 소리
미칠 듯이 몸을 뒤채다
나도 발가벗고
안개 속으로 뛰어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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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斷想I
최문숙
그래, 일상이 허둥거린다.
손바닥 보자기에
파편처럼 부서져 내린
삼십촉 백열전구
그래, 곱게 접어야지.
은총 내리는 모습
저토록, 산산히 부서질까
무심한 햇살은 저혼자
성근 눈으로
찢기운 은총에 내려앉아
졸고있고,
차곡차곡 포개고픈 책장사이로
비죽이 손 내미는
엽서 한 장은
그 누가 보낸 연서란 말인가
어디쯤 가야 그를 만날까
시린 등허리
따개비들 촘촘히 집을 짓고
뽀얀 희망은 수레바퀴에
펄럭이며
숨을 고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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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M F
허 남 미
어깨 처진
남편을
마중 나간 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늘에 공이 있네.'
혼자 중얼대는
아이를 보며
남편과 나는
슬프도록 환한
달덩이를 안고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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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한 은애
졸졸 고이는 산 개울물
운 좋아 비 맞으면 철철 넘치는.
80포기 배추는 소금도 쓸리지 않은 채
어느샌가 항아리 속 김치로 드러누었고
장갑 한 번 끼어 보지 못한 어머니의
얼은 손 맛은 한끼에 한 포기가
뿌리 째 없어졌습니다.
살좀 찌라며 가끔씩 닭을 잡으시는
새벽 문 열리는 날은
어김없이 손 두덩이 찢겨진 채로,
내 유년시절 간간히 책장을 넘기실 때는
소르르르 떨리던 고운 손이었습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남의 집 살이를 하시면서
이딸년 공부시키느라 아픈것도,
힘든것도 없다 하시더니.
......몰랐습니다.
굽어 취어진 묵은 어머니의 손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오래전 굽은 길은 위험하다며
바른 길로 두손 꼬옥 잡고 먼저 발 내 디시던.
그 따뜻한 어머니가 휘어진 채로
배추 김치 한 줄기 바로 잡지 못하셨습니다.
첫 눈 오는 날 첫 사랑 만나시라고 손녀딸이 곱게
얹어준 봉숭아조차
세 번 네 번에도 고운 빛을 머금지 않으셨습니다.
엊그제
푸욱 삶은 닭을 어머니 상에 놓았습니다.
껍질과 살을 발라 내시는 손은
보내 버린 세월을 탓 해야만 했습니다.
아상한 마디마다 살을 채워 주시고,
이제 와 남는 사랑 손주 녀석만 아시는
나의 전지나무. 굽은 손에 간직해온 사랑 앓이에
장갑 한 번 끼워 드리고 싶어
장만했습니다. 제일 큰 치수로.
가까이서
떨어진 낙엽을 파랑색에 맞추려는 듯,
하늘 한 번 높이 보고
집게로 파르르 집어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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