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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나는 문경새재의 저녁으로 눕는다 / 황종권

 

 

이것은 곰의 갈비뼈 속으로 난 길이다

저 억새풀이 곰의 털이라는 것은 바람만이 안다

뻣뻣하지만 구불거리는 나무는 곰의 이빨

 

돌부리에 넘어진 무릎만이 비로소 신발 끈을 매고

첩첩 뿌리로부터 멀어지는 꽃들이 곰의 위장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발자국을 밀어올리는 것은 길이 아니라

곰의 숨소리, 으스스 별자리가 돋는 것도

제 등허리를 바위에 긁은 까닭이다

 

발목이 늘 벼랑인 사람들이 있다

떨어지지도 주저 않지도 못하는 힘으로

아비가 될 사람들은 발목에 불씨를 지폈으리라

아니 발바닥에 물집 잡히는 힘으로

신열 들키지 않게 제 짐을 산맥에 맡겼으리라

 

문경새재, 산적도 피해 가는 길

피처럼 붉은 달, 곰의 내장을 밝혀준다

울 수 없어 노래하고 노래할 수 없어

발목으로 저녁을 불러들였을 나의 아비들

젖은 눈썹을 지닌 사람은 저 고원이 고향이다

 

바람마저 곰의 뼈를 빌려 노래하는 문경새재

흙바닥에 나의 이마가 찍혔다

달밤은 춥고 나는 닳도록 걸어야 할 길이므로

목 길고 허리 가는 억새꽃밭의 저녁으로 눕는다

 

 

 

 

당신의 등은 엎드려 울기에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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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상문경새재 / 최재영

 

억새풀 우거진 고갯길에 달빛이 휘황하다

조령과 주흘을 곁에 둘러앉히고

굽이굽이 넘어 온 길을 둘러보는데,

달빛을 가득 품고서야

비로소 환해지는 옛길이다

새들은 벌써 다 건너갔을까

오래된 그리움들이 폭설처럼 쏟아지고

막사발은 천년의 비경을 품고 고요하다

수백리 물길을 여는 초점(草岾)*에 이르러

새재를 넘던 옛사람을 생각한다

물굽이 시퍼렇게 일으켜 세워도

못다 이룬 꿈이었을까

아슬아슬 벼랑길을 비껴가는 바람은

계곡마다 눈물꽃을 피워내느라

허기진 산기슭 한사발은 들이켰으리

먼 후일 가슴 뜨거워진 내가 찾아와

다시 맨발로 천년을 거슬러 오르리니,

달빛이 슬어놓은 푸른 전설이

아직도 구슬픈 아리랑곡조로 흘러가는

, 문경새재

 

초점(草岾): 낙동강 발원지 중 하나 (태백 황지, 영주 순흥, 문경 초점)

   

 

     

 

 

[우수상문경새재 / 심강우

 

문경에서 나는 박달나무는 홍두깨가 되었지요

주흘산 조령산을 넘어온 구름이 보자기란들

사시장철 굽잇길 다듬잇돌을 시늉하던 걸음

성황당 고개에서 비손을 하던 여인,

자드락자드락 해동갑으로 잇대던 구김살

어이 다 싸맬 수 있을까요

 

때까치 울고 오목눈이 직박구리 추임새에

저 멀리 조령관 너머 수안보 지나 한강으로

신수 훤한 도포자락을 언제 또 보려는지,

옷고름에 젖은 사연 낙동강 굽이마다

새재라 새재, 눈 밝은 새들의 기별도

마애비로 남아 하인의 옹심도 선비의 큰마음도

가루를 자청한 기와 조각이 되었지요

 

새재에 불던 바람은 길이 되었지요

주흘관 조곡관 조령관 한 줄로 꿴

오르막 내리막 패랭이 쓴 장꾼이 걷던 길

넘으면 시름이요 앉으면 푸념이라던

질경이 바랭이 억세게 핀 황톳길

가도 가도 첩첩산중 애옥살이 닮은 길

어이 다 지울 수 있을까요

 

새재를 넘어도 새재

새재에 못 미쳐도 새재

사람살이 천길만길 다함없는 발짝으로

문경에 가면 우리 한세상 닮은 새재가 있지요

경사를 들을 날 있다고 문경聞慶

계절이 빗장을 걸고 새들이 문지기를 서는,

새재가 있어 문경이 완성된 그런 곳이 있지요

 

 

 

 

전망대 혹은 세상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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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재 넘어가는 바람이 들려주는 이야기들

 

문경은 주흘산, 황장산, 희양산, 대야산 등 수많은 명산이 솟아있고 가파른 고개 문경새재가 있는 곳이다. 새재 길 구비에는 문경새재아리랑 가락이 박달나무 푸른 잎새를 흔들고, 한양으로 과거보러 가던 선비의 못 다한 꿈은 여궁폭포 흰 물줄기로 흘러내린다. 문경 전통 찻사발에 담긴 말차의 연둣빛은 마음을 헹구어주고, 붉은 보석 오미자와 문경 꿀사과는 우리의 몸을 정화시킨다. 이렇게 문경은 아름다운 자연 풍광과 풍성한 특산품으로 언제나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시를 통해 이곳 문경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문경새재를 전국으로 알리고자 문경새재문학상을 제정하여 공모하였다. 작년에 개최한 문경새재 창작 시 공모를 좀 더 문학적인 성취도가 있는 좋은 작품을 얻고자 문경새재문학상으로 승격시켰다. 응모기간이 길지 않았음에도 총 178편의 많은 작품이 투고되었고 작품 수준도 향상되어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심사를 하면서 아쉬운 점 몇 가지를 우선 지적하고자 한다.   한 편의 시가 위대한 건 세상을 바꾸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금은 세계가 이웃과 가족처럼 통하는 시대이다. 인터넷으로 문경과 문경새재를 검색하면 수많은 정보들이 쏟아져 나온다. 누구나 쉽게 정보를 접하는 시대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 정보는 정보일 뿐 감동을 주지는 못한다. 시는 단순 정보가 지니지 못한 감동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검색 한 번에 다 보이는 정보를 짜깁기해서 만든 시는 시로서의 가치를 잃는다. 또한 시는 시인만의 눈으로 본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문경새재가 판에 박힌 활자 속의 장소가 아니라 무궁무진한 상상속의 세계로 도약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시만이 할 수 있는 일이고 시가 가진 힘이다. 여기에 낭송을 통한 소리의 힘이 더해지면 그 감동의 폭은 더욱 확장될 것이다.   

 

일부의 시들에서 안일하게 단순히 정보의 짜깁기로만으로 만들어진 것을 볼 수 있었다. 이것저것 문경에 대한 것들을 이어 붙여 도무지 내용이 연결이 되지 않았다. 문장도 하나의 생명체이다. 앞 뒤 흐름이 있고 전체적인 조화가 있어야 한다. 함축된 시어라 해도 불구의 문장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또 어떤 시들은 시작은 좋았으나 마무리가 허술해서 안타까움을 주었다. 마치 덜 그린 그림 같이 좋은 색감과 바탕으로 시작했으나 마무리를 안 하고 끝낸 느낌이었다. 그리고 가장 심사위원들이 안타까워했던 점은 응모자의 무성의한 태도이다. 공모 요강이나 공모 의도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아무 관련이 없는 시들을 보내오는 경우이다. 적어도 문학상에 공모를 한다면 공모 요강을 꼼꼼히 훑어보고 공모를 하였으면 한다. 자기가 직접 경험하지 않은 것은 시를 쓰지 않는다는 철칙을 가진 시인들도 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적어도 ‘문경새재’에 관한 시를 쓰면서 ‘문경세재’라는 오자는 내지 않아야 한다는 게 심사위원들의 공통적인 의견이었다. 자신이 쓰려고 하는 소재나 제재에 대해 이름도 정확히 모르면서 어떻게 그곳에 대해 쓴 시가 감동을 주겠는가. 그것은 정말 사랑한다고 외치면서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대상은 황종권의 「나는 문경새재의 저녁으로 눕는다」 로 돌아갔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문경새재의 표면적인 풍경을 그리는 것에 그쳤다면 황종권의 작품은 시각이 달랐다. 문경새재를 품은 깊은 골짜기와 산들을 곰으로 형상화한 점이 굉장히 신선했다. 저녁이 오도록 높고 험한 고개를 넘어 길을 떠날 수밖에 없는 세상의 아비들을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며 나 또한 그 길을 닳도록 걸어야 함을 담담히 말한다. 주흘산 영봉을 지나 뒤를 돌아보면 봉우리들이 곰이 돌아앉은 형상이라는 점과도 잘 맞아떨어진다. 거대한 곰의 위장 속으로 난 길을 따라가며 발자국을 밀어 올리는 숨소리를 듣고 곰이 긁어 만든 별자리를 본다는 것은 문경새재를 특별한 공간으로 만들고 있다. 또 단순한 하나의 고개에서 누구나 걸어 넘어야 하는 생의 고개로 확장되는 시의 전개가 훌륭했다. 대상 작품으로 손색이 없었음을 밝힌다.

 

우수상은 최재영의 「문경새재」 심강우(본명:심수철)의 「문경새재」 두 편으로 선정되었다. 공모 요강에 공지된 것처럼 문경새재문학상은 문경새재시낭송대회와 함께 개최된다. 당선작은 다음 낭송대회의 지정 시로 지정이 되어 낭송이 된다. 그러므로 낭송시로서의 적합성을 함께 본다. 리듬감과 전달력이 있어야 하고 너무 장시이거나 단시이면 곤란하다. 이 두 편의 작품은 그 요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최재영의 「문경새재」는 달빛 속의 문경새재를 넘으면서 느껴지는 감흥을 잘 표현했다. ‘달빛을 품고서야 가득 환해지는 길’처럼 세밀한 관찰과 새들도 넘기 어려웠다는 험한 고개를 어찌 오갔을까에 대한 의문을 ‘새들은 벌써 다 건너갔을까’ 라는 물음으로 아우르고 있다. 가파른 초점에 이르러 느낀 그 옛날 청운의 꿈을 안고 이 고개를 넘어갔을 옛사람에 대한 연민을 ‘바람이 눈물꽃으로 피워내느라 허기진 산기슭을 들이켰’다고 풀어내는 점도 좋았다.

 

심강우의 「문경새재」는 문경새재를 넘던 사람들의 애환을 우리가 한 세상 살아가는 모습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좋았다. 과거보러 떠나는 선비의 꿋꿋한 꿈도 비손하던 여인의 간절함도 길 위에서 생을 다 보내는 장꾼의 발걸음도 이제는 모두 한 줄기 길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세상만사 많고도 많은 사연과 일들도 시간이 가면 다 바람이 되고 단단한 마음도 세월 앞에서는 가루가 되어 흩어짐의 필연성을 말하고 있다. 험한 고개 가로막고 있어도 사연 깊은 강물 놓여있어도 천길만길 걸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생과 새재의 공통점을 시로 잘 나타냈다.

 

문경에 대한 사랑과 관심으로 보내주신 많은 작품들이 있었으나 모두에게 당선의 영광을 드리지 못해 죄송스럽다. 당선되신 분들에게는 축하를 다른 분들에게는 다음 기회의 기약을 드린다

 

 

<본심에 오른 작품>

 

<순례의 길 / 최형만> <문경새재를 걷다 / 양소은> <문경새재의 봄 / 강수화> <문경새재 / 한춘화><아직은 주흘산이 / 김국현> <새재의 밤 / 길덕호> <문경새재에서 / 이생문> <문경새재 / 박덕은><문경새재, 바람따라 / 박진옥> <문경새재 / 서희정> <새재여, 문경새재여 / 박영원> <말하는 나무 /  조긍><과거길의 화법 / 홍경흠> <먼데서 오고 있을까요 / 이 훈> <꽃바람 / 길덕호> <토끼비리 / 최정희><박달나무 숲에는 메아리가 산다 / 이원규> <붉은 꽃, 오미자 / 김국현>

 

심사위원 : 엄정옥, 도명희, 황봉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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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상] 시라시 / 염민숙

 

 

초봄이면 한강으로 시라시를 뜨러 갔다

빚보증으로 논밭을 날린 후 어머니는

책값이며 차비가 없어 꾸러 다녔다

어머니가 떠오는 시라시는

식구들 마른 삶에

도랑물을 내었다

 

시라시를 따라 강의 깊은 데까지 가

등에 업힌 막내와 자맥질도 하였다

눈물자국 같은 물빛이 뜰채에 걸려나왔다

물의 정수리를 오래 들여다본 죄로

햇살에 눈이 멀어

어머니 돌아오는 걸음이 출렁거렸다

 

어디 먼 바다로부터

제 어미의 길을 되짚어

시라시가 오는 철이다

곁에 감기던 식구들 다 떠나고

어머니 혼자 봄밤을 지새우는 날

얼음장 떠가던 그 밤처럼

무릎 시리게 떠오르는

물빛 기억들

 

*시라시: '시라시'라고 부르는 작고 가는 실뱀장어. 외국에 양어종자로 팔았다

 

 

 

[밀크북] 시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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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시의 곁을 맴돌며 떠나지 못한 저에게"

 

지난여름 교통사고로 눈을 조금 다쳤습니다. 치료를 받으면서 녹내장 초기증세를 알게 되어 앞으로 올 실명을 예방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소식은 시의 곁을 맴돌며 떠나지 못한 저에게 모닥불로 다가왔습니다. 껍질 벗기려다 심은 도라지가 꽃 핀 것처럼 숨어 있는 것 꺼내고 싶은 열망이 듭니다.

 

걸어온 모퉁이 돌아보면 고통은 혼자 오지 않고 기쁨도 같이 데리고 왔습니다. 어깨의 짐을 걸머지고 오는 동안 웃음을 주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지나고 보면 삶의 자락에 빛이 들거나 그림자가 지든지 그것이 모여 아름다운 무늬가 되었습니다. 오늘의 환희가 그 자락에 밝은 그림 하나를 짜 넣는 일이기에 심사위원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저의 길이 맞닿을 때까지 천천히 걸어가겠습니다.

 

문학의 길로 이끌어주신 시인 장석남, 김우섭 선생님과 지도해주신 여러 선생님들 고맙습니다. 새얼문학 찬용, 진채, 수조, 선우, 선호, 계숙······ 함께 길을 걸어온 문우들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끊임없이 문학적 소재와 이야기들을 길어다 부어주는 성식씨와 가족들 사랑합니다. 넘어질 때마다 일으켜준 광미, 경희, 지은, 명자, 여러 친구들과 기쁨을 함께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가작] 뿌리 / 최재영

 

 

뿌리는 힘이 세다

수십 년 세월을 밀어 올리는 힘으로

매일 쥐눈이콩 같은 눈망울을 매달고 길을 낸다

기억 켜켜이 어둠의 지층을 뚫고 나아간 흔적이

시퍼런 강물처럼 겹겹이 굽이치는 저녁

뿌리는 뿌리만으로도 온전한 몸통을 이룬다

어둠보다 두터운 벽이 있으랴

누구도 읽을 수 없는 뿌리의 내력을

더운 숨결 내뿜는 잔털이 말해준다

축축한 흙냄새에 처음 내딛는 발걸음이 말랑해지고

이제부터 모든 어둠은 뿌리의 시작이다

뿌리의 문을 밀면 저 안쪽 깊은 곳에서

쿵쾅이며 들려오는 우렁찬 함성들

지상의 푸른 잎들이 땅 밑으로 신호를 보내는지

파르르 가녀린 심호흡을 내 뱉는다

누구나 보이지 않는 어둠의 시간 있었으리라

폭풍우 몰아치는 날에는 잠시 주춤하기도 했으리라

그러나

어느 종족이 이리 형형한 눈빛을 가졌는가

단단한 암벽을 파헤치는 힘으로

여전히 길을 탐색하는,

뿌리에게는 어둠도 환한 불빛이다

 

 

 

꽃피는 한 시절을 허구라고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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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투데이가 주최하고 금융위원회 후원, 신한은행 협찬으로 실시된 '제10회 머니투데이 경제신춘문예' 당선작을 선정했습니다.

 


우수상(신한은행장상)에는 상금 300만원, 가작에는 상금 100만원이 각각 지급됩니다. 당선작은 2015년 1월 1일 머니투데이신문과 홈페이지에 게재됩니다. 시상식은 내년 1월 21일(수) 오후 3시 서울 프레스센터 19층 국화실에서 열립니다.

당선자께서는 시상식에 참석해 상장과 상금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응모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내년 12월 '제11회 머니투데이 경제신춘문예' 공모가 이뤄질 예정이니 많은 성원과 응모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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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도는 부족 외 4편 / 최재영

 

 

말(言)로써 그려진 지도가 있었다

아이의 첫 울음으로 운명의 등고선을 점치고

짐승들의 귀도 처음인 듯 열리던 곳

누대 몸속으로 유전해 온 길이 있어

아슴하니 눈길 닿는 곳까지 획을 그었는지

그들의 생을 축척해도 영역은 가늠되지 않았는데,

몸에 길을 들여 가는 곳마다

부족의 영토는 새로이 확장되곤 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 좌표를 그렸으므로

어디에도 경계선은 없었으므로

간혹 돌아오지 못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그들은 탯줄의 울림으로 지도의 노래를 배우고

가장 먼 별자리에 방점을 찍어

매일 웅장한 족적을 기록했으리라

모든 문명이 부족을 비껴갔으므로

말(言)의 사원을 짓고 탑을 올렸으리라

무지개를 필사하여 후세에 전하기를 수백 번

몸으로만 익혀 온 지도는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말았으니,

태초 아름다운 지도는 멸실되었으니,

이로써 부족은 떠도는 것들의 기원이 되었다

 

 

 

 

필경사 Ⅱ

 

 

필력을 자랑하는 꽃들이

허공에 몇 점 획을 찍는 아침

말 못할 천기를 예감하였을까

누군가는 하늘의 전언을 필사하느라

지상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도도하고 정교한 문장을 틔우는 중이다

바람의 어수선한 틈을 놓치지 말 것

두려움과 초조함을 감추느라

혹자는 애써 꽃받침을 활짝 열어 젖힌다

오래전부터 그들은 세상의 징후를 기록하였던 바,

기록에는 별다른 기교가 필요치 않다며

담장 밑 그늘만을 꼼꼼히 채록하기도 한다

개화는 이미 밀서가 아닌 평서(平書)인 것

그러므로 꽃들은 쉽사리 서체를 내놓지 않는다

형형색색 눈부신 필력을 드러내기까지

그 미궁을 빠져나오는데 평생이 걸릴 것이다

꽃들은 비밀을 간직한 두려움으로 몸을 연다

일필휘지 내리긋는 격렬한 몸놀림

새로운 필경사가 피어났다는 소식이다

 

 

 

 

꽃이 말하다

 

 

꽃이 열리는 한 시절을 허구라고 하다

봄 그늘에 앉아

무심한 바람이 둥글 펴지고

향기로운 햇살 몇 줌 도르르 구르는 것을 지켜보다

그 아득한 멀미 속을 헤매이다가

끓어오르는 절정들을 그만, 복사하다

꽃의 이마는 늘 신열에 휩싸였으므로

뜨거움 속에서 종종 길을 잃다

매번 허탕만 치고 돌아오는 길은

무수한 통점이었느니,

돌아보니 푹풍처럼 지나왔노라고

지나온 길은 단숨에 지워졌노라고

꽃이 닫히는 시점 또한 눈 멀고 말아

모든 찰나는 숨가쁜 적요에 들다

하여 천 년을 피어있어도 순간이라 기록하다

한나절 봄볕이 붉게붉게 소멸해 가다

그리고 진실에 눈 뜬 자들은 이윽고 말하다

봄은, 오늘 또 몇 번의 허구를 재촉하였는가

꽃들이 기울어가는 봄날을 탁본하여 후일을 도모하다

다시 처음인 듯,

 

 

 

 

빗살무늬

 

 

어제는 짐승의 시간이었어요

오랜 유목을 끝내고

수백 도의 펄펄 끓는 화기를 견뎌냈지요

어쩌다 가끔 순백의 쌀알을 받을 때면

온 몸 황홀해져 전율이 일곤 했지요

숨도 쉴 수 없는 암흑을 지나

날카로운 빗금을 몸에 두를 때까지

수천 년을 감당하기에는

나는 너무 소극적이고 협소하여라

폐허처럼 버려져 있을 때에도

수없이 겨울이 내리고 꽃이 다녀갔지요

그때 이미 소멸의 끝에서 당신을 알아버렸으니,

내게 유적의 냄새를 입히고

빗살 문양을 넣은 이는

자신의 빗장뼈를 갈고 다듬어

아직 오지않은 날들을 벼리었을까요

꿈에도 기교가 필요한 법이라지만

화려한 장식 따위 필요치 않아요

지금도 기원을 찾아 다시 태어나고 싶은

나는 끝이 뾰족한 빗살무늬 토기여요

 

 

 

 

목련 Ⅰ

 

 

창가의 목련이 흔들린다

이쪽을 기웃거리다 나와 마주치자

슬며시 외면해 버리는,

그 파문에 나도 잠시 흔들렸던가

목련의 한 시절이 내게 물들어

모두 북쪽으로만 가고 있나니

내 발걸음도 자연스레 북(北)으로 향할 밖에,

봄볕 몇 줌에도 꽃들의 좌우명은 바뀌나니

바람의 먼 기별에도

나는 자꾸만 눈물샘이 젖어들었으니

내 안의 그늘진 폐허도 한 번은 화들짝 피어날 것이니

나의 짧은 몇 걸음이

네게는 천 년을 견디는 일이어서

피고지는 주어들도 한 계절을 걷는 일이어서

봄날을 건너가는 그의 잔잔하고 기인 호흡이

얼룩처럼 어룽지는 몇 날

목련 안쪽의 세상을 내 더 이상 알 수 없으나

떨어지는 날들도 한 생일 것이니

지금 막 눈 맞추는 순간이

너와 나의 평생이다

이리 뜨거운,

밤새 천둥번개가 요란하였다

내밀한

 

 

 

 

꽃피는 한 시절을 허구라고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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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다시 새해가 되었고, 여전히 신춘문예의 열병 속에서 응모를 했습니다. 아주 우연히 시작된 글쓰기는 내게 많은 실망과 좌절과 즐거움을 안겨 주었습니다. 수없이 응모를 하고 낙담하는 시간이 길었습니다. 글쓰기의 노고와 번거로움, 그것은 기쁨이었고 환희와 같았으므로 기꺼이 낙방의 슬픔을 감내하였지요. 출 퇴근을 하는 매일의 일상 속에서 내 의식을 차지하는 가장 큰 부분은 바로 ‘글쓰기’였기 때문입니다. ‘글쓰기’의 어려움은 내게는 곧 즐거움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굴곡을 지나면서 얻어지는 한 편의 ‘시’...... 밤잠을 잊어도 좋을 향기로운 문장을 맞이하는 일은 어쩌면 내 평생의 업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곧 봄이 오는 소리들이 사방에 가득합니다. 이 싱그러운 내음을 향유할 수 있게 해 주셔서 너무나도 행복한 시간입니다. 응모 작품 모두를 당선작으로 한다는 심사방식이 새로웠으나 내 작품에 대한 신뢰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용기를 내어 정진할 수 있도록 어깨 다독여주신 심사위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시’가 아니었다면 누리지 못할 호사입니다. 필시 내 다음 생도 시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루파나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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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경위]

 

올해로 여섯 번째인 한국문학방송 신춘문예. 이번 응모자는 260여 명이었다. 예심에서 6인의 작품 30편을 선하였고, 그 30편에 대해 각각 응모자 인적사항(성명, 연락처 등)을 삭제한 다음 무작위로 불규칙 편철했다. 그 후 곧바로 본심으로 넘겼다. 본심은 채점이 종결될 때까지는 심사위원끼리도 서로 누구인지, 몇 명인지 전혀 알 수가 없도록 보안을 유지했다. 또한 집계된 점수에 의거 각 심사위원이 당선자 결정을 인준할 때까지도 심사위원이 누구인지 응모자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았다. 심사위원 전원이 당선자를 인준한 후에야 심사위원과 당선자 및 본선진출자들을 각 심사위원에게 공개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이렇듯 한국문학방송의 당선자 결정방식은 심사위원간 작품추천 및 토론 형식이 아닌 것이다.

 

채점 기준은 시행 첫회부터 올해까지 한결같은 기준이 적용됐으며, 각 작품별로 △문법 · 어법 · 표현의 적절성(10점) △주제와 내용의 부합 · 일관성(20점) △감동 · 느낌(20점) △시적구조와 메타포의 깊이(20점) △작품의 신선감 · 독창성(20점) △작가적 역량 · 성장가능성(10점) 등 총 100점 만점으로 되는 구조다.

 

심사위원은 해마다 전원 교체 위촉함을 원칙으로 하는데, 이번 본심은 문정영 시인, 서상규 시인, 천향미 시인, 김다희 시인이, 예심은 안재동 시인(한국문학방송 주간)이 맡았다.

 

올해도 당선작에 대한 작품평은 별도로 내지 않기로 한다. 한국문학방송의 신춘문예는 타 신춘문예나 문예지 등과 '차별성(개성)'을 매번 추구한다. 그래서 심사방식도 채점제인 것이다. 본선진출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인비(人秘)키로 한다. 본선진출자나 낙선자 모두의 사기를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끝으로, 이번 신춘공모에 참여해 주신 모든 응모자 제위께 진심어린 큰 감사와 아울러 아쉽게도 낙선된 분들께는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

 

― 정리: 안재동 시인(한국문학방송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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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아리 /최재영

 

 

처음 나는 겸손한 흙이었다
진흙 층층이 쌓인 어둠을 밀어내고
누군가와 끈끈하게 얽혀진 숨결
불룩한 옆구리를 뽐내며
어느 집의 연륜을 저장하는,
도대체 우화를 꿈꾸지 않았건만
나는 햇살을 움켜쥐고
내 안의 목록을 삭여내는 중이다
아주 오랫동안
해마다 비밀스런 내력을 보태며
맛과 맛, 그 아귀를 맞추는 시간들은
서로 맥박을 주고받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럴때마다
번쩍이는 세월의 빗금하나 그어지고
그리운 것에 대한 열망으로
짜고 싱거움에 길들여진 것들
손꼽아 여닫히던 햇살들
점점 순도 높은 깊은 맛을 우러낸다
내게 저장된 세월을
프리스틱 통에 담아가는 사람들,
그리움을 꾹꾹 눌러 담으며
겸손한 덕담 하나씩 건네준다.

 

 

 

꽃피는 한 시절을 허구라고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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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詩 쓰는 동안 행복과 고통이”

 

많은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내게 있어 詩를 쓴다는 것에 대해 뭐라고 정의 하기는 어렵다.
다만 그때그때 당면한 문제들에 최선을 다해왔다고 생각한다.
한 편 한 편 완성하기 위해 보낸 많은 불면의 밤들이 헛되지 않았다는, 그래서 나 스스로를 검증할 수 있게 되었지 않나 싶다.
詩를 쓰는 동안은 행복하고 또한 고통스럽다.
문장을 지우고 고쳐가면서 더 나은 글이 완성될 때의 그 만족스러운 순간들이 여기까지 오게 했다.
누군가에게 따뜻한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는 겸허한 시인이 되고 싶다.
지난 일년을 어떻게 보냈나 싶게 빠르게 흘러간 시간들이다.
바쁘다는 말을 늘 입에 달고 살았던 것 같다. 그 시간들 속에 함께 해 주신 많은 분들께 고맙다.
詩가 뭔지도 모르면서 다만 엄마가 지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좋아하는 아이들과 우리 가족을 위해 항상 최선을 다해 주는 남편, 무엇보다도 고맙고 감사하다.
詩가 임재할 진정성에 대해 가르쳐 주신 박경원 선생님, 고맙습니다.
만나면 즐겁고 편안한 시원 동인 선배님들, 제가 한턱 단단히 쏘겠습니다.
詩의 길로 한 걸음 내딛을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신 신문사와 부족한 작품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쓸 것을 다짐하며 감사드립니다.

 

 

 

 

루파나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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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순도높은 깊은 맛 우러나오길

양의 풍성함과는 달리 질이 그것에 미치질 못해 실망스런 심사였음을 먼저 밝혀둔다. 한동안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응모작들이 일정한 수준을 견지했던 점을 생각하면 무척이나 이상한 일이다. 응모하신 분들이 스스로의 문학적 진지성과 치열성을 한번쯤 되돌아봐야 할 것 같다.


대부분의 응모작들이 경험의 지루한 서술이나 단순한 풍경의 묘사에 빠져 의미있는 언어의 장을 구축하지 못하고 있었고, 어떤 응모작들은 맥락 없는 언어의 남용, 단절된 이미지들의 혼란, 장식적 비유의 화사함에 갇혀 스스로 시적 품격을 떨어트리고 있었다. 또 어떤 응모작들은 자기에 대한 집착이 강해서인지 개별성이 보편성으로 이어지질 않아 유의미한 소통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몇몇은 나름대로의 장점을 갖고 있었다. 주대생 씨의 경우 언어의 재치가, 고옥희 씨의 경우 비유의 참신성이 살만했고, 강란숙 씨는 일상적 체험에 대한 성찰이, 오영희 씨는 서사의 무게가 돋보였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주제의식의 밀도라든가, 시적 구조의 짜임새 등이 튼실하지 못하여 더 이상의 바람직한 결과를 얻어내지 못하였다.


최재영 씨는 시적 자질이 그 중 나아보였다. 언어의 운용이 자연스럽고, 시를 얽어매는 솜씨가 꽤나 세련되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평범함을 벗어나지 못했다. 주제의식이 뚜렷한 것과 너무 빤한 얘기를 드러내는 것은 구별되는 것이다. 언어의 질박함이 미덕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표현의 수일성의 결함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신인임에랴.


정직하게 말하면, 나로서는 어느 것도 당선작으로 밀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많은 젊은 문학도들의 기대와 희망을 헛되게 저버릴 수가 없다는 핑계로 나는 나 자신과 타협을 했다. 아쉬운 대로 최재영 씨의 「항아리」를 당선작으로 내보내는 까닭이다. 최재영 씨는 시의 길에 더욱 정진하여 ‘겸손한 덕담’만이 아니라 정말 ‘순도 높은 깊은 맛’을 우려낼 수 있는 항아리로 성장하길 바란다. 아울러 뽑히지 못한 많은 분들도 실망하질 말고 자신의 시업을 꿋꿋이 가꾸어 나갔으면 한다.

 

심사위원 김승립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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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 최재영

 

 

연두빛 내력들이 제 몫의 봄을 키우느라
햇살을 끌어 모으는 중이다
허공 한구석 팽팽해지고
골목에 나앉은 늙은 여자들
볼우물 가득 생의 이력을 오물거리는지
골목은 하루종일 분주하다
봄의 한 복판에서 출렁이는
저 환한 푸념들
가지마다 탱탱하게 들어차는 수런거림
한 순간 시간이 정지된 듯
지상과 허공 그 짧은 간극으로
물오른 생의 주름들이 펼쳐지고
음탕한 농담 한 두 마디 건넬 때마다
자지러지게 흩어지는 쭈글쭈글한 웃음소리
잠시 생을 붉게 물들이는
봄날 눈(眼)빛 환한 기억들이
골목을 가득 메우고 있다
담장에 기대앉은 봄꽃들
한동안 그들이 피워올린 검버섯을 따라 올라가고
여기 짧은 환희, 봄은 덫이었나.

 

 

 

꽃피는 한 시절을 허구라고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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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든든한 버팀목 동인들에 감사”

 

오랫동안 불면과 함께 지냈다.

불편한 이름 하나 가슴에 간직한 채 수년을 흘러왔다.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았고 새벽녘 수시로 찾아들던 까닭모를 설움들이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밤새 머리맡에서 수군거리는 은유의 모퉁이만 스쳐도 그 밤은 행복했다.
눈을 뜨면 무수히 쏟아지는 허물……, 나는 얼마나 자주 절망을 내몰아야 했던가.
시 쓰기는 항상 어렵다. 알 수 없는 것들이 나를 이곳까지 이끌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크고 작은 사소한 상처들이 생의 변두리로 나를 밀어냈는지도 모르겠다.
상처의 흔적 하나씩 생길 때마다 내가 견뎌야 할 시간은 깊고 또한 어떤 목표라고 여기던 것들은 점점 멀어지는 순간을 경험하면서 매번 쓰디쓴 독배를 마시곤 했다.


지사연수로 대둔산을 산행하게 되었는데 그곳 정상에서 어떤 새로운 다짐을 새기고 있을 때 전화를 받았다. 골목길…… 내 생의 상처가 자라고 그 상처가 다시 꽃이 되어 피어나는 곳, 바람이 들어차면 그곳에 뿌리내린 모든 삶이 다시 환하게 들썩거리는 곳…… 햇빛이 잘 들지 않는 골목길을 나는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것이다. 또한 내 언어의 뿌리도 그곳을 지나치지 못할 것이고 오래오래 곰삭아 깊은 맛이 우러나는 언어가 그곳에서 피어날 것이다.


내 안에 푸른 독이 스미기를, 내 안에 갇힌 사유들이 자유롭게 햇빛을 볼 수 있기를, 그래서 날카로운 칼날로 나를 벨 수 있기를 희망한다.


한 편 한 편 시를 쓸 때마다 다짐을 한다. 삿됨없이 시를 쓰도록, 내 시가 누군가를 위로하고 기쁨을 줄 수 있도록 또한 절실하지 않은 그 무엇을 나는 애써 미화하고 있는가를…….


이미 올 봄에 이승을 떠나신 어머니, 당선소식에 세상에서 당신이 제일 예쁘다고 말해준 남편, 아침도 잘 챙겨주지 못하는 엄마를 제일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아이들, 모두 정말 고맙고 사랑한다. 내가 편하게 일할 수 있는 공간의 지사장님과 이곳 평택의 영어를 책임지는 사무실의 선생님들, 그리고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 같은 시원 동인님들과 이 기쁨을 같이 하겠다. 부족한 작품에 손 들어주신 대전일보와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고개 숙여 감사드리며 큰 절 올립니다

 

 

 

루파나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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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시적 미학 절묘한 표현 돋보여”

 

예심을 통해 올라온 작품은 16명이 출품한 80여편이었다. 이 중에서 본심을 통해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네 명의 다섯 작품.

 

‘그해 겨울…’(허남훈)은 아프가니스탄 이주노동자의 현실을 그린 시였다. 변압기 공장에서 손가락마저 잘리고 임금마저 받지 못한 채 고향인 카불로도 갈 수 없는 처지인 형을 한국인 화자의 시선으로 그렸다. 이 시는 과거의 리얼리즘 시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작품 속에 감상주의의 낙인이 깊게 남아있다.


‘맛있는 두부’(최성춘)는 이채롭고 속도감 넘치는 시였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말랑말랑한 두부는 아스팔트에 떨어졌다/ 두개골이 갈라져 피가 나듯이/ 녹슨 냄새와 국물은 흘러나왔다”처럼 식탁에 차려진 두부와 오토바이 사고의 기억을 합성시켜 특이한 시적 활력을 생성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후반부로 갈수록 활력을 살리지 못한 채 상투형으로 마무리된 것이 흠이다. 시는 소설처럼 연속된 서사가 아니라 비연속의 연속적 서사다. 텍스트에 너무 친절한 서사를 부여한 점이 이 시의 최대 약점이었다.

 

‘떠들썩한 식사’와 ‘검객 사오정’(김영식)은 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떠들썩한 식사’는 “오후 두시의 강변 뷔페 안” 창가 식탁의 어느 청각장애부부의 “부지런한 필담”을 마치 그 부부의 일원이 된 듯 세밀하게 전하고 있다. 또 ‘검객 사오정’은 “황사 휘날리는 도시 비탈을 순례”해야 하는 자본주의 세일즈맨의 ‘검법(판매술)’을 실감나게 묘사했다. 두 작품의 결점을 굳이 찾자면 작품들이 너무 고요하게 완성됐다는 점이다.


“연두빛 내력들이 제 몫의 봄을 키우느라/ 햇살을 끌어모으는 중이다”로 시작되는 ‘골목길’(최재영)은 응모작들 중 단연 돋보이는 따뜻한 작품이다. 총 20행의 시행들이 저마다의 밀도로 촘촘히 살아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특히 “볼우물 가득 생의 이력을 오물거리는지/ 골목은 하루종일 분주하다”와 같은 표현은 그야말로 순간포착을 절묘하게 묘사했다. 또 시적 미학을 충분히 쏟아놓은 마무리 역시 뛰어나 심사위원들은 일치된 마음으로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심사위원 김명인, 이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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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 최재영

 

 

길을 나서면 안개가 먼저 다가온다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내력

지상의 열린 틈마다 안개가 스며들고

사람들은 한 번쯤 기침을 호소한다

새들은 노래하지 않으며

길은 늘 젖어있다

세상의 새벽은 잠 못 이루는 곳에서 먼저 깨어나

충혈된 소음이 도시를 빠져나가고

밤새 안개에 젖어 퉁퉁 불은 가로등이

불면의 문장처럼 침침하다

정오가 되기까지는 완전한 침묵이다

이곳의 시간은

안개의 흐름에 따라 정해진다

사물들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낼 때쯤이면

정오의 햇살이 길의 한복판까지 나와 있다

지루한 변명들이 길게 꼬리를 남기고 사라진다

내 안에 내가 관여할 수 없는 것들처럼

대부분의 안개는 길 위에서 소멸해 버리고

구부러진 생의 길목마다

어둠은 먼저 찾아드는 법

새들은 모두 어디로 날아갔을까

 

 

 

 

꽃피는 한 시절을 허구라고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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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수련과정 거친 솜씨 탁월 

 

시인을 꿈꾸는 사람들은 많다. 이번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응모한 전국 시인 지망생들이 무려 2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이 낸 1,500여 편의 시 작품 중에서 오직 한 편만이 당선작으로 뽑힌다. 그래서 시인을 꿈꾸는 사람은 많지만, 시인이 되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는 생각을 새삼 다시 갖는다. 

예선을 거쳐 넘어온 12분의 작품 중 조용숙, 최재영, 심은섭, 이순주 씨의 작품들이 최종적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네 분 다 일정한 수준에 이른 작품을 보여주었지만, 많은 논의 끝에 최재영 씨에게 당선의 영광을 안겨주기로 하였다. 

심사 위원 두 사람이 무엇보다도 관심을 둔 것은 시의 완결성과 참신성이었다. 시의 완결성이란 곧 시의 구조적 통일성을 말하는 것으로, 시는 특히 독자 공감의 의미 구조화가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참신성이란 언어 선택과 언어 조합에서 느껴지는 시적 탄력을 말하는 것으로, 신인으로서의 신선한 언어감각과 문체의 힘이 확인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네 분의 시가 모두 부분부분 구조적 오류와 진부성을 보여주고 있어서 선택이 어려웠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최재영 씨의 작품은 많은 수련 과정을 거친 솜씨가 돋보였고, 시적 완결성과 참신성 면에서도 높은 가능성이 인정되는 것이었다. 축하하며, 치열한 분석적 성찰을 통해 보다 좋은 작품 창작에 노력해 주기를 바란다. 

낙선한 분들이 가진 가능성도 매우 큰 것이었다. 도전 의식도 좋고, 상상력도 남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부분과 전체를 관계 짓는 안목에 미숙함이 보였다. 스스로가 지닌 시적 결함이 무엇인지 살피는 ‘눈’을 형성하여 새로운 창조적 도전 있기를 기원해마지 않는다. 

 

- 심사위원: 신승근, 박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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