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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 / 김행숙

 

 

잘 아는 길이었지만……

우리가 아는 그 사람처럼

알다가도 모를 미소처럼

 

안개가 자욱하게 낀 날이었어요.

눈을 감고도 갈 수 있는 길이었지만

눈을 감지 못하는 마음이었어요.

나는 전달책 k입니다.

소문자 k입니다.

 

거기까지 가는 길은 아는데

왜 가는지는 모릅니다.

오늘 따라 울적합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어요.

이럴 때 나는 내가 불편합니다.

 

만약 내가 길가에 떨어진 돌멩이라면

누군가가 나를 주워 주머니에 숨길 때의 그 마음을

누군가가…… 누군가를 쏘아보며 나를 집어 던질 때의 그 마음을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내가 알면 뭐가 달라지나요?

 

평소에도 나는 나쁜 상상을 즐겨했습니다.

영화 같은

영화보다 더 진짜 같은

 

그러나 상상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면

우리의 모든 상상이 비껴가는 곳에서

나는 나를 재촉했습니다.

한 명의 내가 채찍을 들고

한 명의 내가 등을 구부리고

 

잘 아는 길이었는데

눈을 감고도 훤히 보이는 길이었는데……

안개가 걷히자

거기에 시체가 있었습니다.

두 눈을 활짝 열어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있습니다.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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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문화재단은 3일 서울 종로구 교보빌딩에서 제28회 대산문학상 수상작과 수상자를 발표했다. 대산문학상은 시, 소설, 희곡, 평론, 번역 5개 부문에 시상하는 종합문학상이다. 희곡과 평론은 격년으로 수상자를 발표해 올해는 시, 소설, 평론, 번역 부문에서 4명의 수상자가 나왔다.

시에선 김행숙의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가 수상작으로 뽑혔다. 예심에서 선정된 10권의 시집을 대상으로 본심을 진행한 후 최종 대상작 4권을 선정했다. 그 중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는 “고통의 삶에 대한 반추, 미래를 향한 열기 등의 주제의식이 탁월한 리듬감과 결합하여 완성도 높은 시 세계를 형성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김행숙은 199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후 2009년 노작문학상, 2015년 전봉건문학상, 2016년 미당문학상을 수상했다.

장편소설을 대상으로 하는 소설부문에선 본심에 오른 6편 중 김혜진의 ‘9번의 일’이 수상작으로 결정됐다. 심사위원단은 “노동의 양면성을 천착하는 흡인력 있는 이야기로 우리 삶의 근간인 노동의 문제를 통해 참혹한 삶의 실체를 파헤치는 냉철하고 집요한 시선이 돋보인다”라고 평가했다. 김혜진은 201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후 2013년 중앙장편문학상, 2018년 신동엽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2년 전에는 ‘딸에 대하여’로 대산문학상 본심에 오르기도 했다.

평론은 유성호의 ‘서정의 건축술’이 선정됐다. 해당 비평집은 “비평적 세계를 안정적으로 펼치고 있으며, 정확한 심미성을 지향하면서 비평의 현장성과 역사성을 두루 겸비했다”라는 평을 받았다. 4개(영어·프랑스어·독일어·스페인어) 언어를 돌아가며 시상하는 번역 부문에선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을 스페인어로 옮긴 주하선이 수상했다. 주하선은 ‘82년생 김지영’과 이번 본심에 같이 오른 ‘잘 자요, 엄마’를 통해 문학 번역가로 첫발을 내디뎠다. 심사위원단은 해당 번역본에 대해 “원작의 태도를 잘 파악하고 원작을 살린 충실한 번역을 통해 뛰어난 가독성을 확보했다”라고 평가했다.

수상자에게는 각 상금 5000만원과 양화선 조각가의 청동 조각 상패 ‘소나무’가 주어진다. 시상식은 오는 26일 오후 4시 광화문 교보빌딩에서 열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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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의 존재 / 김행숙



유리창에 손바닥을 대고 통과할 수 없는 것을 만지면서…… 비로소 나는 꿈을 깰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벽이란 유리의 계략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넘어지면 깨졌던 것이다. 그래서 너를 안으면 피가 났던 것이다.

유리창에서 손바닥을 떼면서…… 생각했다. 만질 수 없는 것들로 이루어진 세상을 검은 눈동자처럼 맑게 바라본다는 것. 그것은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보는 것과 같지 않았을까. 유리는 어떤 경우에도 표정을 짓지 않는다. 유리에 남은 손자국은 유리의 것이 아니다.

유리에 남은 흐릿한 입김은 곧 사라지고 말 것이다. 제발 내게 돌을 던져 줘. 안 그러면 내가 돌을 던지고 말 거야. 나는 곧, 곧, 무슨 일이든 저지르고야 말 것 같다. 오늘에야 비로소 나는 죽음처럼 항상 껴입고 있는 유리의 존재를 느낀 것이다.

믿을 수 없이, 유리를 통과하여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창밖에 네가 서 있었다. 그러나 네가 햇빛처럼 비치면 언제나 창밖에 내가 서 있는 것이다.

 

 

 

제16회 미당문학상 수상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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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이제 우리 시는 부드러운 집요함 알게 됐다

 

심사위원들은 본심에 오른 작품들에 나타나는 두 가지 특징에 대해 우선 동의할 수 있었다. 첫째, 예년에 비해 비교적 젊은 시인들의 작품이 대거 본심에 올랐다는 것과 이를 반영하듯 실험적 형식을 개진하는 작품이 상당수 눈에 띄었다는 것이다. 둘째, 그와 동시에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체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경향도 두드러졌다. 그런데 이와 관련된 것이지만, 자신만의 방법론을 개진하는 데 집중하고 있는 작품들은 때로 형식의지만을 지나치게 드러냈으며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드러내는 작품의 경우는 때로 태도가 문장보다 훌쩍 앞서 나갔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방법론을 개성적으로 고수하면서도 주관에 함몰되지 않고, 현실에 대한 자신의 사유를 드러내면서도 문장의 탄력을 잃지 않는 작품을 최종적으로 검토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심사위원들은 어렵지 않게 김행숙 시인의 작품을 수상작으로 선정할 수 있었다.

 

당선작인 유리의 존재는 특유의 다감한 어조 안에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예리한 인식을 담고 있다. 그러면서도 문장들은 일말의 흐트러짐도 없이 간격들을 정확하게 유지하면서 작품 전체의 사상(事象)에 깊이와 긴장을 부여한다. “나는 오늘에야 비로소 죽음처럼 항상 껴입고 있는 유리의 존재를 느낀 것이다와 같은 문장은 감수성과 지성의 통합이라는 현대시의 과제가 한국시에서 어떻게 달성되어 가고 있는가를 증명한다. 이 문장에 심사위원들의 탄복이 있었음을 밝혀둔다. 이제 한국시는 부드러운 집요함을 알게 되었다. 수상을 축하한다.

 

심사위원 오생근·김혜순·송찬호·이영광·조강석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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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굉장히 잘 깨지는 존재아픔 함께 슬퍼할 수 있다면

 

기다리지 않아도,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봄은 온다고 했던 이성부(19422012)의 시구절을 비틀어 이렇게 사용할 수 있을까. 벅찬 기쁨, 오랜 소망 같은 것들은 그것들을 바란다는 사실조차 잊었을 때라야 비로소 찾아오는 것이라고.

 

단단하면서도 가슴 아린 시 유리의 존재로 올해 미당문학상을 받는 시인 김행숙(46)의 경우가 꼭 그렇다. 김씨는 13일 인터뷰에서 더운날 하염없이 길을 걷다가 정신 번쩍 들게 하는 서늘한 세숫대야 물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라고 밝혔다.

 

김씨는 최근 1년 새 병명조차 모른 채 아팠다고 했다. 심할 땐 비명을 지를 정도였다. 결국 마음에서 비롯된 뼈와 관절들의 고통이었는데 진통제, 신경계통 약들을 오래 복용하자 시 쓰는데 필요한 예민함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당선작 유리의 존재를 포함해 최근 1년간 간신히 쓴 8편 은 그런 몸과 마음의 악조건 속에서 건진 것들이다. 그래서 올해 수상을 전혀 예상 못했다는 것. 시라는 정신의 영롱함은 생살을 찢는 아픔 속에서 태어나는 것이라는 문학의 역설이 다시 한 번 어깨를 드러낸 셈이다.

 

당선작에 대한 설명을 부탁하자 김씨는 인간은 굉장히 잘 깨지는 존재인 것 같다. 그래서 누군가를 사랑하기도 힘들 뿐더러 충분히 가까이 다가갔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어떤 간격, 투명한 벽이 가로막고 있어서라고 말했다.

 

2000년대 중반 김씨의 등장은 시단(詩壇)의 사건이었다. 견고하고 단일한 시의 화자나 주체가 사라진 이상한 감각들의 세계에서 김씨는 오히려 자유로운 모습이었다. 인간 주체를 대신해 시의 주인 노릇을 하는 건 종종 귀신과 사춘기 악동, 혹은 분열된 시선 자체였다.

 

당선작은 그런 흔적을 품고 있다. 현실과 꿈의 질서가 교란돼 있고 심지어 죽은 자의 시선까지 상정한다. 살아있는 시인이 상상하는 시체의 시선, 그 시선에 비친 풍경은 그 이미지만으로도 섬뜩하고 참혹하다. 어떤 슬픔, 울음기마저 느껴진다.

 

시에 슬픔이 많은 이유를 묻자 김씨는 요즘 들어 부쩍 누군가의 아픔을 함께 슬퍼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고 했다. 천사는 천사이되 고통을 대신하는 천사가 아니라 곁을 지키며 함께 슬퍼해주기만 해도 좋을 천사가 지금 한국사회에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러면서 슬퍼한다는 건 단순히 우는 게 아니다. 말하자면 이건 아니기 때문에 슬퍼하는 것이라고 말을 이었다. 현실의 개선을 꿈꾸는 슬픔, 그래서 힘이 센 슬픔이라는 거다.

 

김씨의 문학도 결핍에서 출발했다. 여러 사람 앞에 나서기 꺼려하는 성격을 고치는 데 시 쓰기가 도움이 됐다. “지금도 시를 쓸 때 가장 큰 충족감을 느낀다고 했다. 김씨의 슬픈 시는 아팠던 사람이 아픈 사람에게 건네는 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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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의 초상 / 김행숙

 


입술들의 물결, 어떤 입술은 높고 어떤 입술은 낮아서 안개 속의 도시 같고, 어떤 가슴은 크고 어떤 가슴은 작아서 멍하니 바라보는 창밖의 풍경 같고, 끝 모를 장례행렬, 어떤 눈동자는 진흙처럼 어둡고 어떤 눈동자는 촛불처럼 붉어서 노을에 젖은 회색 구름의 띠 같고, 어떤 손짓은 멀리 떠나보내느라 흔들리고 어떤 손짓은 어서 돌아오라고 흔들려서 검은 새떼들이 저물녘 허공에 펼치는 어지러운 군무 같고, 어떤 얼굴은 처음 보는 것 같고 어떤 얼굴은 꿈에서 보는 것 같고 어떤 얼굴은 영원히 보게 될 것 같아서 너의 마지막 얼굴 같고, 아, 하고 입을 벌리면 아, 하고 입을 벌리는 것 같아서 살아 있는 얼굴 같고,

 

 

 

 

에코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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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월간 현대시학사가 전후 신서정파의 기수로 알려진 전봉건 시인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제1회 전봉건문학상 수상자로 김행숙 시인이 결정되었다. 수상 시집은 김행숙 시인의 에코의 초상이다. 전봉건문학상은 지난 한 해 발간한 중견 시인들의 시집을 대상으로 엄정한 심사 과정을 통해 상의 위상을 높이고, 우리 시단의 대표적인 문학상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제정되었다.

 

심사위원(남진우, 홍일표, 권혁웅, 조재룡)들은 김행숙의 시집에코의 초상도처에 선언과 주장과 판결의 웅성거림만 가득한 세계에서 힘겹게 에코의 연약한 목소리를, 그 사라져가는 현존을 기억하고 이어가려고 하는 그녀의 노력은 이번 시집에서 아름다운 시적 메아리를 낳고 있다.”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한 삶에서 뿜어 나오는 미광 하나로 김행숙이 공동체 저 밑바닥의 무의식을 불러내 지금-여기의 절망을 차분히 기록해나갈 때, 그의 시는 벌써 조용한 절규이며, 이 비극적인 삶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는 조금만 울려도 좋다고 믿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단호하고도 아름다운 실천이다라고 평하였다.

 

수상 작품과 수상 소감, 심사평 등은 월간 현대시학10월호에 발표될 예정이다.

 

수상자인 김행숙 시인은 1970년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고려대 국어교육과 및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9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사춘기(문학과지성사, 2003)이별의 능력(문학과지성사, 2007), 타인의 의미(민음사, 2010),에코의 초상(문학과지성사, 2014) 이 있고, 현재 강남대학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9년 제9회 노작문학상과 2014년 제8회 웹진 시인광장올해의 좋은시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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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부분 / 김행숙

 

 

어제 저녁 당신을 감동시킬 오페라 가수는 풍부한 감정과 성량을 가졌다. 예상할 수 없는 감정까지 당신에게

 

그러나 대부분 우리가 모두 아는 감정일 것이다, 그중에서

 

나는 얼굴을 들지 못하겠다. 우리가 모두 아는 것이 사실일 때에도 내일까지 바닥을 끌고 가는 긴 드레스 속에는 발목이 두 개, 곧 끊어질 듯. 젖도 크다, 곧 터질 듯.

 

나는 믿을 수 없다. 나는 마룻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다. 은빛 칼처럼 빛이 쑥 올라오는 틈새가 있다.

 

 

 

노작문학 수상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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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작문학상 운영위원회가 주관하는 제9회 노작문학상 수상자로 김행숙 시인이 10일 선정됐다. 수상작은 '어두운 부분' 4편이다.

 

이 상은 시 '나는 왕이로소이다'를 쓴 노작(露雀) 홍사용(洪思容.1900-1947)의 문학정신을 기리고자 그의 선영이 있는 경기도 화성시 문화계 인사들이 주도해 만들었다.

 

상금은 1천만 원이며 시상식은 내달 4일 경기도 화성시 정남면 라비돌리조트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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