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 서효인
사랑하는 여자가 있는 도시를
사랑하게 된 날이 있었다
다시는 못 올 것이라 생각하니
비가 오기 시작했고, 비를 머금은 공장에서
푸른 연기가 쉬지 않고
공중으로 흩어졌다
흰 빨래는 내어놓질 못했다
너의 얼굴을 생각 바깥으로
내보낼 수 없었다 그것은
나로 인해서 더러워지고 있었다
이 도시를 둘러싼 바다와 바다가 풍기는 살냄새
무서웠다 버스가 축축한 아스팔트를 감고 돌았다
버스의 진동에 따라 눈을 감고
거의 다 깨버린 잠을 붙잡았다
도착 이후에 끝을 말할 것이다
도시의 복판에 이르러 바다가 내보내는 냄새에
눈을 떴다 멀리 공장이 보이고
그 아래에 시커먼 빨래가 있고
끝이라 생각한 곳에서 다시 바다가 나타나고
길이 나타나고 여수였다
너의 얼굴이 완성되고 있었다
이 도시를 사랑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네 얼굴을 닮아버린 해안은
세계를 통틀어 여기뿐이므로
표정이 울상인 너를 사랑하게 된 날이
있었다 무서운 사랑이
시작되었다
대산문화재단은 제25회 대산문학상 수상작으로 시 부문에 서효인 시인(36)의 '여수', 소설 부문에 손보미 작가(37)의 '디어 랄프 로렌', 희곡 부문에 장우재 작가(46)의 '불역쾌재', 번역 부문에 케빈 오록 경희대 명예교수(78)의 영역작 '한국시선집: 조선시대'를 각각 선정했다고 7일 밝혔다.
심사위원단은 시 '여수'에 대해 "이 땅의 여러 장소에 대한 애정과 연민이 돋보이고 상투적 현실 인식에 안주하지 않는 풍성한 발견과 성찰을 보여준다"고 평했으며, 소설 '디어 랄프 로렌'에는 "다국적 소비문화의 영향 아래 자기 인식의 언어를 배운 젊은 세대가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과정을 서사적 상상의 발랄함으로 표현했다"는 평을 남겼다.
서효인 시인은 이날 광화문 교보빌딩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번 상은 나를 포함한 선후배 젊은 시인들에게 크나큰 격려를 준 것으로 생각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시·소설 부문 심사는 지난해 8월부터 올해 7월까지 1년간 단행본으로 출판된 작품을 대상으로 진행됐는데, 1980년대생 작가들의 약진이 눈에 띄었다. 격년제로 수상작을 내는 희곡과 평론 부문은 최근 2년간 나온 작품을 대상으로 했고, 번역은 최근 4년간 발표된 영어 번역물을 심사했다.
번역 부문 수상자인 케빈 오록은 1964년 한국으로 건너 와 외국인 최초로 한국문학 박사학위를 따고 40여 년간 한국문학 연구에 천착했다. 오록은 "첫 번째 번역 시집으로 1989년 한국문학번역상을 수상했고 그로부터 30년이 지나 커리어를 마감하는 지금 상을 타서 더 큰 의미가 있다"며 "이번 번역서는 한국 고전 번역 계획의 마지막 단계에 해당하는 시집으로, 조선시대 한시 600수 이상을 담은 시집이다"라고 말했다.
시·소설·희곡 수상작은 내년도 번역 지원 공모, 주요 언어 번역 등의 과정을 거쳐 해외에 소개된다. 상금은 부문별 5000만 원. 시상식은 오는 27일 오후 6시30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릴 예정이다.
'국내 문학상 > 대산문학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27회 대산문학상 / 오은 (0) | 2021.07.23 |
---|---|
제26회 대산문학상 / 강성은 (0) | 2021.07.23 |
제24회 대산문학상 / 이장욱 (0) | 2021.07.23 |
제23회 대산문학상 / 마종기 (0) | 2021.07.23 |
제22회 대산문학상 / 진은영 (0) | 2021.07.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