훔쳐가는 노래 / 진은영
지금 주머니에 있는 걸 다 줘 그러면
사랑해주지, 가난한 아가씨야
심장의 모래 속으로
푹푹 빠지는 너의 발을 꺼내주지
맙소사, 이토록 작은 두 발
고요한 물의 투명한 구두 위에 가만히 올려주지
네 주머니에 있는 걸, 그 자줏빛 녹색주머니를 다 줘
널 사랑해주지 그러면
우리는 봄의 능란한 손가락에
흰 몸을 떨고 있는 한그루 자두나무 같네
우리는 둘이서 밤새 만든
좁은 장소를 치우고
사랑의 기계를 지치도록 돌리고
급료를 전부 두 손의 슬픔으로 받은 여자 가정부처럼
지금 주머니에 있는 걸 다 줘 그러면
사랑해주지, 나의 가난한 처녀야
절망이 쓰레기를 쓸고 가는 강물처럼
너와 나, 쓰러진 몇몇을 데려갈 테지
도박판의 푼돈처럼 사라질 테지
네 주머니에 있는 걸 다 줘, 그러면
고개 숙이고 새해 첫 장례행렬을 따라가는 여인들의
경건하게 긴 목덜미에 내리는
눈의 흰 입술들처럼
그때 우리는 살아 있었다
대산문화재단(이사장 신창재)이 주관하는 제21회 대산문학상 시 부문에 진은영(43) 시인의 시집 '훔쳐가는 노래'가, 소설 부문에 김숨(39) 씨의 장편 '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이 선정됐다.
희곡 부문은 '칼집 속에 아버지'를 쓴 고연옥(42) 작가, 번역 부문은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영어로 번역한 최양희(81) 씨가 수상자로 뽑혔다.
6일 서울 광화문의 한 식당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진은영 시인은 "이번 수상은 문학적 행운이다. 언제 또 불행이 찾아올지 모르지만 궁핍한 순간에 찾아온 이 행운을 벗 삼아 좋은 시인이 되겠다." 소감을 내놨다.
진 시인은 "제 시는 누군가의 전범이 되는 종류의 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면서 "전범이 되지 않는 문학의 소중함이 있다고 생각하고, 전범이 될 수는 없으나 존재해야 하는 특별한 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저의 소망"이라고 말했다.
진씨는 시집 '훔쳐가는 노래'로 한국시의 미학적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았다.
부문별로 상금이 3천만∼5천만 원이었던 대산문학상은 올해부터 전 부문 5천만 원으로 조정됐다. 희곡과 평론 부문은 격년제 심사로 바뀌어 내년엔 평론 부문을 시상한다.
올해 시상식은 다음달 3일 한국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린다.
'국내 문학상 > 대산문학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24회 대산문학상 / 이장욱 (0) | 2021.07.23 |
---|---|
제23회 대산문학상 / 마종기 (0) | 2021.07.23 |
제21회 대산문학상 / 박정대 (0) | 2021.07.22 |
제20회 대산문학상 / 백무산 (0) | 2021.07.22 |
제19회 대산문학상 / 신달자 (0) | 2021.07.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