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이사장 신창재)이 주최하는 제13회 대산문학상에 김명인(시·사진 가운데)·김연수(소설·사진 왼쪽)·정과리(평론·사진 오른쪽)씨가 9일 선정되었다. 수상작은 김명인씨의 시집 <파문>과 김연수씨의 소설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정과리씨의 평론집 <문학이라는 것의 욕망>이다. 번역부문 상은 프란시스카 조(44) 미국 조지타운대 종교학과 교수가 한용운 시집 <님의 침묵>을 영어로 옮긴 <everythingyearned for>(미국 위즈덤 출판사 펴냄)에 돌아갔으며, 희곡 부문은 수상작을 내지 못했다.
9일 낮 시내 한 식당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수상자 김명인(59·고려대 문창과 교수)씨는 "앞으로 긴장을 유지하며 시를 쓸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는 않다"며 "전에는 열정이 내 시를 지탱해 왔다면 이제는 내가 아득해지는 지점에서 맞이하는 넓이와 깊이가 내 시를 떠받들고 있다는 느낌"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김연수(35)씨는 "평범하게 살았다면 지금쯤 대기업 말단사원으로 편하게(?) 지낼텐데 소설가의 길로 들어서서 이 무슨 고생인지 모르겠다"면서 "이번 상을 받아 앞으로 얼마나 더 고생을 해야 할지, 심사위원들이 나를 힘든 길로 자꾸 떠미는 것 같아 걱정"이라며 능청을 떨었다.
정과리(47·연세대 국문과 교수)씨는 "수상작은 한국 문학 이론이 지닌 한계를 돌파하고자 나름대로 애를 썼지만 스스로 부족하다고 생각하던 책"이라면서 "이번 수상은 세상이 나의 한계를 한계로서 묶어 두려는 결정이 아닐까 한다"고 말했다.
올해 대산문학상의 부문별 수상자들에게는 오는 25일 오후 6시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열리는 시상식에서 3천만원씩의 상금이 주어진다.
아직은 제 풍경을 거둘 때 아니라는 듯 들판에서 산 쪽을 보면 그쪽 기슭이 환한 저녁의 깊숙한 바깥이 되어 있다 어딘가 활활 불 피운 단풍 숲 있어 그 불 곁으로 새들 자꾸만 날아가는가 늦가을이라면 어느새 꺼져버린 불씨도 있으니 그 먼 데까지 지쳐서 언 발 적신들 녹이지 못하는 울음소리 오래오래 오한에 떨리라 새 날갯짓으로 시절을 분간하는 것은 앞서 걸어간 해와 뒤미처 당도하는 달이 지척 간에 얼룩지우는 파문이 가을의 심금임을 비로소 깨닫는 일 하여 바삐 집으로 돌아가면서도 같은 하늘에서 함께 부스럭대는 해와 달을 밤과 죽음의 근심 밖으로 잠깐 튕겨두어도 좋겠다 조금 일찍 당도한 오늘 저녁의 서리가 남은 온기를 다 덮지 못한다면 구들장 한 뼘 넓이만큼 마음을 덥혀놓고 눈물 글썽거리더라도 들판 저쪽을 캄캄해질 때까지 바라봐야 하지 않겠느냐
시인의 말
두어 달 嚴冬을 바닷가 시골집에서 야산의 고사목을 잘라 군불 지피며 갯바위에 올라 낚시나 하면서 살았다. 저녁 늦게까지 들리지 않던 파도 소리가 자정 넘겨 점차 스산해져가는 것을, 잠귀에 고여 오면 뒤척거려 쏟아버리곤 했다. 그러고 보니 오랫동안 그 비몽사몽간에 내 자각을 세워두었던 것 같다. 애써 의식하지 않았으므로 이 적요 길게 이어질 듯하다.
2005년 7월
김명인
초대 이형기문학상 김명인씨 격월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제정한 제1회 이형기문학상에 시인 김명인씨(60·고려대 문예창작과 교수)가 2일 선정됐다. 수상작은 시집 '파문'(문학과지성사)이다.
김명인 시인은 1946년 경북 울진 후포에서 태어나 1969년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이후 ‘반시(反詩)’ 동인으로 활동했다. 미국 유타 주 브리검 영 대학과 러시아 연해주 소재 극동국립종합대학에서 교환교수를 지냈으며 경기대 국문과 교수를 거쳐 현재 고려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시집 『동두천東豆川』(1979) 『머나먼 곳 스와니』(1988) 『물 건너는 사람』(1992) 『푸른 강아지와 놀다』(1994) 『바닷가의 장례』(1997) 『길의 침묵』(1999) 『바다의 아코디언』(2002) 『파문』(2005) 『꽃차례』(2009) 등이 있으며 소월시문학상, 김달진문학상, 동서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산문학상, 대산문학상, 이형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이 상은 지난해 작고한 이형기 시인의 삶과 문학을 기려 제정됐다. 상금은 300만원이며 시상식은 17일 세종문화회관 콘퍼런스홀에서 열린다.
두어 달 嚴冬을 바닷가 시골집에서 야산의 고사목을 잘라 군불 지피며 갯바위에 올라 낚시나 하면서 살았다. 저녁 늦게까지 들리지 않던 파도 소리가 자정 넘겨 점차 스산해져가는 것을, 잠귀에 고여 오면 뒤척거려 쏟아버리곤 했다. 그러고 보니 오랫동안 그 비몽사몽간에 내 자각을 세워두었던 것 같다. 애써 의식하지 않았으므로 이 적요 길게 이어질 듯하다.
저자 및 역자소개
시인 김명인은 1946년 경북 울진 후포에서 태어났고, 1969년에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이후 동두천에서의 교사 생활을 거쳐 월남전에 참전한 바 있다.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시단에 데뷔했고 이후 ‘反詩’ 동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미국 유타 주 브리검 영 대학과 러시아 연해주 소재 극동국립종합대학의 교환 교수, 그리고 경기대 국문과 교수를 거쳐 현재 고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시집으로 『東豆川』(1979), 『머나먼 곳 스와니』(1988), 『물 건너는 사람』(1992), 『푸른 강아지와 놀다』(1994), 『바닷가의 장례』(1997), 『길의 침묵』(1999), 『바다의 아코디언』(2002) 등이 있다. 김달진문학상(제3회), 소월시문학상(제7회), 현대문학상(제45회), 동서문학상(제8회), 이산문학상(제13회) 등을 수상하였다.
[수상소감] 숙명의 인연 : 지훈 선생님의 가르침과 나의 습작기
금년도 지훈 문학상의 수상자가 저로 결정했다는 통보를 받는 순간 아뜩한 현기증을 느낄 정도로 한동안 정신이 멍했습니다. 이 상은 우리 현대시의 우뚝한 이정표이셨던 조지훈 시인의 업적을 기려 주변인들의 정성으로 발의되었고, 제정 이래 그 취지만큼이나 상의 순결을 지켜내려고 애써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동안의 수상자의 면면에 고려대학교 출신 시인들이 철저히 배제되어온 것도 이와 같은 사정이 반영된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저야말로 고려대학교 출신으로 선생님의 훈도를 받아 시인이 된 사람이니,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참으로 뜻밖의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아직도 저는 선생님과의 인연을 숙명처럼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상이야말로 지훈 선생님께서 “그동안 네가 열심히 시를 쓰느라 고생했다” 하고 제게 내리시는 격려인 것만 같아서 감격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다시 고백하지만 저는 선생님을 뵙게 되면서 시를 써보려고 했었습니다. 제 시 인생의 단초(端初)를 선생님께서 잡고 계신 것입니다. 저는 사실 공부하고 싶었던 대학의 1차시험에 낙방하고서 우여곡절 끝에 고려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저는 한 학년을 다 마치도록 전공에 대한 회의를 접지 못했습니다. 그 덕분에 1학년 때에는 낙제과목이 여럿일 정도로 학과공부에 소홀했었습니다. 심지어는 지훈 선생님께서 담당하셨던 국어작문조차도 낙제였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시인이나 작가가 되어야겠다는 포부 따위는 가져보지도 않았습니다.
대학 1학년을 마칠 무렵, 고학이 너무 힘에 겨워 마침내 건강까지 해치게 되자, 차라리 있는 현실을 그대로 수긍해야겠다는 결심이 섰습니다. 그 겨울에는 그나마 가정교사 자리도 잃어버려서 학업의 지속이 참담한 고민거리가 되었습니다. 서울 생활이 견디기 힘든 곤혹스러움으로 다가왔던 그때 저는 친구의 하숙방에서 며칠 기숙하면서 닥치는 대로 소설들을 읽었습니다. 그 무잡한 독서 끝에 제가 한 선택은 기왕에 펼쳐진 길이라면 그렇게 살아보리라는 결심이었습니다.
시를 습작하기 시작한 것은 대학 2학년에 진급해서 지훈 선생님의 ‘시론’ 수업을 듣게 되면서였습니다. 저는 다급해진 학비나 해결하려고 장학금을 받을 요량을 혼자 속셈했었습니다. 그때 지훈 선생님의 ‘시론’ 과목이 설강되었는데, 선생님께서는 오래 와병중이라서 한 학기에 한두 번 출강하시는 것이 고작이셨습니다. 따라서 선생님의 과목은 언제나 휴강이었습니다. 성적도 리포트로 대신했는데, 그 과제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읽고 요약하는 것, 자작시 다섯 편을 써서 제출하라는 것 등이었습니다. 저는 ‘시론’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시를 습작해보았습니다. 시에 관해 아는 바가 없었으므로, 되도록 많은 작품들을 읽으면서, 작시(作詩)를 소화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기성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괜찮다 싶은 시편을 만나면 노트에 수기(手記)했던 그때부터 저는 차츰차츰 시에 매료되었습니다. 이듬해 신춘문예에 몇 편의 습작품들이 최종심에 오르는 바람에 시를 계속 써보려는 열정을 가졌으니, 시에 다가섰던 저의 업(業)은 그렇게 마련된 선생님과의 인연 탓이었던 것입니다. 선생님의 그 과제가 아니었다면 제가 시를 써볼 엄두나 냈겠습니까. 그렇게 찾아든 시마(詩魔)로, 마침내 저는 지금까지 시를 앓아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선생님의 ‘시론’을 수강했던 그 2학년 초가을부터 습작을 들고 선생님 댁을 혼자서 찾아다녔으니, 그건 또 어디서 솟아난 숫기였을까요. 선생님이야말로 시의 인생으로 저를 안내하신 분이십니다.
저는, 지금도 기억합니다. 성북동 골짜기 선생님 댁을. 선생님이 칩거하고 계셨던 개울 건너 목욕탕, 골목 끝의 누옥(陋屋)을. 대문을 두드리면 선생님께서 직접 빗장을 따주시던 기역자로 꺾어진 기와집, 그 문간방 서재에, 오랜 병환으로 수척해지신 선생님이 누워 계셨습니다. 거의 두 주에 한 번 꼴로 조포(粗暴)하기 이를 데 없었던 습작품을 갖다 드리면, 선생님은 전에 두고 갔던 시편들을 제게 돌려주셨습니다. 저의 습작품들을 일일이 챙겨 읽으시고, 제목이며 구절들을 꼼꼼히 첨삭해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누구도 받아보지 못한 선생님의 살뜰한 지도를 받았던 셈입니다. 오래 떠돌며 사느라고 그때의 그 원고들이 언제 어떻게 산실(散失)되었는지, 지금 제 수중에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너무 내성적이어서 부끄럼을 많이 탔던 저는 습작에 대한 스승의 평가를 제때 여쭤볼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첨삭원고를 돌려주시는 일 외에는 제 작품에 대해 가타부타 구체적인 말씀들을 아끼셨습니다.
기묘한 침묵의 첨삭지도는 거의 두 해나 계속되었습니다. 그 사이에 저는 해마다 신춘문예 최종심에 들기는 했지만, 번번이 낙선의 고배를 마셨습니다. 대학 3학년 말의 겨울방학이었던가요. 선생님께서는 동아일보의 신춘문예를 심사하고 계셨습니다. 습작원고를 들고 찾아간 저를 곁에 앉혀놓고, 그해의 당선시를 읽어주셨습니다. 마종하 시인의 시였을까, 제가 몸 둘 바를 몰랐던 것은 저의 작품도 거기 투고되었던 까닭이었습니다. 당선작을 미리 귀띔해주신 것은 허망한 기대로 제가 마음 상할까 다독거려준 배려였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선생님을 찾아뵈었던 것은 제가 대학 졸업반이 되던 해의 2월 어느 날이었습니다. 선배였던 오탁번 형과 동행이 된 자리였습니다. 오탁번 선배는 그때 이미 신춘문예로 등단한 시인이었습니다. 그가 지훈 선생님 댁을 방문하면서 저를 앞장세웠던 것은 습작시편을 들고 선생님을 자주 찾아뵙는다는 제 소문을 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날 빈손으로 선생님 댁을 방문할 수 없어 ‘도라지 위스키’ 한두 병을 마련했던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 싸구려 위스키로 우리를 응대하시곤 술기운 탓이신지, 예의 굵은 바리톤으로 당신의 습작 시 〈월광곡〉을 낭송하셨습니다. 그해 늦봄에 선생님께서 돌아가셨으니, 아무리 철부지 적의 일이라 하지만 아직도 그때의 민망함을 씻어낼 길이 없습니다. 선생님은 간경화에다 동맥경화까지 오랜 지병을 겹쳐서 앓고 계셨으니, 술을 드시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급조된 계기들이 만들어준 성급한 우연으로 대학 2학년 말부터 신춘문예의 최종심에 들기는 했었지만, 저는 번번이 낙선의 좌절을 맛보아야만 했었습니다. 무딘 재주에다 생계조차 번거로웠으니 시의 깊이와 방법에는 제대로 눈뜨지 못한 채 몇 년을 허송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좌절들을 딛고 제가 다시 시를 쓰려고 했던 것은 1972년 늦가을, 3년을 꼬박 채운 사병생활을 마감하고 제대한 뒤였습니다. 가판대에 놓인 신문에 실린 신춘문예 모집광고를 보고 며칠간 급조해서 응모했던 작품으로 저는 운이 좋게도 마침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던 것입니다.
돌이켜 보니 저의 시 쓰기는 순전히 선생님으로부터 비롯된 사건입니다. 아니 시보다 앞서 저는 스승으로서 선생님을 상기할 때가 많았습니다. 어린 제가 뵙기에도 선생님은 대인의 풍모를 지니셨고, 누구라 할 것 없이 주변인들을 감동시키셨습니다. 선생님의 남다른 모습을 우리들 제자들은 누구나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쉰을 채 못 넘기신 아까운 연세로 선생님은 타계하셨습니다. 어느새 그 연치를 넘겨 살아가고 있지만, 저는 시인으로서 선생으로서 난처한 지경을 만날 적마다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처신하셨을까 하고 자문해볼 때가 잦습니다. 그러니 아직도 선생님을 그리워하는 것은 시인된 입장보다도 그분의 제자로서의 사정이 더 큰 것입니다. 저는 정말로 이 상의 수상자가 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끝으로 저를 수상자의 반열에 넣어주신 심사위원께, 그리고 이 상을 운영하시는 나남문화재단 측에도 마음으로부터의 고마움을 전해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제7회 지훈문학상 심사보고
지훈문학상의 규정에 따라 지난 2년간(2005년 4월∼2007년 3월) 시집으로 간행된 성과들 중에서 3인의 심사위원이 추천한 바를 종합정리한 결과 다음의 다섯 시인이 최종심의 대상으로 선정되었다. 김명인, 《파문》(문학과지성사); 신현정, 《자전거 도둑》(애지); 장경린, 《토종닭 연구소》(문학과지성사); 최종천, 《나의 밥그릇이 빛난다》(창비); 최하림, 《때로는 네가 보이지 않는다》(랜덤하우스중앙).
약 10일의 검토 기간을 거친 뒤 이루어진 최종심 회합에서 심사위원들은 후보를 김명인, 최하림 두 시인으로 좁히고, 다각도로 의견을 교환한 끝에 김명인의 《파문》을 수상 시집으로 결정하였다. 나머지 세 권의 시집도 각기 뚜렷한 개성과 시정신의 밀도를 보여주는 성과로서 높이 평가되었으나, 심사대상 기간의 성과와 함께 그 이전의 시력(詩歷)이 보여주는 모색과 성취의 궤적 또한 고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취지에서 앞으로의 시적 진전을 더 기대하기로 했다.
최하림, 김명인 시인의 시집들이 보여주는 공통점은 삶의 남은 자락이 그다지 많지 않다고 느끼면서 이 세계를, 그리고 자기 자신을 응시하는 시선일 것이다. 이런 유형의 시편들이 흔히 빠져들기 쉬운 상투적 정신주의 내지 고답적(高踏的) 달관의 유혹을 거절하고 사물들과 상황을 바라보는 절제된 태도에 우리는 주목했다. 아울러, 그러한 시적 긴장이 두 시인의 오랜 시작생활을 통해 견지되어온 서정적 자기규율의 성실성에 기초해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의견을 같이했다.
그런 가운데서 김명인 시인을 수상자로 선정하게 된 이유는 작품의 원숙함 속에 살아있는 주제와 언어의 치열성이었다. 1970년대 후반의 ‘반시(反詩) 동인’ 활동과 첫 시집 《동두천》(1979)으로부터 약 30년의 시적 여정(旅程) 동안 작품세계에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지만, 그는 언제나 자신의 주제와 시적 상황에 대한 긴장된 관계를 견지해왔다. 근년의 작품들에 자주 등장하는 죽음 또는 허무의 문제들에 대한 시적 접근방식에서도 그의 시선은 보기 드물게 날카롭고, 그의 언어는 강선(鋼線)처럼 팽팽하다. 이러한 긴장과 치열함이 앞으로도 값진 성과를 산출하리라 기대하면서 우리는 그의 이름을 지훈문학상 수상자의 명단에 올리고자 한다
시가 떠오르면 어쩔 수가 없었다. 일도 손에 잡히지 않고 하루 종일 2% 부족한 사람으로 살아야 했다. 시는 나를 2% 부족한 사람으로 살게 한다. 아니면 2% 부족한 나였기 때문에 시를 쓰며 사는지도 모르겠다.
돌이켜 보니 완벽한 것은 나를 유혹하지 못했다. 2%의 여백, 살랑살랑 여운을 남기며 가는 꼬리를 따라다녔다. 하늘도 어둠의 2%를 열어놓기 위하여 별을 띄웠으리라.
별이 빛나는 한, 지상에는 2%의 갈증을 느끼는 시인들이 노래를 부르리라. 부족하지만 나도 함께 노래를 부르고 싶다.
지하철 1호선을 타고 동대문운동장으로 가는 길에 당선통보를 받았다. 전화기를 들고 허둥지둥하는 나를 보고 있는 아내의 눈빛도 요란하게 떨렸다. 한나절이 지났지만 아직도 얼떨떨하다.
부족한 시를 뽑아주신 매일신문사와 심사위원님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낳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은혜, 옆에서 묵묵히 지켜봐 준 아내와 아들딸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시의 스승인 아모르파티님들과 어젯밤에 쓴 시를 오늘 아침에 들어주었던 제자들을 위해 붉은 마음을 펴서 장미꽃 한 송이를 접는 중이다.
[심사평]
예심을 거쳐 올라온 서른 분의 작품을 다시 검토해 본 결과 남은 작품은 '황소'(서은교), '아가리 마을'(이규), '가야동 계곡'(김순자), '아스팔트 킨트'(김우연), '입이 없는 비평'(최문희), '나무별똥'(문성록), '불안의 거처'(김지고), '일획'(정수원), '마네킹'(박정수), '소금밭의 기억'(김중곤), '바늘'(김명희), '파문'(이장근), '토마토'(하숙욱), '등피를 닦으며'(박선영) 등이었다.
매번 느끼는 일이지만 신춘문예의 특성상 새로운 것에 천착한 나머지 일부러 문장을 비틀고 기발한 착상에 몰두해 난삽한 기교의 과잉에 의한 억지가 많았다.
비튼 문장이나 발상이 독특한 감각으로 살아나 신선한 감동을 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새로운 감수성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표현하기까지의 데생의 기초가 우선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냥 시단의 한 흐름을 따르고 있는 난해한 아류의 것들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이런 점에서 새로움도 있고 표현의 신선함을 주는 작품으로 '일획' '마네팅' '소금밭의 기억' '바늘' '파문' '등피를 닦으며' 등을 들 수 있었다. 작품 하나 하나 놓고 볼 때 모두 독특한 포즈을 지니고 있어 오래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투고한 작품이 모두 고르다는 점에서 이장근의 '파문'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파문'은 자칫 통속적으로 떨어질 평이한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독특한 시적 비전에 의해 삶의 진지성과 감동을 주는 데 효과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이 시인이 지닌 삶에 대한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된다. 앞으로 더 깊은 비전에 천착해 좋은 작품을 생산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