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너무 가엾다 / 권혁소
배롱나무를 좋아하는데,
감나무도 한두 그루 있다면 좋겠는데
주춧돌 세운 여기는 배롱나무도 감나무도
뿌리 내릴 수 없는 수목 한계선
알면서도 나무 탓을 한다
현주玄酒 같은 사랑 한 번 하고 싶었는데
세상에는 그렇지 않은 마음도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우리는 서로에게 얼마나 가여운 존재였을까,
잘라버리고 싶은 나무였을까
더 이상 뿌리를 뻗지 않는 나무를 뽑아내며
이제야 묻는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던 것이냐고
등 돌린 그대가 저만치 걸어간다
그대가 가서 숲이 된다면 좋겠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말고 동짓달 하늘에 핀
초승달이 된다면 좋겠다, 이것이
빌 수 있는 마지막 축복 이라니
우리가 너무 가엾다
[수상소감]
‘양간지풍’ 거세게 불던 날 밤이었다. 산골 이웃들과 봄바람 안주하여 술 한잔 걸치고 바람 너울대는 마당에 들어서는데, 전화가 왔다. 모르는 번호였다. 그런데, 받았다.
“박영근 시인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입니다··· 모르는 전화를 반갑게 받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선생님의 시 ?우리가 너무 가엾다?가 제6회 박영근작품상에 선정되었습니다··· 거부하지 않으신다면 수상소감 등을···”
잊고 있었던, 아니 잊으려고 했던, 생각하면 늘 가슴 한켠이 아려오는 박영근 시인, 아니 영근이 형···, 그 영근이 형이 따라주는 상이라니···.
삼십 몇 년 전으로 돌아가 본다.
1983년 5월에 조태일 시인이 ‘움직이는 시’라는 부제를 달아 ‘역사와 더불어 살아가는 시 무크’ ??시인??을 복간했을 때 나는 아직 제일 싼 담배를 피우는 대학생이었다. 맘껏 책을 살 수도 없던 때, 춘천 ‘청구서적’ 한 귀퉁이에 기대어 서서 목차부터 찬찬히 읽었다. 거기서 처음 박영근이라는 이름을 만났고, 형의 시 ?앞날을 향하여?와 ?취업 공고판 앞에서?를 읽었다.
누렇게 바랜 책을 다시 열어 보니 ‘···어두운 소문들 부서지는 공고판 앞에서/살아있으므로 믿어야 할 앞날들···’에 밑줄이 쳐 있다. 그리고 나는 투고를 결심했던가.
1984년 ‘민주·민중·운동·문학’이라는 부제를 단 ??시인?? 2집을 통해 나는 ‘등단’이란 것을 했고, 형은 같은 책의 특집 좌담회(바람직한 문학운동을 위하여) 토론자로 참석해서 ‘본격적인 노동자 입장도 아니고 먹물끼가 든 노동자’라고 자신을 낮추면서도 당시의 ‘지식인 주도의 운동 양상’을 드세게 비판했는데, 많이 공감했던 것 같다. 어쨌든 형은 그해에 첫 시집 ??취업 공고판 앞에서??를 청사에서 냈고, 나의 시는 조금씩 더 거칠어졌다.
형이 택시를 타고 춘천으로 왔던가 안 왔던가. 오라고 했던가 오지 말라고 했던가. 택시비가 있다고 했던가 없다고 했던가. 그런데 춘천 퇴계동 어디쯤에서 택시비를 계산하는 내가 보이는 환영은 뭘까. 지금은 배가 터지도록, 술집을 통으로 살 수도 있는데···.
형은 ‘노동운동’을 했지만 나는 고작 ‘노동조합 운동’을 한다. 형은 노동시를 썼지만 나는 고작 노동자 풍의 시를 흉내 낸다. 형은 기계와 여공과 가난한 과거에 맞서 치열했지만 나는 고작 시대와 불화하는 사랑을 불안해 할 뿐이다.
형과 이렇게 새로이 얽힌 것을 이제 어쩌겠는가. 형이 나를 다시 불러세운 것은 아마도 ‘더욱 단단한 노동자로 살라’는 뜻이겠지만, 내가 뭐라고···. 늘 그래왔던 것처럼 아이들과 함께 ‘거센 바람이 불어와서···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샛바람에 떨지 마라’ 힘차게 부르는 수밖에. 그렇게 함께 그리움을 달래는 일 밖에.
미욱한 졸작을 작품으로 격상시켜주신 심사위원들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졸시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나의 민중들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다.
[심사평] 세상에 대한 연민과 이해와 공생의 마음자리
박영근 시인은 시는 “서정적 울림과 설득력 있는 현실”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도저한 사유가 있더라도 서정성에 가닿지 못하면 시의 울림은 꺾이고 만다. 현실을 길러내는 언어의 파문 또한 중요하다. 심사위원들은 ‘울림과 현실’을 새기며, 제 6회 박영근작품상 선정에 숙고와 토의를 거듭했다. 그 과정에서 ’박영근 시인의 시 정신을 잇는 빼어난 작품 1편‘을 선정한다는 것의 무거움을 절감했다.
예심에서 올라온 15편의 시들은 모두 박영근의 문학정신을 잇는 특성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들 중 김선우· 김효연· 조말선· 이창기· 이현승· 최지인· 황인찬· 권혁소의 시편에 주목했다.
박영근의 유고시집 『별자리에 누워 흘러가다』와 깊이 닿아 있으며 “죽은 지 오래인 별들의 임종게를 발굴해 옮겨 쓴” 김선우의 「천문」, “보잘것없는 것들이 뭉치면 확성기가 되고 투쟁조끼가” 된다는 김효연의 「지역뉴스」와, 심야식당, 야간분만 등 노동력의 시대적 변화 양상을 엿볼 수 있는 조말선의 「야간조」, “복지 생활자들의 숲”이 된 작금의 변방과 소외를 다룬 이창기의 「나쁜 꿈」을 중점적으로 검토했다. 더불어 “우리는 여전히 아우슈비츠에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할 수 없었던 쪽에 인간은 있다”는 압축된 인간선언 이현승의 「호모 사케르」와 이 시대 절박한 문제인 고독사와 주거문제를 소외된 노동과 결합시킨 수작 최지인의 「도시 한가운데」, 성소수자 문제를 독특하고 현장감 있게 다룬 황인찬의 「우리의 시대는 다르다」 등으로 좁혀서 의논했다.
단 한 편의 시로 작품상을 결정한다는 데에 적잖은 부담이 있었고, ‘시 자체냐, 시 정신이냐’라는 논란이 될 만한 고민도 없지 않았으나, 박영근의 생애와 시 정신을 동시에 감안하며 범위를 좁혀서 의논한 결과 권혁소의 「우리가 너무 가엾다」를 제6회 박영근작품상으로 선정했다. 2019년 하반기에 출간된 시집 『우리가 너무 가엾다』 의 표제작이기도 한 이 작품은 일반적인 저항시와 구별된다. 이 시는 대상과의 일체감을 이룬 채 시적 내면을 객관화하는 능력이 돋보인다. 동시에 타자를 부정하고 분리하는 세계 너머를 가리키는 손가락은 품 넓은 사랑의 시학으로 채워진 시의 명징한 장소이기도 하다. 시인은 지치고 나뉘어 서로의 삶을 박탈하려는 갈라진 세상에 연민과 이해와 공생의 마음자리를 선물하고 있다. 밋밋할 만치 소박하게 독백하는 듯한 이 시는 언어라는 꽃에 인위적 데코레이션을 하고 향수까지 뿌리기도 하는 현재 시단에서 드물게 담백하고 솔직하다. 광장과 투쟁이라는 용광로를 통과한 쇳물의 생애를 거쳐온 자가 존재 자체에 바치는 경외와 겸허한 연민의 목소리가 시의 진정성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등 돌린 그대가 저만치 걸어”가 “그대가 가서 숲이 되었으면 좋겠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말고 동짓달 하늘에 핀/ 초승달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것이” “빌 수 있는 마지막 축복이라” 해도, 그래서 “우리가 가엾다” 해도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 비록 사랑이 환상일지라도, 백두대간 병풍 아래 사는 시인의 바로 이 사랑의 축복으로 하여 동과 서, 남과 북으로 나뉜 대관령 진부령 모든 령들을 넘어설 수 있길 빈다. 수상을 마음 깊이 축하드린다.
- 심사위원: 박수연(평론가), 오창은(평론가), 김해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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