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밤의 모자 / 권민자

 

안부는 도로 입속에 넣어줘

토마토의 色을 빌려주겠니? 가지나 타조의 色 같은 것도

괜찮아?

나의 발은 완전히 몽롱해졌으니

은신시켜놨던 자학이나 꺼내야겠다

엉망진창 울고 있는 얼굴과 불쌍한 어깨는 쓰레기통에 처박고

나는, 폐빌딩에서 나올 법한 동전

내 등짝은 폐빌딩의 문짝처럼 너덜너덜해

나는 나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열쇠와 양말을 챙겼다

밤은 밤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토마토가 필요했다

토마토처럼

굴러가기 좋은 동전을 폐빌딩에서 발견한 나는

모자 쓴 밤의 모자를 벗기겠다

모자의 얼굴과 내 얼굴을 구분 못하겠다

떨어지지 않는 발과 떨어진 발을 고르고 고르다 할 수 없이

괜찮아지겠다

 

 

728x90

 


 

그녀의 사막 / 도복희


  여자의 몸에 더듬이가 자라기 시작했다 밤이 익어갈수록 손톱을 물어뜯는 횟수가 빨라졌다 그가 벗어놓고 간 와이셔츠와 빠진 몇 가닥 머리카락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언젠가부터 낯선 냄새가 여자의 몸에 붉은 발진을 일으켰고 시간이 지나면서 냄새의 농도는 차츰 진해지기 시작했다 너무 오래 그 남자만 바라보고 왔기에 손동작 하나하나 읽히지 않는 것이 없는 여자에게 냄새의 징후는 불길했다 그것은 편서풍이 불 때 느껴지는 묘한 기분으로 가만있어도 멀미를 일으켰다 여자의 밤이 길어지고 발진의 부작용으로 온몸을 벅벅 긁어댈수록 길게 뻗어가는 더듬이는, 닫힌 현관문을 빠져나가 그가 품고 있는 흔적을 찾아다녔다 몸 한쪽에서 길어진 더듬이가 낯익은 냄새를 찾아 나선 동안 그녀의 발이 검은 집을 기웃거렸다 키우던 난화분들이 배배 말라가며 뱉어내는 신음이 베란다 가득 쌓여가는 집, 생장점을 저당 잡힌 여자가 더듬이로 버티는 집에서 밤마다 목쉰 소리가 웅얼웅얼 창틀을 새나갔다 악어가죽 소파에 앉아 있는 등에 악어 한 마리 아가리를 쩌억 벌리고 있다 끝도 없이 중얼거리는 입 바삭하게 말라가는 말들이 악어의 목구멍 속으로 연신 뛰어 들어가는 저녁, 그녀의 사막에는 돌개바람 뿌리가 쭉쭉 뻗어가고 있었다




지느러미의 본능


폭우 끌어당긴 가문비나무 한 그루

날비린내를 풍긴다

일시에 펄럭거리는 바람의 결 따라

비릿한 냄새 창문 넘을 적마다

구석구석 돋아나는 비늘,

오만 년 전 잃어버린

꼬리지느러미 주변부가 근질거린다

지느러미가 양귀비꽃처럼 돋아나면

수중 곳곳 드나들 수 있겠다


수초 사이사이 피라미들

불빛 쪽으로 고개 드는 새벽녘

쏘가리가 쏘아 올리는 파문이

상형문자로 뜨고

두 발 얻으면서 사라진 꼬리가

가슴에서 자라는 나는

물에서 퇴화된 종족

천년을 뛰어넘어 전해진 수면 위

네가 보낸 글자를 해독하느라

양팔 벌린 자세로 종일 서 있다


금강 물길 뒤집어질 때마다

빗길 뚫고 달려가 강둑에 서는 것은

지느러미 본능 탓

돌아가고픈 숨죽인 기대가

황토빛으로 뒤집어져 흐르기 때문

나무가 품고 있던 물고기 떼

먹장구름 따라 우루루 몰려가는 곳으로

꼬리지느러미 힘차게 방향을 튼다






낭만적 우울에 대한 처방전


동방마트에서 사온 햇소금 한 수저와

당신을 밀어내고 남은 공허 한 줌을 섞어

세상에서 제일 심심한 오븐에 구워내면

씹지 않아도 넘어가는 쿠키 다섯 개쯤 된다

그것을 적당히 갈라 때마다 끼니로 대체하면

그런대로 평온한 하루를 보낼 수 있다

간간 바람과 햇살을 공복에 복용하는 것으로

경미한 우울증을 넘기기도 한다


소스리바람으로 제조한 것보다는

골 바닥에서 산마루로 불어 올라간 것을

이용하는 편이 재발 방지에 도움이 된다

햇살의 양은 조절이 필수적이다

절대적으로 과부하 상태를 막아야 한다

포플러 잎새에서 정제된 빛이 최상의 조건

주로 이른 아침 갓 따낸 태양을 활용하는 편이 바람직하다


부작용으로 심한 알러지 증상을 보일 수 잇으니

먹장구름이나 안개를 주의할 것

비상시를 위해 비타민제와 수면안대를 준비할 것

호흡곤란이 올 경우를 대비해 소나무에서 추출한

산소통을 항상 가까이 비치해 둘 것

쿠키의 장기 섭취는 혈압의 수치를 떨어뜨려

삶에 대한 의욕을 제거할 수 있으니 조심할 것


이상을 실연을 시련으로 받아들인

낭만적 우울에 대한 민간요법으로

체질에 따라 속성으로 치유되기도 하나

간혹 평생을 복용하고도 개선되지 않는 특이 체질이 있다




허물을 벗다

파란 양철대문 옆 삐딱하게 자리 잡은 등받이 나무 의자

구름을 앉히고 바람을 품던 몸 반질반질 닳아 있다

이른 저녁밥을 물리고 앉은 노인의 눈이

어둠 안으로 파묻히는 골목을 바라본다

되풀이해 온 여느 날처럼

새 떼 한 무리 하늘을 끌고 가는 동안

한낮 폭염에 지쳐버린 바람이 맨발 위에 머문다

투두둑 떨어져 내리는 웃음소리

간간 들려오는 담장 안

농익어서 스스로 떨어지는 까만 분꽃씨

뜸들어가는 밥 냄새를 잊을 수 있을까

그의 등이 의자 깊숙이 파묻히고

상수리나무가 먹빛을 뒤집어쓴다

능소화 툭툭 떨어져 있는 그늘에

능구렁이 한 마리 허물 벗어두고

달의 입구로 미끄러져 간다

그의 발에서 흘러내린 뒷굽 닳은 신발 한 짝

이슬 맞으며 대문 밖에 놓여 있다


 



그늘의 냄새


그네를 타고 있었죠

아무도 없는 운동장에서

높이 날아올랐죠

바람이 손톱을 세우고 귓불 할퀴어도

통증이 되살아나지 않았죠

구르지 않아도 하늘로 올라가는 텅 빈 운동장

그네 위 둥실 떠오르던 몸이

한순간 땅바닥에 곤두박질쳤죠

박살난 뼈마디가 살을 뚫고 나왔는데

하나도 울지 않았죠

늘 혼자이던 그림자 안

그 애가 목매단 닭들에게 모이 던져주며

상처를 부풀리고 있었죠

자살한 엄마의 그늘 아래서

자라지 못하는 그 애 마른 눈물 바라볼 때도

심장 박동 수는 일정하게 간격을 맞추고 있었죠

검은 집 담벼락이 담쟁이덩굴 무덤이 되고

겨우내 끊이지 않는 곡소리 벽을 타고 기어 올라갔죠

흉물이 되어버린 그 집 내력에

두 귀 닫아버린 사람들

아침과 저녁이 딱딱하게 흘러가고 있었죠

아무것도 아파하지 않으려고

겨울이 지나갈 때 검은 나무 감은 눈마다

뾰족한 이파리

마디마디 장전하고 있었죠

쉿, 조심하세요

당신 가슴에 탄피가 박힐지도 몰라요





도복희 시인 약력 

*1966년 부여 출생. *충남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9년 계간 《시와정신》 등단.

*2010년 천강문학상 수상.




728x90

 

 

 

 

 

 

 諺簡文  / 안채영

  

 죽음의 꼬리처럼 지하의 시간은 길고 길었습니다.

 열두 매듭으로 정한 거처는 다 삭아서, 한 번쯤은 돌아누울까도 생각했습니다

 이 몸은 뱃속의 아이를 무덤으로 정한 바 있고

 아이는 어미의 마지막 안간힘을 먹고서야 조용해졌습니다.

 

 둘 중 누가 무덤이란 말입니까

 

 세상, 돌아누워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땅은 등이  되기도 하고 천장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달래지 않으니 아이도 울지 않았습니다. 꽃가루로 참 오랜 세월 요기를 대신했고 얼레빗 한 자루로 여염의 자세를 잃지 않으려 했습니다. 누운 마음이라도 일으켜 뱃속의 태아를 뛰어놀게도 하고 싶은 날들, 다만 가물, 기억이라면 기억일 별빛이 그리웠습니다. 이곳엔 그 흔한 窓이나 무너진 천장도 없으니 안락하기로는 별 탈이 없겠습니다만 어느 윤달조차도 놀러오지 않습니다.

 

 그동안 나는 몇 겹의 무덤이었습니다

 태중에 닮은 人形을 넣는 서양 小品이 있다지요

 서로 무덤이 되어 다행인 세월입니다

  

 병인윤시월 함께 넣어진 슬픔엔 공기도 소진하였고 검은 머리엔 흰 세월이 간간히 섞여 있습니다. 같이 넣은 언문의 글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없답니다.

 

 

 살던 곳, 낯익어야 할 테지만 모두 캄캄한 초면일 뿐 낯익은 一家가 모여 있는 친정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습니다.

 襲衣에 적힌 날짜도 희미한데

 아아, 어느 무덤으로 돌아가야 합니까.

 태중의 아이와 이 몸, 어느 쪽이 무덤이란 말입니까.

 

 

 

 

*파평윤씨 모자미라: 병인윤시월 난산으로 아이와 함께 사망. 언문으로 쓰여진 편지가 나왔으나 훼손으로 판독불가.

 

 

 

 

 

 

   穀雨 무렵

 

 

고로쇠수액봉투에 지난밤이 고여 불룩하다

야생차밭에 참새들이 앉았다 날아간 뒤 낮은 허공엔 새들의 푸른 혀가 가득하다

떫지 않은 고백이 있을까

씨앗에 비가 내린다는 절기, 움트는 것들이 어디 먼 곳의 기억뿐이겠는가

뜨거웠다 식혔다를 반복해 덖어도

자꾸만 바깥으로 튕겨 나오던 돌돌 말려진 혓바닥

제대로 한 번 우려내 보지 못한 관계들은 다 푸르스름하여

달아오른 헛것의 그늘에도 들지 못한다.

 

곡우 무렵 새들이 떠난 자리마다

새의 혀들이 와글와글 끓고 있다

지나간 절기에 뱉었던 말들이 촘촘 돋아나 있는 차밭

黃經에도 들지 못한 절기가 있다

마른 잎으로 견디는 시간쯤이야

더운물 한 그릇 만나 펴진다지만

잎의 뒷면에 들었던 遠行엔 쫑긋 세운 귀가 없다

 

 

나무들의 수혈이 끝나는 곳

푸르스름한 소실점들이 길고 멀다

혀를 갖지 못한 말들이 땅속에서 우려지고 있는 시간

천천히 비워지고 있는 겨울 산에

물 끓는 소리가 졸졸 난다

 

 

늦은 발자국소리 같은 잎이 톡톡 피는 야생 차밭, 그늘진 적요에 문하나 틔워 놓으라는 시린 당부.

 

 

 

  도마뱀

 

 

 퇴화된 뒷다리가 앞 다리를 따라가고 있다

 가만히 보니 앞다리에는 돌기처럼 바퀴가 달려 있다

 새로운 진화다.

 

 차양 안으로 오일장의 정오가 그늘로 진열되고 있다

 모두 꼭지를 뚝, 하고 떠난 것들

 제 살던 곳에서 떨어진 것들만이 진열돼 있다

 잘려진 뒷다리가 성한 앞다리를 먹여 살리는 일

 누군가 돌을 던지듯 쨍그랑 소리와

작은 그늘 같은 푸른 지폐 몇 장이 바구니 안에 들어있다

  

 그 누구도 저 고무 주부 안의 끊겨진 꼬리를 확인한 이는 없다.

 뜨거운 순대를 지나고 취객의 기울어진 트림을 지나고 옥수수찜통을 지나고

 버려진 말들만 바닥에 뒹굴고 있다

 앞가슴에 비늘이 있다는 듯

 고무판에는 긁힌 비늘무늬가 가득하다

 

 길의 입구를 당겨 천천히 기어가는 도마뱀

 사람들 많아 빨리 도망가지도 못한다.

 냉혈동물인 도마뱀

 땀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면

 이곳에 완전히 적응한 것 같다.

 

 쨍그랑 소리가 짧은 끈처럼 끊어지고 있다

 

 

 찬송가를 참 잘 부르는 어느 신이 도마뱀의 모습으로 기어가고 있다

 파장의 오일장은 다시 오일 후면 돋아 날 것이고

 잘려진 꼬리는 도마뱀을 오래 먹여 살릴 것이다

 

 

 

 

 툰드라 산 19번지

 

 

 툰드라의 나무들 사이에서 태어난 뿔각사슴은

 뿌리를 머리에 이고 다닌다지요

 가지보다는 아직 뿌리에 가까워서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딱딱 소리를 내면서 뿔들이 흔들리고

 그 어느 방향도 믿지 못하는 습성의 나무들은

 양쪽의 세상을 동시에 더듬는 지도들 몰래 만들고 있는,

 

 

 아주 어린 바람들은 나뭇가지 맨 끝에서 사는데 가끔 먼 곳까지 뻗어갔다 돌아온 자리는 작은 새순이 그 자릴 차지하곤 한다지요

 

 몇 개의 갈래가 생기고

 저가 키운 무게를 저 머리위에 얹고 다니는 머리채 같은 산 19번지

 뿌리를 숨기고 유영하는 툰드라의 나무는

 짧은 손의 풀들이 땅을 움켜잡고 있지요

 몇몇의 선교사들이 지도를 따라 다녀가고

 길은 악착같이 갈래를 만들어 어지러운 고원에 집들을 돋아나게 했고

 일 년에 네 번의 각기 다른 계절의 공터를 만들어

 푸성귀를 키우지요

 그 풀을 뜯어 먹고 있는 머리가 무거운 짐승들은

 늘 불안해서 무거운 머리 위 지도를 벗어버리고 싶지요

 이곳의 주소는 산인데

 나무 한 그루 없고

 이제 지구상에서 철거될 곳은 이 툰드라 밖에 없다는 소문만 앞 다투지요

 

 아무리 갈래를 만들어도

 제 머리를 벋어나지 못하는 뿔

 뾰족한 끝을 가졌다 해도 그 끝은 늘 끊어져 있어

 허공에서 막힌 길들이 제 몸으로 천천히 귀가하는 툰드라 산 19번지 비탈길

 상상처럼 불들이 켜지는.

 

 

 

 

 실뜨기

 

 

 그려놓은 물뱀의 꼬리는 방금 숲에 가려졌다

 달은 골목을 지날 때면 으레 회벽을 따라 걷는다

 아이 둘이 같은 자세로 오래 놀고 있고

 뱀이 숨은 검은 숲이 일렁거린다.

 이 회벽에게도 오늘 밤엔 뿌리가 조금 길어졌을 것이다

 실뜨기를 하던 아이들이 돌아간 낮에는

 납작한 보름달이 숨어 있었다

 저 滿月은 언제부터 실뜨기놀이를 배웠을까

 기우뚱 기운 바깥이 활활 타오를 때까지

 혼자서 걷는 검은 지구의 외출

 바람은 실태를 잡고

 滿月의 뿌리는 벽을 타고 자란다.

 

 흰 달에 검은 실금이 생겼다

 

 오늘 밤, 은하계좌에 신생의 별을 저축했다는 문자를 받았다

 누에고치 속 같은 봄 나무들

 천천히 매듭을 끌러 바람을 펼쳐놓고 있다

 직립보행의 자막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지나가고

 엉켜 있던 지난 가을 앙상한 가지들의 모양이 생각나지 않는다.

 

 벽을 비워놓았다고 답장을 보냈다

 

 물뱀의 혀가 몇 갈래로 휘어지며 사라진다

 툭, 바람의 계보가 끊어지고

 모두 숨어버린 벽에 아이들이 물뱀의 실태를 잡고 있다

 민들레씨앗이 안보이게 터지고 있다

 

 

 

 

 

  木足

 

 

 나무의 관절에서 파릇파릇 바람이 튀어 나온다

 

 어느 날 불쑥, 사내의 걸음에 소리가 생겼다. 木이 자란 한  쪽의 걸음은 나뭇가지들이 내는 바람소리 같았다. 멀리까지 같다 돌아오는 나무의 소리 들은 술에 취해 있기도 했다.

 

 

 관절의 입구까지 올라 온 소리들이

 후드득 떨어지고 있었다.

 

 오래전 관절염으로 가지하나를 자른 뭉툭한 지점에 새 가지가 자랐다. 걸음을 데리고 다닌다는 사내의 농담이 지금도 기억난다. 사내의 걸음에는 늘 잎 스치는 소리가 났었다.

 

 

 구름이 幻痛처럼 밟히기도 하고

 벌레가 스멀스멀 숨어 살기도 했다

 어쩌면 몸은 너무 무거운 한 그루 나무였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木足을 벗어 나무에 기대어 놓고 쉬는 동안 푸른 새 잎이 돋아나는 것을 본 것도 같다. 내가 아는 유일한 걸어 다니는 나무였던 木足. 계절이 없었던 나무는 마지막까지 혼자였다. 한 며칠 물에 담가놓으면 새 싹이 돋아날 것 같았던 다리 한 짝이 오랫동안 다락에서 바짝 마르고 있었다.

 

 

 몸이 떠나자 더 이상 걸을 수 없었다

 그 후 어느 閏月 閏日에

 흰 연기가 되었다.

 

 

 

 

 

 궁륭

 

 

 오래된 느티나무 그늘에는 깊은 궁륭이 있다

 잎들의 걸음이 스스스 빨라지면

 소리들은 떠나고 빈 몸만 허공에 오래 걸쳐진다.

 그늘에 앉아 쉬는 이들을 잡고 가끔 놓아주지 않는 궁륭

 이 그늘의 이불을 덮은 사람은

 오래 잠자는 나뭇가지가 된다

 

 원래 이 궁륭은 딱따구리가 건축해 놓은 것

 지난여름에는 원앙이 금실을 깔아놓고 갔다

 한낮에도 갈 곳이 없는 둥그런 어둠이 밤까지 웅크리고 있기도 했다

 늘 안쪽으로만 불러오는 공터의 배

 

 이맘때쯤이면 그늘도 텅텅 비어서

 검은 뼈대들이 잘그락, 마른 소리로 살을 보태고 있을 뿐이다

 그늘에도 문이 있어 열고 닫는 계절이 가면

 활짝 열려진 노인들이 수다의 입구를 닫고

 제 그늘을 걷어 사라진다

 이때 쯤엔 마을도 조용해서 문을 닫고 房의 그늘에서나 누워 있을 것이다

 아직 마을엔 여럿의 궁륭들이

 느릿느릿한 길들을 잊어버리고 있다

 

 

 느티나무 몸 안의 깊숙한 외부

 깊숙한 외부여서 문도 없다

 문 없는 곳들은 대게 추위가 웅크리고 있다

 움푹 들어간 혹이 춥다.

 

 

 

 

 

 

 

728x90

 

 

저니 맨* / 김학중



그는 유망주였다

공을 쥘 때마다

세계의 심장을 움켜쥐고 있다고 느꼈다

심장이 담장을 넘어갈 때마다

모자를 고쳐 썼다

자신의 삶이 실점에 대한 기록임을 지켜봐야 했지만

그는 끝까지 배트를 잡지 않았다

- 누구도 자신을 위해 타석에 설 수 없다고 낮게 얘기했을 뿐 -

그리고 긴 여행은 시작되었다


그는 이제 큼직한 여행 가방을 끌고

플랫폼에 서 있다

불쑥 내뱉고 싶던 말처럼

가방의 터진 겉감 사이로 안감이 비집고 나와 있다

그 안에 그의 여행이 온전히 담겨 있다

언제부터 입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는

바지 몇 벌과 셔츠 몇 벌

유니폼만이 새것인 채로 매번 바뀌었다

그의 짐은 매일 다시 첫장부터 쓴 낡은 일기장

몇 장을 뜯어냈는지 알 수 없는 인생


자신을 짐으로 쌀 수 있다는 위안인 그가

지금 플랫폼에 서 있다

열차가 들어오면 그는 곧 떠나야 한다

한 손은 여전히 공을 쥐고 있는 듯 둥글지만

그는 곧 가방을 잡기 위해 손을 펴겠지

공 하나를 세계의 심장이라고 믿던

그는 익숙한 듯 모자를 고쳐 쓰고는

열차가 멈추는 소리를 듣는다

세계를 주무를 수 없는 그의 손은

이제 온전히 자신을 쥐고

문이 열리는 열차로 들어설 것이다


가방의 무게에 그의 팔이 살짝 떨리는 것이 보인다



* 저니맨 (journey man - 해마다 또는 자주 팀을 옮기는 선수



 

 

 

728x90

728x90

 


달콤한 문 / 손미


 초희楚姬*

 붉게 터진 네 아기를 찾으러 갈 시간 너는 맨몸으로 딱딱한 무덤을 나와 우주에 떠 있는 고아원으로 가자 측백나무 가지가 길게 삐져나온 별 하나를 찾자 언젠가 지나오는 길에 노란 손수건을 매어둔 것 같은 나무가 있다  스물일곱 송이 꽃이 폈고 비로소 우리는 가장 아픈 꼭짓점에 섰지 토성의 달들이 우리의 소풍을 반겨줄 것이다


 초희, 달아나자 우주를 향해 네 것인지 내 것인지 머리카락 뜯으며… 가는 길 어디쯤 앉아 단 한 번만 춤을 추자 네 시를 비웃던 남자와 내 삶을 비웃던 애인이 모퉁이에서 만나 웃거나 혹은 외면하겠지


 문밖에서 우주가 울고 있다


 문을 열면 고아처럼 버려진 것들이 젖을 찾아 온몸에 파고들어 초희, 우리는 가서 이름 없는 것들의 어미가 되자

 우리, 가는 길 어디쯤 앉아 별의 꼭지를 잡고 단 한 번만 웃거나 울자 스물일곱 송이 꽃이 졌고,

 사자가 먹은 제 새끼를 생각하는 기린 한 마리가 우리를 배웅해줄 때 미리 와서 떠돌던 스푸트니크의 개가 마중 나오는 그림자가 보인다

  자, 이제



*초희楚姬: 허난설헌의 이름






젤리 후레쉬맨 / 손미


동족을 찾아가는 길이었어

질긴 혓바닥을 가진, 내

하나뿐인 친구가 절교를 선언했을 때

서른이 오고 있었어


우주를 날아다니는 후레쉬 후레쉬 후레쉬

후레쉬 하지 않은


나를 폐기 하라 오버.


빙하에 박힌 매머드,

들키지 않게 사라지는 법을 알고 있는 유일한 종족


어금니가 아파 합체할 수 없는 젤리가

벨벳으로 싸인 별에 흘러내려, 달달

달달한 통증.

사라진 언어로 이야기하는 후레쉬 후레쉬

후레쉬맨.


본부 응답 없음.




728x90

 

 

불을 먹은 삼촌 / 임경묵


절연테이프로 동여맨 발가락 사이에 산수유꽃이 피었어요

뭉개진 얼굴에 겨우 살아남은 땀구멍

맑게 솟구쳐 목덜미로 흐르는 수액쯤은 절은 수건으로

꾸욱 눌러 주세요

쉰아홉 살, 둘째 삼촌의 타버린 손가락에도 젖먹이 적

뽀얀 새살이 버들개지처럼 물이 올라 돋아나고 있잖아요

얼마나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에요

천식 때문에 소박맞은 작은 엄니가 그 보드라운

새살을 보았더라면, 강 건너 반곡리에서 얼굴 붉히며

속속곳 바람으로 밤새워 돌아왔을지도 모르잖아요

불에 탄 자전거는 타이어만 교체하면

봄 햇살 풀어놓은 두멧길, 두렁길을

훨씬 부드러운 허밍을 내며 달릴 수 있을 거예요


반쯤 녹아내린 입술 사이 망울망울 터지는 말씀 좀 보세요

외로움 때문에 불을 먹은 건 아니잖아요

휴대용 버너 녹슨 스위치를 다시 힘껏 돌려놓을게요

첫날밤처럼 뜨겁게 달아오르게 했던 저, 저 붉은 꽃숭어리!

삼촌일랑 어서 가서, 양푼 가득 함께 몸을 풀어도 좋을

후끈후끈한 라면 한 봉지만 골라 오세요

단내 나는 그림자를 들먹이며 초르르 초르르 자전거 페달을 밟으세요

윗주머니에 달고 온 굵은 달걀 한 개가

짓무른 삼촌 가슴팍에 자꾸만 툭툭 주먹질을 해대면

집으로 돌아오는 고샅길이 얼마나 즐거울까요

보세요, 봄볕에 그을린 살구나무 우듬지도

뒤울안 부추밭을 겨누고 시방 참았던 꽃을 벌리고 있잖아요




 



728x90

 

 

가장 뜨거운 씨앗 / 정미정


내 말에 심지가 느껴지십니까

그럼 불을 붙이세요

백열등을 켠 당신의 눈동자에

활활 타오르는 나, 바짝바짝 혀부터 마르네요

언제 가슴 밑바닥을 헤집었나요

벼린 이빨 사이 야무지게 장전한 16연발탄

서로의 급소에 맞춤인 걸요

햇살이 머릴 박으며 뛰어드는 당신의 단도

잽싸게 내 머릿속을 갈가리 찢어놓자

꼬리에 불붙은 양 날뛰는

짐승 한 마리

벌겋게 달군 긴 혀로 당신의 목을 휘감아 절벽 아래로 내던졌어요

악착같은 당신도 질세라

날 선 혀 안에서 서슬 퍼런 기관총을 마구 쏘아 올렸죠

웃을까 말까 하던 당신과 나의 관계,

확실하게 찢어져 버린 거죠

악!

떨어진 살점들이 사이렌처럼 울고 꺾인 팔다리가 구급차를 부르네요

- 뻣뻣하게 굳은 혀를 절단해야 합니다

- 피가 엉긴 시간들도 잘라내야 합니다

날콩 같은 비린 물내가 두 볼을 타고 흘러요

낭자한 말의 탄피 속에 우두커니 서 있는

당신 손바닥 위

미안해,

그 작고도 여린 씨앗 한 알

이제 떨어뜨릴까 해요


 

 

 

 


728x90

 


가을산 / 장현숙


태양이 초록색 비단 능선을 걷고 있다

금빛 치맛자락을 사그락 사그락 끌며

한 손엔 염료통을 들고

또 한 손엔 붓을 들고 능선을 넘어 가고 있다

푸른 잎사귀마다 붓끝이 스치며

붉은 꽃송이들이 얼굴을 들고 있다


심지어 산새들이 깃을 접어

어둠의 둥지 속으로 날개를 걸어놓고

푸른 잠 속으로 잠입중일 때에도

태양의 손은 쉴 새가 없다

초록의 자물쇠로 단단히 잠겨있던

산 담벼락을 넘어 노란색 염료통을 들고

새벽이 올 때까지

국화꽃 같은 색깔의 꽃을 피워 놓았다


그러니 지상에서 꿈꾸던 달개비 풀도

하늘로 날아올라 쪽빛으로 깊어졌겠지


산주름이 깊어 자글자글하게

골짜기 사이로 하루가 늙어가더니

땀방울처럼 꽃들이 피어 환하다

이제 태양은 붓을 놓고

서쪽으로 금빛 보료를 깔더니

고단한 잠을 청하고 있나보다


가을이 가기 전에

저 산 한가운데를 가위로 재단하여

붉은 꽃 그려진 비단을

거실창 커튼으로 걸어놓고 싶다






바람의 뜨개질 / 장현숙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에 막 돋아난 잎사귀

보푸라기 일어난 실 같다

노을이 강물에 몸던지는 시간

황금빛 실로 바람이 뜨개질을 시작한다

물결화선지 위에 수묵화로 번지는 산 그림자

직선으로 곡선으로 짜 넣고 있다

물고기들이 강물건반을 콩콩 뛰어 다닌다

건반 위를 숨차게 뛰어

사분음표 이분음표를 그려 놓는다

바람은 한 점의 획도 놓칠세라

조심스럽게 무늬로 짜 넣고 있다

풀들이 수줍은 듯 몸을 흔들고 있는 건

조용히 발걸음 옯겼을 선율 때문

파닥거리며 흐르고 있는 음률 위로

마른 갈대가 흔들린다

마지막 붉은 노을이 사력을 다해

제몸을 밀며 내게 왔다

남루한 붉은 색은

그대 뒷모습을 안은 채 왔으므로

가끔 파르르 떨기도 하는 것이다

이제 가만히 저녁 어스름이

빗방울처럼 내 속에서 뛰는 것을 바라본다

짧은 순간 스러져 가는 것들

코를 지어 짜고 있을 바람에게

바래가는 기억의 한 끝을 부탁해 본다


이 저녁 바람이 짜 놓은 버드나무 스웨터를

버들잎 우표를 붙여 그대에게 보낸다






파문 / 장현숙


뻐구기 소리가

파문을 일으키며 귀에 와 닿는다

소리가 제 몸을 밀어 내 귀까지 온 것

물결이 제 몸을 밀어 강가에 닿듯이

사막의 모래가 제 몸을 밀어 그 끝에 닿듯이

소리가 소리를 밀어 내 귀에 닿은 것

햇살을 온 몸으로 밀어내며 오느라

조금은 야윈 소리로

바람의 부력을 밀어내며 오느라

조금은 힘빠진 소리로 온 것

담벼락에 부딪히지 않으려고 어깨를 겯고 온 것

손을 맞잡고 안간힘으로 온 것

뒤뚱거리는 몸짓으로 팔랑거리며

젖은 날개로 온 것

온 몸을 허공과 마주서며 날아온 그대

땀으로 얼룩진 날개엔 아직도 열기가 후끈하다

날개를 감싸 안으며

달팽이관 안으로 고이 접어 넣었다

기억의 회로를 지나 가슴 속까지 왔을 때

뜨겁게 데워둔 심장으로 깊이 안아 주었다






악어처럼 / 장현숙


장미꽃 위를 떠도는 시간

나무들이 상두꾼처럼 서 있다

몇 마리 새들의 비명소리가 요령처럼 울렸을 뿐

아침마다 그렁하게 밀어 올리던 생도

한참을 버둥거렸는지

붉은 꽃잎 하나가 저승 문턱을 넘어 간다

- 이제가면 언제 오나

에-야-에헤-야아-

상여소리 같은 바람이 꺼이꺼이 지나갔다


울렁거리는 세상을 막 더듬어 갈 때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놈이 천천히 눈독을 들인 것

탐욕스러운 눈빛도

발자국 소리도 없이 와서는

커다란 입을 벌리고 덥석 불고 늘어진다

한 번 물면 놓치 않는 놈의 습성으로

단단한 턱에 걸리면 절대 빠져 나올 수 없다

발버둥 치면 칠수록 늪 속으로

발을 들여 놓는 것이다


가끔 내 옆에도 그놈의 숨소리가 느껴질 때가 있다

거친 바람처럼 등을 스치고 지나갈 때

식은땀이 소름처럼 돋는 것이다

놈 앞에선 통통하게 살이 오른

허벅지를 보이지 말아야 한다고 한다


늙은 시간의 입가에는 붉은 핏자국이 낭자하다






어떤 무늬 / 장현숙


안산 갈대습지는

아직도 바다 발자국을 품고 있다

물굽이 이랑마다 파종을 하던 갈대 발목에는

조개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물놀이 고랑마다 써레질하던 연잎 손끝에서

해초가 울렁거리던 손짓이 보인다

잠시 우수수 일어서던 물결도

펄럭이던 고등어 등푸른 빛깔

햇살 닿을 때바다 뜨겁게 반짝이는 것은

먹이를 쫓던 갈치 떼 비늘

지워지지 않을 바다 무늬가 새겨진 몸을

버석거리며 잠들지 못하고 뒤척인다

바람도 갈대사이를 지나 시화호 둑을 지나

바다쪽으로 불어가는 곳

물살도 갈기를 세워 달려가

제 몸을 바다 쪽으로

돌아 눕히고서야 잠잠해진다

바다보다 깊은 속은

갈매기 소리가 박혀 지워지지 않고


이무렵 내 몸에도

어머니가 궁굴려 온 시간이

무늬를 그리며 흐르고 있다

 



 

 

728x90

 

 

몰락하는 가을 / 한석호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날들의 저녁 창을 열면

무수히 많은 별들이

마음의 갈피마다 집을 짓고 있다.

하늘 가장자리서 뜯어온 들풀로 지붕을 엮고

그 들풀의 이슬들 꿰어

슬픔의 반대쪽 귀에 높이 걸어두는 것이다

태가 고운 바람이 불고

명상에 든 달맞이꽃의 그림자가

투명한 풍경소리에 제 어둠 묻는 시간이면

풀벌레 울음소리 더욱 환해진다

모두는 가을밤 가운데로 걸어 나와

고달팠던 걸음들 내려놓고 한없이 깊어 가는 것이다

그런 날은 책갈피 위에 불을 밝히고

찻물 끓는 소리가 툇마루 가득 흘러넘칠 때까지

어떤 흔적들 찾아 나선다

푸른 여우가 몰고 오는 달빛과

그 달빛에 부서지는 박쥐들 하얀 웃음소리 들려오는 곳으로

방직돌기를 굴려 나아간다

내 의식의 처마 끝을 잡고 있는 곳으로

거미줄 그렇게 던져 가는 것이다

별들이 지은 집 담장은 높지 않아서

오가고 싶은 것들은 모두 경계를 잊고 넘나들며

마음의 풍향계를 어루만지다 간다

그들은 소중했던 것들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을 번갈아 지우며 멀어져 간다

은빛구름, 소나기, 검은 우산

욕망의 사슬에서 풀려나야만 비로소 만날 수 있는

풍경 속으로 묻히는 것이다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날들의 새벽 창을 열면

핵을 감춘 무엇이 기다리고 있다

티벳 사자의 서 같은 화두를 던지며

사랑해야 할 날들의 저녁으로 돌아가라고

눈 부릅뜨고 있다.





어둠의 겉봉에는 수취인이 없다


시간은

땅거미에 이끌려 한 발짝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다가설수록 무거워지는 나의 걸음 앞에서

마을과 길들은

공손하게 허리를 꺾고 있었다.

지상의 모든 황홀과 빛남이

저처럼 낮게 엎드려온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나는, 내 안에 품었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으리라 마음먹었다.

누군가에게 보낸 나의 마음들은

밤하늘 광활한 백지에 활자가 되어 빛나고

억새의 늦은 울음을 한 아름씩

산등성이에 뿌리고 있었다.

입동 지나면

나의 그리움도 고뇌에 찬 나의 시편들도

억새풀처럼 날려 가겠지만

살얼음처럼 투명하게 번져가는 밤하늘은

또 누가 쓰고 누가 반송한 소식들로 쌓이는지

나는 그 어둠의 겉봉을 접고 있었다.






순례자의 잠


시간은 저녁의 호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무거운 신발을 벗는다.

거룩한 자여,

오월은 푸른 장미 향기로 그윽한가

길은 저만치 수구를 따라 휘어지고 있다

보리의 술렁임이 깊어질 때

일몰은 치맛자락을 끌고 내려오고

나는 물끄러미 강물에 발을 담근다

그러면 세상의 슬픔은 더욱 가라앉고

새떼가 남긴 하늘의 봉분은 둥글게 부풀어 오른다

나는, 떠나는 이름들과

새로 쓰는 이름들이 무심히 교차하는 들판에서

그대를 우러러 부른다

수척해진 밤의 손길이

꺼칠해진 대지에 무언가를 쓰고 있다

자신의 오른 손엔 잠을 내려놓고

또 다른 손엔 그리움을 내려놓으며

조금씩 사위어 가고 있다

하늘의 거룩한 자여,

부도 위로 검은 나비 떼 날고 있는가

가을이 가고 겨울의

쇠 발굽소리 그 경계를 넘어올 때

나는 떠나리라

푸른 잠 속엔 누군가 있고

성성한 갈기를 휘날리는 백마 한 마리

덫에 걸린 내 잠의 둘레를 자꾸 뚜벅대고 있다






불안으로부터의 離巢


잠자는 침묵을 깨워 내 보낸 모델의 흐린 창을 열고

어둠이 살며시 내 곁에 들어와 눕는다.

종일 선창을 흔들던 바람소리와

그 바람 거슬려 나아가던 파도는

지금쯤 어느 바다로 가고 있을까 나의 시야에

수런대던 근심 하나가 솜털을 날리며

팽팽한 방안의 정적을 가라앉힌다.

이럴 땐 잠이 모두를

아주 먼 곳으로 데려가 주었으면 하는

가느다란 희망을 깊게 품어보는데

흐릿한 집어등 하나가

내 골다공증의 삶 위에 걸터앉는다.

내 가슴을 끌어 당겨 덮는 바람을

뼈 속에 집어넣는다.

여기 서울장 408호,

시린 무릎을 추억하고자 찾는 사람들 묵는 곳에는

또 하나의 등불 걸어두게 되는 셈이다.

그 등불 밝아 바닷길 화안하게 열리는 곳에

그 바다의 가장 푸른 물빛을 내려놓고

주름진 내면을 가만히 비춰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반사되는 불면의 시간위에

나는 보내야 할 것과 지워야할 것들의 목록을 부표처럼 띄워놓고

심지에 불을 붙인다 부채질한다.

잠은 침묵의 바다에서 뜨겁게 타오르고

바다는 잠의 하늘에서 차갑게 반짝이고 있다.

나는 문을 열고 훌쩍 키가 자란 등불을 밖으로 던져버린다

눅눅한 비망록을 길 위에 펼쳐놓고

뼈 속까지 파고드는 바람에 온 몸 내어 맡긴다.

그런 불안으로부터의 이소를 나는 꿈꾼다.






봄을 거역하는 노래


1.


여느 시간이 이토록 눈부실까.


나는 그리움의 모자를 하늘로 벗어 던진

한 무더기의 꽃들을 가슴에 안았다.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뛰쳐나오려는

모든 것들의 안부를 봉쇄하고,

누군가를 꽝꽝 묻어버리고

무심하게도 그 위에 제 발자국을 찍는

강철신발을 보았다.


2


전갈 꼬리처럼 갈라진 거기, 그쯤, 무엇이 느껴지나요?


강물은 오늘도 푸른 소문을 낳는 대지위에

제 족적 남기고 있는데

대지를 억누르는 바위 밑은 너무 고요해서

나 이 밤을 반죽할 거예요


거기, 그것 좀 치워 봐요!


봄이 오면 잊힐 거라던 그 허드레 소리들

땅 속에 넣고 밟아 버릴 거예요.

태어날 어린 땅의 파란 활착을 위해

지금, 나 당신을

아득히 지울 거예요.


3.


내가 쏘아올린 금촉화살의 하늘


저 환한 그늘 속엔

세상의 눈 맑은 아이들이 등불 하나씩 밝혀들고

나이테 깊은 곳을 비추고 있지요.

저 그늘 속 어둠은

내 허무가 그린 나이테.

얼음장 밑을 흐르는 숨소리를 데리고

아직 바람의 물기가 남아있는 풀밭으로 나아가

녹슨 화살을 줍지요.

그런 나는

당신 맘속에만 존재하는 외딴방

그 외딴 방엔,

빛의 무덤인 허연 스크린이 있고

허무의 깊이를 재는 자벌레 한 마리가

꼭지점 없는 컴퍼스를 들고 스크린 위를 서성이겠죠.

당신

평생 내 주위를 맴돌며

마음이 한없이 우묵해지는 시간들과

회화誨化하며, 실뿌리까지

하얗게 변한 서릿발 뿌리며 내게 묻겠지요

그 녹슨 입술이 내 심중의 이슬이라는

그것 아느냐고,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