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산 / 장현숙
태양이 초록색 비단 능선을 걷고 있다
금빛 치맛자락을 사그락 사그락 끌며
한 손엔 염료통을 들고
또 한 손엔 붓을 들고 능선을 넘어 가고 있다
푸른 잎사귀마다 붓끝이 스치며
붉은 꽃송이들이 얼굴을 들고 있다
심지어 산새들이 깃을 접어
어둠의 둥지 속으로 날개를 걸어놓고
푸른 잠 속으로 잠입중일 때에도
태양의 손은 쉴 새가 없다
초록의 자물쇠로 단단히 잠겨있던
산 담벼락을 넘어 노란색 염료통을 들고
새벽이 올 때까지
국화꽃 같은 색깔의 꽃을 피워 놓았다
그러니 지상에서 꿈꾸던 달개비 풀도
하늘로 날아올라 쪽빛으로 깊어졌겠지
산주름이 깊어 자글자글하게
골짜기 사이로 하루가 늙어가더니
땀방울처럼 꽃들이 피어 환하다
이제 태양은 붓을 놓고
서쪽으로 금빛 보료를 깔더니
고단한 잠을 청하고 있나보다
가을이 가기 전에
저 산 한가운데를 가위로 재단하여
붉은 꽃 그려진 비단을
거실창 커튼으로 걸어놓고 싶다
바람의 뜨개질 / 장현숙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에 막 돋아난 잎사귀
보푸라기 일어난 실 같다
노을이 강물에 몸던지는 시간
황금빛 실로 바람이 뜨개질을 시작한다
물결화선지 위에 수묵화로 번지는 산 그림자
직선으로 곡선으로 짜 넣고 있다
물고기들이 강물건반을 콩콩 뛰어 다닌다
건반 위를 숨차게 뛰어
사분음표 이분음표를 그려 놓는다
바람은 한 점의 획도 놓칠세라
조심스럽게 무늬로 짜 넣고 있다
풀들이 수줍은 듯 몸을 흔들고 있는 건
조용히 발걸음 옯겼을 선율 때문
파닥거리며 흐르고 있는 음률 위로
마른 갈대가 흔들린다
마지막 붉은 노을이 사력을 다해
제몸을 밀며 내게 왔다
남루한 붉은 색은
그대 뒷모습을 안은 채 왔으므로
가끔 파르르 떨기도 하는 것이다
이제 가만히 저녁 어스름이
빗방울처럼 내 속에서 뛰는 것을 바라본다
짧은 순간 스러져 가는 것들
코를 지어 짜고 있을 바람에게
바래가는 기억의 한 끝을 부탁해 본다
이 저녁 바람이 짜 놓은 버드나무 스웨터를
버들잎 우표를 붙여 그대에게 보낸다
파문 / 장현숙
뻐구기 소리가
파문을 일으키며 귀에 와 닿는다
소리가 제 몸을 밀어 내 귀까지 온 것
물결이 제 몸을 밀어 강가에 닿듯이
사막의 모래가 제 몸을 밀어 그 끝에 닿듯이
소리가 소리를 밀어 내 귀에 닿은 것
햇살을 온 몸으로 밀어내며 오느라
조금은 야윈 소리로
바람의 부력을 밀어내며 오느라
조금은 힘빠진 소리로 온 것
담벼락에 부딪히지 않으려고 어깨를 겯고 온 것
손을 맞잡고 안간힘으로 온 것
뒤뚱거리는 몸짓으로 팔랑거리며
젖은 날개로 온 것
온 몸을 허공과 마주서며 날아온 그대
땀으로 얼룩진 날개엔 아직도 열기가 후끈하다
날개를 감싸 안으며
달팽이관 안으로 고이 접어 넣었다
기억의 회로를 지나 가슴 속까지 왔을 때
뜨겁게 데워둔 심장으로 깊이 안아 주었다
악어처럼 / 장현숙
장미꽃 위를 떠도는 시간
나무들이 상두꾼처럼 서 있다
몇 마리 새들의 비명소리가 요령처럼 울렸을 뿐
아침마다 그렁하게 밀어 올리던 생도
한참을 버둥거렸는지
붉은 꽃잎 하나가 저승 문턱을 넘어 간다
- 이제가면 언제 오나
에-야-에헤-야아-
상여소리 같은 바람이 꺼이꺼이 지나갔다
울렁거리는 세상을 막 더듬어 갈 때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놈이 천천히 눈독을 들인 것
탐욕스러운 눈빛도
발자국 소리도 없이 와서는
커다란 입을 벌리고 덥석 불고 늘어진다
한 번 물면 놓치 않는 놈의 습성으로
단단한 턱에 걸리면 절대 빠져 나올 수 없다
발버둥 치면 칠수록 늪 속으로
발을 들여 놓는 것이다
가끔 내 옆에도 그놈의 숨소리가 느껴질 때가 있다
거친 바람처럼 등을 스치고 지나갈 때
식은땀이 소름처럼 돋는 것이다
놈 앞에선 통통하게 살이 오른
허벅지를 보이지 말아야 한다고 한다
늙은 시간의 입가에는 붉은 핏자국이 낭자하다
어떤 무늬 / 장현숙
안산 갈대습지는
아직도 바다 발자국을 품고 있다
물굽이 이랑마다 파종을 하던 갈대 발목에는
조개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물놀이 고랑마다 써레질하던 연잎 손끝에서
해초가 울렁거리던 손짓이 보인다
잠시 우수수 일어서던 물결도
펄럭이던 고등어 등푸른 빛깔
햇살 닿을 때바다 뜨겁게 반짝이는 것은
먹이를 쫓던 갈치 떼 비늘
지워지지 않을 바다 무늬가 새겨진 몸을
버석거리며 잠들지 못하고 뒤척인다
바람도 갈대사이를 지나 시화호 둑을 지나
바다쪽으로 불어가는 곳
물살도 갈기를 세워 달려가
제 몸을 바다 쪽으로
돌아 눕히고서야 잠잠해진다
바다보다 깊은 속은
갈매기 소리가 박혀 지워지지 않고
이무렵 내 몸에도
어머니가 궁굴려 온 시간이
무늬를 그리며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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