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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하는 가을 / 한석호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날들의 저녁 창을 열면

무수히 많은 별들이

마음의 갈피마다 집을 짓고 있다.

하늘 가장자리서 뜯어온 들풀로 지붕을 엮고

그 들풀의 이슬들 꿰어

슬픔의 반대쪽 귀에 높이 걸어두는 것이다

태가 고운 바람이 불고

명상에 든 달맞이꽃의 그림자가

투명한 풍경소리에 제 어둠 묻는 시간이면

풀벌레 울음소리 더욱 환해진다

모두는 가을밤 가운데로 걸어 나와

고달팠던 걸음들 내려놓고 한없이 깊어 가는 것이다

그런 날은 책갈피 위에 불을 밝히고

찻물 끓는 소리가 툇마루 가득 흘러넘칠 때까지

어떤 흔적들 찾아 나선다

푸른 여우가 몰고 오는 달빛과

그 달빛에 부서지는 박쥐들 하얀 웃음소리 들려오는 곳으로

방직돌기를 굴려 나아간다

내 의식의 처마 끝을 잡고 있는 곳으로

거미줄 그렇게 던져 가는 것이다

별들이 지은 집 담장은 높지 않아서

오가고 싶은 것들은 모두 경계를 잊고 넘나들며

마음의 풍향계를 어루만지다 간다

그들은 소중했던 것들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을 번갈아 지우며 멀어져 간다

은빛구름, 소나기, 검은 우산

욕망의 사슬에서 풀려나야만 비로소 만날 수 있는

풍경 속으로 묻히는 것이다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날들의 새벽 창을 열면

핵을 감춘 무엇이 기다리고 있다

티벳 사자의 서 같은 화두를 던지며

사랑해야 할 날들의 저녁으로 돌아가라고

눈 부릅뜨고 있다.





어둠의 겉봉에는 수취인이 없다


시간은

땅거미에 이끌려 한 발짝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다가설수록 무거워지는 나의 걸음 앞에서

마을과 길들은

공손하게 허리를 꺾고 있었다.

지상의 모든 황홀과 빛남이

저처럼 낮게 엎드려온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나는, 내 안에 품었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으리라 마음먹었다.

누군가에게 보낸 나의 마음들은

밤하늘 광활한 백지에 활자가 되어 빛나고

억새의 늦은 울음을 한 아름씩

산등성이에 뿌리고 있었다.

입동 지나면

나의 그리움도 고뇌에 찬 나의 시편들도

억새풀처럼 날려 가겠지만

살얼음처럼 투명하게 번져가는 밤하늘은

또 누가 쓰고 누가 반송한 소식들로 쌓이는지

나는 그 어둠의 겉봉을 접고 있었다.






순례자의 잠


시간은 저녁의 호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무거운 신발을 벗는다.

거룩한 자여,

오월은 푸른 장미 향기로 그윽한가

길은 저만치 수구를 따라 휘어지고 있다

보리의 술렁임이 깊어질 때

일몰은 치맛자락을 끌고 내려오고

나는 물끄러미 강물에 발을 담근다

그러면 세상의 슬픔은 더욱 가라앉고

새떼가 남긴 하늘의 봉분은 둥글게 부풀어 오른다

나는, 떠나는 이름들과

새로 쓰는 이름들이 무심히 교차하는 들판에서

그대를 우러러 부른다

수척해진 밤의 손길이

꺼칠해진 대지에 무언가를 쓰고 있다

자신의 오른 손엔 잠을 내려놓고

또 다른 손엔 그리움을 내려놓으며

조금씩 사위어 가고 있다

하늘의 거룩한 자여,

부도 위로 검은 나비 떼 날고 있는가

가을이 가고 겨울의

쇠 발굽소리 그 경계를 넘어올 때

나는 떠나리라

푸른 잠 속엔 누군가 있고

성성한 갈기를 휘날리는 백마 한 마리

덫에 걸린 내 잠의 둘레를 자꾸 뚜벅대고 있다






불안으로부터의 離巢


잠자는 침묵을 깨워 내 보낸 모델의 흐린 창을 열고

어둠이 살며시 내 곁에 들어와 눕는다.

종일 선창을 흔들던 바람소리와

그 바람 거슬려 나아가던 파도는

지금쯤 어느 바다로 가고 있을까 나의 시야에

수런대던 근심 하나가 솜털을 날리며

팽팽한 방안의 정적을 가라앉힌다.

이럴 땐 잠이 모두를

아주 먼 곳으로 데려가 주었으면 하는

가느다란 희망을 깊게 품어보는데

흐릿한 집어등 하나가

내 골다공증의 삶 위에 걸터앉는다.

내 가슴을 끌어 당겨 덮는 바람을

뼈 속에 집어넣는다.

여기 서울장 408호,

시린 무릎을 추억하고자 찾는 사람들 묵는 곳에는

또 하나의 등불 걸어두게 되는 셈이다.

그 등불 밝아 바닷길 화안하게 열리는 곳에

그 바다의 가장 푸른 물빛을 내려놓고

주름진 내면을 가만히 비춰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반사되는 불면의 시간위에

나는 보내야 할 것과 지워야할 것들의 목록을 부표처럼 띄워놓고

심지에 불을 붙인다 부채질한다.

잠은 침묵의 바다에서 뜨겁게 타오르고

바다는 잠의 하늘에서 차갑게 반짝이고 있다.

나는 문을 열고 훌쩍 키가 자란 등불을 밖으로 던져버린다

눅눅한 비망록을 길 위에 펼쳐놓고

뼈 속까지 파고드는 바람에 온 몸 내어 맡긴다.

그런 불안으로부터의 이소를 나는 꿈꾼다.






봄을 거역하는 노래


1.


여느 시간이 이토록 눈부실까.


나는 그리움의 모자를 하늘로 벗어 던진

한 무더기의 꽃들을 가슴에 안았다.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뛰쳐나오려는

모든 것들의 안부를 봉쇄하고,

누군가를 꽝꽝 묻어버리고

무심하게도 그 위에 제 발자국을 찍는

강철신발을 보았다.


2


전갈 꼬리처럼 갈라진 거기, 그쯤, 무엇이 느껴지나요?


강물은 오늘도 푸른 소문을 낳는 대지위에

제 족적 남기고 있는데

대지를 억누르는 바위 밑은 너무 고요해서

나 이 밤을 반죽할 거예요


거기, 그것 좀 치워 봐요!


봄이 오면 잊힐 거라던 그 허드레 소리들

땅 속에 넣고 밟아 버릴 거예요.

태어날 어린 땅의 파란 활착을 위해

지금, 나 당신을

아득히 지울 거예요.


3.


내가 쏘아올린 금촉화살의 하늘


저 환한 그늘 속엔

세상의 눈 맑은 아이들이 등불 하나씩 밝혀들고

나이테 깊은 곳을 비추고 있지요.

저 그늘 속 어둠은

내 허무가 그린 나이테.

얼음장 밑을 흐르는 숨소리를 데리고

아직 바람의 물기가 남아있는 풀밭으로 나아가

녹슨 화살을 줍지요.

그런 나는

당신 맘속에만 존재하는 외딴방

그 외딴 방엔,

빛의 무덤인 허연 스크린이 있고

허무의 깊이를 재는 자벌레 한 마리가

꼭지점 없는 컴퍼스를 들고 스크린 위를 서성이겠죠.

당신

평생 내 주위를 맴돌며

마음이 한없이 우묵해지는 시간들과

회화誨化하며, 실뿌리까지

하얗게 변한 서릿발 뿌리며 내게 묻겠지요

그 녹슨 입술이 내 심중의 이슬이라는

그것 아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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