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도에 빠지다 외 4편 / 심인숙
하아, 깃털 몇 개 꽂은 고깔모자라니!
눈앞에서 파랑도가
마법사의 주문처럼 탁, 사라지고 없다
나에게 그 모자를 십 분만 빌려다오 아니면 오 분만 오- 오 분만
내게 모자를 씌워다오
목마처럼 겅중겅중 하늘로 날아오르겠다
허리띠는 저 혼자 훌훌 곤두박질치겠지만
아랫도리와 배꼽도 사라지고 모자만 살아남는 즐거움,
시간의 칸막이 속을 주유하며
공터에서 고무줄놀이를 하고 있는 나를 불러볼까
파출소를 지나 개울을 건너
개성여관으로 아버지를 찾아나설까
그러나 오 분은 너무 촉박하므로
미안하다, 파랑도야
양떼구름 속으로 첨벙! 바로 달려들겠다
모자는 어디에 숨겼니?
코끼리바위에게 주었니 갯메꽃에게 씌워주었니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어느새 파랑도는 싯푸른 각을 세우며 바닷속으로 뛰어든다
저 멀리 붉은 산호초에 둘러싸인 고깔모자를 향해
손을 뻗는다
달의 角 / 심인숙
허공에 걸린 달의 角,
아파트 위로 떠오른 저 초승달을 보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들판을 헤매고 있었을 것이다
가시덤불에서 홀로 시름만 뜯고 있었을 것이다
초저녁 하늘에서
우뚝 솟은 뿔을 보았다
너도 중심에서 벗어나고 싶었구나
달무리 주위로 어둠이 쏟아지고 불끈 솟아오른 달의 뿔만 버젓이 내어걸려
푸-푸우,
서서히 움직인다
돌진하는 네 뿔에 받혀 내 숨소리는 가빠진다
門 하나가 열린다
엘리베이터는 喪中입니다 / 심인숙
흐린 눈빛을 가진 사람들이 내 몸속으로 들락거립니다. 지푸라기 같은 한숨이 묻어납니다. 누가 먼저 말을 걸어주지 않아도 나도 이젠 관상쟁이가 다 됐나 봅니다.
아침이면 긴 생머리를 늘어뜨린 605호 여자가 진한 남자 냄새를 풍기며 들어옵니다. 501호 여자는 화요일에 만나는 남자와 팔짱을 끼고 쇼핑을 갑니다. 203호 할머니에겐 모자를 눌러쓴 장정들이 가끔 찾아와 그 때마다 한바탕 소란이 일어나곤 합니다. 302호 할아버지는 자주 혈압이 올라갑니다. 자식 자랑도 줄고 광대뼈가 부쩍 튀어나왔습니다. 나는 그들의 비밀을 실어 나르고 있습니다. 쑥덕쑥덕 하루가 그림자에 껴 있습니다.
지지난밤. 쿵쾅거리는 119구조대원 발자국에 선잠 깨었습니다. 둘둘 말린 모포는 말이 없고 구급차는 급히 원룸을 빠져나갔습니다. 어쩐지 요즘, 302호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경비원과 청소부 아줌마만이 쉬쉬, 다가와 한숨 섞인 소독약을 뿌려댔습니다. 매캐한 냄새에 눈이 아파옵니다. 할아버지의 구부정한 허리가 눈앞을 서성거리다 사라집니다.
오늘은 喪中입니다. 옆집은 동당거리며 서너 계단씩 뛰어다니는데 점검 중 간판을 내걸고 있습니다. 머릿속에 조등만 환히 밝히고 있습니다.
달과 노래하는 중이에요 / 심인숙
초저녁달이 도르래를 내리고 있어요
끊어진 수화기에선 아직도 당신의 말소리가 새어나와요
슬플 땐 노래하라고 밀림의 타잔이 말했던가요
샤우팅 창법으로 노래하고 싶었어요
나는 주춤거리다 이내 달이 끄는 도르래에 올라타요
담을 훌쩍 넘어
아아 새보다 빠르게 달음박질치는 건 내 몸의 긴 그림자에요
달빛 도르래에 매달려
난 정말 가뿐하게 네거리 빨간 신호등을 건너가고 있어요
밧줄을 잡고 나무와 나무의 등을 옮겨 타며 밀림을 지나가고 있어요
아 아 코끼리를 불러볼까요
구구구구 자그마한 구관조들이 몰려오네요
물소리가 들려요 폭포수가 보여요
공기방울처럼 흩어져 내리는 함성들
빈 둥지를 슬쩍 건드리면 하프를 켜는 천사들이 나올까요
당신의 말소리 이곳에선 들리지 않아요
나는 달빛 도르래를 타고 울퉁불퉁한 지평선을 넘어가고 있어요
악보를 삼킨 달이 연거푸 노랠 불러요
공놀이 / 심인숙
햇볕 위로 집이 기우뚱 미끄러져요
어지럼증을 느낀 나는 그만 엉금엉금 침대로 기어들어요
오늘은 방 하나만 차지하기로 하죠
천장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동안
당신은 전등갓처럼 입을 크게 벌려 웃고 있군요
벽들이 빠르게 자리를 바꿔치고 있어요
늦기 전에 전화를 걸어야 하는데 수화기가 자꾸 달아나고 있어요
장롱이 거꾸로 뒤집어져요
달력 속의 시간들은 미래로 앞 다투어 나가고
걸어 논 옷가지는 바닥으로 떨어지지도 않고 둥둥 떠다니네요
지금 방은 거대한 공처럼 튕겨지고 있어요
문갑이 천정 속으로 기어들어 가고 서랍들이 의자 위에 걸터앉아요
너구리 인형이 꼬리를 흔들며 미끄러져 가고
크고 작은 난 화분이 산발한 채 굴러다녀요
끓어오르는 열정을 싣고 다니며
침대가 또 한 번 신나게 솟아오르지만 뭐, 까딱없어요
문 앞에 앰뷸런스가 당도할 때까지
당신과 나,
온몸에 바람을 불어넣고 가속도를 붙여요
<심사평>
구체적 묘사와 소재의 특이성
새로운 시인을 뽑는 일은 새로 떠오르는 눈부신 별 하나를 기다리는 일만큼 가슴 뛰는 일이다. 많은 응모자들 중에 숨어 있을 빼어난 시인을 기다리며 떨리는 손으로 심사에 임했다. 먼저 예심을 통과하여 최종 심사에 넘겨진 마흔네 분의 작품 400여 편을 면밀히 읽었다. 이미 예심을 통과한 작품들이어서 그런지 전체적으로 시적 긴장이 넘치고 진정성이 돋보였다. 우선 시에서 제일 눈에 거슬리는 언어의 클리쉐(Cliche)가 별로 눈에 뜨이지 않았다. 그러나 시류적 경향에서 자유롭지 못한 작품들이 여전히 눈에 뜨였다.
마지막까지 손에 남은 11편을 들고 최종논의를 한 결과 심인숙 씨의 <파랑도에 빠지다>와 김지윤 씨의 <수인반점의 왕선생>을 당선작으로 정하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심인숙 씨의 <파랑도에 빠지다>는 우선 경쾌한 리듬과 구체적인 묘사가 신선한 이미지와 활력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었다. 김지윤 씨의 <수인반점의 왕선생>은 습작의 내공이 만만치 않게 느껴지는 솜씨였다. 사물을 따스하게 포착하는 시선과 소재의 특이성이 앞으로의 가능성을 충분히 내보이고 있었다.
이외에 심사위원의 손에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이 안승 씨의 <밤 눈>외, 조혜정 씨의 <동물사전>외, 심은섭 씨의 <겨울 도마뱀>외, 김정욱 씨의 <물고기좌 이선생>외, 김선미 씨의 <외딴집>외, 최운정 씨의 <동백>외, 김해선 씨의 <더위먹은>외, 김선 씨의 <종이 인형>외 등이었다. 모두가 곧 새로운 별로 떠오를 시간이 임박해왔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을만큼 수준작들이었다.
심인숙, 김지윤 두 당선자에게 진심으로 축하를 드리며, 문운이 내내 왕성하기를 기원한다.
* 심사위원: 문정희(시인/동국대 교수) 권영민(본지주간/문학평론가)
심인숙 시인
한국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졸업
2006년 <전북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2006년 <문학사상> 신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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