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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장골 시편 민달팽이 / 김신용

 

 

냇가의 돌 위를

민달팽이가 기어간다

등에 짊어진 집도 없는 저것

보호색을 띤, 갑각의 패각 한 채 없는 저것

타액 같은, 미끌미끌한 분비물로 전신을 감싸고

알몸으로 느릿느릿 기어간다

햇살의 새끼손가락만 닿아도 말라 바스라질 것 같은

부드럽고 연한 피부, 무방비로 열어놓고

산책이라도 즐기고 있는 것인지

냇가의 돌침대 위에서 오수(午睡)라도 즐기고 싶은 것인지

걸으면서도 잠든 것 같은 보폭으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꼭 술통 속을 빠져나온 디오게네스처럼

물과 구름의 운행(運行) 따라 걷는 운수납행처럼

등에 짊어진 집, 세상에게 던져주고

입어도 벗은 것 같은 납의(衲衣) 하나로 떠도는

그 우주율의 발걸음으로 느리게 느리게 걸어간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아내가 냇물에 씻고 있는 배추 잎사귀 하나를 알몸 위에 덮어주자

민달팽이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귀찮은 듯 얼른 잎사귀 덮개를 빠져나가버린다

 

치워라, 그늘!

 

 

 

 

도장골 시편 - 민달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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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작문학상 운영위원회는 제6회 노작문학상 수상자로 시인 김신용(61) 씨를 8일 선정했다. 수상작은 '도장골 시편-민달팽이' 5편이다.

 

노작문학상은 시 '나는 왕이로소이다'를 쓴 노작 홍사용(1900-1947)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그의 선영이 있는 경기도 화성시 문화계 인사들이 주도해 만들었다.

 

상금은 1천만 원이며, 시상식은 128일 오후 730분 화성시 라비돌리조트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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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改作 / 김경미

 

 

어머니는, 옷은 떨어진 걸 입어도 구두만큼은

비싼 걸 신어야 한다 아버지는, 소고기는 몰라도

돼지고기만큼은 최고 비싼 질을 먹어야 한다

그렇다 화장하다 만 듯 사는 친구는, 생리대만은 최고급이다

먹는 입 싸도 칫솔에만큼은 돈을 아끼지 않는,

누구는 귀를 잘라 팔지언정 음악만은 기어이 좋은 걸 쓴다.

다들 세상의 단 하나쯤은 질을 헤아리니

그렇다 라일락꽃들의 불립문자 탁발의 봄밤 혹은

청색 다도해의 저녁 일몰이야말로 아니다 연애야말로

삼각관계야말로 진정 질이 전부이다 고난이야말로

매혹의 우단 벨벳 검은 미망인 기품으로

잘 지어 입혀야 한다 몸이야말로 시계를 꺼낼 수 없는 곳

영혼이든가? 기도야말로

그렇다! 품종이 좋은 하늘을 써야 한다 관건은,

가장 비싼 것 하나쯤엔 서슴없이 값을 치르니 귀함이

가장 싼 셈, 숨만큼은 정말 제대로 비싼 값을 치르는 것

다 쓴 이쑤시개처럼 봄 햇빛들 쏟아지는 오후

싸구려 플라스틱 용품들 한없이 늘어놓아진 봄길에

값이여 말 자꾸 많이 하지 말아라

 

 

 

 

질-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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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작문학상 운영위원회는 제5회 노작문학상 수상자로 시인 김경미씨를 선정했다. 수상작은 -개작4편이다.

 

노작문학상은 '나는 왕이로소이다'라는 시로 민족의 울분을 대변했던 노작(露雀) 홍 사용(洪思容1900-1947)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그의 선영이 소재한 경기도 화 성시 문화계 인사들이 주도해 만들었다.

 

상금은 1000만원이며, 시상식은 1213일 오후 730분 경기도 화성시 정남면 라비돌리조트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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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워지는 순간 / 문태준

 

 

어두워지는 순간에는 사람도 있고 돌도 있고 풀도 있고 흙덩이도 있고 꽃도 있어서 다 기록할 수 없네

 

어두워지는 것은 바람이 불고 불어와서 문에 문구멍을 내는 것보다 더 오래여서 기록할 수 없네

 

어두워지는 것은 하늘에 누군가 있어 버무린다는 느낌,

 

오래오래 전의 시간과 방금의 시간과 지금의 시간을 버무린다는 느낌,

 

사람과 돌과 풀과 흙덩이와 꽃을 한사발에 넣어 부드럽게 때로 억세게 버무린다는 느낌,

 

어두워지는 것은 그래서 까무룩하게 잊었던 게 살아나고 구중중하던 게 빛깔을 잊어버리는 아주 황홀한 것,

 

오늘은 어머니가 서당골로 산미나리를 얻으러 간 사이 어두워지려 하는데

 

어두워지려는 때에는 개도 있고, 멧새도 있고, 아카시아 흰 꽃도 있고, 호미도 있고, 마당에 서 있는 나도 있고……. 그 모든 게 있어서 나는 기록할 수 없네

 

개는 늑대처럼 오래 울고, 멧새는 여울처럼 울고, 아카시아 흰 꽃은 쌀밥 덩어리처럼 매달려 있고, 호미는 밭에서 돌아와 감나무 가지에 걸려 있고, 마당에 선 나는 죽은 갈치처럼 어디에라도 영원히 눕고 싶고……. 그 모든 게 달려있어서 나는 기록할 수 없네

 

개는 다른 개의 배에서 머무르다 태어나서 성장하다 지금은 새끼를 밴 개이고, 멧새는 좁쌀처럼 울다가 조약돌처럼 울다가 지금은 여울처럼 우는 멧새이고, 아카시아 흰 꽃은 여러 날 찬밥을 푹 쪄서 흰 천에 쏟아놓은 아카시아 흰 꽃이고……. 그 모든 게 이력이 있어서 나는 기록할 수 없네

 

오늘은 어머니가 서당골로 산미나리를 베러 간 사이 어두워지려 하는데

 

이상하지, 오늘은 어머니가 이것들을 다 버무려서

 

서당골에서 내려오면서 개도 멧새도 아카시아 흰 꽃도 호미도 마당에 선 나도 한 사발에 넣고 다 버무려서, 그 모든 시간들도 한꺼번에 다 버무려서

 

어머니가 옆구리에 산미나리를 쪄 안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세상이 다 어두워졌네

 

 

 

 

제4회 노작문학상 수상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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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작문학상 운영위원회(위원장 홍신선 동국대 교수)가 주관하는 제4회 노작문학상 수상자로 시인 문태준씨(34)가 선정됐다. 수상작은 어두워지는 순간3.이다

 

노작문학상은 나는 왕이로소이다라는 시로 민족의 울분을 대변했던 노작 홍사용(19001947)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그의 선영이 소재한 경기도 화성시 문화계 인사들이 주도해 만들었다.

 

시상식은 오는 1210일 오후 630분 경기 화성시 정남면 라비돌리조트에서 열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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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북 / 문인수

 

 

저 만월, 만개한 침묵이다.

소리가 나지 않는 먼 어머니,

그리고 아무런 내용도 적혀있지 않지만

고금의 베스트셀러 아닐까

덩어리째 유정한 말씀이다.

만면 환하게 젖어 통하는 달.

북이어서 그 변두리가 한없이 번지는데

괴로워하라, 비수 댄 듯

암흑의 밑이 투둑, 타개져

천천히 붉게 머리 내밀 때까지

억눌러라, 오래 걸려 낳아놓은

대답이 두둥실 만월이다.

 

 

 

 

문인수 달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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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회 노작문학상에 문인수 시인의 '달북'이 선정됐다. 수상자에게는 500만 원의 창작지원금이 수여되며 별도의 수상집이 발간된다.

 

노작문학상 운영위원회(위원장 홍신선 동국대교수)는 지난 19일 황동규 교수(서울대), 신경림 시인, 김주연 교수(숙명여대)가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가운데 열린 최종 본심에서, 격론 끝에 10명의 작품 가운데 '달북'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김주연 교수는 심사평에서 "'달북'은 원숙과 독창이 자연스럽게 어울린 명품으로서 손색이 없어 보인다""만월을 '만개한 침묵'이라고 하면서 어머니의 '덩어리째 유정한 말씀'이라고 풀어놓은 짧은 비유의 언어는 시인의 깊은 상상력이 음전하게 표현된 것"이라고 평했다.

 

문인수 시인은 1945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나 1985년 심상 신인상에 '능수버들'이 당선돼 문단에 나왔다.

 

이후 첫 시집 '늪이 늪에 젖듯이'를 비롯, '', '홰치는 산','동강의 높은 새' 등 시집을 발표했으며 2000년 김달진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노작문학상은 일제강점기 '나는 왕이로소이다'로 민족의 울분을 대변했던 노작(露雀) 홍사용(1900~1947)선생의 문학정신을 선양키 위해 그의 선영이 소재한 경기 화성시 문화계 인사들이 주축이 돼 제정한 상이다.

 

2001년 제1회 문학상은 안도현 시인, 2회 문학상은 이면우 시인이 수상한 바 있다. 시상식은 다음 달 20일 오후 430분 경기 화성 정남면 '라비돌리조트'에서 열릴 예정이다.

 

 

 

달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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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 / 이면우

 

 

오솔길 가운데 낯선 거미줄

아침 이슬 반짝하니 거기 있음을 알겠다

허리 굽혀 갔다, 되짚어 오다 고추잠자리

망에 걸려 파닥이는 걸 보았다

작은 삶 하나, 거미줄로 숲 전체를 흔들고 있다

함께 흔들리며 거미는 자신의 때를 엿보고 있다

순간 땀 식은 등 아프도록 시리다

 

그래, 내가 열아홉이라면 저 투명한 날개를

망에서 떼어 내 바람 속으로 되돌릴 수 있겠지

적어도 스물아홉, 서른아홉이라면 짐짓

몸 전체로 망을 밀고 가도 좋을 게다 그러나 나는 지금 마흔아홉

홀로 망을 짜던 거미의 마음을 엿볼 나이

지금 흔들리는 건 가을 거미의 외로움임을 안다

캄캄한 뱃속, 들끓는 열망을 바로 지금, 부신 햇살 속에

저토록 살아 꿈틀대는 걸로 바꿔 놓고자

밤을 지새운 거미, 필사의 그물짜기를 나는 안다

이제 곧 겨울이 잇대 올 것이다

 

이윽고 파닥거림 뜸해지고

그쯤에서 거미는 궁리를 마쳤던가

슬슬 잠자리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했다

나는 허리 굽혀, 거미줄 아래 오솔길 따라

채 해결 안 된 사람의 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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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 노작문학상 수상자로 시인 이면우(51)씨가 선정됐다. 수상작은 '거미' 4편이다.

 

노작문학상은 일제시대 '나는 왕이로소이다'라는 시로 민족의 울분을 드러냈던 노작(露雀) 홍사용(1900-47)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그의 선영이 있는 경기도 화성시의 문화계 인사들이 노작문학상 운영위원회(위원장 홍신선.동국대 교수)를 설립해서, 지난해부터 시상하고 있다. 1회 수상자는 안도현 시인이다.

 

올해 수상자인 이씨는 대전 출신으로 중학교 졸업 후 보일러공으로 일하며 시집 저 석양,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그 저녁은 두 번 오지 않는다등을 발표했다.

 

시상식은 오는 27일 오후 5시 서울역 건너편 연세빌딩 주택문화관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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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 안도현

 

 

나무 속에

보일러가 들어 있다 뜨거운 물이

겨울에도 나무의 몸속을 그러렁그러렁 돌아다닌다

 

내 몸의 급수 탱크에도 물이 가득 차면

, 그것이 바람난 살구꽃처럼 터지려나

보일러 공장 아저씨는

살구나무에 귀를 갖다 대고

몸을 비벼본다

 

 

 

제 1회 노작문학상 수상작품집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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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작(露雀) 홍사용 시인을 기리는 제1회 노작문학상 수상자로 안도현(41) 시인이 선정됐다. 수상작은 <시인> 4편이며 상금은 5백만 원이다.

 

노작문학상은 노작의 방계 후손인 홍신선 교수(동국대 문예창작과) 등 문인들이 주축이 되고 노작의 고향인 경기도 화성시의 후원으로 제정됐다.

 

시상식은 215일 대학로 문예진흥원 강당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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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해서 머나먼 / 최승자

 

 

먼 세계 이 세계

삼천갑자동방삭이 살던 세계

먼 데 갔다 이리 오는 세계

짬이 나면 다시 가보는 세계

먼 세계 이 세계

삼천갑자동방삭이 살던 세계

그 세계 속에서 노자가 살았고

장자가 살았고 예수가 살았고

오늘도 비 내리고 눈 내리고

먼 세계 이 세계

 

(저기 기독교가 지나가고

불교가 지나가고

도가(道家)가 지나간다

 

쓸쓸해서 머나먼 이야기올시다

 

 

 

쓸쓸해서 머나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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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문학회와 천년의시작이 공동 주관하는 제5회 지리산문학상 수상자로 최승자 시인(58)5일 선정됐다.

 

수상작은 쓸쓸해서 머나먼이다.

 

심사위원회는 최승자 시인은 군사문화로 대변되는 가부장적 기존질서와 시류에 대한 페미니즘적인 성찰과 함께 자본주의적 허구에 대한 통렬한 글쓰기를 해왔다누층구조로 개진되는 시적 삶과 감각의 새로운 힘이야말로 누겹의 산자락으로 형성된 지리산의 아득한 존재성과 상응한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함께 발표된 제5회 최치원신인문학상은 이혜리 시인(22)에게 돌아갔다.

 

수상자는 각각 500만원과 200만원의 상금을 받게되며 시상식은 28, 29일 경남 함양군 상림공원에서 열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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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신발 / 정호승

 

 

비가 온다

집이 떠내려간다

나는 살짝 방문을 열고

신발을 방 안에 들여놓는다

비가 그치지 않는다

신발이 떠내려간다

나는 이제 나의 마지막 신발을 따라

바다로 간다

멸치 떼가 기다리는 바다의

수평선이 되어

수평선 위로 치솟는 고래가 되어

너를 기다린다

 

 

 

당신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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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시작과 계간 '시작', 지리산문학회가 공동 주관하는 지리산문학상의 제4회 수상자로 정호승 시인의 '물의 신발' 4편이 선정됐다.

 

지리산문학상은 그동안의 공모제에서 기성 시인들의 지난 한 해 발표된 작품을 대상으로 하는 심사제로 전환했다.

 

특히 올해부터 지리산문학상은 ()천년의시작.계간 '시작'과 지리산문학회가 공동으로 주최하게 되면서 전국적인 규모의 대표적인 문학상으로 도약하는 원년이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이러한 지리산문학상의 새로운 도약에 걸맞는 수상자 선정을 위해 유안진 시인 등은 심사위원들의 고심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오랜 격론 끝에 근자에 들어 삶과 죽음, 바보와 성자,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 의식의 심화와 확장을 보여주고 있는 정호승 시인이 제4회 지리산문학상 수상 시인으로 선정됐다.

 

한편 제4회 최치원신인문학상 당선작은 이은희의 '달의 아이' 4편이 선정돼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수상을 하게 된다.

 

한편 지리산문학제를 주관해 왔던 지리산문학회는 전국에서 드물게 올해로 30년을 맞고 있는 문학회로 그동안 매년 '지리산문학' 무크지를 발행해왔으며 김륭시인을 비롯해 문병우, 정태화, 권갑점 등의 시인과 노가원, 곽성근 작가와 정종화 동화작가 등을 배출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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쭉쭉 빵빵 사이로 오는 황진이 / 김왕노

 

 

황진이 네 생각이 죽은 줄 알았다. 아파트 납골당을 지날 때, 묘비가 된 빌딩을 지날 때, 황진이 생각이 새까맣게 죽어 간줄 알았다. 어디서 육탈되어 뼈만 남아있는 줄 알았다. 난 애도나 명복 한 번 빌 줄도 몰랐고

 

그러나 거리를 지날 때, 죽은 줄만 알았던, 황진이 생각이 살아서 돌아오고 있었다. 어둠을 초월해 황진이 생각이, 긴 치맛자락 나부끼며, 자유롭게, 모든 저지선을 뚫고 오는, 황진이 생각, 붉은 입술의 황진이 생각

 

이제 저 쭉쭉 빵빵 사이로 오는 황진이를 찾아 이 시대에는 없다지만 그럴수록 황진이를 찾아, 황진이 같이 붉은 칸나 키우며 황진이를 찾아, 내 영혼의 뿌리를 담글 속 깊은 황진이를 찾아, 저 쭉쭉 빵빵 사이로 오는 황진이, 나의 계집 황진이를 찾아, 남 몰래 살 섞을 황진이, 우리의 황진이가 아니라 나의 황진이를 찾아, 방도 붙이고, 실종 신고도 내고, 저 쭉쭉 빵빵 세월 사이로 오는 황진이, 붉은 옷자락의 황진이를 찾아, 하얀 이마를 찾아, 조개 보다 더 꽉 다문 황진이의 정조를 찾아, 죽창보다 더 꼿꼿한 황진이의 지조를 찾아

 

직장에서 거리에서, 술집에서, 강남에서, 광화문에서, 황진이 내 황진이를 찾아, 저 쭉쭉 빵빵 세월 사이로 오는, 가냘프나 올 곧은 정신의 황진이, 나를 불태울 황진이, 나를 재로 남길 황진이, 쭉쭉 빵빵 사이로 거침없이 오는 황진이, 사이트로, 극장가로, 로데오 거리로, 현상금도 내걸고, 전단지도 뿌리며, 기어코 찾아야할 내 황진이, 내 몸의 황진이, 내 넋의 황진이

 

황진이 네게 사무치는 말들이 저렇게 푸른 하늘을 밀어오는데, 수수밭 사이로 초가을 호박꽃 피우며, 벌써 차가워진 개울물 건너오는데, 황진이 말 타고 네 치마폭에 파묻히려 청동방울 딸랑거리며, 개암나무 뚝뚝 떨어지는 전설 속을 지나, 산발한 채로도 가고 싶구나. 황진이 네 은장도 빛나는 밤, 올올이 엉키던 넝쿨이 틈을 보이는 계절, 네 머무는 마을에 꿈이 깊고, 우물물 깊어져 마을을 파수하는 개 울음 높아가는 밤, 네 있는 마을은 이조의 어느 모퉁이인가. 기우는 사직의 어느 뒤란쯤인가.

 

쭉쭉 뻥뻥하게 다가오는 세월 사이, 저 비대한 몸짓 사이 너는 오늘도 보이지 않고, 난 새털구름 따라 흐르는 갓 태어난 철새 같이, 끝없이 사방으로 풀려가는 쪽물 같이, 네게 끌려 흐르고 싶은, 황진이 네 웃음소리 청아한 마을, 처연한 내 그리움 앞세우고 찾아 가는 황진이, 황진이 네 붉은 마음을 찾아, 구비 구비 너를 찾아

 

 

 

복사꽃 아래로 가는 천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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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회 지리산문학상 수상작으로 김왕노(52·사진) 시인의 쭉쭉 빵빵 사이로 오는 황진이6일 뽑혔다.

 

권혁웅·정끝별 시인과 평론가 유성호씨 등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은 "김왕노 시인은 비극적 언어를 통해 시적인 것의 깊이를 구축해 왔으며, 궁극적으로 지상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들의 존재 형식을 증언하는 곳으로 한결같이 귀환해 왔다"며 "이런 연장선상에서 더욱 감각적 선명성과 음악적 배려로 시편의 진경을 보여주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시상식은 11일 오후 4시 경남 함양군 상림공원 특설무대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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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하백마도(柳下白馬圖)*를 보다 / 유종인

 

 

버드나무는 우듬지가 보이지 않는다.

치렁치렁한 줄기 가지로 옅은 바람을 탄다

흰 말이 곁에 있었지만

수양인지 능수인지 모를 버들은 말을 건드리지 않는다

 

말은 예민한 짐승, 잘못 건드리면

주인도 태우지 않고 먼 들판으로 달아난다

거기서 말의 고삐와 안장은

들꽃들의 우스갯거리에 불과하다

이 흰말에 죽은 말벗을 태우려 했나니 이 흰

말의 잔등에 앉아 영원을 달리려 했더니

 

버드나무는 고삐도 없이 수백 년 한자리에 묶이고

잠시 매인 흰 말은 무료한 투레질로

오월 허공에 뜬 버들잎에 허연 침버캐를 묻힌다

가만히 버들가지가 말의 허리를 쓸어준다

흰 말은 치뜬 눈동자가 고요해지며 제 눈의 호수에

버들잎 몇 개를 띄어준다 눈이 없는

버드나무는 말의 항문을 잎끝으로 간질이자, 말은

()이 안 든 허공에 뒷발질을 먹인다 허공은 죄가 없으므로

멍이 들지 않는다 뼈가 부러지지도 않는다

 

주인이 오지 않는 흰 말과 버드나무

사이에 능수(能手)와 능란(能爛)의 연리지(連理枝) 고삐 끈이 늘어진다

버드나무는 오히려 짐승처럼 징그럽고

흰 말은 꽃 핀 오두막처럼 고요하다

친연(親緣)의 한나절이 주인을 빼먹은 일로 갸륵하다

 

* 공재 윤두서의 그림. 보물.

 

 

 

숲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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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 소감]

 

부끄럽고 일천한 얘기지만, 나는 이전까지 한 번도 지리산을 와 보지 못했다. 지리산은 문학과 관념 속의 지리산이었고 같은 한반도 안에서 언젠가는 가봐야 할 막연한 명산 중의 하나였다.

 

그러던 어느날 그 지리산이 내게 하나의 의미있는 존재로 서서히 그 명암을 드리우기 시작하는 느낌을 가졌다. 그것은 어떤 글이나 그림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하나의 기운에 가까웠다. 그것은 단순한 예감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돌올해졌다. 무엇이든지 하나의 산을 만나기 위해서는 그 만한 높이와 넓이와 그늘의 바다를 거느려야 한다는 게 내 판단이라면 판단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리산은 내게 하나의 전환기적인 분수령으로 다가드는 드넓은 품일지도 모른다.

 

아득한 세월 저편에 나를 유목하듯이 내버려두고 이제와 이 높은 뫼의 자락에서 다시금 나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예감은 나의 바람이자 실제가 될 수도 있을지 모른다. 비록 온몸으로 다가와 이 산을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나는 이 땅이 내게 전해준 서기(瑞氣)를 예전부터 감지하고 있었고 그 막연한 도움 속에서 내가 살아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근친의 관계로 이 땅에 살아있음을 확인해준 산이 있다면 그 맨 앞자리에 지리산을 두지 않을 수 없으리라. 어쩌면 이 순간의 만남 속에 지리산에서 무엇이든 회복할 수 있고 소멸된 그 어떤 것도 복원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져본다.

 

그런 면에서 지리산은 내게 가장 늦된 만남이자 가장 원초적인 선험의, 아니 영험의 큰 뫼로 이미 우뚝했음을 선선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내게 지리산의 기운이 잠재돼 있음을 일깨워주시고 그 문장의 연분이 이제와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계기가 있음을 보여주신 함양의 모든 분들과 지리산에게 그리고 시문이 또한 지리산 같아야 함을 부족한 글에 독려해 주신 정일근 선생님과 송수권 선생님께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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