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안의 비린내를 헹궈내고 달이 솟아오르는 창가 그의 옆에 앉는다 이미 궁기는 감춰두었건만 손을 핥고 연신 등을 부벼대는 이 마음의 비린내를 어쩐다? 나는 처마 끝 달의 찬잔을 열고 맑게 씻은 접시 하나 꺼낸다 오늘 저녁엔 내어줄 게 아무것도 없구나 여기 이 희고 둥근 것이나 핥아보렴
시인 송찬호, 소설가 박범신, 평론가 이광호 씨가 3일 대산문화재단(이사장 신창재)이 주관하는 제17회 대산문학상 부문별 수상자로 뽑혔다. 브루스 풀턴·주찬 풀턴 부부와 김기창씨는 최윤의 소설집 <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There a Petal Silently Falls)로 번역 부문 상을 받았다. 희곡 부문은 수상자를 내지 못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공선옥), <도가니>(공지영), <엄마를 부탁해>(신경숙) 등과 각축을 벌인 박씨의 소설 <고산자>는 “역사적 인물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소재와 형식에 도전하는 작가적 태도를 엿볼 수 있었다는 점과 그 시대가 만들어낸 문제적 개인으로서의 고산자를 정밀하게 그려낸 점”이 높은 점수를 얻었다.
송씨의 시집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은 “뛰어난 묘사력과 동화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개성을 확보하고 있으며 따뜻한 인간미를 담고 있으면서도 참신함과 새로움을 주고 있는 점”이, 이씨의 평론집 <익명의 사랑>은 “현장성과 비평적 에스프리를 지니고, 우리 문학의 현재 모습을 보다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점”이 각각 평가받았다. 번역 수상작에 대해서는 “원문의 섬세함과 아이러니를 잘 살린 매우 우수한 번역이고 유수한 출판사에서 출판되어 한국문학의 국외 선양에 기여도가 크다는 점”이 선정 사유로 꼽혔다.
고향인 충북 보은에서 시를 쓰고 있는 송찬호씨는 “유년기의 농촌 환경과 정서가 내 시 쓰기에는 큰 축복이었다”면서 “내가 있는 자리에서, 시선을 멀리 두지 않고, 보이는 삶의 풍경을 그려내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광호씨는 “시와 소설에 대한 질투가 내 평론의 동력이었다”고 토로하면서 “그런 질투와 평론의 자율성 사이에서 고민하던 내게 이번 수상이 다시한번 평론을 밀고 나갈 수 있게 힘을 주었다”고 말했다.
소설 부문은 5천만원, 시와 평론·번역 부문은 각 3천만원의 상금을 준다. 시상식은 27일 오후 6시 서울 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열린다.
민음사가 주관하는 제19회 김수영문학상 수상자로 시인 송찬호씨가 선정됐다. 수상작은 올해 2월 출간된 시집 "붉은 눈,동백"(문학과지성사)이다.
동백나무부터 동백교도소에 이르기까지 ‘동백’이란 키워드를 여러 각도로 조명한 이 시집은 “머리와 심장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온몸으로 밀고 나가려는 치열한 시작 자세를 지향한다”(시인 김광규)는 평을 받고 있다.
송씨는 1959년 충북 보은 태생으로 경북대 독문학과를 졸업한 뒤 1987년 "우리시대의 문학"에 "금호강 변비"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송 시인은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민음사) ‘10년 동안의 빈 의자’(문학과지성사,1994) 등을 발표했으며 현재 시작 활동과 함께 충북 보은에서 축산업을 하고 있다.
며칠 전에 집에서 가까운 산으로 단풍 구경하러 갔습니다. 그 너머로는 이름난 속리산도 있지만, 그날 갔던 산은 그리 높지 않고 혼자서도 걷기에 좋은 고적함이 있었습니다. 이왕 산에 들었으니 정상까지 올라가려고 했지요. 그런데 정상에 가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작년부터 말썽을 부리기 시작한 왼쪽 무릎이 욱신거리며 오를수록 통증이 더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무리하면 무릎 관절염이 더 심해지겠다는 생각에 그만 포기했습니다. 그러고 8부 능선쯤의 바위에 앉아 가져간 물과 빵을 먹으며 한참 쉬었습니다.
산꼭대기가 아니더라도, 거기서도 겹겹의 산줄기들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멀리 제가 사는 동네도 보이고 그 앞 국도로 성냥갑만한 차들이 바삐 오가는 것도 보였습니다. 문득 저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문학의 높이라면, 제 시쓰기의 자리는 어디쯤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기서 가리키는 봉우리는 꼭 문학적 성취나 성공의 높이를 이르는 건 아닙니다. 그보다는 쓰고자 하는 글의 목록이나 쓰는 글의 내적 열망의 크기를 가리키는데 더 가까운 말입니다. 요즘 제가 원고지앞에 옛 습작 시절의 추억과 열정을 자꾸 소환하는 것도 그 이유일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제 위치는 지금 산 날망이 아니라, 오르는 비탈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이번처럼 무릎이 아프면 쉬엄쉬엄 올라야 하거나 아예 중도에 포기하고 내려올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나이에 따른 퇴행을 넘어 무릎의 건강을 바라는 심정과 같이, 저의 ‘문학에의 등정’을 포기하지 않기를 스스로에게 다짐할 뿐입니다.
지난 몇 년간 시에 대한 고민이 더욱 많아졌습니다. 앞으로 제가 쓰는 시가 새롭지 않으리란걸 압니다. 그래도 계속 시를 쓸 것입니다. 그렇게 쓴 시가 평이하게 비쳐도 수긍하겠습니다. 제17회 애지문학상 수상자로 저를 호명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번에 상을 주시는 것도, 비록 평이한 시가 나올지라도 거기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치열한 갱신의 정신으로 다가가라는 격려와 채찍의 말씀으로 알겠습니다. 심사해주신 선생님들께 시에 대한 더욱 부지런함으로 보답하겠습니다.
우리 인간의 세상에서 말처럼 굳세고 목질이 좋고, 말처럼 아름다운 꽃과 열매를 지닌 것은 없다. 말은 상냥하고 심지가 곧고, 언제, 어느 때나 정의로운 길로 인도하며, 서로가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게 해준다. 부모형제, 단군, 하나님, 도덕, 종교, 사상, 이념, 가정, 군대, 학교, 경찰, 회사, 국회, 정부, 진리, 허위, 선악, 남녀 등―, 이 모든 것은 말의 꽃이자 열매라고 할 수가 있다. 말보다 키가 크고, 말보다 힘이 세고, 말보다 빠르고, 말보다 높이 나는 것은 이 세계에 없다.
말은 명령하고, 말의 명령으로 우주가 탄생하고, 말은 모든 것들의 영원을 원하고, 이 생명의 숲을 가꾼다.
2019년은 『애지』 창간 20주년이며, 어느덧 제17회 애지문학상을 시상하게 되었다. 2018년 겨울호부터 2019년 가을호까지 발표한 작품들 중에 10편의 시를 후보작으로 선정했고, 그 결과 송찬호 시인의 「악어의 수프」와 이영식 시인의 「꽃의 정치」를 공동수상작으로 선정하게 되었다. 박분필의 시인의 「자작나무 自敍傳」, 천양희 시인의 「어느 미혼모의 질문」, 이병률 시인의 「그 배를 타기는 했을까」, 고재종 시인의 「길에 대하여」, 김병호 시인의 「누가 괜찮아, 했을까」, 송승언 시인의 「나 아닌 모든」, 서효인의 「종각에서의 대치」, 김기택의 「발바닥」 등은 모두가 탁월한 시들이고, 대단히 안타깝고 죄송하게 생각한다.
송찬호 시인의 「악어의 수프」는 사회적 천민들의 ‘눈물의 수프’이며, 그 ‘수난의 역사’를 우화적으로 노래한 명시라고 할 수가 있다. 자본주의 사회는 제국주의와 똑같고, 소수의 귀족들(자본가들)이 생산과 소비의 과정을 다 움켜쥐고, 소비자의 구매의사결정능력까지도 다 빼앗아 버린 사회라고 할 수가 있다. 그토록 사납고 포악한 악어는 육체노동을 하는 농민들이고, 이 농민들은 이른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최고급의 농산물을 생산해내지만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이라고는 고작 피곤하고 지친 육체와 가난과 병과, 심지어는 농약을 먹고 자살하는 것뿐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 과정은 송찬호 시인이 역설한 대로 악어가 악어사냥꾼들을 위해 그토록 처절하게 수프를 끓이고, 끝끝내는 자기 자신의 육체마저도 먹잇감으로 바치는 것과도 똑같다. 하나도 희생정신이고, 둘도 희생정신이고, 이 악어들의 희생정신이 도시의 자본가들, 또는 도시의 고급문화인들의 삶의 토대가 된다.
모든 고급문화는 「악어의 수프」의 역사이며, 이 땅의 이름없는 사회적 천민들의 희생의 역사라고 할 수가 있다.
2019년부터는 애지문학상 문학비평부문을 다시 부활하여 시상하고자 했지만, 그러나 최종심에 올라온 후보작들을 보고 그만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비평가는 사상가이며, 그 모든 것을 주재하는 심판관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한국문학비평의 후퇴는 참으로 애석하고 안타깝기 짝이 없다.
제17회 애지문학상 공동수상자인 송찬호 시인과 이영식 시인에게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부디 더욱더 좋은 시 많이 쓰시고, 우리 한국어와 우리 한국인들의 영광을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해 주시기를 바란다.
이미 자세히 보도된 바와 같이, 본심에는 비교적 젊은 시인에서부터 원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시인 열 분이 올랐다.
원로시인들은 원숙하고 익숙하고 안정감 있는 시세계를 보여주었고, 비교적 젊은 시인들은 새롭고 패기에 찬 사유와 당돌한 언어를 보여주었다.
심사의 논의는 원숙함과 안정감을 존중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움과 당돌함을 존중할 것인가에 대한 것으로부터 출발되었다.
이 논란은 미당문학상의 성격에 대한 논의로 이어졌다. 미당문학상은 그 해에 발표된 작품 중 가장 우수하다고 판단되는 작품에 수여하는 최고 권위의 작품상이다.
이는 “개별 작품의 완성도”가 무엇보다 중요하고, 시인의 경력이나 원숙함 또는 새로움이나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기준이 됨을 의미한다. 지금까지의 미당문학상 수상작들도 이 점을 뒷받침한다.
그래서, 매우 아쉽고 불안한 마음으로, 원숙의 편안함과 당돌의 불편함을 우선 옆으로 미뤄두었다.
한편 원숙함 속에는 비슷한 높이와 비슷한 모습을 한 봉우리들이 군집을 이루고 있어 “하나의 우뚝 솟은 봉우리”를 찾는 심사위원들의 눈을 오래 머물게 하지 못했다.
또 당돌함 속에는 매력과 힘에 미치지 못하는 거칠고 미숙한 표현들이 더러 있어 심사위원들의 눈을 피해가게 만들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공기는 내 사랑’(정진규), ‘저수지 관리인’(김명인)같은 원숙함의 미덕과 ‘우리가 소년 소녀였을 때’(심보선) 같은 새로움의 반짝임과 사유의 저돌성은 특히 포기하기 힘들어 자주 재론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논의의 테두리는 ‘겨울 시금치 밭’(장석남), ‘늙은 산벚나무’(송찬호), ‘가을’(송찬호) 등으로 좁혀지면서 다시 ‘완성도’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이야기 했다. 그것은 내용과 형식을 아우르고, 새로움과 안정감을 아우르는 개념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정통적인 형식성과 언어미학을 기본 조건으로 한다. 이러한 기본 조건을 가장 높은 수준에서 충족시키고 있는 작품으로, 심사위원들은 송찬호 시인의 ‘가을’을 선택했다.
‘가을’은 전통적인 감각과 언어로 가을의 서정을 노래한 작품이다.
미당선생이 지녔었던 언어의 마술을 다시 한번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또한 분위기와 어조에는 백석의 느낌도 있다.
장난기와 천진함도 있다. 또 요즘 시에서는 좀처럼 만나기 힘든 소리와 운율의 미학이 특별한 수준에서 성취되어 있음도 매력적이다. 그래서 대가(大家)의 옛날작품을 대하는 것 같기도 하다.
‘가을’은 복고적인 작품이다. ‘가을’ 속의 가을은, 오늘날 비현실에 가깝다. 그것은 현실의 재현이라기보다는 현실이 상실한 미학을 복원해 보여준다.
해체와 잡종과 금속성의 21세기 전자시대에, ‘가을’이 보여주는 복고적 감각과 언어 미학은 뜻밖의 전위성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최근 송찬호 시인은 무거운 형이상학적 사유 대신에 명랑한 옛날식 언어유희를 추구하고 있다. ‘가을’은 그 가운데서도 수작이다.
‘가을’에서 멋지게 구현된 ‘명랑한 옛날식 언어유희’는, 사이버 세상에 대한 유쾌한 반란군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미당문학상 수상작 ‘가을’은 사실 예심에선 거의 논의되지 않았다. ‘코스모스’ ‘소나기’ 등 송찬호 시인의 다른 작품이 물망에 올랐었다. ‘가을’은 콩이 단단히 여물어가는 모습을 그렸다. 젊은 세대들의 경험 밖 풍경이다.
“콩은 자기 씨를 퍼뜨리기 위해 콩깍지를 스스로 찢고 나옵니다. 가을엔 살짝 스치기만 해도 콩알이 1m 이상씩 탁탁 튀어나와요. 아주 역동적이죠.”
시선은 콩알총에서 ‘허리 구부정한’ 콩밭 주인에게로 옮겨간다. ‘이제 산등성이 백도라지 무덤이 더 좋다’는 콩밭 주인. 죽음을 이보다 더 환하게 예언할 수 있을까. ‘황두 두말 가웃’이면 부피론 40리터가 채 안 된다. 농사 규모로는 매우 적다. 그런데 ‘콩새야, 니 여태 거기서 머하고 있노 어여 콩알 주워가지 않구’라며 콩새에게 남은 콩을 주워가라고 재촉한다.
“적은 규모에서의 조화랄까…. 어릴 때 보았던 가장 아쉽고 따뜻한 풍경을 시로 옮길 수 있다면 이 정도이지 않을까합니다.”
작은 것에 만족하고 모자란 대로 나누며 사는 삶.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에 도달했음에도 3만 달러, 4만 달러를 재촉하는 현대인들이 까마득히 잊고 지내던 가치다.
사실 시인은 황두 두말 가웃의 소출에도 빙그레 웃을 수 있는 삶의 태도를 지녔다. 1987년 등단 후 여태 시집 세 권 낸 게 전부다. 시 청탁 마감을 잘 어기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끙끙 앓으며 시를 써내는 편”이라서다. 그 흔한 산문집 하나 내지 않았다. 시적 완성도에 비해 인지도가 낮은 건 그래서다.
“어떻게 해야 시와 내가 갈등을 빚지 않고 화해하며 오래도록 쓸 수 있을까를 고민했습니다. 남들보다 워낙 적게 내고, 나이도 있으니 앞으로 얼마만큼 시를 쓸 수 있을까 싶어 한 편 한 편 더 정성을 기울이게 되지요.”
KTX가 표준인 시대에 시인은 ‘비둘기호’같은 속도로 산다. 인터뷰를 하러 서울까지 오는 길에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기차를 한번 탔단다. 그가 사는 충북 보은군에서 서울까지 차로 한 시간이면 닿을 거리이지만 시인에겐 운전면허가 없다. 남들은 모두 서울로만 향하는데 고향에 머무는 까닭을 물었더니 “나고 자란 곳이라서”란 답이 돌아온다. 남들이 “불편하겠다”고 생각할 뿐 자신은 불편할 게 없단다. ‘아무개골 시인’이란 수식어로 주목받을 수도 있을 텐데, 그에겐 오로지 시로써 이야기하겠다는 고집스러움이 있다.
“시를 쓰게 된 게 운명적이라면 너무 비장하고, 그냥 시 쓰는 팔자입니다. 자연스럽게 시 쓰는 길로 들어섰으니 부지런히는 아니라도 꼼꼼하게 쓰자는 주의죠.”
시 앞에선 보통 꼼꼼한 게 아니다. 시인은 지난 겨울부터 동시에 손을 댔다. 초등학교 6학년인 딸에게 “시 좀 같이 만들어보자”며 살살 꼬였다. 같은 제목을 두고 부녀가 각각 시를 썼다. 딸에게 시를 가르치려는 게 아니었다.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비교하기 위해서였다.
“열댓 편 써봤는데 시가 썩 잘 됐단 생각은 전혀 안 들고, 딸은 말을 안 듣고…. 그래도 잘하면 올 겨울엔 쓸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고 보니 ‘가을’도 어른을 위한 동시라 할 정도로 천진난만하다. 시인은 잊혀져 가는 옛 풍경과 마음 씀씀이뿐 아니라 동심마저도 살려내고 있었다. 시 한 편으로 이보다 더 배부를 수는 없을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