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허무, 방랑의식과 민족혼을 커다란 스케일로 노래했던 공초 오상순 선생의 시적 위의(威儀)는 오늘날 한없이 왜소해진 우리 삶의 성찰적 역상(逆像)이 되어 주고 있다. 이러한 선생의 삶과 시를 기리는 공초문학상 제29회 수상자로 선정된 허형만 시인은 맑고 고운 순수 모국어를 섬세하게 가다듬어 온 우리 시단의 대표적 중진이다.
그의 시 세계는 근원적 보편성을 일관되게 탐색하고 추구함으로써 존재의 기원에 대한 원형적 사유를 줄곧 축적해 왔다. 사물들을 향한 경험적 관찰과 그리움의 에너지를 통해 다양하고도 심원한 형상을 얻어 온 것이다. 이번 수상작 ‘산까치’ 또한 이러한 허형만 브랜드의 정점에서 발화된 결실로 다가오고 있다. 시인은 보슬비 내리는 산길에서 산까치들이 뛰노는 장면을 만난다.
그네들과 함께 뛰고 싶어 우산을 접고 다가가는데 산까치들은 어느새 나뭇가지 위로 날아오른다. 그때 시인은 “젖어라 시여/ 심장 깊이 젖어라 시여”라고 산까치들이 젖으며 노래하는 환청을 듣는다. 산딸기도 젖으며 붉게 익어가고 시인이 상상한 ‘시’(詩)도 부드럽게 젖어간다. “젖어라 시여/ 뼛속까지 젖어라 시여”라는 마지막 외침은 ‘산길=산까치=산딸기’를 살아 있는 형상으로 만들면서 그 형상이 아름답고 처연하게 젖어 가는 순간을 실감 있게 담아내고 있다. 이는 서정시의 광맥을 지속적이고 균질적으로 일구어 온 그만의 미학적 성취다. 허형만 시인이 노래하는 이러한 생명 지향의 언어를 통해 우리는 경험적 진정성과 함께 사물의 존재 형식에 대한 발견에 깊이 참여하게 될 것이다.
자유와 허무, 방랑의식과 민족혼을 처연한 감성과 큰 스케일로 노래했던 공초 오상순 선생의 시적 위의(威儀)는 오늘날 한없이 왜소해지고 사사로워진 우리 삶의 성찰적 역상(逆像)이 되어주기에 족하다.
선생을 기리는 공초문학상 제28회 수상자로 선정된 오탁번 시인은 이러한 공초 선생의 면모에 최대한 부합하는 자유로운 상상력과 활달한 언어 그리고 인간과 자연을 실물적으로 포착하고 재현하는 능숙한 역량으로 이미 우리 문학사의 고전이 된 분이다. 그의 시세계는 기억 속의 유년과 고향에서 시작하여, 가장 순수한 원형을 간직한 ‘원서헌’ 근처의 생명들을 보살피고 어루만져온 과정을 담아낸 것이었다.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우리 기층언어에 대한 지극한 헌신을 이루어낸 시집 ‘알요강’(2019)은 이러한 만유 공존의 상상력을 극점에서 드러낸 명품이다. 거기 실린 수상작 ‘하루해’는 ‘하루해’ 아래서 때로 부지런하고 때로 느리게 움직여가는 자연의 풍경을 부조하면서도 “낮곁 내내/보행기 미는 노인 한 둘”을 대조적으로 배치함으로써 더디게 스러져가는 삶을, 쓸쓸하지만 환하고, 비어 있지만 가득한 삶의 역리(逆理)로 노래하고 있다. 오탁번만의 천진성과 반(反)근대적 시법이 다시 한번 확인되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그야말로 순은(純銀)이 빛나는 아침으로부터 뉘엿하게 기울어가는 해거름까지, 하루해의 시간을 근원적 시선으로 발견한 순수 회귀의 시학이 미덥게 펼쳐진 것이다.
진주시와 이형기 시인 기념사업회(회장 박우담)는 20세기 우리나라 지적서정의 대표시인 이형기를 기리는 2020년 제10회 이형기 문학상 수상자로 강희근 시인(77)을 선정했다고 지난 6일 밝혔다.
선정 시집은 `리디아에게로 가는 길`(현대시학사ㆍ2020)로 등단 55주년을 기념해 발간됐으며 강 시인의 21번째 자작시집이다.
이번 상은 예심과 본심을 거쳐 선정됐다. 심사위원인 오형엽 교수(고려대)와 이재복 교수(한양대)는 본심 심사에서 "언제부터인가 우리 시단에 삶의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만 요란한 시가 우리의 눈을 현혹시키고 있다. 이에 비해 강희근 시인의 이번 시집은 길에 대한 성찰로 가득하다. 자신의 삶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성찰을 통해 삶의 고양과 그 아름다움이 그 어떤 여타의 시집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한 경지를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수상자 강희근 시인은 경상대학교 명예교수로 그간 국제펜 한국본부 부이사장,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을 지냈고, `프란치스코의 아침` 등 21권의 시집과 `시 읽기의 행복` 등 15권의 저서를 출간했으며, 공보부 신인예술상, 김삿갓 문학상, 가톨릭문학상 특별상, 경남도문화상, 송수권 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한국 시문학사에서 전봉건은 전후(戰後) 모더니즘 시를 추구한 대표적인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인정될 수 있지만, 좀 더 깊은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 이유는 한국의 시단이나 학계에서는 모더니즘을 현실 인식이 없는 개념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선입견이 지배적인 것은 모더니즘을 문학의 한 사조로 이해하기보다는 리얼리즘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전봉건문학상의 심사평에서 이와 같은 점을 제기한 것은 모더니즘에 대한 고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 시인이나 연구자 중에서 전봉건과 강인한의 시 세계에 대한 관련성에 궁금증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전봉건 시인이 모더니즘 시를 추구한 것은 사실이지만 현실 인식이나 역사의식이 없다고 볼 수 없고, 강인한의 시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봉건의 시 세계는 한국전쟁이 가져온 충격과 상흔을 극복하려고 한 산물로 볼 수 있습니다. 생명력에 대한 강인한 의지로 인간 실존의 존엄성과 가치를 추구한 것입니다. 그가 「춘향연가」「속의 바다」「돌」「6․25」 등을 제재로 삼고 연작시를 쓰고, 견고한 시인 정신이 반영된 이미지를 구축하고, 유구한 생명력을 노래한 것이 그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따라서 남진우가 『전봉건 시전집』(문학동네)을 간행하면서 전봉건 시 세계의 본질을 “에로스의 시학”이라고 진단한 것은 일리가 있습니다.
전봉건은 한국전쟁의 비극을 사랑의 정신과 항일성의 언어로 극복하려는 모더니즘 시를 추구했습니다. 이와 같은 지향은 자연을 순수하게 노래한 소위 서정시와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서구의 모더니즘 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등장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자 그동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인간들이 이룩해 놓은 도덕, 사상, 윤리, 종교 등에 근본적으로 회의하고 몸소 겪어야 하는 불안과 소외 등을 주체적으로 반영해낸 것입니다. 따라서 모더니즘은 현실 인식을 회피하거나 역사의식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수용한 운동입니다.
한국전쟁이며 독재정권을 몸소 겪은 전봉건이 추구한 시 세계 역시 이와 같은 모습입니다. 단지 아방가르드적인 유럽 계열의 모더니즘보다는 감정을 적절히 통제하고 대상을 직관과 이미지로 정밀하게 묘사하는 영미 계열의 모더니즘 시 경향을 보였습니다. 결국 전봉건은 전후의 한국 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현대성의 획득이라고 생각하고 모더니즘 시를 추구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 결은 다소 다르지만 전봉건의 시 세계는 박인환, 김수영, 김종삼, 김규동 등과 같은 지형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또한 강인한의 시 세계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입니다.
전봉건이 “앞 산자락에서는/아버지가 죽었다/뒤 산자락에서는/작은아버지가 죽었다/앞 산중턱에서는/삼촌이 죽었다”(「6․25 21」)라고 민족 국가 건설이라는 거창한 명분을 내세운 한국전쟁이 가져온 무자비한 폭력을 고발한 모습은, 강인한이 “부하의 총에 죽은 깡마른 군인이, 일찍이/이 강변에서 미소 지으며 쌍안경으로 쳐다보았느니/색색의 비행운이 얼크러지는 고공의 에어쇼,/강 하나를 정복하는 건 한 나라를 손에 쥐는.”(「강변북로」) 것으로 여긴 권력자를 비판한 것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경제 발전을 빌미로 국민의 자유를 탄압한 독재 권력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전봉건이 “수천 년 수만 년을 돌 속에 갇혔어도/억척같은 그 어둠에 갇혔어도/눈 똑바로 뜬 물고기가 어찌 휘황한/황금빛이 아닐 수 있을 것이며/그 어둠 깨지자 어찌 꼬리쳐 하늘로/하늘로 솟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돌 36」)라고 상상한 것처럼, 강인한은 “내 손 안에서 숨 쉬는 알/동우리에서 막 꺼낸 피 묻은 달걀처럼/이 속에서 눈뜨는 보석 같은 빛과 팽팽한 힘이/내 혈관을 타고 심장에 전해온다”(「빈 손의 기억」)라고 돌의 생명력을 상상합니다. 그리고 전봉건이 “아직도/좀 어두운”(「6․25 1」) 시간에 일어난 한국전쟁에 맞서 “이제/곧 밝은/새벽”(「6․25 3」) 을 기다리듯이 강인한은 어둠을 걷어내는 웃음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아픔 위에 아픔을 붓는
밤의 크고 고요한 손을 본다.
누군가의 나직한 잠이 흐르고
잠 속으로 툭 떨어지는
빗방울이었다,
나는.
멀리서 가까이서 뿌옇게 내리는
가을의 분별,
회복할 수 없는 어둠을 토하며 지금
내 피는 닳는다.
새도록 떠다니는 잠의 바다여.
묵은 책갈피에 오래 파묻혔던
내 손은 눈을 뜬다.
목질의 가느다란 실핏줄과 물결 소리를
자욱이 풀어준다.
사물은
내 피가 닳는 저 어둠 뒤에서
희게 말하고
희게 웃는다.
― 강인한, 「희게 말하고 희게 웃는다」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아픔 위에 아픔을 붓는/밤의 크고 고요한 손”을 방관하거나 회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회복할 수 없는 어둠을 토”하는 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피”가 “닳는” 대응을 합니다. 아픈 상황에 자신의 아픈 몸을 밀어 넣는 역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신의 운명을 탓하지 않고 기꺼이 맞서는 세계인식을 발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묵은 책갈피에 오래 파묻혔던” 자신의 “손”이 “눈을” 뜨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하여 “목질의 가느다란 실핏줄과 물결 소리를/자욱이 풀어”줍니다.
화자는 자신이 “피가 닳는” 응전으로 헌신했을 때 실존의 조건들이 “희게 말하고/희게 웃는”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지각이나 우연적인 감각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랜 삶의 체험과 현실 인식을 통해 자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회 내에 살고 있는 인간의 영혼과 양심의 지속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질풍노도의 시대”(「질풍노도 시대가 있었다」)를 거쳐온 강인한 시인의 고투가 씨알로 빛나고 있습니다. “웃고 있는 사진 속/향연(香煙)처럼/흰/물소리”(「두 개의 인상」) 속에서 새로운 생명체가 꿈틀거리며 탄생하고 있습니다.
전봉건문학상 수상작으로 강인한 시인의 ‘두 개의 인상’ 외 4편이 선정됐다. 수상자는 상패와 상금 1000만원을 수여하게 된다. 전봉건문학상은 1950년대 모더니즘 대표 시인 전봉건 시인의 시적 성취를 기리기 위해 2015년 마련됐다. 제1회 김행숙시인, 2회 송재학 시인, 3회 김상미 시인, 4회 이승희 시인, 5회 한영옥 시인이 수상했다.
현대시학 작품상은 전형철 시인의 ‘슬프다고 말하기 전에’ 외 4편이 선정됐다. 수상자는 상패와 상금 500만원을 수여받는다. 현재 우리 시단에서 가장 왕성하고 개성적인 시작 활동을 보여주는 시인에게 수여한다. 박용래, 김종삼, 조영서, 김선영, 임성숙, 정진규, 이원, 이장욱, 이덕규, 박형준, 이병률, 이인원, 장석원, 위선환, 권혁웅, 조연호, 조말선, 우대식, 이승일, 이은규, 전형철 시인 등이 역대 수상했다.
현대시학 2020 신인상은 서종현 시인(‘ㄱ’ 외 4편), 하시안 시인(‘파일의 방식’ 외 4편)에게 돌아갔다. 수상자는 각각 상패와 상금 100만원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