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긴 길마다 우물이 피어났다, 여자의 눈물을 성수라 믿는 사람들이 물통을 든 채 말라가고 있었다
잎 떨어진 계절마다 배설을 끝낸 평면들이 지하를 채워 나갔다
부풀지 못한 뼈들을 눕혀 물길을 만들면 사람들의 발목에도 실뿌리가 자랄까
안개가 사라진다 흰개미가 우물 입구를 닫을 시간이다
우물은 떠나지 못한 자의 피부다
[당선소감] 누군가에겐 위로가 되는 떳떳한 시를 쓰다
창고에 수북한 원고들, 창고 벽마다 겨울이 두텁다. 내부에서 쌓은 벽을 허물었으나 외부에서 생긴 벽은 도무지 재질을 알 수 없다. 그때마다 나는 깃을 손질하듯 시를 어루만진다.
글자에게도 혼이 있어 누군가는 위로가 되고 치유가 될 것이라 믿는다. 공대를 졸업했고, 흔한 문학회 한 곳 가입하지 않았으니, ‘삼겹살’이라고 불리는 학연, 지연, 혈연 이 세 가지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나의 비기다.
고등학교 때 받은 숙제를 뒤늦게 서울신문에 제출했다. 늦은 숙제를 검사해 주신 정호승, 나희덕 두 분 선생님께 감사를 드린다. 반짝이는 표면에는 허상이 있다. 질소가 가득한 것은 과자뿐만이 아니다. 소망 하나 있다면, ‘삼겹살’과 상관없이 좋은 작품을 쓰는 시인들이 시만 써도 먹고살 수 있으면 참 좋겠다. 내세울 것 없는 삶이지만 시 하나만큼은 떳떳하다.
[심사평] 죽음의 사건을 환기하며 시대의 음화 그려내
사회 전체가 죽음의 사건들에 침잠된 탓인지 올해 투고작들은 전반적으로 어둡고 무거운 느낌이었다. 몽환적이고 묵시록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작품들도 많았다.
이 죽음의 시대에 시는 현실적인 응전이나 전망을 보여주기보다는 그 내상(內傷)을 깊이 앓으며 치러내는 제의적 행위에 가까운 것일까. 그러나 이런 현상이 한편으로는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나 패배의식의 반영으로 보이기도 한다.
당선작인 최은묵의 ‘키워드’ 역시 ‘죽은 우물’을 중심으로 우리 시대의 음화(陰畵)를 그려내고 있다. 이미지가 지나치게 모호해서 소통이 쉽지 않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고도의 암시성은 시에 있어서 결함보다는 장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는 세월호를 비롯해 죽음의 사건들을 환기하면서 그것을 상징화된 제의로 감싸안는다. 나머지 시들에서도 어딘가 깨지고 부서지고 불구화되고 불모화된 존재들이 그려내는 고통과 폐허의 풍경은 하나의 세계를 이루었다고 할 만하다.
당선작과 함께 마지막까지 고민했던 작품은 서진배의 ‘고립한다’였다. 이 시는 ‘고립’에 대한 사유를 ‘벽’이라는 소재를 중심으로 밀고나가 개성적인 존재론에 이르고 있는데, 특히 ‘고립되다’의 수동성을 ‘고립하다’의 능동성으로 전환해내는 인식의 힘이 좋았다. 하지만 산문적인 어투나 언어의 긴장을 잃어버린 대목들이 눈에 띄고 나머지 작품의 밀도가 뒷받침되지 못했다.
이 밖에도 유니크한 발상과 탄력적인 리듬을 보여준 김창훈의 ‘스핑크스의 그림자’, 대상의 기미를 섬세하게 알아차리고 그것을 감각적으로 잘 풀어낸 이정오의 ‘멀다’ 등도 좋게 읽었다. 당선자에게는 진심 어린 축하를, 나머지 세 분에게는 격려와 기대의 마음을 전한다.
나무 밑동이 전해주는 야사(野史)나, 자식들 몰래 내뱉는 어머니의 한숨, 대개 이런 소리들은 바닥으로 깔리는데
누워야만 들리는 소리가 있다
퇴적층의 화석처럼 생생하게 굳어버린,
이따금, 죽음을 맞는 돼지의 비명처럼 높이 솟구치는,
발자국을 잃고 주저앉은 소리들
소나무는 자신이 들은 소리를 잎으로 콕콕 찍어 땅 속에 저장하고
땅에 발자국 한 번 남기지 못한 채 지워진 태아는 소리의 젖을 먹고 나무가 된다는 걸, 당신은 알까
낡은 라디오 잡음처럼 바닥을 기어 다니는 뿌리 곁에
밑창 터진 신발을 내려놓았다
서서히 땅의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오래된 소리들을 다 비워낸 문은 새로운 이야기로 층층이 굳어지고
나무들은 땅속에 입을 둔 채 소리들의 발자국으로 배를 채울 것이다
[수상소감]
아직도 갈대 잎을 흔들리게 하는 소리를 종이에 옮겨 놓지 못했습니다. 갈대숲까지 가는 길이 너무 멀기 때문입니다. 바닥을 기어가는 동안 숱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소리마다 냄새가 있고, 저는 사람 냄새에 머물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냄새는 사람 냄새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닥에 가까운 냄새일수록 아픔이 깊었습니다. 그런 냄새가 말하는 소리를 듣기 위해 바닥에 눕고 엎드리고 기었습니다.
바닥은 제가 은둔하는 터입니다. 이곳을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계절만이 때에 맞춰 찾아옵니다. 그런 곳에 누군가 다가오는 것이 낯설기만 합니다. 저는 아직 찾아야 할 냄새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시산맥작품상>은 낯선 손님이었습니다. 이 어색하고 어리둥절한 상황을 명확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저를 보고 사람들은 시인이라고 부릅니다. 학연, 지연, 인연 없이 문단을 배회하고 있는 저는 한때 좋은 시인과 좋은 시를 쓰는 시인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었습니다. 아직도 그 구분을 선명하게 가르지 못한 채 막연히 시 앞에 섭니다.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시 앞에 서면 늘 두렵습니다. 저에게 있어 시는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머무는 곳인데도 그렇습니다.
<땅의 문>을 찾기 위해 바닥에 누워있던 저의 소박한 몸부림을 주목해주신 <시산맥>에 감사드립니다. 바닥에서 음지에서 간혹 볕 좋은 담벼락 밑에서 조근조근 이야기를 들려준 투명한 영혼들에게 제일 먼저 이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곳에도 꽃이 피고 새가 울고 별이 뜨고 노래가 있다는 걸 사람들은 알까요?
아직도 들어야 하는 소리와 맡아야 하는 냄새가 많습니다. 어쩌면 평생 다 적지 못할 만큼 많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낮은 소리를 통해 위로를 받은 제가 무얼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드넓은 시의 길에서 무릎이 헤지도록 기어보겠습니다.
유명무명을 떠나 작품으로 인정받았다는 것은 큰 위로이며 격려입니다. 시산맥 작품상 수상자 전화 통보를 하면서 ‘좋은 시를 발표하고 더 좋은 시를 쓰라’던 박남희 시인의 조언은 큰 교훈이었습니다. 멈추지 않고 나아갈 수 있다는 건 새로운 세상을 향한 움직임이 분명합니다. 제가 쓴 시를 읽어주고 묵묵히 응원해주는 소수의 독자에게 두 번째로 수상소식을 전했습니다. 마치 본인들의 일처럼 기뻐해주신 분들께 또 하나의 빚을 졌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말이 지금의 기쁨과 어색함을 모면할 수 있는 최고의 표현입니다. 좋은 작품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노력하는 <시산맥>의 정신을 훼손하지 않도록 더 많이 고민하고 아파하겠습니다.
[심사평] 낮은 땅과 소통하는 ‘터진 신발'
올해로 시산맥 작품상이 제정된 지 4년을 맞는다. 처음에 시산맥 작품상을 제정하면서 우선적으로 내세운 취지는 공정하고 깨끗한 작품상이 되도록 운영해나가는 것이었다. 그것은 우리나라에 수많은 문학상이 있지만 진정으로 공정하게 운영되는 문학상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문학상의 상금 액수나 문학상을 수상한 문인의 유명도가 권위를 대신하는 기존의 문학상보다, 상금의 액수는 적지만 오로지 문학성만을 기준으로 공정하게 운영되는 문학상이 더 권위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시산맥 작품상은 기존의 어떠한 문학상보다 부끄럽지 않은 문학상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1년 동안 시산맥 시인들에 의해 선정된 시산맥 작품상 후보작 20편은 저마다 그만한 규모와 무게를 지니고 있어서 어느 것을 선정해도 무방할 만큼 작품 수준이 높았다. 심사위원들은 시인들의 이름이 표기되지 않은 20편의 작품을 놓고 A, B, C로 점수를 매겨서 최종심에 여섯 작품을 올린 후 결선 심사에 들어갔다. 비교적 심사위원들의 고른 득표를 받은 작품은 송찬호의 <장미>, 안은주의 <물의 각>, 장옥관의 <탱자는, 탱자가 아닙니다>, 조정의 <시신기증>, 최은묵의 <땅의 문>, 황병승의 <목책 속의 더미dummy들> 등이다. 작품성이 높은데도 덜 주목받은 숨은 보석을 발굴하려는 시산맥 심사의 내부 기준을 참고하여 이미 문학상을 많이 받은 분이나 등단 연조가 짧은 시인을 제외하고 마지막 결선에 올린 시인은 황병승, 조정, 최은묵 등 세분이다.
우선 황병승의 시는 제목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목책(나무 울타리) 속의 인형들이라는 상징적인 소재를 바탕으로 쓴 시인데, ‘설교 기계’로 대변되는 기성세대의 낡은 가치관을 풍자하고 있는 일종의 알레고리 시이다. 이 시는 상징성 짙은 제목과 사회성 있는 주제에 비해 내용이 지나치게 산문적이어서 긴장감이 떨어진다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또한 이 시는 정치인으로 대변되는 기성세대의 가치관 뿐 아니라 기존 시의 문법까지 해체하려는 듯한 극단적 산문성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내용이 기성세대의 설교(가치관 강요)에 국한 되는 단조로움을 벗어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조정 시인의 작품은 어머니의 시신을 해부학교실에 기증하고 귀가하는 화자의 복잡한 마음을 에둘러 표현한, 간접화법이 돋보이는 시이다. 화자의 충혈된 눈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머지않은 곳마다/ 신호등은 그 눈이 선지적으로 붉었다”고 진술하는 것이나, 임종하는 어머니를 “어머니는 영사기 리모콘의 꺼짐 버튼을 누르는 중이었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간접화법은 슬픔을 억누르는 화자의 마음을 오히려 울림 있게 전달해준다. 이 작품은 작품의 진정성이나 절제된 표현 기법이 균형을 이룬 수작이다. 수상작과 마지막까지 겨룬 것만으로도 이 시인의 앞날이 기대된다.
끝으로 제4회 시산맥 작품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최은묵 시인의 <땅의 문>은 “터진 신발 밑창에서 땅과 연결된 문을 발견”한다는 참신한 발상을 바탕으로, 소외되고 억눌린 채 바닥으로 버려진 소리들에 귀 기울이는 화자의 마음이 따뜻한 울림이 되어 전달되는 시이다. 이 시는 ‘터진 신발’, ‘나무뿌리’, ‘퇴적층의 화석’같은 소외된 대상들을 ‘자식 몰래 내뱉는 어머니의 한숨’이나 ‘죽음을 맞이하는 돼지’, ‘발자국 한 번 남기지 못 한 채 지워진 태아’와 같은 숨은 야사(野史)와 연결지어 소통하게 함으로써 새로운 인식에 도달하게 해주는 수작이다. 특히 3연의 “누워야만 들리는 소리가 있다”는 진술은 직립 보행을 하면서 높은 곳만 바라보면서 사는 인간의 물신화된 욕망에 경종을 울리는 것이어서 시적 울림이 크게 다가온다. 또한 ‘터진 신발’을 통해 땅의 문을 열고 그동안 소외되고 버려졌던 땅의 소리를 듣게 된다는 상상력은 억지스럽지 않고 신선하다. 여기서 ‘터진 시발’은 문명의 상징인 ‘신발’의 소통부재를 뛰어넘어 맨발로 흙과 만나려는 시인의 소박한 마음의 기표이다.
물신화된 가치관이 지배하는 이 혼탁한 세상에서 이렇듯 소박하고 신선한 시인의 마음과 만나는 일은 쉽지 않다. 최은묵의 등단 연도는 일천하지만, 이 시인이 세상의 모든 타자를 깊이 바라볼 줄 아는 혜안과 뛰어난 시적 감수성은 시산맥 작품상 수상자로서 부족함이 없다할 것이다. 제4회 시산맥 작품상 수상자로 선정된 최은묵 시인에게 다시 한 번 축하하고 아쉽게 선정되지 못한 모든 분들께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해드린다.
박남희(본지 주간)
[심사평] 타자(他者)인 수많은 존재들과의 인연
제4회 시산맥 작품상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을 살펴본 결과, 역량있는 시인들의 철학적 깊이와 언어예술이 대체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송찬호의 <장미>, 오태환의 <헛개나무야>, 유정이의 <아직>, 이정록의 <나비 수건>, 전기철의 <시인의 영토>, 조정인의 <땅꾼의 여자>, 최은묵의 <땅의 문> 등을 주목할 수 있었다. 이들 작품 중에서 오태환의 ?헛개나무야?는 “나무”라는 생명체의 존재양식을 심층적으로 투시하는 인식능력의 날선 검(劍)을 보여주었다. 전기철의 ?시인의 영토?는 막힘없는 사색과 한계 없는 자유의 요람인 내면적 “고독”을 시의 근원으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최은묵의 ?땅의 문?은 ‘나’와 타자(他者)의 관계, 개인과 세계의 관계, 인간과 자연의 관계, 고유한 존재양식(存在樣式)을 갖고 있는 모든 개체들의 상호관계 등을 포괄하고 있다고 판단되었다. 그의 시는 위에서 열거한 작품들보다 훨씬 더 넓은 시(詩)의 스케일을 보여주고 있다.
최은묵의 <땅의 문>에서는 첫 시어(詩語) “터진 신발”이 상징하듯이 ‘생존’과 ‘소유’를 위해 전진하기에 급급했던 현대인들의 소통 부재와 자아 상실을 암시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신발”이 “터졌다”는 것은 현대인들의 정신적 병리현상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준다. “터진 신발”은 현대인들의 부정적인 일상을 비판함과 동시에 그것을 변혁시킬 수 있는 긍정적 전환점을 제시한다. “터진 신발”은 문학적 아이러니의 기능을 발휘하면서 언어예술과 시대정신(時代精神)을 자연스럽게 결합시키는 매개체가 되고 있다. “터진 신발”의 “밑창”을 통하여 화자(話者)는 이 세계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을 돌아보는 마음의 여백을 넓힌다. 그는 모든 생명체의 근원이자 반려(伴侶)인 “땅”과 연결된 생명선(生命線)을 만져본다. 그는 “땅”이라는 공동의 터전에서 함께 살아온 존재들의 삶을 의식하게 된다. “발가락에 힘을 주고 지냈으니 눌린 것들의 소란은 도무지 위로 오르지 못했던 거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화자는 타자(他者)들의 삶, 그들의 좌절, 그들의 애환에 귀를 닫고 살아 왔다. 화자를 포함하는 무수한 현대인들은 “발자국을 잃고 주저앉은” 타자(他者)들의 삶의 “소리”를 소외시키며 살아 왔다. 그러나 “신발”이 “터졌다”는 아이러니를 보라! 자기중심의 어두운 감옥을 해체시키는 전환적 성찰의 힘을 발휘하지 않는가? “땅”의 토박이 “나무”의 “뿌리 틈”으로 전해오는 “소리들”을 향해 마침내 귀를 여는 화자의 전향을 따라가자.
화자에게 잊혀진 이웃이었던 “나무”. 그 이웃의 전언(傳言)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는 화자. “땅”을 밟고 지나가는 ‘인간’이라는 이웃들의 환희, 절규, 아픔, 희망의 “소리들”과 그 “발자국”으로 “배를 채우는” 나무. 이 초록빛 이웃을 닮아가려는 화자. 그는 “나무”가 번역해주는 이웃들의 “주저앉은 소리들”과 “지워진 소리들”을 편견 없는 자연의 언어로 전해 듣는다. 화자는 “나무”와의 생명적 유대감을 공감한다. 그는 “나무”라는 공생의 동반자를 통하여 “나무”의 나이테에 새겨진 수많은 이웃의 삶의 기록들을 읽는다.
최은묵의 시 <땅의 문>은 그의 시를 읽는 독자 개인과 수많은 타자(他者) 사이에 닫혀 있던 ‘상호관계’의 문을 열어주는 열쇠가 되었다. “나무”와 인간의 ‘상호관계’를 예술적 미디어로 전용(轉用)하여 끊어졌던 “소리들”간의 소통의 네트워크를 복원하는 작품이 <땅의 문>이다. 소설가 토마스 만(Thomas Mann)은 “문학이라는 예술은 현실을 정신적으로 승화시킨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최은묵의 시 <땅의 문>은 타자(他者)인 수많은 존재들과 시인이 맺고 있는 드넓은 관계망(網)의 ‘현실’을 형식미학 속에 용해하여 예술작품으로 ‘승화’시켰다. 시산맥 작품상 수상작으로 결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어릴 적 나는 성경책을 읽으시는 어머니 곁에 엎드려 집에 있는 책들을 모조리 읽었습니다. 생각으로 넘나들 수 있는 세상이 점점 커졌습니다. 그러다 크고 넓은 강 앞에서 멈추었습니다. 나는 강을 건너기 위해 커다란 돌을 짊어지고 돌다리를 놓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강을 건너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강물은 나의 행동과 상관없이 흘렀습니다. 돌다리에 주저앉아 한참동안 강물이 흐르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천강문학상’으로 다시 돌다리 하나를 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만큼 더 깊이 강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시를 쓴다는 건 강을 건너는 게 아니라 강물에 나를 적시는 일이란 걸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 힘을 내어 강을 향해 한 걸음 더 내디딜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가족들에게, 감사를 전할 모든 분들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어머니, 어제는 나이 드신 어머니의 떨리는 손을 오래 잡아드렸습니다. 어머니의 체온은 세월이 지나도 주름지지 않고 그대로였습니다. 그런 시를 쓰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재능이 부끄럽게 쓰이지 않도록 늘 같은 마음으로 시를 쓰겠습니다.
[심사평]
시는 불꽃이요, 한 벌의 의상이다. 시는 비교적 단일한 것으로 이해되는 시상을 노래한다. 시는 시적 대상을 다른 대상에 견줌으로써 그 대상에 대한 해석의 폭을 확장한다. 유비(類比)가 중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시가 진술의 형태를 갖더라도 시는 주견을 강조하지 않는 장르이다. 시적 화자의 위치를 낮춤으로써 시적 대상을 추켜세우는 것이 시의 미덕이다. 비교적 단일한 것으로 이해되는 시상을 노래하는 것이기에 서사 구조를 회피하려는 성향을 갖게 되고, 또 시상 전개에 있어서는 구조화가 중요하게 된다.
제 4회 천강문학상 시 부문 공모에는 총 300명의 작품 2171편이 접수되었다. 뜨거운 열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작품의 질적 수준도 매우 높은 편이어서 심사 과정은 녹록하지 않았다. 빈틈이 없이 차분하고 조심스럽게 심사는 진행되었다. 물론 공모작품들을 살피면서 아쉬움도 있었다. 첫째는 가족과 관련한 시가 많았다. 대개는 가족 구성원과의 이별로 인한 비감, 그리고 지나간 과거에로의 아련한 회귀와 재생 같은 것이 주류적 심상을 이루었다. 둘째는 시간의 경과에 따른 일이나 마음의 형편을 노래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로 인해 산문화되는 경향이 다분히 많았다.
예심을 통과해서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은 스물아홉 분의 시편들이었다. 오랜 숙고 끝에 세 분의 응모작을 두고 본격적인 논의를 진행했다. 김춘순, 임세한, 최은묵 세 분의 작품들이었다.
김춘순님의 시편들은 독특한 자기 발언력을 갖고 있었다. 시적 대상과 세계에 대한 독자적인 육성을 들려주었다. 시적인 사건들을 대개는 통증으로 이해하는 성향을 보여주었다. 가령 <화농의 봄>에서 만개한 ‘꽃’은 신생의 생명력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의 ‘화농’으로 인식된다. 그렇다고 삶의 비극성을 발언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는다. 김춘순님의 시는 상상력의 탄력성을 잘 보여주었지만 특별한 시적 진술을 발굴하려는 의욕이 너무 강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임세한님의 시편들은 농촌 서정에 기반을 두면서도 모성애적 보살핌을 주로 노래했다. 작물이 뿌리내린 공간은 어머니의 자궁과 태에 비유되곤 했다. 가족의 관계를 중심으로 해서 펼쳐지는 그의 시는 따뜻했다. <눈 오시는 날>이 현시하는 서정성은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다만 막연한 애상에 빠지는 경우가 있어 감정의 낭비를 조절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천강문학상 시 부문 대상의 영예는 최은묵님에게 돌아갔다. 최은묵님은 활달한 상상력과 트인 수사를 보여주었다. 작품들의 수준도 높낮이나 차이가 없이 한결같았다. 풍부한 창작 경험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했다. 대상작 <밤 외출>은 ‘업다’라는 행위를 변주한 작품이다. 어릴 적 엄마의 등에 업혔던 기억에서 이 시는 탄생한다. 그리고 그 업힌 기억은 평온과 자유로움의 그것으로 노래되고 있다. 이 시의 백미는 시의 후반부이다. 별을 바라보는 화자가 있다. 화자가 별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화자는 능동적인 위치에 있다. 그런데 이 시는 밤하늘을 바라보는 화자가 되레 밤하늘에 업히는 입장으로 전환되어 버린다. 지상과 하늘이라는 두 공간, 그리고 주체와 객체라는 두 입장을 역전시켜 버린다. 이런 변전은 읽는 이에게 어떤 인식의 새로운 열림과 그로인한 쾌감을 경험하게 한다. 심사위원들은 최은묵님의 이러한 능력을 소중한 것으로 평가했다.
간발의 차이로 수상자가 되지 못한 분들이 많았다. 낙담하지 말고 계속 정진하길 바란다. 수상자들에게는 박수를 보낸다. 앞길에 문운이 함께 하길 바란다.
수염은 뭔가 말을 하려고 밤새 입 주변에서 자랐다 아이는 면도기 속에 수염을 먹고 사는 곤충이 살고 있다고 말했다 전기면도기 보호망 속에서 먼저 살았던 부스러기들을 하수구에 털어낸다
어제 짐을 싸던 손에 청하던 김 과장의 악수는 어색했고, 오늘 구두 대신 아내 몰래 신은 운동화 밑창이 그러하다
발바닥이 낯설다 버스정류장은 운동화로 바뀐 걸음을 알아보지 못했다 정류장을 지나 전에는 열려있었을 하천을 걸었다
굴속을 흐르던 아침이 한꺼번에 입 냄새를 쏟아내는 복개가 끝난 하천 수풀 옆 은밀히 따뜻했을, 버려진 좌변기가 더럭 구멍 난 옆구리로 방귀를 뿜는 중년의 끝자락
살을 비집고 나온 수염이 말을 한다 아내가 듣기 전에 전기면도기에 살고 있는 곤충이 토독토독 수염을 먹어치운다
[우수상] 달전을 부치다 / 신혜경
달전을 부칩니다
신혼 때부터 즐겨 먹던 것입니다
애호박을 썰어 부친 것을 달전이라 합니다
달처럼 둥글다고 해서이지요
비탈진 언덕 호박꽃 같은 신혼집에서
벌처럼 붕붕대며
늦은 저녁과 함께 부쳐 먹곤 했습니다
남편은 달전을 먹으며
호박처럼 둥글둥글 살아가자고 했습니다
보름달처럼 환하게 살자고도 했습니다
달덩이 같다는 말은 때대로
뚱뚱하다는 말로 들리기도 하는데
내 얼굴이 보름달 같아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어둡고 험한 삶의 언덕 더듬더듬 넘을 때마다
달전 부쳐놓고 남편을 기다립니다
하늘이 달을 띄워 밤길 열어주듯
밥상가득 달을 띄웁니다
사시사철 애호박이 있어 든든합니다
여름 한철 나던 것보다 맛은 덜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달전을 부칠 수 있으니까요
사는 일이 호박덩굴처럼 엉켜버린 오늘은
그믐입니다
시장에서 가장 잘 생긴 애호박을 골라
이 어둠 밝힐 달전을 부칩니다
[우수상] 당진형수사망급래 / 이종성
내 눈물은 배롱나무꽃이다.
누군가에게 영혼을 바쳐본 이는 안다.
마음이 마음을 지나면 그 색으로 물이 든다는 것을,
내게도 안팎으로 곱게 물들던 시절이 있었다.
유년의 바깥마당 환하게 핀 나무 아래로
꽃이 되어 걸어 들어온 사람 있었다.
그날부터 뭉실뭉실 하늘에는 꽃구름이 일었고
산 너머 종달새는 보리밭을 푸르게 일으켰다.
밤에는 별을 따라 반딧불이 어둠을 날았다.
마음이란 그렇게 하나의 삼투현상이어서
색깔이 바뀌고 날개를 달아주는 신비한 현상
처음으로 그때 한 사람의 색으로 치환이 되었다.
그 후로 나는 세상의 어느 색으로도 물들지 못했다.
지금, 형수님 산소엔 배롱나무꽃이 한창이다.
간밤 비에 젖은 봉오리 뚝뚝 지고 있다.
아직도 떨리는 손에 든 한 통의 비보
글씨 위로 꽃잎이 붉다.
[우수상] 폭설 / 이명윤
큰 눈이 왔다
한 소년의 눈망울이 적설량을 재고 갔다
새벽부터 눈을 치웠다 삽에 담긴 겨울이 무거웠다 개 한 마리 흥에 겨워 따뜻한
똥을 누고 갔다
잠시 후 아이들이 눈을 끌고 다녔는데 눈이 배꼽을 드러내고 희게 웃었다
하루 내내 눈을 치우고 안전표지판을 바로 세웠다
다음날, 무슨 일이 있었느냐 능청스럽게 白雲을 문 하늘의 입 언저리가 새파랗다
뭐라고 한마디 해야겠는데
파란 바람에 그만 눈이 시려와 그만두기로 했다
보험설계사가 웃으며 새 달력을 건네준다 물끄러미 마흔과 조우했다
깜박 잊고 있었던 봉투를 찾아 들었다
우체국 가는 길, 일그러진 표정의 잔설이 자꾸만 발등에 올라탄다 골목을 돌자
등 뒤로 개 짖는 소리 따라 걷기 시작하고
소리는 점점 눈 뭉치처럼 커져만 가는데
세탁소 이층집 창가에서 바라보던 아이, 눈이 마주치자 쿵, 커튼을 내린다
눈두덩에 잔설이 떨어진 것은 우연일까 곁눈을 뜨자 가로수가 무거운 팔을 든 채
멀뚱 쳐다본다 고개를 든다
글썽글썽 눈구름이 참 곱다,
곱다-라는 방울소리가 머릿속을 환하게 굴러다닌다.
[심사평] 현대시는 상황시이다
현대시는 상황시이다. 서정적인 경향이 강하다 할지라도, 보다 깊이 그 시적 렌즈를 들이대면 입체적이며 구체적인 상황시이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러한 점이 현대시의 목숨이며, 모더니즘적인 시들 이전의 낭만주의적이거나 또는 상징주의적인 시들과 다른 점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현대의 많은 상황시들은 극사시極私詩에서 출발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극사시는 개인의 극점極點에 서 있는 시다. 개인의 극점에 있는 ‘거기’, 즉 아무도 도달하지 못할, 아무도 건드리지 못할 ‘거기’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위의 용어들에 대하여는 강은교의 무명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5(서정시학 소재)를 참조하시길.]
그러나 진정으로 좋은 극사시는 순간적으로 그 ‘거기’-개인적인 의미가 강한 ‘거기’-를 넘어서서 초극사시超極私詩가 된다. 그리고 그럴 때에야 한편의 시의 울림은 읽는 이의 공감을 이루어낸다.
따라서 심사는 이러한 상황시의 초극사시적 울림을 조금이라도 울리고 있는 시에게 이번 응모시들 중 가장 우수한 시에게 부여되는 대상을 부여하자는 원칙을 세웠다. 그리고 이러한 심사원칙과 함께 상상의 틈, 진정성, 필연성 등 현대시에 필요한 제반 시적 기준을 적용하여, 몇 번의 독회를 거쳐 시를 걸러내었다. 그리하여 마지막 심사까지 남은 작품들은 ‘달전을 부치다’, ‘폭설’, ‘당진형수사망급래’, ‘구두를 벗다‘의 네 편이었다.
심사자들이 이들 네 편을 가지고 다시 논의한 결과 ’달전....‘과 ’폭설‘의 경우엔 그 시적 표현의 능숙함에도 그 시적 상황이 단선적이어서 입체적 상황시를 이루고 있지 못할 뿐 아니라, 아직 극사시에 깊이 머물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당진형수사망급래‘는 그 시적 상황의 진정성이 심사자에게 읽는 순간 약간의 감동까지 주었으나 그 시적 ’틀‘이 아직 상투성에 머물고 있는 점이 많으며 따라서 그 극사시적 울림이 가지고 오는 진정성도 초극사시적 울림으로의 강렬한 폭발음을 내지 못하고 있어 신인다운 신선한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따라서 대상은 ‘구두를 벗다’의 시로 결정되었다. 이 시에는 입체적 상황이 있으며 초극사시로 가려는 몸짓이 아직 완전치는 못하나 신인다운 강렬함으로 울리고 있다. 앞으로의 대성을 바란다. 문단에서 큰 별로 조우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