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 공터의 풍경 / 오정순
공터에 내리는 비는 구겨진 절기의 줄기가 느릿합니다
버려진 액자가 있고
시든 난蘭 한 포기가 비에 젖고 있습니다
일직의 빗줄기가 지나가고 뿌리를 잡고 있는 바위에
푸른 이끼라도 살아 날듯합니다
깨어진 유리에는 깨어진 햇볕이 어울리겠지요
반짝, 비가 갠 공복의 허공엔 햇볕이 따뜻합니다
소슬하게 바람이라도 불었는지
흔들린 난蘭잎 주변에 먹물이 번져 있습니다
골목을 막 들어선 봄의 등 뒤로 아지랑이 배접이 구불구불하고
몇 년 아니, 몇 십 년 쯤 피어있었을
꽃대가 피곤해 보입니다
붉은 노을이라도 세 들어 있는지
낙관엔 오래 흔들린 악력握力이 흐릿합니다
낡은 시선만 가득한 풍경,
떠나 온 벽의 경사가 누워 있습니다
어쩌면 저 풍경의 크기만 한 흰 공터를
벽에 남겨 놓았을지도 모르지요
상실의 흔적들이란 저렇듯 각이 져 있을지도 모릅니다
공터의 담 벽이 비스듬히 그늘을 만들고 있고
어쩌다 풍경화 한 점 걸리는 호사를 누리고 있는 담 벽
아이들의 웅성거림이
공터의 배접으로 드러눕는 시간
흔들리는 그늘들은 모두 저녁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이제, 그 어떤 풍경도 이 액자에 들어 갈 수 없다는 듯
캄캄해지고 있습니다
[수상소감]
깨진 액자 유리 사이로 비가 스며들고 있었습니다. 핏물처럼 번져나가며 흐릿해지는 꽃과 낙관을 오랫동안 바라보았습니다. 누군가 간절하게 잡고 있던 것들이 사라지는 모습은 내게 하나의 풍경으로 남았습니다.
시를 쓰면서 언제나 어둠을 헤맸습니다. 늦은 시작이 어둠에 묻혀버리는 절망이 될까봐 새벽까지 깨어있는 날이 많았습니다. 이제 조금은 형체를 분간할 수 있다면 교만일까요. 수상이란 벅찬 감격을 잠시 호사를 누리듯 기뻐하면 안 될까요. 숨을 조였던 시간들이 일제히 푸른 이끼 같은 울음을 토해내려고 합니다.
이제 알겠습니다. 어둠 속에서 자주 넘어지지 말라고, 넘어져도 많이 다치지 말라고 발자국을 떼는 법을 알려주신 것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미덥지 않은 딸을 위해 늘 기도해주시는 부모님. 늦은 밤 스탠드 불빛에 눈이 부셔도 자는 척 해주는 나의 남편, 사랑하는 두 아들 대식, 윤식 그리고 나의 글 동지 덕희, 수정, 미자, 언주, 하린, 수화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이 모든 영광 나를 일으켜 세우신 하나님께 드립니다. 소중한 기회를 허락하여 주신 의령군민,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께 큰 절로 감사를 드립니다.
[심사평]
서정시는 단순성의 미학이다. 분석의 대상이 되는 구조의 틀, 혹은 주제를 구성하는 의미론적인 층이 비록 복잡성을 띠고 있는다고 해도, 적어도 발화 형식의 결에 있어선 그렇다는 얘기다. 시를 쓰려고 하는 사람들 중에 시를 산만한 사설(辭說)의 언술임을 착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생각된다. 하고 싶은 많다면 어쩔 수 없이 산문의 장르를 선택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한다. 시를 쓰는 사람은 다름 아니라 산문을 쓰는 사람이 하지 못하는 말을 부리는 사람이다. 그는 산문을 쓰는 사람이 쉽사리 할 수 없는 구석진 말의 물결 같은 흐름에 중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시는 사물의 이면을 꿰뚫어볼 수 있는 통찰의 상상적 결과가 아닌가 여겨진다.
우리 심사위원 두 사람은 예선에 통과한 스무 명의 공모작 약 150편 정도의 작품을 철저한 익명의 상황에서 면밀히 검토한 결과, 세 분의 응모자, 즉 한승엽, 임재정, 오정순의 시 작품들을 뽑는데 의견을 함께했다. 이 세 분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대상 한 편을 최종적으로 고르기로 했다.
한승엽의 「붉은발말똥게」는 시의성(時宜性)이 있는 글감에다 독특한 발상으로 인해 가장 먼저 눈길이 가는 작품이었다. 우화적인 실존의 인격으로 투사하며 이를 현실의 장력(場力)으로 확대한 붉은발말똥게의 동선과 궤적을 바라보는 작자의 예리하면서도 주 · 객관적인 교차의 시선도 진지함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적 진술의 긴밀한 통사구조가 의도적인 탈문법이라기보다는 좀 미숙해 보이는 듯한 약점 때문에 이완되거나 해체되는 것 같아서 대상으로 미는 데 주저함이 앞섰다.
임재정의 「물속 경주 남산」과 오정순의 「공터의 풍경」을 두고 오랫동안 논의를 거듭하였다. 「물속 경주 남산」은 매우 환상적인 시다. 환상 그 자체가 주제이기 때문에 이 경우 주제를 현실로 환원시킬 필요가 없다. 이 밤은 어느 인연의 물속인가……화두를 튼 선객(禪客)의 격조 있는 어록과도 같다. 선(禪)의 세계로 약동하는 듯한, 꿈속처럼 아슴해 보이는 화려한 난센스의 언어! 여기에 서정시의 진경(眞境)이 있을 법하다.
오정순의 「공터의 풍경」은 버려진 그림이 있는 공터의 풍경을 묘사해 가면서 추보식으로 구성한 현대적인 의미의 서경시다. 전통적인 의미의 선정후정이 없다. 시 쓰는 이의 주관적인 감정의 실마리를 끝내 배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제는 오래된 이미지즘 시를 연상하게 하는 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삶의 이면에 생기를 불어넣으며 버려진 의미를 탐색해 가는 가운데, 무언가 채워놓을 수 없는 삶의 아쉽고도 그리운 부분들을 여백처럼 남겨놓고 있다는 점에서 사뭇 다르고, 그래서 한결 인상적인 시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종이 한 장 차이의 독창성과, 여타의 작품들이 지닌 신뢰성의 한 뼘 높이에 있어서, 오정순의 「공터의 풍경」을 대상으로 결정하기로 했다. 천강문학상 시 부문 대상 수상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앞날에 문운이 왕성하기를 기원한다.
- 심사위원 : 김종해(시인), 송희복(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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