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천 할머니 / 최은묵
할머니 얼굴에는 동굴이 있죠. 동굴은
쇠약한 바람의 입
고장 난 피리처럼 구멍에서 침식된 총소리가 쏟아져요
해풍이 불 때면
바람의 말을 새로 배우느라
밤새 빈병 소리를 내던 할머니
바닷물이 턱에 머물다 가면
정낭 올리듯
동굴 입구를 무명천으로 감싸야만 했어요
저 흰 천은 누굴 위한 비석인지
얼굴에 백비 동여맨 채 바다를 읽는
무명천 할머니
파도가 절벽을 적시듯 침을 흘려요
침은 닦지 못한 비명
숱한 어둠이 동굴에 터를 잡을 때마다
남몰래 뜰에 나와 달빛을 채워 넣었죠
수명을 다한 빛이 녹슬고
완성되지 못한 낱말들 진물처럼 떨어지면
새 무명천 꺼내 빗장을 걸던 할머니, 혼자 떠나요
바람의 언어를 중얼거리며
동굴 벽 짚고 떠나요
이제 동굴은 메워지고 피리소리는 멈추겠지요
잃어버린 턱을 채우려는 듯
월령리(月令里) 백년초가 바람의 말 속삭이면
할머니, 무명천 벗고 가시처럼 다녀가겠죠
제3회 제주4.3평화문학상의 영광은 시 ‘무명천 할머니’와 소설 ‘2세대 댓글부대’에게 돌아갔다.
제주4·3평화문학상 운영위원회(위원장 김병택)는 올해 4·3문학상으로 최은묵(48·대전)씨의 시 ‘무명천 할머니’, 장강명(40·서울)씨의 소설 ‘2세대 댓글부대’를 각각 당선작으로 선정했다고 5일 밝혔다.
이 당선작은 지난해 5월19일부터 12월20일까지 전국 공모로 접수된 시 90명·1026편, 소설 55편 가운데 선정됐다. 당선자에게는 시 2000만원, 소설 7000만원의 상금이 지급된다.
시 ‘무명천 할머니’는 4·3의 상처를 고스란히 안고 살았던 할머니의 신산한 삶을 바탕으로 제주의 4·3과 제주의 바람과 바다를 제주의 가락에 담아 잔잔하면서도 끝이 살아 있는 언어로 녹여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심사위원들은 “예년에 비해 작품의 수준이 고루 향상됐다”며 “당선작은 문학의 보편성과 4.3문학상의 특수성을 고루 갖춘 기념비적(記念碑的)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소설 ‘2세대 댓글부대’는 현재 저변으로 확대된 인터넷저널의 순기능과 역기능을 정치권력이 악의적으로 이용하고, 그것의 하수인으로 살다 결국 용도 폐기되는 낙오자들의 참혹한 조건을 사실적으로 그려냄으로써 댓글정치가 지닌 대중조작의 폭력성을 다뤘다.
심사위원들은 작가의 경쾌하고 날렵한 문체, 이야기를 밀고 나가는 힘, 치밀한 취재가 바탕이 된 현장감 등을 높이 평가했다.
본심사는 시 부문에 고은·김수열·김정환 위원 등 3명, 소설 부문에 염무웅·이경자·현기영 위원 등 3명이 맡았다. 예심에는 각 부문별 5명의 심사위원이 참가했다.
시상식은 이후 일정이 정해지면 개최할 예정이며, 수상작품은 빠른 시일 내에 출판한다.
한편 제1회 4·3문학상은 현택훈의 시 ‘곤을동’·구소은의 소설 ‘검은 모래’가, 제2회 4·3문학상은 박은영의 시 ‘북촌리의 봄’·양영수의 소설 ‘불타는 섬’이 각각 당선작으로 선정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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