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리의 봄 / 박은영
한 여인의 젖을 아이가 빨고 있었다
말 못하는 어린 것의 울음이 서모에서 부는 바람소리 같았다
핏덩이를 등에 업은 어미의 자장가가 들리는 듯한데
젖몸살을 앓던 아침, 붉은 비린내가 퉁퉁 불어 마을을 떠돌아다녔다 새들이 총소리를 물고 둥지로 날아갔다 소란스런 포란의 방향, 꽃을 내준 가지가 동쪽으로 기울었다
그것은 서쪽에서 해가 뜰 일
서모에서 부는 바람소리가 말 못하는 어린 것의 울음 같았다
뚝 뚝, 지는 목숨들 사이
아이는 나오지 않는 젖을 한사코 빨아대고 있었다
어미를 살려내려는 필사적인 몸부림,
그 힘으로 동백꽃이 피고
젖 먹던 힘을 다해 봄이 오고 있었다
* 서우봉
[수상소감]
이번 공모전을 준비하는 동안, 참 많이 아팠습니다.
제가 몰랐던, 무지하여 알지 못했던 사실들로 인해 가슴을 치며 울었습니다.
새벽에 가슴 통증으로 일어나 거울을 보니 감자알만하게 멍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멍 자국은 공모를 준비하는 내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 땅을 밟고 사는 게 참 많이도 부끄러웠고 까닭 없이 흐르고 했던 지난 눈물들 또한 죄스러웠습니다.
얼마나 아프셨습니까, 얼마나 몸서리치게 무서우셨습니까.
아직도 캄캄한 동굴 깊이 숨어 있을 분들, 그분들의 손을 잡고 함께 밖으로 나오고 싶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긴 밤을 아침이 오도록 동행해드리고 싶었습니다. 이젠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다시 봄이 오고 동백꽃이 피었다고, 저는 이 말씀을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세상엔 왜 이렇게 가려진 것들이 많은지,
한 문장 한 문장 시를 통하여 세상에 알리고 싶었습니다. 잃어버린 마을들과 잃어버린 이름들과 잃어버린 지난 시간을 되찾아드리고 싶었습니다. 그 간절함이 조금이나마 전해진 것 같아, 참으로 감사한 마음입니다.
부족한 저를 믿어주시고 선해주신 신경림 선생님, 이시영 선생님, 김준태 선생님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그리고 예심 심사위원님들 또한 머리 숙여 감사 드립니다.
저를 서른여덟 해 동안 마음 아프게 품고 계시는 부모님, 평생 갚지 못할 부모님의 기도로 제가 여기까지 걸어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주 4.3사건 희생자, 그리고 유족 여러분 앞으로 제주 4.3을 알리는 시인이 되겠습니다.
나의 아버지였고 어머니였고 할머니였고 삼촌이었고 이웃이었던 분들과 다시 재회할 수 있도록 시를 쓰겠습니다.
봄감자를 수확하는 손처럼 정직한 시인이 되겠습니다.
[심사평]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작품은 응모자 아홉 분의 110편이었다. 전체적으로 의욕적인 작품들이 많아서 반가웠다. 올해로 비록 2회째를 맞이했지만 ‘제주4.3평화문학상’에 대한 문학인(문학지망생 및 기성문인)들의 관심이 높아가고 있다는 것은 여러모로 의미가 있어 보였다.
특히 ‘제주4.3’에 대한 문학적 노력들이 살아나고 있는 것 같아 옷깃을 여미며 심사에 임하였다. 어제의 역사가 시, 소설을 통해서 다시 숨을 쉬게 된다는 것은 오늘 그리고 내일의 삶(역사)과 문학에도 생산적인 에너지를 불어 넣어주는 효과를 가져다주기 때문일 것이다. 제주4.3은 변방의 역사가 아니다. 6.25한국전쟁을 전후하여 한국현대사의 또 하나의 중심에서 제주4.3은 증좌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제주4.3을 거치지 않고 한국현대사에 대한 숙제를 통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반도 남쪽 바다 한 가운데에 떠있는 ‘제주’는 4.3 이후 문제적 ‘다중심의 하나’로서 작동하고 있는 오늘 우리가 당면한 모습의 일면이기도 하다.
이것은 역설이지만 그런 의미에서 제주(제주4.3)는 한국문학에 중요한 모티브와 오브제, 그리고 테제와 안티테제를 어떤 책무처럼 두루 제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바로 그러한 생각을 하면서 ‘제주4.3평화문학상’ 응모작품들을 심사한 결과, 좋은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더없는 기쁨이었다. 테크닉 수사법에 의존하여 괜히 길어지는 ‘컴퓨터시’를 응모한 몇 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 일정 부문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응모자의 시편을 가지고 작품성, 작가정신(시인정신), 미래전망 등을 고려하면서 심도 있게 심사함은 당연한 것이었다.
본심에 올라온 아홉 분 중에서 마지막까지 남은 응모자(작품)는 다음과 같다.
▲ [수산에 들다] [옛날, 옛날 썩은 섬에서] 외 8편의 시가 손에 잡혔다. “알돌과 밑돌이 서로에게 닳아가는 소리”([수산에 들다]) 표현은 화자의 시선이 ‘발견의 눈’을 가지고 있어 섬세하고 아름다운 시적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썩는다는 것은 어디론가 몸 바꾸는 일” 등의 아포리즘 기법을 넣어 노래한 강정마을의 이야기는 가작이었다. [수산에...] 등을 응모한 이의 나머지 작품은 시적 긴장감이 떨어지고 어떤 시는 너무 평이하게 소재주의에 빠져 있었다. 사물에 대한 치열성이 더해지면 시로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주는 응모자였다.
▲ [붉은 감나무 사원] 외 23편의 시가 다음으로 손에 잡혔다. 그러나 [붉은...]을 제외하면 응모자의 의욕과는 달리 시적 긴장감이 덜했다. 실패한 작품은 없는데 거의 모든 작품이 고만고만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한 송이 꽃이 피는데도 천지(하늘과 땅)가 움직인다는 사실을 터득한다면 그렇게 시가 쉽게 씌어지는 것은 아닐까 싶다. 이 응모자는 어떤 매너리즘(타성)에 빠져 있어서 사물을 보는 시선이 한곳으로만 고정된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이 응모자의 시에 대한 견결한 성실성은 다른 응모자들에 비하여 장점으로 보였음은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북촌리의 봄] [견치(犬齒)] [어우늘] [작은 뼈] [파종] [순이삼촌] [백년초] 등을 선보인 이의 시작품이 제2회 제주4.3평화문학상 응모자(응모작품)들 가운데서 단연 군계일학이었다. 제주4.3을 이만큼이라도 아픔과 사랑으로 혹은 눈물(힘)을 가지고 시로 노래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로되, 이 응모자의 시작품은 우선 전체적으로 ‘날것’이 아니면서 읽는 이의 마음에 누군가의 살(肉)이 낯설지 않게 닿는 듯한 그런 느낌을 주었다. 시를 노래하는 사람이 제주4.3(한국현대사)을 혈육의 슬픔(시의 힘)으로 소화하고 육화하고 있다는 것이 예의 시편들 곳곳에서 확인되면서 가볍지 않은 감동과 함께 시적 성공을 거두고 있다.
슬픔을 슬픔으로 노래하기보다는 그 슬픔을 ‘버텨내고 이겨내는’ 것을 이 응모자는 자신의 견결하면서도 젖은 음색(봄비와 같은)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것은 이번 제주4.3평화문학상의 수확으로 여겨진다. [견치(犬齒)] [어우늘] [작은 뼈]도 만만치 않는 작품이었으나 [북촌리의 봄]을 수상작으로 올려놓는다. 제주4.3의 제노사이드(집단학살) 현장이기도 한 북촌리(혹은 너븐숭이)의 그날이 선연하게 되살아나고 있는 이 시의 마지막에서 1948년 그해 제주4.3은 이렇게, 오늘의 우리들에게 현현한다. 가을과 겨울이 아닌 봄으로. “뚝뚝, 지는 목숨들 사이 / 아이는 나오지 않는 젖을 한사코 빨아대고 있었다 / 어미를 살려내려는 필사적인 몸부림, / 그 힘으로 동백꽃이 피고 / 젖 먹던 힘을 다해 봄이 오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이번 당선자의 작품은 제주4.3평화문학상의 취지에 가장 들어맞는 응모작으로 생각되며 전편이 분노와 회환으로 가득 찬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하면서 큰 울림을 준다. 특히 ‘견치’나 ‘파종’은 시적 완성도도 험을 잡을 수 없을 만큼 높다. 시적 대상 앞에서 절대 흥분하지 않으면서 비극적 실화(實話)를 ‘함묵의 예술’로 승화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어서 심사위원들의 눈길을 오래 붙잡았다.
당선작 [북촌리의 봄] 응모자에게 축하드리며 앞으로 더욱 낮은 모습으로 거듭날 것을 믿는다. 한라산도 가장 낮은 곳, 바다 저 깊은 밑바닥에 뿌리를 두고서야 솟아있지를 않는가! 제주4.3문학상에 응모한 여러분의 건필과 건승을 빈다.
- 심사위원 신경림, 이시영, 김준태 시인
'국내 문학상 > 제주4.3평화문학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6회 제주4.3평화문학상 / 정찬일 (0) | 2019.04.06 |
---|---|
제5회 제주4.3평화문학상 / 박용우 (0) | 2019.04.06 |
제4회 제주4․3평화문학상 / 김산 (0) | 2016.03.19 |
제3회 제주4.3평화문학상 / 최은묵 (0) | 2015.03.12 |
제1회 제주4.3평화문학상 / 현택훈 (0) | 2013.03.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