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우翠雨 / 정찬일
봄비 맞습니다. 누가 급히 흘리고 갔나요. 밑돌 무너져 내린 잣담에서 밀려 나온 시리 조각. 족대 아래에서 불에 타 터진 시리 두 조각 호주머니 속에서 오래도록 만지작거립니다. 손이 시린 만큼 시리 조각에 온기가 돕니다. 온기 전해지는 길에서 비 젖는 댓잎 소리 혼자 듣는 삼밧구석입니다. 푸른 댓잎에 맺힌 빗방울 속이 푸릅니다.
이 봄비 그치면 취우 속에 가만히 들어 한밤 한낮을 꼬박 잠들겠습니다.
매 순간 모든 것이 흔들리고, 빛 속에 숨었던 얼굴들 다 드러나고, 누구도 내 모습을 보지 못하고, 진저리치는 생으로 불거진 물집 하나 서러운 적요로 붉게 물든 열매 하나조차도 투명하게 사그라지는
내게 와서 내가 되지 못한 눈빛들이, 돌을 뚫고 깨부수던 말들이, 견고한 나무의 길로 위장했던 내 비린 상처들이, 어둠을 혼자 견뎌내던 새들조차도 흔들리며 다 흩어지겠습니다.
이 봄비 그치면 취우 속에 가만히 들어 몸으로 번지는 비취색 나뭇잎 하나 배후로 삼아 한밤 한낮을 꼬박 잠들겠습니다. 단 한 번도 따뜻한 적 없는 시리 조각에 잠겨 한밤 한낮을 꼬박 잠들겠습니다.
주머니 속 시리 두 조각, 긴 세월 지나도 맞붙이 치는 소리 잇몸 시리게 쩡쩡거립니다. 이 봄비 그치면 취우 속에 가만히 들어 한밤 한낮을 꼬박 잠들겠습니다.
연애의 뒤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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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제주4.3평화문학상 수상자로 김소윤(39·소설), 정찬일(55·시) 씨가 선정됐다.
5일 제주4.3평화재단(이사장 양조훈)에 따르면 4.3평화문학상 운영위원회(위원장 현기영)는 지난 2월 28일 본 심사위원회를 열고 김소윤의 소설 〈정난주 마리아-잊혀진 꽃들〉, 정찬일의 시 〈취우(翠雨)〉를 각각 제6회 4.3평화문학상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4.3평화재단은 지난해 7월부터 12월 20일까지 작품을 공모했다. 그 결과 국내·외 15개 지역에서 모두 231명(시 1685편, 소설 101편)이 응모했다. 시상금은 소설 7000만원, 시 2000만원으로 국내 최고 수준으로 손꼽힌다.
<정난주 마리아-잊혀진 꽃들>은 1801년, 조선조 후기 천주학 사건(황사영 백서)으로 인해 제주로 유배돼 관노비로 살게 된 여자 정난주의 비극적 일생을 그린 소설이다.
〈취우(翠雨)〉는 4.3로 잃어버린 마을 ‘삼밧구석’의 슬픔과 아픔을 서정적으로 표현하는 한편 치유의 과정을 잘 드러냈다.
소설 부문 본 심사위원 김석희, 송기원, 한승원 씨는 심사평에서 “조선이라는 봉건시대의 변방에 놓여있는 제주라는 어떤 차별성을 정난주라는 한 여인의 핍진한 삶과 연결시키는 작가의 진정성이 감동으로 다가왔다. 거기에 작가의 성실하고 개성있는 문체도 돋보였다”고 호평했다.
시 부문 본 심사위원 강은교, 박남준, 정희성 씨는 “70주년을 맞이한 4.3은 이제 물 위로 올라와야 한다. 4.3평화공원에 아직껏 이름을 짓지 못해서 ‘백비’로 남아있는 비에 마땅한 이름이 새겨져야 한다. 주먹을 쥔 결기와 투쟁적 언어로는 어제와 오늘, 내일을 열고나갈 시대를 어루만질 수 없다. 서정의 힘이 다시금 필요할 때다. 〈취우(翠雨)〉가 그러한 시적 성취와 함께 치유의 덕목을 고루 갖추었다”고 밝혔다.
김소윤 씨는 1980년 전북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10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에서 단편소설 <물고기 우산>이 당선돼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같은 해 한겨레21 손바닥 문학상에 단편소설 <벌레>, 2012년 제1회 자음과 모음 <나는 작가다>에 장편소설 <코카브-곧 시간의 문이 열립니다>가 당선됐다. 저서로 장편소설 《코카브-곧 시간의 문이 열립니다》, 단편소설집 《밤의 나라》가 있다.
정찬일 씨는 1964년 전북 익산 출생으로 유년 시절 이후 제주에서 활동했다. 1998년 현대문학에서 시인으로 등단한 뒤, 2002년 제2회 평사리문학대상에서 <꽃잎>으로 소설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2005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유령>이 당선됐다. 시집 《죽음은 가볍다》와 《가시의 사회학(社會學)》이 있으며 현재 다층 동인,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제6회 4.3평화문학상 예비 심사위원은 소설 부문에 김숨·김한수·손홍규·심윤경·오수연·한창훈 소설가, 시 부문에 김경훈·박형준·손택수·안현미·황규관 시인이 각각 참여했다.
시상식은 3월 중 개최할 계획이며 당선 작품은 곧 공식 출판을 통해 독자들에게 선 보일 예정이다.
4.3평화문학상은 제주도가 2012년 3월 제정해 제6회에 이르고 있으며, 2015년부터 4.3평화재단이 업무를 주관하고 있다.
4.3평화문학상 제1회(2012) 수상작은 ▲현택훈의 시 <곤을동>·구소은의 소설 <검은 모래> ▲제2회는 박은영의 시 <북촌리의 봄>·양영수의 소설 <불타는 섬> ▲제3회는 최은묵의 시 <무명천 할머니>·장강명의 소설 <댓글부대> ▲제4회는 김산의 시 <로프>·정범종의 소설 <청학> ▲제5회는 박용우의 시 <검정고무신>·손원평의 소설 <서른의 반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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