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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덕규

 

 

열일곱 살 여름이었습니다 이슥한 밤마실을 다녀오는 어둠 속이었는데요 그날따라

불빛 한 점 보이지 않는 칠흑의 허공을 더듬으며 집으로 가던 길이었는데요

눈감고도 찾아가던 집이었는데요

아무리 가도 집은 나오지 않고 자꾸 엉뚱한 곳으로 가고 있었는데요

냇가 쪽 같기도 하고 이미 동네를 벗어나 들판으로 접어든것 같기도 했는데요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방향을 수십 번 다시 잡았으나

집은 갈수록 멀어지는 듯했는데요 어느 순간

발을 헛디뎌 어떤 허구렁 속으로 까마득 굴러떨어졌는데요 그때 그 어둔 허구렁 속에서

누군가 내미는 손을 무심코 잡고 일어서다 소스라치게 놀라 물러섰는데요

놈이었습니다

깜깜한 놈,

어둠 속에서 나를 환히 내다보는 놈,

놈의 손을 잡는 순간 손끝을 통해

놈의 엄청 시커먼 마음이 내 몸속으로 고압 전류처럼 까무룩 흘러들어왔는데요

그 순간 나는 유정(油井)처럼 캄캄하게 깊어졌는데요

어둠이 깊어질수록 환하게 눈뜨는 놈에 이끌려 밤새 뒷산을 헤매다가 집으로 돌아와보니,

남향이었던 집이 감쪽같이 북쪽을 향해 있었는데요

등뒤로 해가 뜨고 지고

그동안 보이지 않던 어둠 속의 일들이 대낮처럼 환히 다 보이지기 시작했는데됴

놈의 일거수일투족도 한눈에 들어왔는데요

으슥한 어둠 속에 숨어 다디단 죄를 짓기 시작한 그때 놈의 나이 열일곱 살이었는데요

 

 

 

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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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문학사와 충북 보은문화원이 주관하는 9회 오장환문학상수상자와 5회 오장환 신인문학상당선자가 가려졌다.

 

12일 실천문학사에 따르면 제9회 오장환문학상 수상자로 이덕규(55) 시인을 선정했다. 수상시집은 놈이었습니다’(문학동네 )이다.

 

5회 오장환 신인문학상 당선자로는 역류하는 소문을 쓴 박순희(46·)씨를 뽑았다.

 

이번 오장환문학상의 심사는 도종환·송찬호·최두석 시인이, 오장환신인문학상 심사는 김일영·안현미·조기조 시인이 각각 맡았다.

 

오장환문학상 심사위원들은 심사평에서 선이 굵고 힘 있는 남성의 언어로 희미하게 남아있는 농업 경제의 잔영과 세속적 삶과 인물들을 감각적이고 생동감 있게 되살려낸 시집이라고 평했다.

 

그러면서 시의 스케일이 넓고 깊은데다 가끔 시의 솜털에 휘파람을 불어주는 섬세한 면이 돋보였다고 설명했다.

 

이 시인은 1998년 시 전문지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한 뒤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문학동네 )밥그릇 경전’(실천문학사 ) 등의 시집을 출간했다. 이번 수상작은 그의 세 번째 시집이다.

 

오장환신인문학상 심사위원들은 당선작인 '역류하는 소문'에 관해 "형태가 없는 소문의 이미지를 짜임새 있게 잘 표현한 시"라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오장환문학상 수상자인 이 시인에게는 창작기금 1000만원, 오장환신인문학상 당선자인 박 씨에게는 500만원의 상금을 준다.

 

오장환 문학상은 보은군 회인면에서 출생해 한국 아방가르드 시단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오장환(19181951) 시인을 기리기 위해 2008년 제정했다.

 

그동안 최금진(1), 백무산(2), 최두석(3), 김수열(4), 최종천(5), 윤재철(6), 장이지(7), 최정례 시인을 수상자로 선정했다.

 

시상은 '21회 오장환문학제'가 열리는 오는 23일 보은읍 뱃들공원에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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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그릇 경전 / 이덕규

 

 

어쩌면 이렇게도

불경스런 잡념들을 싹싹 핥아서

깨끗이 비워놨을까요

볕 좋은 절집 뜨락에

가부좌 튼 개밥그릇 하나

고요히 반짝입니다

 

단단하게 박힌

金剛말뚝에 묶여 무심히

먼 산을 바라보다가 어슬렁 일어나

앞발을 굴리고 밟고

으르렁 그르렁 물어뜯다가

끌어안고 뒹굴다 찌그러진,

 

어느 경지에 이르면

저렇게 제 밥그릇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을까요

 

테두리에

잘근잘근 씹어 외운

이빨경전이 시리게 촘촘히

박혀있는, 그 경전

꼼꼼히 읽어내려 가다보면

어느 대목에선가

할 일 없으면

가서 [밥그릇이나 씻어라]* 그러는

 

* 조주선사와 어느 학인과의 선문답

 

 

 

 

밥그릇 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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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오후 6시 서울 출판문화회관 강당에서는 제4회 시작(時作)문학상 시상식이 열렸다. 화성 노작홍사용문학관 명예관장 겸 선임연구원인 이덕규 시인이 수상자였다. 강당에 가득한 시인들은 이 시인의 수상을 축하하는 덕담을 나눴다.

 

한글글꼴 안상수체로 유명한 디자이너 안상수 교수는 꼭 해보고 싶은 디자인이 책디자인이었는데 이덕규 시인의 [밥그릇 경전]을 디자인하면서 시를 알게 되고 좋아하게 됐다며 뒤주머니에서 지갑을 거내들고는 디자이너 특유의 감각으로 만든 엄지손가락 크기의 LED 화환을 만들어 왔노라며 시인에게 선물했다. 브로치 크기의 반짝이는 전자 화환을 받아 든 시인은 무척 즐거워 보였다.

 

문학평론가 유성호 교수는 심사보고에서 "이 시인은 자연 사물의 구체적 목록들을 다양하게 재현하면서 거기서 푸른 직립의 결기를 읽어내기도 하고, 생태 지향의 에로티시즘 미학을 일구기도 하고, ''으로 상징되는 근원으로의 회귀를 갈망하는 사유를 드러내기도 했다.

 

고요히 반짝이는 '밥그릇 경전'처럼 삶의 바닥을 궁구하는 사유의 깊이가 이전 시집 보다 확연한 진경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시인은 수상소감에서 글을 모르던 일곱 살 어느 가을날을 떠올리며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글을 알기 전에 시를 느꼈던 그 시간이 바로 지금이라고 인사하고 문우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덕규 시인은 1961년 화성에서 나서 농사와 공사판을 떠돌다가 1996년 농사일 말고는 하던 일들을 하루아침에 정리하고 시를 쓰기 시작해서 1998[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한다. 2003[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를 내고 2004년 현대시학작품상을 받았다.

 

2009년에 두 번째 시집 [밥그릇 경전]을 내고 이 시집으로 시작문학상을 받게 됐다.

 

동탄 개발이 한창 시작될 무렵 동탄 신도시는 무엇으로 살아야 할까를 고민하다가 신도시 개발 이익의 한 부분으로 화성에서 난 작가 노작 홍사용을 기리는 문학관을 짓자는 제안을 화성시와 토지주택공사 등에 하게 된다. 그의 바램이 이루어져 지난 봄 노작공원에 문학관이 생기고 명예 관장으로 시를 가르치고 농사를 지으며 산다.

 

"누군가를 간절하게 사랑해서 그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뼈가 저릴만큼 사랑하게 된다면, 그를 생각만 해도 시가 된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시인은 누구나 자신만의 텃밭을 가지고 있다. 내게는 글을 모르던 유년 시절의 기억이 그것이다. 글을 알기 전에 시를 알았다. 머리를 쓰는 것보다 몸을 굴리는 일에 익숙하지만 짧은 토막 문자질에 머물지 않기 위해 시를 쓴다

 

평론가 강동우 교수의 평론처럼 농사짓는 이덕규 시인에게서 흙으로 상징되는 생명력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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