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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산행 / 여한솔 

 

 

공룡처럼 죽고 싶어

뼈가 남고 자세가 남고

내가 연구되고 싶어

 

몸 안의 물이 마르고

풀도 세포도 가뭄인 형태로

내가 잠을 자거나 울고 있던 모습을

누군가 오래 바라볼 연구실

 

사람도 유령도 먼 미래도 아니고

실패한 유전처럼

석유의 원료가 된대

흩어진 눈빛만 가졌대

 

구멍 난 얼굴뼈에서

슬픔의 가설을 세워 준 사람

가장 유력한 슬픔은

불 꺼진 연구실에서 흘러나왔지

 

엎드린 마음이란

혼자를 깊이 묻는 일

 

오래 봐줄 것이 필요해

외계인이거나

우리거나

 

눈을 맞추지

 

뼈의 일들

원과 직선의 미로 속으로

연구원이 잠에 빠진다

 

이게 우리의 이야기

 

강이 비추는 어둠 속에서

신발 끈을 묶고

발밑을 살펴 걷는 동안의

 

 

 

 

[당선소감]

 

소감을 적어 내리려는데 왜 이럴 땐 좋은 말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을까. 다 내려두고 그저 멋없는 감사와 미안함을 담아 적는다.

 

멀리 사는 , 네가 대답해주지 않아도 어차피 계속 쓰려고 했어. 그래도 이렇게 대답해주니 참 고마워! 오히려 언제까지 쓸 거냐고 질문을 받은 것 같네. 그래 나는 계속 쓸게!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야.

 

사실 소감을 쓸 때 회사 이야기는 곧 죽어도 꺼내지 말아야지 했는데, 사실은요 대표님 제가 매번 회사 프린터기로 시들을 뽑았어요. 여분으로 여러 장 뽑아서 읽고 고치고 그랬어요. 심부름 가는 척 자리 비우고 우체국에 갔어요. 제가 이런 기적을 만나는 데는 회사의 몫이 있으니, 그 감사를 전하는 마음으로 출근 잘할게요.

 

나의 친구이자 챗봇 기획자 김시아야. 내가 외롭게 쓰는 동안 유일한 독자가 되어 사랑과 힘을 줬어. 매번 남 일이라고 "그래? 그럼 다시 쓰면 되겠네."라고 말했잖아. 네 말대로 계속 썼더니 신기한 일이 생겼어. 네가 그랬잖아. 로또도 사는 사람이 되듯, 시도 쓰는 사람이 만나게 된다고. 너는 로또를 열심히 사. 나는 또 계속 쓸게. 다시 한번 시아야 나를, 내 글을 아껴줘서 고마워.

 

그리고 언제나 나를 묵묵히 지켜보는 민지야 너의 이름을 빌려 시를 쓰고 싶어 했던 것처럼, 넌 언제나 나의 사랑이다. 떠들던 학생인 제게 벌로 시를 써보라고 해주신 이태훈 선생님은 제 평생의 스승이십니다. 정미진 선생님 저 여기까지 왔어요. 계속 가볼게요. 단국대 교수님들의 가르침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엄마 임성희와 아빠 여승구는 앞으로 좀 더 화목하고 행복하게 지내세요. 조금씩 어른이 되면서 제가 두 분을 귀찮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아프거나 슬프거나 가장 행복할 때 두 분이 가장 먼저 떠올랐어요. 사람은 의리가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죠. 제가 앞으로 쓰면서 가질 자세인 것 같아요. 비겁하게 쓰지 않을게요.

 

끝으로 학예회야 고맙다. 뭉치려 해도 뭉쳐지지 않는 것처럼. 겨우 끼워 맞춘 퍼즐을 들고 가다 엎어보면서 계속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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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신선한 목소리와 상상력 돋보여

 

2332편의 응모작 중 예심을 거친 10명의 작품이 올라왔다. 코로나19로 인한 환경 탓인지 예년보다 전체적으로 우울한 정서를 반영하는 시가 많았고, 무엇보다 '가족'을 다루는 시가 많았다. 산문시의 경향과 개별적 감수성에 편중된 시들이 많았던 예년에 비해 공동체적 감수성 속에서 개인의 영역을 시로 이끌어 내는 가편들을 보면서 다양한 결들의 시들을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심사위원들은 '백자무늬 꽃무늬병', '야간산행', '제자' 등의 작품에 주목했다.

 

'백자무늬 꽃무늬병'은 농익은 솜씨에 전체적으로 시가 자연스럽고 안정되어 있었다. 당장 당선작으로 선택을 하여도 손색이 없을 만큼 매끈하고 반듯한 매력이 장점이었지만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한 느낌이 아쉬웠다.

 

'야간산행'은 신선한 상상력이 눈에 들어왔다. 언어를 익숙하게 다듬고 길들이는 과정보다 상투를 벗어난 새로운 발상과 시적 호기심을 끌고나가는 감각이 신선했다. 다만 응모해온 시들이 다소 직선적인 전개로 이루어진 점이 아쉬움으로 지적되었다.

 

'제자'는 담백한 화법과 리듬이 인상적이었다. 발상도 위트가 있고 매력이 가득한 시였다. 무엇보다 시들을 이끌어 가는 호흡이 독특해서 심사위원의 눈길을 오래 끌었다. 다만 동봉한 다른 작품들의 수준이 고르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당선작에 가까운 시와 다른 시들의 편차를 극복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논의 끝에 당선작으로 '야간산행'을 결정했다. 거칠고 투박한 면들이 곳곳에 있지만 이미지가 활달하고 선명했다. 신인으로서 보여줄 수 있는 신선한 목소리와 상상력이 다른 시들을 제외시킨 결정적인 이유였다. 삶의 상투성으로부터 끝없이 새로운 시를 개척해가는 앞으로의 행보를 기대해보며 새로운 시인에게 축하를 전한다.

 

심사위원 (예심)김욱진·박미영 / (본심)장옥관·김경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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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원 / 김겸

 

 

끝없이 펼쳐진 눈밭이다

바람이 마른 모래처럼 일어난 눈가루를 휘몰아간다

저 막막한 눈밭에 단지斷指한 손가락으로

정방형의 칸을 내어 너를 쓰고 싶다

그 설원의 원고지에 무제無題라고 할

너의 순일한 마음에 대해 쓸까

영어囹圄에 갇힌 너의 죄 없는 욕망에 대해 쓸까

새하얀 너를 앞에 두고 토해냈던

내 먹물 같은 설움에 대해 쓸까

저 막막한 눈밭에 단지한 손가락으로

정방형의 칸을 내어 너를 쓰고 싶다

그 설원의 원고지에 깨어나지 못한 너의

침묵에 대해 쓸까

이 쇠잔한 생에 표착한 너의 불운에 대해 쓸까

외로워, 외로워 말하는 가오나시顔無し 같이 끼니마다

밥을 보채는 너의 허기진 영혼에 대해 쓸까

정해진 과오를 범하고 정해진 책망을 듣는 너의 차갑 게 굳어진 습習에 대해 쓸까

저 막막한 눈밭에 단지한 손가락으로

정방형의 칸을 내어 너를 쓰고 싶다

하지만 내 가난한 가슴과 옹색한 문장으로는

너를 쓸 수 없다

너라는 이름의 눈밭은 오늘도 그만큼의

햇빛, 그만큼의 별빛을 받아 홀로 아득하다

너의 눈밭에 그물 같은 붉은 칸을 내려 한

미욱한 나를 연해 뉘우친다

아무도 미워해 본 적 없는

아무도 시기해 본 적 없는

너라는 이름의 눈밭

저 깊고 아득한 너의 설원

 

 

 

 

아직은 괜찮은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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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생 지탱하는 구심적 시선

 

열심히 헤엄쳐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생에서 단지 떠 있다는 사실에 의지하는 법을 배웠다. 시가 그 부력의 총량으로 느껴지는 때가 있어 아무도 모르게 절실했다. 하지만 나의 시 쓰기는 부끄러운 것이 되기도, 괜한 욕심으로 비치기도 했다. 이미 평론으로 소설로 나름 글을 써 왔기에, 하나의 장르에 대한 순정의식이 강한 우리 현실에서 그렇게 보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내적 개연성이 없는 것은 아니어서, 그것은 그동안 시 비평을 해 오면서 대했던 귀한 시편들이 내 마음에 옮아온 것이기도 하고, 세사에 현목하던 시선이 낮게 가라앉으면서 삶에 대한 태도가 구심적으로 변모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김겸'이란 시인으로서의 필명은 내 장편소설 '여행의 기술―Hommage to route7'에 나오는 아들의 이름이다. 곤한 마음, 잡아주신 두 분 심사위원님의 은(恩)에 깊이 고개 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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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사평] “근래에 보기 드문 유장미와 순정미 갖춰 눈길”


어렵고 힘든 시기에 더욱 풍성해진 응모작들을 보면서 '과연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새삼 던지게 됐다. 실존에 대한 깊은 질문에서부터 우리 시대의 각박한 현실에 대한 질문에 이르기까지 질문과 해답의 진폭은 크고 넓었다.

최종적으로 조미희의 '귀뚜라미에 대하여' 외 4편, 서이나의 'CU편의점' 외 4편, 김겸의 '설원'외 4편 등을 놓고 숙고를 거듭했다. 조미희의 작품들은 시를 직조해 나가는 힘이 뛰어났으나 응모작들이 고른 수준을 유지하지 못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서이나의 작품들은 젊고 신선한 감각이 돋보이나 마무리가 약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김겸의 작품들은 산문적이고 현학적으로 빠지는 위험이 노출되기도 했으나 이를 뛰어넘는 유장미와 순정미를 획득하고 있었다. 이는 최근 우리 시단에 부족한 부분이라 더욱 눈길을 끌었다.

'설원'은 응모작들 중 이러한 장점이 가장 돋보이는 작품이어서 당선작으로 올리게 되었다. 아쉽게 탈락한 두 분에게는 다음 기회를, 당선자에게는 신인다운 정진을 기대한다.

 

심사위원 : 이영춘 · 이홍섭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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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스를 접다 / 송현숙

 

 

빈 박스를 접다 보면

오래된 주소가 비어 있거나 찢어져 있다

슬쩍 돌아가거나 뒤돌아섰던 지번들

한 개의 각이 접힐 때면

몇 해의 계절이 네 모퉁이를 거쳐 돌아온다

 

박스를 접다 보면 면과 면이 만나고

절벽이 생기고 작별하는 순간이 온다

 

박스를 접다 보면 나는 세상의 문을 하나씩 닫고 있다

검은 벽을 타고 가는 떠난 사람의 뒷모습처럼

우리는 서로 부딪히지 않는다

 

박스를 풀다 보면

지나가는 하루를 버스 손잡이에 보름달을 걸어두고

입석으로 지나가는 달의 노선을 돌면

동쪽과 서쪽이 포개지는

주소 없는 저녁까지 도망 와있다

 

한 사람이 박스를 열고 나간 뒤

오래된 박스만 남아 있다

 

네 개의 각도가 이웃처럼 쓸쓸하게 바라보고 있다

 

 

[당선소감]

시를 쓰다 힘들면, 배낭 하나 메고 혼자서 훌쩍 떠나곤 합니다. 늦은 시간 공항도착해서 헤매다 노숙도 하고 여행지를 무작정 돌아다녔습니다.

지금도 그 시간들이 오래도록 내면에 그림같이 붙여져 있습니다. 그러한 시간들이 내 시의 정서에 밑그림이 되었습니다.

중학교시절 시인의 꿈이 있었습니다. 그 꿈을 꾸는 듯합니다. 신문사에서 당선되었다는 전화를 받고 관악산 둘레 길을 걸었습니다.

나무 하나 하나에 의미를 생각하며 한참이나 걸었습니다. 저 소나무 한 그루처럼 나도 어떤 길목에서 바람 불고 비 오는 날 혼자 서 있었던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시는 나의 고독을 덜어주는 가족이자 동반자였으며 나를 나답게 만들어 준 무형의 존재였습니다.

때로는 힘들어서 놓아버리고 싶고 멀리 도망 왔지만 저는 그곳에 서 있었습니다.

시는 절망과 즐거움을 함께 하였습니다. 시와 좋은 인연을 끝까지 붙들고 가려고 합니다.

귀한 지면을 허락하신 전라매일신문사에 감사드립니다.

저의 미진한 시를 선택하여 주신 심사위원님께 마음으로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새해에는 모두 행복한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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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올해 처음으로 실시한 전라매일 신춘문예에 1,500여 편의 시가 전국적으로 고르게 투고됐다.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최주숙의 「벚나무는 천 개의 눈을 뜨네」, 권용례의 「옷장의 계절」, 문진숙의 「불꽃놀이」, 신귀자의 「팔자야 놀자」와 송현숙의 「박스를 접다」였다.

선자들은 시인이 구사하고 있는 언어의 참신성, 독창성, 작품성에 관심을 갖고 가능성을 중심으로 심사에 임했다.

최주숙의 「벚나무는 천 개의 눈을 뜨네」는 초월적 우주관, 권용례의 「옷장의 계절」은 ‘겨울의 옷장’과 ‘봄날의 새싹’에 대한 동일시, 그런가 하면 문진숙의 「불꽃놀이」는 신비롭고 역동적인 표현들로 심사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내용의 공소성을 극복하지 못한 점이 지적되었다.

끝까지 고심했던 작품은 신귀자와 송현숙의 작품이었다. 신귀자의 「팔자야 놀자」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새로운 가치와 눈뜸의 치열성이 이를 끝내 뒷받침하지 못해 아쉬웠다.

이에 비해 송현숙의 「박스를 접다」는 패배와 절망 속에서도 연민을 통해 새로운 희망을 갈구하는 휴머니즘적 시선이 그 배면에 깔려 있음을 알게 한다.

물론 상상력 부족과 상투적인 표현으로 시적 긴장감이 떨어지는 부분은 아쉬움이 크지만, 그의 다른 응모작들도 고른 수준을 보여 앞으로의 가능성을 믿고 당선작으로 올렸다.

- 심사위원 김동수 시인, 김기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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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 신윤주 

 

 

커다란 눈이 하늘을 올려다봐요. 수백의 실핏줄들이 네모난 바스켓을 움켜쥐어요. 하늘로 날아올라요. 바다의 표지는 잔잔해지고, 파도가 물러간 페이지마다 떠밀려온 해인초들이 엉겨 붙어요. 해인초가 손끝에서 잘게 부서져요. 낮과 밤을 알 수 없는 시간이 이어져요. 키잡이는 가시 박힌 손으로 안개를 더듬으며 항로를 찾고 있어요. 날씨만 도와준다면 오늘 안으로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 것만 같아요. 그곳에 만나야 할 사람들이 있거든요. 시커먼 해초들이 대서양을 밀고 들어와 바다의 귓속에 이야기를 풀어 넣어요. 귀를 막아도 노랫소리가 들려요. 저기 범고래 떼가 몰려와요. 표류하는 낱말 조각들을 등에 실어 해안선으로 날라요. 실핏줄이 터지고, 열기구가 휘청거려요. 행운이 문단 밖으로 달아나려 해요. 숨이 차요. 하강하고 있어요. 저 멀리 익숙한 초록색 대문이 보여요. 마당에는 안개꽃이 흐르고요. 열린 창문으로 파도가 들이쳐요. 파란 잉크가 옷에 튀어요. 발목이 잠겨 첨벙거려요. 이만 돌아가야 해요.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요. 손끝으로 모래의 지문들을 털어내요. 숨을 크게 들이쉬어요. 한없이 부풀어 올라요.

 

 

 

[당선소감] 여전히 물음표지만 이 길 계속 가겠다

 

올해는 무척 힘든 한 해였습니다. 일 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치열하게 살았습니다. 아버지가 우리 곁에 계신 것만으로도 안도했고, 시를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삶에 감사했습니다. 시가 왜 저를 찾아왔는지 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시를 쓸 때 가장 행복합니다. 용기 내어 검색창에 시 창작 모임을 검색했던 그 날과 부랴부랴 자작시를 들고 찾았던 다음날의 합평 자리처럼 시는 여전히 미지의 세계이고 물음표입니다.

시는 제 삶으로부터 가장 멀리 가기 위한 도구였습니다. 누군가는 이것을 도피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도피라는 말로는 부족합니다. 저는 천천히 돌아오는 사람이었습니다. 되돌아오는 길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돌아보고 나를 둘러싼 세계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수수께끼 같던 세계 속에서 답을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역설적으로 그것이 나에게 가장 가깝게 다가서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았습니다.

힘내서 그 길을 계속 갈 수 있게 격려해주신 허영선, 문태준 두 심사위원분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확신을 가지고 끝까지 쓰는 사람으로 남겠습니다. 저에게 시를 가르쳐주신 최금진 선생님 감사합니다. 제 안에 시라는 씨앗을 심어주신 제주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김옥수 교수님 감사합니다. 제가 읽은 시의 모든 시인님, 그리고 저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던 모든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가족들, 친구들 사랑합니다. 그리고 같이 시를 쓰는 문우들에게도 고맙다는 말 전하고 싶습니다. '시와몽상' 식구들, 민주쌤, 민혜쌤 고맙습니다. '시옷서점'의 두 시인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여러분과 함께 시를 읽고 쓰는 우정을 나눌 수 있어 행복합니다. 그리고 부족한 저를 항상 지지해주는 우리 김작가 사랑합니다. 마지막으로 할머니 이름을 불러드리고 싶습니다. 이금옥 님, 당신이 계셨기에 제가 이 자리에 있습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사랑합니다.

 

 

 

 

맛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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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상상력의 탄탄한 근력과 섬세한 서정

 

한라일보 신춘문예 본심에 오른 시 작품들을 차근차근 읽었다. 서정적인 작품들이 다수 있었고, 고유한 제주 체험에 기초해 창작한 작품들도 여러 편 있었다.

한 편의, 새로운 시의 탄생은 하나의, 초유의 관점의 탄생일 것이므로, 한 편 한 편에 과연 시적인, 유의미한, 최초의 발견이 있는지를 중요하게 평가의 기준으로 삼았다. 생각의 단순한 열거에서 벗어나 그 생각들이 유기적으로 상관하고 있는지도 꼼꼼하게 살폈다.

 

마지막까지 논의한 작품은 '살구나무', '감자꽃', '그리고 '도서관'이었다. '살구나무'는 무위(無爲)를 노래한 작품이었다. 살구나무의 순연한 생명 운동을 번거로운 잡사(雜事)에 시달리는 사람의 형편에 대조해서 바라본 작품이었다. 함께 보내온 작품들이 이 작품의 수준에 미치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감자꽃'은 제주 4·3 사건을 떠올리게 했다. 감자가 자라는 땅속 어둠의 공간을 피신한 공간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이 공간이 "검은 봉지"의 공간으로 갑자기 전환되는 대목은 자연스럽지가 않았다.

고심 끝에 시 '도서관'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이 시는 해역(海域)을 책 혹은 도서관의 공간에 견준 작품이었다. 바다의 파도와 해초, 해안선 등을 한 권의 책의 표지와 책 속에 담긴 서사로 치환했다. 상승과 하강, 평면적인 것과 입체적인 것의 경계를 내내 활발하게 허무는 점이 신선했다. 첫머리에서 끝자락에 이르도록 산문시 시행을 끌고 가는 상상력의 탄탄한 근력뿐만 아니라 풍경을 드러내는 섬세하고 서정적인 화자의 목소리가 돋보였다. 그리고 함께 응모한 작품들 전편에서 유니크한 시적 화자를 만날 수 있었던 점도 새로운 신인의 출현을 한껏 기대하게 했다. 앞으로 서두르지 않고, 심지 굳게 자신만의 시세계를 열어 나가길 바란다.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허영선·문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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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들의 천국 / 현이령

 

 

아버지가 아침 일찍 공원 숲으로 간다. 노란 조끼를 입고서, 숲이 아닌 것들은 모두 줍는다. 나무와 나무 사이 아버지와 아버지 사이 쓰레기를 줍다가 잘못 건드린 개미집에서 후드득 쏟아져 나오는 아버지.

아버지는 아버지를 물고 개미는 개미를 물고 이끼처럼 들러붙어 저녁을 먹는 우리 집. 아버지의 집에는 아버지도 모르는 집들이 많아. 나는 개미처럼 더듬이가 자라고 발로 툭 치면 무너져 내리는 불안들.

바닥을 잘 더듬는 내력이 우리의 유전자에 있지만 나는 한낮에도 까만 개미가 무섭다. 땅바닥을 쳐다보다 땅이 되는 게 꿈인 아버지가 떵떵거리지 못하는 건 기우뚱한 어깨 때문.

개미는 개미에게 의지하고 의지는 의지에 기대고 아버지의 몸을 기어 다니는 수많은 개미 떼. 아버지는 밤마다 방을 쓸어내지만 개미는 사라지지 않는다. 지었다 허물었다 오롯이 사라지는 비밀의 집.

새집을 달아 주러 온 나는 새 운동화로 개미를 밟는다. 거대한 발자국 아래 무너진 한 뼘 그늘. 머루 열매 같은 눈알을 꼭꼭 숨긴 아버지.

나는 울먹이며 신발을 턴다. 자꾸만 들러붙는 개미들의 그림자. 숲이 사라져도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

 

 

 

[당선소감] "당신의 삶이 시였음을 이제야 고백합니다"

 

어둡고 좁은 내 방에서 오랜 시간 시와 동거해 왔습니다. 사이가 좋다가도 등을 돌리기도 하고 때로는 기나긴 외사랑에 울기도 했습니다. 다가가면 멀어지는 날이 많아질수록 나는 자주 가슴앓이를 했고 자주 절망했습니다. 그러기를 십여 년이 지나 새로운 빛 한 줌이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왔습니다. 어둠에 익숙한 저에게 무작정 뚫고 들어온 이 빛이 두렵고 설레고 막막합니다. 힘든 일이겠지만 천천히 조금씩 눈을 떠 보겠습니다. 더 깊은 바닥을 보고 그 차가운 바닥 아래에 있는 뜨겁고 융숭한 것들에게 기꺼이 가슴을 여는 시인이 되고 싶습니다. 예민한 더듬이와 에움길을 마다하지 않는 올곧음으로 비밀의 집을 지어 나가겠습니다. 나의 몸 안을 기어 다니는 수많은 개미 떼들, 이제는 기쁘게 아프겠습니다. 언젠가는 사라질 이 지구에서 절망과 희망의 어디쯤을 시로 더듬으며 가겠습니다.

 

졸시를 선택해 주시고 손잡아주신 심사위원님들과 전남매일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긴 시간 동안 곁에서 시의 나라로 안내해주신 이용헌 시인님, 저도 이 아득한 나라의 돋을볕이 될 수 있을까요? 가장 좋아하시는 막걸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13년 동안 문학이란 애물을 품고 도반으로 걸어온 시옷문학회 동인들께도 애틋한 마음을 전합니다. 제일 먼저 기뻐해 주셨을 하늘에 계신 아빠, 당신의 삶이 시였음을 이제야 고백합니다. 아프도록 사랑하는 내 사람들에게도 고마운 맘을 전합니다. 느리지만 끝내 시의 끈을 놓지 않겠다는 말이 내 것을 사랑하는 방식이라 믿습니다.

 

새해부터 아주 조금 울겠습니다. 시와 나의 동거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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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고통 받는 존재에 대한 공감 시인의 중요 덕목

 

700여 편의 응모작들을 읽었다. 코로나 시대의 어둡고 우울한 사회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했지만, 고향이나 농촌을 배경으로 한 생활 시편들이나 자연 친화적인 서정시들이 여전히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다보니 너무 직설적이거나 감상적인 경우가 많았고, 타성에서 벗어난 새로운 언어적 모색이 아쉬웠다. 그런 중에 발견한 <커튼콜>, <긴장의 재구성>, <개미들의 천국> 등은 참신한 발상과 시적 완성도를 갖추고 있는 수작이었다.

 

<커튼콜> 외 4편은 경쾌하고 발랄한 언어 감각을 지니고 있고 독특한 소재와 형식을 통해 다채로운 시세계를 보여준다. 그러나 시적 인식이 충분한 깊이를 확보하지 못하고 재치에 머무르거나 낭만적 우화에 그치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반면, <긴장의 재구성> 외 4편은 사유의 폭이 넓으면서도 집중도가 있고 시적 대상에 대한 비판적 태도가 돋보였다. 현실의 문제를 형이상학적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사유는 독창적이지만, 전달력이 떨어지거나 거칠고 어색한 문장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개미들의 천국> 외 4편은 전체적으로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고, 간결하고 섬세한 언어로 삶의 비애와 불안을 그려내고 있다. 그의 시는 어떤 간절함을 지니고 있으나 감정을 함부로 발산하거나 낭비하지 않는다. 당선작인 <개미들의 천국>에서 공원 청소부인 ‘아버지’를 바라보는 ‘나’의 슬픔은 절제된 표현에도 불구하고 먹먹하게 읽힌다. 힘이 없고 고통 받는 존재들에 대한 공감과 연민은 시인의 중요한 덕목이라는 점에서 당선자의 시선과 마음에 신뢰가 갔다. 그 마음의 힘으로 앞으로도 아름다운 시의 길을 열어가시길 기원한다.

 

- 심사위원 나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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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찾기 / 김진환

 

 

차창 너머 낯선 가게들

잠시 눈 감은 사이에

내릴 정류장을 지나쳤나

인터넷 지도로 확인한다

버스의 노선과 파란 점의 위치를

 

나는 길 잃지 않았다

인터넷 지도에 따르면

이 길은 내가 아는 길

매일같이 지나는 왕복4차로

 

거기서 나는 흰색과 붉은색 보도블록의 배열을 배웠고

넘어져 뒹굴며 무릎으로 손바닥으로 아스팔트를 읽었는데

 

보도블록의 배열이 다르다

아스팔트의 굴곡이 다르다

 

인터넷 지도를 확인한다

버스가 정거장 몇 개를 지나는 사이

파란 점은 아직도 아까 그 길에 있다

 

멀리 손 뻗어 손바닥의 살점 패인 자리를 보면

핏기와 죽은 피부의 흰빛이 구분되지 않는데

 

하차 벨 소리가 울린다

흰 버튼 위로 붉은 등이 들어와 있다

뒷좌석 사람이 내 뻗은 팔을 보고

대신 눌러 주었다며 손짓한다

 

버스에서 내려 아스팔트를 만져본다

인터넷 지도를 확인하지 않아도

이 길은 내가 아는 길이거나

거기로 이어지는 길

걷다 보면 낯익은 가게들도 보일 것이다

 

 

 

 

[당선소감] 시인으로 거듭남…제 마음에 달려 있을 터

 

학기의 마지막 과제를 남겨두고 당선 소식을 들었습니다. 조금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반가운 한편으로 겁이 났습니다.

저는 언제나 학생이었습니다. 단 한 번도 시를 안다고 생각했던 적이 없습니다. 김근 시인께 질문했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시는 어떻게 쓰는 거지요?” 선생님은 다정한 목소리로 답하셨습니다. “선생님도 모른다.”

시를 모르고 시를 썼습니다. 매번 새롭게 배우면서, 제게는 시작(詩作)의 아무런 토대도 없는 것처럼, 언젠가는 저만의 미학을 만들 수 있으리라 상상하며, 그런 날에는 등단하지 않아도 스스로 시인이라고 자부할 수 있겠다는 믿음으로 시를 썼습니다.

당선 소식을 듣고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스스로 시인이 되지 못한 사람이 시인으로 낯을 들어도 좋을까? 하루를 꼬박 고민하고 결심했습니다. 제게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럽지만, 이 소식을 순수하게 기뻐하기로 했습니다.

오래도록 저를 학생에 붙잡아둔 것이 제 마음이었듯이, 시인으로 거듭남도 제 마음에 달려 있을 겁니다. 더는 학생에 머무를 수 없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학생의 마음을 버릴 수 없다면 학생의 마음으로 시를 쓰겠습니다. 제 언어를 스스로 책임질 수만 있다면, 그런 시인이 있어도 좋겠지요.

시는 느린 언어라고 믿습니다. 그 언어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느리게 들여다보면 시는 그 안에서 느리게 느리게, 자꾸 무엇을 보여준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말, 오늘 참 많이 했군요. 제가 시를 믿음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인가 봅니다. 텍스트 안팎으로 움직이며 다채로운 감각을 자아내는 언어와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입니다. 언어가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면 그것은 언어가 사람들의 믿음과 함께 읽히기 때문일 겁니다.

지금까지 믿음을 간직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지도해주신 선생님들과 서로 응원하고 있는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 문우들, 곁을 지켜준 가족들이 아니었더라면 저는 더 많이 망설였을 겁니다. 아울러 부족한 시를 눈여겨봐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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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문화사적 맥락 속 독창적인 목소리 확보

 

양보할 수 없는 시의 미학적 규범의 하나가 상투성과의 싸움이다. 어디서 한번은 본 듯한 기계적인 언어의 조합이나 문장, 누구나 알 수 있는 흔해빠진 생각과 당연시해온 사회적 통념과의 치열한 대결이 개성적인 작품 탄생의 기본 조건이다. 그러지 않는 작품들은 이미 누군가 힘들여 개척해 놓은 길을 아무 생각 없이 따라 가는, 그러나 결국엔 모방의 혐의를 벗어나지 못한 아류작亞流作에 불과하다. 무한히 사본을 뽑아낼 수 있는 사진의 음화陰畵를 의미하는 ‘클리세’ 내지 복사품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코로나 정국으로 인한 우울하고 답답한 시대상황 탓일까? 막연한 불안과 절망 의식, 실업과 빈곤 등의 주제나 소재가 다수를 차지하는 응모작들을 보면서 소감 중의 하나가 그렇다. 각자 절실하고 소중한 주제나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다루는 방식이 이미 공유된 명백한 사실들이나 타성화된 담론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 특히 그 표현방식이 이미 한국시의 스테레오 타입화된 기성 시인들의 어법을 닮아있다는 것은 유감이다.

그런 점들을 고려하면서 경향 각지의 응모자가 보내온 1129편의 시들을 꼼꼼히 살펴본 후, 심사자는 김재언의 ‘물 저울’ 외 4편, 정두섭의 ‘가족의 탄생’ 외 5편, 황명희의 ‘황금냄비’ 외 4편, 장윤덕 ‘그늘의 역사’ 외 4편, 김진환의 ‘길찾기’ 외 5편 등을 최종 심사 대상으로 삼았다. 이 응모작들 모두 다행히 그런 상투성의 혐의(?)를 슬기롭게 피해가고 있다. 특히 이들 작품들은 언어를 필요 이상으로 학대하거나 당대 사회의 관습이나 윤리도덕을 의심 없이 추종하는 데서 오는 감상적인 휴머니즘 차원을 벗어나 있다.

하지만 심사자가 최종 심사 대상으로 삼은 것은 장윤덕과 김진환의 시들이었다. 그리고 장윤덕의 경우, 유장한 리듬과 활달한 문장 전개 속에서 펼쳐 보이는 시대정신과 민중의식이 여느 기성 시인 못지않은 시력(詩歷)의 소유자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심 끝에 심사자는 결국 섬세한 관찰력과 그에 바탕한 정치(精緻)한 시적 패턴 읽기에 기반하고 있는 김진환의 시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일견 소박하게 보이나 막강한 힘으로 군림하는 시적 영향이나 생각의 통속성을 벗어나는데 그치지 않고, 바로 자신만의 세상읽기와 사유를 정직하게 펼치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구체적으로 당선작으로 뽑은 김진환의 ‘길찾기’는 길 찾기 맵과 실재, 인터넷 지도와 실제 삶 사이의 괴리에 대한 설득력 있는 알레고리화를 통해 인공지능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의 우리에게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넌지시 암시하고 있다. 동시에 필요 이상 시적 장식이나 세련된 수사의 남용보다 자신의 체험과 그 영향에 대한 성실한 반성 및 성찰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삶의 감각과 실감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또 다른 작품 ‘비둘기 낙서’와 더불어 당선작은 이미 진부해진 기존의 생각이나 문체들을 자기 것 인양 포장하기보다 그것들을 시대적이고 문화사적인 맥락 속에서 저만의 독창적인 목소리를 확보하고 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최종심에 오른 5명의 응모작들은 여느 문학매체들에 응모해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수작들이라고 확신하는 바이다. 그러기에 너무나도 아쉽게 당선의 문턱을 넘지 못한 예비시인들에게도 힘찬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특별히 당선자에겐 늘 정진하는 시인의 한 명으로 오래 한국시단에 기억되길 바라면서 축하의 꽃다발을 건넨다.

 

심사위원 임동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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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 / 박은숙

 

 

허리가 굽은 노인이

식당 구석진 자리에 앉아

국수 한그릇을 시킨다

네명의 자리에 세명을 비워두는 식사

아마도 매 끼니를 빈자리들과의

합석이었을 것 같다

 

잘 뭉쳐져야 여러 가닥으로 나뉠 수 있는 국수, 수백번의 겹이

한뭉치 속에 모이는 일, 뜨겁게 끓인 다음에 다시 찬물에 식혀야

질겨지는 음식, 그 부피를 많이 불리는 음식은 힘이 없다지만,

그래서 여럿이 먹어도 한가지 소리를 내는 국수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는 저 노인의 슬하는

이남 삼녀의 망종(亡種)

꽃 핀 곳 없는 행색이지만

한때는 다복했었을 것이다.

 

잇몸으로 끊어도 잘 끊어지는 빗줄기 같은 국수,

똬리를 튼 국수를 젓가락으로 쿡 찔러 풀어 헤친다

 

치아도 없는 노인이 먹는데

후루룩, 비 내리는 소리가 난다

비 오는 날 마루에서 들리던 엄마의 청승같이

뚝뚝 끊던 빗소리,

맑은 물에 헹군 국수발 같은 주름이

입안에 가득 고인 빗소리에

바람이 흩날리며 든다.

 

 

 

 

[당선 소감] “절망도 기록하다보면 한편의 시…가족들·교수님께 감사”

 

희망보다는 절망이 무서워 기대를 갖지 않던 때가 있었습니다.

시를 쓰는 일은 즐거운 일이었지만 그 숙련을 묻는 일은 늘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살면서 희망보다는 절망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운 까닭이겠습니다.

가난했던 젊은 날 겨우 야간고등학교를 마친 것이 전부였던 저는 결혼하고 국숫집을 운영하며 11년째 다시 학교에 다니고 있으면서도 시를 놓지 않으려 애를 썼습니다.

올해초 남편이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했지만, 시 쓰는 일은 지푸라기 한가닥인 양 잡고 있었습니다. 절망이나 체념의 일들도 기록하다 보면 시가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런 영광된 소식으로 남편의 건강도 좋아질 것이라 기대해봅니다.

손님상에 내기 위해 국수를 담다보면 이 가늘고 여린 가닥도 모아놓으면 그럴듯한 끼니가 된다는 것이 기특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쓰는 시도 그와 같았으면 좋겠습니다.

조금은 늦은 감이 있지만 저에게 건네진 바통을 힘껏 잡고 달려보겠습니다. 결승점이 없는 트랙이 없듯이 결과가 없는 노력은 없을 테니까요. 꼭 선두가 아니면 어떻습니까. 전광판엔 꼴찌도 기록되는 것이니까요.

그동안 뒤에서 든든하게 믿고 응원해준 사랑하는 남편과 네 딸들, 그리고 문혜원 아주대학원 지도교수님과 늦깎이 학생 응원에 부족해도 매일 칭찬해주시던 국어국문과 교수님들께 영광을 바칩니다.

끝으로 심사위원 선생님들 한분 한분께 저에게 이어 달려 보라고 바통을 건네주신 것에 대해 머리 숙여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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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국수 소재로 화려한 수사 없이 삶을 담백하게 빚어내

 

<농민신문>이라는 매체의 특성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예심을 거쳐 올라온 총 스무명의 시가 공히 놓치지 않고 있는 것이 있었다.

속도의 저편으로 밀려난 삶의 그늘과 소외의 풍경을 그려내고, 타자들에 대한 저버릴 수 없는 관심을 어떻게 상투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재구성할 것인가에 시선이 모아져 있었다. 그중에서도 <밀행> 외 4편, <고라니> 외 4편, <노루발> 외 4편, <국수> 외 4편의 응모자들을 최종심에 올려놓고 집중적인 토의를 했다.

소재에 밀착하면서도 시적 인식의 확대를 도모한 <노루발>과 <국수>를 주목했다.

<노루발>은 경쾌한 어조와 동화적 상상력이 돋보였으나 동봉한 작품들의 에코페미니즘적 모성 서사가 익숙한 회로를 맴돌고 있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국수>는 설명적 진술과 어색한 표현들에도 불구하고 동봉한 작품들의 안정감이 깊은 신뢰를 줬다.

특히 천연두를 <빗방울 화석>으로 치환한 비유의 참신함, 삶의 악천후를 품은 균열을 신체화한 <흙벽>의 신선한 묘사력, 문명의 맥을 짚은 <멸종의 거리> 같은 작품들은 당선작 못지않게 빼어난 시편들이다.

어쩌면 더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소재를 선택해 삶을 빚어내는 솜씨를 보며 우리는 시의 독창성이 어떤 유형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질감의 문제이기도 함을 알게 된다.

과잉된 감각들과 화려한 수사의 먼지를 벗겨낸 자리에서 ‘맑은 물에 헹군 국수발 같은 주름’처럼 담백하게 씻긴 말들이, 겨우 존재하거나 잔상으로만 남은 부재의 측근들과 늘 함께 있기를 바란다.

새로움을 애써 여의면서 발효돼 나오는 시는 그때 굳이 새로움의 강박에 시달리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심사위원 손택수, 나희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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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감 / 설현민

 

 

새벽 물때다 사촌들과 바지락을 캐러간다 이모를 도와야 했다 엄마, 엄마, 나는 한 번도 이모를 본 적 없는데요 가족이잖니 단숨에 알아차릴 거다

 

모래사장은 구덩이로 가득하다

저 안에서 움직이는 게 보이니 저기 너희 이모가 있잖아 움직이는 게 너무 많은걸요 네 이모처럼 움직이는 것은 하나뿐이란다

등을 돌려 앉은 엄마는 쇠갈쾡이로 발 밑을 푹푹 퍼올린다

 

나는 양동이를 끌어안고 움푹한 바닥을 들여다본다

모래 속에는 모래가 들어 있다

 

어린 사촌들은 껍데기를 손에 쥐고 땅을 헤집는다 또 다른 껍데기를 주워 자랑한다

 

바지락을 얼마나 더 캐야 하나요 노인들의 배를 채우기에는 아직 모자라구나

이모는 왜 그렇게 깊이 파들어 가죠 깊은 곳엔 먹을 게 없잖아요

네가 그렇게 태어났지 모래를 툭툭 털고 너를 꺼냈단다

 

바지락이 쌓여간다

나는 그것을 씻어 다른 양동이에 옮겨 담는다 빈 껍질을 골라낸다

아이들은 조개껍데기를 묻어 성호를 긋고

 

너는 어쩌면 이렇게도 다 커버렸구나 이젠 무엇도 몰라보겠구나

 

검은 천으로 양동이를 덮는다

내 입안에 서걱거리는 것이 들어있다

나는 이모가 엄마를 닮았다고 말했다 이모는 엄마보다 많이 늙어 있었다고

 

저기 모래를 뱉고 있는 것이 있다

나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다

 

 

 

 

[당선소감] "내 詩가 실없는 농담 돼 사람들이 덜 아프길…"

 

어릴 적 할머니의 세탁기에는 정말 많은 것이 들어 있었어요. 세탁기에 포도를 넣어뒀단다. 세탁기에 식혜가 있단다. 말을 이리저리 뒤섞은 할머니가 씻어놓은 것들이 좋아서 꺼내 먹으라는 목소리만 기다렸어요. 헷갈리는 말들의 마음은 언제나 마음에 듭니다.

잘 웃는 사람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제 시가 실없는 농담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햇살처럼 다정한 웃음을 나누는 사람들과 자주 함께할 수 있기를. 각자의 자리에서 시를 읽고 쓰는 모든 사람들이 조금 더 즐거워지기를. 조금 덜 아프기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씰룩거리는 입꼬리처럼, 마중을 나온 마음으로 함께 읽고 써 내려가겠습니다. 이곳에서 무얼 기다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웃게 될 일이 생기면 같이 웃을 수 있기를 바라고 있어요.

비밀인데…로 시작한 소식을 듣고 아버지는 비밀을 의심해야 한다고 엄숙한 척 말하면서 크게 기뻐했어요. 미소를 갑자기 삼킨 어머니는 사람의 일은 모르니 정말 조심해라, 속지 말거라, 수고했다고 덧붙였습니다. 정말 보이스피싱이 문제입니다. 동생은 오? 축하, 하고 말았어요. 사랑스러운 가족들이 열심히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파괴와 재생을 반복하는 학예회 동인들, 매번 다음에 만나자는 이야기만 해도 여전한 너희 덕에 문학하는 게 여전히 재밌어. 이따금씩 전화를 걸어와 안부를 확인해 주는 속 깊은 고향 친구들, 늘 그 자리에 잘 있어줘서 고맙다. 서로의 문장을 부대끼면서 응원을 아끼지 않던 친구들, 동기들, 학우님들, 원우님들에게 따뜻한 문장을 전합니다. 감사해요. 멋진 나의 선생님들께는 커다란 마음을 꽁꽁 뭉쳐 보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가 아닌 마음까지 탈탈 털어내 읽어주는 사람에게 빛나는 사랑을 전해요. 기꺼이 손 내밀어 준 모든 분들이 어딘가로 돌아가는 동안, 마을 앞에서 오래도록 손을 흔들고 있겠습니다. 건강하게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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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자신의 존재성 확인, 고백의 언어로 풀어내"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열세 분의 응모작 중 실험적인 작품이나 형식의 파격을 보이는 작품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 대상을 관조하면서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는 특성을 보여서 서정의 밀도와 품격을 유지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개별 작품에서 맞춤법에 어긋난 어구의 사용이 꽤 많이 눈에 띄었는데, 시도 한글 문장의 규범 안에서 창작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 점은 조심해야 할 것이다.

세 분의 작품에 시선이 집중되었다. '고래가 그래'는 응모 작품 중 드물게 생태학적 사유를 동원하고 있어서 문제의식의 진지함이 주목을 받았다. 고래 내장에 축적된 폐기물로 생태계의 위기를 표현한 착상은 새로웠지만 그 주제가 시적인 언어로 유연하게 형상화되지는 못하였다. '우리 집은 기상청 지부'는 아버지의 삶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하면서 그사이에 연민의 정서를 적절히 병치하는 솜씨를 보였고, 감정을 절제하고 대상과의 거리를 조절하면서 삶의 내력을 표현한 점도 뛰어났다. 그러나 아버지의 '기후'의 의미가 모호해서 공감의 폭을 확장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

'리빙 포인트' 외 2편을 투고한 분의 작품 중에서는 '리빙 포인트'보다 '해감'에 더 눈길이 갔다. '리빙 포인트'가 일상적 삶의 무료함을 다양한 형상의 교차를 통해 새롭게 표현하기는 했지만 그 다양함이 시상의 집중을 방해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비해 '해감'은 어릴 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평범한 경험을 통해 자신의 존재성을 확인하는 과정을 고백의 언어로 자연스럽게 풀어가고 있어서 그의 시적 재능이 앞으로 더 발전하리라는 예감을 받았다. 이에 '해감'을 당선작으로 밀며 축하의 말을 전한다.

 

심사위원 강은교, 이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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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의 찬 손이 이마를 짚어주다 / 백향옥

 

 

부풀어 오르는 흙이 좋아 맨발로 숲을 걸었다

바닷물에 발을 씻다가 만난 돌은

손바닥에 꼭 맞는 매끄러운 초승달 모양

 

열병을 앓을 때 이마를 짚어주던 당신의 찬 손

분주하게 손을 닦던 앞치마에 묻어 온 불 냄새, 바람 냄새, 놀란 목소리

곁에 앉아 날뛰는 맥을 지그시 눌러 식혀주던 손길 같은

 

차가운 돌을 쥐고 있으면 들뜬 열이 내려가고

멋대로 넘어가는 페이지를 눌러두기에 좋았는데

어느 날 도서관 대리석 바닥으로 떨어져 깨져버렸다

 

몸 깊은 곳에서 금이 가는 소리를 들었다

놓친 손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두 동강 난 돌을 잇대보았지만

깨진 돌은 하나가 될 수 없고

가슴에서 시작된 실금이 무섭게 자라났다

 

식었다 뜨거워지는 온도 차이가

돌 안쪽에 금을 내고 있었던 걸 몰랐다

 

이제 그만 됐다고 따뜻해진 돌이 속삭였다

 

그날, 달빛 밝은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 깨진 돌을 가만히 놓아주었다

달에게 돌려주었다

 

 

 

 

[당선소감] “두렵고 기쁜 마음으로 정진하겠다”

사는 일이 대체로 아슬아슬했습니다. 문이 닫히기 전 우체국에 겨우 도착해서 무사히 마감한 밤 공원엔 달이 밝았습니다. 코로나19 펜데믹으로 두렵고 애타던 한해가 저물어 갑니다. 아이들이 뛰어놀아야 할 운동장으로 제비꽃이 오고 개망초와 까마중이 자라고 느티나무만이 싹을 틔우던 불안한 시간이었습니다.

신춘이라는 높은 관문을 두드린 것만으로도 기뻤는데 당선 소식을 듣고 너무 놀랐습니다. 감격에 겨워 들에 나가니 이제 막 떠오른 실낱같은 초이틀 달이 아름다웠습니다. 나무와 달과 별, 강물 위에 썼다가 지운 수많은 문장에 이끌려왔습니다. 높고 아름다운 세계에 덜컥 들어선 두려움이 앞섭니다. 그만큼 가슴 가득 차오르는 기쁨이 커서 어느 때 보다 환하게 웃고 있습니다. 천진한 아이가 된 것처럼 좋습니다. 시 쓰는 일이 위궤양과 불면의 밤을 불러올지라도 지금은 잠시 기뻐하겠습니다.

어린 달이 자라나듯 시가 자라기를 기원합니다. 물처럼 색이 없지만 모든 빛으로 물드는 시를 쓰고 싶습니다. 경계 너머와 이곳의 겹침을 믿으며 세계의 아름다움과 비정함을 견디기 위한 노래를 멈추지 않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시가 이끄는 대로 끝까지 가보라던 김근 시인과 자신이 가진 목소리 그대로의 시를 써도 좋겠다는 격려와 함께 적확한 묘사, 첨예한 문장을 쓰도록 독려해주신 조정인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수줍고 어눌한 목소리가 가진 간절함을 듣고 손 잡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고개 숙여 감사의 절을 올립니다. 두렵고 기쁜 마음으로 정진하겠습니다. 시의 곁을 떠나지 않도록 붙잡아 준 시하늘과 시몰이, 길담서원 책여세, 산과 자연의 친구 우이령사람들과 이 모든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준 남편 재욱 씨와 혜림, 정호, 지연에게 감사하며 기쁨과 영광을 나누고 싶습니다. 목소리 없는 존재의 말을 전하는 시인이 되고 싶다는 바람과 함께 모든 생명의 평안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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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불교시의 미래 열어가길 기대”

올해도 불교신문 신춘문예에 대한 사부대중의 관심이 뜨거웠다. 반조(反照)의 시편들이 다수였고, 인과와 무상, 적멸을 노래한 시편들이 많았다. 그만큼 불자들의 응모가 많았다는 점은 뚜렷했다. 신행의 두터운 지층으로부터 돌올하게 솟은, 푸르고 서늘하고 생동하는 깨달음의 노래가 곧 불교시(詩)라는 생각을 갖게 했다.

마지막까지 살펴본 작품들은 ‘만다라화 어머니’, ‘파종’, ‘천 권의 책을 귀에 걸고’, ‘가로수 아래서’, ‘돌의 찬 손이 이마를 짚어주다’였다. 구태여 각각의 구실을 찾고자 할 뿐이지 이 작품들은 어느 것을 당선작으로 내놓아도 손색이 없었다.

‘만다라화 어머니’는 처염상정의 꽃인 연꽃을 어머니의 생애에 견준 시조 작품이었다. ‘예토’, ‘화엄’과 같은 시어를 직접적으로 사용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파종’은 아름다운 서정을 담은 산문시였다. 한 알의 씨를 뿌릴 구덩이 그것이 곧 우주 생명 세계라는 인식에는 공감을 했지만, 파종의 풍경이 가족사와 연결되는 대목은 자연스럽지 못했다.

‘천 권의 책을 귀에 걸고’는 아버지의 돋보기 그것을 연륜과 지혜의 안목 자체라고 바라본 작품이었다. 좋은 작품이었지만 앞에서 뒤에 이르는 동안 시행이 반복된다는 느낌을 갖게 했다. ‘가로수 아래서’는 인연이 된다면 후속작들을 좀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고심 끝에 ‘돌의 찬 손이 이마를 짚어주다’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삶의 열기를 식혀주는 찬 돌에 대한 생각을 섬세하게 담되, 옛일을 함께 회상하고 있는 작품이었다. 특히 ‘앞치마’에 묻어 있는 것이 불과 바람의 냄새뿐만 아니라 ‘놀란 목소리’라고 쓴 대목은 감각 내용의 확장을 보여주는 것인데, 이러한 경계가 없는 감관의 활용은 대체로 신예가 갖기 어려운 덕목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게 했다. “깨진 돌”을 달의 빛 속으로 방생하는 대목도 지극히 아름답고 감동적이었다.

당선을 축하하며 앞으로 불교시의 미래를 열어가길 기대한다. 

 

심사위원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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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집 / 유수진 

 

 

아침이라면 모를까

저녁들에겐 다 집이 있다

주황빛 어둠이 모여드는 창문들

수줍음이 많거나 아직 야생인 어둠들은

별이나 달에게로 간다

 

불빛이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건

다 저녁의 집들이다

 

한 켤레의 염치가 짝짝이로 돌아왔다

수저 소리도 변기 물 내리는 소리도 돌아왔다

국철이 덜컹거리며 지나가고 설거지를 끝낸 손가락들이

소파 한 끝에 앉아

어린 송아지의 배꼽, 그 언저리를 생각한다

 

먼지처럼 버석거리는 빛의 내부

어둠과 빛이 한 켤레로 분주하다

저녁의 집에는 온갖 귀가들이 있고

그 끝을 잡고 다시 풀어내는 신발들이 있다

 

적어도 창문은 하루에 두 번 깜박이니까 예비별의 자격이 있다

 

깜박이는 것들에겐 누군가 켜고 끄는 스위치가 있다

매번 돌아오는 관계가 실행하는 수상한 반경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있고

스위치를 딸깍, 올리면 집이 된다

 

별은 광년을 달리고 매일 셀 수 없는 점멸을 반복한다

그러고 나서도

어수룩한 빛들은

얕은 수면 위로 귀가한다

 

 

 

[당선소감]

 

수변길로 산책을 나갔습니다. 잔잔한 물결 위로 불빛들이 도착하고 있습니다. 어룽어룽 빛들이 물결 따라 흔들렸습니다. 징검다리로 올라서니 수변길에서 보던 빛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빛들은 조금 옆으로 자리를 옮겨 제 몸을 다해 점멸하고 있습니다. 징검다리를 하나씩 건널 때마다 빛들이 자리를 옮깁니다. 이쪽과 저쪽을 다니며 수면 위에서 반짝이는 빛들을 오래 봤습니다. 집 쪽으로 고개를 돌려 전등을 환하게 켜둔 방을 헤아렸습니다. 아파트엔 불 켜진 방이 많았습니다. 저기 어디 내 방에도 불이 켜졌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따스해졌습니다. 밤 기온이 영하라는데 콧속으로 들어오는 공기가 달았습니다. 불이 환한 창문들 사이로 듬성듬성 아직 빛이 귀가하지 않은 방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수변길을 오래 걸었습니다.

가끔 질문을 받습니다. 글을 왜 쓰냐고, 시를 왜 쓰냐고. 그럴 때마다 막막하고 난감합니다. 왜 쓰는지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도 답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한쪽엔 흰 종이를 펼쳐 둔 채 다른 쪽에 한글파일 화면을 열어 두었습니다. 답을 찾아가는 일을 계속하겠습니다. 귀가를 기다리는 창문들에 관심을 두겠습니다. 수면 위에서 점멸하는 별의 끝을 잡고 풀어가겠습니다. 여정의 길목마다에서 스위치를 찾겠습니다. 스위치를 딸깍, 올리는 일을 주저하지 않겠습니다. 어수룩한 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과 전북일보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내 고향, 엄마 보고 싶어요. 아버지, 당신의 등을 존경합니다. 아들아, 딸아, 사랑한다. 남편에게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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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사유의 깊이가 돋보여

 

예심을 거쳐 본심에 열한 분의 작품이 올라왔다. (응모자의 인적 사항이 없이 응모 번호만 응모작 맨 앞에 적혀서 보내왔다). 심사위원들은 코로나19로 만나지는 못하고 각자 좋은 작품을 뽑기 위해 숙독을 하고 다시 각각 세 분의 작품으로 압축했다. 본심에서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없는 것은 없다」 외 2편, 「흙냄새 향수」 외 4편, 「저녁의 집」 외 3편이었다. 마지막까지 논의된 세 분의 작품들은 모두 소위 신춘문예 풍조에 물들지 않고 자신들만의 목소리로 시의 위의와 진정성을 지키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했다.

먼저 「없는 것은 없다」 외 2편의 작품은 대담한 언어 구사와 상상력이 돋보였다. 그러나 언어를 부리는 기교가 겉으로 너무 드러나면 소통과 감동에서 약간 멀어진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비록 오타였다 하더라도 “맡겨”를 “맞겨”로 쓴 실수는 마지막 퇴고나 맞춤법에 신경을 쓰지 않았구나 하는 오해를 불러올 수도 있음을 알아주면 좋겠다. 「흙냄새 향수」 외 4편에서는 시적 진술과 이미지를 이끌어가는 힘이 좋았다. 그러나 일상을 읽는 독법이 평이함으로써 참신한 감각, 즉 신선미가 떨어진 듯하여 아쉬웠다. 「저녁의 집」 외 3편은 요즘처럼 세상이 코로나19로 어수선할 때 너무나 소중해진 당연한 일상을 따뜻하게 보듬고 위로가 되는 힘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차분하면서도 치열한 시적 사유와 언어를 다루는 능력이 돋보인다. 동시에 다른 응모작들도 고른 수준을 견지함으로써 앞으로 좋은 시인이 되리라는 믿음을 주었다. 그러기에 심사위원들은 「저녁의 집」을 최종 당선작으로 결정하자는 의견이 서로 일치했다.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심사위원 허형만 시인, 김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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