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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킹 / 유정

 

 

잘 지내나요?

당신의 긴 속눈썹이 생각나요

속눈썹 너머에는 무엇이 있나요?

당신은 그리움이 생기면 발뒤꿈치를 들고

먼 곳의 바다를 바라보곤 했죠

아직도 발뒤꿈치를 들고 있나요?

툭 누군가 건들면 당신은 수평선 쪽으로 쓰러지고 일어나곤 했어요

듣고 있나요? 항상 나의 속삭임이 닿을까 궁금해요

나는 그저 당신이 입었던 옷을 버릇처럼 떠올릴 뿐이에요

그때 당신의 옷에 붙은 가격표를 찾고 있었지요

가격을 확인하면 당신의 눈동자가 흔들렸어요

울음인지 웃음인지 모를 표정 속에서

나는 높게 서 있는 유리창을 닦으며 지상으로 내려와요

당신은 자신의 알몸을 본 적 있나요?

나도 오늘 당신처럼 옷을 갈아입어야 했어요

건물 외벽에 튀어나온 못에 작업복이 찢겼거든요

이런 날, 집으로 돌아오면

오래된 인형처럼 누워

당신보다 먼 바다를 꿈꾸며 입술을 깨물곤 해요

당신도 뒤척이나요?

문득 당신의 눈가에 말라붙은 마스카라가 보이네요

불붙지 않는 목재처럼

처음부터 우리는 손을 잡아도 함께 바다로 갈 수 없었군요

아무렇지 않게

우리 사이에 나뭇잎 하나가 흔들리고

마지막 인사 대신

오늘도 허공에 떠서

몰래 유리창에 손자국을 남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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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창밖 거리를 향하는 마네킹은 우리의 자화상

 

신인은 매너리즘에 물드는 사회와 시단에 문제를 제기하고 새로움을 제시하는 사람이다. 새로움의 형상화와 작품 선정은 우리에게 삶을 투영하고 대입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사적 선물이며 사회적 공식이다.

 

본심에서 경합한 반려의 문장눈잣나무는 안정된 시상의 호흡을 보였지만 처음부터 예기한 결과가 나타나면서 선자들의 마음에서 멀어졌다. 당선작은 적어도 한 편의 시 속에 입체적이면서 시공간적이고 사회적이면서도 심리적인 갈등을 융합하여 관통하는 미학의 구조를 보여야 한다.

 

이런 면에서 유정 씨의 마네킹은 현실적 슬픔과 포기할 수 없는 생의 그리움을 한계와 단절이라는 복선 위에 손자국의 흔적을 몰래남겼다. 그것이 설령 미결과 얼룩이라 할지라도 쉽게 해결되고 소통되지 않는 삶과 모순을 반영한 것 이상을 넘어 마음에 오래 남을 시적 이미지를 그리는 데 성공했다고 판단했다.

 

옷이 팔려나가면 새로운 옷을 걸치고 다른 가격표를 붙이는 마네킹그러한 상실과 희생을 넘어 다시 창밖의 거리를 향해야 하는 화자의 절실한 결의와 희망이 곧 우리 모두의 자화상의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수평선에서 먼 어느 시가지의 코너에 서 있는 이 마네킹의 꿈은 하나의 선물이자 시인이 내재화한 사회적 공감이다. 유정 시인은 인내하면서 시의 길을 잘 살펴 밟아가길 바란다.

 

심사위원 고형렬·이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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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개질을 해요 / 강나무

 

당신의 목소리는 코바늘 8호가 적당해요

가볍게 날리는 분홍의 기억 한 뭉치를 골랐어요

보풀처럼 번지는 무심함을 당겨 한 코에 한 번씩 입김을 불어 넣어요

일정한 텐션을 유지하려고 수시로 미간의 주름을 살피죠

오늘 본 영화처럼 촘촘했다가 느슨해지는 건 좋은 결말이 안 나요

뒤꿈치를 들던 첫 입맞춤처럼 한 단 한 단 키가 늘어나요

짧은뜨기는 기둥코 하나를 세워서 더디지만 튼튼하고

한길긴뜨기는 기둥코가 두 개라서 빠르지만 힘이 없어요

여러 길목에서 서성거리는 마음을 정하는 일은 정말 어려워요

몇 번의 이별을 겪고 나면 어느새 겨울에 당도하죠

실밥처럼 눈이 내리면 자꾸 옆을 보게 돼요

여름에는 얇은 꿈으로 성글게 잠을 떠서 뒤척이는 세상을 덮어줘요

낮에 꺼내지 못한 색색의 이야기들로 여러 개의 별을 뜨며 밤을 견디죠

별들을 이어붙이며 멀리서 혼자 깜박거리는 당신을 생각해요

한 단을 마무리하는 빼뜨기는 문장의 마침표에요

숨을 몇 번 쉬었는지 강약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게 뱉어버린 고백 같아요

마음이 식으면 미련 없이 줄을 풀지요

나는 처음과 달리 꼬불꼬불 엉켜 있어요

다시 시작해야 하지만 괜찮아요

사슬뜨기의 콧수를 세다 보면 다른 생각이 안 나요

비구름 속에 숨은 하늘색 실을 뽑아 네트가방을 떠요

숭숭 뚫린 구멍들 속으로 팔딱거리는 물고기들을 잡았다가 놓아준다고 상상해요

빠져나가는 물고기 지느러미에 당신의 기억을 달아놓아요

가방 손잡이는 웃고 있는 나의 입을 닮았죠

 

[당선소감]

 

낯선 곳이었습니다. 얼마간 걷다가 만나는 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귀가할 생각이었습니다. 워낙 길치인지라 평소에 길을 잃고 헤맨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날도 방향을 잃은 체 도로 옆 나무와 들풀들이 우거진 긴 흙길에서 무작정 걸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일부러 길을 잃어버린 아이처럼 두근거림과 두려움이 공존하던 시공간에서 당선 소식을 알리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뭉클한 각본 같아 너무 비현실적이었습니다.

시로 밥을 하고 국을 끓이고 시로 꿈을 꾸고 시로 울기도 한 긴 시간들이 떠올랐습니다. 걷다가 만난 작은 나무의 열매를 터뜨려 보랏빛으로 물든 손바닥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처음 걷는 길과 처음 본 열매의 흔적 그리고 첫 당선 소식, 한 번도 본 적 없는 빛나고 선명한 길 위에 제가 서 있었습니다.

시와는 이제 서로 알아가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이보다 즐거운 일이 또 있을까요? 이 즐거운 일에 김유정이라는 이름과 함께 동행할 일이 사실 너무 두렵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얼마나 벅차고 행복한 운명인가요?

멀기만 한 시의 길에 무지개를 선물해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경림 선생님,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빼곡히 적은 노트를 들여다보면서 방향을 잃을 때마다 이정표로 삼아 여기까지 왔습니다.

박지웅 선생님, 그 감사함을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당부하신 말씀처럼 초심 잃지 않고 제 시를 마음껏 쓰겠습니다.

늘 든든한 후원자 병도 씨 그리고 륭, 존재만으로도 힘이 되었던 가족과 친구들, 사랑하는 인천 새얼문학회 문우들과 오래오래 이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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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심사위원 이상국, 고형렬

 

본심에서 거론된 작품은 「재림」 「새들은 빈집에 와서 죽는다」 「옥상 언니들」 「뜨개질을 해요」 등이다.

오브제와 발상, 형식과 목소리가 각각 다른 열여덟 편에서 「뜨개질을 해요」를 흔쾌히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당선작은 일상 속에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이미지들 중에 자기 것에 눈을 맞춰서 알아내고 그것을 마음의 거울에 비춰 ‘네트가방’과 같은 한 편의 아름다운 시를 뜨개질했다.

기억할 만한 현재적 의미와 더 나아가서는 시적 미래의 약속까지 제시한, 예컨대 “몇 번의 이별을 겪고 나면 어느새 겨울에 당도하죠/(중략)/나는 처음과 달리 꼬불꼬불 엉켜 있어요/다시 시작해야 하지만 괜찮아요/사슬뜨기의 콧수를 세다 보면 다른 생각이 안 나요”의 시행들은 간결한 치유와 위안의 힘을 가졌다.

얼굴 앞에서 움직이는 코바늘의 침묵과 시인의 내면 응시가 부딪치는 길항의 울림이 빛났으며 시적이라 할 만한 것의 어떤 조화를 빚어냈다. 청유형과 고백체 화법의 「뜨개질을 해요」는 말이 끊어진 팬데믹 속에 갇힌 마스크 시대가 발견한 성찰과 인내의 기쁨이자 이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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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류 연연해 안타까워, 수상자 없음 결론”

 

 

당선작 없음

 

시는 자기 마음대로 쓴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쓰는 것이 아니다.자유롭게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에 더욱 조심스럽고 진지하게 말을 써야한다.이번 본심에 올라온 작품 중에는 스스로만 아는 언어로 표현된 작품이 많았다.전위적인 작품으로도 평가하기 힘들었고 산만하고 흐트러진 부분이 많았다.시에도 유행성이라는 것이 있다.사람들이 너무 시류에 연연하는 것 같다.이해가 어려운 전위성 속에서도 시 정신과 인간의 사유나 시대를 반영되기 마련인데 대체적으로 가독이 불가하거나 의미,문학성을 찾아보기 어려웠다.특히 젊은 사람들은 문학적 시류에 민감한 부분이 있지만 이것을 좋다고 하면 시가 망가질 수도 있다.때로는 절제가 필요한 부분이 필요하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함부로 써내서 당선되기 보다는 경각심이 필요하지 않을까 해서 당선작을 뽑지 않기로 했다.말들이 모여 행이 되고 낱말 하나 하나와 그것들의 연결이 중요하다.꼭 이렇게 쓸 수 밖에 없다는 필연성이 있어야 한다.납득이 돼야 감동이 나온다.

심사위원 정현종·이상국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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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도 될 줄 알았다 / 지이산

 

석 달 열흘쯤 차만 우리면 뭐라도 될 줄 알았다

꽃 소식 지나가고 눈 덮인 산 바라볼 때까지

차만 우렸다 넉 달쯤 차만 우리면 뭐라도 될 줄 알았다

엽저가 폭설보다 높게 쌓이도록 차만 우렸다

1년이 지나갔다 누구는 미쳤다고 하고, 누구는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누구는 같이 하자고 하고, 누구는

모른 척 했다 그래도 차만 우렸다

 

차를 우려 마시면 찻물이 씻어줄 거라 믿었다

몸 안에 가득 찬 울음이 어디로든 빠져나올 거라 믿었다

꽃도 못 본채 1년하고도 석 달이 지나갔다 감자 꽃 하얗게

피었다는 소식에 다시 찻물 올려놓았다 찻물 끓는 동안

다구를 닦았다 돌돌 말린 찻잎 넣고 물을 부었다

대나무 향이 올라왔다 적벽대전 하루 전 날처럼

차는 마시지 않고 있다 바람만 바라보았다

 

차는

마시는 일이 아니라 적셔내는 일

차는

마시는 일이 아니라 품는 일

차는

마시는 일이 아니라 바라보는 일

차는

마시는 일이 아니라 노는 일

입으로 마시는 일은

가장 나중에 하는 일이라는 것을

하늘에서 뭐라도 뿌리는 날

 

 

 

[당선소감] 

 

"늘 차와 함께 시처럼 살겠다"  지이산

 

 

찻물부터 끓입니다.지독한 폭염 안에서도 차를 우렸으니,당선 소식 받고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차를 우립니다.못 된 슬픔과 맞서려고,한 사람 마음 안에 들어가고 싶어 위리안치 스스로 유배시켜 놓고 유배일기 쓴지 5년.1300편 넘는 유배일기는 늘 차와 함께한 시간이었습니다.그러고 보니 1001번 째 쓴 당선작 ‘뭐라도 될 줄 알았다’도 차 우리는 이야기입니다. 

시에서도 드러나듯 차 우리는 시간은 참 좋은 친구입니다.17년 전 어머니 수의 안에 꼬깃 넣어드린 원고지 생각이 납니다.지금은 다 지워졌을 테니 이제 큰 소리로 읽어드려야겠습니다.심사해주신 분이 정현종·이상국 시인이라는 말에 더없이 기뻤습니다.고맙습니다.늘 되뇌었던 다짐으로 시처럼 사는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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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사평]

 

“문인으로서의 첫 발걸음을 뗐으니 앞으로 열성적인 작품활동에 나서겠습니다.”

2018 김유정신인문학상 수상자들이 문학의 계절 가을에 선배 작가 김유정의 혼이 깃든 춘천 실레 마을에서 등단의 기쁨과 다짐을 밝혔다.수상자들은 19일 열린 김유정신인문학상 시상식에서 ‘작가’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아들었다.올해 김유정신인문학상에 응모된 작품은 단편소설,시,동화 등 3개부문에서 총 1261점이 접수돼 전국 신인문학상 중 최고수준을 기록했다.부문별로는 소설 293편,시 852편,동화 116편이 등단의 꿈을 품고 접수를 마쳤으나 이 중 단 3편만이 심사위원의 손을 통과해 독자를 만났다.수상자들은 이날 수상소감을 통해 작가라는 무게감을 짊어지고 좋은 글을 쓰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단편소설 부문에 ‘판타스틱 엘라’로 상금 1000만원을 받은 정지윤 씨는 “글을 읽어주시고 뽑아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앞으로 좋은 글을 쓸 수 있도록 노력하고 정진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뭐라도 될 줄 알았다’로 시부문 수상자로 선정된 지이산(본명 지용식)씨는 “1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말이 시인에게도 통하는 것 같다.좋은 심사평을 남겨주신 만큼 큰 그림을 그리는 시를 써나가겠다”고 말했다.

‘딱풀마녀’로 동화부문 수상자로 선정된 신전향씨는 “새로운 시작의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분들께 감사드리며 아이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김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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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의 둥지 / 안광숙

 

땅속 깊은 곳까지 봄을 심은 건 누구일까

산책 나온 달이 갓 출산한 감자꽃에 머물다 가는 밤

하얀 스위치 같은 저 꽃잎을 켜서 줄기를 타고 내려가면

알 밴 감자들이 세들어 살고 있을거야

땅속 환하게 어둠을 불 밝히며

도란도란 뿌리내린 새끼감자들이 있을거야

둥근 알들끼리 툭, 하고 어깨를 부딪혀도

상처가 나지 않아 마데카솔이 필요없는 땅속 마을

날카로운 아카시아 뿌리가 신경줄기를 건드려도

거참, 너털웃음 한번 웃고 나면

맛나게 풀리고마는 순박한 이들의 터,

저 깊은 땅 밑에도

흙으로 막걸리를 빚어 미소를 틔워주는 지렁이가 있고

짠눈물과 더 고소하게 퍼져가는 사랑이 자라난다

언제부터인지 내가 서 있는 땅이 꼬물거린다

땅속의 소식을 알려주듯

갈라진 뒷굽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 올라오는

따스한 이야기가 사는 마을

장난치던 바람이 뿌리혹박테리아를 빠져나오는 밤,

아직 동화가 살아 있는 지하 마을에는

통통하게 살찐 봄이 감자를 키우고 있을거야

발고랑속, 빼곡한 어미들이

포슬포슬 알전구를 켜고 아이들의 구겨진 단잠을 다려 펴주겠지

새끼달이 강물 속에 태어난 지 한참 지난 오늘

노랗게 여물어가는 아랫마을,

온통 깜깜해서 더 눈부시게 익어간다

 

 

[당선소감] “가슴 속 구멍에 차곡차곡 시 쌓아”

 

저녁밥을 지으면서 친정엄마를 떠올렸다. 털곰팡이균의 침범으로 한쪽 눈을 도려내고 다시 유아기로 넘어오신 엄마. 얼굴에 작은 우물 하나 품고 사시는 당신.

 

그때부터 내 가슴에도 동그란 구멍하나 생겼다. 무언가를 채우려고 할수록 자꾸만 깊어지는 구멍, 허기진 그곳에 시들을 차곡차곡 쟁여 놓았다. 엄마에게 도착하는 내 언어는 언제나 핑계들로 가득했다. 이제 그 변명들을 한소쿠리 담아 엄마의 식탁에 올려 드리고 싶다. 부족한 시를 뽑아주신 정현종, 이상국 심사위원께 감사드린다. 낮은 자세로 열심히 쓰겠다. 뼈를 열고 활짝 쏟아부어 가르쳐주신 박종현 스승님, 시우님들에게도 감사드린다. 어머니 김삼순여사, 친정식구들, 남편 이용석, 착한곰 이영준, 예쁜딸 이지안. 부족한 한 여자를 보듬어주어 감사인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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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긴 호흡 살아있는 행간의 숨결 탁월”

 

본심에 올라온 작품 중 유영삼의 ‘그믐’, 김정희의 ‘수국’, 김도형의 ‘수목장’ 그리고 안광숙의 ‘감자의 둥지’가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그중 ‘그믐’과 ‘수국’은 전통 서정시의 향기를 지니고 있었으나 본인들의 여타 작품과의 결이 달랐고 ‘수목장’은 시의 폭이 협소했다. 이에 따라 비교적 긴 호흡과 행간의 숨결이 살아있는 ‘감자의 둥지’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시는 언어로 쓰여지지만 언어가 전부는 아니다. 당연히 언어의 배후인 사유와 지적 자산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응모작품 대부분이 지닌 사유의 불구성과 자기도취적 요설, 그리고 언어 곡예는 요즘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지닌 공통적 폐단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많은 언어를 동원했음에도 작품들이 관념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생명력의 문제다. 그것은 정신이 건강하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고 확대하면 우리 사는 세상이 건강하지 않다는 말이기도 하다. 

 

대중문화적 교양이나 감수성 정도로 시가 된다고 믿는 것은 우리 서정시에 대한 일종의 폭력일 수 있는 것이다. 오랫동안 시를 쓰는 사람들도 문학이 심각할 필요가 있느냐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살기도 힘든데 엄숙함은 우리를 부담스럽게 한다. 그렇다고 문학이 삶을 가볍고 유희적으로 바라봐도 좋다는 말은 아니다. 

 

축하와 함께 시인을 꿈꾸는 이들의 고투에 박수를 보낸다.

 

- 심사위원 정현종·이상국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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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물상의 봄 / 어향숙

 

 

어린 날의 보물창고 필순이네 고물상

 

마당에는 꿈을 재던 커다란 저울이 있고, 그 옆 벽에는 깨진 거울이 걸려있어 곧잘 우리의 마음을 들키곤 했다 버려진 뾰족구두에 헐렁한 원피스를 걸치고 절뚝거리며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볕이 잘 드는 모퉁이에 쪼그려 앉아 배는 부르지 않아도 빈 깡통들이 차려주는 밥상을 소리 내어 맛있게 먹었다 가끔 엿을 고던 가마솥을 빡빡 긁어 입천장에 붙이고 그 달콤한 맛에 찐득이는 손으로 자주 솥뚜껑을 열었다

 

양손에 빈병 하나씩 들고 아이들이 코를 훌쩍이며 뛰어왔다 담 밑에서 별꽃들이 눈을 반짝이며 기다려주었다 훌쩍 자란 우리 키 만큼 나팔꽃이 담벼락을 타고 올랐다

 

고철더미에 엉덩이를 걸친 금성흑백 텔레비 위에서 겉표지가 떨어져 나간 순정만화를 읽었다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던 캔디와 나의 첫사랑 테리우스를 만났다

 

마당가 민들레꽃은 자꾸 결말을 재촉했다

 

납작 엎드려 우리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가슴이 부풀 때마다 푸른 하늘로 꽃씨를 날려 보냈다 그 꽃씨를 따라 우리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당선소감] “시인·독자 즐길 수 있는 시 쓰고 싶어

 

가끔 시간을 가로질러 어린 날의 필순이네 고물상에 가곤 합니다. 그곳은 지금도 내 상상력의 놀이터입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도 늘 생생한 모습으로 있어서 좋습니다. 신나게 놀다 보면 창문으로 새벽이 들어와 옆에 서있을 때가 많습니다. 힘들지만 즐거운 일입니다. 앞으로 시인도, 독자도 함께 공감하며 즐길 수 있는 시를 쓰고 싶습니다.

 

 

 

[심사평]

 

 

 

문학은 대체적으로 인간과 그 삶을 표현하고자 한다.그러나 대부분의 응모작들에게서 사람의 체취와 삶의 진정성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있다 하여도 피상적이거나 어설픈 수사에 불과할 뿐. 이를테면 살아가는 일에 대한 사랑이나 그리움은 보이지 않았다.

 

로댕의 의자는 언어에 대한 단련이 상당했으나 여타 작품들이 그것을 도와주지 못했다.당선작인 고물상의 봄은 어떤 기시감이 느껴지기도 했으나 사물들이 환기시켜주는 삶의 구체성이 돋보였다. 다만 추억과 그리움에만 머문 생각을 좀 더 확장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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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사이버대학교 문화창조대학원 미디어문예창작전공을 졸업한 어향숙(사진, 11학번)씨가 '2016년 김유정 신인문학상'에서 시 부문('고물상의 봄')으로 수상했다.

 

서울 동대문구에서 10여 년 동안 약사로 일해 온 그는 신인문학상을 수상하기 이전에도 대한약사회의 '제3회 이가탄 한국약사문학상'과 서울시약사회의 '제1회 한독문학상'에서 수상할 만큼 탁월한 시적 재능을 드러냈다.

 

수상소감으로 그는 "사람들에게 효험을 주는 시를 쓰고 싶다. '생각한 대로 길을 걸어가라'고 북돋아주는 것 같아 무척 기쁘다. 프랑스 철학자이자 시인 가스통 바슐라르가 '시는 시인의 것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것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독자와 함께 공감하고, 즐길 수 있는 시를 쓰고 싶다"고 밝혔다.

 

그의 수상작인 '고물상의 봄'이라는 시는 어린 시절 단짝 친구 명숙이네 고물상집을 배경으로 초등학생 때의 추억을 담았다. 미디어문예창작전공을 졸업하기 전까지 어향숙 졸업생은 약 100편의 시를 써놓았다. 그동안 써온 시로 문학상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었고, 올해 김유정 신인문학상 수상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그는 "약사로 일하면서 몸과 마음이 가장 힘들고 지쳤을 때, 시를 쓰게 됐다"며 "시 몸과 마음을 치료하는 약"이라고 말했다.

 

시를 쓰면서 시를 좀 더 체계적으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약사로 일을 하면서도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공부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경희사이버대 대학원 미디어문예창작전공에 입학했다"고 입학한 배경을 밝혔다.

 

미디어문예창작을 전공하고 나서 어씨는 사람과 사물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됐다. 김기택·이봉일·홍용희 교수 등에게서 문학 전반에 관한 깊이 있는 강의를 들을 수 있었고, 온·오프라인 세미나 역시 실력을 쌓는데 큰 도움이 됐다.

 

졸업 후에도 전공의 온라인 세미나에 참석해온 그는 교수진의 첨삭 지도를 받으며 '2016년 김유정 신인문학상'을 준비할 수 있었다. 전공 스터디 모임인 '서지', '수다예찬'에서 졸업 후에도 꾸준히 참여해 재학생·졸업생들과 교류하며, 서로 다독이면서 시를 써나갈 수 있었다.

 

좋아하는 작가와 책으로 프랑시스 퐁주의 '테이블', 조광제의 '주름진 작은 몸들로 된 몸', 롤랑 바르트의 '텍스트의 즐거움', 허연의 '오십미터'·'불온한 검은 피'를 꼽은 어씨는 앞으로의 계획으로 "시 창작에 열중할 것이다. 약사들을 위한 글쓰기 강의를 하고 싶다. 기회가 되면 독자들과 시를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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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품인생 / 김상현

 

내가 거품이 많다고?

맞아, 내 생각들은 피지(皮脂) 많은 지성이니까

 

그대들의 생각은 신선한가?

종이컵 가득 든 삼겹살 기름 같은 생각들

빨대로 불면 부글부글 거품이 일지

그대들의 거품, 그대들의 생각들

더 높이 더 많이,로 피지를 재배하는 그대들

수명이 연장되니

이제는 더 멀리,로 피지의 이모작을 하는 그대들

거칠고 윤기 없는 생각들, 검은 양복에 내린 하얀 재들

거품이 필요한 거지

 

즐거운 나의 샴푸는

내 머리 위에 수국(水菊) 송이를 피워 올리지

모발 틈틈이 하얗게 서리 맞은 생각들

손가락 쟁기로 갈아엎으면

뽀글뽀글 뽁. 뽁

옹알이 거품마냥 피어오르는 거지

이를테면 돈 냄새 나는 푸석한 생각들

동전크기만큼만 샴푸를 덜면

꽃망울 뽁. 뽁 터지며 피워 오른다는 거지

 

나는 거품의 인생

하루 두 번 생각을 감지

최적의 빛 반사율을 만들어주어

싱그러운 생각이 치렁치렁하지

 

나와 함께 샴푸하는 그대여

어때, 수국으로 피어오르는 느낌, 개운한가?

 

 

 

[당선소감]

 

어제 형과 문자를 주고받았다.

형 글이 될 듯 될 듯하다가도 끝내 무너지고 말아. 아무리 늦게 자도 빨리 눈을 뜨게 돼.

잠이 오지 않는다. 오지 않는 나의 잠을

누가 대신 자는가.

어제 형과 문자를 주고받았다.

형 글이 될 듯 될 듯하다가도 끝내 무너지고 말아. 아무리 늦게 자도 빨리 눈을 뜨게 돼.

잠이 오지 않는다. 오지 않는 나의 잠을

누가 대신 자는가.

남의 꿈은 잠의 평화이고

나의 잠은 잠의 죽음이라고

남의 잠은 잠의 꿈이고

나의 잠은 잠의 현실이라고

 

- 오규원< 남들이 시를 쓸 때> 중

 

시는 정말 어려워. 천재적 재능 따위는 세상에 없어. 다 노력이었다는 군. 그럼에도,그럼에도 이 시점에서는 큰 계기가 필요한데,당선 같은 선물 말이야. 하지만 실패가 이젠 밥과 같아. 아무튼 고마워. 형.

 

그리고 오늘. 두 손바닥에 듬뿍 밀크로션을 덜고는 뺨을 때릴 찰나,대중목욕탕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당선 소식이었다. 요강에 폐결핵의 피를 한 움큼씩 토하면서도 죽기 직전까지 펜을 놓지 않았던 29세의 김유정을 생각해본다. 닭 30마리와 살모사 구렁이 십여 마리를 달여 먹고라도 일어서려 하였던 그 창작열.

 

뜻 깊은 상을 받게 해주신 심사위원님들께 참으로 간절하게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이 일을 계기로 더 우직하게 나아가겠습니다. 아울러 작가가 꿈인 제가 늦깎이로 이 세계에 뛰어들었을 때 아둔한 필력으로 끼친 폐가 많기에 우석대 문창과 교수님들께 엎드려 절 올립니다. 안도현 교수님,누군가를 바라볼 수 있어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나의 가족과 문창과 문우들 그리고 <달려라 검정분필> 제자들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심사평] 과잉된 언어·복잡한 수사 아쉬워

 

본심에 올라 온 10명 50여 편의 작품 중 김상현씨의 ‘거품 인생’을 당선작으로 하는데 기꺼이 합의 했다. 우리는 동전만한 샴푸 한 방울로 머리를 수국처럼,생각을 구름처럼 일게 할 수도 있다. 인생은 거품 같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거품은 우리를 꿈꾸게 하고 마냥 부풀린다. 그런 상상의 연관성들이 거품처럼, 혹은 샴푸 후의 개운함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응모작들이 나름대로의 개성과 고심의 흔적을 가지고 있었으나 대부분 요즘 시의 유행적 폐단에서 멀리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언어의 과잉이나 수사의 미로를 힘들게 통과하고 나서도 그 뒤에 아무 것도 발견할 수없는,읽기에 머리 아픈 시들의 강한 전염성에서 김유정 신인문학상 공모도 예외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일언이 폐지하면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말이다. 물론 세계의 존재양태나 삶의 양식 또한 과거에 비해 복잡해졌으므로 이를 표현하고자 하는 언어와 표현양식도 달라져야 함은 상식에 속한다. 그러나 읽어서 즐겁고 읽어서 서러운 시의 본령은 변하는 게 아니다. 결국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게 시라면 그것은 대중으로부터 시를 빼앗는 일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나머지 말은 고은 시인의 ‘한 충고’라는 시로 대신했으면 한다.

 

‘시들이/그 이상의 시들을 막는다/시들이/그 이후의 시들을 막는다//시야 시야 파랑시야//시의연혁/시의 패션/시의 권위 백년 가까스로 벗어나//그대의 시 벌벌 떨며 막 태어나 혼자이거라.’

 

- 심사위원 정현종·이상국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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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민일보와 김유정기념사업회가 공동 주최한 ‘2015 김유정 신인 문학상’소설 부문에 이루다(38·경기 남양주시)씨의 ‘미루나무 등대’ 작품이 당선됐다. 또 시 부문에 김상현(47·전북 익산시)씨의 ‘거품인생’이,동화 부문에는 김나은(35·경기 용인시·본명 김혜정)씨의 ‘나무피리’가 선정됐다.

 

단편소설 ‘미루나무 등대’는 원전마을을 둘러싼 주민들 간의 갈등에 다문화가정의 문제를 녹여낸 작품으로 초등학생 소녀를 내세워 사회문제를 바라보는 눈높이를 낮게 설정해 오히려 어른들의 위악을 부각시킨 점이 높게 평가됐다.

 

시 ‘거품인생’은 “인생은 거품 같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거품은 우리를 꿈꾸게 하고 마냥 부풀린다. 그런 상상의 연관성들이 거품처럼, 샴푸 후의 개운함처럼 다가왔다”는 호평을 받았다.

 

동화 ‘나무피리’는 흔한 소재임에도 상호 배려를 통해 완벽한 소통의 의미를 감동적으로 풀어내 동화가 문학의 한 장르라는 것을 여지없이 증명하는 수작으로 평가됐다.

 

올해 신인 문학상에는 소설 193편,시 555편,동화 88편 등 총 836편의 작품이 응모됐다.

 

소설부문 수상자에게는 국내 단편소설 공모전 중 전국 최고 수준의 상금인 1000만원이 수여되며 시·동화 부문 수상자에게는 각각 300만원의 상금이 전달된다.

 

시상식은 내달 16일 오전 10시 30분 춘천 김유정문학촌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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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손의 장어 / 최윤정

 

 

우주의 하루를 살았다

 

하늘은 가장자리가 부서져 내렸지만 둥긂을 포기하지 않았다

 

바람은 어디서 불어오는가,를 생각하는데 오전을 보내고

 

구름 귀퉁이를 기어가다 미끄러진 지렁이를 잡아먹는 동안

 

느루 내리는 비처럼 은사시나무의 오후가 지나갔다

 

고함치듯 뛰어다니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

 

무지막지하게 지붕을 덮어버린 꽃잎이나 잠깐

 

흘러들어온 냄새에 온 정신이 홀리기도 했지만

 

그것이 시간의 다른 얼굴이라면 나는 잠시 시간을 사랑했던 것

 

나의 하루는 길어서 이미 사라진 시간의 꽁무니 뒤로

 

수만 마리의 새가 부리를 비비며 날아갔다

 

나뭇잎 한 장이 만든 그늘 아래 고개를 묻고

 

어쩐지 경건한 마음으로 어제를 떠올리는 건

 

기도 없이는 할 수 없는 일, 손대신 온몸을 모은다

 

찰나에도 떴다 지는 별과 무시로 바뀌는 바람의 온도

 

둥글고 긴 허공을 이해하는 동안 귀돌에 새겨진 시간들

 

새가 떠난 나뭇가지처럼, 나뭇가지 그림자를 부풀리며 지는 해처럼

 

돌아보면 침묵같이 아득한 하루를 살았다

 

 

 

 

*닐손의 장어=1859년 당시 8살이었던 사무엘 닐손이 우물에 던진 후, 20148월 죽은 것이 발견될 때까지 155년 이상을 살았다는 뱀장어.

 

 

 

 

 

 

 

[당선소감] “손 놓고 싶던 순간 여러번 오갔다

 

나무 아래 앉아 숲을 보려 한 시간이 길었다. 나무를 떠나 한참을 걸었다고 생각했지만, 돌아보면 아직도 숲은 제 모습을 다 보여주지 않는다. 내게 시는 숲과 같다. 아직 제대로 본 적 없으므로 그저 추측하고 상상해서 숲을 그릴 뿐이다.

 

누군가는 사물을 오래 바라보면 그 사물이 말을 걸어온다고 했다. 사물과 대화 하려 노력했지만 내게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내게 사물은 언제나 묵묵부답이므로 그저 사물에 나를 기대놓고 그것이 되어보려 노력할 뿐이다.

 

가끔은 내가 쓴 시들이 거짓말 같아서 손 놓고 싶은 순간들이 여러 번 오갔다. 열등의 시간이 머릿속의 욕심도 어깨에 든 힘도 내려놓게 했다.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지만 여전히 내가 쓴 시들을 돌아보면 부끄러울 뿐이다.

 

아직 숲을 보기 위해 갈 길이 먼 내게 심사위원께서 올려주신 짐 하나를 달게 지고 가겠다. 심사위원님과 김유정신인문학상 관계자께 감사드린다.

 

머리 맞대고 시 이야기만으로도 행복했던 비상 식구들과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다. 늘 내 곁을 지켜주는 가족에게 오래도록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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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신인다운 감각·참신성 결여 아쉬워

 

예심을 통해 넘어 온 작품은 정연희 외 12명이었다.

 

대부분의 응모작이 삶의 내면이나 이와 유사한 일상의 풍경에 대하여 성찰의 시각과 열정을 보여 준 반면 사회성의 반영이나 다소 무거운 주제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대체적으로 인간에 대한 탐구랄까 새로운 삶을 발견하려는 노력보다는 관념의 고착이나 작품에 대한 안전성이 더 고려된 느낌이었다. 그러면서도 표현의 난삽함과 모호성 등을 우정 피해 가려고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한편 거개의 작품들이 지나치게 길고 산문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어서 요즘 세상에 대하여 할 말이 많다거나 복잡다단한 삶을 몇 행의 시로 감당하기 어렵다는 걸 여실히 증명하기도 했지만 그러한 이유들로 시가 운명적으로 운문의 영역이라는 게 무색해 보이기도 했다.

 

한미정 이지성 김순희 최윤정 등이 끝까지 남았으나 작품의 완성도나 사유의 깊이 등으로 보아 최윤정의 닐손의 장어가 낙점을 받았다. 당선작 외에도 또 다른 그의 작품들이 그를 받쳐주는 것이 든든한 이유이기도 했다.

 

최윤정은 155년 이상을 우물 속에서 살았다는 장어를 통하여 거대한 시간 속에 매몰된 존재를 받아들이고 투시하는 사유의 공간을 보여준다. 그가 인식하고 소비하는 공간성의 구체화가 그것인데 그것은 시간에 대한 우주적 느낌과 시각, 좀 더 크게 말한다면 무한한 시간의 공간 속에 유한한 인간의 시간을 대비시키면서 우리를 유장한 우주적 흐름에 합류하게 하는 스케일을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언어 사용과 수사적인 면에서 신인다운 감각이나 참신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당선자에게 앞으로 남은 숙제이기도 할 것이다.

 

- 심사위원 정현종·이상국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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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혈목이의 책장 / 이병철

 

 

당신은 풀잎 위에 누워 돌을 떨어뜨리고 있었어요 나는 당신 귀밑머리에 매달린 하얀 박쥐들을 떼어냈고요 우리의 책은 폭설을 쏟아내고 있었지요 마른 혀도 꽃이 될 수 있을까요 그때 바람이 입 속으로 들어왔어요

 

바람이 갈비뼈를 두드리자 피아노 소리가 났어요 소리가 빚어낸 동전 몇 닢 손에 쥔 하늘은 구름을 보름달솥에 고았지요 어둠이 우러났어요 별가루 뿌리고 배추흰나비와 벚꽃잎 고명 얹은 국 한 사발 떠 주었지요

 

국을 들이킨 당신은 은어 떼 헤엄치는 수박 향기로 반짝였지요 당신이 흘러든 풀섶에서 유혈목이가 기어나와 내 품을 파고들었어요 책장엔 진달래꽃 피어났고요 알몸을 포갠 우리는 따뜻한 무덤이 되어갔지요

 

 

 

 

오늘의 냄새

 

nefing.com

 

 

[당선소감] “부끄럽지 않은 행복한 시인 될 것

 

이십대의 모든 날들을 시 쓰기에 바쳤습니다. 시가 돈이 되지 않아도 행복했습니다. 아무도 걷지 않은 오솔길의 임금이 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서른 살이 되자, 돈이 되지 않는 시를 계속 붙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멀리 달아났습니다.

 

하지만 달아나면 달아날수록 시는 더 강하게 저를 잡아당겼습니다. 돌아선 뒤통수에 쏟아지는 시의 따가운 눈총이 미안하고 괴로워 몹시 취해버린 밤도 많았습니다.

 

계절이 바뀌는 저녁에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제 나름으로는 갈림길에서 받은 전화였습니다. 용기와 힘, 그리고 막막한 두려움이 동시에 제 가슴에 불을 밝혔습니다. 그 불빛을 의지해 뒤돌아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화는 시가 걸어온 것이었습니다. 서른 살에 세상을 떠난 김유정 선생이 걸어온 것이었습니다. 누나 집에 얹혀살며 늑막염으로 괴로워하던 가난한 청년, 치료비도 없이 병과 문학을 함께 키워야 했던 김유정 선생을 떠올려봅니다.

 

선생은 절망 가운데서도 결코 문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나이 서른 살 짧은 생애였지만, 선생이 남긴 문학은 위대한 것이었습니다. 김유정 선생의 서른한 살, 서른두 살을 제가 살아낸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읽고 쓰겠습니다.

 

선생으로부터 걸려온 전화 한 통을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숨이 여린 작품을 잡아 일으켜 근력과 호흡을 불어 넣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언제나 온화한 미소로 격려해주시는 이승하 교수님, 제겐 아버지와도 같으신 이경교 교수님, 시 쓰기의 즐거움을 알게 해주신 장석주 선생님께 감사 드립니다. 명지전문대, 서울과기대,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의 모든 선생님들께 감사 드립니다. 부끄럽지 않은 제자가 되겠습니다. 행복한 시인이 되겠습니다.

 

 

 

 

[심사평] 응축·변주·확장 탁월한 수작

 

본심에서 세 분의 작품을 거론했다.

 

먼저 <죽은 시인의 사회> 11편을 투고한 심상숙의 작품들에선 시적 포즈나 비의 같은 것에 욕심 부리지 않고 문장을 끌고 가는 정서의 힘이 느껴졌다. 시인이 관찰하는 인물, 사건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심이 남다른 묘사 문장을 탄생시켰다.

 

그렇지만 어떤 시들은 기행문이나 산문 같았다.

 

<비의 기원> 4편을 응모한 민경란의 시는 다른 응모작들에서 흔히 보이는 상투적인 우화 만들기, 한결 같은 감상적 정서를 훌쩍 벗어나 주변 공간 묘사에 의지해 자신을 표현하고, 해부하고, 고백하는 남다른 표현법을 갖고 있었다. 자신만의 표현법, 자신만의 문장 구사 방법을 갖고 있다는 것은 자신만의 언어 세계를 갖고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일 것이다.

 

하지만 일상적 대화 수준으로 떨어져 버린 문장의 나열이 들어있는 <광염소나타> 같은 시가 신뢰를 떨어트렸다. <유혈목이의 책장> 4편을 응모한 이병철의 시들은 어떤 순간에 집중하여 그 순간을 증폭시켜 이미지의 정원으로 확장하는 시적 구축의 방법이 흥미로웠다. 이를테면 네 입술이 닫히는 순간 세상의 문들도 닫히, ‘추억 속 고통은 무슨 힘으로 밝히지?’하고 고통스럽게 질문하다가 뒤틀리고 찢겨진 살결을 보이며 검게 물든 엽록소를 배설할 거야’(<일기예보>) 라고 다짐하는 장면에 이르는, 시적 언술의 연속이 작은 한순간에서부터 독자를 이끌고 가 확장된 시의 이미지 공간에 부려 놓는 힘이 느껴졌다.

 

그러나 <비 개인 저녁의 안부 편지>에서처럼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센티멘탈하기만 할 때는 시를 쓴 의도를 의심하게 했다.

 

논의 끝에 이미지의 응축과 변주, 확장이 시의 문장들에 깃들게 함으로써 시적 긴장이 발생하게 한 <유혈목이의 책장>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 심사위원 정현종·김혜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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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렁이를 알아가다 / 서귀옥

 

 

얼마나 천천히

몸을 대보는 지요 아스팔트 위에서

겉돌았던 생을 자책하듯 틈새기 찾으며

보도블록들이 공중에 쏟아지지 않게 꽉 붙들고

누가 몰래 이 별의 불룩한 자루 속을 뒤지나

누가 자꾸 이 별의 아픈 데를 헤집나 알아내겠다는 듯

민들레를 펼쳐놓고 안테나 뽑고 있네요

빗물에 둥둥 뜬 노란 암호를 풀면서

웅덩이로 풍선을 불면서

자전거바퀴에 감긴 빗방울 체인을 휙휙 채면서

스며들기 좋은 데를 기웃거리네요

이 별의 마디마디 흠집이 저리 깊었나, 다 읽히고 마네요

저러다 밟히면 어쩌나 싶어도 흙투성이로 뒹굴고 차이는 일들이

이 바닥을 알아가는 일이라는데요

진창에 바람 불어넣어 씨앗을 터뜨리기도 하고

꼬챙이 휘두르며 꽃밭을 들쑤시다가 부러지기도 하는데요

하긴 차갑게 스며들지 않고서

어떻게 이 별에 다시 태어날 수 있겠어요

태양이 높이 튀어 올랐다 내려오는 사이

뜨겁던 꽃이 식어버리고

버드나무에 앉은 매미 울음소리가 홀쭉해지고

차갑게 얼어붙은 처마의 톱니 날 풀리는 것들이 모두

별의 깊은 데에 몸 대보는 일이지요

흙빛을 닮아가기 위해 몸속 거친 끈 하나

풀어놓는 일이지요

 

 

 

 

 

[수상소감] “이제 할 일은 독창성·신선함 찾기”

 

  한 사내를 사랑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님이다. 영화를 본 날부터 나는 키팅과 시를 구별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 사내를 보듯 대놓고 시를 짝사랑하게 되었다. “어떤 사실을 안다고 생각했을 때 그것을 다른 시각으로 봐라, 그것이 틀리고 바보스러울지라도 시도를 해봐라!”라며 책상 위에 올라서는 그를 보고,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사실 그때까지 마음의 여유 정도 부리듯 습작을 해왔던 나는 마치 대낮 길거리에서 번개를 맞은 것 같았다. 죽고 못 사는 애인 삼아 시를 좇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시에 걷어차일 때마다 ‘내 삶의 목적을 한층 보람되게 하려고…’라며 수치를 무릅쓴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치고받고 밀고 당기는 동안 나도 시도 얼룩덜룩해졌다. 분명한 것은 시도 아주 멀리 달아나지 않고 내 옆을 걷고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살면서 겪은 것들이 고스란히 스며들 수 있는 꼭 그만큼의 거리에서 말이다.

  수상 소식을 듣고 손을 뻗었더니 비로소 시의 감촉이 만져졌다. 거친 내 발뒤꿈치의 질감과 비슷했다. 어쩌면 나는 시를 따라다닌답시고 내 그림자를 좇고 있었던 건 아닐까.

  이제 내가 할 일은 눈 먼 집착 때문에 매너리즘에 빠져 결여된 독창성이나 신선함을 찾는 일, 사랑도 좀 세련되게 하는 일이다.

  부족한 작품 뽑아주신 심사위원에게 감사드린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들도 나름의 가치가 있을 터, 이제 그것을 스스로의 손으로 찾아 그 존재만의 옷을 해 입히겠다. 우석대학교 문예창작과 선생님들께도 감사드린다.

 

 

 

 

 

 

 

 

홈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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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신인다운 기발한 발상·기법 아쉬워

 

  예선을 거친 10명의 응모작 50여 편은 두 심사위원에게 우송되어 각기 심사를 했다. 그 결과 응모자 3명 내외의 작품이 각자 선정되었고, 9월 23일(월요일) 김유정문학촌에서 만나, 각자가 선정한 작품을 중심으로 토의를 거쳐 합의에 이르렀다.

  다행스럽게도 두 심사위원들이 선정한 작품은 서귀옥씨의 4편, 장모란씨의 3편, 이향숙씨와 최주현씨의 작품이 각기 2편씩이었다. 따라서 자동적으로 4편의 작품이 선정된 서귀옥씨가 당선신인으로 결정되었고, 그의 작품 중에서도 최우수작으로 <지렁이를 알아가다>를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응모자들의 작품 50여 편은 대체로 고른 수준의 작품이라는 의견이었으나, 체험적 설득력이 약한 듯, 서술과 기교에서도 지나친 감추기로 내용의 연결과 시적 승화가 허약한 작품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위의 4명의 작품들은 내공의 깊이가 헤아려지고, 소통의 보편성이 무난한 수작으로 평가되었지만, 참신성이나 기발함에서는 아쉬움도 적지 않았다.

  예술작품에서 치명적인 약점은 비슷함이어서, “비슷하면 가짜다”라고 공인되었는데, 응모작품들의 발상 및 주제가 엇비슷했고, 심지어는 제목이 동일한 경우도 있었다. 왠지 기성시인들이 수도 없이 다루어온 주제와 기법을 별 감동 없이 재활용한 듯, 단지 무난한 수준에 이른 듯한 느낌도 떨칠 수 없었다.

  신인다운 기발한 발상이나 기법을 신인에게 기대한다는 것이 무리일 수도 있겠으나, 그럼에도 그래야만 하는 것이 신작과 신인다움이라서 많이 아쉬웠다. 더욱이 같은 응모자의 작품들끼리도 서로 엇비슷한 시상과 전개과정이어서 작품별로 나타나주어야 하는 그 작품 나름의 독자성 유일함 등이 부족했다는 지적도 있었다.

  적지 않은 아쉬움에도, 소통에 결정적인 약점이 되는 지나친 감추기가 아닌, 즉 너무 감추지 않으면서도, 참신하다고 평가되는 서귀옥씨의 <지렁이를 알아가다>,‘물수제비를 뜨다’,‘빈자리’,‘웅덩이’,‘풀’ 등의 작품은 그 중 가장 우수하다고 평가되었다. 장모란씨의 ‘신장개업’과 ‘쌍화점’, 최주현씨의 ‘소금쟁이, 날아오르다’,‘선지국’과, 이향숙씨의 ‘허공에 머물다’,‘별을 달다’도 발상의 신선함과 점증점강의 기교도 돋보였음을 밝히고 싶다.

  서귀옥씨의 <지렁이를 알아가다> 역시 서술 상 다소 복잡한 느낌이었다. 시는 언어 경제학적이라는 특성과, 너무 많은 정보를 담으면 강조점이 희석되고 만다는 사실도 잊지 않기 바라면서, 우리문단에 우뚝한 시인으로 대성하기 바란다. 당선신인으로 선정됨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 심사위원 정현종·유안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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