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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 정일근

 

 

먼 바다로 나가 하루 종일

고래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사람의 사랑이 한 마리 고래라는 것을

 

망망대해에서 검은 일 획 그으며

반짝 나타났다 빠르게 사라지는 고래는

첫사랑처럼 환호하며 찾아왔다

이뤄지지 못할 사랑처럼 아프게 사라진다

 

생의 엔진을 모두 끄고

흔들리는 파도 따라 함께 흔들리며

뜨거운 햇살 뜨거운 바다 위에서

떠나간 고래를 다시 기다리는 일은

그 긴 골목길 마지막 외등

한 발자국 물러난 캄캄한 어둠 속에 서서

너를 기다렸던 일

 

그때 나는 얼마나 너를 열망했던가

온몸이 귀가 되어 너의 구둣발 소리 기다렸듯

팽팽한 수평선을 걸어 내게로 돌아올

그 소리 다시 기다리는 일인지 모른다

 

오늘도 고래는 돌아오지 않았다

바다에서부터 푸른 어둠이 내리고

떠나온 점등인의 별로 돌아가며

이제 떠나간 것은 기다리지 않기로 한다

 

지금 고래가 배의 꼬리를 따라올지라도

네가 울며 내 이름을 부르며 따라올지라도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겠다

 

사람의 서러운 사랑 바다로 가

한 마리 고래가 되었기에

고래는 기다리는 사람의 사랑이 아니라

놓아주어야 하는 바다의 사랑이기에

 

 

 

 

바다가 보이는 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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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인연, 인드라망

 

일어섰다 눕다를 되풀이하는 두어 달 시름시름한 병중에서 지훈문학상 수상 통보를 받았습니다. 이 땅의 시인으로 존경하는 분의 이름으로 주는 문학상을 받는 것은 더할 수 없는 영광이었으나 그 영광이 저에게는 앞으로 지훈문학상의 이름값을 못하는 시인이 되면 어쩌나 싶은 정신적 부담이 컸던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최근 쉽게 회복되지 않는 병 하나와 친구하며 지내며 저는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많이 지쳐 있었습니다.

 

지난해 여름을 세계 최빈국가의 하나인 동티모르공화국에서 보냈습니다. 해발 15백 미터가 넘는 동티모르 고산지대에서 커피농사를 짓는 그곳 사람들과 여름을 보내며 그들의 커피수확도 돕고 한 NGO의 공정무역(fair trade)을 취재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히말라야를 비롯하여 세계의 오지를 많이 다녔지만 적도를 넘어가는 열대지역은 처음이었습니다. 동티모르를 떠나 귀국하기 전날 우리가 학질이라고 부르는 말라리아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38~40도를 오르내리는 고열에 시달리며 인도네시아를 거쳐 한국으로 돌아오는 오랜 비행시간 동안 저는 또 한 번의 죽음의 경계를 아주 가깝게 경험했습니다.

 

귀국하여 말라리아는 치료되었으나 그러나 고열이 남긴 길고 긴 후유증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 사이 응급실에 여러 번 실려 가기도 하고 몇 번의 입원과 퇴원을 되풀이했지만 한번 고갈된 물통의 물이 다시 채워지지는 않았습니다.

 

제 치료를 맡은 의사는 말라리아 후유증과 싸우는 데 3년 정도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진단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저는 전 세계적으로 1년에 2백만 명이 말라리아로 죽어 간다는 사실도 알았으며 말라리아가 우리나라에서도 발병하고 있으며, 불운했다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던 위험한 병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돌아보면 마흔 이후 저는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2번의 뇌수술과 히말라야 고산등반으로 인한 고산병 등으로 쓰러질 때마다 시가 있어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시가 있었기에 제 삶에서 가장 혹독한 시기로 기록될 불혹에서 지천명까지의 힘든 10년을 이를 악물고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등단 25년을 맞이해 나름대로 뜻깊은 10번째의 시집을 펴내고도 출판사에서 보내온 새 시집들을 펼쳐 보지도 못한 채 육신의 고통 속에서 불완전한 미래에서 오는 공포와 싸워야 했습니다. 시를 쓸 수도 읽을 수도 없는 속수무책의 시간들 속에서 삶이 난파선 같았습니다.

 

그 시간 속에서 수상통보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두려웠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건 시가 다시 저에게 내미는 운명의 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가 다시 한 번 저의 등짝을 짝소리 나게 치며 다시 일어서라는 뜨거운 경고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지훈 선생님을 뵌 적이 없습니다. 1968년 지훈 선생님이 이승을 떠나셨을 때 저는 장래 희망이 시인인 10살짜리 어린 초등학생이었습니다.

 

중학교 국어시간에 청록파를 배우며 지훈 선생님의 시를 읽게 되었고 제가 중학교 국어교사였을 때 역시 중학생들에게 청록파를 가르치며 지훈 선생님의 시를 읽게 하였습니다. 그것이 지훈 선생님과의 인연이라면 인연의 전부인데 그 이슬방울보다 작은 인연의 힘이 저에게 다시 용기와 힘을 가지게 하였습니다.

 

불가에 연기법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인드라망이란 말이 있습니다. ‘인드라’(Indra)는 인도의 수많은 신 가운데 하나로 제석천(帝釋天)이라고도 합니다. 제석천의 궁전에는 무수한 구슬로 만들어진 그물, 즉 인드라망이 있는데 그 그물은 한없이 넓고, 그물의 이음새마다 있는 구슬은 서로를 비추고 또 비추어 주는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불가에서 그 구슬들은 서로를 비출 뿐만 아니라 그물로서 서로 연결되어 있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인간세상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혼자 살아가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서로가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 비추고 비치는 밀접한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이 인드라망입니다.

 

이 세상 모든 법이 하나하나 별개의 구슬같이 아름다운 소질을 갖고 있으면서 그 개체성을 유지하고 있지만, 결코 그 하나는 다른 것들과 떨어져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오늘 저는 지훈 선생님의 맑고 향기로운 정신의 구슬에 제 얼굴을 비추며 지훈 선생님에서부터 저에게까지 이어지는 시의 인드라망에 한없이 감사하는 것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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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저는 1992년부터 울산에서 살고 있습니다. 푸른 동해를 가진 울산은 예로부터 고래바다’[鯨海]였습니다. 선사시대 바위그림인 국보 285호인 반구대 암각화58마리의 고래그림이 새겨져 있고, 고래가 회유하는 바다는 천연기념물 126호인 울산귀신고래회유해면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고래와 저와의 만남은 운명적이었습니다. 제가 울산의 시인으로 살면서부터 제 이름 뒤에는 고래보호운동가라는 이름이 하나 더 생겼습니다. 어느 시인은 저에게 고래 파수꾼이라고도 불러 주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러한 생명운동가가 아니라 고래를 기다리는 시인이었음을 고백합니다.

 

고래를 사랑하였기에 자주 바다로 나가 고래를 관찰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망망대해 바다에서 고래를 만나기도 했고 만나지 못하고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10년이 넘게 고래를 관찰하면서 누군가를, 혹은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동안은 참으로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다리는 대상이 사랑하는 것일 때 더없이 행복하였습니다. 그것이 낡은 유행가 가사처럼 커피 한 잔을 시켜 놓고하염없이 기다리는 일일지라도 기다리는 그 순간만은 꿈결처럼 감미로운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 사는 일이 기다리는 일의 연속일지 모릅니다. 어린 시절에는 설빔을 입는 설날을 기다렸고, 첫사랑을 하면서 그 사람만을 기다렸고, 군사독재시절 청춘의 어둠이 춥고 길수록 자유의 새벽을 기다렸습니다.

 

사무엘 베케트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블라디미르에스트라공처럼 고도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 현대인의 삶이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들에겐 약속만이 있을 뿐 기다리는 것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약속과 기다리는 것은 분명 다릅니다. 약속은 지켜야 하는 차가운 금속성이지만 기다린다는 것은 언제나 사람의 심장을 뛰게 하는 뜨거운 동물성입니다.

 

소풍, 생일, 방학, 서울 가신 아버지, 친구의 답장, 첫사랑, 첫 키스, 등단, 첫 시집, 제가 온몸으로 기다렸던 그 많은 것들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요?

 

기다리는 것이 그리울 때 저는 울산바다로 고래를 만나러 갔습니다. 아닙니다. 고래는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니기에 고래를 기다리기 위해 바다로 나갔습니다. 우리 모두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귀신고래는 돌아오지 않은 지 40년이 넘었지만 그래도 밍크고래와 돌고래 무리와 상괭이 같은 것은 기다리고 기다리다 보면 고도처럼 불쑥, 불쑥불쑥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고래를 기다리는 일은 아프고 고된 기다림이었습니다. 고래가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큰 동물이지만 망망대해 위에서는 하나의 점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 점을 기다리는 일은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오지 않는 것을 기다리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수백 장의 종이 위에 연필로 선을 긋듯 바다 위를 오가며 고래를 기다리는 일, 그건 저를 떠나간 첫사랑의 여자를 기다리는 일과 같았습니다. 그 여자네 집으로 가는 막다른 골목길 외등 아래에 서서 혹시 저를 찾아오는 발자국 소리를 기다리는 일과 같았습니다.

 

다시는 돌아보지 않겠다고, 다시는 기다리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고 다짐을 하지만 또 다시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는 저를 보는 일이 고래를 기다리는 일이었습니다. 어느새 고래를 기다리는 일이 저의 시가 되었지만 그 기다림이 저는 푸른 바다 위로 부는 맑은 해풍처럼 좋았습니다.

 

저는 시를 쓰는 일도 기다리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가 기다림이 아니라면 수많은 시인들이 어떻게 평생을 시를 쓰는 시인으로 살다갔겠습니까? 또한 그보다 더 많은 시인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21세기로부터 용도폐기 중인 시를 쓰며 살아가겠습니까?

 

저는 다시 기다릴 것입니다. 앞으로 10, 20, 기다리다 제 생이 모래 한 줌으로 사라진다 해도 기다리는 고통 속의 즐거움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감히 약속드립니다.

 

부족한 저를 수상자로 선정해 주신 존경하는 심사위원 분들과 지훈상 운영위원회, 나남출판에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이번 수상으로 서울이 아닌 지역에서 지훈문학상을 받는 첫 시인인 된 것에 자부심을 가집니다. 언제나 시에 대해서 최선을 다하며 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소금 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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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지훈문학상 심사보고

 

이번에 지훈문학상 수상 후보로 최종 거론된 시인들은 모두 20년 시력(詩歷)을 채운 우리 시단의 중견들이었고, 작품적 완결성과 미적 좌표의 품격으로 보아도 그 어느 해보다 미더운 성취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다양하고 깊이 있는 미적 성취와 가능성으로 이분들의 시집은 한결같이 지훈문학상의 제고된 위상을 보여 주기에 족한 것이었다. 후보들은 김경미의 고통을 달래는 순서, 이진명의 세워진 사람, 정끝별의 와락, 정일근의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였는데 이 가운데 심사위원들은 정일근 시편의 문학성과 한결같은 지속성을 높이 평가하여 제9회 지훈문학상 수상작으로 그의 시집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를 선정하였다. 김경미 시편이 보여 주는 부재와 사랑의 견고한 결속, 이진명 시편의 투명하고도 아름다운 원음’(原音), 정끝별 시편의 자유롭고 탄력 있는 꿈과 사랑의 목소리가 오래도록 뇌리에 남았으나, 심사위원들은 오랜 토론 끝에 정일근 시편이 보여 주는 오랜 지속과 심화의 세계를 최종 선택하게 되었다. 더불어 심사위원들은 안도현 시인이 말한 죽음 직전의, 아픔의 우물 밑바닥까지 내려갔다가 올라와서써낸 깊은 세계에 의미 있는 격려가 얹혀야 한다고 의견을 보탰다.

 

정일근 시인은 그의 열 번째 시집이 되는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까지 지속적이고 균질적인 시 창작을 해 왔다. 이는 등단 25년을 맞은 이 중견 시인의 지속적 심화 과정을 선명하게 보여 주기에 족하다고 할 수 있다.

 

시편 가득 넘쳐나는 바다고래이미지를 통해, 시인은 자신이 가 닿고자 하는 상상의 세계, 곧 깊은 상처를 넘어서는 그리움사랑의 풍경을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또한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단시(短詩) 미학에도 남다른 공을 들였고, 삶의 여러 존재론에 대해서도 깊고 다양한 투시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한 발자국 물러난 캄캄한 어둠 속에 서서/너를 기다렸던 일/그때 나는 얼마나 너를 열망했던가/온몸이 귀가 되어 너의 구둣발 소리 기다렸듯/팽팽한 수평선 걸어 내게로 돌아올/그 소리 다시 기다리는 일인지 모른다”(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면서, ‘열망기다림의 자세가 삶의 그것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 준 그의 시세계가, 아름다운 마을 은현리’(銀現里)에서 더욱 심원하게 완성되어 가길 기대해 본다.

 

이제 정일근 시편은 그동안 지훈문학상이 배출한 수상자들의 성취에 더해져, 이 상의 위상을 더욱 높여 줄 것이라 생각한다. 거듭 축하의 말씀을 드린다.

 

새삼 지훈 선생님의 높은 시세계와 정결하고도 오롯한 문학 정신을 되새기면서, 다시 한번 지훈문학상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해 마지않는다.

 

심사위원 유종호 유성호 최동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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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칼 키스1 / 신대철

 

 

물살 그림자

 

투명한 물살 밑에 일렁이는

희미한 문살무늬 그림자

 

창호에 무슨 소리 어리듯 나는 그림자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머리끝에 마른번개

스친 뒤 물은 금시 정강이까지 차올랐다. 콧수염 달린 사내가 달려와 소매를 잡아 당겼다. 맨발의 해맑은 얼굴, 나는 망설이다가 그가 미는 대로 밀려갔다. 모래밭이

끝나는 산비탈 중턱 자작나무 사이에 노란 텐트가 열려 있었다. 젊은 여자가 밖을 내다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물도 그림자도 깊어서? 나도 환하게 웃었다. 모두 바이칼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나도 두 사람 사이에서 막 태어났다고 하니 소리 내어 웃었다.

 

바이칼은 호수 이름이 아니라

피와 영혼의 이름이죠?

 

사내는 내말을 되받아 바이칼은 영혼의 눈빛이라고 신파조로 중얼거렸다. 우리 앉은 자리는 어느새 가설무대가 되었다. 근 내 코에 코 비비고 볼에 볼 비비고 느닷없이 온몸에 서릿발 첫 키스를 날렸다. 아무도 없었지만 물과 바람과 햇빛 속에서 비명소리가 울려왔다. 황폐한 내 몸속에 누가 또 있었던가? 바이칼 소년이? 온몸에 문살무늬 그림자 어른거리고 하늘엔 흰 구름 한 점 기웃거리다 흘러간다.

 

아이두세 요하르 아리두세 헤이부룰라

 

검붉은 노을이 꺼지는 저녁, 우리는 장작개비를 들고 구릉에 올랐다. 하늘을 향해 장작불을 피워 불길을 올렸다. 샤먼이 북을 치자 가슴에 묻힌 영혼들이 불려나온다. 빙 둘러서서 춤추며 노래한다. 아이두세 요하르 아이두세 헤이루불라, 맑혀진 영혼들 불길타고 하늘로 올라가고 몸 타고 태초의 어둠이 내려온다.

 

피부도 족속도 모르지만

우리의 푸른 불기운은

손에서 손으로 넘어간다.

빙글빙글 도는 춤 속에

바이칼 뜨거운 피가 흐른다.

 

 

 

 

바이칼 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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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아버님과 스크랩북

 

엊그제도 읍내 장터에서 국밥을 드시고 다방에서 친구분들을 만나시던 아버님이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 중에 수상소식을 들었습니다.

 

우리 시사에서 올곧은 선비정신의 표상으로 추앙받는 조지훈 시인의 문학상을 받게 되어 기쁩니다. 그러나 제가 걸어온 길을 돌이켜보면 머리를 들 수가 없습니다. 그동안 제 창작이 지지부진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제 시는 아직도 서투르고 풋내가 납니다. 그러나 돌아가신 아버님은 기뻐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아버님이 원하시던 길로 접어들어 계속 시를 쓰고 있고 이렇게 격려도 받기 때문입니다. 문득 아버님께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아버님은 유품으로 시 스크랩북 세 권과 산문 스크랩북 한 권을 남기셨는데, 그 유품을 보는 순간 가슴이 저려왔습니다. 아버님과의 갈등이 그 유품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버님은 일정한 직업도 없이 동네 사랑방을 떠도시며 떠도는 소문과 함께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신문이나 잡지를 보따리에 넣고 오셔서 밤새 뭔가를 오리시고 풀로 정성스레 붙이셨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들여다보면 시, 시조, 수필, 평론 등 문예 작품들이었습니다. 가족들은 땔감을 준비해 놓고 양식을 기다리는데 아버님은 철 지난 소문과 문예물들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처음엔 호기심으로 스크랩북을 열어 보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문학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문학은 특별한 사람만 하는 줄 알았는데 이름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감정에 매여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문학이 무슨 열병같이 느껴졌습니다. 문학이 먹고 사는 일보다 중요하다니! 저는 그런 아버님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몇 번 망설이다가 아버님이 나가신 틈을 타 마침내 그 스크랩북을 불쏘시개로 썼습니다. 며칠 만에 돌아오신 아버님은 습관처럼 구깃구깃한 신문 구석에 붙어 있는 일요시단과 오래된 잡지의 독자 투고시들을 오려 놓으시고 스크랩북을 찾으셨습니다. 그간 끼니 때문에 나무하러 가거나 팔러 가는 등 자주 집을 비운 일이 있었기 때문에 아버님은 그 스크랩북을 도둑맞은 줄 아셨는지 뜻밖에도 아무 말씀도 안 하셨습니다.

 

그 사건 이후 아버님은 문학에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꽃모종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동네 근처에서 얻어온 꽃들은 분꽃, 겹채송화, 장다리 등 낯익은 꽃들이었지만 타지에서 가져온 꽃들은 대부분 처음 보는 꽃들이었습니다. 아버님은 멀리서 가져온 작품들을 스크랩북에 반듯하게 붙이듯이 네모난 화단에 몽울진 꽃들을 붙이셨습니다. 비가 온 뒤에는 새벽부터 일어나셔서 막 피어난 꽃들을 물러나서 보시기도 하고 바싹 다가서서, 혹은 쪼그리고 앉으셔서 보고 또 보셨습니다. 저는 생활과 취미를 구별하지 못하는 아버님을 가까이 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님이 관심을 가진 것들은 다 피하고 싶었습니다. 아니 가족을 돌보지 않는 아버지를 아버지로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집을 떠나 공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일반 사춘기 소년들처럼 꿈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숲 속이나 바다, 혹은 사막이나 평야, 그곳에서 무슨 일을 하든 문학만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몇 달 지나자 다시 문학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어쩌다 문학하는 친구를 사귀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는 나이에 비해 조숙하고 공부도 잘하는 모범생이었는데 염세적인 인생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저에게 씨트론이라는 이름을 주고 일방적으로 글(, 혹은 시적인 편지)을 보냈습니다. 때로는 연가풍의 시편과 철학적인 산문도 간간 섞여 있었습니다. 그의 염세주의는 미수에 그친 자살 충동과 전학으로 끝났지만, 그를 업고 병원으로 다니던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의 무게를 내려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난 번 어느 글에서 친구 이름을 C라고 밝혔습니다만, 본인이 양해를 했으니 이젠 이름을 밝혀도 좋겠군요. 최운석이라는 친구였습니다. 지금 그는 미국에서 문학과는 거리가 먼 일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제가 문학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서울에서 내려온 육촌형 때문이었습니다. 대학 진학을 포기한 채 방황하던 중 우연히 읍내 장터 길목에서 친할머니께 인사하던 낯선 육촌형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육촌형은 엉거주춤 서 있는 저에게 진학에 대해서 물었고 저는 가정 형편상 진학을 포기했다고 말했습니다. 한 달 뒤 저는 졸업하면 산속에 들어가겠다고 좀더 구체적인 계획을 적어 형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편지를 읽고 형은 글재주가 있으니 국문과에 들어가라고 답장을 보냈습니다. 합격이 되면 형 집에서 같이 지내자는 온정어린 말이 부기되어 있었습니다. 육촌형은 제 글을 처음 읽고 호의적인 반응을 보여준 첫 독자였습니다.

 

대학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에 대학도 학과도 형이 선택한 대로 정했습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가정 형편이 더 나빠진데다 형에게 신세지는 게 부담스러워 1학기를 마치고 휴학하게 되었습니다. 칠갑산에 혼자 들어가 화전민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흩어진 가족들이 하나 둘 모여들고 아버님도 돌아오셨습니다. 아버님은 다시 시 스크랩북을 만드셨습니다. 이전과는 달리 시들을 다 붙이신 다음 선반에 올리지 않고 잠든 제 머리맡에 가만히 놓아 두셨습니다. 저는 인기척을 느끼는 순간 잠결에 그러는 것처럼 스크랩북을 멀리 밀어 놓고 다시 잠들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깊은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밖에 나오면 어둠 속에서 아직 꺼지지 않은 연기와 탄내가 훅 끼쳐 왔습니다. 어린 시절 아무것도 모르고 활활 타오르는 화전 밭에서 가슴 설레며 본 불똥 같던 별들에서도 탄내가 났습니다.

 

불길 번지는 소리 같던 물소리들에서도 탄내가 났습니다. 당시 자연도, 스크랩북도 저에겐 너무 무겁고 가혹했습니다. 화전생활은 아주 고달팠습니다. 산속 좁은 산비탈에서 터전을 잡으려면 한동안 풀과 나무와 거기 깃든 생명붙이들과 땅을 빼앗고 빼앗기는 혈투를 벌여야 했습니다. 돌과 바람과 나무와 생명붙이들이 친구처럼 이웃처럼 느껴질 정도가 되면 화전시기는 끝납니다. 우리 가족은 칠갑산 합대나뭇골에서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어린 시절에 겪은 화전생활은 고통만 남겨 줬지만 대학 1학년 때 제가 혼자 시작하여 10여 년을 지속한 화전생활은 인간 삶의 조건을 구체적으로 체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깊은 말을 주고받은 적은 없었지만 아버님과 밭일을 같이 하며 조금씩 같은 하늘 밑에 있다는 안도감과 함께 잠시 아버님과 깊은 유대감을 느꼈습니다. 대학에 복학하면서 아버님과 스크랩북과는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게 되었습니다. 합대나뭇골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아버님은 다시 떠돌기 시작하여 행동반경을 점점 넓혀 가셨습니다. 그만큼 스크랩북의 시들도 다양해지고 많아졌습니다. 방학 때 집에 돌아오면 오리지 않은 신문들이 방구석에 차곡히 쌓여 있었습니다. 아버님이 시들을 읽고 선택하여 스크랩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불쏘시개로 사라진 첫 스크랩북보다는 낯익은 이름들이 많이 눈에 띄었습니다. 어디서 구하셨는지 각종 신인상 당선시들과 신춘문예시들도 섞여 있었습니다. 아버님은 서울 가서 보라고 스크랩북을 짐 꾸러미 속에 챙겨 넣으셨지만 저는 언제나 짐이 너무 많다는 핑계를 대고 빼냈습니다. 그때만 해도 저에게 문학은 너무 멀리 있었습니다. 시인이나 작가를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공무원처럼 관문을 거쳐 문단에 등단한다는 일도 번거롭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제가 인연을 맺는 사람은 모두 문학과 관련을 맺은 사람이었습니다. 여름방학 때 시골집으로 내려가던 중 천안역에서 우연히 같은 과 여학생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여학생도 고등학교 때부터 시를 써온 시인 지망생이었습니다. 지금은 제 아내가 되었지만 그 여학생과 자주 만나면서 문학과 친숙하게 되었고 아버님의 스크랩북을 자세히 읽기 시작했습니다. 시가 어렵기도 했지만 그땐 아버님의 한없는 사랑이 가슴 깊이 느껴져 시를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불쏘시개로 태워 버린 첫 스크랩북은 아버님의 삶과 관련된 것이었지만 그 이후의 스크랩북은 아버님이 온전히 저를 위해 준비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제게 일어났던 그 숱한 우연적인 일들은 능력이 부족한 저를 한 시인으로 만들기 위한 필연적인 일들이었을까요? 아버님에게나 저에게나 그때그때 삶을 지탱해 줄 수 있는 어떤 힘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제 삶의 무게를 시로 느끼기 시작한 지 40여 년이 흘렀습니다. 지난 일을 돌아보니 제 시의 원천은 아버님에게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아버님이 남기신 스크랩북을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아버님 말씀이 생생히 울려옵니다. ‘피와 눈물이 없는 시도 시냐?’ 하시던 말씀이 잊히지 않습니다. 세상이 달라져도 사람 사이의 일을 시로 쓰라는 말씀이었을까요? 아버님 영전에 졸시집 바이칼 키스<지훈상>을 바치고 싶습니다. 부족한 저에게 계속 시를 쓸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올리면서 평소 아버님이 스크랩북에서 즐겨 읽으시던 시 한 편을 소개하고 이 글을 그치겠습니다.

 

 

풀잎 단장(斷章) / 조지훈

 

무너진 성터 아래 오랜 세월을 풍설(風雪)에 깎여 온 바위가 있다.

아득히 손짓하며 구름이 떠가는 언덕에 말없이 올라서서

한 줄기 바람에 조찰히 씻기우는 풀잎을 바라보며

나의 몸가짐도 또한 실오리 같은 바람결에 흔들리노라.

아 우리들 태초의 생명의 아름다운 분신으로 여기 태어나

고달픈 얼굴을 마주 대고 나직히 웃으며 얘기하노니

때의 흐름이 조용히 물결치는 곳에 그윽히 피어오르는 한 떨기 영혼이여.

 

- 시집 풀잎단장(창조사, 1952)

 

 

 

 

극지의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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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회 지훈문학상 심사보고

 

지훈문학상의 심사 대상은 관례와 규정에 따라 지난 2년간 출간된 시집의 목록에서 후보작을 선정하였다. 세 명의 심사위원들이 각기 추천한 후보작은 중복되는 시집을 포함하여 신대철의 바이칼 키스, 장옥관의 달과 뱀과 짧은 이야기, 전동균의 거룩한 허기, 이원의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였다. 각각의 시집들은 지훈상의 후보로 손색이 없는 시적 개성을 보여주었다.

 

장옥관의 시집은 전통적 서정시의 틀 안에서 사물의 본질적 측면을 간파하는 시적 인식의 깊이를 보여주고 있다. 전동균의 시집은 삶과 타인에 대한 따뜻한 연민의 온도를 보여주는 소박하고 정갈한 서정성이 주목할 만하였다. 이원의 시집은 사물에 대한 특유의 상상력이 시의 내부에서 기계와 생에 대한 다른 상상적 차원에 이르고 있다. 심사위원들은 이들 시집이 훌륭한 미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신대철의 시집 바이칼 키스가 보여주는 새로운 서정성의 영토를 보다 의미 있는 것으로 주목했다.

 

이 시집은 신대철 시인이 사십여 년의 세월 동안 네 번째로 출간한 시집이다. 첫 시집 무인도를 위하여1977년 출간한 뒤 23년 동안 절필했던 시인은 2000년 다시 활발한 창작 활동을 전개한다. 이번 시집에서 특히 바이칼, 알래스카, 시베리아, 몽골의 광활한 자연 속에서 자신의 서정성을 재정립한다. 그는 이전 시집에서 화전민 경험과 청년 시절 DMZ와 실미도 군대 체험을 바탕으로 한 시편들을 쓰기도 했으나, 이번에는 더 넓고 황량한 대자연 속에 삶에 대한 보다 심원한 시적 통찰에 이르고 있다. 이것은 시인의 몽골과 알래스카에서의 체류경험을 바탕으로 삼은 것이다. 바이칼호와 몽골 초원이라는 압도적인 자연 앞에서 시인은 개인적 체험과 한반도의 현실이라는 문제의식을 넘어서, 생명과 인간 그리고 자연이라는 보편적 주제와 그 살아있는 것들의 이야기성을 담아낸다. 시인은 자연의 깊은 순결성으로부터 역사의 비극성을 껴안고 그것을 넘어서는 생의 숭고성을 자각한다. 이것은 신대철 시인의 시적 확장으로서도 의미가 있지만, 한국 서정시의 지평 확대라는 측면에서도 의의가 있다.

 

심사위원들은 지훈문학상이 시인 조지훈의 미학과 정신에 부합되는 작품을 반드시 뽑아야 한다는 전제를 갖지 않고 심사를 진행하였다. 그런데 최근의 한국 시단에 대한 상황을 참고하면서 신대철 시인을 수상자로 선정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그것은 조지훈의 미학에 가장 가까운 시인을 선택한 것이 되었다. 그것을 단지 우연으로 말할 수도 있지만, 조지훈의 문학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을 의미 있게 생각한다.

 

심사위원 홍신선 황동규 이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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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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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두어 달 嚴冬을 바닷가 시골집에서 야산의 고사목을 잘라 군불 지피며 갯바위에 올라 낚시나 하면서 살았다. 저녁 늦게까지 들리지 않던 파도 소리가 자정 넘겨 점차 스산해져가는 것을, 잠귀에 고여 오면 뒤척거려 쏟아버리곤 했다. 그러고 보니 오랫동안 그 비몽사몽간에 내 자각을 세워두었던 것 같다. 애써 의식하지 않았으므로 이 적요 길게 이어질 듯하다.

 

 

저자 및 역자소개

 

시인 김명인은 1946년 경북 울진 후포에서 태어났고, 1969년에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이후 동두천에서의 교사 생활을 거쳐 월남전에 참전한 바 있다.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시단에 데뷔했고 이후 反詩동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미국 유타 주 브리검 영 대학과 러시아 연해주 소재 극동국립종합대학의 교환 교수, 그리고 경기대 국문과 교수를 거쳐 현재 고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시집으로 東豆川(1979), 머나먼 곳 스와니(1988), 물 건너는 사람(1992), 푸른 강아지와 놀다(1994), 바닷가의 장례(1997), 길의 침묵(1999), 바다의 아코디언(2002) 등이 있다. 김달진문학상(3), 소월시문학상(7), 현대문학상(45), 동서문학상(8), 이산문학상(13) 등을 수상하였다.

 

 

 

 

이 가지에서 저 그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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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숙명의 인연 : 지훈 선생님의 가르침과 나의 습작기

 

금년도 지훈 문학상의 수상자가 저로 결정했다는 통보를 받는 순간 아뜩한 현기증을 느낄 정도로 한동안 정신이 멍했습니다. 이 상은 우리 현대시의 우뚝한 이정표이셨던 조지훈 시인의 업적을 기려 주변인들의 정성으로 발의되었고, 제정 이래 그 취지만큼이나 상의 순결을 지켜내려고 애써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동안의 수상자의 면면에 고려대학교 출신 시인들이 철저히 배제되어온 것도 이와 같은 사정이 반영된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저야말로 고려대학교 출신으로 선생님의 훈도를 받아 시인이 된 사람이니,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참으로 뜻밖의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아직도 저는 선생님과의 인연을 숙명처럼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상이야말로 지훈 선생님께서 그동안 네가 열심히 시를 쓰느라 고생했다하고 제게 내리시는 격려인 것만 같아서 감격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다시 고백하지만 저는 선생님을 뵙게 되면서 시를 써보려고 했었습니다. 제 시 인생의 단초(端初)를 선생님께서 잡고 계신 것입니다. 저는 사실 공부하고 싶었던 대학의 1차시험에 낙방하고서 우여곡절 끝에 고려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저는 한 학년을 다 마치도록 전공에 대한 회의를 접지 못했습니다. 그 덕분에 1학년 때에는 낙제과목이 여럿일 정도로 학과공부에 소홀했었습니다. 심지어는 지훈 선생님께서 담당하셨던 국어작문조차도 낙제였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시인이나 작가가 되어야겠다는 포부 따위는 가져보지도 않았습니다.

 

대학 1학년을 마칠 무렵, 고학이 너무 힘에 겨워 마침내 건강까지 해치게 되자, 차라리 있는 현실을 그대로 수긍해야겠다는 결심이 섰습니다. 그 겨울에는 그나마 가정교사 자리도 잃어버려서 학업의 지속이 참담한 고민거리가 되었습니다. 서울 생활이 견디기 힘든 곤혹스러움으로 다가왔던 그때 저는 친구의 하숙방에서 며칠 기숙하면서 닥치는 대로 소설들을 읽었습니다. 그 무잡한 독서 끝에 제가 한 선택은 기왕에 펼쳐진 길이라면 그렇게 살아보리라는 결심이었습니다.

 

시를 습작하기 시작한 것은 대학 2학년에 진급해서 지훈 선생님의 시론수업을 듣게 되면서였습니다. 저는 다급해진 학비나 해결하려고 장학금을 받을 요량을 혼자 속셈했었습니다. 그때 지훈 선생님의 시론과목이 설강되었는데, 선생님께서는 오래 와병중이라서 한 학기에 한두 번 출강하시는 것이 고작이셨습니다. 따라서 선생님의 과목은 언제나 휴강이었습니다. 성적도 리포트로 대신했는데, 그 과제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읽고 요약하는 것, 자작시 다섯 편을 써서 제출하라는 것 등이었습니다. 저는 시론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시를 습작해보았습니다. 시에 관해 아는 바가 없었으므로, 되도록 많은 작품들을 읽으면서, 작시(作詩)를 소화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기성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괜찮다 싶은 시편을 만나면 노트에 수기(手記)했던 그때부터 저는 차츰차츰 시에 매료되었습니다. 이듬해 신춘문예에 몇 편의 습작품들이 최종심에 오르는 바람에 시를 계속 써보려는 열정을 가졌으니, 시에 다가섰던 저의 업()은 그렇게 마련된 선생님과의 인연 탓이었던 것입니다. 선생님의 그 과제가 아니었다면 제가 시를 써볼 엄두나 냈겠습니까. 그렇게 찾아든 시마(詩魔), 마침내 저는 지금까지 시를 앓아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선생님의 시론을 수강했던 그 2학년 초가을부터 습작을 들고 선생님 댁을 혼자서 찾아다녔으니, 그건 또 어디서 솟아난 숫기였을까요. 선생님이야말로 시의 인생으로 저를 안내하신 분이십니다.

 

저는, 지금도 기억합니다. 성북동 골짜기 선생님 댁을. 선생님이 칩거하고 계셨던 개울 건너 목욕탕, 골목 끝의 누옥(陋屋). 대문을 두드리면 선생님께서 직접 빗장을 따주시던 기역자로 꺾어진 기와집, 그 문간방 서재에, 오랜 병환으로 수척해지신 선생님이 누워 계셨습니다. 거의 두 주에 한 번 꼴로 조포(粗暴)하기 이를 데 없었던 습작품을 갖다 드리면, 선생님은 전에 두고 갔던 시편들을 제게 돌려주셨습니다. 저의 습작품들을 일일이 챙겨 읽으시고, 제목이며 구절들을 꼼꼼히 첨삭해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누구도 받아보지 못한 선생님의 살뜰한 지도를 받았던 셈입니다. 오래 떠돌며 사느라고 그때의 그 원고들이 언제 어떻게 산실(散失)되었는지, 지금 제 수중에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너무 내성적이어서 부끄럼을 많이 탔던 저는 습작에 대한 스승의 평가를 제때 여쭤볼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첨삭원고를 돌려주시는 일 외에는 제 작품에 대해 가타부타 구체적인 말씀들을 아끼셨습니다.

 

기묘한 침묵의 첨삭지도는 거의 두 해나 계속되었습니다. 그 사이에 저는 해마다 신춘문예 최종심에 들기는 했지만, 번번이 낙선의 고배를 마셨습니다. 대학 3학년 말의 겨울방학이었던가요. 선생님께서는 동아일보의 신춘문예를 심사하고 계셨습니다. 습작원고를 들고 찾아간 저를 곁에 앉혀놓고, 그해의 당선시를 읽어주셨습니다. 마종하 시인의 시였을까, 제가 몸 둘 바를 몰랐던 것은 저의 작품도 거기 투고되었던 까닭이었습니다. 당선작을 미리 귀띔해주신 것은 허망한 기대로 제가 마음 상할까 다독거려준 배려였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선생님을 찾아뵈었던 것은 제가 대학 졸업반이 되던 해의 2월 어느 날이었습니다. 선배였던 오탁번 형과 동행이 된 자리였습니다. 오탁번 선배는 그때 이미 신춘문예로 등단한 시인이었습니다. 그가 지훈 선생님 댁을 방문하면서 저를 앞장세웠던 것은 습작시편을 들고 선생님을 자주 찾아뵙는다는 제 소문을 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날 빈손으로 선생님 댁을 방문할 수 없어 도라지 위스키한두 병을 마련했던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 싸구려 위스키로 우리를 응대하시곤 술기운 탓이신지, 예의 굵은 바리톤으로 당신의 습작 시 월광곡을 낭송하셨습니다. 그해 늦봄에 선생님께서 돌아가셨으니, 아무리 철부지 적의 일이라 하지만 아직도 그때의 민망함을 씻어낼 길이 없습니다. 선생님은 간경화에다 동맥경화까지 오랜 지병을 겹쳐서 앓고 계셨으니, 술을 드시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급조된 계기들이 만들어준 성급한 우연으로 대학 2학년 말부터 신춘문예의 최종심에 들기는 했었지만, 저는 번번이 낙선의 좌절을 맛보아야만 했었습니다. 무딘 재주에다 생계조차 번거로웠으니 시의 깊이와 방법에는 제대로 눈뜨지 못한 채 몇 년을 허송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좌절들을 딛고 제가 다시 시를 쓰려고 했던 것은 1972년 늦가을, 3년을 꼬박 채운 사병생활을 마감하고 제대한 뒤였습니다. 가판대에 놓인 신문에 실린 신춘문예 모집광고를 보고 며칠간 급조해서 응모했던 작품으로 저는 운이 좋게도 마침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던 것입니다.

 

돌이켜 보니 저의 시 쓰기는 순전히 선생님으로부터 비롯된 사건입니다. 아니 시보다 앞서 저는 스승으로서 선생님을 상기할 때가 많았습니다. 어린 제가 뵙기에도 선생님은 대인의 풍모를 지니셨고, 누구라 할 것 없이 주변인들을 감동시키셨습니다. 선생님의 남다른 모습을 우리들 제자들은 누구나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쉰을 채 못 넘기신 아까운 연세로 선생님은 타계하셨습니다. 어느새 그 연치를 넘겨 살아가고 있지만, 저는 시인으로서 선생으로서 난처한 지경을 만날 적마다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처신하셨을까 하고 자문해볼 때가 잦습니다. 그러니 아직도 선생님을 그리워하는 것은 시인된 입장보다도 그분의 제자로서의 사정이 더 큰 것입니다. 저는 정말로 이 상의 수상자가 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끝으로 저를 수상자의 반열에 넣어주신 심사위원께, 그리고 이 상을 운영하시는 나남문화재단 측에도 마음으로부터의 고마움을 전해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꽃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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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회 지훈문학상 심사보고

 

지훈문학상의 규정에 따라 지난 2년간(2005420073) 시집으로 간행된 성과들 중에서 3인의 심사위원이 추천한 바를 종합정리한 결과 다음의 다섯 시인이 최종심의 대상으로 선정되었다. 김명인, 파문(문학과지성사); 신현정, 자전거 도둑(애지); 장경린, 토종닭 연구소(문학과지성사); 최종천, 나의 밥그릇이 빛난다(창비); 최하림, 때로는 네가 보이지 않는다(랜덤하우스중앙).

 

10일의 검토 기간을 거친 뒤 이루어진 최종심 회합에서 심사위원들은 후보를 김명인, 최하림 두 시인으로 좁히고, 다각도로 의견을 교환한 끝에 김명인의 파문을 수상 시집으로 결정하였다. 나머지 세 권의 시집도 각기 뚜렷한 개성과 시정신의 밀도를 보여주는 성과로서 높이 평가되었으나, 심사대상 기간의 성과와 함께 그 이전의 시력(詩歷)이 보여주는 모색과 성취의 궤적 또한 고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취지에서 앞으로의 시적 진전을 더 기대하기로 했다.

 

최하림, 김명인 시인의 시집들이 보여주는 공통점은 삶의 남은 자락이 그다지 많지 않다고 느끼면서 이 세계를, 그리고 자기 자신을 응시하는 시선일 것이다. 이런 유형의 시편들이 흔히 빠져들기 쉬운 상투적 정신주의 내지 고답적(高踏的) 달관의 유혹을 거절하고 사물들과 상황을 바라보는 절제된 태도에 우리는 주목했다. 아울러, 그러한 시적 긴장이 두 시인의 오랜 시작생활을 통해 견지되어온 서정적 자기규율의 성실성에 기초해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의견을 같이했다.

 

그런 가운데서 김명인 시인을 수상자로 선정하게 된 이유는 작품의 원숙함 속에 살아있는 주제와 언어의 치열성이었다. 1970년대 후반의 반시(反詩) 동인활동과 첫 시집 동두천(1979)으로부터 약 30년의 시적 여정(旅程) 동안 작품세계에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지만, 그는 언제나 자신의 주제와 시적 상황에 대한 긴장된 관계를 견지해왔다. 근년의 작품들에 자주 등장하는 죽음 또는 허무의 문제들에 대한 시적 접근방식에서도 그의 시선은 보기 드물게 날카롭고, 그의 언어는 강선(鋼線)처럼 팽팽하다. 이러한 긴장과 치열함이 앞으로도 값진 성과를 산출하리라 기대하면서 우리는 그의 이름을 지훈문학상 수상자의 명단에 올리고자 한다

 

심사위원 김흥규 정희성 황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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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택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

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 있는 것 같다.

 

말은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 있는

몸 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이 한 웅큼씩 뽑혀나오도록 울어보지만

말은 눈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수천만 년 말을 가두어 두고

그저 끔벅거리고만 있는

, 저렇게도 순하고 동그란 감옥이여.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서

소는 여러번 씹었던 풀줄기를 배에서 꺼내어

다시 씹어 짓이기고 삼켰다간 또 꺼내어 짓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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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시쓰기는 제가 좋아서 스스로 선택한 일입니다. 몸이 배고파서 밥을 찾듯이, 목말라서 물을 찾듯이, 내 몸이 원해서 저 스스로 한 일입니다. 내 몸이 그것을 원한 것은 그 안에 오랫동안 갇혀 있는 어둡고 축축하고 냄새나는 무엇인가가 있었기 때문이고, 그것이 내 몸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못하고 뒤척이며 몸 밖으로 나오려고 용을 썼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 없고 형체 없는 생명체가 자신에게 맞는 언어의 형식을 발견하고 그것을 입는 순간, 몸 밖으로 나온 것입니다. 등단 전의 습작기간에, 몸 밖으로 나온 것은 괴물 같은 것이었습니다. 눈뜨고 보기 힘든 몰골이었습니다. 내 몸 속에서 충분히 숙성되고 발효되지 못한 것들이 직설적으로 배설하듯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제 습작과정은 그것에 이목구비를 붙이고 피부를 입히는 것이었고, 그래서 아주 흉하지 않게 되었을 때 겨우 시인으로 등단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제 속에 든 것들에게 햇볕을 쪼이고 바람을 맞게 한 것이 지금까지의 제 시쓰기입니다.

 

내 몸이 좋아서 하는 일이니 시쓰기는 자족적인 일이지만, 그러나 자족적인 일이 되지 않을 때도 많이 있었습니다. 처음 시를 쓸 때의 절박함이 어느 정도 충족되고 나니, 그 동안 써온 시들이 하나의 관습이 되어 지금까지 달려온 관성의 힘으로 앞으로 나아가려 했기 때문입니다. 이 관성의 속도가 자기에게 편승해서 손바람을 날리며 쓰기를 유혹했기 때문입니다. 시가 안 써지면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을 간혹 받는 일이 있는데, 그때마다 저는 쓰지 않는다고 대답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내 박약한 의지와 우유부단과 그것을 합리화해 줄 여러 사정에 의해서 억지로 쓴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써지지도 않고 그래서 꽤 오랫동안 쓰지도 않아서 이러다 정말 시를 못 쓰는 게 아닌가 우려가 될 때도 있었습니다. 먹고사는 일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아예 시가 계속 써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삐딱한 생각을 하면 갑자기 시가 솟구쳐 나와서 아슬아슬하게 시인의 이름을 이어가곤 했습니다.

 

이번 상을 받게 된 시집인 시인의 말에서 저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너무 건조해서 불면 먼지가 날 것 같은 머리와 가슴. 도저히 시가 나올 것 같지 않은 그곳에서 그래도 시가 나오는 이유는 끊임없이 몸을 물고 늘어지며 뒤척이는 마음이 있기 때문. 지루하고 답답한 삶의 압력이 강제로 상상력을 분출시키기 때문.

 

이 글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미 제 몸은 아름다운 시를 쓸 수 있는 물기가 다 말라버렸습니다. 도시와 아파트와 자동차와 온갖 편의시설이 없으면 하루라도 살 수 없을 만큼 몸은 도시문명에 오염되었고, 많은 본능적인 감각들이 퇴화되었고, 자연과의 친화력은 거의 상실되었습니다. 제 몸은 시를 쓰기에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치명적인 불구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시가 나오는 제 몸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시인으로서 시를 쓰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제 몸 속에, 어두운 곳에서 나오고 싶어하는, 사람이든 동물이든 괴물이든 자신에게 맞는 형체와 이름과 언어를 부여받고 싶어하는, 갇혀 있는 생명체가 있어서 그것이 햇빛과 바람이 있는 곳으로 나오려고 하기 때문에 시가 나오는 것입니다. 제가 그것들을 꺼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저희들의 필요에 의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내 상상력을 압박하여 몸 밖으로 강제로 밀고 나오는 것입니다.

 

시쓰기는 자족적인 일이니, 쓰는 행위 자체가 자신으로부터 상을 받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송구스럽게도 여기에 더하여 상을 하나 더 얹어 받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그 보잘것없는 일에 지훈이라는 큰 이름으로 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상을 받게 되니 그동안 보이지 않던 제 시의 왜소함, 부족함, 시에 대한 저의 소극적인 자세가 갑자기 눈에 확 띄는 것 같습니다. 그것들이 지훈 선생님의 투명하고 엄격한 눈앞에서 다 들키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제 시를 보는 눈과 태도가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것은 저에게 큰 격려이기도 합니다. 저는 지훈문학상이 저에게 주신 반성의 뜻과 격려를 다같이 기쁘게 받겠습니다. 그것들로 새로운 용기를 제 몸에 수혈하겠습니다. 부족한 글을 뽑아 격려해 주신 세 분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이 상을 제정하고 운영하시는 나남출판사와 지훈상 운영위원회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갈라진다 갈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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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회 지훈문학상 심사보고

 

심사위원들은, 지난 2년 동안에 출간된 모든 시집들을 심사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지훈문학상의 규정을 염두에 두면서 이 시기 안에 발간된 김기택의 와 박형준의 , 이정록의 의자를 중점적으로 논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기택은 사물에 대한 독특한 관찰과 치열한 탐구정신을 지속적으로 보여준 점에서, 박형준은 경쾌한 상상력의 전개와 현대적 서정성을 조화롭게 연결시킨 점에서, 그리고 이정록은 자연과 인간의 교감을 개성적인 표현방법으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모두 수상자가 될 만한 시인들이라는 데 심사위원들은 의견을 같이하였다. 그러나 한 사람의 수상자를 정할 수밖에 없어서 결국 김기택의를 수상작으로 결정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 작품이 시적 진실을 엄정히 추구했던 지훈 선생의 문학정신에 제일 가까운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김기택의 는 도시적 삶의 비인간화 현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도 비관하거나 절망하는 어조를 보이지 않는다. 시인은 도시생활의 이모저모를 섬세하면서도 강인한 의지로 관찰하는 가운데, 일상인들이 눈여겨보지 않는 새와 나무, 평범한 동물과 미세한 벌레의 움직임 혹은 생명력을 통해 우리의 삶과 현실을 냉정히 반성하고 희망을 찾으려 한다. 이러한 이성적 반성의 노력과 희망의 의지뿐 아니라 이 시집을 관류하고 있는 긴장된 시적 정신과 진실에의 강한 열정도 예사롭지 않은 시인의 미덕으로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발간된 지 1년이 지난 이제 뒤늦게나마 이 시집에 지훈상의 영예가 돌아가게 된 것을 기쁘고 다행스럽게 생각하며, 시인에게 진심으로 축하의 인사를 전하고자 한다.

 

심사위원 오생근 김주연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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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호텔 / 이문재

- 인도에서 소녀가 오다

 

 

*

 

옥상 위에 공무원들이 배치되었다

저녁 일곱시 구분 정각

꽃가루가 일제히 제국광장 상공에 흩날려야 한다

역기는 충분할 정도가 아니라 과도하기까지 하다

늙은 총독의 초대장에는 오랜만에 금박이 입혀져 있다

관저 주위의 병력은 충분하다

오늘밤에는 우선 샴페인을 한 잔 마셔야 할 것 같다

 

*

 

나로서는 고맙지 않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이곳의 사회적 인프라는 순진함과 비열함이다

 

제국에서 공인한 종교에 종사하는 한 승려가

행사 기간 내내 반도 곳곳이 성소(聖所)였다는 글을 신문에 발표했다

그에게 전화를 걸어 치하했다

 

제국은 영원할 것이다

 

*

 

인도에서 축구공을 만들다 눈이 멀었다는 소녀가 왔다

다섯 살에 가장이 되어 이 년 동안 축구공을 꿰매다가

일곱 살 때 실명했다는 것이다

국제 시민단체들이 눈먼 인도 소녀를 초청해

세계배 쟁탈 축구대회를 지원하는 초국적기업들을 성토했다

스포츠용품을 생산하는 초국적기업들이

3세계 아동의 노동력을 부당하게 착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눈이 먼 인도 소녀는 세계적인 축구 선수들에게 말했다

아저씨들이 차는 축구공에 가난한 어린이들의 피와 땀이 서려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기사는 많이 나오지 않았고 나왔다 해도 작게 취급되었다

툭하면 눈물을 흘리며 성금을 내곤 하는 이곳 사람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시청 앞 광장으로 몰려들었다

디지털 강국의 이미지를 압축한 개막식 전야제가

제국의 전파를 타고 지구 반대켠까지 생중계되었다

 

*

 

광장에서 보았다

젊은이들은

관음증 환자인 동시에 노출증 환자였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카메라가 있었다

 

새벽 세시 현재

본국 국기는 불태워지지 않았다

 

여름 휴가는 넉넉해질 것 같다

 

*

 

(대단한 것도 아니지만) 본국 언어를 배워놓지 않았다면

내 능력은 절반 이상 평가절하되었을 것이다

본국어 단어를 매일 세 개씩 외운 것이 벌써 몇 년째인가

이곳 언어는 아침 인사말 하나라도 구사해선 안 된다

(, 명예시민증을 호텔에 두고 왔다)

 

*

 

꿈은 이루어진다고?

제국에서

이루어진 꿈은 꿈이 아니다

그대들의 꿈은 늘 미루어지게 되어 있다

 

*

 

서쪽 바다에서 교전이 발생했다

교전이 끝나자 남쪽에서는 내전이 일어났다

전혀 새롭거나 복잡한 상황이 아니다

 

본국에서 온 애인은 체중이 조금 늘어나 있었다

내일 아침에는 푸른색 넥타이를 매라고 한다

 

 

 

 

제국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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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휴대전화를 통해 수상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온 첫 마디가 무겁습니다였습니다. 저에게 조지훈 선생은 오래 전부터 크고 무거운 이미지였습니다. 선생을 직접 뵌 적은 없지만(만나뵐 수가 없었지요. 선생께서 돌아가시던 1968, 저는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던 9살 짜리 코흘리개였습니다), 우연찮게도 제게는 고려대 출신 선배 문인이 많았습니다.

 

제가 나온 경희대 국문과가 황순원, 조병화 선생 운운하는 것처럼, 연배가 지긋하신 고대 출신 선배들은 지훈 선생에 대한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가령, 두루마기 차림으로 혼자 정문을 가로막고, 시위하는 대학생들에게 호통을 치셨다는 삽화 같은 것입니다. 그분들이 들려준 이야기들이 내 안에 오래 쌓여 크고 무겁다는 앙금으로 남아 있습니다.

 

무거운 상을 받으면서, 상이란 벌과 대단히 흡사한 구조를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숙연했습니다. 문화의 전 국면은 물론, 개별적 삶의 진전도 상과 벌 사이로 난 길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상과 벌은 우선, 공개적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몰래 주는 상이나, 아무도 모르는 데서 받는 벌은 없습니다. 상과 벌은 대 사회적이고 또 매우 직접적입니다. 죽은 자에게 주는 상이나 벌은 없습니다.

 

상벌은 그것을 받는 사람에게 강력한 성찰의 계기를 제공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상을 받는 자는 박수를 받고 벌을 받는 자는 손가락질을 받지만, 수상자나 수형자 모두 진지하게 자기 삶을 돌아보고 들여다 봅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서 얼마큼 와 있는 것인가, 그리하여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나와 타자, 나와 자아는 서로 편안한가, 아니면 불편한가. 그리하여 상을 받거나 벌을 받는 순간, 당사자는 삶의 중심, 우주의 중심입니다. 상과 벌은 사랑이나 질병, 죽음처럼 전적으로 당사자에게 주어진 몫입니다.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고,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상과 벌의 본질일 것입니다.

 

상벌은 또 주는 쪽과 받는 쪽이 분명하게 나뉩니다. 스스로 상을 주면 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이고, 또 스스로 벌을 내리면 신경정신 계통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받기 쉽습니다. 큰 상일수록, 또 큰 벌일수록 그것을 받는 사람은 겸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삶과 정면으로 마주 선다는 것은 아늑한 일이 아닙니다. 어떤 선사가 말했듯이 진실이란 우리가 두려워 하는 그 무엇이기 때문입니다. 상과 벌은 바로 그런 진실과 대면하게 합니다.

 

가장 성숙한 수상자는 상에서 벌의 의미를 발견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릇된 가치와 제도가 내리는 벌을 기꺼이 상으로 받아들이는 순교자나 혁명가, 예술가들이 그런 것처럼 말입니다. 돌아보면, 역사의 방향을 바꾸거나 시대에 브레이크를 건 정신이나 운동들, 기왕의 질서와 개념을 뒤흔들며 끝끝내 인간과 생명을 옹호한 예술가들은 스스로 벌을 받기로 작정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상과 벌은 연속과 단절의 전위입니다. 상을 통해 기왕의 미덕이 전승, 유지되고, 벌을 통해 기왕의 악덕이 지탄의 대상으로 떠오릅니다.

 

오늘 저는, 제가 받는 상에서 벌의 의미를 굴착하려고 합니다. 저에게는 무거운 상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저는 지조론과 무관한 작은 삶입니다. 심사위원들이 지적했듯이, 저는 선비, 즉 지사이기보다는 겨우 한 사람의 시민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 작은 시인입니다. 제가 짧은 소견으로 이해하는 선비란, 자기를 지키는 사람입니다. 스스로에 대해 대단히 엄격하고, 세계에 대해 대단히 예민한 존재입니다. 글과 삶 사이에 시차가 없는 삶입니다. 그러면서도 아량과 여유를 갖고 있는 향기로운 인간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직 선비가 못 됩니다. 글과 삶 사이가 아득하게 멉니다. 신념이 많지도 않고, 있다 해도 분명하지 못합니다. 삶 또한 구차하고 옹색할 때가 많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오랫동안 선비적 삶은 저에게 유예될 것입니다.

 

지훈은 시 <낙화>에서 꽃이 지기로소니/바람을 탓하랴라며 바람으로 대표되는 외부적 요인을 일거에 일축하며 즉 자기 자신으로 온전하게 돌아가 있지만, 저같이 미욱한 시인은 꽃이 지지도 않았는데 바람을 문제 삼곤 했습니다. 낙화의 원인을 끊임없이 외부에 전가해왔습니다. 꽃이 지지 않는 아침에도 울고 싶다며 감상에 젖곤 했습니다. 지훈은 <낙화> 이후 전쟁의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며 시대의 전면으로 나섭니다. <터져오르는 함성>에서 권력의 구둣발이 네 머리를 짓밟을지라도/(...)/절망하지 말아라 절망하지 말아라라며 민주주의를 희구합니다. 저는 지훈의 이 전환에 주목합니다. ‘목어를 두드리다/졸음에 겨워하던 청록파의 감수성이 어떻게 ‘1960년대의 포악한 정치와 맞서는 사자후로 변화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당시 지훈은 40대 초반이었습니다.

 

이번에 지훈상을 수상하게 된 제 시집 제국호텔은 제가 40대 초반에 쓴 시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 시집의 상당 부분은 지사적 사유와 삶이 불가능한 시대에 대한 질문이고자 했습니다. 시의 사회적 효용이 용도 폐기되었다고 하는 판정에 대한 문제 제기이고자 했습니다. 갈수록 시가 작아지고 있습니다. 한국 시는 형용사와 부사의 울타리 안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시는 곧 서정시였고, 어느 사이엔가 시인은 변방으로 물러난 인간문화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시는 세상과 무관해졌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개별적 삶, 실존적 삶의 안쪽을 깊숙이 파고드는 시도 많지 않습니다. 시는 외치지 않았고, 그렇다고 속삭이지도 않았습니다. 많은 시가 시인과 독자, 언어와 현실 사이에서 부유하고 있습니다. 문학의 언어, 문학에 대한 언어, 문학을 위한 언어에는 패배주의적 분위기가 짙게 배어 있습니다. ‘낙화하는 시는 바람만 탓하고 있습니다. 바람을 탓하며 절망하고 절망하고 또 절망하고 있습니다. ‘대중문화의 구둣발이 시의 머리를 짓밟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국호텔은 사실 제가 감당하기 힘든 무거운 제목입니다. 요즘 우리 시의 흐름에서 벗어나 있는 이미지입니다. 1990년대 이후 문학과 인문학이 내팽개쳐버린, 이른바 거대담론입니다. 저의 치기, 저의 오만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거스르고 싶었습니다. 아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형용사, 부사도 우리 시를 구성하는 주요한 유전자이지만, 그것은 우리 시의 뼈이기 보다는 살이었습니다. 살만 있는 몸은 없습니다. 연체동물은 홀로 서지 못합니다. 저는 제국호텔에서 우리 모국어의 척추, 즉 명사와 동사의 힘을 구축해보고 싶었습니다. 거칠게 말해, 커다랗고 무거운 상상력을 동원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저 제국이 우리의 일상적 삶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엄연한 현실을 공감하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부정하고 외면하려 해도, 우리는 제국 안에 살고 있습니다. 그것도 세들어 살고 있습니다. 냉전시대를 갈라 놓았던 장벽이 무너지자, 모든 것이 벽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시는 이 무수한 벽을, 우리 안에까지 들어와 있는 저 제국의 벽에 대해 발언하지 않습니다. 분단 현실도 그대로입니다. 빈부 격차는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제가 속해 있는 40대는 물론, 우리의 청년들은 일자리를 찾지 못해 고통스러워 합니다. 일이 없으면 꿈도 없어집니다. 이 사태는 치명적입니다. 여기에 종교 갈등, 민족 분쟁, 인종 차별, 문화 충돌, 그리고 이 모순과 갈등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생태 환경 문제가 들씌워집니다. 저는 이 지구적 차원의 문제들이 우리의 구체적 일상을 좌우한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제국은 더 이상 미국이나 일본과 같은 단위 국가가 아닙니다. 강대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제국의 황제가 아닙니다. 국가 위에, 초국적 기업이라는 새로운 제국이 우뚝 서 있습니다. 정치적 동맹은 없습니다. 그것은 경제적 제휴의 포장지일뿐입니다. ‘보이지 않는 손은 강대국의 국가 비전이 아닙니다. 초국적 기업의 마케팅 전략이 세계 정책입니다. 초국적 기업의 현지 법인이 총독부입니다. 개별 국가는 초국적 기업의 경제적 식민지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영토는 시장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인간의 시대는 벌써 끝났는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백성과 국민, 시민의 시대를 거쳐 소비자로 진입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소비자입니다. 소비 능력이 있는 인간과 소비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인간. 인간은 소비자입니다. 이것이 제가 거칠게 파악하고 있는 제국의 풍경입니다. 그런데도 한국 시는 이 구체적이고 일상적이며, 사회적이며 심리적인, 그리하여 공포스럽기 그지없는 제국의 거대한 그늘에 대해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소비자의 시대에 유일하게 소비자이기를 거부하고, 마지막 개인이기를 주창할 수 있는 인간이 시인입니다. 시는 자본주의 유통 구조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습니다. 종교와 학문, 그리고 예술이 모두 자본주의 시스템 속으로 편입된 시대, 자본주의로부터 벗어나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가 시인입니다. 시인이 서 있는 위치가 시인의 역할을 규정합니다. 시인은 제국의 안에서 제국의 전모를 조망하는 이중적 존재입니다. 시인은 소비자이면서, 자립하고 자존하고 자긍하는 시민이기를 고집하는 분열증적 상상력입니다.

 

'몰락의 길은 평이하고 향상의 길은 간고하다'는 지훈의 금언을 되새기며 무거운 수상소감을 마치고자 합니다. 지훈 선생님의 유족 분들, 상을 제정하고 운영하시는 나남출판사 조상호 사장님과 지훈상 운영위원회 선생님들, 그리고 시가 아니려고 애쓰는 어설픈 시에 후한 점수를 매겨주신 세 분 심사위원 황동규, 김인환, 최동호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무거운 상을 무거운 벌로 달게 받겠습니다.

 

 

 

 

혼자의 넓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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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회 지훈문학상 심사보고

 

지훈 조동탁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지훈 문학상이 어언 제 5회를 맞게 되었습니다. 지난 2년 동안에 출간된 시집들을 대상으로 심사를 진행하면서 심사위원들은 무엇보다 먼저 작품의 완성도와 성취도를 중요한 척도로 삼아 논의하였으나, 지훈 선생의 시가 지닌 조형성, 전통성, 사회성도 간접적인 기준으로 고려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318일에 모여 심사위원 각자가 세 권의 시집을 추천하기로 하고, 48일에 추천된 시집들을 대상으로 구체적인 논의에 들어갔습니다. 가장 우수한 시집 한 권을 선정하기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우리는 중복 추천된 시집들을 중심으로 최근에 다른 상을 받았다든가, 등단 시기가 얼마 안 되어 아직 충분히 검증되지 않았다든가, 반대로 노대가에게 상을 드리기는 편안하지 않다든가 하는 이유를 제시하여 대상 시집의 수효를 줄여나가면서 작품의 질에 대한 평가를 병행하였습니다. 최후로 남은 시집은 이문재 시인의 제국호텔이었는데, 이 시집을 선정하기로 한 데 대하여 세 사람의 심사위원은 일말의 거리낌도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합의하였습니다.

 

강인한 자기반성과 심오한 비판의식으로 이문재 시인은 우리 시사의 한 맥을 새롭게 탐구해 왔습니다. 이미지를 애써 만들려고 하지 않더라도 그의 문체는 언제나 일반화된 도식을 떠나서 발생상태의 감각적 인상을 참신하게 포착하였습니다. 자기표현을 극도로 절제하여 자신을 작게 나타내려고 노력하지만, 항상 이 땅의 가장 낮은 곳으로 마음을 열어놓는 비판적 애정이 이문재 시인의 시에 견고한 의미의 구조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야 한다지만 나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이문재 시인의 질문은 우리 시대와 우리 시대의 불교에 대한 예리한 비판입니다. 인간은 자기를 파악하려고 하면 자기를 전보다 더 모르게 되는 존재입니다. 바로 이 자기와 다른 존재가 허위의 근거이면서 동시에 초월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일상생활 속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면에서나, 신자유주의의 일방적 세계화를 비판하는 면에서나, 이문재 시인의 시는 전통문화와 불교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는 지훈 선생의 시를 계승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훈 선생의 선비의식에 대비되는 이문재 시인의 시민의식에도 유의하였습니다. 우리들 세 사람의 심사위원은 그의 시를 통하여 우리 시사가 새롭게 조명될 수 있도록 이문재 시인이 자기가 선택한 길을 끝까지 밀고 나아가기를 기대하면서 이문재 시인에게 진심으로 축하의 인사를 전하는 바입니다.

 

심사위원 황동규(시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최동호(고려대 국문과 교수) 김인환(고려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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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영시인의 시집 <은빛호각>을 읽으면서 내내 스미던 느낌은 바로 행복이라는 것이었다. 개인적인 경험들을 한 편의 시로 그림처럼 펼쳐 보이는 시인의 솜씨가 유유하다. 시란 모름지기 이렇게 그림이 보이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흑백으로 펼쳐지는 이 그림들 속에는 참으로 크게 욕심 부리지 않고 살아가는 시인의 묵은 기억들이 은빛호각소리처럼 길고도 선명하게 웃고 있다.

 

그의 시에는 사람을 향한 애정만큼의 꽃송이들이 봉긋봉긋 피어있다. 소설집 한권을 읽고 난 기분이 들만큼 수런수런, 수많은 얘깃거리가 강물처럼 흘러간다. 어쩌면 칼날 같았음 직한 일들도, 가슴이 에였음직한 일들도....... 그 힘겨웠을 기억들마저도 이렇게 따뜻하게 풀어내다니, 기억이 추억이 되면 이토록 따스해지는 것인가. 시인에게는 저세상마저도 편안하고 따스한 자연으로 보여 지는 가 보다.

 

중학교 일학년 때였다. 차부(車部)에서였다. 책상 위의 잉크병을 엎질러 머리를 짧게 올려친 젊은 매표원한테 거친 큰소리로 야단을 맞고 있었는데 누가 곰 같은 큰손으로 다가와 가만히 어깨를 짚었다. 아버지였다. <차부에서> 전문

 

새벽녘 대문을 활짝 열어젖힌 추탕집 펄펄 끓는 가마 곁에서 플라스틱 수조 얕은 물을 튀기며 미꾸라지들이 아주 순하게 놀고 있다. <> 전문

 

내 영혼은 오늘도 꽁무니에 반딧불이를 켜고 시골집으로 갔다가 밤새워 맑은 이슬이 되어 토란잎 위를 구르다가 햇볕 쨍쨍한 날 깜장고무신을 타고 신나게 봇도랑을 따라 흐르다가 이제는 의젓한 중학생이 되어 기나긴 목화밭 길을 걷다가 느닷없이 출근했다가 아몬드에서 한잔하다가 밤늦은 시간 가로수 긴 그림자를 넘어 언덕길을 오르다가 다시 출근했다가 이번에는 본 적 없는 어느 광막한 호숫가에 이르러 반딧불이도 끄고 다소간의 눈물 흘리다. <잠들기 전에> 전문

 

삶이란 -새벽녘 추어탕집 펄펄 끓는 가마 곁에서도 물을 튀기며 순하게 놀고 있는 미꾸라지들처럼-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죽음과 삶,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 그런 것들이 한 데 섞여 둥둥 떠다니는 가운데, 아무것도 미리 알지 못한 채, 그저 불어가고 불어오는 바람처럼, 그러다가 마침내 어느 길모퉁이에선가 그 떠다니는 것들과 하나씩 입 맞추며 가는 그런 것이 삶이리라. 깊고 추운 겨울날, 은빛호각 한 개 품에 앉고 뜨신 방에 엎드려 펼쳐 보기를 권한다.

 

 

 

 

은빛 호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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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존경하는 김종길 선생은 최근 어느 잡지(시와정신2004년 봄호)에 기고한 글에서 이른바 시격(詩格)에 관한 격의 이론을 소개하면서 오늘날 우리는 시비평에 있어서보다 오히려 일상생활에서 간혹 격의 높낮음을 이야기할 뿐이라며 옛날의 한시비평에서도 격의 고하, 즉 시적 가치의 위계는 있었다중국 역대의 격이론을 살펴보면 예쁘거나 기이하거나 강렬한 것보다도 유원(幽遠)하거나 고고(高古)하거나 담박(澹泊)한 것을 격이 높은 것으로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고 하셨는데 조지훈 선생의 시야말로 바로 여기에 딱 들어맞는, 우리 근대시사에서는 몇 안 되는 특이한 전통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훈 선생의 모든 시가 다 그렇다고 단언할 수 없겠습니다만, 우리 시 읽기에 눈 밝은 신경림, 정희성 시인이 공편한한국현대시선,Ⅱ》(창작과비평사, 1985)에 수록된 지훈 선생의승무(僧舞),고사 1(古寺),낙화(落花)는 김종길 선생이 말씀하시는바 시격의 위의(威儀)를 두루 갖춘 기품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적 정서 또한 유원하고 고고하며 담박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어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자유시임에도 마치 고조(古調)의 정형을 연상하듯 2행씩 끊어 쳐서 웅혼하고 유장한 가락을 형성하고 있는 이 시를 청년 시절부터 수없이 반복해서 읽어왔지만 내면을 스치는 어떤 서늘한 기상과 호소하듯 절제된 애수가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전혀 낡지 않은 채 제 가슴을 촉촉이 적셔줍니다. 제가 좋아하는 한 후배 시비평가는 저의 이런 느낌을 실상 모든 시는 그것이 작품이 되는 순간 이미 시계의 시간에서 탈출해” “과거로 밀려서 사라지지 않는영원의 시간을 산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만, 지훈 선생의 작품 중 이렇듯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또 하나의 예를 들라면 저는 선뜻고사 1을 들고 싶습니다.

 

목어(木魚)를 두드리다

졸음에 겨워

 

고오운 상좌 아이도

잠이 들었다.

 

부처님은 말이 없이

웃으시는데

 

서역(西域) 만릿길

 

눈부신 노을 아래

모란이 진다.

 

40여 년 전에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제 마음은 제2연의 고오운에서 크게 한번 출렁거렸는데, 오늘 그 구절을 반복해 읽어도 제 내면의 리듬은 바로 여기에서 다시 한번 출렁! 합니다.

 

세상에는 상도 많고, 좀 외람되이 말씀드리자면 아예 없었으면 하는 상도 많지만 이렇듯 고매한 인품과 기풍이 서린 지훈상을 받는 제 마음 또한 조찰히기쁩니다. 65년 전인 1939년에 지훈 선생의 시를 세상에 처음 내보낸 지용 선생의 어느 시 구절을 빌려 표현하자면 새삼스레 눈이 덮인 뫼뿌리와/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를 한 느낌입니다. 그토록 두껍고 완고한 동토(凍土)에도 이제 막 얼음 금가고 바람 새로 따르거니여기 오신 모든 분들께도 새로운 기운이 가득 생동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상을 제정하고 운영하시느라 애쓰시는 분들, 심사하신 분들께도 깊은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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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회 지훈문학상 심사보고

 

조지훈 선생의 고결한 인품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지훈상의 심사에 임하면서 우리는 새삼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었다. 길지 않은 한평생을 살면서도조지훈 전집에서 볼 수 있듯이 청렬하면서도 아름다운 예술적 성취와 호한한 학문적 탐구, 그리고 준열한 지사정신을 통해 이 땅 정신사와 예술사에 불멸의 업적을 남겨주었기 때문이다.

 

20034월부터 20043월까지 출간된 주요시집 100여 권 가운데 심사위원들이 주목한 것은 다음 세 권이었다.

 

먼저 조창환의수도원 가는 길(문학과지성사)은 자연에 대한 그윽한 명상이 종교적 영성(靈性)을 느끼게 할만큼 맑고 깊은 것이어서 관심을 환기하였다. 그러나 지훈시에서 볼 수 있는 정신의 준열함이나 치열성이 다소 약한 것이 아쉬움으로 느껴졌다.

 

김영석의모든 돌은 한때 새였다(시와시학사)는 정련된 시어와 정신의 지향성이 매우 높은 성취를 보여준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잘 씌어진 시들이 흔히 그렇듯이 굵고 깊은 울림을 던져주는 데는 다소 아쉬운 느낌을 준 것이 사실이다.

 

수상자로 선정된 이시영의은빛 호각(창비)은 시인 특유의 날카로운 사회의식과 섬세한 예술의식이 탄력있게 조화를 이룸으로써 아름다운 정신의 울림을 던져준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무엇보다도 이시영 시인이 등단 이래 견지해온 지사적 기품과 성정이 서정성의 내면을 관통하고 있어서 지훈정신과도 연결되는 것으로 이해되었기에 심사위원 모두의 지지를 받았다.

 

앞의 두 분도 지훈상을 받을 충분한 자격과 업적이 있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어차피 수상자는 한 사람이어야 하기에 아쉽지만 다음 기회로 유보되었다. 앞으로도 지훈상이 더 훌륭한 분들에게 주어져서 해가 갈수록 더욱 빛나는 큰 상으로 자리잡아가기를 희망한다.

 

심사위원 김재홍(경희대 국문과 교수) 최동호(고려대 국문과 교수) 홍기삼(동국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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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 하성 운호가든집에서 / 고형렬


  이상한 집이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낙엽이 떨어져 뒹구는 외진 口字 한옥
  두 남자가 설거지를 하다가 우리를 맞아주었다.
  오후 5시였다.

  여자는 어색하게 5호실로 들어가는 남자를 뒤따라
  구두를 벗고
  몸을 감추듯 안으로 들어갔다, 가방을 안고.
  돌아앉아서 신을 가지런히 밖으로 세워두는
  여자는 얼굴이 작은 편이다.
  한참 뒤

  젊은이가
  물과 물수건과 메뉴판을 가지고 돌아왔다. 남자는 소머리
국밥을 시켰다.
  여자는 "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말없이 밖으로 물러나갔다.

  방안은 정적이 있었다. 뜯어진 도배지 틈이
  붉은 황토를 내보이는 흙벽돌집이다.
  김포 석양이 동편 벽을 비추고 있었다.
  작은 창을 가린 처녀아이 속치마 같은 하얀 커튼 사이로.

  '현대식 건물이 아니다.'

  남자는 나그네, 여자는 돈 받고 따라온
  색시 같았다.
  그녀는 중매를 두고 처음 따라온 사람처럼 쳐다보고
  웬일인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그는 가만히 있었다.

  얼마 만의 둘만인가.
  계속 둘이 말없이 뭔가를 기억하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가 음식상을 마루에 내려놓고
  노크를 한 것이다.
  그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새롭고 즐거웠다.

  "예."
  잠시 후 문고리를 잡는 소리가 나더니 드르륵
  문이 열렸다. 청년은 상 앞에 예바르게 앉는다.
  우리는 가만히 있었다. 그는 살이 흰 김치와 삭은 깍두기
를 올려놓고
  뚝배기를 올려놓고, 쟁반을 들고 일어났다.

  그가 말했다.
  "맛있게 드십시오." 여자 같았다.
  그때 둘은 합장하듯 총각을 쳐다보며 "예." 하고 얼른 대
답했다.

  여기가 한국인가 싶었다. 웃음이 나왔다.

  뽀얀 사골 국물에
  삼베 쪼가리같이 얇게 베어 넣은 소머릿살
  접시에 담아온 썬 파를 한숟갈 넣고 굵은소금 한스푼 넣
고 맛을 보았다.
  국물이 진하다.
  소 사골은 어쩌면 이렇게도 사람의
  젖처럼, 뽀얀 국물을 내는 걸까.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작은 스테인리스 그릇은 뜨거웠다.
  뚜껑을 여니 김이 나는 김포 하성의 하얀 쌀밥
  김포 땅은 어쩌면 이렇게 백미를 만들어내는 걸까.
  그랬더닌 다시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차진 쌀밥은 잘 익어서도 반짝이고 곤두서 있었다.

  '이런 식사도 참 오랜만이구나.'

  여자는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서 입술 사이로 가져가고,
남자는
  후루룩 시끄럽게 떠먹는다.
  여자는 참하고 남자는 짓궂다.
  남자는 소리까지 지른다. "아 맛있다. 시원하다. 정말
달다."
  여자는 말이 없다. 누님같이. 남자를 따라다니는 여자
는 다 그렇지.

  다 먹을 때까지 국그릇이 따뜻했다.

  밖엔 간혹 낙엽 궁구는 소리뿐
  둘이 조용한 방에서 수저 소리만 딸가닥이며 국을 뜨고
있었다.
  바람의 기척들은 궁금했을 것이다.
  처음 보는
  웬 두 남녀가 5호실로 들어가서 말없이 가만히 밥만 먹
고 있으니 말이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다른 생각도 생길 만한데 머리는 조용하다.
  허리띠를 묶으며 여자는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도 같
은데
  가방에서 잘 접혀진 냅킨 한장을 꺼내 입을 닦는다.
  그때, 남자가 말했다.

  "하룻밤 자고 갈까?" 여자는 웃기만 한다.

  하룻밤 자고 가고 싶은 곳이었다. 정말 하룻밤을 자고 나
가는 사람들처럼
  둘은 해가 지는 김포 하성 운호가든집을 나왔고,
  남자는 음식값 만원을
  지갑에서 꺼내 아쉽게 계산했다.

  집 안과 길이 서로 보이지 않는 은밀한 작은 대문을 배웅
하듯 따라나오는
  주인에게 인사를 하였다.
  "안녕히 계십시오."
  주인은 웃으며 "예, 안녕히 가십시오." 하였다.

  오랜 세월을 그런 에티켓으로 살아온 사람 같았다.

  남자는 저만큼에서 운호가든집을 돌아보았다.

  여자는 그냥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돌아보지 앉았다.
  코트를 입은 그녀 허리가 행복해 보였다.
  주인은 들어가고 없고
  운호가든집만 거기 서 있었다.

  먼 훗날 어느 겨울 저녁, 혼자 운호가든집을 찾아갔더니
주인은 바뀌고 하얀 수박등 하나가 눈발 속에 서 있었다.
상 건너편에서 소머리국밥을 맛깔 있게 먹던 그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김포 운호가든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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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전아하고 선미적인 시세계를 보여준 조지훈선생의 문학의 뜻을 기리는 지훈상을 받게 된 것은 저로서는 의외의 일입니다. 그 의외 속에서 문득, 까마득한 옛 시절을 간신히나마 건져올릴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마치 무한으로 분열되고 경사가 가팔라지는 듯한 세계의 현실과 환상 속에서승무,고풍의상,낙화의 시세계에 대한 그리움을 강하게 느꼈음을 고백합니다. 모든 것이 분쇄된 듯한 시대는 저항하다 못해 이젠 버려진 형국으로 치장된 것 같기도 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자화상일지 모릅니다. 불현듯이 눈부신 노을 아래/모란이 지는산사의 고우운 상좌 아이가 부재하는 세계는 우리에게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에 대해 이미 외면하고 있는 듯도 합니다. 하지만 새로운 논리, 변명, 대안은 있는 것 같지만 우리를 안심시키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훈의 정치하면서 고풍한 언어가 살아 있는 세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이젠 돌아갈 수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도 같습니다. 그럼으로 하여 그의 시풍은 우리 시에서 몇 안되는 시적 추억으로서 제 가슴속에 살아서 불고 있는 혼과 바람으로 남아 있습니다. 특히 별이 있는 밤의 깊은 하늘을 향하는 을 통한 구도적 혹은 구애적 시경이며 이 지상의 아침에 낙화함으로써 보여지는 의 인연상은 점점 깊어지는 화두처럼 저에게 새롭게만 다가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너무나 험한 지경에 다다랐을지라도 더 이상은 파편화될 수 없다고 판단할 때 어느 마음이든 지훈 시를 찾아 읽을 것이 분명합니다. 소란한 세상 속에서 지훈 시풍을 다시 기억하며 조용해지는 시간을 얻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꽃을 떨구었던 그 나무에게 있었을 법한 이름 지어지지 않은 성품을 느끼면서 다름 아닌 저 자신의 품속에 잠시 머물라고 위로하며 독려하고자 합니다.

 

언제나 부족할 뿐인 저를 수상자로 선정한 심사위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다시 한번 이 나라의 어느 산중에서 한개 별빛에 모두우는눈동자를 기억하고 당대마다 소란한 정황 속에서 꽃이 지기로소니/바람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할지라도 그러나 스스로에게 울고 싶은 아침이 없지 않았다는 고백을 듣는 것만 같아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녹음이 짙어가는 계절에서 저는 꽃을 기억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꽃이 또 다른 말을 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지만 저 바람들이 몸을 뒤집어주는 잎사귀 뒤켠에서 열매가 크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집니다. 허전하여 그것이 바로 우리네 자식들이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시간이 걸리기를 다 자라야만이 갈 수 있는 지훈의 서역 만릿길이 이제는 초단위로 변하는 세상이라도 저는 더 먼 길을 골라 걸어서 갔으면 하는 생각도 하곤 합니다. 어찌해서라도 완전에 다가가는 누림을 얻고 느끼고 몸에 담고 알아서 건너가기를 또한 바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감사합니다.

 

 

 

오래된 것들을 생각할 때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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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회 지훈문학상 심사보고

 

芝薰의 이름이 붙은 문학상의 수상자로는 선생의 인품과 학덕에 걸맞는 업적과 개성을 가진 인물을 선정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그렇다고 그 일이 작은 지훈이나 뒤에 온 지훈을 찾아내는 일은 아닐 것이다. 심사위원들은 오히려 지훈이 뒷세대에게 기대하였을 창조적 활력을 중요하게 여겼지만, 선생의 웅혼한 그림자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20014월부터 20033월까지 지난 2년간에 발간된 200여 권의 시집 가운데 심사 위원들이 최종적으로 주목한 시집은 모두 네 권이었다.

 

홍신선의 자화상을 위하여는 삶의 방식과 윤리적 기준이 뿌리부터 바뀌는 우리 시대에 자아의 자리를 역사적으로 정립하려는 한 선비 시인의 노력이 담긴 진지한 시집이다. 오랜 시력을 증명하듯 시어 하나하나에서 높은 기운이 감지되었다. 그러나 학자적 조심성에서 기인했을지 모를 강한 자기검열과 번잡한 비유와 은유로 인해 이 시집의 장점이 상쇄되고 있지는 않은가 느꼈다.

 

함성호의 너무 아름다운 병은 문명 비판적 시선과 실험 의욕, 그리고 시적 서정이 긴밀하게 어울려 있는 특이한 시집이다. 재치가 깊은 감정을 자극하고 언어는 빗겨 달아나면서도 힘차다. 안타까운 점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해진 문화적 코드들을 너무 자주 만나게 된다는 사실이다. 대담하고 과격하기까지 한 이 형식과 언어의 실험들은 시인을 사로잡고 있는 문명의 허황함을 흥겹고 애잔하고 어지럽게 증명하는 지점에 아직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닐까.

 

유종인의 아껴먹는 슬픔은 저자의 첫 시집이다. 젊은 날의 고통과 상처와 좌절을 높은 탄력으로 노래하는 이 시집에는 이른바 잘 빠진 시가 많다. 말이 색깔과 선율을 아울러 누리고 있어 이 시인의 타고난 재능을 드러낸다. 심사위원들은 이 젊은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을 기다리자는 데 뜻을 모았다. 저자는 두 번째 책부터라는 프랑스 속담도 있다.

 

수상자로 선정된 고형렬의 시집 김포 운호가든집에서쾌적한장치가 없어 그 장점이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비유에도 상징에도 크게 의지하지 않는 그의 시들은 자주 산문에 가깝다. 그러나 이 시집을 천천히 주의 깊게 읽는다면 삶의 깊은 슬픔과 사물에 대한 고양된 사랑이 아프게 전달되어 오며, 항상 앞서 나가는 말을 막고 시가 있는 곳에서나 없는 곳에서나 우직하게 진실에 천착해온 이 시인을 존경하게도 된다. 한 걸음씩 천천히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는 이 시인에게 지훈상을 주게 된 것이 기쁘다.

 

심사위원 황현산(고려대 불문과 교수) 김혜순(서울예대 문창과 교수) 이성원(서울대 영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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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아픈 별을 찾아서 /이승하

- 아들에게

 

 

취해서 귀가하는 어느 밤이 온다면

집에 당도하기 전에 꼭 한 번

하늘을 보아라 별이 있느냐?

별이 한두 개밖에 없는

도회지의 하늘이건

별이 지천으로 돋아난

여행지의 하늘이건

뼈아픈 별 몇이서

너를 찾고 있을 테니

그 별에게 눈 맞춘 다음에야

벨을 눌러야 한다

잠이 들어야 한다 아들아

천상의 별을 찾는다고 네 발 밑에서

지렁이나 개미가 죽게 하지 말기를

통증을 느끼는 것들을 가엾어하지 않는다면

네 목숨의 값어치는 그 미물과 같지

아들아 네 등뒤로 떨어지며 무수히 죽어간

별똥별의 이름은 없어 뼈아픈 별이기에

영원히 반짝이지 않는단다.

 

 

 

 

뼈아픈 별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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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마르지 않는 우물과 밤하늘의 별

 

아버님께 올립니다.

 

아버님, 요즘 몸은 좀 어떠신지요? 고질이 된 허리병이 더 심해지지는 않았습니까? 지훈 조동탁 시인의 이름을 기려 만든 지훈상의 문학 부문 수상자로 제가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저는 가장 먼저 아버님을 떠올렸습니다. , 김천에 계신 아버님이 이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뻐하시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머님도 물론 기뻐하시겠지만 제가 대학에 취직자리를 얻었을 때도 아버님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으니까 이번에도 반신반의하며 기뻐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그만큼 아버님 속을 썩이고 애를 태운 자식이었습니다.

 

저는 머리가 마구 세어 가는 요즘 들어 더욱 자주, 나한테 아버지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시인이 될 꿈을 가졌으랴 하는 생각을 합니다. 아버님은 저한테 세상살이의 희로애락을 일일이 챙기는 능력을 키워주셨고, 인간 생로병사의 비의를 골똘히 생각하는 버릇을 길러주셨고, 사물의 본질을 뚫어져라 투시하려고 노력하게끔 이끌었습니다. 고통의 뜻을 알고 싶어서 시를 쓴다는 제 나름의 시론도 아버님이 안 계셨더라면 형성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젊은 시절, 소월의 시를 줄줄 외우고 다니셨다는 아버님, 아버님이 누런 원고지에 쓰신 습작소설의 줄거리를 저는 지금껏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직업 경관이 되면서 문학의 꿈을 접으셨지만 시인 조지훈의 이름은 아버님도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조지훈 선생은 청록파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고,승무〉〈고풍의상〉〈완화삼등 주옥같은 시를 남긴 시인입니다. 그러나 지훈 선생은 탁월한 문학론을 전개하여 저를 일깨워준 분이었습니다. 지훈 선생의 문학론은 문학의 예술성과 독자성을 강조한 순수문학론, 문학정신의 지향점이 된 민족문학론, 민족문학의 실천적 방법으로 삼은 고전주의적 문학론, 이 세 가지로 집약됩니다. 지훈 선생이 쓰신 글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순수시는 경향시에 대한 정통시요, 순수시의 영역은 정치, 종교, 사회, 어디에도 갈 수 있는 무제한이나 다만 시가 되고 예술이 되는 것을 전제로 하는 무제한이다.” 이 말씀을 저는 시라는 것이 공리적인 가치나 정치·종교·사회가 추구하는 가치와 완전히 별개일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가치를 초월하는 이상적인 가치, 혹은 미적 가치를 지녀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지훈 선생의 문학론은 제가 평생을 다해 퍼내야 할 우물 같은 금언이라 생각합니다. 우물 같은 말저는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당선소감을 다음과 같이 썼었지요.

 

나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내 문자행위의 출발점은 이것이다. 부끄러워 고개 들지 못할 때, 자신을 이겨낼 수 없다는 무력감에 사로잡힐 때, 원고지를 대하는 일은 구원이 아니라 구속이었다. 줄기차게 꾸짖는 200개의 네모난 입들. 너는 결코 떳떳하지 않아. 너는 벌써 물들어 있어.

 

필요한 것은 의지였으며 부족한 것은 신념이었다. 몇 차례의 시행착오를 더 겪어야 나도 하나의 성채를 가질 수 있을지. 보다 깊은 우물의 의미와 열려진 세계의 끝을 찾으려는 노력. 명암에 대한 성찰에의 길을 이제 떠나야 한다. 언어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내 정신은 늘 부활을 꿈꿀 것이다. 고통마저 사랑하기 위하여. 이 땅 이 시대의 당신들을 벗삼기 위하여.

 

보다 깊은 우물의 의미용비어천가에 나오는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아니 그칠 새 내를 이뤄 바다로 가나니하는 대목에서 따온 것입니다. 저는 등단 무렵이나 지금이나 보다 깊은 우물을 찾지 못해 헤매고 있고, 저의 방황은 아마 평생토록 계속될 것입니다. 시인의 언어는 비가 좀 안 온다고 금방 고갈되는 시내가 아니오, 며칠 퍼붓는다고 금방 콸콸 흐르는 계곡도 아니오,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우물 같은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물 하니까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몇 해 전에 중국에 가서 우물을 본 적이 있습니다. 용정의 윤동주 생가 터에 있는 우물은 너무 깊어서 시 자화상에 나오는 그 우물 같지는 않았습니다만 윤동주는 그 인근 어디서 우물을 길어 올리며 시상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우물이 지하의 세계라면 별은 천상의 세계입니다. 우물은 당연히 차가운 물의 세계이고 별(항성)은 타오르는 불의 세계입니다. 우물은 한계가 있는 깊이의 세계이고 별은 무한정한 넓이의 세계입니다. 어느 한쪽도 놓쳐서는 안 될 세계이지요, 그리고 둘은 모두 유동의 세계이며 밤에 눈뜨고 있습니다. 깊은 우물은 인간을 살리고, 밤하늘의 별은 길 잃은 자를 인도합니다. 우물물을 퍼올려 마시며 윤동주 시인은 별을 보았을 것입니다. 윤동주의 시별 헤는 밤서시에도, 지훈 선생의 시승무絶頂山上의 노래에도 나오는 별은 순수함과 영원함을 상징하지요.

 

우리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별들 너머에는 얼마나 많은 이름 없는 별들이 빛나고 있을까요. 만유인력에 의해 수축을 거듭하다 폭발하는, 질량이 큰 별을 초신성이라고 한답니다. 그리고 별이 수축하면 거대한 압력이 중심으로 몰리다 마침내 고온의 압축 가스가 터져 나오는 격렬한 폭발이 일어나 그 별은 숨지고 만다고 합니다. 수많은 별들은 놀랍게도 숨거두는 그 순간까지 어디론가 빠른 속도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지구를 포함한 태양계가 팽창하고 있고, 태양계를 포함한 은하계가 팽창하고 있고, 은하계를 포함한 이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허블의 우주 팽창설은 많은 천문학자들에 의해 증명된 것입니다. 제가 별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아버님 덕분이었습니다.

 

저는 앞에서 요즘 들어 자주, 아버지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시인이 될 꿈을 꾸었으랴 하는 생각을 해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수상시집이 된뼈아픈 별을 찾아서를 아버님께 헌정한다고 자서에서 말씀드렸었지요. 제목에 아버지가 들어가는 시도 다섯 편이나 됩니다. 지난 설에 갖다드린 그 시집, 읽어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시편 속에서 아버님은 알코올 중독자였다가 식물인간이 되셨다가 식솔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둡니다. 아버님은 술을 간혹 드시긴 했지만 장이 안 좋으셔서 과음을 하면 꼭 배탈이 났었으니 알코올 중독자가 될 턱이 없었습니다. 취하신 모습도 1년에 고작 서너 번, 아주 드물게 볼 수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아버님은 56년 전부터 허리가 안 좋아지시긴 했지만 병원에 입원하신 적이 한 번도 없었고, 더더구나 지금 생존해 계십니다. 그런데 저는 시를 쓰면서 아버님을 부엌칼을 들고 자기 식솔들을 협박하는 인물로 그렸고, 자발적으로 배설하지 못하는 몸으로 그렸고, 뇌사 상태에 빠뜨렸다가 결국 임종을 순간을 맞이하게 합니다. 아버님이 생존해 계심을 아는 사람들은 저의 사기술에 배신감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다섯 편의 시는 그 어느 독자보다 아버님께 읽어드리고 싶어서 썼습니다. 아버님은 이 녀석이 제 애비가 뇌졸중으로 식물인간이 되기를 바라서, 또는 어서 빨리 죽기를 바라서 이런 시를 썼다고 생각하시겠지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부터 그런 시를 쓴 이유에 대해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아버님은 그 시집을 분명 읽으셨을 테지만 제가 1991년에 냈던욥의 슬픔을 아시나요를 읽으셨을 때처럼 격노하지 않고 지금까지 아무 말씀이 없으십니다. 그 시집을 읽으시고는 당장 김천에 내려와 첫 글자부터 끝 글자까지 한 자도 빠뜨리지 말고 다 읽으라고 불호령을 하셨는데 10년 세월이 아버님의 몸에서 기운을 다 뺏어갔나 봅니다. 아버님은 제가 이번에 낸 시집을 읽으시고 이놈이 그때 그렇게 집을 뛰쳐나가곤 하더니 이런 식으로 복수를 하는구나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셨는지요? 아버님, 저는 제가 생각해도 천하에 둘도 없는 불효자식입니다. 이번에 드린 시집을 읽고 많이 괴로워하셨을 테고 서운한 마음도 들었을 테지만 그 시들은 제가 아버님을 이해하려는 지난한 노력의 결과물입니다.

 

아버님의 하나밖에 없는 딸 선영이의 영혼이 돌아올 수 없는 세계로 가버린 뒤, 저는 의지처가 없어 1년 넘게 성당에 가서 죽어라 하고 기도를 드렸던 적이 있습니다. 제 기도의 내용은 단 한 가지였습니다. 선영이가 정상으로 돌아오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아버님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해달라고 저는 빌고 또 빌었습니다. 하느님이 그런 청을 들어주실 분이 아니지요. 그래서 저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런 시를 써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 60억의 인간이 살고 있지만 아버님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저밖에 없다는 깨달음을 얻는 데 걸린 시간이 17, 선영이의 몸과 영혼이 분리된 지도 어언 17년이 되었습니다.

 

 

 

 

생애를 낭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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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 제가 등단한 것이 1984년이니 시인이 된 지는 올해로 19년째로 접어듭니다. 아버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20년 가까이 시를 써오면서 시집을 일곱 권 냈습니다. 첫 시집부터 지금까지 일관된 세계가 있는지 생각해보았습니다. 시 세계의 변모 양상은 저도 잘 모르겠지만 제가 즐겨 쓴 시어는 분명히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입니다. 제가 별이란 낱말을 화두로 삼고 살아왔고, 이번 시집의 제목도 이런 식으로 정한 이유가 있지요.

 

저는 고교 3년간의 과정을 혼자서 공부해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그 무렵의 예비고사라는 것은 인문계도 과학의 네 과목(물리·화학·생물·지구과학)이 다 출제되어 저는 각종 화학 방정식과 물리 공식을 암기하고 문제를 푸느라 골방에서 전전긍긍해야만 했습니다. 혼자서 깨쳐나가는 공부인지라 진도도 안 나가고 싫증도 자주 났지만 지구과학 과목 중 지구의 역사와 천체 부분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한 문장 한 문장이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학자들은 1936년에 큰곰자리에 있는 성운이 집단을 이루어 매초 4의 속도로 멀어지고 있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이 속도는 광속의 7분의 1에 가까운 끔찍한 속도입니다. 이러한 우주팽창설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는 G.E. 르메트르의 빅 뱅(big bang) 이론의 바탕은 우주가 태초에는 하나의 거대한 불덩어리였다는 것입니다. 태초에 거대한 불덩어리였던 물질이 대폭발을 하였고, 그 파편들이 성운을 이루어 무서운 속도로 팽창하고 있는 이 우주의 모습을 상상해보며 저는 전율을 느끼곤 했습니다.

 

지구과학 교과서에 설명되어 있는 케플러의 법칙, 허블의 상수(常數), 지구의 역사, 혜성의 존재, 별의 생성과 소멸아아, 광대무변한 우주는 이승하란 이름을 갖고 있는 내가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고생대 중 가장 오랜 시대라는 캄브리아기는 56억 년 전에 해당되니 태양계의 지극히 작은 혹성, 이 지구의 역사만 하여도 얼마나 유구한 것입니까. 하물며 이 우주의 역사는 앞으로 얼마나 유구할까요. 우주의 시간과 넓이가 이 정도인 것을 알면서도 우리 인간의 삶의 양태란 하루살이처럼 불을 보며 달려드는 꼴이지요. 반드시 죽을 목숨들이 영원히 살 것처럼 서슴없이 자신과 남을 속이는 것은, 지구 생성 이전부터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별의 존재를 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우주는 얼마나 넓습니까. 은하계만 하여도 300억 개 이상의 별이 있다고 합니다. 은하계의 지름은 약 10만 광년인데 1광년은 태양과 지구 사이 거리의 63080배라 하지요. 이 넓은 우주의 한 점 먼지에 불과한 우리 인간은 100년도 못 되는 생을 살면서 부를 축적하기 위해, 명예를 얻기 위해, 쾌락을 맛보기 위해, 온갖 죄악을 다 범합니다. 인류가 저질러온 죄악의 수야말로 이 우주의 별보다도 많을 것입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마음이 울적할 때면 별을 보았습니다. 별을 한참 보고 있으면 슬픔이며 설움같은 것은 점차 사라져 마음이 평안해지고, 계속 보고 있으면 기쁨으로 충만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어린 시절, 아니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저는 별을 통 볼 수 없었습니다. 집이 지하실이다 보니 마음먹고 골목길로 나서지 않는 한 별을 볼 수 없었던 거지요. 그래서 별에 대해 더욱 애착을 갖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아버님은 당신의 생의 이력이 실패와 좌절로 점철되어 왔다고 생각하시곤 자포자기한 모습을 자주 보이셨습니다. 말단 경찰관으로 산골 지서를 전전한 십수 년 세월에 남은 것은 여전히 적수공권이었지요. 아버님이 곧잘 내뱉으신, “이렇게 사느니 이놈의 집구석 불지르고 우리 다 죽어뿌리자라는 말을 나이 마흔 셋이 된 지금 저는 감히 이해한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선영이가 스물 네 살 때 저렇게 되자 아버님의 불같은 성격도 조금씩 잦아들어 갔습니다. 거식증과 실어증의 딸을 바라보는 아버님의 눈빛에 측은지심이 실려 있다고 느끼기 시작하면서 아버지를 향한 제 증오심에도 조금씩 측은지심이 실리지 시작했습니다.

 

아버님의 고함소리보다 더 듣기 괴로웠던 어머님의 오랜 통곡과 선영이의 숨죽인 울음을 피해 저는 지하실 우리 집을 빠져나와 밤의 골목길에서 하늘을 우러러보곤 했습니다. 밤하늘에 흩뿌려져 있는 별은 제게 베토벤 9번 교향곡에 나오는 환희의 송가처럼 가슴 벅찬 감동을 안겨주곤 했습니다. 아주 어릴 때에도 그랬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별은 저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별을 보면서 저는 어른이 되면 밀항을 해서라도 이 지옥 같은 집을 떠나리라 생각했었지만 저는 고등학교를 딱 두 달만 다니고 집을 뛰쳐나가 그 뒤 몇 년 동안 사고뭉치가 되었습니다.

 

집안의 경제 사정이 무척 어려워졌고 저의 대인공포증도 심해져 학원에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대입검정고시에 합격하고 나서도 3년 반을 이 도시 저 도시 떠돌며 부모님의 속을 썩이는 악동이었습니다. 다행히 중앙대 문예창작학과에 합격했지만 바로 1년을 휴학했습니다. 불면증과 신경성 위궤양에 관절염까지 겹쳐 대학시절도 투병의 나날이었습니다. 약 없이는 하룻밤도 제대로 못 자는 날이 몇 달이 이어져 몇 년이 되었고, 구토증세 때문에 밥을 먹다가 호흡을 가누는 날이 비일비재했습니다. 몇 년 동안 바깥출입을 하지 않으면서 생겨난 관절염 때문에 약을 5년이나 먹고 물리치료를 수차례 받았던 것도 기억하시지요?

 

아버님, 대학생이 되었을 때 저는 심한 말더듬이로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잘 아는 사람 앞에서는 간단한 의사 표시를 하는데 낯선 사람한테는 말을 마구 더듬으며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대학시절, 발표는 늘 제 몫이었습니다. 이놈의 말더듬이를 고쳐보고자 필사를 노력을 했던 것입니다. 저는 시와 소설을 쓰는 법을 배웠고, 친구도 사귀었고, 명정의 상태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대학은 저에게 시 창작 기법만을 가르쳐준 곳이 아닙니다. 1980년을 겪은 대학생 치고 낭만이란 말의 뜻을 아는 이가 몇이나 될까요. 인간은 낱낱이 떨어져 눈을 빛내는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 동물이며, 공동체의 일원임을 뼈저리게 알게 한 대학 4년이었습니다. 제 자신의 고통은 동시대의 아우성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저는 제 고민을 침소봉대했던 것입니다.

 

윤동주의 시구가 생각납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지훈 선생은 이렇게 썼습니다.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그렇지요. 지구에서 보아서 별은 아름다울 수 있지만 별 스스로는 자기 몸을 태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 역시 어느 누구와도 똑같이 고통을 겪고 죽음을 맞이할 것이기 때문에 별이란 존재를 더욱 가슴 벅차게 받아들이게 되나 봅니다. 유한하기 때문에 인간은 영원성을 추구해야 하지만, 그래서 영원의 세계에 대한 해답을 갖고 있는 종교를 신봉하기도 하지만, 인간은 또한 사회적 동물입니다. 그 시대 현실 사회의 질곡을 끌어나고서 괴로워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저는 전세계 폭력과 광기의 양상을 그렸고, 생명이 물건으로 뒤바뀌는 아픈 현실을 고발했습니다.

 

많이 쓴다고 남들이 욕을 하여도 쓰지 않을 수 없어 썼고, 시가 거칠다고 비난하여도 쓰지 않을 수 없어 썼습니다. 공부가 부족하여 남들이 쓴 시를 지하철을 타고서도 버스 속에서도 읽었습니다. 저는 늘 부족함을 느끼고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중국 송나라의 육유라는 시인은 생애 2만 수의 시를 써 1만 수가 남아 있다고 합니다. 몇 해 전에 중국에서 공식적으로 선정한 10대 시인 중에 그가 들어간다고 하지요. 저는 문리가 언제 트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때까지 줄기차게 연구하고, 쓰고, 고치고, 발표하겠습니다. 샘이 깊은 물이라야 가물에 아니 마르지 않습니까. 자신을 불살라야만 밤하늘을 빛내는 존재가 되지 않겠습니까. 아버님 앞에서 외람된 말이 되겠지만 저는 제 수명의 10분의 9를 살았는지 100분의 99를 살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고서 읽고 쓰겠습니다. 그럼 그 언젠가 사후에 남을 단 한 편의 시는 완성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아직 그런 시를 쓰지 못했습니다.

 

아버님, 저는 아이 둘을 키우면서 아버지를 조금씩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아버님의 생에 대한 절망과 세상에 대한 환멸을 말입니다. 수상의 영광을 누리게 된 오늘, 저는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아버님을 용서할 수는 없지만 이해할 수는 있다고. 사랑할 수는 없지만 연민할 수는 있다고. 오늘 제가 누리는 이 기쁨과 영광은 전적으로 아버님의 몫입니다. 고향에 내려가 아버님을 얼른 뵙고 싶습니다.

 

2002615

소자 승하 올림

 

 

 

예수·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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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 지훈문학상 심사보고

 

지훈상의 문학 부문 심사위원들은 지훈의 높은 지조와 선비정신, 동서양의 문학과 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 겨레문화의 전통과 현대에 대한 애정이 본 상을 통하여 계승 발전되어 앞으로 국제사회에서 한국문학의 위상이 새롭게 정립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하였다.

 

심사위원들은 200131일부터 2002228일까지 발간된 시집들을 대상으로 하여 작성한 목록들 가운데 30여 권의 작품집을 선정한 후, 이를 다시 심사위원 각자가 검토한 결과, 최종 수상작 후보를 다음과 같이 선정하였다.

 

송찬호,붉은 눈, 동백

염창권,그리움이 다시 힘이 된다면

이승하,뼈아픈 별을 찾아서

 

이상 세 권의 시집에 대해서 심사위원들은 장시간에 걸친 논의를 거쳐 이 가운데 이승하 시집의 시집 뼈아픈 별을 찾아서를 수상작으로 결정하였다.

 

다른 두 시인의 시집에 나타난 시세계도 물론 독자적인 개성과 정신세계를 보여주고 있지만, 이승하 시인의 시집에 나타나는 가족사를 근간으로 하는 내밀한 세계, 한국인의 기상과 정신에 대한 남다른 시각과 애정, 한문학을 중심축으로 하는 동양 정신, 세계사를 이끌었던 중요 사건과 인물에 대한 시적 형상화의 작업 등을 심사위원 전원은 높이 평가하여, 이 이승하 시인의 시집을 수상작으로 결정하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게 되었다.

 

이승하 시인의 부단한 창작 활동과 시에 대한 열정 및 문단 활동도 그를 수상자로 결정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그는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된 후 지금까지사랑의 탐구(1987), 생명에서 물건으로(1995), 시선집 젊은 별에게(1998) 등의 시집을 상재하였고, 시론집 한국현대사와 풍자의 미학(1997)생명 옹호와 영원 회귀의 시학(1999), 한국 시문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2001) 등 여러 권의 시론집을 출간하였으며,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2001)을 발표함으로써, 한국시단을 활성화하는데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왔다.

 

따라서 심사위원들은 지속적으로 훌륭한 시작품을 발표해 왔고, 시론과 평론 분야에서 높은 열정과 애정을 지니고 있는 이승하 시인의 시집뼈아픈 별을 찾아서가 지훈의 문학정신에 가장 근접한다고 판단하여 그를 제2회 지훈상 문학부문 수상자로 결정하게 되었다.

 

심사위원 오세영(서울대 국문과 교수) 윤호병(추계예대 문창과 교수) 성찬경(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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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익 시인이 처음 시단에 나왔을 때, 그에게 붙여진 이름이 비애와 우수의 시인으로 문단은 기억한다. 그 말에 문인들은 매우 공감했다. 그리고 그는 나이가 들면서 더욱 이미지를 선호하게 되고 정교한 언어에 집중하면서 저자는 사물시에 대한 관심을 집중하였다. 차츰 세월이 지나면서 시에다가 인간의 현실적 삶을 그려내는 방법을 생각하게 되었고, 시와 인간의 고뇌와 번민을 염두에 두면서 작업을 했다.

 

이렇게 지난 과정을 살펴보면 그의 시는 이미지와 정서, 그리고 관념이 하나로 묶여져 있음을 실감하는데, 관념은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더욱 견고해졌다. 그리고 그의 시선집 불과 얼음의 콘서트에서 밝힌 것처럼 허무의 낭만주의는 시작에서 뜨거운 열망과 차가운 절제 사이를 명료하게 짚어서 걸러냈다. 서로 모순된 에너지끼리 상호 침투하면서 특유의 화음을 발생시키는 일이 이수익 시의 본질적 사명이므로, 허무의 낭만주의는 아직 젊고도 푸르다

 

이수익李秀翼 시인은 1942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부산사범학교를 거쳐 서울대사범대학 영어교육과를 졸업함. 196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 그 이후 동인지 현대시에 들어가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함. 저서로는 1969년 첫 시집 우울한 샹송을 펴내고 이어서 야간열차』 『슬픔의 핵』 『단순한 기쁨』 『그리고 너를 위하여』 『아득한 봄』 『푸른 추억의 빵』 『눈부신 마음으로 사랑했던』 『꽃나무 아래의 키스』 『처음으로 사랑을 들었다』 『천년의 강』 『침묵의 여울12권을 펴냈으며, 시선집으로는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불과 얼음의 콘서트등이 있음. 현대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한국시협상, 지훈문학상, 공초문학상, 육사시문학상, 이형기문학상, 부산시문학상 등을 수상함.

 

 

 

 

 

이수익 시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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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45년 전 지훈 선생의 질책을 떠올리며

 

기쁩니다. 그리고 자랑스럽습니다. 제가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는 순간 당혹감도 있었습니다. 바로 얼마 전 한국시인협회가 운영하는 제33한국시협상을 수상한 터라 연거푸 제가 상을 받게 되니까 이 연쇄적인 상복이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얼떨떨한 기분도 들었습니다.

 

1. 그것은 하나의 새 출발의 선언입니다. 그것은 앞으로 나아갈 진로와 행보를 가늠하며 귀중한 첫 수를 두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한국 시문학사에 큼직한 족적을 남긴 고() 조지훈 선생님의 지고한 시정신과 그 업적을 기리는 사업에서 제가 첫 번째 행마의 역을 맡게 된 것이 개인적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영광이면서 아울러 엄중한 책무임을 절감합니다.

 

이런 복합적인 느낌과는 별도로, 저는 芝薰償수상 소식을 듣자마자 순간적으로 제 어릴 적에 있었던 소중한 추억 하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중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그때 저는 시 쓰는 데 꽤 소질이 있는 학생으로 친구들한테 알려져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국어 선생님이 숙제로 내준 시 한 편 지어오기에서 단연 제가 두각을 나타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고나서부터 저는 공부는 뒷전이고 시간만 나면 엎드려 시를 끼적거리는 문학소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당시(1950년대) 중고등학생들 사이에 거의 유일한 잡지였던학원에서 매년 주최하는 학원문학상 작품공모에 응모해서 뜻밖에도 입상하게 되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생이 선배 중고등학생 틈에 끼여서 제4학원문학상수상자로 발표된 그 해 가을은 정말 하늘 높이만큼 뛸 듯이 기쁜, 그런 나날이었습니다. 그 때의 입상작이 시농촌의 오후였는데, 그 작품을 뽑아준 심사위원 두 분 중에서 한 분이 바로 지훈 선생님이었습니다. 지금도 선연히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지훈 선생님은 제 작품평의 말미에 시가 따분하고 맥이 없다며 작품의 잘못된 점을 지적해 주셨습니다. 그 앞에서는 무어라고 칭찬을 하신 듯한데 그런 내용은 잘 기억되질 않고 이런 결점만 오래오래 남아있는 걸 보면 제가 선생님의 그 지적을 소중한 교훈으로 받아들인 듯합니다.

 

어쨌든, ‘학원문학상수상은 저를 대내외에 공개적으로 시를 잘 쓰는 아이로 부각시켜준 최초의 사건이 되었으며, 바로 그때의 고무와 성취감이 결국 오늘의 시인 이수익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이렇듯 제게는 내밀한 인연이었던 조지훈 선생님과 두 번째의 만남이 제1지훈상수상자로 이어지게 된 것을 저는 아마도 중학교 2학년때부터 40여 년 세월을 꾸준히 시쓰기에 정진해 온 저를 하늘에서 지켜보신 선생님께서 가상타 여기시며 음덕을 베풀어주신 게 아닐까 하는 묘한 생각도 가져봅니다.

 

그러면서 저는 이제 제1회 수상자로서 짊어져야 할 보이지 않는 구속과 책임도 은근히 느끼고 있습니다. 상을 받은 사람의 모습이 좋아 보이지 않으면 앞으로 그 상의 존재 가치와 권위가 퇴색될 것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 꽤 나이를 먹었습니다. 아무리 인생은 60부터라고 매스컴에서는 화려한 언사로서 초로의 인생들을 격려하고는 있지만, 나이 60에 앞으로 이룰 수 있는 일에는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큰 욕심을 가지려 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앞으로 제 시의 건강성이 유지, 발전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지만은 분명히 가지고 있으며 이를 실천하는 데 견마지로(犬馬之勞)의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면서 제가 보고 느끼는 중견 및 중진 시인들의 작품 쓰기의 어려움은 주로 신선미와 탄력의 상실에 있는 듯합니다. 시의 소재가 어쩔 수 없이 회고적인 것이 된다거나 표현이 평면화되고 서술적인 것으로 기울어 버립니다. 체험 영역이 점차 축소되다보니까 소재에서 쉬이 한계를 드러내게 되고, 노화에 따른 집중력의 저하로 표현은 느슨해지고 상상력은 날지 못하는 새처럼 떨어지게 마련입니다. 이런 보편적 흐름에도 아랑곳없이 탄력과 절제를 보이며 신선하고 깊이 있게 소재를 다루는 중견 및 중진 시인들도 있기는 합니다만, 그 수는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렇게 젊음의 패기를 작품으로 보여주는 선배와 동료 시인들을 존경하며 저 역시 그런 시인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아직도 저는 경제활동으로 가족을 부양하는 생활인의 처지에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올해부터는 작품 쓰기가 본업이고 직장일은 부업이라는 생각을 갖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시쓰기를 위해 갖는 직업정신이야말로 제 시의 건강성을 복원하고 유지, 발전시켜줄 수 있는 강력한 에너지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전 같으면 원고 청탁을 받아야 어쩔 수 없이 작품을 쓰던 태도를 버리고 이제부터는 시쓰기가 나의 피할 수 없는 일과요 책무라는 마음가짐으로 저의 생활방식을 규제해 나가기로 했습니다.

 

앞으로 과연 얼마나 제가 자신에게 부과한 책무를 수행해 나갈지 알 수 없는 터에 이런 욕심을 공개하는 걸 보면 아직도 제 기분은 수상자의 흥분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끝으로, 제게 다시 한번 저의 현실적 위치와 앞으로의 과제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귀중한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지훈상을 제정하고 제게 큰 영광과 격려를 주신 지훈상 운영위원회()나남출판 관계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조용한 폭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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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지훈문학상 심사보고

 

芝薰賞의 문학부문 심사위원들은 지훈의 활달한 기상과 높은 지조, 겨레의 문화 전통에 대한 깊은 사랑이 이 상을 통해 계승되어, 한국문학의 발전에 오래도록 밑거름이 되기를 희망하였다.

 

심사위원들은 199931일부터 2001228일까지 발간된 시집들과 평론집을 대상으로, 나남출판사 편집국의 도움을 받아 작성한 목록 가운데 30여권의 작품집들을 선정한 후, 각자 2주일간에 걸쳐 이를 검토하였다. 이 검토의 결과, 최종 수상작을 결정하는 자리에서 물망에 오른 작품은,

 

김정환,해가 떴다

송재학,기억들

신대철,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

이수익,눈부신 마음으로 사랑했던

 

4권의 시집이었다. 심사위원들은 장시간의 논의를 거쳐 이 가운데 이수익 시인의 시집눈부신 마음으로 사랑했던을 수상작으로 결정하였다.

 

김정환 시인의 시집은 문학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기 위한 노력이 높은 시적 서정성과 결부되어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송재학 시인의 시집에서는 인간의 삶과 자연질서 간에 조화를 찾으려는 섬세하면서도 광활한 시선을 만날 수 있었다.

 

신대철 시인의 시집은 자연의 엄숙한 힘을 가난한 삶을 통해 재발견하는 특별한 감수성을 보여 주는 한편, 분단조국의 비애와 그 극복의 희망을 힘찬 언어로 활달하게 풀어내고 있다.

 

수상작으로 선정된 이수익 시인의 시집은 단정하게 명징한 시어와, 절제된 표현으로 한 도시민의 감정을 섬세하게 드러낸다. 구성은 단단하고 지적이다. 시의 소재는 늘 일상생활의 구체적인 세목에서 구한 것들이지만, 그것들을 해석하는 지혜는 인간사의 요체를 짚어내며, 그것들을 형상화하는 상상력은 종종 존재의 비극에 닿아 있다.

 

그의 오랜 시력과 부단한 창작의 열정도 그를 수상자로 결정하는 데에 큰 요인이 되었다. 이수익 시인은 196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된 이후우울한 샹송을 비롯하여 지금까지 8권의 시집을 상재하고, 한국시단의 중견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심사위원들은 훌륭한 시작품을 발표해 왔고, 문학에 높은 열정을 지닌 이수익 시인이 제1회 문학부문 수상자가 되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고 판단하였다.

 

심사위원 유종호(이화여대 영문과 교수) 황현산(고려대 불문과 교수) 김종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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