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허공위에 뜬 집 / 정동철


얼어 죽은 새들을 주우러 강변에 나갔다
일찍이 우리가 접어 날린 종이비행기들
한 무리 되새떼가 되어 이리저리 허공에 휩쓸리고 있었다
쩡쩡 얼어붙은 강은 속내 깊숙이
낡은 달력들을 흘려보내는 중이었다

미루나무 가지 사이로 빠르게,
추운 햇살 한 묶음 지나가던 동화 속의 집
왜 아버지는 거칠고 마른 삭정이만 골라
허공 위에 집을 지으셨을까
마루 밑에 놓인 신발들이 안쓰럽다며
어머니는 자꾸 창문 밖을 내다봤다
밥알 같은 눈발들이 지붕 낮은 집들을 지워버리는 동안

잠들 때마다 등을 쿡쿡 찔러대던
낡고 불편한 나뭇가지의 집
우리들의 하루는 종일 공중에 떠 있었다
귀 시린 겨울밤을 지우개로 지우며
연탄난로 위에 마른 건빵을 굽다가
갈라진 손등으로 벌건 연탄집게를 들어 글씨를 썼다

어디로 공처럼 튀어나갈 수도
굴러갈 수도 없었던 날들
사방연속무늬 벽면에서 철지난 통신표들이 노랗게 바래갔다
청색의 동치미국물을 마시며 우리는 조금씩 단단해져 갔지만
허공 위에 뜬 집에서는 쉽게 잠이 들 수 없었다




아버지 소처럼 말씀하시네 / 정동철


눈송이 몇점 손님처럼 찾아간 날
더 이상 견딜 것도 더 탕진할 것도 없는 나는 집으로 내려갔다
굴뚝에서 쇠죽 끓이는 연기가 흰 팔뚝을 들어
눈 덮인 지붕을 버텨 올리는 참이었다
늙은 암소 등을 빗질하며 나직나직 하시는 말씀이 외양간 밖으로 새어나오는데
눈을 머리에 인 단풍잎들이 고개를 이기지 못하는 것을 고향집은 아는 것이다
구수한 쇠죽 냄새가 등을 토닥거려주자
처마 밑으로 녹다만 눈덩이 하나 툭 떨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염치 하나 툭 떨어져도

할 말이 없는 거다
푸우-푸 뜨끈한 여물을 먹으며
늙은 암소가 입김을 불어가며 메주콩을 씹더라도
이 세상 모든 구멍이란 구멍마다 후끈거리는 몸으로 가득하더라도,
소에게도 할 말이 없는 거다
그래, 겸연쩍게 얼굴을 들고 외양간 문을 엿보는데
부엌에서 저녁 짓다가 어머니 힐끗 보고 하시는 말씀

아서라,
느 아부지가 지금 소허구 말씀을 허신다

이 한 마디가
짚을 썰어 가마솥에 넣고 잘 마른 꽁 깍지와 쌀겨를 뿌리고
찬물 두어 동이 붓고는 풍구를 돌려가며 쇠죽을 쑤고 계시던 아버지를
외양 밖으로 불러내시는 것이었다

눈송이 몇 점 또 손님처럼 오시는 것이었다.

 

 

 

 

나타났다

 

nefing.com

 

 

 

[당선소감] 꿈 속 시 잊지 않으려 머리맡에 메모장


어느덧 십여년이 흘렀습니다. 문학이 좋아서 시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던, 하루종일 시를 생각하고 잠들면서도 시를 생각하고 꿈속에서도 시를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꿈속에 쓴 시들은 왜 꿈을 깨면 기억이 나질 않던지. 아예 메모지를 머리맡에 두고 잠든 날도 많았습니다. 꿈결에 써둔 시들은 언제나 알 수 없는 기호가 되어 여러 날의 아침을 쓸쓸하게 하곤 했습니다.


밥을 벌러 세상에 나왔어도 신춘문예철만 되면 가슴이 두근거리는 건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시를 빙자해서 문학을 빙자해서 문학 이외의 것들에 너무 정신이 팔려 있지는 않았나 싶은 시절이었습니다. 문학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무기가 될 수 있다고 믿었지만 무기만 믿고 문학을 등한시하지 않았나 하는 자책이 든 것도 시쓰기를 그만두고 나서의 일입니다. 내가 울지 않으면 절대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울리지 못한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습니다.


전북청년문학회 벗들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그들과 같이 가고자 했던 길, 여전히 우리 앞에 놓여 있는데 길을 앞에 두고 우리들은 각자의 밥을 팔러 세상 속으로 흩어졌습니다. 이제 그들이 답할 차례입니다.


늘 따르고 싶었던 최하림 선생님이 제 시를 뽑아주신 것이 제게는 더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뒤늦게 다시 시작한 시업이지만 결코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갑자기 원고지를 잡고 끙끙대는 저를 불안한 눈길로 바라보던 아내와도 기쁨을 같이하고 싶습니다. 아내는 늘 제 시의 첫 독자이자 마지막 독자이기도 합니다. 감사합니다.

 

 

 

 

[심사평] 인간의 둥근 삶 표현


신춘문예 시들을 심사하다 보면 거의 모든 시들이 기다림의 시학에 서툴다는 면이 보인다. 시는, 그 시가 지닌 내용만큼의 기다림의 시간을 요구한다. 그 시간은 한 달이 될 수 있고 일 년이 될 수 있고, 십 년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투고자들은 그만큼 기다려주지 못하고 마무리하려고 든다. 이성임의 '별을 굽는 여자'가 그 예에 속한다. 길거리에서 설탕을 끓여 별 모양을 찍어 파는 여자를 보고 '오글오글 모여 있는 햇살을 끌어안고/온종일 별을 찍어내고 있다'라고, 햇살과 별을 하나의 이미지로 뽑아내는 탁월함을 보여주었으면서도, 그 햇살이 어떻게 세계를 비추고 따뜻하게 하는지를 보려고 하지 않았다. 시란 쓰는 것이 아니고 낳는 것이다. 때문에 회임기간이 있어야 한다.

 

설정환의 '아버지는 둥글다' 외 9편도 기다릴 줄 모르는 면에서는 같다. 시 제목과 같이 인간의 삶은 둥근 것이다. 아버지의 삶도 암탉 수캐 염소 박새 등과 둥글게 굴러간다. 그런데 이 시에서 요구되는 것은 아버지와 암탉 수캐 염소 등이 어떻게 서로 상관하며 굴러가는 가를 형상화했어야 했다. 구체적인 묘사 없이 인간의 삶이 둥글다는 것을 독자들은 수용하지 못한다.

 

정동철의 '아버지 소처럼 말씀하시네'도 인간의 삶이 둥글고 뜨겁다는 것을 그린 작품이다. 눈오는 날 외양간에서 쇠죽을 쑤는 아버지의 모습이나, 아버지를 조금은 쓸쓸하고 따스운 시선으로 보는 아들이나 '느 아부지가 지금 소허구 말씀허신다'는 어머니의 한마디가 함께 둥근 원을 그린다. 사랑이 있는 풍경은 뜨거운 것이고 둥근 것이다. 거기에 시의 진정성이 자리한다. '허공 위에 뜬 집'도 언어들이 절도있고, 시의 보폭도 비유도 적절하다. '허공 위에 뜬 집'과 '아버지 소처럼 말씀하시네' 두편을 당선작으로 뽑는다. 정진하고 정진하기 바란다.

 

심사위원 최하림 시인

 

728x90

 

 

전주철물점과 행복부동산 사이 / 정동철


우리철물점과 행복부동산 사이
그가 끼어 있다
손톱만한 햇살이 간신히 창에 비쳤다
사라질 때쯤이면 늘, 나는 그의 집을 지나친다

움켜쥔 칼끝으로 그가 새기고 싶은 것과
도려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가 칼끝으로 파낸 햇볕의 부스러기들은
결코 이름이 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는 이름 사이에 낀 것들을 도려내며 늙었다

그가 밖으로 나오는 법은 거의 없었다
조금씩 이빨이 자라는 설치류 꽉 다문 입 속,
엉거주춤 끼어 남의 이름을 도드라지게 새기다가
반복되는 자기 생까지 파내버릴 듯하였다
날마다 자신의 뭉툭한 손가락을 하나씩 빼내
손가락 끝에 아프게 지문을 새기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목도장을 하나 파러 갔다가 어느 날
나는 그의 뒤통수에 난 창문 하나를 보았다
(그것은 잠깐, 둥근 보름달이었다가 그믐이 되기도 했다)
나뭇결 사이에 촘촘하게 어둠을 밀어 넣는 동안
달빛이 인주를 찍어 뒤통수에 도장을 박아 넣은 것이었다

 

 

 

 

나타났다

 

nefing.com

 

 

 

[심사평] 깊은 시선·다양한 형식 시적 가능성 보여줘

 

모든 심사는 새로움과 완성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미묘한 저울질과도 같다.

 

풋풋한 개성과 독창성을 지닌 작품에는 무언가 한끝 모자라는 공백이 보이고, 잘 짜여진 구조와 안정된 화법을 만나면 각()이 너무 다듬어져 익숙한 느낌이 들기 십상이다. 그래서 양자가 적절한 지점에서 만나는 작품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우선, 투고작 중에서 실험의식과 젊은 감각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준 것은 원진철의 시였다. 쉼표나 마침표만으로 제목을 삼는 것도 재미있는 발상이라 할 수 있고, 활달한 구어체 문장은 다소 거칠고 산문적인 대로 씹는 맛이 있다. 그러나 시상이나 이미지를 전체적으로 조율하고 집중시키는 힘이 약해 산만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최미정의 시는 차분한 관찰력을 바탕으로 간결하고 절제된 서정성을 보여준다.‘마중물같은 작품에서 그런 특징은 일정한 성취에 도달하지만, 전반적으로 상투화된 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단문으로 된 기술방식이 특유의 속도감을 낳기보다 의미를 분산 또는 분절시키는 것도 그 한계를 만들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당선작과 함께 마지막까지 논의된 작품은 신유정의 폐품장의사였다. 그의 시에서는 사유의 힘이 느껴지고 안정된 호흡과 군더더기 없는 문장에 호감이 갔다. 시어를 이 정도로 유연하게 구사한다는 것은 오랜 숙련의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자꾸 읽을수록 왠지 허전해지고 그 낯익음이 드러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당선작으로 뽑은 정동철의 전주철물점과 행복부동산 사이도 사실 아주 낯선 소재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를 읽다 보면 골목의 작고 어두운 공간에서 도장을 파며 살아가는 사람의 등을 통해 이라는 이름이 아름답게 부조(浮彫)되는 듯하다. 그것은 아마도 대상을 바라보는 깊은 시선과 신중한 손끝이 낳은 이미지일 것이다. 한 가지 스타일에 갇히지 않고 다양한 형식의 모색을 보여준다는 점도 그의 시적 가능성에 신뢰를 갖게 한다.

 

다만, 뛰어난 시는 나뭇결 사이에 촘촘하게 어둠을 밀어 넣는노력 못지않게 비약과 파괴를 통해 탄생한다는 것을 부기(附記)해두고 싶다.

 

심사위원 안도현, 나희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