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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 / 이영종

 

 

열차와 멧돼지가 우연히 부딪쳐 죽을 일은 흔치 않으므로

호남선 개태사역 부근에서 멧돼지 한 마리가

열차에 뛰어들었다는 기사를 나는 믿기로 했다

 

오늘밤 내가 떨지 않기 위해 덮을 일간지 몇 장도

실은 숲에 사는 나무를 얇게 저며 만든 것

활자처럼 빽빽하게 개체수를 늘려온 멧돼지를 탓할 수는 없다

 

동면에 들어간 나무뿌리를 주둥이로 캐다가

홀쭉해지는 새끼들의 아랫배를 혀로 핥다가

밤 열차를 타면 도토리 몇 자루

등에 지고 올 수 있으리라 멧돼지는 믿었던 것이다

 

사고가 난 지점은 옛날에 간이역이 서 있던 자리

화물칸이라도 얻어 타려고 했을까

멧돼지는 오랫동안 예민한 후각으로 역무원의 깃발 냄새를 맡아왔던 것일까

 

역무원의 깃발이 사라진 최초의 지점에

고속철도가 놓였을 것이고 밝은 귀 환해지도록 기적소리 들으며

멧돼지는 침목에 몸 비벼 승차 지점을 표시해 두었으리라

콧김으로 눈발 헤쳐 숲길을 철길까지 끌고 오느라

다리는 더욱 굵고 짧아졌으리라

 

등에 태우고 개울을 건네줄 새끼도 없고

돌아갈 숲도 없는 나는 오랜만에 새 신문지를 바꿔 덮으며

그때 그 역 근방에서 떼를 지어 서성거렸다는

멧돼지 십여 마리의 발소리를 믿기로 했다

 

 

 

 

 

[당선소감] "재미와 비애 있는 詩 쓸 수 있도록 분투하겠다"

 

2011년 크리스마스 저녁이었다. 마음의 모든 정물들을 설레게 했던 당선 통보를 받고, 나는 산양이 바위를 건너는 법을 생각했다. 약속한 것은 아니었지만 해거름에 전화해도 그냥 한 잔 할 수 있는 사람처럼 늘 거기 있을 것 같은 산양의 눈망울을 떠올렸다. 산양이 아니라면 건너기 힘든 바위를 딛고 사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하나의 법을 알았다 했더니, 어느새 새로운 바위가 나를 기다리는 날이 지속되고 있다. 결국 바위를 건너는 법을 다 알지 못하고 가고 말 것이다. 하지만 살아있는 한 지속되어야 할 고통스럽고 즐거운 일이다.

 

내가 사는 곳은 눈이 많이 내린다. 겨우내 이 땅의 주인은 사실 눈이다. 내가 아끼는 나무를 부러뜨려 눈을 흘기면 "내 것 내 맘대로 하는데 네가 무슨 상관이야."라고 말하는 듯 처마에 고드름을 수십 개나 매달아 놓은 적도 있다.

 

나는 하루 종일 집에 갇혀 있거나 엉금엉금 친구를 만나러 나간다. 원래 만나려 했던 친구를 나는 늘 만나지 못한다. 그가 이 땅에서 살았던 자취를 거두어 자기 땅으로 망명해 버린 지 몇 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13권 대하소설 '마적'을 마치고 삶 또한 마친 친구 서 권은 지금도 눈 내리는 감나무 가지에 와서 내 집 개를 밤새워 짖게 한다. 나가 담배를 피워 그와 소통을 하는 일이 뜸해졌다. 그도 이제 돌아갈 곳을 찾았는지도 모른다.

 

심사위원들께서는 관계를 성찰하여 희열 가득한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면허증을 내주셨습니다. 재미와 비애가 있는 시를 쓸 수 있도록 분투하겠습니다. 오랫동안 시를 쓴다 하였지만 눈 뜨지 못한 나에게 점안을 해주신 안도현 교수님, 아낌없는 비판을 해주었던 우석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문우들께 금오도를 드립니다. 내가 살았던 날들을 빨래처럼 비틀면 흘러나올 물 색깔이 거의 똑같을 나의 친구들, 함께 젓가락 딸그락거리던 어머니와 아내, 식구들께는 무엇을 드려야할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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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따뜻한 서정과 맑은 연민 보여주고 있어"

 

심사는 비교적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심사위원들은 한 편의 시가 유기적 구조를 갖추고 있는지를 우선적으로 보았다. 작품의 처음과 끝이 조직화되어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난해한 시를 배제하지는 않았다. 난해한 시는 명상과 사색에서 탄생한 것으로서 유심하게 들여다보면 해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심사위원들이 곤란하다고 본 시는 비록 그것의 파편적 언어와 기발한 상상력이 부분적으로 절창을 낳더라도 맥락의 구조화가 되어 있지 않은 경우였다. 시행의 전개가 연상에 의해 진행되더라도 산만하고 까다롭기만 한 경우는 제외시켰다.

 

고현도의 '까치의 독후감' 외 2편은 안정되고 사려 깊은 시편들이었다. 시류에 영합하지 않는 장점이 돋보였고, 오래 다듬은 흔적도 역력했다. 그러나 정아(正雅)하기만 할 뿐 새롭고 기발한 해석이 부족했다. 규정하고 설명하는 진술이 많은 것도 시의 맛을 떨어지게 했다.

 

반면에 임해야의 '독도' 외 4편은 전체적으로 보아서 사고가 기발하고 분명했다. 그런데 이 기발하고 분명함의 수준이 투고한 작품들 사이에서 편차가 컸다. '독도'나 '쿼드러츠學' 같은 작품들은 상상력이 뛰어났으나 그 착상 자체는 진부하고 평범했다. 그래서 연상이 과잉되게 사용되고 있는 느낌을 갖게 했다. 시적 질문이 보다 더 독특하고 다양한 곳에서 생겨났으면 좋을 듯하다. 당선작과 마지막까지 경합한 작품들이었음을 밝혀둔다. 분발을 당부한다.

 

이도율의 '노숙' 외 3편은 진지한 작품들이었다. 순정이 있는 따뜻한 서정을 보여주었다. 옹동이라는 곳의 맵고도 신 삶의 풍경을 보여준 '항아리'도 좋았으나 심사위원들은 '노숙'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우화적 요소가 가미되었으나 낮은 수준으로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맑은 연민에 이르고 있다는 점도 이 시의 장점이었다. 시단에 좀 늦게 나오는 만큼 정신을 곤두세워 부지런히 좋은 작품을 쓰길 바란다.

 

- 심사위원 송하선, 문태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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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골목 / 장정희

 

 

작은 아버지 바지가 걸린 바지랑대 사이로 푸석한 골목이 보였다.

구암댁 할아버지 이끼 낀 돌담을 짚으며 모퉁이를 돌아가고

양철대문이 덜컹, 삽살개가 기다림의 목덜미를 물었다.

입대한 큰아들 주검으로 돌아오던 그날까지 놓아주지 않았다.

작은 아버지는 좀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발가락이 오그라든 대문은 문패를 버리고 밤새

신작로 쪽으로 귀를 던져 놓고 있었다.

낮은 지붕을 내려온 거미가 먼저 발을 내딛는 골목,

목줄을 잡아 맬 수 없는 굴뚝으로 연기는 담쟁이넝쿨같이 기어 나왔다.

뼈마디 드러난 상처를 덮듯 배추는 또 자라나고

햇살은 어두운 골목에 도둑고양이의 눈빛을 씨앗처럼 심어주었다.

다섯 살 박이 손자가 작은 아버지 팔을 잡아당기며 대문을 나서고.

나는 빨랫줄 문 집게처럼 뻣뻣한 골목의 시간을 만지고.

바람이 골목에 발을 담글 때마다, 나는

한 남자의 내면을 수없이 들여다보았다.

 

 

 

 

불기소처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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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시는 아름다운 구속, 이제부터 시작이다"

 

시를 쓰겠다고 대들었던 날부터 혼자 놀기에 익숙해져 갔다. 콩깍지 낀 눈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함께 걷기를 자청했던 유명 시인들의 시집이 때론 오래된 친구처럼 편해져 가던 어느 날, 갑자기 시가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무엇일까? 하나씩 더 알아 갈수록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도망치고 싶어 뒤돌아 보았을 땐 이미 늦었다는 걸 알았다. 용감하게 연필을 놓을 자신이 없어 매달렸다.

 

스스로의 무게에 눌려 주저앉고 싶을 때 항상 나를 응원해 주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넘어지려 할 때 말없이 손 잡아준 소중한 친구들이 있었다. 십년을 함께 해온 '샘시문학회'의 이병관 선생님과 문우들은 나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버팀목이었다. 그리고 마산대학 시창작반 문우들과 함께 공부했던 시간들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마산대학 시창작반 문우들과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다. 나에게 시심의 뿌리를 준 이영옥 선생님 고맙습니다. 자신의 언어나 머리를 믿지 말고 더 좋은 언어를 찾아 끊임없이 노력하라, 사소한 것도 깊게 보라며 다른 사람보다 한 발 더 진보한 시 쓰기를 가르쳐 주신 김륭 선생님께 진심으로 큰절 올린다.

 

시로 인해서 알게 된 좋은 사람들이 너무 많다, 일일이 열거 하지 못함이 아쉽다. 시의 바탕이 되어준 부모님, 아주 특별한 내 동생들 고맙다. 항상 엄마의 자리를 빛내주었던 아들, 딸 사랑한다. 이 자리 오기까지 묵묵히 지켜봐 준 남편에게 이 영광을 돌리며, 부족한 글 뽑아주신 황동규 선생님, 안도현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앞으로 더 정진할 것을 다짐한다. 나에게 "시란 아름다운 구속이었다."고 외친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시와 아름다운 사이로 나란히 걷기 위해 나는 다시 연필을 깎는다.

 

 

 

[심사평] 참신한 묘사적 표현, 시에 생기 불어넣어

 

좋은 시는 남들과 다른 언어를 건지려는 노력에서 나온다. 그렇게 태어난 시는 이기적이면서 품이 넓다. 그런데 비유가 생경한 시, 비문이 노출된 시, 인위적으로 제작하는 데 급급한 시들이 적지 않았다. 다들 조바심을 내는 듯했다. 발효와 숙성 과정을 거친 시들이 그만큼 아쉬웠다는 말이다.

 

네 분의 시가 마지막까지 남았다. 정지웅 씨의 '매미'는 매미 울음이 공중에 구멍을 뚫는다는 재치 있는 발상의 시다. 발상이 그저 발상으로 끝난 아쉬움이 크다. 소재를 끝까지 밀고 가는 힘을 키워야 할 것이다. 이명옥 씨의 '사과 연대기'는 어투가 매우 발랄하고 상상의 진폭이 크다. 시에서 감각을 어떻게 끌어올려야 하는지 아는 사람 같다. 하지만 시를 만지는 손끝이 너무 쉽게 드러나 보이는 게 흠이다. 최병국 씨의 '구름을 걷는 달팽이' 외 몇 편은 상당히 현란한 상상력과 언어 구사 능력을 보여준다. 문장과 문장 사이 의미의 연결이 불투명한 약점을 시급히 보완하면 좋겠다.

 

그리하여 우리는 장정희 씨의 '오래된 골목'을 당선작으로 뽑는 데 합의했다. 언뜻 보면 평이해 보이지만 자신의 사유를 잘 간추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있는 시다. 군데군데 참신한 묘사적 표현이 시에 생기를 더하면서 '오래된 골목'의 전경을 형상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앞으로 더 좋은 시를 보여주는 시인으로 성장하시기를 바란다. 축하를 드린다.

 

심사위원 황동규(시인·서울대 명예교수),안도현(시인·우석대 문창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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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 김혜원

 

 

1. 무게

체중계를 꺼내려다

나보다 먼저 올라앉은 먼지를 본다

저것도 무게라고 저울 위에 앉았을까

털어내는 순간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저 가뿐한 내공

내가 눈금처럼 꼼꼼히

몇 장의 졸업장과 얼마간의 통장으로

몸집 불리는 동안 너희는 세상을

깎고 갈고 부서지며 삭으며 살아왔구나

저울 위에 앉아 제 발자국 헤아리다가

세상 변두리 어디쯤 다시 찾아 날아올랐겠지

버려야만 이루어지는 저 가뿐한 무게

달 수조차 없는 그 삶에

문득 마음 무겁다

 

 

2. 높이

먼지도 세월을 견디면 높이를 갖는구나

어둠 속에서 말을 잊다보면 눈이 밝아지는 법, 나는

저 허름한 생의 목록을 다 적을 수 있을 것 같다

양말이 벗어놓은 하품 바스러진 각질의 한숨 비틀대던 머리카락과 맥없이 흘러내리던 낡은 옷의 넋두리 나뒹굴던 보풀의 푸념 몇 낱 희미해진 거울의 깨진 비명도 몇 개, 그런 것들이

그런 것들이 뒷걸음쳐 이 구석 찾았을 게다

내일이 꼭 오리라 믿었을 그들

나는 오지 않은 날의 달력을 찢어

숨죽여 쌓인 어제의 높이를 가만히 들어 올린다

 

 

3. 길

차 안에 쌓이던 먼지

어느 날 흔적이 없어졌다

닦은 적도 없는데 저희끼리 뭉쳤다가

알갱이 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나 보다

어디든 다시 떠돌고만 싶은 것 같아

조심조심 발판을 걷어 밖에 뿌려준다

순간 바람의 어깨를 딛고 올라서서

일제히 질주하는 저 하얀 맨발들

길이란 열망이란 얼마나 서늘한가

천 길 절벽은 허공에도 있어

지상으로 추락하여 얼룩지는 생이여

흙물이 제 지나온 길 가라앉히듯

빗물에 씻겨 다시 먼 길 떠나는구나

밤하늘에 담겨 반짝반짝 눈을 뜨는 별들도

떠나온 별을 찾아 몇억 광년 속으로

저렇게 먼지처럼 뛰어든다던데

나 이제 몇십 킬로의 동력을 켜고

내게 남은 시간의 벌판으로 달려간다

 

 

 

 

[당선소감] "더욱 겸손하고 엄격하게 정진할 것"

 

시와 사진과 길

 

먼저 사진이 있었다. 문학을 전공하고서도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건만, 사진을 찍으면서부터 카메라로 다하지 못한 말들이 마음속에 시(詩)로 남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시가 내게로 왔다.'

 

당선 소식도 내게로 왔다. 본격적인 시쓰기를 시작한 것은 작년. 아직도 혹독한 습작기련만 예상보다 일찍 당선 소식을 들은 지금, 그래서 내 앞길은 더 캄캄하고 아득하기만 하다. 하지만 '당선'이란 습작기의 성실함을 '운 좋게도' 인정받은 것일 뿐이고, 시집 한 권도 내지 않은 사람을 시인이라 부를 수 없다는 내 지론이 있지 않은가. 다만 나는 내게 더욱 겸손해지고 엄격해지고 가혹해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부족한 시를 뽑아 주신 허소라, 김용택 심사위원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또한 굼뜨고 더딘 나를 질책과 채근으로 길러 주시고 앞으로도 키워 주실 우석대 문창과 정 양, 안도현 교수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쓰고쓰고쓰고 고치고고치고고쳐 더 큰 성장으로 보답해 드리는 길밖에 없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어렸을 적부터 음악과 미술과 문학을 동경할 수 있도록 키워 주신 부모님! 나의 피붙이 형제들과 그의 가족들! 이들 모두의 묵묵한 지원이 아니었더라면 '나밖에 모르는 삶'은 애초 불가능했을 것이다.

 

마지막 감사는 홀로 걸어온 길!

 

'먼지'처럼 함부로 떠도는 그 길에는 언제나 시와 사진이 함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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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관념적 소재 '견딤' 미학으로 이끌어

 

요즈음이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 시 쓰기가 어려운 시대가 아닌가 한다. 첫째는 광야에서 골리앗 장군처럼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내던 시대의 공동과녁이 유체화된 데에다, 또 하나는 그 옛날 감히 다가서지 못했던 시 쓰기의 엄위한 비의(秘義)가 이곳저곳에서 그만 해킹되고 만 것이다. 이런 때에 빠지기 쉬운 함정이 바로 아무 고민 없는 사적(私的) 요설이다.

 

이런 몇 가지를 상정하면서 조심스레 심사에 임했다. 807편을 상회하는 응모작 속에서 예심을 거쳐 우리에게 넘겨 온 작품들은 10명의 것이었다. 이 가운데에서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먼지> <신발 고르는 저녁> <호후(虎侯)> 등 세 편이었다. 이 세 작품은 어느 작품을 내세워도 당선작으로 손색이 없으리만치 수준이 가즈런하나, 규정에 따라 고심 끝에 <먼지>를 택하였다.

 

<신발 고르는 저녁>은 세차원인 '쑤안'(이주여성)이 파장에 신발을 고르는 모습을 통해 그려낸 인간애가 눈물겹기만 한 작품이다. 그러나 심사자는 응모자를 바라봐야지 시 속의 '쑤안'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냉정 때문에, 그리고 화살이 빗나간 날들의 변두리에 박힐 때마다 손가락질이나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녁으로 서보라는 <호후(虎侯)> 역시 시대의 정곡을 찌르는 훌륭한 작품이나 아무래도 주제의 깊이에서 <먼지>에 밀릴 수밖에 없어 아쉬움이 크다.

 

당선작 <먼지>는 한 주제를 가지고 세 편으로 나눈 일종의 연작시 형태를 취하고 있는바 신춘문예 응모작으로는 대단히 모험적인 기법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 세 작품은 내적으로 교묘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작품 속의 하찮은 <먼지>는 화자 자신, 나아가 우리 인간존재의 등가물로서 내밀한 삶과 그 가치를 성찰하고 긍정코자 한 시도로 이해된다. '1. 무게'에서는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먼지'처럼 버리고 비우며 가뿐하게 사는 소박한 모습을 통해 가진 자들의 욕망에 대한 반성을 꾀하였고 '2. 높이' 역시 고단한 삶을 견뎌내게 하는 힘은, 바로 내일이라는 희망에 물꼬를 대고 있다. 특히 "먼지도 세월을 견디며 높이를 갖는구나"라는 아포리즘적인 시행이 두 심사자의 눈길을 오래 머물게 하였다. '3. 길'은 쌓였다가 깎였다가 하면서 오랜 시간 존재해온 '먼지'와 그들이 걸어온 '길'을 통해 무한한 시간 속에서의 부단한 자기 성찰을 드러내려 한 작품으로 속도감 있는 운율이 돋보인다.

 

그리고 '방구석→차 안→허공→우주'로 확대되는 공간배치의 기법도 탁월하다. 자칫 관념으로 떨어지기 쉬운 소재를 끝내 작은 것들의 '견딤'의 미학으로 이끈 것은 오랜 동안의 습작의 뒷받침이 아닌가 싶다.

 

요즈음 시인은 많으나 시가 없다라든가 아니면 시는 지천으로 흐드러지는데 정작 시인이 안보인다 라는 말을 뒤집어보면 같은 맥락의 이야기가 된다. 금번 최종심으로 넘어온 10명의 응모작들은 그 궁핍증을 덜어주는데 족히 일조가 될 만한 수준이다. 그럼에도 노들강변으로 널려 있는 등단길을 외면한 채 연마에만 몰두해온데 대해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러므로 낙심은 금물, 응모자 제위의 행운을 빌어마지 않는다.

 

심사위원 허소라, 김용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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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 / 안성덕

 

 

골판지는 골판지대로 깡통은 깡통대로

끼리끼리 모여야 밥이 된다고

삼천변 요요要要자원* 파지 같은 생들이

마대자루에 빈 페트병 고봉으로 눌러 담는다

오락가락하던 진눈깨비가 물러간다

유모차에 생활정보지 걷어오는 할머니

치마꼬리 따라온 손주 볼이 발그레하다

어슬렁거리던 누렁이가 꼬리친다

쥐불 놓는 아이들의 함성 오종종 모여 있는 갈밭

풀린 연기 사이로 북녘을 가늠하는

오리떼 몸통이 통통하다

버들개지 은대궁도 제법 토실하다

모두 요요夭夭하니

풀려나간 요요yoyo가 제 목줄 감아올리듯

스르르 계절조차 되돌아온다

쥐불 놓은 갈밭에도 펜촉 같은 새순이 돋아

돌아올 개개비떼 노래 낱낱이 기록하겠다

코흘리개 맡겨놓고 감감 소식 없는 며느리도

한 소식 보내오겠다

 

* 전주 삼천변에 자원재활용센터 요요자원이 있다

 

 

 

달달한 쓴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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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이제 시작... 사람 냄새 채우겠다"

 

이미 일가를 이루었어야 할 다 늦은 때 나를 찾아온 시는, 내가 나를 달달 볶게 했다. 소싯적 이웃집 가시내처럼 희멀건 목덜미 슬쩍 내보이고는, 풀풀 살 냄새 흘리고는 그뿐, 내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숱한 밤 잠 못 들고 열뜨게 했다. 먹다 남은 소주병을 찾게 한 밤이 많았다.

 

희미한 불빛을 따라가다 돌부리에 차여 고꾸라졌었다. 고꾸라진 나를 일으켜 세우고 깨진 무르팍 쓰리게 닦아 딱지 앉게 해준 형 같은 아우가 있다. 그 상처 덧나지 않도록 호호 불어 처매주고, 다시는 넘어지지 말라고 두 다리에 힘을 넣어준 선생님이 계신다.

 

내게 언제까지 곁눈질 할 수 있는 핑계 하나 만들어 준 전북일보와 두 분 심사위원님께 큰절 올린다. 떠오르는 얼굴들이 많다. 강연호 교수님 고맙습니다. 박성우 시인 고맙다. 고향집을 홀로 지키는 어머니, 곁에서 묵묵히 지켜봐 준 아내와 두 아들 지혁 동녘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지루한 내 삶에 위로가 된 적도 아주 없진 않았던 시, 재촉하지 않겠다. 연필심에 침 발라가며 밤새 풀잎에 이슬 내리는 소리 또박또박 받아 적겠다. 원고지 한 칸 한 칸 사람냄새 채워 넣겠다.

 

아파트 모퉁이에 '행복수선'이라는 헌옷 수선집이 있다. 해지고 구멍 난 옷만 수선되는 게 아니라, 조각나고 망가진 우리들 행복도 수선될 수 있다면 좋겠다. 뜻하지 않은 경제난으로 춥고 긴 겨울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꽃 피고 새 우는 봄날이 빨리 왔으면 참 좋겠다.

 

 

 

 

몸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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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촘촘한 얼개, 지난한 삶 극복의 따뜻한 주제의식

 

전북 거주의 응모자가 많았음을 큰 기쁨으로 생각했다. 작품 수준도 크게 향상되었음을 읽었다. 응모작들의 문법은 거의 정확했다. 구조의 탄탄함도 믿음직했다. 시대나 사회적인 문제의식보다는 시 본연의 감각과 감수성을 기조로 한 시들이 만만치 않았다. 다만 장광설 또는 단순 처리로 아쉬움을 준 시, 명쾌해야 할 전달력이 불투명하게 처리된 시도 없지 않았다.

 

걸러내고 걸러내다 보니 최종심에 오른 시는 강영식의 '삼거리 외눈부처''물수제비', 이연아의 '대팻밥을 담으며', 안성덕의 '구두병원''입춘' 등이었다. '삼거리 외눈부처'는 개성미와 형상성이 괜찮았으나 울림이 부족했고, '물수제비'는 깨끗하고 투명한 이미지가 좋았으나 단순 처리된 것이 흠이었다. '대팻밥을 담으며'는 수준급에 달했으나 부분적으로 산문형태의 상투성이 눈에 거슬렸다. '대패질은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의 돌출로 말미암아 아차, 하는 사이에 당선권에서 밀려났다. 상식이 통하지 않은 것이다.

 

'구두병원'은 어둡고 구석진 삶의 단면을 걷어내고 윤끼 반짝이는 건강성을 보이고 있으나 끝 연의 처리가 안이하게 풀어져 균형을 잃고 말았다. 당선작 '입춘'은 구조의 일관된 응집력과 나무랄 데 없는 언어 표상, 그리고 선명한 주제와 함께 시의 내면을 가득 채운 따뜻한 훈김이 삶을 지탱하게 하는 역동성으로 작용하여 당선작 선택에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했다. 읽을수록 깊이 깨물려 단물이 고였다. 참신한 이미지의 거듭됨이 안정된 어조로 짜여 있다. 더할 수 없이 살기 힘든 현실의 가난과 외로움을 따뜻이 끌어안고 삶의 밑바닥을 뒤지면서도 절망하지 않는 이웃의 아름다움이 측은지심을 넘어 감동을 이끌어 낸 수작이다. 그라시아스 합창단의 크리스마스 칸타타처럼 생명감이 넘치는 노래다. 재활용품 수집이 생계 수단인 할머니와 어린 손주, 이들 가족사의 진정성을 뒷받침해줄 끝부분의 희망의 불씨 또한 시의 완성도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심사위원 이운룡(시인·문학평론가), 정양(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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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떼의 겨울 / 이지현

 

 

강 위에 오리가 머리를 숙였다 올린다

노란 부리로 쪼아낸 물방울은 베틀을 돌리지 않았는데도

모퉁이에서 가운데로 물결을 만들어간다

물결이 엉키지 않도록

휘휘 발 저어 옮기는 오리들,

혼자서는 저 넓은 강을 물고 날아오를 수 없다고

함께 강을 담아갈 보자기를 짜고 있는 것이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서로의 날갯소리를 엮을 수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코와 코를 매듭지을 수 있다는 것을

결국 삶의 보자기는 혼자 짜낼 수 없다는 것을

오리떼가 함께 날아 오를 때 알았다

살얼음이 발목을 조여와도

강의 끝자락을 팽팽히 잡아당기는 오리떼,

놓고 가는 건 없는지 막바지 점검을 끝낸 후

세상 바깥으로 일제히 날아 오른다

세상 안쪽으로 폭설이 쏟아진다

 

 

 

 

[당선소감] "열심히 새로운 짐을 꾸려야죠"

 

막상 짐을 꾸리는 데는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지만 옮길 것들을 머릿속으로 가늠하면서 하루 해를 다 보내버리기도 했습니다. 보자기는 펼쳤는데 어디서부터 손을 봐야 할 지 몰라 우왕좌왕 했죠. 당선 소식을 듣고 반가움에 앞서 그 짐꾸리던 일들이 퍼뜩 떠오릅니다.

 

이제 또 짐을 꾸려야 될 것 같은데 너무 무거워서 그 무게를 제대로 가늠하기가 어렵습니다. 제게 새로운 짐을 꾸리는 일은 기쁨에 앞서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는 일은 없어야 겠죠. 묵은 먼지도 열 손가락 마디마디에 묻혀보고 구석에 숨어 있는 동전들도 하나씩 챙기면서 열심히 저만의 짐을 꾸리겠습니다.

 

제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 우석대 문창과 선생님들, 이용범 선생님, 누구보다 저를 아끼고 사랑하시는 부모님께 이 기쁨을 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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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시문학의 양산, 빈곤한 시대의 역설

 

시대는 참으로 수상하다. 사람됨의 가치와 삶의 의미가 물질의 위력과 현실 의제에 밀려나는 형국이니 어찌 수상타 하지 않으리오. 사람됨의 최소한의 덕목들이 정신의 가치로 승화되지 못하는 시대는 암울하다. 정신·문화적 가치가 황폐한 시대일수록 이를 안타까워하고 이를 정신력으로 복원시켜야 한다는 욕구는 더 뜨거워지는 것인가?

 

올해 신춘문예 시부문 응모작품 수가 모두 1351편에 이르렀다. 양적인 수확에서 기록적이며, 각 작품들이 드러내고자 하는 시정신의 치열성에서도 기대에 값하였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작품은 모두 10여분의 응모자들이 투고한 30여 편이었다. 이희정의 기억의 성지는 시적 완결성에서는 일정한 구성력을 확보하고 있으나 세계를 보는 안목에서 당선작으로 밀기에는 미흡하다는 데서, 원창훈의 ‘FTA’는 현실을 조응해 내고 이를 시적 어법으로 형상화하는 시력은 확인할 수 있으나 전체적인 시적 긴장도가 처진다는 데서, 이혜숙의 빌딩은 소재가 주는 비인간성의 측면을 예리하게 잡아내고 있으나 시정신의 참신함을 드러내지 못했다는 데서 심사자들의 선택을 망설이게 했다.

 

마지막까지 남은 이지현의 오리떼의 겨울은 일단 정통적인 시수업의 흔적을 느끼게 했다는 데서 안정감을 주었다. 삶의 진정성을 담아내기 위해 구축해 내는 이미지들이 여타 응모작들에 비해서 참신하였으며, 소재를 응시하는 서정으로 시의 의미 맥락을 담아내는 솜씨를 인정하면서 최종 당선작으로 삼았다. ‘함께 강을 담아갈 보자기를 짜고 있는 것이다강의 끝자락을 팽팽히 잡아당기는등의 아름다운 의미나 참신한 표현은 시 수업을 희망하는 이들의 귀감이 될 만하였다. 더욱 분발하여 더 큰 시업의 성취를 기대한다.

 

사족 하나. 응모자들이 서너 편의 응모작 중에서 대표작으로 올린 시보다 그 다음 장의 시들에 호감이 가는 시가 많았다. 야구선수가 어깨에 힘이 들어가면 홈런이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시도 그럴 것이다.

 

심사위원: 정양, 이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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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가는 판화 / 이현수

 

 

조각도 앞에 손을 둔다
순간, 조각도가 날렵하게 손에 스쳤다
아직도 내 손에 깎아내야 할 부분이
이렇게 많구나, 싶었다

어머니 얼굴은 남겨 둬야할 곳보다
파내야할 곳이 더 많았다
얼굴 윤곽보다 뚜렷한 곡선을 여러 번 파내다보면
결국에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 얼굴
그래서 더 어머니로 보였던 얼굴

동그랗게 몸을 말고
조각도를 따라 비워지는 굴곡
그 허공에도 몇 겹의 층이 있어
잉크로 찍어내면 더욱 환해졌다
어두워질수록 빛나는 주름의 공허

몇 번씩 그 결을 만지며
여백을 남기는 어머니
완성된 얼굴 판화가 내 어머니이기만 할까
하나면 충분할 것을 여러 장 찍어내며
확인하는 것이다

 



[당선소감]  "앞으로 농부의 딸이 얼마나 예쁘고 고운 것들을 길러내는지 보여드릴게요"

평생 신문구독 한 번 하신 적 없는 아버지가, 신문에 글이 실린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아버지가, 딸에게 좋은 소식인 것만은 확실해서 웃으셨나 봅니다. 대학가서 글 쓰겠다고 했을 때에도, 졸업하고 공부를 더 하고 싶다고 했을 때에도 아무 말 없이 고개 끄덕여 주셨던 아버지와 어머니. 그 농부의 마음이 영 팔아먹지 못할 것을 길렀던 것은 아니었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전화 한 번 넣기가 그렇게 어려웠을까요. 아버지, 조금만 더 지켜봐 주세요. 앞으로 농부의 딸이 얼마나 예쁘고 고운 것들을 길러내는지 보여드릴께요. 그 텃밭에서 뽑아 올린 것들로 우리 가족 모두 모여 푸짐한 저녁을 함께 해요.

늘 존경하는 송수권 선생님, 신귀백 선생님 그리고 원광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정동란 선생님, 최정주 선생님, 류경동 선생님, 전동진 선생님 감사합니다. ‘따오기’라고 불러주는 박성우 선생님, 아울러 누나, 언니 또는 현수야 라고 불러주는 ‘詩공간’과 대학원 가족들, 그 다정한 얼굴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부족한 작품을 뽑아주신 전북일보와 심사위원님, 누가 되지 않도록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어깨 토닥여주시며 격려해 주시던 이상복 교수님, 묵묵히 믿어주신 정영길 교수님, 그리고 늘 그리운 강연호 교수님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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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육친 정으로 밥지어 세월·삶 양념으로 비벼낸 내공"

시가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선물 가운데 하나는 소통의 즐거움이다. 소통의 그물, 이른바 네트워크에 속한 기쁨은 이에 연루된 사람의 수가 적다고 작아지지 않는다. 시를 즐기는 사람들이 두루 엮인 그물을 긴장하게 하는 높은 안테나는 세속과 타협 않는 비판정신 또는 일종의 반골정신 같은 것으로 이루어졌음에 틀림없다. 이 도저하게 올곧은 사람됨의 바탕은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을 여간 두렵게 하는 것이 아니다. 저, 학교를 졸업한 후 시에서 멀어진 사람들을 보아라. 그들은 차마 무서워서 다시 시를 펼치지 못하는 것이다.

심사를 맡은 우리는, 심사를 통해 새로운 소통을 체험하게 되었음을 영광스럽게 고백한다. 이 소통이 더러 잔치의 성격을 띠기도 함을 우리는, 예심을 거쳐 올라온 20여 예비시인이 쓴 70여 편의 시를 읽으며 깨닫게 되었다. 특히 우리는, 정재영, 문정희, 임상훈, 김정경, 최민영, 신은영, 이현수의 작품들을 남겨 거듭 읽어보았다. 정재영의 ‘손이 쥔 손’, 문정희의 ‘붉은 다라이 공장에서’, 임상훈의 ‘덕지덕지’ 등은 당선작으로 올려도 손색이 없을 작품이라는 데 우리는 흔쾌히 동의했다. 다만 ‘신춘문예답다’고 말할 유형적 한계를 나누어 가지고 있었고 동봉한 다른 작품들이 이런 의구심을 다 지워 주지 못했다. 김정경의 ‘몸의 곶간’, 최민영의 ‘애벌레의 꿈’, 신은영의 ‘춤추는 애벌레’, 이현수의 ‘늙어가는 판화’ 등은, 시의 전통적 미덕이 젊은 상상력으로 되살아나는 진경을 엿보게 했다. 그러나 신춘문예가 사람이 아니라 작품에 주는 격려라는 점에서 우리의 선택은 편치 않았다.

신은영과 이현수의 작품을 두고 고심하던 우리는 후자를 남기기로 결정했다. 신은영은 보낸 작품들의 전반적 수준에서는 더 나았으나, 집중된 한 편을 보여주는 데는 이현수에게 뒤졌다. 당선작은 상황의 개연성은 약했으나, 육친의 정으로 밥을 지어 세월과 삶의 양념으로 비벼낸 간단치 않은 내공을 보여주었다. 당선자에게 축하한다. 또 낙선자들에게도 격려의 갈채를 보낸다. 낙선이야말로 뜻있는 글꾼에게는 한때의 양식이 아니었던가. 시적 소통을 놓지 않는 우리 모두에게 시적 축복이 폭설처럼 내리기를!

 

안도현(시인, 우석대 교수) 이희중(시인, 문학평론가, 전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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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어 / 기명숙

 

 

살점이 뭉텅 빠진 들쑥날쑥한 몸 하나 허공에 걸려있다

 

쾡한 눈알을 바람이 핥고 지나가자 파르르 눈가의 잔주름이 흔들린다 헤쳐가야 할 길을 또렷이 바라볼수록 굳은살처럼 딱딱한 몸은 야위어간다 그 해 누군가 억센 손으로 그의 내장을 파내고 그 속에 단단한 뼈대를 세웠다 그의 몸 바깥에서 느닷없이 아카시아꽃이 펑펑 지고, 군화자국이 지나간 자리마다 비늘 같이 꽃잎이 소복하게 쌓였다 바람 불어 허공이 저 혼자 우는 밤, 그는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하고 뻣뻣해졌다

 

스물다섯 해, 맷집 하나로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사는 북어가 있다 상한 지느러미 곧추세워 풍향계처럼 헤엄치려 하는데 아무도 그에게 길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우리 큰오빠……

떠나야 한다, 떠나야 한다 입술을 달싹이는데 내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몸 밖의 안부를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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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다니는 꽁치 / 기명숙

 

 

접시 위에 잘 구워진 채 퍼덕거린다 물때가 채 가시지 않은 맑은 눈을 또랑또랑 뜨고 꽁치는 지금 잠시 숨을 고르는 중이다 꽁치가 다시 날아가지 못하도록 젓가락들이 날렵하게 접시 주변을 들락거린다 그러다 보니 꽁치의 살과 살 사이 흰 머리카락 같은 가시들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참 성가시게 달라붙어 있다 용케도 힘을 나란히 모으면서 촘촘히 박음질한 무명 천 조각처럼 가시는 끄떡없다 이 가시는 바다에서 꽁치의 몸을 찌르던 바늘이었다 바다를 벗어나고 싶은 꽁치가 나는 누구인가, 하고 물을 때마다 가시는 단단해졌다 가시 때문에 아파서 푸른 물결을 뚫어야 했다 가시에 찔리지 않으려고 도망치다 보니 꽁치는 길쭉해졌다 그러다가 꽁치의 몸에 청회색 바다가 대가리부터 꼬리까지 길게 들어와 박히게 되었다 젓가락들이 바다를 뜯어먹게 놔두고

 

지금 꽁치는 다시 날아가려고 기우뚱 몸을 한번 뒤집고 있다

반대쪽 살이 통통하다

 

 

 

 

 

[당선소감] "미숙한 출발 치열하게 정진할 터"

 

터널 속을 통과할 때 잠시 겪는 적막감이 줄곧 나를 괴롭혔다. 발길에 채이는 것은 온통 고개숙인 것 투성이고 문득 내가 서있는 곳이 어딘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럴 때마다 일기장 귀퉁이에다 주절거리기도 하고 수신인이 없는 엽서에 한없이 깊고 슬픈 내 사랑을 꾹꾹 눌러 썼다. 삶의 비의가 날카롭게 나를 스쳐가고 문학을 향한 그리움이 세월의 톱니바퀴 속에서 자잘하게 부서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두리뭉실하게 살아버리자, 하며 나를 달래고 있을 때, 기적과 같은 당선소식이 내게로 왔다.

 

과문한 문장, 부끄럽고 송구스러울 뿐인데 시인으로서 명찰을 달아주신 전북일보와 두 심사위원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우석대 문창과 안도현 교수님을 비롯한 여러 교수님들을 만난 건 내게 행운이었다. 그분들의 존재가 너무 커서 혹 뒤뚱거리다 그림자라도 밟을까 늘 조심스러웠다. 우석대 문창과 꼬맹이들아! 정말 고맙다. 문학캠프 담임선생님, 윤석정 선생님, 두 분의 열정이 무지하고 소심한 내게 불을 지폈습니다. 그 고마움을 오랫동안 잊지 못 할 것 같고, 무엇보다 나를 믿고 지켜봐 준 사랑하는 남편과 내 아이들, 사랑하는 아버지, <북어>의 모델이 된 오빠, 멋진 기행숙과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다.

 

어쩌면 하늘나라에서 시인의 모습으로 다시 살고 계실 어머니! 당신이 내 몸에 남겨놓은 풍류객의 피가 결국 무대 위로 나를 세우는군요. 친구 황미숙, 그 외에 나를 아껴주는 많은 친구들과도 이 기쁨을 함께 하고 싶다.

 

무턱대고 달아오르는 문학에 대한 열정만으로 시작한, 미숙한 출발이지만 앞으로 정진하겠습니다. ....

 

 

 

 

[심사평] 섬세한 관찰력이 돋보인 수작

 

예심을 거친 17사람의 시가 우리에게 넘겨졌다. 한 사람이 대략 3-5편씩, 더러는 10여 편이나 20편 가까이 응모한 이도 있었다. 한 사람이 열 편도 넘게 응모하는 것은 응모하는 이에게 아무래도 손해가 될 것 같았다. 그중에 좋지 않은 게 섞여서 그 사람의 다른 시들도 도맷금으로 넘어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 단위가 아니라 넘겨받은 시 한 편 한 편을 독립시켜 읽어보고자 했다. 오늘이 동짓날, 일 년 중 낮이 가장 짧은 날이라고는 해도, 오후 2시부터 심사를 시작했으니 시간은 우리에게 녹녹한 편이었다.

 

예선을 거친 작품들이어선지 시들은 그러나 모두 녹녹치 않았다. 선 밖으로 일단 밀어놓는 작품들이 쌓일 때마다, 하얀 실에 검정물이 드는 것을 보고 한없이 울었더라는 墨子 생각이 나곤 했다. 노란색 파란색 빨간색 그 어느 색깔로도 다시는 물들일 수 없는 그런 절망적인 검정색이 아니기를 빌면서 우리는 자꾸만 선 밖으로 작품을 밀어냈다. 한 편만 뽑아야 한다는 건 얼마나 야속한 선택인가.

 

얼룩동사리, 어머니에게 잊혀진다는 말은, 날아다니는 꽁치,북어등 마지막 4 편이 그렇게 우리의 선 안에 남았다. 선 밖으로 작품을 밀어낼 때마다 우리는 작품의 흠결들을 주로 화제로 삼곤 했는데 이제부터는 작품의 좋은 데를 서로 들춰보였다. 그러면서 우리는 한 곳으로 한 곳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얼룩동사리는 정확한 관찰과 참담한 부성애를 집요하게 부각시키는 전개 솜씨가 돋보였지만, 마지막 부분의 자살한 사람과 얼룩동사리와의 대비가 시적 긴장을 결정적으로 상쇄시킴으로써 시 전체가 사람이 미물만도 못한 거 아니냐 하는 일반론에 함몰되고 만 것 같다.

 

어머니에게 잊혀진다는 말은이라는 작품에 대해서 우리는 가장 길게 의견을 나누었다. ‘잊혀지는 것잘 삭아서 숙성되는 것을 일원적으로 파악하는 시적 착상이 무엇보다 돋보이는 작품이었지만 땜질 흔적이 드러나 보이는 구조상의 문제점과 숙성이 덜 된 시어들이 끝내 우리들의 맘에 걸렸다.

 

날아다니는 꽁치북어는 둘 다 기명숙씨의 작품이었다. 데생이 정확한 화가가 좋은 그림을 오래 그릴 수 있다는 말을 새삼 떠올리게 할 만큼 두 작품 다 섬세한 관찰력이 우선 돋보였다. 날아가는 꽁치의 시적 긴장이 유지되는 상상 또한 그런 섬세함 때문에 더 신선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북어는 북어라는 媒材를 통하여 시대의 그늘과 그 아픔이 우리들의 삶 속에 어떻게 얼룩져 있는가를 가시화하고 있어서 특히 눈길을 끈다.

 

선 밖에 빚더미처럼 쌓인 작품들이 내내 맘에 걸렸지만 우리는 이견 없이 이 두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고 신문사를 나섰다. 일 년 중 낮이 가장 짧은 날 뽑았지만, 가장 좋은 작품이 가장 긴 밤과 큰 축복을 함께 누렸으면 좋겠다. 팥죽도 못 얻어먹은 동짓날 짧은 해가 무슨 미련이 남아 있는 듯 녹다 만 눈길 위에 머뭇머뭇 기울고 있었다.

 

심사위원 이운룡, 정양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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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이름, 팔레스타인 / 경종호

 

 

올해도, 고향엔 칡꽃이 흐드러졌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계집 아이 몇이 고무줄놀이를 하고 놉니다. 고무줄이 튕튕 울릴 때마다. 호박이며, 박이며, 수세미 꽃이 핍니다. 어느 새 검정 고무줄에도 꽃이 피어, 달맞이꽃으로 피어, 계집 아이 몇은 노래를 부르며 툭툭 튀어 오릅니다. 미사일 날리듯

 

양지바른 골목길 벽돌 속에 아비와 오래비를 묻고 옵니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은 예루살렘으로 흐르는 계곡마다 넘쳐나는데 칡넝쿨 얽힌 이국의 틈으로 어김없이 달은 떠오릅니다. 어김없이 총알은 밀알처럼 떨어집니다.

 

폭격기가 지나간 바위 밑 두 눈만 깜박이다, 꿈벅거리다, 풀이 되고 나무가 되어 버린 못생긴 계집 아이는 어느 새 어미가 되고 전사가 되어 아이를 안고 모래 틈을 가로 지르며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의 군화에도 꽃이 피었습니다.

 

바위를 덮고, 돌산 넘쳐나는 꽃이 피었습니다. 동방 외간 사내가 보내는 꽃, 생리를 하고, 배란이 지나 생산을 하는 동안에도 그 꽃이 신화(神話)보다 더 질긴 꽃이었음을, 옆구리에 낀 아이가 그 꽃을 닮았다는 것을 몰랐어도 그녀는 좋았습니다.

 

 

 

 

그늘을 새긴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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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부족한 삶 '우직한 소'로 보답"

 

당선이라는 연락을 받고 처음 생각한, 그리고 묵묵히 기억 속에 남아 있던 말.

 

'가족'.

 

아버지, 어머니. 한 삶을 흙에서 시작하고, 그 흙에서 아들, 딸을 키워오신, 그렇게 내 삶의 틀을 이미 다지고, 바탕을 마련하셨던 김제 평야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형님, 형님보다도 형수님, 누님과 아우. 어느 땐 단단한 울타리였다가, 어느 땐 어린 시절 마당 한 가운데 멍석 같은. 꼭 그렇게 지푸라기만큼 질겨 어느 순간, 순간이라도 내가 꼭 잡을 수 있는 끈 내밀어 주셨던 '가족'. 그리고 세 살, 우리 은솔이. 내 아버지가 나에게 보여주셨던 길을 꼭 그렇게 나도 보여주어야 하는. 그러나 가족이지 못하는 가족이라는 뿌연 안개 같은 이 순간에 또 하나의 가족이, 내 안에 꼭꼭 숨어 있던 문학이 부끄러운 얼굴을 빼꼼히 내밀었습니다.

 

늦게 시작한 공부. 스물 여덟에 처음 입학한 대학, 그리고 글바람 문학회. 내 삼십대의 빈틈마다 촘촘히 파고들었던 목소리. 종필 형, 찬홍 형, 장근, 명철, 정희, 병희, 청필, 석우, 진만, 상렬이. 그리고 아직까지 마음 깊숙한 곳에 시를 담고 살았다는 것으로 이 부족한 삶을 변명처럼 대신해 드리고 싶은, 오수의 장작불이 그리운 이용숙 선생님.

 

지도 교수님이신 김용재 선생님. 그리고 항상 제 주위에서 저보다 저를 더 위해주는 선배님, 친구, 내가 근무하는 시골 작은 학교의 동료 선생님까지. 특히, 눈만 동그랗게 뜨고 뻐끔히 바라보는 우리 반 아홉명의 아이들. 항상 곁에 있어도 그리움 사람들로 인해 행복한 오늘.

 

'가족'

 

항상 가까운 곳에 있는, 심장에서 가까운 허파 혹은 식도 부근에서 내 마음에서 흐르는 혈액으로 만들어지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삶을, 새끼 꼬듯 꼬아도 보고, 멍석처럼 엮어도 보고픈 마음. 그래서 내 마음의 불 더 지피고 싶은.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직도 많이 부족한 저를 당선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주신 송하선 · 복효근 선생님께 지금의 이 마음 묵묵히 끌고 가겠다는 것으로, 우직한 소가 되겠다는 것으로 대신하며 감사를 드립니다.

 

 

 

천재 시인의 한글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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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그 여느 해보다 응모작이 많고 또한 그만큼 우수한 작품도 많았다. 긴 시간 논의 끝에 경종호의 꽃 이름, 팔레스타인과 김윤경의 마이너스통장으로 지은 집’, 문정희의 길들여지는 슬픔에 대하여중에서 당선작을 내기로 하였다.

 

김윤경은 그늘진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따뜻하고 언어를 다루는 솜씨 또한 매끄러웠으나 오히려 그 점이 감점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평이하고 무난하지만 신인다운 독특한 개성이 아쉬웠다.

 

문정희는, 밝음(문명)만을 추구하고 어둠과 밤을 타부시하는 고정관념을 깨고 삶에 있어서 어둠’(, )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독특한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작품의 전반부에서 유사한 예를 필요 이상으로 반복하고 결국 그것을 유기적으로 엮어내지 못하여 구조면에서 아쉬움을 남겼다.

 

경종호의 작품은 그 차분한 전개부터가 눈길을 끌었으며 독자의 생각을 오래 붙잡아두는 매력이 있었다. 우선 기법면에서 참신하다. 전쟁상황에 놓인 팔레스타인의 한 여자아이를 먼 이국의 아이로 타자화 시키지 않고, 한국전쟁후 한반도의 골목길에서 고무줄 놀이하는 한민족의 계집아이에 오버랩 시켜 팔레스타인 문제가 결코 남의 문제가 아님을 효과적으로 환기시켜주고 있다.

 

시사성 있는 문제, 시의적절한 주제를 다룸으로써 시대와 동시대인의 아픔에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는 점도 눈길을 끌었다. 비단 팔레스타인뿐 아니라 아직도 진행 중인 이라크전과 같은 전쟁에 대한 시적 인식을 서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심사를 하여 신인을 발굴한다는 것은 을 파는 것과 유사하다. 샘은 그 수질이 우수해야 함은 물론이려니와 몇 바가지 퍼내면 곧 그 수원이 고갈되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계속하여 용솟음하며 냇물을 이루고 강에 이어지는 도도한 흐름을 이루어내야 한다. 따라서 당선작 외에 함께 응모한 다른 작품도 면밀히 살펴서 등단 이후에도 우리시단을 더욱 풍부하게 일궈낼 역량과 가능성이 있는가, 가늠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경종호의 작품에서 갈고 닦아온 내공을 읽을 수 있어 당선작으로 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큰 물줄기를 이루어내기를 기원한다.

 

심사위원 송하선, 복효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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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끝에 매달린 물고기나 되어 / 문신

 

 

풍경(風磬) 끝에 매달린 물고기나 되어
때가 되면 풍경 끝에 매달린 물고기나 되어
허공에 헛된 꿈이나 솔솔 풀어놓고
나 하루종일 게을러도 좋을 거야
더벅머리 바람이 살살 옆구리를 간지럽혀도
숫처녀마냥 시침 뚝 떼고 돌아앉는 거야
젊은 스님의 염불 소리를 자장가 삼아
한낮에는 부처님 무릎에서 은근슬쩍 코를 골고
저녁 어스름을 틈타 마을로 내려가서는
식은 밥 한 덩이 물 말아 훌러덩 먹고 와야지
오다가 저문 모퉁이 어디쯤
차를 받쳐놓고 시시덕거리는 연인들의 턱 밑에서
가만히 창문도 톡톡 두들겨보고
화들짝 놀라는 그들을 향해
마른 풀잎처럼 낄낄 웃어보아도 좋을 거야
가끔은 비를 맞기도 하고, 비가 그치면
우물쭈물 기어 나온 두꺼비 몇 마리 앉혀놓고
귀동냥으로 얻은 부처님 말씀이나 전해볼거야
어느 날은 번개도 치고 바람이 모질게도 불어오겠지
그런 날은 핑계 삼아 한 사나흘 오롯이 앓아누워도 좋을 거야
맥없이 앓다가 별이 뜨면
별들 사이로 지느러미 흔들며 헤엄칠 거야
그런 날이면 밤하늘도 소란스러워지겠지
그렇게 삶의 변두리를 배회하다가 내 몸에 꽃이 피면
푸른 동꽃[銅花]이 검버섯처럼 피어오르면
나 가까운 고물상으로나 팔려가도 좋을 거야
주인의 눈을 피해
낡은 창고에 처박혀 적당한 놋그릇 하나 골라
정부(情婦) 삼아 늙어가는거지
세월이야 오기도 하고 또 가기도 하겠지
늘그막에 팔려간 여염집 처마 끝에 매달려
허튼 소리나 끌끌 풀어놓다가
가물가물 정신을 놓기도 하겠지
그런 연후에 모든 부질없는 것들을
내 안에 파문처럼 켜켜이 쌓아놓고
어느 하루 날을 잡아 바람의 꽁무니에 몸을 묻어도 좋을 거야

 

 

 

 

곁을 주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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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응모작들을 읽으면서 시를 왜 쓰는가 새삼스럽게 생각해 볼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충분히 여과되지 않은 감정의 조각들과 개인적인 넋두리를 그럴 듯하게 행만 바꿔 나열한 시들은 일차적으로 제외되었지만, 일정한 수준에 오른 시들을 읽으면서도 그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시를 습작하는 사람라면 모름지기 언어와 인식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일을 시쓰기의 목표로 삼아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고만고만한 언어 기술자는 많아도 놀랄 만한 발견으로서의 시를 보여주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럼에도 전반적으로 좋은 작품들이 많이 늘어났다는 것이 심사위원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신춘문예가 요구하는 심상치 않은 '조짐'을 찾기 위해 일곱 사람의 시가 마지막까지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강윤미, 김정경, 최민영의 시는 흠잡을 데 없는 말의 수련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매끈함이 중심을 관통하지 못하고 주변을 서성거린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들보다 언뜻 서툰 듯 하지만 김미경의 [만추]와 김인경의 [팔복동과 평화동 사이의 등나무]는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하고, 독창적인 발성을 낼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김윤경의 [대나무꽃]과 문신의 [풍경 끝에 매달린 물고기나 되어] 두 편 중 어느 것을 당선작으로 해도 무난하다고 생각했다. 앞의 작품은 만만치 않은 패기에다 무리 없는 이미지의 전개가 돋보였으나 두어 군데 상투성에 물든 시구가 결정적인 약점으로 지적되었다.

 

문신의 작품은 능청스런 발상이 활달한 화법에 힘입어 시의 감동이 어디에서 오는지 잘 보여주는 시이다. 함께 응모한 시들도 믿음직스럽다. 감동이 드문 시대에 감동을 낳는 좋은 시인이 되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허소라(시인· 전 군산대 교수)·안도현(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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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오천축국전 / 장창영

 

 

지금도 무릎이 시큰거리느냐

 

천 삼백 년이면 불심 강한 이도 한 수 접고 가는 길

어쩌면 너도 천축(天竺)서 관절 꺾고

절 마당 목욕탕인냥 푸욱 담그고 싶었겠지

북녘땅 접어들 때엔 미처 예측 못했겠지

살아 있는 부처 만나기 위해 떠났던 기약 없는 길이었기에

다들 흑백사진 속 표정 없는 얼굴과

써금써금 해진 활자 이야기로만 기억하지만

너만은 또렷이 알고 있지

 

총령(蔥嶺) 거쳐 오대산 한 달음에 달려오던 발길이

꼬이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지

중국 공안에 쫓기던 어린 눈동자

고향이 함흥이랬지

단속 피해 신발만 챙겨든 채

훈춘 화룡 거치면서 몸은 숨 죽이는 일에

더 빨리 익숙해졌다지

장춘행 기차에서

매운 기침으로 쏟아지며 안겼을 때

네 몸은 후끈 달아올랐다지

부처님 진신사리 접했을 때보다

 

예정에 없던 일이라 변변히 옷가지도 못 챙기고

도문 국경* 저편에서 물끄러미

강 이쪽으로 씁쓸히 시선만 던지던 아우여!

돌아오지 않는 다리 안으로

성큼, 건너 설 때는 언제인가

이 땅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은

부처 때문인가, 꽃제비 때문인가

그도 아니면 무심한 우리 때문인가

오늘도 목숨을 승인 받기 위해

연변, 길림, 용정으로 떠돌면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혜초, 내 어린 아우여!

 

* 북한과 중국의 국경 사이에 있는 다리로 이 다리를 통해 경제와 인적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진다.

 

 

 

 

동백, 몸이 열릴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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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줄기차게 두드렸던 문이 끝내 열리지 않았던 날들이 있었다. 어느날인가부터 불현듯 마음 한켠에 오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복수란 무서운 것이어서 나는 한참 동안 복수의 순간을 꿈꾸며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딘 시의 칼을 갈고, 헐거워진 정신을 다시 수습하면서 그렇게 십여 년을 보냈다. 그 덕에 나는 이 질긴 침묵의 시간을 버텨올 수 있었다.

 

다른 이들처럼 원고를 보내면서 소감을 함께 보낸다거나 보낸 이후 호기롭게 술을 마실 여유조차 상상할 수 없었다. 살아 남기 위해, 그리고 살아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단조로운 일상 속에서 두 눈을 부릅뜨며 시를 썼다.

 

나에게 시는 복수의 도구였고, 나를 살아 있게 만들었던 힘이었다. 그러나 최후의 복수를 위해 칼을 빼어 들었을 때, 이미 날은 무디어 있었고 칼집에는 어디선가 왔는지 모를 꽃씨가 떨어져 조금씩 싹을 티우고 있었다.

 

끈질기게 나를 괴롭혀왔던 복수의 끝은 그렇게 허망했다. 나는 모르고 있었다. 나는 복수를 준비하고 있었지만 정작 복수야말로 나를 버티게 만들었던 힘이었다는 사실을,

 

올해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다. 그때문인지 올해는 다른 해와 달리 원고를 보내고 난 후에도 유난히 마음이 설레었다. 긴장이 막바지에 달하면서 점점 더 안절부절 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기다림에 지쳐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연락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나의 복수는 달성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면서 나도 모르게 복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어렴풋하게나마 시를 쓰는 일이 복수가 아니라 생명을 향한 몸부림이며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이제 나는 서툴게나마 다시 시작할 것이다. 아직 나의 복수는 끝나지 않았으므로, 더 좋은 시를 쓰는 것만이 나를 이 길에 들어서게 만들어주신 이들이 나에게 기대하는 '즐거운' 복수리라. 시를 쓰는 일이 복수라는 치졸함으로부터 나를 구원해주었으므로, 그것만이 나에게 삶을 살아가는 다양한 방식에 대해 깨닫게 해주었으므로,

 

이 자리에 설 수 있기까지 참으로 많은 이들의 도움이 있었다. 가족을 비롯하여 많은 분들의 정성어린 격려와 도움이 없었더라면 나는 이 자리에 결코 설 수 없었으리라. 이 자리를 빌어 진심으로 감사한다.

 

 

 

 

디지털 문화와 문학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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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전반적으로 시의 수준이 높았다. 다들 엇비슷해서 그런지 우뚝하게 빛과 향기를 발하는 수작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과거와 비교하면 주제와 어법이 다양해진 것은 보기 좋았지만, 길이가 길어지고 말이 많아진 것은 별로 좋게 보이지 않았다.

 

꼭 필요해서 길어졌다고 보기보다는 손길과 생각이 거칠어서 간추려지지 못한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시를 사랑하는 일은 말을 사랑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아껴 고르면서 부심하지 않는다면 좋은 글을 기대하기 어렵다. 부심해서 고른 말로 이룬 시는 전체와 세부가 모두 방만하지 않은 법이다.

 

유희수, 김일영, 이광찬, 최용만, 장창영 제씨의 작품들을 남겨서 거듭 읽었다. 저마다 귀한 장점이 있는 개성적인 시들을 보내셨다.

 

장점과 단점을 저울질하여 마지막에 남긴 작품은 산수유’(최용만)왕오천축국전’(장창영)이었다. 전자는 개성적인 어법이 서사적 소재와 만나 빚어낸 아름다운 작품이었으나, 통일적이고 일관된 주제 효과를 거두는 데 부족함이 보였다.

 

동봉한 다른 시들도 고른 수준을 보여주었고, 특히 풍자와 알레고리의 방법이 돋보였는데, 역시 전자와 같은 단점을 나누어 가지고 있어 아쉬웠다.

 

후자는 선에 오른 작품들 가운데 가장 무거운 주제를 다룬 시로서, 비교적 침착한 어법과 안정된 서정시의 감각, 그리고 시대를 넘나드는 상상력을 보여준 작품이었으나 또한 세부에 문제가 없지 않았다.

 

숙의 끝에 왕오천축국전을 당선작으로 고른다. 천삼백 년 전 머나먼 구도의 길을 떠난 조상을 상상의 묘법에 기대어 오늘의 아우로 바꾼 기지와, 아우의 방황과 그에 대한 연민이 결국 우리 겨레의 묵은 염원으로 연결되는 스케일, 그리고 동봉한 시들이 뒷받침하는 다양한 시적 고민과 탄탄한 언어적 능력를 사기로 한 것이다.

 

번번히 낙선의 쓴 잔을 들면서도 꾸준히 시의 길을 다져온 장창영씨의 당선을 축하하며, 아울러 선에 오르지 못한 분들께 간곡한 위로와 격려의 뜻을 전한다.

 

심사위원 최승범(전북대 명예교수, 시인), 이희중(전주대 교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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