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 김혜원
1. 무게
체중계를 꺼내려다
나보다 먼저 올라앉은 먼지를 본다
저것도 무게라고 저울 위에 앉았을까
털어내는 순간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저 가뿐한 내공
내가 눈금처럼 꼼꼼히
몇 장의 졸업장과 얼마간의 통장으로
몸집 불리는 동안 너희는 세상을
깎고 갈고 부서지며 삭으며 살아왔구나
저울 위에 앉아 제 발자국 헤아리다가
세상 변두리 어디쯤 다시 찾아 날아올랐겠지
버려야만 이루어지는 저 가뿐한 무게
달 수조차 없는 그 삶에
문득 마음 무겁다
2. 높이
먼지도 세월을 견디면 높이를 갖는구나
어둠 속에서 말을 잊다보면 눈이 밝아지는 법, 나는
저 허름한 생의 목록을 다 적을 수 있을 것 같다
양말이 벗어놓은 하품 바스러진 각질의 한숨 비틀대던 머리카락과 맥없이 흘러내리던 낡은 옷의 넋두리 나뒹굴던 보풀의 푸념 몇 낱 희미해진 거울의 깨진 비명도 몇 개, 그런 것들이
그런 것들이 뒷걸음쳐 이 구석 찾았을 게다
내일이 꼭 오리라 믿었을 그들
나는 오지 않은 날의 달력을 찢어
숨죽여 쌓인 어제의 높이를 가만히 들어 올린다
3. 길
차 안에 쌓이던 먼지
어느 날 흔적이 없어졌다
닦은 적도 없는데 저희끼리 뭉쳤다가
알갱이 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나 보다
어디든 다시 떠돌고만 싶은 것 같아
조심조심 발판을 걷어 밖에 뿌려준다
순간 바람의 어깨를 딛고 올라서서
일제히 질주하는 저 하얀 맨발들
길이란 열망이란 얼마나 서늘한가
천 길 절벽은 허공에도 있어
지상으로 추락하여 얼룩지는 생이여
흙물이 제 지나온 길 가라앉히듯
빗물에 씻겨 다시 먼 길 떠나는구나
밤하늘에 담겨 반짝반짝 눈을 뜨는 별들도
떠나온 별을 찾아 몇억 광년 속으로
저렇게 먼지처럼 뛰어든다던데
나 이제 몇십 킬로의 동력을 켜고
내게 남은 시간의 벌판으로 달려간다
[당선소감] "더욱 겸손하고 엄격하게 정진할 것"
시와 사진과 길
먼저 사진이 있었다. 문학을 전공하고서도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건만, 사진을 찍으면서부터 카메라로 다하지 못한 말들이 마음속에 시(詩)로 남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시가 내게로 왔다.'
당선 소식도 내게로 왔다. 본격적인 시쓰기를 시작한 것은 작년. 아직도 혹독한 습작기련만 예상보다 일찍 당선 소식을 들은 지금, 그래서 내 앞길은 더 캄캄하고 아득하기만 하다. 하지만 '당선'이란 습작기의 성실함을 '운 좋게도' 인정받은 것일 뿐이고, 시집 한 권도 내지 않은 사람을 시인이라 부를 수 없다는 내 지론이 있지 않은가. 다만 나는 내게 더욱 겸손해지고 엄격해지고 가혹해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부족한 시를 뽑아 주신 허소라, 김용택 심사위원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또한 굼뜨고 더딘 나를 질책과 채근으로 길러 주시고 앞으로도 키워 주실 우석대 문창과 정 양, 안도현 교수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쓰고쓰고쓰고 고치고고치고고쳐 더 큰 성장으로 보답해 드리는 길밖에 없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어렸을 적부터 음악과 미술과 문학을 동경할 수 있도록 키워 주신 부모님! 나의 피붙이 형제들과 그의 가족들! 이들 모두의 묵묵한 지원이 아니었더라면 '나밖에 모르는 삶'은 애초 불가능했을 것이다.
마지막 감사는 홀로 걸어온 길!
'먼지'처럼 함부로 떠도는 그 길에는 언제나 시와 사진이 함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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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관념적 소재 '견딤' 미학으로 이끌어
요즈음이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 시 쓰기가 어려운 시대가 아닌가 한다. 첫째는 광야에서 골리앗 장군처럼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내던 시대의 공동과녁이 유체화된 데에다, 또 하나는 그 옛날 감히 다가서지 못했던 시 쓰기의 엄위한 비의(秘義)가 이곳저곳에서 그만 해킹되고 만 것이다. 이런 때에 빠지기 쉬운 함정이 바로 아무 고민 없는 사적(私的) 요설이다.
이런 몇 가지를 상정하면서 조심스레 심사에 임했다. 807편을 상회하는 응모작 속에서 예심을 거쳐 우리에게 넘겨 온 작품들은 10명의 것이었다. 이 가운데에서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먼지> <신발 고르는 저녁> <호후(虎侯)> 등 세 편이었다. 이 세 작품은 어느 작품을 내세워도 당선작으로 손색이 없으리만치 수준이 가즈런하나, 규정에 따라 고심 끝에 <먼지>를 택하였다.
<신발 고르는 저녁>은 세차원인 '쑤안'(이주여성)이 파장에 신발을 고르는 모습을 통해 그려낸 인간애가 눈물겹기만 한 작품이다. 그러나 심사자는 응모자를 바라봐야지 시 속의 '쑤안'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냉정 때문에, 그리고 화살이 빗나간 날들의 변두리에 박힐 때마다 손가락질이나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녁으로 서보라는 <호후(虎侯)> 역시 시대의 정곡을 찌르는 훌륭한 작품이나 아무래도 주제의 깊이에서 <먼지>에 밀릴 수밖에 없어 아쉬움이 크다.
당선작 <먼지>는 한 주제를 가지고 세 편으로 나눈 일종의 연작시 형태를 취하고 있는바 신춘문예 응모작으로는 대단히 모험적인 기법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 세 작품은 내적으로 교묘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작품 속의 하찮은 <먼지>는 화자 자신, 나아가 우리 인간존재의 등가물로서 내밀한 삶과 그 가치를 성찰하고 긍정코자 한 시도로 이해된다. '1. 무게'에서는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먼지'처럼 버리고 비우며 가뿐하게 사는 소박한 모습을 통해 가진 자들의 욕망에 대한 반성을 꾀하였고 '2. 높이' 역시 고단한 삶을 견뎌내게 하는 힘은, 바로 내일이라는 희망에 물꼬를 대고 있다. 특히 "먼지도 세월을 견디며 높이를 갖는구나"라는 아포리즘적인 시행이 두 심사자의 눈길을 오래 머물게 하였다. '3. 길'은 쌓였다가 깎였다가 하면서 오랜 시간 존재해온 '먼지'와 그들이 걸어온 '길'을 통해 무한한 시간 속에서의 부단한 자기 성찰을 드러내려 한 작품으로 속도감 있는 운율이 돋보인다.
그리고 '방구석→차 안→허공→우주'로 확대되는 공간배치의 기법도 탁월하다. 자칫 관념으로 떨어지기 쉬운 소재를 끝내 작은 것들의 '견딤'의 미학으로 이끈 것은 오랜 동안의 습작의 뒷받침이 아닌가 싶다.
요즈음 시인은 많으나 시가 없다라든가 아니면 시는 지천으로 흐드러지는데 정작 시인이 안보인다 라는 말을 뒤집어보면 같은 맥락의 이야기가 된다. 금번 최종심으로 넘어온 10명의 응모작들은 그 궁핍증을 덜어주는데 족히 일조가 될 만한 수준이다. 그럼에도 노들강변으로 널려 있는 등단길을 외면한 채 연마에만 몰두해온데 대해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러므로 낙심은 금물, 응모자 제위의 행운을 빌어마지 않는다.
심사위원 허소라, 김용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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